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만의 비밀스러운 삶
아틀레 네스 지음, 박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혹시 그런 때가 있지 않은지? 문득 길을 걷다가 절반 정도 왔는데 생각해 보니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구나 분명 제대로 목적지로 가는 길로 왔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걸으면 걸을 수록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때가...  어쩌면 이것은 비단 길을 걸을 때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삶에 있어서도 불현듯 엄습해오는 때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제대로 내게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지는 때가... 

    바로, 노르웨이 작가 아틀레 네스가 그려내고 있는 소설 '리만의 비밀스러운 삶'의 주인공 역시도 그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수학자이고 '소수'란 것에 매료된 나머지 수학자로서의 인생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현재까지 이어온 사람이다. 그는 교수이고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까지 꾸리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문득 자신이 제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꿈꾸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나, 즉 꿈을 실현한 내 모습에 끌렸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묵묵히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젊은이로 여겼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잘 모르겠다.(P.14~15) 

  그가 이렇게 느끼게 된 것은 나이 때문이다. 

 마흔살이 된다는 것은 현대 수학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일이다. 죽은 알프레드 노벨은 유언을 작성할 때 수학자인 우리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우리 수학자에게 노벨상 같은 큰 영광이라고 한다면 필즈상이다. 물론 아벨상도 영예롭기는 하지만,  사 년 마다 주는 필즈 메달이야 말로 가장 명예로운 상이다. 어떻게 보면 올림픽의 금메달과도 같다. 그러나 이 상에는 특별한 추가 조항이 있다. 바로 나이 제한이다. 마흔 살 이전의 수학자에게만 수여되는 것이다. 나는 최종 후보로 거론된 적도 없고, 올림피아드 승자도 아니며 국내 대회 결승에도 진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꿈은 항상 수학 올림피아드의 금메달이었다. 나는 금메달을 손에 쥐는 모습을 그리며 정말 열심히 연구했지만 이제 마흔세 살이 되었기 때문에 소용없게 되었다. 대신 나는 리만의 평전을 쓰면서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P.42~43)

  이렇게 나이로 인해 더 이상 의미있는 수학적 업적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려 한다. 그것은 바로 곡면기하학으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영감을 주었고 아직까지도 증명되지 못하여 영원한 미제로 남아있는 가설 때문에 불멸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수학자 리만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이다. 그 평전이 그에게 그만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리만이 40세라는 짧은 인생을 산 데다가 남긴 논문도 몇 편 안 되어 그의 삶이 그가 수학에 미친 영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만의 삶은 짧고 특색이 없다. 그러나 그의 발견은 영원성을 지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난하고 의기소침하며 서툰 왼손잡이에 폐병까지 걸린 사람이 쓴 가설이 후세에 미칠 영향력과 파급력이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설은 완벽한 증명없이 오로지 그의 직관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P.111)

