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31 | 13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아서 코난 도일 외 지음, 정태원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기새의 경우 처음 보는 존재가 그의 어미가 된다고 한다. 모친 결정의 매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우리네 취향이라는 것도 행여 그렇게 결정되는 것은 아닐런지. 그러니까 어릴 때 어떤 경로로든지 좋아하게 된 것이 하나의 취향이 되어 자라나서까지도 남아있게 된 것인 아닐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냥 객적인 소리인지도 몰라도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고전미스터리에 대한 내 취향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어쩌다가 이토록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딱히 그 계기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다만 생각나는 건 그 어느 것 보다 미스터리를 많이 읽었다는 기억 뿐. 왜 그렇게 많이 읽었을까 따져보아도 마치 갓 태어난 아기새가 처음 두 눈에 들어온 대상을 무작정 엄마라 믿듯 그렇게 나 역시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게된 듯한 막연한 느낌만이 인다. 

 

   한 평생 미스터리만을 위해서 사시다가 얼마전 안타깝게 작고하신 고 정태원님에게 선생님은 어쩌다가 미스터리를 사랑하게 되셨나요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까? 정태원님은 나와는 달리 그 연유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 백조는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운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마지막 울음 소리가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세상에 내어놓는 작품을 우리는 더러 '스완송', 백조의 노래라고 부른다. 그렇게 나도 이 작품, 정태원님이 직접 선정하시고 번역하신, 셜록 홈스를 쓴 코넌 도일을 비롯하여 모두 10명의 고전 미스터리 작가들의 서른 편의 단편이 들어있는 이 책,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고 정태원님의 스완송이라고 부르고 싶다. 

 

 

 

  정태원님은 자타공인 유명한 셜로키언이다. 스스로 주석까지 단 홈스 전집을 번역 출간했을 만큼. 그 홈스 전집은 무엇보다 정확하고 꼼꼼한 주석으로 이름이 놓은데 그런 정도의 주석을 달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태원님의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지식이 아주 방대하고 해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 정도의 방대하고 해박한 미스터리 지식을 가지려면 왠만한 열정과 애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홈스 전집 자체가 그만큼 고전 미스터리를 향한 정태원님의 열정과 애정을 나타내는 하나의 구체적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나온 이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역시도 그 열정과 애정을 드러냄에 있어서 그 홈스 전집과 맞먹는다 하겠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셜록 홈스가 연재되었던 죠지 뉸즈라는 남자에 의해 창간된 '스트랜드 매거진'에서 연재되었던 미스터리 단편들 가운데서 정태원님에 의해서 직접 선정된 것들이다. 많이 알려진 유명한 작품들 보다는 다소 덜 알려졌지만 19세기 당시 고전 미스터리의 다양하면서도 그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로 선정되었다. 이 중 베로니스 에뮤스카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 단편들이나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아내를 구하고 대신 배와 함께 죽은 잭 푸트렐의 작품들은 이미 동서 미스터리로 국내에 선을 보인 적이 있으나 내가 직접 찾아보니 각각 단 한 편 만이 겹칠 뿐이고 모두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작품들이었다. 그만큼 정태원님이 가급적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들로만 세심히 선정했다는 의미가 되리라. 

 

 

 

   그래서 나같이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 세계를 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값진 선물이 될 것 같다. 혹시 어릴 때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의 명탐정 45인' 같은 책을 보면서 언젠가는 거기 나온 모든 명탐정들의 작품들을 읽겠다고 꿈꾸었던 이들이라면 더더욱 '종합선물세트'가 되어 줄 것이다. 만듦새도 좋고 번역도 유려하며 거기다 어릴 때 미스터리를 읽으면 꼭 보였던 삽화(여기 실린 삽화들은 '스트랜드 매거진' 연재 당시 같이 실렸던 삽화들이다.)까지 있어서 향수마저 듬뿍 느끼게 해 줘서 금상첨화다. 고전 미스터리의 팬으로써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모든 면에서 흡족할 만한 이런 책을 받고 보니 마치 정태원님이 마지막을 예감하시고 당신 자신이 산타클로스가 되어 자신과 똑같이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멋진 선물을 주시고 가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고맙고 아이가 하나 남은 사탕을 그렇게 먹듯 아껴가며 조금씩 천천히 먹었다. 진한 추억의 내음마저 물씬 머금은 그 단편들을... 

