일곱 번째 이름 모중석 스릴러 클럽 27
루스 뉴먼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생각해보면, 나도 저 먼 기억 어딘가 그렇게 초록 무성한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 누워 조용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한여름의 주말 교정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내 비워진 시간을 그렇게 오롯이 응시로만 채우던 때가 있었다. 
특별히 외롭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내내 얼굴 위로 내리쬐는 뙤약볕이 귀찮았을 뿐...
그나마 너른 광장을 꽉 채워 불어오는 바람이 없었다면 그렇게 구름을 바라보다 일사병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누워서 시간이 하늘에다 점점이 찍어내는 맑고도 투명한 발자국을 바라보면서 문득 삶이 날 얼마나 피로하게 만드는가를 느꼈고 이대로 시간이 흙으로 퇴적되어 날 묻어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스 뉴먼의 ‘일곱 번째 이름’을 읽으면서 문득 기억났던 건 바로 그 여름의 시간이었다. 이 소설이 영국의 유명한 대학 케임브리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은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한 스릴러이지만 소설의 꽤 많은 부분이 등장인물들이 대학에서 보내는 일상으로 채워져 있어 비슷한 시기의 어느 여름날 그렇게 온종일 내내 누워서 하늘만 바라보던 그 순간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연상작용이란 얼마나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뻗어나가는 것인지...

봄이라는 계절에 너무도 어울릴만한 화사한 샛노란 표지를 넘기면 그 표지에서 받았던 인상을 완전히 전복시키듯 한 밤 기숙사의 살해 현장으로 우리는 바로 인도된다. 거기 한 여자가 온통 피로 물들어있고 또 한 사람의 남자는 살해된 여자가 쏟아낸 내장을 주워 담고 있다. 표지에서 받았던 인상과는 너무도 다른 잔혹한 현장... 급작스런 분위기의 변화에 우리의 뇌리는 잠시 이것을 어떻게 봉합을 해야 하는지 혼돈을 겪게 된다.

 표지와 첫 장면의 뚜렷한 ‘대조’와 그것의 ‘봉합’은 사실 이 소설 전체를 특징짓는 것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 ‘일곱 번째 이름’의 세계 역시도 한여름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문득 죽음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대조적인 두 개의 세계 - 계급적으로 차이가 있고 인기의 중심인 한 남자를 향한 소녀의 애틋한 로맨스라는 말하자면 ‘꽃보다 남자’의 세계와 젊은 여대생만을 골라 무참하게 살해하는 연쇄살인마의 세계 - 가 봉합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소설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라고나 할까... 

 
 그렇게 화사한 샛노란 표지가 연상시키는 말랑말랑하면서도 달콤한 그러면서도 언제 그 사랑을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사랑에 서투른 한 소녀의 연애이야기라는 ‘지킬 박사’의 이면에 앞에서는 우정을 말하던 그 친구들이 사실은 뒤에서 배신을 하고 또한 그 친구들이 하나 둘 살인마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는 그러한 감춰진 ‘하이드씨’의 세계가 봉합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정한 규칙 같은 것이 없이 ‘무작위적’으로 드러나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어느 정도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 아마도 그 때문인지 소설은 글자의 모습(고딕체와 명조체)을 달리하여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회상과 고백의 내용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완전히 혼란을 잠재우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봉합은 ‘문득 떠올린 죽음’ 만큼이나 갑작스럽고 그래서 서툴러 보인다. 그런에 이 거칠고 성긴 봉합은 그대로 이 봉합의 중심에 있다고 여겨지는 주인공 소녀 올리비아 역시도 마찬가지다.

 올리비아는 다중인격자이다. 제목인 ‘일곱 번째 이름’은 바로 올리비아가 가지는 일곱 개의 인격을 말한다. 그녀는 친부모로부터 성적으로 학대당한 끔찍한 과거가 있다. 올리비아는 그러한 학대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일곱 개의 인격을 스스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은 이 올리비아가 가진 인격들이 교대로 말을 해 나가는 듯하게 전개된다. 첫 시작에 피로 온통 물들어 있었던 여자가 바로 올리비아였다. 그리고 내장을 집어넣고 있었던 남자는 바로 그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그녀의 남자 친구 ‘닉’이었다. 출동한 경찰에 둘은 주요한 용의자로서 체포된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인 매튜가 그녀를 담당해 기억을 복원하려 한다. 바로 이 복원의 과정이 주요한 소설의 내용이 된다.

 소설의 대부분은 올리비아가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러모로 부정확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한 올리비아의 부정확하고 때로는 모순되는 것들을 하나로 봉합하는 역할이 그것을 듣는 ‘매튜’의 역할이다. 그는 올리비아의 고백을 봉합해야 할 뿐 아니라 일곱 개의 인격으로 흩어진 그녀의 영혼 역시 하나로 봉합해야 한다. 그렇게 매튜는 이 소설에서 이중의 역할을 떠안는다. 바로 복원과 봉합의 역할이다.

