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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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돈... 

  읽고나서 처음엔 어떻게 이 소설을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이제는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괴물을 마주할 준비가... 더구나 이 소설은 우리를 그  괴물의 내면으로까지 데리고 간다. 난처하다. 당신이 이끄는 손길은. 거부하고 싶었다. 뿌리치고 싶었다.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 괴물의 모습을. 그의 눈으로는 더더욱... 

  왜냐면 난 이미 그 시선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을 통해서... 그 소설에도 고문기술자의 시선이 나온다. 그의 시선일 때 우리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그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구나' 하는 모습이다. 노모를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보통의 가장... 단지 한국전쟁 때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이 살해당했던 기억 때문에 '빨갱이'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이 맺혔고 그래서 이성 보다는 감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의 고문이란, 그러한 응어리진 한을 푸는 그래서 어쩌면 인간적으로 이해할만한 폭력이라는 동정... 그도 결국 온전한 폭력의 주체는 아니며 다만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한낱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인식 등등... 하지만 이러한 소설 속 제안들은 오히려 날 미치게 만들었다. 작고하신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심정과 같았다. 실제 피해자인 자신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범인을 보며 그렇게 용서의 기회마저 박탈당하여 절망 끝에 결국은 자살한 여주인공 처럼, 나 역시 끔찍하게 자행되는 고문에 대한 분노를 '그래, 당신도 피해자였어...'라는 소설의 시선 때문에 어디다 풀어야 할지 몰라 온 영혼이 비틀거렸다. 

  나는 솔직히 가해자를 동정하고 싶지 않다. 가해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 만큼은 절대적 이분법을 선호한다. 악은 악일뿐. 그건 전혀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그는 가둬져야 한다. 소설 속 공간 '다락방'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두고 굳게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 그렇게 영원히 봉인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붉은 방'이 나온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누군가가 그 문을 열어 젖히고 그 괴물을 소환한다. 

  그가 천운영이고 그렇게 괴물은 다시 나타나 그의 내면 안으로 또다시 우리를 포획한다.  돌연 햄릿 앞에 나타나 숙부가 자신을 죽였음을 말하는 아버지 유령과도 같이... 

  세월이 흘렀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이... 그 괴물 조차 이제는 개과선천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하던가... 세월마다 켜켜이 퇴적되는 망각에 힘입어 괴물의 존재가 거의 지워져버린 지금 어쩌자고 작가는 다시 그 괴물을 소환하여 우리에게 마주보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 시선을 거부하면서도 한 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운영. 솔직히 나는 이 작가를 처음 만난다. 그래서 이 작가의 세계관을 알 길이 없다. 해서 들어야 했다. 그 이유를. 그녀의 말로 직접! 하지만 '작가의 말'을 읽어봐도 알 수는 없었다. 단 하나의 대답이 있긴 했었다. "써야하니까!" 헐~ 어쩌라는것인지?... 

  다만 알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이 괴물을 소환한 계기였다. 그건 다락방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괴물이 잡히기 전에 10년간이나 다락방에 은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다락방... 다락방이라면 나도 추억이 있다. 하지만 그 추억은 그리움과 공포를 동시에 수반한 것이다. 숨바꼭질 할 때 가끔 다락방에 숨곤 했다. 그건 그리움이다. 가끔 들창으로 햇살이 빠꼼이 비쳐들때면 만화책을 읽다가 졸기도 했다. 그것 역시 그리움이다. 하지만 화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락방에서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렇게 광란의 매타작을 당하는 날이면 다락방의 문을 쳐다보는 것 조차 무서웠었다. 낭만과 공포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애증의 공간. 그것이 '나의 다락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 소설 '생강' 자체가 어쩐지 '나의 다락방'과도 비슷한 것 같다.  