 

   아기새에게 한 번 엄마로 인정된 존재는 영원히 엄마로 남는다. 그렇게 아기새 처럼 내게 낙인처럼 찍힌 고전 미스터리의 취향도 영원히 그렇게 나와 함께 할 것 같다. 이유도 없고 까닭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마냥 좋은 걸. 아마 정태원님도 그렇게 대답하시지 않을까? 좋아하는 이유를 따질 만큼 즐길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냥 마음껏 즐기고 볼 일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어의 노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어의 노래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8-1 프로파일러 토니 힐 시리즈 1
발 맥더미드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그러면 우리 갑시다, 당신과 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에 펼쳐져 있을 때,

우리 갑시다, 어떤 반쯤 버려진 거리를 통해,

싸구려 일박 여인숙에서의 불안한 밤과

굴껍질이 있는 톱밥 깔린 레스토랑의

중얼거리는 뒷골목을 지나서.
 

                                        - T.S 엘리어트,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 

 

  1987년 데뷔한 발 맥더미드는 이미 그동안 범죄소설 장르에 있어서 그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작년, 그러니까 2010년 CWA에서 평생공로상마저 수상한 바가 있다. 아마도 그 공로의 대부분은 바로 이 소설 '인어의 노래'로 시작된 '토니 힐' 시리즈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양들의 침묵'의 인기로 인해 프로파일링이 약간씩 알려지고는 있었으나 그 유명세에 비해서는 프로파일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던 작품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던 90년대 중반 그 때, 발 맥더미드는 바로 이 '토니 힐' 시리즈를 통해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독자들에게 남아있었던 '프로파일링'을 꽤 사실적인 묘사로서 제대로 그것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시도와 결과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등장하자마자 그 해 영어권 최고 범죄소설에게 주는 '골든대거'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야 지금 소개되었지만(아마도 작년에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평소 영국드라마를 챙겨보았던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미 오래전에 이 '토니 힐' 시리즈를 만나보았을 것이다. 2002년에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영국 ITV에서 'WIRE IN THE BLOOD'란 제목으로  드라마로 만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원작의 높은 인기 탓이었는지 이 드라마는 무려 여섯 시즌까지 방영되었는데 특히나 롭슨 그린이 연기한 주인공 토니 힐이 보여준 독특한 매력이 톡톡히 한 몫을 했다. 본인 역시 이 드라마를 먼저 보고 나중에 원작을 접한 케이스인데 드라마에서의 본 토니 힐 캐릭터가 너무 익숙했던 지라 원작을 읽을 때는 거기 묘사되는 토니 힐이 아무래도 드라마의 토니 힐과는 차이가 있어 사실 몰입하기 조금 어려운 것도 있었다. 원작의 토니 힐은 '발기 불능'이란 것만 빼면 조금의 흠도 없는 매력적인 신사이지만 드라마속의 토니 힐은 처음 부터 와이셔츠를 반은 넣고 반은 밖으로 뺀 그렇게 제대로 정돈조차 하지 못하고 나오는 등 어딘가 어설프고 서투르기 짝이 없는 약간 찌질남스럽기도 한 그런 캐릭터였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토니 힐의 첫 등장 장면. 반쯤 삐져나온 와이셔츠가 보인다. '인어의 노래'를 각색한 것으로 시즌 6 까지 이어진 'WIRE IN THE BLOOD'의 첫 시작을 열었다. 

 

  사실 드라마에서 이렇게 토니 힐을 원작과는 다르게 인간 관계에 있어서 좀 모자라는 캐릭터로 설정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발 맥더미드가 '인어의 노래'를 비롯, 토니 힐 시리즈 전체를 통해서 추구하려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토니 힐은 프로파일러다. 프로파일러의 핵심은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 그렇게 타자를 자신 만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토니 힐은 게이만을 잔인한 고문 끝에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을 프로파일링 하면서 끊임없이 그 범인 자체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는 자주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마치 그와 대화를 하는 것 처럼 독백을 한다. 드라마의 토니 힐은 한 술 더 떠서 아예 시체 있는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누워보기까지 한다.(나중에 이것은 일본드라마 '언페어'에서 다시 모방된다.) 

