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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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잔이 정물화를 그리듯, 본질로서의 독재를 포착하려 하다. 

 

 '염소의 축제'는 '독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정확히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30여년 동안 지배했던 트루히요 독재 정권을 다룬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우리가 흔히 '독재를 소재로 한 소설'이란 말을 들었을 때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생생한 기록을 통한 고발이나 독재에 대한 상상적 심판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소설은 '트루히요 정권'을 다루고 있지만 그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이 어떤 특정 독재 정권에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 소설의 관심은 그 특정 독재를 넘어서 독재 일반이 가지는 어떤 성향이랄까 아무튼 보다 본질적 차원에서의 독재,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독재적 현상'을 다루는데 있다. 여기서 현상은 보통 어떤 실체를 둘러싼 외부적 상태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훗설적 의미에서 '현상'을 가리킨다. 훗설은 '현상'을 사물이 처해 있는 객관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인식 안에 들어온 것을 '현상'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 현상은 우리가 얼른 인지하기는 힘들지만 사태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 그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훗설은 특별히 '현상학적 방법'을 고안했는데, 말하자면 이 방법은 주위 상황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순수한 직관의 힘으로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면 폴 세잔이 정물화를 그리는 방식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폴 세잔은 오랜 시간을 들여 정물을 그리길 좋아했다. 그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사물이 시시각각 드러내는 변화하는 존재의 가상적인 측면들을 지워내어 그 사물의 변하지 않는 핵심 즉,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감히 말하자면 이 소설 '염소의 축제'도 바로 그러한 세잔이 정물을 그리면서 추구했던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도 이 소설을 통해 특정 체제로서의 독재를 넘어 그 모든 가상적인 것을 제외하고 불변하는 독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포착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요사가 포착한 그 본질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2. 호르헤 살라메아의  소설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를 매개로 살펴보는 독재의 본질.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일단 그것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보다 먼저 독재자에 대한 소설을 썼으며 요사 처럼 특정 독재가 아닌 독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호르헤 살라메아의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를 통해 먼저 그 가능한 모습을 실루엣이나마 가늠해 보려 한다. 이것은 살라메아의 소설이 독재의 본질적 측면을 드러내는 데 있어 요사의 소설과 공통된 부분이 있으므로 일종의 이해를 위한 매개체로 삼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호르헤 살라메아의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는 '위대한 독재자 브룬둔 부룬다'의 장례식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 브룬둔 부룬다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독재자이다. 그러니까 살라메아는 역시적 실체로서의 독재가 아니라 그 원형으로서의 독재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그는 이 소설을 하나의 우화처럼 썼는데, 우화가 시대와 지역을 통해 두루 공감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소설에서 그가 묘사하는 독재 역시 그것의 원형이라 볼 수 있고 그렇게  살라메아에게 있어서 모든 독재는  사실상 하나의 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독재의 모습들이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나더라도 그건 그저 모사할 때의 붓 터치의 차이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만큼 독재는 많은 부분에서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건 이 소설 '염소의 축제'를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트루히요의 독재의 많은 모습들이 바로 우리나라의 독재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어쩐지 등장인물들만 다를뿐 똑같은 상황극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살라메아의 '위대한 독재자 브룬둔 부룬다'는 사실 모든 독재자들의  이데아이고, 거기 우화로 씌여진 상황은 그대로 모든 독재 국가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살라메아는 이 소설에서 독재의 원형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 여기서는 두 가지 점에서나름의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소설이 주로 다루는 것이 독재자의 장례식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 중반에 나오듯이 소설속의 독재자가 특히 중요시했던 것이 '말의 압살'이었다는 것을 통해서이다. 

 '장례식'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하나의 의례이며 거기엔 단 하나의 시간만 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살라메아는 장례식의 처음 부터 끝까지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묘사한다. 그리고 그 묘사의 대부분은 장례식 행렬에 있어서의 행진하는 단체들의 순서에 따른다. 

 이 소설이 그 순서를 충실히 따른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소설에는 유일한 하나의 시간만 흐르고 있다는 걸 나타내는데, 이 소설이 독재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자면 바로 이 '유일한' 시간이라는 자체가 독재의 본질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장례식이란 특정 한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의례이므로 당연히 그 시간의 주인공은 지금 장례식의 주인공인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 소설은 독재엔 언제나 단 하나의 '지배자의 시간'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두번째, '말의 압살'을 보자. 소설은 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부룬둔은 인간들의 찢어지는 가난과 그로 인한 고민과 반발이 언어 행위를 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임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온 인류의  기억에 남을 만한 부룬둔의 지혜로운 업적이었다.  결국 그는 자기의 통치를 받는  대다수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누가, 어느 시대에, 다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있을 것인가? 

