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방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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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비밀과 거짓말’

  

  이것은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말 만큼 할런 코벤의 작품 세계를 정의 내려 주는 말도 또 없을 듯하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작 ‘아들의 방(Hold Tight)'의 1장엔 바로 그러한 할런 코벤이 주조하는 작품 세계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 그 세계에서 영위되는 일상이란 겉으로 보면 참으로 안정된 것 같지만 실상은 소설에도 나오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언제 어느 때 허물어져 버릴지 모를 허약한 일상이며 그래서 더욱 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이 불안은 단순히 그 일상이 외부의 공격에 훤하게 노출되어 있어서 야기되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노출되어 있더라도 적의 접근을 알 수 있으면 그다지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다가오는 자가 나의 적인지 이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말도 있듯이, 내게 다가오는 자의 그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과연 예수의 말대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웃은 칸트적 의미의 ’사물‘이다. 그 사물은 내 주체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자체로 내 존재를 한계 짓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로 내게 포섭될 수 없는 내 인지의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그것을 ’트라우마‘로 여긴다. 즉 그 사물은 내게 일종의 상처인 것이다. 이웃이라는 타인은 그런 존재다. 칸트의 사물이고 프로이드의 트라우마다. 사르트르에게는 내 실존을 위협하는 방해꾼이었다. 코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한다. 코벤에게 있어서 ’이웃‘ 또한 전적으로 포용할 수만은 없는 어떤 음험한 것으로 남는다.

 

   더구나 코벤에겐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거짓말‘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다 안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어느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로 돌변함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은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사실상 이러한 돌변 또한 그 내부에 불안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건 간단한 이치다. 타인 내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우리들은 행여나 있을지도 모를 예측 불허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리의 진심을 위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건 생존을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기도 하다. 우리 역시도 그런 전략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타인의 비밀이 우리의 거짓말을 유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비밀‘과 ’위장‘은 타인의 속마음을 내 속마음처럼 알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부득불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건 하물며 자신이 낳고 키워온 아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즉 코벤에게 있어 이웃이 더욱 음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그 비밀을 안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비밀을 더욱 알 수 없게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코벤은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거짓말 즉 ’위장‘이라는 전략을 자주 쓰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대표적인 것이 범죄자 내시가 살해한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이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시체를 전혀 다른 존재로 위장하거나 그가 하지 않았던 비행의 흔적을 거짓으로 꾸며놓는 것이다. 이 내시의 위장은 내시라는 존재 자체가 사회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 ’클럽 재규어‘(즉 내시가 절대적 외부적 존재로서의 이웃을 개인화한 상징이라면 클럽 재규어는 그것을 사회화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역시도 똑같이 취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코벤은 작품에다 적극적으로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는 등장인물들을 집어넣음으로서 우리가 가진 이웃을 음험한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욱 확실시 한다. 그런데 이러한 ’거짓말‘의 전략은 사실 또 어떻게 보면 의심의 증거만이 아니라 희망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돌‘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인식을 하고 생각을 하는 나와 동등한 ’주체‘라는 자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 타자들의 행위 때문에 나만의 일방적 공격이 아니라 둘이서 함께 하는 게임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을 여실히 하게 된다. 비밀만이 아니라 여기에 거짓말이 더해짐으로 인해 이제 우리의 관계는 게임으로 전환된다. 놀랍게도 코벤 역시 정확히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소설 자체에서 드러난다. 게임 이론의 가장 대표적 이론인 수인의 딜레마(prisoner s dilemma)를 만든 학자인 ’내쉬‘와 이 소설의 범죄자이자 가장 거짓말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자인 ’내시‘가 그 이름에서 거의 똑같다는 것에서...
 

 

 

 

 

  그렇게 코벤은 제안한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고. 그것이 어쩌면 이 불안으로 점철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단 게임으로 바라볼 경우 게임의 참가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다 동등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권력 효과가 미치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2장에서 티아와 마이크 부부는 아들의 컴퓨터에다 해킹 프로그램을 깐다. 아들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일이지만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냥 감행한다. 하지만 결국 그 행위가 불행을 불러온다. 이런 전개를 통하여 코벤은 간단히 말해서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지나친 행위였고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그렇게 ‘지배자’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소설에서 마이크는 아들 애덤에게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니 자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즉 티아와 마이크는 아들을 오로지 그저 수동적이기만 한 ’사물‘로 대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때문에 코벤은 이러한 아들을 나와 동등한 그리고 대등한 참가자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관계를 게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든다. 앞서도 말했듯 티아와 마이크가 궁극적으로 불행을 초래하게 된 것은 지켜야 할 것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워 그 남용을 정당화했다. 해서 가져온 것은 가족 전체가 극심한 위험 속으로 빠져 들게 된 것 뿐이었다. 하마터면 자녀들의 목숨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이로써 코벤은 지켜져야 할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또한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볼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 즉 게임에는 각 참가자는 모두 동등하다는 것 말고 또 하나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게임의 규칙은 무조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지려면 공정해야 하고 그 공정은 오로지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으로만 보장받는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승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화목과 합의를 목적으로 했던 게임은 다시금 혼란 속으로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참가자든 게임의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은 필수이며 그것은 자신이 승리할 경우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바로 이 게임의 규칙을 우리는 ’관용‘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타자도 나와 동등한 존재이며 똑같이 공정한 게임을 위해 규칙을 지킬 것을 전제하는 것, 이것이다. 그는 이 게임의 규칙으로써의 ’관용‘의 중요성을 작품 곳곳에서 보여준다. 특히나 마이크의 이웃인 ’로리안‘이나 내시를 추적하는 ’뮤즈‘의 에피소드가 그렇고 결국은 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마는 ’매리언‘의 에피소드는 이를 더욱 강조한다. 즉, 할런 코벤의 이번 소설 ’아들의 방‘은 코벤이 독자에게 건네는 하나의 진지한 제안이다. 비밀과 거짓말로 영원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래도 이 세상을 제대로 헤쳐 나가기 위하여 필요한 제안 말이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는!  앞에서 보듯 그것은 하물며 전적인 애정을 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가족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원제인 ‘Hold Tight’도 주제(주제에는 오히려 ‘아들의 방’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아들의 방’은 절대적으로 타자가 자리 잡은 공간 자체를 상징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기보다는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코벤이 제안하는 일종의 태도 같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책을 읽고 나면 이 제목 자체가 어쩐지 비관적 전망 끝에 나온 자포자기식의 체념적 진술로도 느껴짐을 부정할 수 없다. 한 편으로 할런 코벤의 ’아들의 방‘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 비관적 시선을 던지는 소설이며 그러한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궤도 위의 롤러코스터처럼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체념이 짙게 깔린 소설이기도 한 게 사실이다. 여기의 ‘Hold Tight’는 사실 가족을 단단히 ‘붙들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Show Must Go On’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처럼 붙은 마지막 장면이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Hold Tight’는 꽤나 반어적으로도 읽힌다. 앞서도 들었지만 주인공 티아와 마이크 부부가 아들의 비밀을 캐기 위해 아들의 컴퓨터에 해킹 시스템을 깔아놓는 것이 특히 그렇다. 여기서 보여준 부모의 사랑으로 위장된 집착 역시 ‘Hold Tight’ 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이러고 보면 참으로 많은 해석들이 가능한 ‘아들의 방’ 이라는 이 소설 자체가 독자들에게 하나의 게임을 권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다성악적(Polyphonic)’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목소리들 또한 소설의 후반까지 도대체 어떻게 서로 이어질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각기 별개의 궤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즉 코벤은 제목이든 문장이든 구성이든 자신이 이 소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여 소설 전체를 하나의 게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떤가? 한 번 코벤이 제안하는 이 진지한 게임에 한 번 참여해 보는 것은? 특히나 당신이 만일 솔로라면 이 게임을 끝냈을 때 지금 당신의 처지를 그지없이 다행하게 여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솔로들의 정신 무장을 위한 하나의 경전이 될 수도 있다. 코벤이 이 소설을 통해 강조하는 것의 다른 하나는 분명 이러한 사회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는 것인가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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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독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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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죽는다. 그에겐 미모에다 능력까지 겸비한 아내가 있다. 남자의 사인은 비소에 의한 중독사. 한 마디로 독살. 그는 그 날 자신의 사촌과 저녁을 먹었고 밤에는 지금은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전날 먹은 비소로 인해 죽었다. 수사가 벌여졌지만 그가 그 날 어디서 어떻게 비소를 먹었는지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아내가 비소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녀가 남편에게 비소를 먹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녀가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기에 그 살해 동기가 충분하다는 점과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 중 유일하게 비소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으로 인해 검찰은 그녀를 남편 살인죄로 기소한다. 그렇게 열 두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그녀의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법정이 열리게 되고 바로 그 법정에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판사석 위에는 선홍색 장미가 놓여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핏방울 튄 듯이 보였다.(p.7)