 

   

      역시나 '인어의 노래'에서의 한 장면. 그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사건의 시체 발견 장소에서 시체의 현장 사진 그대로 토니 힐이 누워보고 있다

 

  프로파일링은 토니 힐이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는 실제의 그가 아닌 그가 남긴 흔적, 잔여를 통해 그와 관계를 맺는다. 흔적과 잔여는 존재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분일 뿐, 그 자체가 존재가 될 수는 없기에 토니 힐에게 그 모든 것은 해석을 위한 단서들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토니 힐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오로지 그 자신만의 해석이 바탕이 되는 그렇게 순전히 자기 만족적 환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인 것이다. 해석이 그대로 실체적 진실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그 또한 하나의 '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토니 힐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궁극적으로 대상과 일치되고자 하는 욕망은 자기 작위적 환상을 더욱 더 굳건히 하려는 노력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은 '자폐적'이고 '도착적'이다. 때문에 토니 힐은 현실 세계에서 진짜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드라마에서 처럼 서투르고 원작에서 처럼 '발기 불능'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토니 힐의 '발기 불능'은 그의 프로파일링이 그야말로 자폐적임을 드러내는 징후이다. 진짜 연인, 그렇게 실체적 존재를 껴안을 수 없는 그의 '한계'는 그야말로 그가 오로지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위적 환상 가운데서만 충족을 느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토니 힐이 오로지 '폰-섹스'를 통해서만 절정에 오를 수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폰-섹스' 역시 실체와 행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은 다만 스스로 기꺼이 만들어가는 작위적 환상만이 있을 뿐이다. 실제가 아니라 스스로 꾸미는 가상의 섹스. 토니 힐이 그것으로만 절정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오로지 자기만의 작위적 환상안에서만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폐적' 인간임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드라마는 더 나아가 시간날 때 마다 '툼 레이더' 게임을 즐기는 게임광으로 까지 만든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게임광'의 모습은 사실 '인어의 노래'에서 연쇄살인범이 가지고 있는 취미였다. 

   토니 힐의 이러한 형상화는 발 맥더미드가 토니 힐 시리즈를 단순한 스릴러로만 만들지 않았다는 걸 암시한다. 무엇보다 앞서 드라마가 일부러 범죄자의 취미를 토니 힐에게 주었듯이 그렇게 토니 힐과 그가 추적하고 체포해야 할 범죄자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사실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인어의 노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가 시작될 때 마다 연쇄살인마의 자전적 기록이 먼저 나오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범죄자가 어떻게 범죄를 행했는지를 그 육성으로 듣게되는 셈인데 거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 범죄자의 행위 역시 작위적이고 일방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한 범죄자가 맺는 관계의 성격은 무엇보다 '고문'이라는 것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이 '고문'은 바로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과 근저에서 많이 닮았다. 토니 힐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자신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을 점점 실체로 만들어가듯이 고문 역시도 범죄자가 꿈꾸는 진실을 그 대상으로 하여금 토해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프로파일링도 고문도 자기가 만들어내거나 바라는 진실을 '실체화'로서 보상 받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행위인 것이다. 결국 그런 의미에서 토니 힐과 범죄자는 똑같은 존재들이다. 드라마는 그것을 '게임광'의 면모를 통해서 더욱 더 강조하지만 발 맥더미드 역시 이들의 유사성을 작품 곳곳에 공들여 세공해 놓는다. 스포일러상 자세히 말을 못하지만 토니 힐과 범죄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나 결말의 대치 장면은 바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까 발 맥더미드의 토니 힐 시리즈는 결국 '관계'에 대한 얘기인 것이다. 토니 힐이 그렇게 묘사된 것, 범죄자와의 유사성 이 모두가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설정인 것이다. 아마도 발 맥더미드의 주된 관심은 단순히 프로파일링을 통해 범죄자를 체포하는 것 거기에만은 있지 않을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토니 힐이 가지고 있는 '자폐적' 인간 관계를 어떻게 하면 허물고 보다 진정한 인간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지 그것을 풀어보는 것에 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토니 힐 시리즈는 사실 토니 힐을 치료하는 시리즈이며 바로 그 때문에 발 맥더미드에겐 토니 힐을 진정한 인간 관계 형성을 통해 치료해 나갈 또 하나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녀가 바로 '캐롤 조던'인 것이다 

 

 

   '인어의 노래'에서의 캐롤 조던. 소설 보다는 좀 연상으로 묘사되었다. 수사국에서 지위도 높아서 돈 메릭을 부하처럼 부리고 있다. 같이 나온 고양이는 그녀가 기르는 '넬슨(영국 제독의 이름인가?)' 