                                   호르헤 살라메아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중에서 (p.77) 

 그렇게 그는 자신의 말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말을 죽인다. 완전히 압살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독재가 가진 본질의 또 다른 측면이 드러난다. 즉, 독재엔 오로지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살라메아의 소설에서 보듯, 독재 체제란 하나의 지배자의 시간과 그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이것은 바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는 특히 트루히요의 마지막 날을 보여주는 '독재자의 시간'에서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3. 다시 읽기를 권하는 '우라니아의 고백'이라는 폐제(foredosure).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전이됨에 따라서 달라지는 텍스트의 의미들 

    

 하지만 요사가 살라메아와 독재의 본질적 측면에 있어 공유하는 게 있더라도 그는 좀 더 시야를 넓힌다. 그러니까 살라메아가 오로지 독재자 하나에 맞춰 그 시간성과 목소리를 탐색했다면, 요사는 독재자의 시간을 하나의 부분으로 만들고 거기에 독재자에게 절망을 가져다 준 존재이자 그에게 박해를 당했던 한 영혼의 시간과 그 독재자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암살자들의 시간까지 더해서 시간성과 목소리에 있어 다층적인 차원을 부여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 소설이 독재의 본질이라는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분명히 '반(anti)독재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여러 개의 겹처진 시간과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독재자가 하나의 시간과 목소리만을 가진다는 것에서 비추어 볼 때, 분명 소설 전체적으로 '독재적인 것'에 대해 저항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저항은 내가 볼 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듯 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반(anti)독재적'임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앞에서 내가 말했던 것, 즉 '독재'라는 것을 하나의 관찰가능한 대상으로서의 '현상'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라깡이 말한 바 있었던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하나의 시간과 목소리만을 갖는 독재자의 이야기는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지배자 담론'이라 할 수 있다. 'I AM WHAT I SAY!' 로 정의되어지는 '지배자 담론'은 주체의 발화내용과 발화행위가 완전히 일치하는 단독자의 담론이므로 더이상 타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사는 이 독재자 트루히요의 담론을 첫번째 우라니아의 담론과 세번째 암살자들의 담론 사이에 끼워넣었다. 이 두 담론들은 트루히요가 최종적으로 죽음으로서 사라질 때 까지 포위하고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독재자의 목소리를 그에게 굴욕과 죽음을 안겨주었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박해를 받았던 피해자로서의 다층적인 목소리가 포위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트루히요가 붙였던 별명을 가진자가 아무도 없다. 트루히요의 권력층엔 모두 트루히요 자신이 붙인 별명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우라니아와 암살자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별명을 붙인다는 것은 의미를 정의하는 권력의 힘을 말한다. 그래서 그가 부여한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들이 권력자가 부여한 기표들을 거부한 주체들이며 스스로 의미를 생성해내는 주체들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사실 그들의 다차원적인 시간과 목소리들은 바로 이 주체들의 드러냄 자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렇게 위로부터의 권력을 거부하는 저항의 목소리들을 통칭 라깡은 '히스테리 담론'이라 부른다. 히스테리 담론은 저항과 분열이 핵심인 담론이다. 그만큼 타자의 개입 여지가 지배자 담론 보다는 많아진다. 

 사회적 이상으로 추앙받는 사회적 문화적 지배기표들에 도전하고 그것을 심문하려 들 때 히스테리 담론의 구조가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 '기호 주체 욕망' 박찬부 중에서 (p. 118) - 

 따라서 이런 식으로 요사는 담론의 배치를 통해 독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독재'라는 현상을 보다 접근 가능하고 임상가능한 환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살라메아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독재의 본질이 그 시간성과 목소리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도 이를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그는 이 소설에서 그것을 약간 구조적으로 비튼다. 거기에 다층적 차원의 시간성과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사는 살라메아 소설에서는 그저 수동적 관찰자로서 밖에만 머물 수 없었던 독자들을 자신의 소설 속에 좀 더 깊숙이 개입하도록 적극적 참여자로까지 유도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요사가 원하는 대로 작품으로 드러난 환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세밀히 살펴보려 한다. 