 이 소설의 주제마저 함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의미심장하면서도 매혹적인 이 문장과 더불어... 

 이것이 1930년에 도로시 세이어스가 발표한 이 소설 '맹독(STRONG POISON)'을 이끌어가는 주가 되는 사건의 개요이다. 그러니까 세이어스의 대표적 캐릭터, 명탐정 피터 윔지 경이 풀어야 할 미스터리 인 것이다. 과연 피해자는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독을 먹게 되었나 말이다. 안 그래도 미스터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 그토록 수사를 집중했지만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난제인 만큼 그 사실 만으로도 윔지의 가슴은 벌렁거릴 판이지만 하지만 다른 쪽에서 그의 가슴을 더더욱 뛰게 만들고 있었으니 그게 바로 지금 살인 혐의를 받아 법정에 서 있는 여인, 헤리엇 베인이다. '사랑이란 그 찾아옴이 예측불가능하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말한 이도 있다지만 정말 사랑은 그러한 것인지? 피터 윔지는 전혀 예기치 않게도 법정에 선 그녀를 보고 그만 한 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사랑이란 묘약은 장님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는 말 처럼 그렇게 큐피드의 화살을 맞아버린 윔지는 덮어놓고 그녀의 결백을 믿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명탐정적 재능을 발휘하여 오로지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으로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을 입증하려 한다. 호사가적 취미의 미스터리 풀이가 이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절박한 수단이 된 것이다.  

 소설 '맹독'은 마트에서 흔히 보는 '1+1'에 또 하나를 더 '+1'한 소설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하나를 가지고 세가지 측면에서 즐길 수 있다. 한 파인트에 세가지 종류의 각기 다른 맛을 가지는 아이스크림을 섞어 담아 떠먹는 맛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소설 '맹독'을 즐기는 코스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A 코스... 

  그 첫째는 순수한 미스터리로 즐기는 코스이다. 소설은 초반부터 판사의 말을 통하여 사건의 전모를 세세하게 밝혀가며 정리해 준다. 하지만 그렇게 세세하게 밝혀진 피해자의 그 날 하루 경로를 아무리 따져보아도 도대체 어디서 그가 어떻게 독을 먹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피터 윔지에게 이것은 '나인 테일러스' 못지 않는 난제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것을 다음 재판이 열리게 될 때까지 남겨진 시간인 '한 달'안에 풀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자존심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일생동안 유일하게 느꼈던 운명적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전의도 결의도 그 어느 윔지의 시리즈 보다 불타오르고 굳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윔지를 몰아붙일 정도로 난제이지만 세이어스는 G.K 체스터튼이 주도한 추리 클럽의 창립 맴버 답게 아무리 난제라고 하여도 아무런 반칙 없이 추리 게임을 공정하게 이끌어 나간다. 단서는 빈틈없이 주어지며 그 모든 건 논리적으로 잘 따지기만 하면 하나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절박한 윔지를 도와 난제를 해결하는 순수 미스터리적 즐거움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B 코스... 

  미스터리를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이 소설을 하나의 로맨스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운명적 사랑을 느낀 한 남자의 절절한 애정 고백기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언제나 귀족(아시다시피 그는 공작 가문 출신이다.)적 매너를 유지하며 매사에 강한 자존심과 쿨한 면모를 보여주던 윔지가 이 소설에서 만큼은 쉽사리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해리엇 베인 때문에 전전긍긍해 하고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오로지 애정만을 애걸복걸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참으로 귀엽지 않을 수 없다.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차이이든 이미 한 번 결혼한 몸에다 살인 누명까지 쓰고 있는 그래서 열악하고 편견 마저 얻기 쉬운 사회적 신분에 처해 있는 그녀의 처지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투우장의 숫소 처럼 사랑만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그의 모습은 윔지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삼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한 남자의 순정이 담긴 로맨스로 즐길 수도 있다. 

 

 C 코스... 

  사실은 이 코스가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말하려는 핵심이 될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스는 이런 면에서 이 작가를 그저 미스터리 작가로만 묶어두는 것에 강한 반발심을 느끼게 만든다. 때로 어떤 면에서는 순문학 보다 더 높은 경지를 보여주니까 말이다. 바로 이 '맹독'의 C 코스가 그런 경우이다. 이 소설은 20년대 본격적으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잉여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잉여 여성'이란 영국 사회에서 1차 대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남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남성의 수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여성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소설에서도 이 '잉여 여성'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나온다. 