 

  캐롤 조던은 경찰국 내에서 유일한 여성 형사다. 그렇게 그녀는 고립적이다. 그녀는 당당한 형사로서 인정받고 싶지만 경찰에서는 '형사'로 보기 보다는 먼저 '여성'으로만 본다. 토니 힐을 만나고 나서 그녀는 호감을 가지는데 그 주된 이유가 이러했다. 

적어도 토니 힐은 그녀가 만나 본 몇몇 전문가들과는 달리 전문가로서의 오만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달리 그녀의 어려움에 잘난 체 하지 않고 공감을 표해주면서 문제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쪽으로 기꺼이 함께 움직여 주었다.(p.76)

 

  그러니까 토니 힐은 그녀를 동료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준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동료로서 인정해 주었다는 것에서 호감마저 느낄 정도로 캐롤 조던은 조직 내에서 유일한 여성으로서 일종의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우리는 특히 그녀가 토니 힐과 한 팀이 되어 수사해 갈수록 그러한 그녀의 고립적 위치를 더욱 더 잘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캐롤 조던 말고 또 하나, 조직내 유일한 여성으로서 고립되어 있는 존재를 소설에서 보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기자 '페니'이다. 발 맥더미드가 이렇게 각기 다른 조직에서 고립된 여성들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은 역시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관계-맺기' 테마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둘의 고립된 여성이 각기 맺어나가는 관계의 방식을 통해 그가 토니 힐에게 주려는 그 진정한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탐색한다는 것이다. 캐롤 조던과 달리 페니의 관계 맺기는 토니 힐, 범죄자와 똑같이 일방적임을 우리는 보게된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현재 위치를 보장해주거나 승진시켜 줄 수 있는 특종 거리 때문에 형사들과 관계를 맺는다. 거기엔 타자와의 어떤 인간적 교감도 없으며 있는 건 다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다루는 것 뿐이다.  그렇게 페니는 원하는 정보들을 얻어내지만 궁극적으로 그녀에겐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빈 손일 뿐이다. 결국 발 맥더미드는 이러한 타자를 일방적인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관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인데 문제는 페니가 보여주는 이러한 관계는 작품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크로스 경감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가 결국 수사를 실패로 몰아가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게이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소설은 그렇게 등장인물들을 달리해가며 반복을 계속한다. 토니 힐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작위적 환상과 범죄자가 가지고 있는 일방적 강요, 페니가 보여주는 타인의 수단화 그리고 크로스 경감의 편견.  마치 발 맥더미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을 유형화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이것들은 그 근저에 있어서는 다 동일한 것이다. 타자의 것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관념 욕망으로만 타자를 채운다는 점에서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토니 힐, 범죄자, 페니 그리고 크로스 경감에게 있어 타자란 오로지 '인어의 노래'가 된다. 

 

나는 인어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서로서로에게.

나는 그들이 나에게 노래해 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나는 그들이 파도를 타고 바다쪽으로 나가는 걸 보았다

바람이 바닷물을 흰색 검은색으로 불어댈 때

파도의 흰 머리칼을 뒤로 불어 넘겨 빗질하면서. 

붉은 색 갈색 해초로 화환을 두른 바다 소녀들 옆에서

우리는 바다의 방들에서 머물렀었다

인간의 목소리들이 우리를 깨울 때까지, 그리고 우리는 익사한다. 