 앞 서 얘기했듯이 이 소설에는 크게 세 가지 시간이 등장한다. 하나는 바로 우라니아의 시간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독재자 트루히요의 시간(이 시간은 단일한 독재자의 시간으로 그의 마지막 날 하루를 시간순서대로 담아내고 있다. 살라메아의 소설적 시간 그대로이다)이다. 마지막 시간은 그를 암살한 사람들의 시간이다. 마지막 시간만 여러가지 인물이 등장하고 따라서 다양한 시간과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들이 개별적 층위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 연쇄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이 모든 관계가 연쇄적이라는 것을 독자는 소설이 끝날 때 가서야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우라니아의 고백을 통해서다.(두번째 시간과 세번째 시간은 소설의 후반에서 서로 포개어진다.) 사실 이 소설의 제목 '염소의 축제'는 바로 그 마지막 부분을 집약해 놓은 것이기도 할 만큼 그 고백은 중요하며 소설 속 모든 시간들은 그 고백을 통해 일종의 연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시간은 될 수 없다. 요사는 그러한 독재의 시간을 거부하므로 우라니아가 고백하는 시간을 현재속의 '과거'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현재와 과거라는 '층위'에서 단절을 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요사는 그렇게 독재의 시간을 거부하면서도 소설의 구조를 그렇게 만들었던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맨 마지막에 우라니아를 통해 드러나는 우라니아의 상처의 근원이자 트루히요에게 있어서는 소설속 자신의 시간 내내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있는 굴욕을 안겨줬던 그 시간이 왜 하필이면 첫번째 시간의 끝과 두번째 시간의 처음과 만나는 접점으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를 쉽게 얘기하자면 요사는 우리에게 트루히요의 시간을 두 번 읽게 만드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소설의 끝에서 우리는 우라니아의 상처와 트루히요의 굴욕을 보게된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읽는 독자는 트루히요의 시간 초반 부터 등장하는 한 계집 아이에 대한 트루히요의 분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요사는 독자가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는 지점들을 그냥 무시하고 진행시킨다. 왜 어젯밤 만난 계집 아이를 미워하는지 또 침대 위의 얼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연하다. 트루히요의 시간은 지배자의 담론이니까 우리가 아무리 궁금해도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I AM WHAT I SAY!'로 진행되는 이 시간에서 우리는 궁금해도 말해주기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처음에 이 소설적 경험을 완전히 수동으로 하게 된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에 초라한 독재자의 진실이 드러난다. 우리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라는 상징으로 계속 남아있었던 계집아이에 대한 분노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그 권력자가 도저히 지울 수 없었던 흔적의 확인은 이제 독자에게 하나의 틈을 만든다. 그리고 그 틈은 지배자 담론에서 수동적 주체밖에 될 수 없던 우리에게 균열을 일으켜 능동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제 모든 것을 파악한 독자가 다시 트루히요의 시간을 읽는다. 그 시간은 더이상 독자에게 지배자의 담론으로 기능할 수 없다. 독자는 처음 읽었을 때는 파악할 수 없었던 균열들이 담론 곳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독자에게 담론은 그 영향력을 잃고 해석 가능한 텍스트가 된다. 그렇게 그 담론은 이제 독자에게 히스테리 담론으로 전이된다. 말하자면 이것이 요사가 일부러 그렇게(처음의 시간 끝부분과 두번째 시간의 처음 부분이 만나도록) 만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읽는 독자에게도 우라니아와 트루히요의 암살자들 처럼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변화하는 것을 직접 체험시키기 위하여 말이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요사가 이 구조를 통하여 드러내고 싶었던 것 한 가지를 더 얘기하도록 하자. 그것은 '폐제(foredosure)'에 관해서이다. 페제란, 그 개념을 주창한 아니카 르메르에 따르면 이렇다.

 

억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억압은 아직도 수선의 여지가 있는 어떤 찢어짐(rent or tear)으로 드러난다면   '폐제(foredosure)'는 피륙을 짜는 과정에서 갈라진 틈새, 즉 다시는 그 실체를 발견할 수 없는 근원적 구멍(primal hole)을 뜻한다. 