 강철금고 안에 있는 개인 기록을 보았다면 이 여자들이 모두 세간에서는 냉혹하게도 '잉여'라고 표현하는 계층의 여성들임을 알았으리라 (P.81) 

  당시만 해도 영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길이란 오로지 결혼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는 여성들에게 사회는 이렇게 경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잉여 여성이란 그 뜻에 내재된 '쓸모없는 여성'이란 의미 그대로 경멸적 시선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도로시 세이어스의 '맹독'은 그렇게 경멸당하고 천대받았던 여성들을 위해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남성 보다 더 유용한 존재들이다.'라고 외치면서 떨치고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인 작품이다. 말하자면 '맹독'은 페미니즘이 짙게 배인 작품이다. C 코스는 바로 이러한 페미니즘적 독해이다. 이렇게 읽으면 무엇보다 판사의 기다란 독백으로만 채워지는 첫 부분이 아주 흥미롭게 된다. 

 

  왜 도로시 세이어스는 아무리 사건 정황을 정리해준다고 하지만 오로지 혼자 떠들기만 하는 기나긴 판사의 독백으로 시작한 것일까? 여기서 앞서 인용했던 소설의 첫 문장은 그 이유를 짐작하는데 정말 중요해진다. 판사석 위에 놓여진 선홍색 장미. 판사의 검은색 법복과 선명히 대비되는 붉은 핏방울. 바로 이 이미지 자체가 판사의 검은 법복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남성 사회로 부터 경멸당하고 상처를 입은 붉은 핏방울의 여성을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그 기나긴 판사의 독백은 사실 여성의 틈입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그 자체로 단일하고도 굳건한 독재적 남성 사회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 남성의 법정 안에서 유일한 여성인 해리엇 베인은 살인죄라는 낙인을 받아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이어스는 소설의 초반 여성 앞에 압도적으로 군림하는 남성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 뒤 그것을 차례로 허물어 감으로써 오히려 남성 보다 여성이 더 유용하며 그렇게 대등한 존재임을 결국 드러내려 한다. 때문에 사건 해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언제나 윔지가 아니라 여성들인 것이다.(스포일러상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미스터리 작가가 아니라 순문학적 작가로서의 세이어스가 빛을 발하는 곳은 유령과 대화하는 '강신회' 장면이다. 세이어스는 그 강신회 장면을 초반의 혼자 떠드는 판사 장면과 일부러 극명하게 대비되도록 연출한다. 왜냐하면 강신회 장면이 결정적으로 판사가 단죄한 유죄를 정면으로 반박가능한 증거를 가지도록 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강신회 장면은 오로지 여성으로 이루어지며 윔지가 시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 여성 스스로 찾아낸 방법이기도 하다. 거기다 말을 하는 사람의 수도 판사의 하나에서 강신회의 다수로 차이나게 하여 홀로 독재적인 남성성과 대화 가능한 다수성의 여성성을 대조시킨다. 세이어스가 이렇게 공을 들여가며 판사의 독백 장면과 강신회 장면을 연출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여성들이 남성들 만큼 유용하며 대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말해 판사는 진실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지만 강신회는 그 진실을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 전체적으로 보아도 진실을 찾고 드러내는 쪽은 언제나 여성들이다. 이렇게 '맹독'은 그야말로 페미니즘적 소설이며 이렇게 C 코스의 페미니즘적 입장으로 읽으면 더더욱 세이어스가 소설 자체에 공들인 세부와 그 깊이가 드러나게 된다. 

  한 작품으로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다면 독자로서는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도로시 세이어스가 독자를 위해 마련한 세가지 코스에서 당신은 어떤 코스를 더 사랑하게 될까 지금은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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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1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윔지 시리즈 앞권들도 읽어보셨나요? 좋은가요?
제가 '증인이 너무 많다'를 계속 살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거든요.
오호라,,, 윔지 경이 헤리엇에게 애걸복걸한다는 부분만으로도 홀딱 넘어가겠는걸요.
흠, 저는 B 코스 도전하게 되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시 다아시 경과 착각했어요. 시험 일정 끝나면, 읽어봐야겠어요. 아니다,
중간 중간 머리를 쉬어 주어야 공부도 되니까,, 변명을 중얼중얼중얼...... 헤헤.

오드득 2011-10-19 01:12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께서 댓글을! 일부러 이렇게 달아주셨는데 이제야 확인하게 되다니 흑 ㅠ ㅠ 앞으론 서재에 더더욱 자주 들어와야겠어요.
마녀고양이님께서 B코스를 좋아하신다면 '증인이 너무 많다'도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윔지의 여동생 메리와 윔지의 절친 파커 경감의 알콩달콩한 애정행각을 보실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 결말은 '맹독'에서 이루어지죠. 시험 준비중이시군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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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하게도 9기에 이어 10기도 소설 부분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하게 된 신간을 살펴보는 일들은 평가단 활동 가운데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또 계속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럼 10기의 처음 시작으로서 제가 주목하는 신간들을 하나씩 올려보겠습니다.

 

       

 저로 하여금 다시금 10기 신간평가단에 도전하도록 그 동기를 가장 충동질 시켜 주었던 것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신간평가단 도서로 받아서 리뷰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다시 10기에 도전하게 된 것이지요. SF계의 양대산맥이라는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모두 휩쓴, SF 독서계에서 가장 핫 이슈 아이템으로 떠올랐던 파올로 바치갈루피의 '와인드업 걸'을 읽기 위해서 말입니다. '와인드업 걸'은 일종의 바이오 펑크 장르입니다. 제목의 '와인드업 걸'이란 뭐랄까요 지금의 '섹스돌'의 미래형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러한 쾌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적 노예 휴머노이드 같은 것입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여기에는 생체공학을 바탕으로 한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장르가 바이오 펑크이지요. 유전자 공학을 통해 생산되는 식량을 무기로 한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위협에 맞서 주권을 지켜가려는 미래의 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방대한 이야기는 이미 장르소설로는 이례적으로 타임지에 의해 2009년 최고의 베스트 10 중 하나로 선정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가을 꼭 벗해야 할 한 권으로 추천하고 싶군요. 

 

 

 

 존 하트의 데뷔작 '라이어'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굳이 2010년 에드거상 최우수 소설상 이라는 문구가 없어도 이 소설을 읽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라이어'에서 존 하트가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란 존재와 그 아래에서 자녀가 성장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순문학적일 정도로 진지한 시선과 높은 성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종종 존 하트를 스릴러 작가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순문학적 작가라고 해야 할지 헛갈릴 때가 있습니다. '라이어'는 그가 내리는 현재 미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대한 사형선고와도 같았습니다. 세번째 작품인 이 소설 역시 비슷한 주제를 천착하고 있는듯이 보여지는데 특히나 그 원인을 더 추적하는 작품인 것 같군요.  제게는 존 하트란 이름 만으로도 꼭 읽어야 할 소설이지만 여러분들에게도 신뢰할만한 작가의 이름중 하나로 기꺼이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파비치의 하자르 사전은 우리나라의 책을 좋아하는 참 많은 사람들을 애태워왔던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절판되었던 이 책을 찾아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책이 다시 발간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저 다시 간행해 준 열린책들에게 큰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이제야 다시금 벗하며 독창적이면서 영감으로 번득이는 그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게 되었네요.