                                          - T.S 엘리어트,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  

 

  엘리어트의 이 시에서 '인어들의 노래'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그 무엇을 상징한다. 그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고 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인어들이란 바로 '타자'들인 것이다. 엘리어트의 시에서 우리가 그저 바다로 멀리 떠나가는 인어들을 보기만 할 뿐 바다의 방에서 마냥 익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를 오로지 내 자신의 관념, 욕망으로만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발 맥더미드의 '인어의 노래'는 그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바로 오로지 내 자신의 잣대로만 타자를 가늠하는 그 자페적 태도 자체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캐롤 조던은 그 모든 자폐적 관계로 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타자의 받아들임은 토니 힐과의 관계서도 드러나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가족과 같이 사는 존재이며 또한 유일하게 애완동물(소설에서 애완동물은 단 두 마리 나온다. 하나는 캐롤이 키우는 넬슨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자에게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한다. 때문에 이 애완동물의 의미는 소설에서 중요하다.)을 키우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그렇게 매일을 존재와 같이 교감을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캐롤 조던과 토니 힐의 만남이다. 그러니까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만은 아닌 것이다. 과연 발 맥더미드의 바람 대로 캐롤 조던은 토니 힐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아,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이다. 보다 본격적인 그들의 얘기는 아마도 후속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아직은 해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인어의 노래소리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귀찮아 2011-08-22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올해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게 된 작품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 생각하게 해주시는 리뷰네요. 2편은 올 12월경 나올 예정입니다.

ICE-9 2011-08-22 18:08   좋아요 0 | URL
제가 토니 힐 시리즈의 매력을 제대로 설명했는지 자신 없었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12월경에 후속편이 나온다니 정말 기쁘네요.^^

starover 2011-08-2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체 따라 누우는 장면은 '언페어'의 유키히라 형사가 한 행동을 떠올리게 하네요.

ICE-9 2011-08-22 18:10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 님도 '언페어' 보셨군요. 아마도 언페어가 토니 힐을 모방한 것 같아서 저도 본문에 그렇게 언급해 놓았답니다.^ ^
 
속 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2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의 오랜 전국시대는 무수한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많은 요괴들을 낳았고 또한 애니미즘적 성향이 강한 일본 특성상 한 번 생성된 요괴들은 쉬이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일본 산천이나 계곡 혹은 논밭이나 마을 어귀 그 어디에서나 그 오랜 지난했던 전쟁의 역사 동안 비극의 씨앗들은 뿌려졌을 것이며 희생자의 피와 눈물 그리고 원념으로 요괴들은 태어나고 자라났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 요괴란 한 개인의 비극적 삶이 죽은자의 목소리가 되어 산자들에게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점차 사회가 안정되어가자 이제 그 호소의 배경이 되었던 비극의 이야기는 잊혀지고 남은 건 다만 눈에 보이는 그 괴이하고 흉물스런 몰골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오히려 사회가 안정될 수록 요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점점 공포의 대상이 된다. 어느새 사람의 탈을 벗고 괴물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불안했던 그 시대 그러니까 항상적인 죽음과 기근 그리고 병마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그 시대에서 요괴가 태어난 이야기는 곧 듣는 자, 그렇게 산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산자들의 운명과 요괴가 되어버린 자들이 운명이 그리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괴는 측은과 동정의 대상이었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공동운명체였기에. 하지만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워지자 이제 죽은자들의 이야기는 점점 산자들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 '저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현재의 안정과 풍요는 과거의 불안정과 빈곤을 두려워하게 되는 법. 가까이 하게 되면 다시금 옛날로 그렇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과거를 기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염의 공포인 것이다. 현대가 왜 위생과 청소의 신화에 빠져들게 되었는가? 바로 더러움과 쓰레기들이 그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들을 자꾸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용의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자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래된 것, 낡은 것은 재빨리 제거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약하고 초라한 자신들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약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 그렇게 자부하는 그들에게 과거의 모습은 약점이 된다. 불리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흔적을 지운다. 매일 몸을 씻고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청소하는 것이다. 전염의 공포는 건강 때문이 아니다. 비로소 획득한 이 새로운 정체성을 과거의 유령들로 부터 온전히 보호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이건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마저도 그렇다. 개인이 스스로 약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라고 최면을 걸듯 사회도 그렇게 성원들에게 최면을 건다. 폭력적으로 통일을 이루거나 권력을 잡아 태어난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권력의 기반이 그리 강고하지 못한 탓에 그 사회는 안정을 보다 희구하면 할 수록 과거의 잔재를 더욱 더 일소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기반이 약할 수록 권력은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이제 막 태어났다는 그 '새로움'을 더욱 더 강조할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의 정당성은 과거의 비난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 사회에 있어 과거는 오로지 제거의 대상이다.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를 그 몸에 간직하고 있는 요괴들 역시 기피와 혐오 그리고 공포의 대상으로 낙인 찍힌다. 오로지 배척하기 위하여 배척할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 그 태평성대 에도 시대에 요괴들은 그렇게 눈과 입을 빼앗기고 설 자리를 잃었다. 해서 요괴의 이야기를 채록한다는 것은 바로 그 몸에 각인된 과거의 잔여를 모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 안정과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무시되고 버려진 수많은 '다른 자'로 낙인 찍힌 그들의 신음과 눈물 그리고 호소를 모으는 것이다.  