                                                              - '기호 주체 욕망' 박찬부 중에서 (p. 300) - 

 쉽게 말해서 폐제란 뜨개질로 짠 스웨터에서 보이는 틈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다. 메우려고 푼다면 사라질테고 다시 뜨개질을 해도 그것은 구멍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두번째 읽는 트루히요의 시간은 이제 이런 '폐제의 시간'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 시간을 '재앙이 닥쳤다는 느낌을 받으며' 시작한다. 그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바로 우라니아의 고백에서 드러난 남자로서의 굴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하나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지병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요실금이다. 독재자는 무엇이든 다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절대권력의 속성인데 그러나 요실금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언제 어느때 흘러나올지 알 수 없어서 그를 괴롭게 만든다. 이것과 관련해 다시 읽어보면 유난히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는 침대 시트를 꼼꼼히 살폈다. 꼴사나운 우중충한 얼룩이 하얀 리넨을 더럽히고 있었다. 또다시 새어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분노가 치밀어 '마호가니 집'에서 있었던 씁쓸하고 불쾌한 기억마저 밀어냈다. 빌어먹을! 제기랄!... 이것은 그의 내부에, 그의 살 속과 그의 핏속에 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과 기운이 필요한 이 때, 바로 그를 파괴시키고 있었다. 그 비쩍 마른 계집애가 그에게 불행을 가져왔던 것이다. (P.33) 

 여기에서 보듯 통제력 상실을 의미하는 요실금은 계집애에 대한 분노와 같이 있다. 라캉에 따르면 히스테리 담론에서는 그 벌어진 틈으로 인한 주체의 분열은 결국 육체적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와 똑같이 요사도 요실금을 '마호가니 집'에서 굴욕을 당한 것에 대한 일종의 신경증적 반응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결국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그에게 있어 이 둘은 동일한 의미이며 모두 그가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구멍으로 존재한다. 소설에서 그가 내내 신경쓰는 것은 '마호가니 집'에서 그 계집아이에게 맛보았던 굴욕을 지워버리는 일이다. 그는 그 계집애가 벌써 도미니카를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고 또 굴욕감을 맛본다. 그는 결국 대신할 것을 찾아 그 구멍을 메우려 한다. 그러니까 그녀와 아주 닮은 아이로서 상상적으로 그 구멍을 메우려는 것이다. 그의 뚜쟁이인 마누엘 알폰소가 그녀와 아주 닮은 아이를 구했다고 알려온다. 그는 기뻐하며 다시 한 번 '마호가니 집'에서 닮은 그녀를 안음으로써 그 구멍을 메우려 하지만 결국 가는 도중 암살당하고 만다. 결국 다시 읽게 되는 히스테리 담론으로서의 '트루히요의 시간'은 그야말로 폐제의 시간들로 채워진다.  

 문제는 이 '폐제의 시간'이 각 단위 시간들에서 또 하나의 시간들을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처음 읽었을 때는 그토록 막강하던 권력의 모습은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곳곳에 갈라진 균열들과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이 드러나는 것처럼, 권력이 강화되는 시간 위에 그대로 바로 이 폐제의 시간이 겹쳐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에서 시간들은 수평적으로 분열되기도 하지만 수직적으로 분열된다. 그러니까 트루히요의 시간은,  

조니 아베스 -> 주정뱅이 입헌의원 -> 사이먼 지틀맨과의 만찬장 -> 대통령 발라게르와의 만남 -> 푸포 로만의 처벌 

 이렇게 이어지는데, 이 시간의 진행과정이 가지는 의미가 첫번째 읽었을 때와 두번째 읽었을 때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즉, 지배자의 담론으로 읽었던 시간에서는 권력이 강화되어가는 과정이었지만(그것은 사성장군 푸포로만의 처벌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두번재 히스테리 담론으로 읽는 시간에서는 그야말로 이 모든 시간은 점점 더 커져만가는 구멍들만을 드러내는 (미국, 반정부 지식인 카톨릭, 아들 람세스 등등) 폐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결국 권력이 최고로 강화된 것을 보여주었던 푸포 로만의 처벌이 바로 트루히요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폐제의 시간'에서라야 이해가능해진다.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더 넓혀진 구멍이 결국은 그를 삼켜버린 것이다.)  요사가 교묘히 겹쳐놓은 시간의 다층적 차원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세번째 시간은 암살자들의 시간이다. 요사는 이 시간을 암살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 가질 수 있도록 할애한다. 이 시간은 이렇게 진행된다. 

 아마디토 -> 안토니오 델라 마사 -> 임베르트 -> 사트알라 -> 페드로 리비오. 