 이 소설에 대해 다른 말이 필요할까요? 

 '꼭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란 말 이외에... 

 

 

 

  

 역시나 다른 말 필요 없습니다. 

 미셀 우엘벡 입니다. 

 무조건 읽어야 합니다. 

 

 

 

 

 

  

 제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을 선택한 건 순전히 제 취향이 아닌 전략적인 고려입니다. 말하자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올려주신 추천 페이퍼를 보았는데 '삼총사'와 '알레프'를 많이들 언급하셨더군요. 그런데 두 책 다 저에게 있는 것들 입니다. 있는 책을 또 다시 신간으로 받을 수는 없어서 어떻게든 하나는 받지 않아 보려고 그 중 가장 많은 분들이 선택한 것을 골랐습니다. 추천 페이퍼에 이런 의도로 추천 신간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적용되는 다수결 원칙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군요. 그저 가급적 같은 책을 받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돈 윈슬로의 작품은 언제가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국내에 출간되었군요. 더구나 닐 캐리 시리즈의 시작이라니 더욱 기대가 됩니다. 돈 윈슬로는 실제 사립탐정으로 일했던 작가이기에 그 리얼리티가 어느 사립탐정 소설 보다도 생생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립탐정물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당연히 놓칠 수 없는 작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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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0-1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 완료했습니다! 첫 미션 수행 고생 많으셨습니다~ 10기에도 잘 부탁드려요!!

오드득 2011-10-19 01:13   좋아요 0 | URL
넵^ ^
 

   바야흐로 올 가을은 아무래도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의 가을이 될 것 같군요. 이미 뮤지컬이 그것도 신성우, 유준상, 엄기준 등 초호화캐스팅으로 공연중인데다가  좀 있으면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로 유명한 폴. W. S 앤더슨이 감독한 '삼총사'도 3D 영화로 나오고 말이죠. 예고편을 보아하니 일종의 '스팀 펑크' 쪽이던데 주인공들 보다 오히려 악역 배우들이 화려해서 관심이 갑니다. 무엇보다 저의 초유의 관심은 팜므파탈의 대명사 '밀레디'를 누가 맡았느냐인데 '레지던트 이블'로 감독과 인연이 깊은 밀라 요요비치가 맡았더군요. 그래서 관심이 더욱 급증되었습니다. 

 

  오우! 드레스 입은 밀라 요요비치도 멋지군요. 팜므파탈로서의 매력이 정말 물씬나는 캐스팅 입니다.

                                                               

  그 외, 그녀를 유혹해서 스파이로 만드는 버킹검 공작 역엔 올랜도 블룸이 리슐리외 추기경엔 '거친녀석들'로 아주 인상적인 악역 연기를 보여준 바 있는 크리스토퍼 왈츠가 맡았더군요. 거의 악역들의 포스가 삼총사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악역 배우들의 연기가 어떤 앙상블을 만들어낼지 지켜보는 것도 이 영화에 대한 좋은 감상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악역들이 화려해서 정작 주인공 역할을 누가 맡았는지는 관심 밖이 되네요. ㅡ ㅡ) 

 

   근데 왜 이렇게 갑자기 삼총사가 뮤지컬과 영화 양쪽으로 비슷한 시기에 상륙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삼총사의 공습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원작인 뒤마의 '삼총사' 역시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제게는 쥘 베른 선집의 번역가로 더 유명하지만...) 김석희님의 새로운 완역본으로 올가을에 나오게 되었으니까요. 

 

 

 

 

   유년시절 절 가장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소설 중의 하나가 바로 '삼총사' 였습니다. 소설 뿐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까지 가세해서 더욱 더 삼총사의 매력에 헤어나올 수 없었죠. 그래서 당연히 이렇게 각종 컨텐츠로 삼총사가 마구 나오는 것은 저에겐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일단 저는 삼총사에 대한 '팬심'이 있으니까요.  저는 이미 뒤마의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2002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만 삼총사의 새로운 완역본이라면, 그것도 쥘 베른 선집에서 신뢰감을 넣어준 김석희님의 번역이고 보면 소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책이 저에게 왔습니다. 이렇게... 

  두둥! 외관이 2002년에 나온 하얀색 양장본 보다 더욱 근사해졌습니다. 

  이번엔 각도를 달리하여 모아서 찍어봅니다. 흐음, 확실히 전시효과는 뛰어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2002년에 나온 민음사 판을 한번 봐 볼까요? 

 이게 2002년 뒤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민음사에서 나온 판본입니다. 번역자는 이규현님으로 미셀 세르의 '헤르메스'와 미셀 푸코의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를 번역하신 분이죠. 불문학 전공자이시구요. 후기를 보면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생각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했다고 합니다. 시공사 판은 프랑스 왕조의 문양을 사용한 반면, 민음사 판은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와 꽃을 들고 있는 총사'를 표지에 사용했습니다. 민음사 판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양장본으로 세권으로 분권되어 나왔습니다. 이번에 나온 시공사 판은 두 권 입니다. 가격은 당시 민음사 본이 권당 만원이었고 이번 시공사 판은 16,000원이니 한 2천원 정도 민음사 판이 더 저렴합니다. 하지만 2002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시공사 판이 더 저렴하지 않나 생각되는군요. 내친김에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같이 한 번 찍어 올려 봅니다. 

  

  이렇게 같이 죽 놓고보면 민음사 판도 전시효과가 상당합니다. 자아, 이제 외관을 확인했으니 정작 2002년의 민음사 판과 지금 나온 시공사 판이 어떻게 다른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LET'S FIGHT !! 

 

 

 먼저 아무래도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이 번역일테니 두 판본의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되도록 공정하게 하기 위하여 그냥 가장 첫 시작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프랑스 판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아래는 같은 부분의 김석희님의 번역입니다. 

Il y a un an à peu près, qu'en faisant à la Bibliothèque royale des recherches pour mon histoire de Louis XIV, je tombai par hasard sur les Mémoires de M. d'Artagnan, imprimés — comme la plus grande partie des ouvrages de cette époque, où les auteurs tenaient à dire la vérité sans aller faire un tour plus ou moins long à la Bastille — à Amsterdam, chez Pierre Rouge. Le titre me séduisit: je les emportai chez moi, avec la permission de M. le conservateur; bien entendu, je les dévorai.

 

 

   1년쯤 전에 루이 14세의 전기를 쓰려고 왕립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하다가 <다르타냥 씨의 회고록>이란 책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암스테르담에 있는 피에르 루주 서점에서 출간된 책이었다. 당시만 해도 진실을 말했다가는 감옥에 가는 때여서, 이런 불운을 피하고 싶은 저자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저서를 펴냈다. 제목에 마음이 끌린 나는 도서관 사서의 허락을 받고 그 책을 집으로 가져와 한달음에 읽었다.