  '항설백물어'의 요괴 이야기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요괴의 배제는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렇게 개인들에 의해서 배제되어 버려진 요괴이야기들이 주로 모여있는 게 저번에 나온 '항설백물어'라고 한다면 이번에 나온 속편 항설백물어는 사회적 차원에서 배제되고 활용되는 요괴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괴들은 이제 모든 이야기를 잃고 단순히 흉물스런 그 껍데기만 남았다. 물론 그건 요괴 탓이 아니다. 요괴 스스로 그 가면을 쓴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을 다른 것으로 낙인 찍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막아버린 산자들이, 풍요와 편리에 취해 타인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기로 결심하고 눈감아버린 산자들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그들에게 씌워준 가면인 것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처럼. 

  '너희들이 그렇게 무서운 가면을 써야 내 마음놓고 너희들을 싫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무 죄책감 없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들의 '가면 씌우기'는 사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나 똑 같은 것이다. 온갖 색깔론, 지역주의,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한 각종 신분 지위 성별에 따른 모든 차별들에 다는 이유들. 그것들 역시도 우리가 눈앞에 현존하는 타인의 고통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시하기 위하여 씌워주는 요괴의 가면인 것이다. 그러니까 기피, 혐오 그리고 공포 같은 것들은 사실 외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괴물은, 요괴는 그 자체로는 공포스럽지 않다. 우리가 상처입지 않고 무시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혐오나 공포의 가면을 씌워주기 전 까지는. 

  그렇게 요괴는 껍데기만 남는다. 어렵게 얘기해서 '두려움'의 기표만 남는다. 실체는 없다. 길가에 떨어진 이름표와 같은 것이다. 남은 건 이름뿐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사회는 이런 걸 좋아한다. 주워다가 내치고 싶은 사람, 몰아내고 싶은 무리가 생기면 달아만 주면 되니까. 그리고는 손가락질을 하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요괴다!" 사람들이 돌아본다. 사회가 그 중 하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 너 요즘 아프지?"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거 얘네들 때문이야." 하면서 이름표를 붙인 무리를 가리킨다. 사람들 눈이 번쩍 뜨인다. 그리고 또 하나를 불러서 "얘. 너  요즘 일이 잘 안되지?" "응. 힘들어 죽겠어." "그것도 얘네들 때문이다~" "뭐!" 사람들 코가 벌렁인다. 이번엔 모두에게 말한다. "여러분, 우리 요즘 너무 가난해졌죠?" "그래, 그래!" "그것도 애네들 때문이에요!" "정말? 네 이녀석들을!!"  사람들의 입이 일그러지며 이제 이름표를 단 무리에게로 몰려간다. 그 때 사회는 뒤로 냉큼 물러나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요걸로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사회는 그 안정을 위해 반드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요괴는 바로 이것을 위한 가장 1차적 희생양의 기표인 것이다.