 각각이 주체가 되는 시간에서 요사는 그들이 어떤 동기로 트루히요의 암살에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첫번째 그러니까 트루히요의 시간이 지배자 담론이 되었을 때 이들의 시간은 그야말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기다림은 억압받는 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트루히요에게 고통을 받았는가를 담담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히스테리 담론의 시간 아래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저 고통을 받고 기다리기만 했던 시간이 이제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옮겨가는 주체화의 시간으로 바껴지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마호가니 집'에서의 굴욕으로 생겨난 구멍과 얼룩으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렇게 세번째 시간도 이중의 시간적 층위가 드러난다. 여기서 이 세번째 시간에 참여하는 각 인물들의 동기를 보면 점점 그 동기가 더 큰 차원으로 마치 파문을 그리듯 넓혀져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마디토에서 사드알라까지 그 동기는 개인 -> 가족 -> 사회 -> 종교로 넓혀진다. 특히나 페드라 리비오에 이르면 계급적인 차원에 까지 넓혀진다. 요사가 이렇게 마치 단계별로 확장시키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번째 시간이 바로 도미니카 국민 전체의 시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이 과정이 헤겔이 말했던 정신의 구현 단계(가족 -> 시민사회 -> 국가)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주체의 확장 과정이라 할 만한데 그렇다면 결국 요사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결국 도미니카 국민 전체가 지배자 담론하에서는 고통을 겪으며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 히스테리 담론으로 바껴진 지금, 점점 더 많이 스스로 자기의 시간을 살며 목소리를 내는 주체로 바뀌어져가고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느껴진다. 

 

 

 4. '우라니아의 시간의 결여'라는 폐제가 소설 구조에 있어서 가지는 의미. 

 

 하지만 기이하게도 암살의 성공으로 활짝 피어나야 했을 주체의 해방은 그 사후처리의 미숙으로 주요 참가자들 중 임베르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맞게된다. 요사는 이들의 죽음을 잔인하리만치 조금의 동정의 여지도 가지지 않고 서술하고 있는데 결국 이들은 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일까?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 그래서라는 대답은 여기에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지금까지 요사가 해 온 모든 것이 그저 무의미한 유희에 불과했다는 꼬리표를 붙이는데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대답은 지금까지 요사가 해 온 바탕위에서 이들의 죽음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 때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이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19장에서 23장까지 우라니아의 시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라니아의 시간이 소멸하는 전조는 이미 18장에서 배태되고 있다. 18장이 더욱 기묘한것은 사실 우라니아의 시간이 나와야 하는데 거기 트루히요의 시간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거기서 부터 우라니아의 시간은 구조적으로 구멍으로 자리한다. 그런데 18장, 결정적으로 우라니아가 구멍이 되는 자리가 시작되는 그 지점에서 트루히요는 최후를 맞는다는 사실은 꽤 시사적이다. 이후 23장까지 오래도록 우라니아의 시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암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들 역시 트루히요와 똑같이 최후를 맞이한다. 마치 그녀의 구멍 자체가 그들 모두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그런 구조이다.

 우리는 이 구조에 주목해 봄으로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최후를 맞게되는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트루히요와 우라니아의 관계가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트루히요에게 '폐제의 시간'을 선사했던 우라니아가 그와 똑같이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에게도 '폐제의 시간'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라니아가 그렇게 트루히요에게 '메울 수 없는 구멍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만들었듯이 이들에게도 역시나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이 최후를 맞는 동안 우라니아의 시간은 말 그대로 사라져, 구멍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다가오는 방식에선 차이가 있다. 우라니아의 구멍은 트루히요에겐 '체험'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구조상의 결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트루히요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체험'을 통해서일 뿐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배자 담론'에서 그는 오로지 '규정하는 자'(그가 각 참모들에게 별명을 지어주는 것에서 드러나듯이)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어떤 타인도 개입할 수 없다. 그러니 자기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어디서도 '폐제'를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은 다르다. 그들이 진정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히스테리 담론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요사는 그 참여자들의 동기를 통해 도미니카 전체가 주체로 되어가는 과정까지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주체화 과정에서 우라니아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라캉이 말했던 주체화의 과정을 한 번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라깡에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언어 질서에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하지만 요사의 소설에서 이 의미는 약간 변형되어 여기서는 독재 체제가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언어 질서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즉, 주체란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했던 독재 체제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소리들의 개체들이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모델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아버지라는 기표'의 의미이다. 그는 상징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기표'의 매개로 인해 언어 질서에 뛰어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주체가 된다. 그런데 독재 체제에서는 문제가 있다. 그 아버지가 참된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는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만 강요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개체들로서는 아무래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있게 도와주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라니아의 시간이 결정적으로 비어있듯이, 아무데서도 그 아버지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는 비어있다. 그것은 참여자들에게 구조적 결함, 구멍, 얼룩 폐제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그들은 온전한 주체가 되는 것에 실패한다. 