  나의 다락방에 대한 상반된 감정은 시간을 두고 서로 분리된다. 햇살이 들이치는 낮의 다락방은 온전히 그리움의 공간이다. 하지만 주로 밤에 끌려 올려가 매타작을 당한 탓에, 밤의 다락방은 그야말로 공포의 공간이다. 그렇게 나에겐 다락방이 낮과 밤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각각 그리움과 공포로 명확히 대응되고 있다. 이 소설 '생강'의 세계도 그렇게 나뉜다. '밤'이라는 고문기술자 '안'의 세계와 '낮'이라는 그의 딸 '선'의 세계... 소설의 초반부 두 세계의 명암의 대비는 극명하다. 어둠의 고문방에서 '안'은 오로지 파괴와 종말만을 가져다 준다. 거기엔 빛 조차 파멸을 위한 무기이다. 반면 '낮'의 '선'은 이제 꿈꾸던 대학생활이라는 희망으로 눈부시다. 거기엔 다락방의 백열 전구 조차 따스함과 정겨움을 담는다. 결국 세상이 바뀌고 '안'은 도피하게 되는데 그 바깥에서의 도피의 여정 또한 여전히 밤이다. 여러 공간을 전전하지만 결국 '밤'이라는 기차에서 이 객차에서 저 객차로 건너가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좁아져만 간다. 이러한 두 세계의 대조적인 모습은 외연을 확장한다면, 마치 내 다락방이 시간적 차이를 두고 서로 다른 인상을 불러 일으켰듯이,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안'의 세계는 80년대를. 그리고 '선'의 세계는 지금 우리들의 시대를 말이다. 그렇게 이 소설을 '선'의 세계가 상징하는 지금의 우리들이 ''안'의 세계'에서 묘사된 80년대를 바라보고 그것을 껴안아 가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가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임철우의 '붉은 방'에서도 이렇게 두 개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나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선으로 대립적이었다. '생강'의 두 시선들은 모두 한 쪽에 위치한다. '부녀지간'이란 혈연 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선'은 아버지의 행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나 단지 그의 딸이라는 이유로 몰려가게 된다. 그 계기를 만든 사람은 '낯선 남자'이다. 이 남자는 '안'에게 고문을 당한 피해자이다. 말하자면 천운영은 '붉은 방'에서 시선의 주체였던 피해자를 이제는 바라보기의 대상인 '객체'로 만든 것이다. 그 자는 처음엔 '안'과 '선'을 분리시키지만 나중엔 다시 맺게해주는 이중의 역할을 맡는다.이 묘한 관계의 변화, 혹은 수십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뒤틀림. 천운영은 왜 이런 관계를 설정했을까? 이 호기심이 결국은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 소설을 독해하도록 만든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내겐 그 낯선 남자의 존재가 여간 흥미롭지가 않다. 그는 내게 예전에 나온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의 바로 그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영화에서 괴물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그저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그 괴물을 다시금 우리를 80년대로 인도하는 존재라고 느꼈다. 분명히 존재했엇지만 서서히 지워져버린 역사.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떠 올리는 이별한 연인의 얼굴 처럼 생생했던 그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다만 아련한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는 80년대, 그 암흑의 현장 속으로 다시금 우리를 데려가 그것의 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존재라고... 

  그렇게 소설 '생강'에서 '선' 앞에 나타난 낯선 남자의 존재도 영화 속 괴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낯선 남자는 '선'에게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렇게 그때까지만 해도 '선'이 자신의 삶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던 역사의 어둠이 사실은 자신의 존재와 아주 단단하게 결부된 것임을 일깨워준다.  동시에 우리들에겐 우리 역시 '선'처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그 시절 80년대의 어둠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는 '선'과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80년대에로의 초대장 같은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그러니까 객체화된 '낯선 남자'의 존재는 앞에서 말했던, 우리가 바라보는 그 괴물의 내면이 사실은 바로 80년대를 독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을 더욱 더 신빙성있게 만든다.  

  아무튼 초반부 '선'의 세계는 '안'의 세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선'은 자신의 세계에 그러한 '안'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임철우의 '붉은 방'에서도, 고문을 당했던 자는 TV 속에 나오는 고문이니 시국선언이니 하는 모든 정치적 사건들을 자신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그러한 '붉은 방'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설마 자신이 그러한 붉은 방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리라고는 더더욱 말이다. 이건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 독재정권으로 정의되는 70년대 80년대의 관계와도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생채기도 시간이 흐르면 딱지가 안고 결국은 그 딱지 마저 떨어져 나가 버리듯이, 아무리 그 시간들이 고통과 공포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흐르는 시간 속에 그 아픔들과 두려움은 희석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느새 우리도 그것들을 그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한 때의 전설로 여겼다. 어쩌다 듣게되는 독재의 무시무시한 폭압은 그저 과거의 한 때에 일어난 불쾌한 추억 같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우리나라에 곳곳에서 확인되는 현상은 그게 단지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다. '선'에게도 '붉은 방'의 피해자에게도 결국은 현실이었듯이,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 바라보는, 천운영이 이 소설에서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풀어놓는 그 시절의 어둠 역시도 언제 어느 때 또다시 반복될지 모르는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다만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다락방에 숨겨져 있을 뿐... 