  '항설백물어' 속편은 바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노뎃포'로 부터 에필로그와도 같은 '로진노리'까지 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사회에서의 요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그 요괴가 어떻게 사회에서 생산되고 이용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긴밀하게 엮이어져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쩐지 독자를 계몽하려는 듯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서 마냥 지루할 것 같지만 하하! 그렇다면 여기서 작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 작가가 누군가?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를 썼던 바로 그 교고쿠 나쓰히코다. 요괴이야기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 사회학 미학 이론을 마구 버무려 끊임없이 풀어내는 수다로 독자의 오감과 정신을 휘몰아쳐대던 필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한 마디로 괜한 걱정이라는 말씀이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광골의 꿈'에서 실망한 나머지 조금은 반쯤 접어두고 보는 작가였는데 이번의 작품으로 완전히 다시금 신뢰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와 더불어 이 작품을 나만의 개인적인 나쓰히코 베스트 3로 꼽아본다. '노뎃포'의 작은 이야기로 부터 시작해서 뼈대를 세우고 살을 채워 점점 그 스케일을 불려가는 솜씨가 만만찮다. 스케일이 방대해지는데도 아귀마저 딱딱 떨어지니 절묘하다. 한 마디로 당신이 나쓰히코의 팬이라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상투적이라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다. 속편도 이리 대단하거늘 이 다음 '후편'은 일본 최고의 대중소설에게 준다는 나오키 상마저 수상했다고 한다.(세상에 어느 정도로 괴물스런 작품인거야?) 정말 기대가 된다. 빨리 출간해 주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7월 22일 영국 범죄소설 작가 협회, 즉 CWA에서 그 해의 비 영어권 최고 장편소설에 주는 THE INTERNATIONAL DAGGER가 발표되었다. 수상작은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그들의 세번째 작품 'THREE SECONDS'였다. 이미 수상 경력이 화려했던데다 뉴욕타임즈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제목이 '라르손이 지핀 불 더욱 타오르게 하다'였다)를 따로이 할 만큼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은데 이 수상으로 이제 그 평판은 결정적이 되었다. 놀랍게도 만켈과 라르손과 똑같이 스웨덴 작가다. 게다가 라르손이 밀레니엄 1부 '용문신을 한 소녀' 로 수상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자신들의 데뷔작으로 이미 그 '글래스키 상(북유럽 최고 장르문학상)'을 수상한 바도 있었다. 마치 스웨덴의 은둔 고수를 하나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흥미로웠다. 그런데 때마침 글래스키 상을 수상했던 바로 그 데뷔작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그 작품이 바로 2005년에 나온 '비스트' 이다. 

 

  '비스트'는 표지에서 어느정도 추정되듯이 아동 성폭력을 주 테마로 하고 있다. 도입부 부터 아홉살 동갑내기 두 소녀를 유혹하여 무참하게 폭행 살인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범인은 이미 검거되어 재판까지 끝난 채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그러던 중 치료를 위해 밤에 호송 도중 그가 탈출한다. 뒤늦게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수색을 펼치지만 이미 그는 또 하나의 아이를 옛날과 똑같이 폭행하고 살해한 뒤이다. 아이의 이름은 '마리' 아이는 최근 이혼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빠 프레드리크는 오로지 딸 아이 하나만을 삶의 유일한 의미로 알고 살아가던 남자였다. 하지만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 앞에서 그에겐 이제 다른 하나가 오로지 그를 살아가게 해 줄 삶의 의지가 된다. 그것은 바로 '복수' 그는 스스로 '마리'의 죄값을 묻기 위해 범인을 찾아 나선다. 

 전직 저널리스트(만켈도 라르손도 모두 저널리스트 출신이었는데, 루슬룬드는 스웨덴 국영방송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었다.) 출신과 전직 범죄자 출신의 의기 투합이라는 기묘한 조합으로 구성된 이 공동 작가의 데뷔작을 단순히 오로지 독자의 감각을 사로잡을 목적으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로만 버무린 비정한 복수극 정도로만 생각하면 정말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동 성폭력 살인이라는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한 것도 단순히 독자의 관심을 잡아두겠다는 게 목적이 아니다. 아무튼 그 오해를 풀기 전에 일단 이 책의 독특한 서술 스타일에 대해 먼저 말해보려 한다. 이 소설의 스타일은 해닝 만켈과도 다르고 스티그 라르손과도 다르다. 아마도 같은 스웨덴 작가로서 '비스트'와 가장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한다면 '웃는 경관'으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마이 슈발과 펠 바르가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스웨덴 범죄소설의 신대륙을 열였던 그 전통에게로 회귀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이 '비스트'에서 보여주는 것은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소설의 거대한 서사에 함몰되지 않은 채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 세상이 그렇듯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고립된 인생 살이를 해 나가지만 결국 모이고 모여 역사가 되듯이 '비스트'도 이와 똑같이 등장인물 각자의 생각과 행동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것이다. 즉 이것은 여러 가지 목소리가 각자의 색깔로서 한데 모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자이크 그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비스트'의 스타일은 모자이크적이다. 따라서 여기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주인공도 없고 조연도 없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서사의 흐름에 따라 주연도 되고 조연도 되는 것이다. '비스트'를 읽는 우리들은 그러니까 마치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그 천사와 같은 것이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유영해 다니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사람의 머리에 대면 그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우리 역시도 '비스트'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마치 손가락을 등장인물의 머리에 댄 것 처럼 그 생각들을 읽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스타일을 취하면서 굳이 그렇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를 사용해야 했던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범죄 소설이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 앞서 말했던 그 오해를 본격적으로 풀 시간이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왜 이런 모자이크적 스타일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바로 그 이유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의 선택은 관계가 있다. 이 둘 모두가 사용된 이유는 '비스트'가 독자들에게 본질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타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때문에 작가들은 가장 많이 대중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아동 성폭력 살인 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즉 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특히나 만일 당신이 그에게 자녀를 희생당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를 묻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의 대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더우기 그 부모라 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소설 속 프레드리크 처럼 사적인 처벌도 얼마든지 수긍한다고. 사실 어느 부모가 희생당한 아이의 복수를 위해 범죄를 처단하는 아비를 욕할 것인가? 소설 속 한 형사마저(그 역시 똑같이 아버지이다.)  이렇게 울부짖는데 말이다. 