  리만의 영원히 증명되지 않은 가설을 풀기위해서라도 그는 리만의 삶이 제대로 세세하게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그는 석 달이 지나도록 하나의 문장 밖에는 쓰지 못했고 여기에서마저 한계에 봉착한 그는 아무래도 글 쓰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되어 작문 교실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여인 잉빌드를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은 일종의 액자구조를 취하고 있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은 실종된 상태로 나타난다. 그의 딸은 혹시 그를 찾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의 컴퓨터에서 찾아낸 일기를 경찰에게 건네준다. 바로 이 일기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독자는 처음부터 하나의 호기심 - 그는 왜 사라진 것일까? -을 가지고 그의 일기를 읽게 된다. 미스터리를 푸는 것은 사람이 가진 근원적 욕망중의 하나라서 그의 일기에 나온 모든 문장은 그래서 무심히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일기는 어떤 일기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스스로 필생의 프로젝트로 여기는 리만의 평전을 써가는 동안의 일상을 그대로 담아낸 일기이다. 그렇게 모든 일기가 그렇듯이 아주 개인적인 내밀한 고백까지 다 담겨져 있다. 평전의 일부인 리만의 삶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그 평전을 쓰면서 느끼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대한 좌절감이나 잉발드를 만나 새롭게 사랑의 기쁨을 느껴가는 과정까지 다 담겨져 있는 r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보다 분명한 목적, 주인공이 사라진 이유를 찾기 위해 읽기에 이 모든 내밀한 고백들이 언젠가는 우리 앞에 그 이유를 제시해 줄 것으로 믿지만 당신은 아마도 수백년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이 덤벼들었으나 풀어내지 못한 리만 가설 처럼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분명, 이 소설 역시 영원히 당신에게 '리만 가설'로 남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읽기 보다는 처음에도 말했듯이, 문득 자신이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남자의, 그렇게 불현듯 가야할 방향을 상실한 자가 느끼는 갈등을 오롯이 건져낸 자기 고백적인 글로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물론 여기서의 갈등은 새로운 길을 걸으려 할 때 늘 따르게 마련인, 늘 걸어온 길을 계속 걸어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정감과 그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때 늘 따라다니게 될 불안감 사이의 갈등을 말한다. 쉽게 말해 늘 우리에서 살아온 동물이 갑자기 그 우리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 자기 앞에 놓여진 그 광막한 초원 앞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그 불안감 때문에 더 유혹적으로 다가오는 우리 안에서의 안정된 삶 사이의 그런 갈등이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단순히 말해 두 개의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세계란 각각 아내인 키라로 대표되는 늘 유지해 온 삶의 궤도를 따르는 안정된 세계와 잉발드로 대표되는 이전의 삶의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세계를 말한다. 

  정확히 주인공은 언제나 그 두 세계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가 리만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도 아마도 사실은 그러한 욕망,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욕망에서 발현되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리만은 그 당시까지 정설로 내려오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로써 새로이 '곡면기하학'이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정초해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 유클리드 기하학이 '평행한 직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면 리만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아무리 평행한 직선도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리만의 기하학은 완전히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났고 그렇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전복시켰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서 뉴튼의 기계론적 물리학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리만의 기하학이 가진 전복적인 힘을 생각한다면 당연해 보인다. 아마도 이렇게 리만이 당시의 통념으로 부터 벗어난 완전히 자유로운 사유를 하는 수학자였다는 것이 주인공 역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자'라는 점에서 유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리만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왕정을 선택했을 때 그렇게 실망을 느꼇던 것이고 리만이 다시 히노버의 자유로운 체제 아래에서 괴팅겐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이리라. 

  나는 리만이 사고의 자유를 부르짖는 하노버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괴팅겐으로 돌아왔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P.122) 

  하지만 그렇다고 리만이 전혀 자유로운 존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난했고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늘 자신의 가족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에도 부응해야 했다. 일상속에서 그는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수학'에서 뿐이었다. 이것은 지금 주인공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언제나 가정의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점점 통제를 벗어나는 아이들 때문에 근심이 끊이지 않고 아내 카린은 그에게 늘 정신이 딴 데 가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타박한다. 그가 유일하게 자유로움을 느낄 때는 언제나 잉빌드와 함께 할 때 뿐이다. 그렇게 리만이 수학을 통해 자유로웠듯이 주인공은 잉빌드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 따라서 사실은 이 소설에서 리만은 그대로 주인공의 도플갱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자유엔 늘 불안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아틀레 네스는 바로 이러한 불안감을 소설에서는 불륜으로 인한 불안감으로 치환해서 보여준다. 주인공과 잉빌드는 서로 거세게 끌리지만 서로가 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기에 늘 극도로 조심하고 주위 상황에 예민하게 대응한다. 사실 이러한 불안감은 소설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안정과 자유 사이에서 주인공이 늘 갈등하고 있음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리만의 평전과 새롭게 사랑을 엮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이 소설은 본래는 다시 새로운 자유를 찾아 떠나려는 자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네스는 이러한 내면을 충실히 복원만 할 뿐 섣불리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대로 '과정으로서의' 소설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고 작가 역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의 실종이 그 어떤 대답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실종은 그저 단순한 사라짐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소설이 끝났을 때 모든 등장인물이 사라지듯이... 그런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는 단순한 사라짐... 그렇게 이 소설엔 그 어떤 결말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나면, 이 소설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주인공 역시 매혹시켰던 '소수'의 존재 때문이다. 