  그래서 섣불리 외면하거나 망각할수가 없다. 그건 지금 우리들을 상징하는 '선과  그 시대의 어둠을 의미하는 '안'이 혈연으로 맺어진 '부녀관계'라는 점과 다락방의 문 하나를 두고 공존하게 되는 설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그 시절이 어둠은 불가사리의 다리를 잘라내듯 쉽게 잘라내어 버릴 수 없는 역사이다. '선'이 다락방에 숨은 '안'과 함께 살면서 그를 양육하듯이 우리가 안고가야 하는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 존재에 단단하게 고착된 역사란 인식이 가장 인상깊게 드러난 장면이 개인적으론 '안'과 그 가족이 백숙을 먹다가 갑자기 경찰이 들어오는 바람에 '안'이 다락방으로 숨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안'은 서둘러 숨느라 그만 다락방 문을 닫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 때 '선'은 이미 아버지로 인해 가장 친한 친구인 '진'과 짝사랑하던 '민'에게 버림받은 후였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쌓일대로 쌓여 있었다.  그는 선에게 제발 문을 닫아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래 착하지. 이제 문만 조용히 닫으면 끝나. 문을 잡고 선 딸애의 얼굴. 아무 표정이 없다. 넋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문을 붙들고 선 채 꼼짝도 않는다. 텅 빈 눈. 아무것도 담지 않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고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 침묵의 눈. 침묵 조차도 숨겨버리는 절대적인 암묵의 구멍 (P.155) 
 

  하지만 선은 문을 닫지고 그렇다고 경찰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그렇게 문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안은 경찰이 물러간 뒤 내려와 딸애를 본다.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기 내 아내와 딸애가 있다. 문득 딸애의 눈빛이 뇌리를 스친다. 딸애의 눈에 순간적으로 감아돌던 밫은 아버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딸애는 버러지를 보고 있었다. 발정난 개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경멸과 혐오, 절망과 증오, 복수와 처벌을 다짐하는 결의의 눈빛(P.159) 
 

  '안'도 이렇게 느낄 만큼 '선'의 원망은 컸다. 그런데도 왜 대관절 그녀는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것일까? '부녀지간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겐 좀 다르게 읽혔다. '선'이 만일 경찰에게 그대로 알렸다면 아버지는 체포되고 아버지는 배신감에 부녀지간은 어쩌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러한 '선'의 행위는 불가사리의 다리를 잘라내듯이 그 역사를 그대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그렇게 완전히 망각해버리는 것을. 하지만 '선'은 계속 열려진 다락방 문을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갈등을 하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겠지만 내게 이 모습은 왠지 우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렇게 완전히 우리에게 달라붙어 함께 안고 가야할 역사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닫을 수도 활짝 열수도 없는... 그렇게 혐오와 포용을 함께 안고 짊어지고 가야하는 절대로 도려내질 수 없는 불치의 환부 같은 것이라고... 

  그래, 환부이다. 불치의 환부...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안고가야 하는 환부... 

  고통스럽다면 왜 안고가야 하는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안고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은 역설적이다. 우리가 안고가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니까 그것을 안고가야 하는 것이다. '생강'에서 '선'은 일상에서 문득 문득 아버지의 어둠이 엄습해 올 때 마다 반드시 고통을 느낀다. 민가협의 시위 현장에서도 대학을 그만두고 일하던 미용실에서 '진'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렇다. 고통을 받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다. 고통이 그 시절의 기억을 육체에 새겨주기 때문이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 고통을 기꺼이 껴 안아야 한다. '안'은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어린 계집에게 자기 몸에다 채찍질을 하라고 한다. 낯선 남자는 자신의 육체에 고문받을 때 들었던 라디오 방송이 생생히 새겨져 있다고 호소한다.  