 

 같은 부분 이규현님의 번역입니다. 

 일 년 쯤 전에 나는 왕립도서관에서 루이 14세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르타냥 씨의 회상'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피에르 루주 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당시에는 대부분의 책들이 이런 곳에서 출판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릎쓰고 진실을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제목에 끌린 나는 집으로 책을 가져와 - 물론 도서관 사서의 허가를 받고 -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번역 스타일이 확연히 두드러지는 것 같군요. 대체적으로 김석희님이 가독성을 고려한 의역 스타일을 이규현님은 되도록 원문에 충실한 직역 스타일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가독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일단은 김석희님의 번역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하나 더 비교해 볼까요? 이번에는 가장 마지막 부분을 그러니까 어린 시절 절 가장 눈물짓게 만들었던 다르타냥과 삼총사가 헤어지는 부분을 비교해 보죠. 

 김석희님의 번역입니다. 

 아토스는 펜을 들고 사령장에 다르타냥의 이름을 적어서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나에게는 친구가 없겠군요. 아! 이제 남은 것은 씁쓸한 추억뿐..." 

다르타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네는 아직 젊어." 아토스가 말했다. "자네의 씁쓸한 추억도 세월이 흐르면 달콤한 추억으로 바뀔 거야." 

 

 이번엔 같은 부분 이규현님의 번역입니다. 

 

그가 펜을 들었다. 사령장에 다르타냥의 이름을 써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이제 나에게는 친구가 없는 거로군요." 젊은이가 말했다. "아! 이제 남은 것은 씁쓸한 추억뿐..."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볼을 따라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네는 아직 젊어. 젊고말고." 아토스가 대답했다. "자네의 씁쓸한 추억이 달콤한 추억으로 바뀔 시간은 충분하네!"

 

 어릴 때의 감흥이 아직도 남은 것인지 지금 읽어도 왠지 저려오네요. 아무튼 여기서도 번역 스타일은 확연히 차이나죠? 여러분은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번역 스타일도 그렇지만 또 다른 점에서 시공사 판과 민음사 판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번 시공사 판에는 삽화가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민음사 판에는 삽화가 전혀 실려있지 않습니다. 대신 앞부분에 따로 인물 소개 형식으로 삽화가 조금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적인 부분과 관련해서 삽화가 없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삼총사를 보아온 저로서는 상당히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삽화 역시도 저에게 엄연한 추억의 대상이기 때문이죠. 거기다 삽화라는 것이 단순히 내용에 첨부되는 것이 아닌 그 내용을 전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함께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런 고전 클래식에서 삽화가 없는 것은 정말 아쉽기만 합니다. 그럼 여기서 시공사 판에 실린 삽화 하나를 올려보겠습니다. 

 

 삽화의 퀄리티가 상당합니다. 모리스 르루아르의 작품으로 알고보니 당시에 꽤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더군요. 

 

                                               

 여기에 또 하나 차이가 있는 것이 바로 '각주'입니다. 삼총사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할 필요도 있고 아무래도 낯선 지명이나 인명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각주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요. 민음사 판은 그걸 간단히 삽입한 반면 시공사 판은 책 말미에 따로 자세한 각주를 정리해 두었더군요. 이를테면, 민음사 판은 페이지 17에 나오는 도시 '라로셀'에 관하여 각주로 '대서양에 면한 항구도시로 신교도가 세력을 떨쳤던 곳으로 유명하다 - 옮긴이' 이렇게 처리한 반면 시공사 판은 맨 뒤에 따로이 이렇게 자세히 써 두었습니다. 

 

   저기 13 이 있는 각주가 바로 라로셀에 대한 것입니다. 앞의 13은 바로 그 것이 나와있는 페이지를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다른 각주와는 달리 일일이 페이지 수를 명기해 놓았다는 점에서 출판사의 배려가 엿보이는 듯 합니다. 아무래도 말미에 나와있으면 일일이 찾기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죠. 그런데 저렇게 페이지 수를 표기해 놓으면 그 수고는 많이 덜어질 것입니다. 각주의 내용이 분량상 길어서 맨 뒤로 따로이 정리할 수 밖에 없었던 형편상 그나마 독자의 수고를 줄여주려 배려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각주가 꽤 상세해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덤으로 역자 후기와도 같은 작품 해설에 있어서도 차이가 보이더군요. 김석희님은 뒤마의 소개를 문학적 스타일로 풀어간 반면 이규현님은 '헤르메스' 같은 인문서를 번역하신 분 답게 논문식으로 풀어가셨더군요. 뒤마의 일대기에서는 김석희님이 훨씬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삼총사의 전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이규현님의 해설이 좋았습니다.(무엇보다 왜 다르타냥이 있는데도 제목이 굳이 삼총사였을까는 저도 의문이었는데 이규현님 해설 덕분으로 조금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뒤마에 관해서라면 그래도 김석희님 보다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요. 일단 뒤마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흑인 노예를 건드려 낳았다는 건 유명한 얘기입니다만 그런데 뒤마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인 후작의 이름을 쓰지 않았었죠. 그것에 대해서 이규현님은 단순히 아버지와의 불화로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 반면 김석희님은 후작이 다시 다른 여자와 재혼을 결심하는 바람에 아들로서 부친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고자 스스로 포기했다고 보다 상세히 함으로써 그 인간적 고뇌까지 전해지도록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더군요. 

 

 이렇게 이번에 나온 시공사 판과 2002년에 나온 민음사 판을 비교해 보았는데요. 번역 스타일이나 삽화의 차용 그리고 각주의 처리 등에 있어서 두 판본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판본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아무튼 뒤마를 좋아하고 삼총사를 많이 즐겨온 저로서는 이렇게 삼총사로 풍성한 가을이 더욱 기대되지 않을 수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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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1-10-01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규현 님의 번역도 읽고 싶네요!
그래도 제 생애 최고의 삼총사 이야기는... 멍멍기사! :)

오드득 2011-10-02 00:14   좋아요 0 | URL
앗! 저랑 통하시는데요.
저도 그 애니를 정말 사랑합니다.^ ^

2011-10-01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2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10-0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뭐 이쯤되면 헤르메스님 시공사 밀어주시는 게 역력한데요?ㅎ
표지 장정도 시공사가 훨씬 좋아 보입니다.
글치 않아도 문득 이 책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그렇다고 당장 읽겠다는 건
아니고.ㅋ) 이렇게 꼼꼼하게 비교를 해 주시니 감읍할 다름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오드득 2011-10-02 00:25   좋아요 0 | URL
아, 제 개인적인 취향이 너무 드러났나요? ^ ^;
아무래도 제가 두 판본을 다 가지고 있다보니 비교를 한 번 해보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오늘 들어와보고 이 페이퍼가 이리도 관심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도 있습니다.
뭔가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오히려 더 기쁘네요^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adf657 2011-10-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공사에서 삼총사 속편 20년후와 브라즈론 자작(철가면)도 내주면 좋겠습니다.
김석희 선생님이 나마지 속편도 변역해주실지^^
저는 초등학생일부터 삼총사 1부만 지겹도록 읽어왔습니다. 이제 삼총사 속편도 완역본으로 정말 보고 싶습니다.