  '폐제'는 바로 이렇게 '아버지의 기표' 자체가 사라지고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상적인 주체화 과정을 겪기 위해서 꼭 필요한 아버지의 기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폐제의 존재 앞에서 개체들은 온전한 주체가 되는 것에 실패하고 라깡 스스로 사례로 보여주었던 슈레버 케이스 처럼 궁극적으로는 파괴된다. 구조적 결함이 바로 온전한 주체가 되지 못한 개체의 사멸을 이끄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 왜 요사가 하필이면 우라니아의 자리가 비워져 버렸을 때 트루히요를 비롯한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시간 안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을 소설의 구조적 형식을 통해서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두번째 시간과 세번째 시간이 그야말로 화해하는 장면인 사면된 임베르트와 그를 환대하는 발라게르 대통령이 만나는 장면 바로 뒤이어 우라니아의 고백이 나온다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그 환대의 장면으로 도미니카가 이제 독재로 부터 해방되었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판단이다. 요사는 교묘하게도 그 바로 뒤이어 우라니아의 고백을 위치지음으로써 그렇게 그 들이 서로 환대를 했다해도 그들의 관계는 우라니아의 폐제를 가진 관계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결국은 그 환대로 이루어진 관계 조차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로서 우리는 이 소설에서 우라니아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수 있다. 

 

 

 5. 우라니아, 그 영원한 불규정성만이 우리를 진정한 주체로 만든다

     다시금 새로이 드러나는 성(Sexuality)의 층위 

 

 그녀는 첫번째 시간의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과연 그녀가 이 소설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우리는 첫번째 독서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 마지막에서 그녀의 고백을 들을때라야 소설에서 그녀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트루히요와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요사의 진정한 의도에 충실하자면 도미니카 국민 전체)에 '폐제의 시간'을 선사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그들 모두에게 '메울 수 없는 구멍으로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으로 자리한다. 우리는 요사가 왜 하필 우라니아를 그러한 폐제의 존재로 만들었을까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은 우라니아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첫번째 시간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두번째와 세번째 시간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남으로서만 나타난다. 첫번째 시간이 이 두 시간 모두에게 폐제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털장갑에 존재하는 구멍은 털장갑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까. 요사는 이 '폐제'의 구멍이 어떤 것인지 첫번째 시간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여기서 소설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층위인 '성(sexuality)'이 드러난다. 이 '성(sexuality)'의 층위는 오로지 첫번째 시간의 진정한 의미가 체득될 때 드러나는 새로이 겹쳐지는 층위이다. 바로 이것이 우라니아가 여성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사가 이렇게 새로이 '성(sexuality)'의 층위를 끌어들이는 것은 바로 그들이 찾지못했던 진정한 아버지가 어떤 것인지 알아봄으로써 비어있는 자리를 메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독재 체제에서 신음하는 개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알아보려는 탐색이다. 여기서 모두에게 '폐제의 시간'을 선사하는 우라니아가 바로 여성이라는 것은 그 '여성'이라는 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요사의 대답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여기에 유의하면 트루히요 체제 아래에서 특히 트루히요 측근들, 그 남자들에 대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이 소설에서 트루히요는 자신이 내키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의 측근들의 아내나 딸들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게된다. 이것은 트루히요가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지를 나타내지만 새로이 드러난 '성(sexuality)'의 층위에서 보자면 다른 의미로 읽힌다. 그러니까 트루히요는 그들의 아내나 딸을 마음대로 가져감으로써 그들에게서 남성적 자부심을 뺏고 '여성적'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트루히요의 측근들 - 조니 아베스, 헨리 치리노스, 카브랄, 호아킨 발라게르, 푸포 로만 - 모두가 성적관계가 전혀 없거나 남성성의 특징들이 전혀 표출되지 않는 '여성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이 '여성적'인물의 공통점은 아무도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렇게 주체가 되지 못한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라는 데 있다. 이 '여성적'인 것은 그러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트루히요에 의해서 부여된 인위적인 여성성이다. 그리고 이 부여된 '인위적 여성성'의 본질은 그들의 공통적 특징에서 드러나듯이 '온전한 수동성'에 있다. 이것은 오로지 여성성이라는 것에서 부정적인 특질만을 모아서 규정한 그러한 여성성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성(sexuality)'의 층위에서 새로운 대립항이 태어난다. 바로 우라니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러한데, 우라니아가 의미하는 '진정한 여성성' 대 트루히요가 부여한 '인위적 여성성'의 대립항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 볼 인물은 바로 푸포 로만이다. 그는 세번째 시간에서의 참여자들이 암살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결정적으로 실패하게 만든 인물이다. 요사 스스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물로 사실 이 소설은 그를 이해하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인물은 중요해지는데, 결정적으로 이 인물이 그 모든 성공으로 이끌 기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게 되는 건 이 사람이 트루히요 곁에 31년 동안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 트루히요가 부여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하게 내면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래도록 길들여진 '여성성' 때문에 트루히요가 죽었어도 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던 나머지 자신의 파멸마저 초래한 것이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세번째 참여자들의 주체가 되려는 시도가 결정적으로 실패에 이르도록 만든 것이 트루히요가 부여한 '인위적 여성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라니아와의 대항적 관계가 선명해지면서 우라니아가 가진 진정한 여성성이야 말로 요사가 그 아버지의 자리에 앉히고 싶은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이 보다 명확해진다.  