  '생강'에서 모든 고통은 육체에 잔인하게 각인된다. 그렇게 되어,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어쩔 수 없이 고통은 현상되는 순간, 우리에게 바로 그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  '생강'의 후반으로 갈수록 기억한다'는 건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선'은 끊임없이 다락방에 숨은 아버지에게 그가 한 일이 기록된 신문 기사를 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스크랩한다. 

  당신은 장물이었다. 담벼락에 숨겨둔 스티커 쎄트 처럼, 내가 직접 훔친 것은 아니지만 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께림칙한 장물이었다. (...) 당신을 잊고 싶었다. 무시하고 외면하고 아주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잊을 만하면 신문에 당신의 이름이 실릴 때나 연례행사처럼 미용실을 찾아오는 기자들을 마주할 때면, 그제야 그들이 지목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렇게 당신은 유령이 되었다. 다락방의 유령.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가끔씩 자신의 존재를 어떤 신호나 징후로 보여주는, 한밤중에 다락 바닥에 덧댄 나무합판을 들썩이는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당신은 다락방의 유령이었다. (P.255) 

   기억하는 건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더이상의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다.  

  낯선 남자는 고문 받을 때 자신이 허위 진술한 대가로 희생당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세상에 '붉은 방'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량한 가족이었지만 결국은 모두가 정권유지를 위해 희생당해 버린 가족의 이야기를.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라디오 방송으로 자신의 육체에 각인해 놓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들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어느날 미용실을 찾아온 다른 낯선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잘못된 과거를 그냥 숨겨두고 묻어두면, 언젠가는 그게 다시 유령처럼 튀어나와서 똑같은 과올르 저지르게 되어있거든. 난들 그 때의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니? 내가 내뱉은 이름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만 했던 사람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인걸. 그러니까 역사는 말이야, 그런 과거의 유령들 때문에... 그래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예전에 안이 나를 도왔던 것처럼." (P.254)  

  '선'은 이 남자의 이야기를, '낯선 남자'의 이야기를, '안'의 이야기를 듣고 모으고 또다시 우리에게 들려준다. 다시는 이러한 어둠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선'이 지금 시대의 우리를 대표하는 존재라면 이로써 천운영이 왜 하필 지금 그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고통스런 경험을 하게 만드는가는 보다 분명해진다. 그건 비단 그 '괴물'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운영이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바라보게 하는 건, 그 괴물의 내면이 아니라 사실은 그 괴물을 탄생시켰고 활개치게 만들었던 그 '시대' 자체인 것이다.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였는지, 그것이 간직한 어둠이 얼마나 깊었는지 또한 얼마나 편협한 눈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들을 희생시켰는지 생생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왜? 인용한 한 남자의 말에 잘 나와있듯이, 또 다시 그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시절이 어떠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처럼 붙어있는 마지막 부분은 더더욱 우리가 기억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슬금 슬금 그 괴물이 다시금 나오려고 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뭣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 또한 분명하게 그 괴물들이 날뛰었던 시대로 역행하고 있다는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소설에서 '생강'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은 '선'이 미용실의 점심 시간 우연히 엿듣게된 동료들의 대화에서이다. 그 중 한 여자가 김치를 먹다가 생강을 씹었다고 말한다. 어쩌다 씹게 되는 생강의 맛... 행여 당신이 이 소설을 읽게된다면 그렇게 이 소설 역시도 당신이 우연히 씹게된 생강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생강은 모든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는 재료중의 하나다. 사실 우리가 그 맛을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매일 어디서고 우리는 생강을 삼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단단히 결부된 그 어둠의 역사에 대한 은유로도 될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삼키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그 맛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생강이 아주 잘게 썰어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의 역사가 생강의 맛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맛을 잘 못 느끼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 우리 전에 미리 그 생강을 덩어리째 삼키고 잘게 빻아놓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 또한  다시금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 스스로 생강을 덩어리째 삼켜왔던 사람들 덕분이라고... 때문에 더더욱 비록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혐오나 공포를 무릎쓰고서라도 이 소설을 삼킬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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