오드득 2011-10-02 00:27   좋아요 0 | URL
저도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조르주 페렉의 'W 또는 유년의 기억'을 읽어보니 거기에도 삼총사 속편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더군요. 그것도 구구절절. 삼총사가 어떻게 최후를 맞는지도 페렉이 써 놓았던데 그것을 읽으며 속편을 아직도 읽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제발 이번에 삼총사가 제대로 성공해서 꼭 속편도 완역본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염원!

노이에자이트 2011-10-01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마 부자는 둘 다 유명한 소설가죠.제게 뒤마 페르 전기가 있어요.뒤마 피스가 사생아여서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하네요.

오드득 2011-10-02 00:31   좋아요 0 | URL
아, 뒤마의 아버지 역시 소설가였군요. 김석희님의 해설에는 아주 능력있는 군인으로만 나와있어서 몰랐던 사실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10-02 21:26   좋아요 0 | URL
하하하...3대를 파악하려니 꼬였네요.소설가 뒤마 부자란 <삼총사>와<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뒤마와 <춘희>를 쓴 그의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전자를 뒤마 페르, 후자를 뒤마 피스라고 합니다.이름이 똑같거든요.

헤르메스 님이 말하는 능력있는 군인은 뒤마 페르의 아버지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뒤마 페르가 아주 어렸을 때 사망합니다.작가는 아니었어요.뒤마 페르는 이야기솜씨가 좋은 어머니 영향으로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하네요.

정리하면 뒤마 페르의 아버지는 군인이고 아들은 작가입니다.이 뒤마 페르의 아들이 사생아라는 것이죠.

저는 김석희 씨 번역본은 없는데 그 책의 해설은 <춘희>의 작가 뒤마 피스 이야기가 있는지 확인해서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드득 2011-10-02 23:38   좋아요 0 | URL
아, 그게 뒤마와 그 아들 얘기였군요. 저는 뒤마의 아버지 얘기로 오해를^ ^;
김석희님의 해설에도 '춘희'의 뒤마 피스가 바로 뒤마의 사생아중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뒤마는 원래 배우자, 여배우인 이다 페리에 외에도 다른 여인들과 교제하여 네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하는데 양재사였던 마리-로르-카트린 라베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춘희를 쓴 뒤마 피스라고 하는군요. 이름은 아버지를 따랐고 때문에 같은 소설가와 극작가의 길을 걸은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아버지)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아들)로 불리어졌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만 나와있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1-10-03 17:37   좋아요 0 | URL
뒤마 피스에 대해선 그 정도 서술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제가 읽은 뒤마 전기는 이 부자 간 이야기가 상당히 자세해요.뒤마 페르와 빅토르 위고,오노레 드 발자크 간의 일화도 재밌는 게 많네요.하지만 45년 전 것이고 그 뒤로는 안 나오는 책이라 시중에서 구할 순 없죠.

노다웃 2011-10-06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의 비교 잘 읽었습니다~
시공사 삼총사 보자마자 확 들어왔는데 꼼꼼한 비교까지!
양장본이 너무 예뻐서 조만간 데려오려고요. 저도 어렸을 적 달타냥~무지 좋아했었거든요.
참 영화도 기대됩니다. 밀라 요요비치가 나오니깐요 후후훗


오드득 2011-10-07 22:4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달타냥을 좋아하신다면 이번의 삼총사로 또 한번 즐거운 추억에 빠져드실 수 있으실듯 합니다.
저 역시 밀라 요요비치 때문에 영화를 무척 기다리고 있답니다.^ ^

뽀로롱 2011-10-0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정말 알찬 정보 감사드려요 ^^
삼총사가 이번에 물량공세를 하길래 관심이 있었는데 콕콕 찝어주셔서 정말 도움이 됐어요.
저는 읽기 좋고 표지도 이쁜녀석이 끌리네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

오드득 2011-10-10 23:56   좋아요 0 | URL
삼총사의 팬으로서 당연한거죠.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

콜록콜록 2011-10-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민음사 판 삼총사가 반값할인을 하기에 좋은 기회다 싶어 구매하려다 헤르메스님이 포스트하신 걸 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전 시공사 판 번역이 마음에 드네요. 그래서 비싸지만 시공사에서 나온 삼총사로 질렀습니다. ^^
민음사에서도 얼마전 완역본이 새로 나왔는데 번역하신 분이 같으니 아마도 번역의 느낌은 비슷하겠지요...게다가 표지가 안습이에요...--;;
아무튼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m(__)m

오드득 2011-10-19 01:13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오히려 기쁘네요. 즐거운 독서되시길 바랍니다.^ ^
 
기쁜 우리 젊은날 - Our Joyful Young Day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인연이라는 것은... 

  

 사람과의 인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 작품과의 인연도 그렇게 전조도 없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나보다.  그 날 내가 무슨 연유로 평소에는 거의 보지도 않는 TV를 보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무튼 채널 서핑을 하다 그만 우연히 보게 된 장면에서 누군가 내게 '얼음!'이라고 외친 것 처럼 딱 내 시야가 거기에 고정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한국영화였다. 

 바로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 그것이었다. 

 

 

 주말마다 EBS에서 하는 '한국영화특선' 시간이었다. 영화는 이름만 들어봤지 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내가 본 배창호의 영화는 '고래사냥'이 유일할 것이다. 영화는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진행중이었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중요하지도 않았고. 내가 시야를 고정시키게 된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 아니라 카메라가 인물을 담는 방식 때문이었으니까. 나중에 알아보았는데 '기쁜 우리 젊은 날'은 1987년에 나온 영화라고 한다. 그러니까 6.29선언이 있었던 해다. 영화는 5월 2일 개봉되었다. 그러니까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에 개봉된 것이다. 그 시기를 알고 보니 왜 그렇게 주인공을 맡은 안성기가 영화 내내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는지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그 영화를 안성기는 민주화를 염원하는 우리네 모습으로 짝사랑의 대상인 황신혜는 도래할 민주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무엇보다 두 번의 사산 경험에다 임신중독으로 인해 딸아이만 낳고는 죽어버리는 황신혜로 인해, 그렇게 황신혜에서 새롭게 아이로 바뀌는 것은 다가올 6.29선언 자체를 예언하는 것 처럼도 보여졌다. '아, 배창호는 이렇게 시대적 열망을 영화에 담았던 것이로구나!'  이게 이 영화에 대한 내 처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해 안가는 게 있었다. 단순히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대적 열망을 담아냈다는 것만으로는 포함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영화학자 로빈 우드가 말했던 거기에 속하지 않는 '불균질적 층위'들이 이 영화에 분명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시야를 사로잡았던 장면의 묘사였다. 그리고 그게 다시금 이 영화를 바라보게 된 처음의 단서이기도 했다. 