 그럼 여기서 우라니아라는 이름을 살펴보자. 우라니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천문학을 주관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이것이 우라니아의 시간에서 별빛의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보통 거북이(고대에서 거북이는 우주를 바치고 있는 존재로 흔히 묘사된다)의 등을 밟고 지구의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녀는 별들의 위치를 보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으며 우주적 사랑과 성령의 상징이며 철학과 하늘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 특히 사랑하는 여신이다. 우라니아가 소설의 가장 처음 부분에서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고독한 행성을 떠올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신 우라니아는 지구의를 가지고 있음에서 드러나듯 지구 자체를 초월한 탈영토화된 존재다. 그녀는 그렇게 우주라는 텅 빈 여백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폐제로서의 역할을 하는 우라니아가 이 여신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우라니아는 그 이름처럼 탈영토화된, 규정되지 않은 여성이다. 그녀는 카브랄 박사, 우라니아, 우라니타 등등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도미니카 여자답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아울러 아무런 인간관계 조차 맺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완벽하게 지구의 바깥, 타자(the other)자리에 차지한다.

 그런데 한편 우리는 우라니아의 시간을 통해서 그녀 자신의 내부에도 타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러니까 우라니아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거기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반문을 하는 또 하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는 걸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유독 우라니아에게만 나타나는 특유한 것이다. 여타 다른 등장인물들은 자신에게 그렇게 끊임없이 의문을 품지 않는다. 우라니아는 존재 자체도 완전히 타자의 영역에 있지만 그 스스로도 타자적이다. 이것은 그녀가 영원히 불가해한 그 어떤 외부로 부터도 규정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좌표축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라 구토마저 일으킬 혼란에 처한 신체로 부터 구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상 속에서 계속 전장을 사고한다는 것은 새로운 신체의 구축과 새로운 좌표를 희구하는 것이다. 기억은 담론이 아니라 무엇보다 신체와 실천을 구성하는 일인 것이다.  