 여기서 ‘올리비아와 매튜의 관계’는 그대로 ‘일곱 번째 이름’이라는 소설과 그것을 읽는 우리 독자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올리비아가 들려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일곱 번째 이름’이 펼쳐보이는 세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조적이고 파편적인 세계를 우리는 ‘매튜’처럼 하나로 복원하고 봉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세계는 그리 만만치가 않다. 그녀는 다중인격자이고 과거를 감추려들고 기억도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또 온갖 것들이, 왜 이게 소설에 나오는 것인지 얼른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이를테면 타로 점을 보는 장면이나 강신술 장면처럼 별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까지 마구 나오기 때문이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소설은 아이 앞에 무수하게 쏟아진 레고 블럭 조각 같은 것이다. 매튜는 아이가 그렇게 블록을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듯이 하나의 이야기로 봉합해 나간다. 하지만 정해진 설명서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봉합은 매튜 혼자만의 임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진실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왜냐면 매튜가 원하는 대로, 오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욕망에 따라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매튜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봉합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매튜의 친구 스티븐 역시도 그가 올리비아에 대해 딴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지속적으로 다그치지 않는가. 그렇게 매튜의 봉합은 그가 보고 싶어 했고 믿고 싶어 했던 올리비아의 모습만을 투영시켜 만들어진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실제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지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엔 이러한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이 실재에 의해 파괴되는 장면들이 참 많이도 나온다. 올리비아가 가졌던 닉에 대한 환영, 폴라가 가졌던 닉에 대한 환영, 사람들이 가졌던 롭 맥노튼의 환영(스테로이드 덩어리, 그렇게 아주 마초적인 남자로 여겼던 그는 결국 게이였음이 밝혀진다.), 시네이드가 가졌던 올리비아의 가족에 대한 환영 등등... 거기다 주 무대가 되는 에이리얼 칼리지 자체마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즉, 이들은 환영의 공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이 짙게 투영된 서로에 대한 가상의 환영들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유일하게 해석의 주체, 봉합의 주체 매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대로 매튜의 역할을 이어받는 우리 독자도 역시...  



 환영이 가득한 세계에서 진리란 그저 수사에 불과하다. 

 그렇게 반전이란 것도 사실은 독자가 만들어왔던 해석과 전혀 다른 해석 역시도 가능함을 알리는 것에 불과하다. 반전은 뒤집어진 사실 자체로 독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다. 독자들이 진짜 반전에서 충격을 얻는 때는 거기서 나타난 완전히 뒤집어진 해석이 독자 스스로 작품을 차근히 되짚어보니 이미 그것이 작품 속에 나와 있었고 그것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전이란 설득 가능한 또 하나의 해석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석이란 또 무엇인가? 결국은 매튜가 했었던 대로 자신의 욕망을 은밀히 투영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반전이란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 가능성이 거울이 되어 내 욕망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 구체적 모습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독자는 그 전지적 입장에서 자기가 읽고 있는 텍스트의 세계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반전은 독자 역시도 그 세계에서 완전한 지배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참여자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발언을 독자가 투영해왔던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행한다. 반전이 충격적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반전은 그리 강하지 않다. 그것은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너무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너무 산만하기 때문이다. 반전의 충격은 언제나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세계의 밀도와 관련이 깊다. 그 밀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세계는 구체성을 띄게 되고 그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독자의 느낌은 더욱 더 배가 된다. 그는 작품을 해석해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더 커진 지배력만큼 아낌없이 투여한다. 이걸 몰입도라고 할 수 있다. 몰입도란 작품 속 세계가 독자 자신의 자의대로 움직이고 있음에 대한 확인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게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한 순간에 다른 얼굴을 하면서 자신을 내치기 시작한다. 따라서 독자 자신이 쏟아 부었던 욕망의 크기만큼 아무래도 그 좌절에서 오는 충격은 클 수 밖에 없다. 

 
 펼쳐보이는 세계가 파편화되고 산만하다면 세계에 투여되는 독자의 욕망 역시 그 파편만큼 흩어지기 쉽다. 더구나 매튜가 그랬듯이 봉합의 과정 역시 얼기설기 서투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반전이 주는 충격 역시 그만큼 적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이 소설은 다중인격이란 익숙한 소재마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장르에 익숙한 사람들은 나름의 전개도를 몇 개정도 가지고 읽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품이 그 전개도 중 하나와 맞아버리면 식상한 것이 되고 만다. 솔직히 이 소설은 이런 약점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토록 산만한 전개에 맞춰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그야말로 독자가 작품에 대해 행하는 봉합 다른 말로 구성적 해석이 얼마나 자의적일 수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산만할수록 자의의 여지는 넓어지고 그것은 곧 작품이 내놓은 결말마저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나 역시 소설의 결말이 진짜 결말이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환영의 놀이인 셈이고, 놀이의 술래는 자기가 잡고 싶은 대상을 잡을 권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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