  골드바흐는 이미 삼백년 전에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추측을 발표했다. 이 명제는 소소한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마치 수학선생님이 수업시간 끝나기 십 분 전에 새로운 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골드바흐의 추측은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증명되지 못했다. 이처럼 소수를 공식으로 증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수는 모든 규칙을 벗어나 안전한 보호막 속에 있기 때문에 연구 가치가 있다.(P. 14)   

   여기서 보듯이 소수란 단적으로 말해 불규칙적인, 다시 말 해 규칙에서 벗어난 '얼룩' 같은 존재이다. 소수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도 같이 모든 규정하려는 것으로 부터 탈피한다. 어떤 것을 공식화하려는 순간 불현듯 뛰쳐 나와 그 공식을 전복시켜 버리는 존재. 그것이 바로 소수인 것이다. 그렇게 소수는 모든 불확실성으로 열려진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아 있다. 누구도 소수를 공식화 할 수 없듯이, 삶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없다. 우리는 늘 '왜 사는가?'하는 의문을 입버릇 처럼 달고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 일쑤이지 않는가? 소수가 모든 규정성을 벗어나듯이 우리네 삶 또한 그렇게 모든 규정성으로 부터 벗어난다. 그 어떤 결말도 내지 않고 그대로 공백으로 만들어버린 결말은 어쩌면 작가 자신이 문학을 '소수'적인 것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작가는 왜 굳이 자신의 소설을 '소수'적인 것으로 구현하려 한 것일까? 바로 이 소설 말미에 나오는 리만 자신의 미발표 논문의 한 부분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소수가 어떻게 사라지지도 않고 영원히 무한의 길을 가는지 그 이유에 대해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가는 길 중간에는 소수가 전혀 없거나 기나긴 구간이 있었다. 이 숫자들은 예언 시대 이전인 태고적부터 존재해왔다. 우리는 이 수를 잡지 못하고 선회하면서 모호한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신은 만물의 모습을 통해 현현하신다. 소수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가 남긴 족적이자 신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실재한다는 흔적이다. 우리가 수학을 신의 위치인 고차원에서 바라보면, 의심할 바 없이 n차원 공간에서 소수가 신의 규칙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숫자가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P.271)

   소수는 인생의 신비를 구현하고 있다. 소수의 비밀을 아는 것은 리만의 고백에서 보듯이 우리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과 같다. 신의 규칙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지 않을까? 아마도 바로 이러한 이유로 네스는 자신의 소설을 굳이 '소수'적인 것으로 만드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는 소수가 영원히 무규정적이듯이 그렇게 일부러 결말을 내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작가의 진실한 태도라고 여긴다. 이는 아틀레 네스의 이전작들을 생각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그의 이전작들 대부분은 모두 한 개인의 삶을 충실히 복원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작품에서 주로 한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많은 삶의 모습을 세밀히 바라보았던 그였던 만큼 소설이 인생을 어떻게 구현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분명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소설 역시도 그러한 고민 끝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동안 타인의 삶에 천착해서 충실히 복원해왔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그는 이렇게 '과정으로서' 그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작가의 진실한 태도라고 여긴다. 그것은 인생이 가진 신비 앞에서 작가는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리만이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평생 소수에 집착했던 그토록 가우스 이래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었던 리만 마저 소수가 가진 신비 앞에 스스로를 낮추었다면 작가 역시도 소수를 닮은 인생의 깊이 앞에서 겸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때문에 그는 그 어떤 선택도 주인공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그냥 그대로 '공백'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기까지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라 여긴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기로에 선 존재가 어떤 내면의 변화를 그려가는지 충실히 담아내는 것만이 전부라고... 

    혹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고 다른 길에로의 유혹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 이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여기엔 그 어떤 해답도 없지만 어떤 고민들은 굳이 해답을 구하지 않고 다만 천착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다행이 이 책은 작고 가벼워서 어디서든 들고 읽을 수도 있으니, 문득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 한 조각이 괜스레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운다면 자판기 커피를 마시듯 홀짝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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