                                                                -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중에서 - 

 따라서 이것은 그대로 트루히요에서 규정된 인위적 여성성과 대립적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일종의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독재는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다. 거기서 목소리는 바로 규정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그렇게 독재는 오로지 하나의 규정하는 권력에 의해 모든 것들이 다 규정되어진다. 트루히요는 그렇게 국가와 도시, 시민들 그리고 측근들에게 새로운 이름과 별명을 부여함으로써 새롭게 그들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가져감으로써 그들을 여성의 부정적 특징들만을 총합한 '여성적' 자아로 만든다. 따라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독재의 권력에 언제든 포섭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폐제의 자리에 위치해야 하는 건 영원한 불규정성 뿐이다. 이렇게 요사는 그 대립적 관계를 통해 우라니아처럼 '절대적으로 불규정성의 여성성'만이 오로지 개체가 온전한 주체로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진정한 아버지의 자리에 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이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새로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새로운 성의 층위가 밝혀지기 까지는 그것이 오로지 폐제로 인한 구조적 결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성(sexuality)'의 층위에서는 그들이 폐제를 가지게 된 이유가 좀 더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그들이 결국 폐제를 가지게 된 것은 바로 특히 안토니오 델라 마사에서 드러나듯이 그들 자신이 복수와 폭력으로 묶어지는 남성성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남성성은 어떤 남성성인가? 그것은 트루히요에 의해서 새로이 규정된 남성성인 것이다. 독재는 모든 것을 새로이 규정한다. 트루히요가 여성성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규정했듯이 남성성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을 떠올려 보면 이것은 더 분명해진다. 박정희 독재 시절 그들은 남성성을  주로 '산업전사'나 '산업역군' 같은 호명을 통해 마초적인 것으로 재정의했다. 그 호명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같이 주어짐으로써 모든 국민을 그렇게 '남성-되기'에 참여시켰다. 이 '남성-되기'는 사실상 남성성이 가지고 있는 생산자로서의 기표를 과장시켜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박정희의 독재로 부터 받는 억압을 희석화시기키 위함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자신은 국가의 아버지라는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완전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체제로 국가를 재편했다. 그러한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은 새로이 규정된 왜곡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새로이 내면화시켜갔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트루히요 독재 체제 아래에서도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 체제 아래서 30년 넘게 살아온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성이라는 게 트루히요 체제 아래에서 새로이 규정된 남성성이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따라서 그들은 그대로 비규정적인 새로운 여성성인 '우라니아'를 영원한 폐제로 가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편, 역시 도미니카 공화국의 트루히요 독재 체제의 상흔을 다루고 있는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도 이와 비슷한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그 소설에서 화자는 도미니카 공화국 사람들이 트루히요 이래로 대대로 가지고 있는 '푸쿠'에 대해 얘기한다. 거기서 '푸쿠'란 바로 저주의 일종으로 고통의 근원 같은 것을 말한다. 즉, 트루히요 체제 이래로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트루히요가 걸어놓은 푸쿠 때문이고 그 푸쿠란 건 다름아닌 트루히요가 규정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은 오랜 트루히요 체제를 거치는 동안 그들 스스로 내면화한 정체성 때문인 것이다. 역시나 화자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그래서 그는 과도한 남성성의 집착을 보인다. 때문에 화자의 눈에 소설의 중심 인물인 오스카 와오는 더없이 찌질이로 보이는데 그는 그야말로 규정된 남성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트루히요의 푸쿠를 끊어버리는 자가 된다. 여기서 오스카 와오의 규정성을 초월(오스카 와오가 특히 집착하는 것이 SF와 판타지 와 같은, 현실을 초월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성격이 유추될 수 있다.)하는 타자적 특성이 우라니아와 만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렇게 세대가 다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주노 디아스가 공히 그러한 규정성을 초월해 영원히 비규정적인 영역에 머무는 타자적 존재를 온전한 주체로 만드는 하나의 구원 가능성으로 상정하는 것은 흥미롭다. 

  더하여 그 참여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이가 임베르트(그 외 또 한 사람 '루이스 아마미아'가 있으나 그는 1권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자가 아니므로 논의에서 배제시킨다.)뿐이라는 것 역시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가 이 암살에 참여한 진짜 이유는 그 자신 미라발 자매를 흠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고 그렇게 그녀가 내보이는 여성성에 유일하게 매혹된 사람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결국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요사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한 여성성, 그 모든 것으로 부터 규정당하지 않고 영원히 타자의 영역에 머무를 수 있는 여성성만이 우리를 자신의 시간과 목소리를 가진 온전한 주체로 만들어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6. CODA... 

 

 마리오 바르가사 요사의 '염소의 축제'는 쉬운 소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단순히 그것을 고발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 전체로써 - 내용 뿐만이 아니라 구조적 형식 그 자체로서도 - 독재적인 것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목소리만을 갖는 독재적인 것에 저항해 이 소설은 다자(多者)적인 시간과 목소리를 도입하고 여기에 시간의 배치를 통해 하나의 폐제를 구조 자체에다 만듦으로써 독자에게 두 번 읽기를 요구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두 번의 읽음에서 라깡식의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의 전이를 통해 요사가 진정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온전히 드러나는 아주 신비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시간들에서도 그 위에 또 포개어지는 새로운 의미의 층들이 있어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의 지점들이 생성되고 있기까지 하다. 이 소설이 가진 모든 신비한 측면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우라니아 같이 불규정성의 여성성만이 온전한 주체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의 논지에 맞도록 이 소설 자체를 어떤 하나의 의미로 절대로 규정되지 않는 영원한 불규정성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래도 꽤 길게 세세하게 요사가 깃들여놓은 의미들을 파헤치려 노력해 왔지만 여전히 미답의 불모지가 남아있을 것 같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의 이 소설에 대한 독해가 궁금하다. 그 누군가의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을 바로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보다 더 많은 목소리가 이 책을 통해 창출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또 요사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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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미 2011-08-0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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