 

 2. 아버지라는 것은... 

 

 그건 아버지(최불암 분)과 아들(안성기 분)이 만나는 장면이었다.  화면의 톤과 둘러싼 배경 묘사는 이 영화의 연식이 제법 오래되었음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두 배우가 나란히 출연하는 걸 보는 것도 신기하긴 했으나 보다 내 시야를 사로잡은 결정적인 원인은 두 인물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이었다. 흔히 옛날 한국 영화라면 이런 경우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나눠 찍는 분절된 쇼트들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표정과 대사를 강조하고 줄거리를 인지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배창호는 이것을 롱테이크로 담아내고 있었다. 대화 장면이 짧지도 않다. 게다가 그리 극적이지도 않다. 그저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부자간의 대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카메라는 아주 중요한 장면을 찍는다는 듯이 움직임 조차 사려깊게 하려는 듯 그 공간 전체만을 집요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거기서 아들은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고 아버지는 이리저리 공간 속을 활발하게 움직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요즘엔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되서 큰일이라더라." "요즘엔 종합상사가 가장 좋다더라. 너는 거기 들어가라." 의 말을. 아버지의 이 말은 영화에서 자주 반복된다. 안정된 삶을 바라는 아버지의 희구가 느껴진다. 하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흘려버리듯 내뱉는 말들은 그의 이말이 되도록 아들에게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있는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이 이왕이면 어려움 없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과 그래도 왠만하면 자기가 뜻하는 대로 살면 좋겠다는 생각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들 역시도 그랬다. 그저 조용히 앉아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군말없이 '네'하고 대답하고 있지만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극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아들 역시 자신을 위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꿈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단답식의 조용한 대답으로 나오고 있었다. 배창호의 롱테이크는 그것을 잡아내고 있었다. 화면 속에 가로놓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간격과 똑같이 그들이 들어서길 꺼려하는 그 심리적 간격을. 배창호는 바로 그 간격을 그들의 표정과 말투로 서로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사랑'의 영역으로 구현해 놓고 있었다. 그랬다. 이 영화에서는 짝사랑하는 존재인 황신혜 만큼이나 아버지의 비중이 높다. 그것이 이 영화를 애초 생각대로 '민주화 열망의 형상화'라는 주제를 고집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가급적 삼가하고 그저 멀찍이서 조용히 지켜보며 필요할 때 아낌없이 사랑과 위로를 주는 아버지의 존재는 지금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아들이 하는 것과 정확히 닮았다. 카메라는 자주 아들을 위로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는다. 여인에게 처음 마음을 고백했으나 결국 거절당하고 술에 취해 돌아와 드러누운 아들을, 그가 잠든 뒤에도 이부자리를 챙기고 전등을 꺼주는 등 상심한 아들을 보살피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래도록 담는다. 그녀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놀이터에서 혼자 있는 아들을 발견하는 것도 그 아들을 조용히 위로하는 것도 아버지다. 

 

 

   아들의 여인에 대한 사랑이 난항을 겪을 수록 배려와 존중으로 놓여져 있었던 그 간극을 아들은 자꾸만 잘라내지만 그 때도 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서 최대한 아들을 배려하면서 조용히 지켜본다. 언제든 기대어줄 어깨와 다독여줄 손을 가진 채. 이렇게 자주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를 보게 되면 정말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다시한 번 생각하게 된다. 배창호는 정말 한 여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리면서 비록 결실은 맺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그 자체로도 기뻤노라 라는 의미에서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어째서 아들이 그토록 아버지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인지 기묘해진다. 아들이 여인을 처음 만나는 장면은 사실은 아버지가 아들의 맞선을 주선하는 자리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의 착각으로 인해 정작 아버지의 맞선 자리로 바껴져 버리는 장면으로 다시금 반복된다. 그런데 그 뒤 배창호는 홀로 남은 아들이 그 여인과 처음 만나는 순간을 혼자 반복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그 여인을 처음 만나게 된 것도 아버지가 했던 것과 똑같이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 자리로 여인을 인도한 것도 아버지의 모방이었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도,  다시금 배창호가 순서를 재배치 함으로써, 아버지를 모방한 것이 된 것이다. 또한 오래도록 멀리서 지켜보던 아버지의 시선 그대로 아들은 그 여인을 지켜본다. 그렇게 사실 그의 짝사랑이란 다름아닌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의 반복된 형태이기도 하다. 더구나 마지막에 엄마 없이 자라게 된 딸과 아버지로서 대면하는 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엄마 없이 홀로 그를 키운 아버지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3. 배창호의 '회상'적 시선...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표면으론 한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그 아래에 깔린 것은 그 사랑 자체를 가능하게 해 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댓가를 바라지도 않으며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부모의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제목의 의미 또한 이제는 바뀌게 된다. 사랑함으로서 기뻤던 게 아니라 우리는 몰랐지만 그렇게 우리 등 뒤에서 지켜보는 부모로 부터 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기에 기쁜 젊은 날이었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에서 진행되는 내용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바탕이 되고 틀이 된 영화 형식 자체로 부터 드러나는 내용이다. 이러한 전혀 별개의 맥락 자체가 드러난다는 것이 배창호가 이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보여주는데 그가 이렇게 주제와는 별도로 형식에 공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영화의 질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였을까 우리는 그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유념해 볼 것이 배창호가 공간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특히나 앞에서 말했던 내 시야를 사로잡았던 롱테이크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생신 축하 술자리 공간이 묘사되어지는 방식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 공간은 이렇게 드러난다. 

 

 카메라는 바로 그 곳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5촉짜리 전구의 자그마한 빛 아래 생신 축하를 위해 삼삼오오 모여있는 술자리를  카메라는 아주 멀리서 잡는다. 조명 역시 거기 밝힌 5촉짜리 전구가 전부다. 그러니 술자리의 배경과 관객 가까이의 전경은 어둠속에 잠겨있다. 그것은 마치 꿈결처럼 몽환적으로도 보인다. 거기서 생신을 축하하는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5촉짜리 전구의 빛은 작지만 다사롭게 그들을 둘러싸고 나즈막히 들려오는 그들의 노래소리로 그 장면은 더욱 더 아련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왠지 그 장면은 마치 막 기억하려는 그 순간을 닮아보인다.  우리가 뭔가를 떠올리려 할 때 점점 머리 속 어둠이 밖으로 물러나면서 기억하는 그 장면이 처음엔 작게 시작해서 서서히 다가오듯이 그렇게 말이다. 바로 그와 똑같은 속도로 카메라는 노래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그 곳으로 다가간다. 기억 속에 떠오른 장면이 머리 속에 가득찰 때와 같은 똑같은 속도로... 그래서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의 이 장면이 바로 우리가 하는 기억의 과정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다는 것이... 

 

  배창호의 카메라가 아버지를 담을 경우 드러내는 방식은 이와 같다. 그는 언제나 전경 또는 배경에서 아버지가 서서히 드러나도록 한다. 마치 우리가 아버지란 존재를 기억할 때와 같이. 현재에서 과거의 한 때를 기억하는 것을 특히 회상이라 한다. 회상은 언제나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의 그 때를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암기와도 같은 단순한 기억과는 다르다. 그래서 회상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때로는 그 신념에 바탕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아버지를 회상함은 영화속에서 경험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겠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배창호는 어쩌면 그 장면을 찍으면서 정말 아버지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영화속 형식은 그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개인적 회상과 그대로 닮아있을 지 모른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은 표면에 전개되는 내용과는 다르게 형식에서 전혀 다른 맥락을 드러낸다. 그건 배창호의 카메라가 '회상'적 시선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바로 그 '회상'으로서의 측면이 관객에게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는 화면 톤을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조율하며, 회상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 시간의 지속에 대한 경험임을 비추어 볼 때 장면 마저 분할하지 않고 가급적 롱테이크로서 잡아내는 것이다. 하면 이제 우리는 그가 왜 '회상'적 방식을 영화 표현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택했느냐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건 왜 하필이면 그 '회상'적 시선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는가 하는 질문과 닿아있다. 여기서 우리가 아무래도 고려해야 할 것은 그 시대적 상황이다. 예술가들 역시 국그릇 속의 건더기와도 같아서 아무리 예술적 자의식으로 홀로 독야청청하려 해도 자신을 둘러싼 국물에 젖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대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시대가 엄혹할 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그 암울한 시대에 영화를 하는 예술가들은 어떻게 시대를 헤쳐 나아가는가? 아마도 배창호와 관련해 물어야 할 본질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 될 것이다. 그가 '회상적' 방법을 쓴 이유가 - 그토록 공을 들인 것을 보자면 - 하나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념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스스로 다졌을 그 신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신념은 무엇인가? 같은 시기 나름의 소신을 갖고 역시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저항적 신념을 나타내었던 이장호 감독과 비교하면 배창호의 시대를 헤쳐가는 자맥질의 원형이 좀 더 잘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4. 이장호와 배창호... 

 

  이장호와 배창호 모두 형식적은 측면을 중시했고 그것을 통해 시대의 어둠을 헤쳐가려 했지만 그러나 형식으로 드러나는 둘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이장호는 영화 '바보선언'으로 대표되듯이 아방가르드 형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 아방가르드는 과잉이고 파괴에 맞춰져 있다. 영화에서 감독 자신은 진짜 영화를 만들 수 없음에 자살하고 음악은 오로지 적을 파괴하는 것만이 목적인 슈팅 게임의 사운드를 카피해 쓰고 있다. 그는 아방가르드를 취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지금의 한국 자본주의적 현실 자체를 부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계속 이어진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방가르드는 원래 모더니즘적이지만 그의 아방가르드는 리얼리즘이 된다. 

  반면 배창호는 기존의 영화 문법을 크게 비틀지 않는다. 장르적 관습도 여전히 따른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내용과 형식을 분리시킨다. 내용은 기존의 사회가 원하는 것을 충실히 복제하지만 형식은 그러한 복제된 진실에 대해 여전히 의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형식에 투영되어진 '회상'적 시선은 사회에 오염되지 않는 개인적 신념을 늘 자각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보여지는 내용과 형식으로 드러나는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배창호의 영화들은 오히려 모더니즘적이 된다. 그러니까 이장호는 기존의 것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고수하는 한 편, 배창호는 그 회상적 시선에 깔린 - 그의 아버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로 부터 나온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기억함으로서  스스로 하나의 섬이 되어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가치를 지키려 한다. 파괴를 지향하는 이장호에겐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중요하지 않으므로 기꺼이 연대를 위해 내미는 손이 되지만 배창호는 스스로 관찰자의 입장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마치 최인호의 '술꾼'이 그렇듯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는 척 하는 모습의 아래에서 그 모든 것을 데카르트적 회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바로 이러한 배창호의 자세가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1인칭 시점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유이다. 그 장면은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처음 황신혜를 만날 때이고 나머지는 황신혜가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할 것을 알았을 때이다. 그것은 곧 개인이 희망과 절망을 느끼는 순간과도 같은데 그 때 처음 부분에서 배창호는 안경알 속에 그녀를 담음으로써 선명해진 세상을 부각하지만 두번째 부분에서는 모든 세계가 전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흐릿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1차적 시점의 형상화에 있어서의 차이는 줄거리에 따른 외부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바로 배창호 작가 개인의 신념이 짙게 투영된 결과다. 이른바 '까이에 뒤 시네마'가 말했던 카메라 만년필 효과인 것이다. 배창호 개인은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순수한 영역이 사회 어딘가에 있을 것을 믿는다. 주인공 자신의 순정이 통했다고, 그렇게 역시 순수가 있었다고 생각할 때 세계는 또렷해진다. 하지만 여주인공이 최종적으로 자본을 선택할 때 그의 순수에 대한 믿음은 좌절되고 세상은 그 빛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영상은 정확히 그 형식에서 배창호 개인이 믿는 가치를 반영한다. 이러한 이장호와 배창호의 차이는 공교롭게도 두 감독의 대표작 모두에 출연한 '최불암'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즉, 이장호의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아버지의 기표로 존재했던 최불암은 마지막에 살해당하지만 배창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는 나의 신념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보호막이 되어 주는 것이다. 

 

 5. 덧붙여...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기쁜 우리 젊은 날'을 통해 다시금 암울한 80년대를 헤쳐갔던 영화 감독들의 자의식을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오늘자 경향신문 때문이었다. 오늘 경향신문의 1면은 영화 '도가니'로 인해 새삼 깨닫게 된 영화의 저력에 대해 할애되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어느 정도 현실적 변화를 일으킬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이고 개인적으로는 한국 영화의 감독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지금 역시도 80년대와 다를 바 없는 어둠의 시절인데도, 내 일천한 한국 영화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 만큼이나 한국 감독들이 동시대에 대해 직접적 발언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튼 다시금 상기된 영화의 저력과 그동안에 쌓여 왔던 내 불만이 같은 암울한 시기의 80년대를 한국의 영화 감독들은 어떻게 견뎌갔던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에 얼마전에 본 '기쁜 우리 젊은 날'이 그 촉매제가 되어주었다. 저번주에는 곽지균의 91년작 '젊은 날의 초상'을 방영하던데 앞으로 계속 8,90년대의 영화를 방영할 모양이다. 한 번 차분히 영화를 통해 드러내는 감독들의 견딤의 자세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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