  이 일을 하면서 항상 저 자신이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아마 개중에는 잘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이지 아닙니다! (...)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선생을 감시하고, 선생이 10년 동안 수감될 곳으로 호송해가야 하는 저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껴지는지 말입니다. 솔직히 제가 경찰치고 거의 욕을 안 하는 편이긴 하지만 정말...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씨발,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경찰은 프레드리크가 그 범죄자를 처단한 것을 정의롭다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범죄자가 되어 처벌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 그야말로 부정의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는 법을 수호하는 경찰이지만 오히려 법이 전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울부짖는 것이다. 심판은 언제나 정의와 관계된 문제다. 우리는 타자를 심판할 때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비스트'에 그렇게 공분을 일으킬 자극적 소재를 사용한 것은 그 '심판의 즉각성'을 문제삼기 위함이다. 보통 그런 케이스의 경우 우리는 종종 너무도 쉽게 타자를 심판하지 않는가. 아마도 이러한 경향 때문에 비스트의 작가들은 일부러 가장 분노를 자아내고 바로 심판의 칼날이 날아드는 이런 소재를 택하여 그렇게 즉각적이고 단정적인 심판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케 만드는 것이리라.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일까? 행여 우리가 제대로 심판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냥 그대로 남아있게 될 것인가?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수 많은 질문들이 '비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목소리들에서 흘러나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귓가로 스며든다. 읽으면서 우리들은 정말로 타자를 심판하는 것에 관하여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내 톨스토이가 한 단편의 제목으로 썼던 그 말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신은 진실을 알지만 그러나 때를 기다리신다." 

   심판의 쉽지 않음은 우리의 정보가 딱히 부족해서도 인식 능력이 모자라서만은 아니다. 거기엔 또 하나의 제약 사유가 있음을 작가들은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 자체가 가하는 제약이다. 과연 언제나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했던 스웨덴 작가 출신답게 그들은 하나의 심판이 그대로 행해졌을 경우 일으키게 될 예측 못할 사회 전체로 일어나는 파급효과가 어떻게 심판을 어렵게 만드는지 또한 잘 보여준다. 여기서 그들이 왜 스타일을 굳이 '모자이크적'으로 했는지 그 이유가 돌연 드러난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을 독자에게 들려 줌으로써 독자에게 보다 가능한 모든 견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심판이 그렇게 쉽지 않음이 바로 사람과 사람이 담쟁이 덩굴 처럼 얽혀 하나의 긴밀하게 짜여진 네트워크 같은 사회라서 어떤 하나의 결정이 마치 '나비효과' 처럼 사회 전체에 무시하지 못할 파급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쉽고도 간결한 문체에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자 삶의 한 토막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보여주기에 전혀 지루함이 없이 몰입해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는지라 조금은 가볍게 접근하려 했다가 큰 코 다쳤다. 데뷔작이지만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주제를 녹여내는 내공은 만만치 않았고 또한 은근히 깔려있는 주제가 진지하기 그지 없어 왠지 스릴러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회학 보고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엔 주 소재인 아동 성폭력 말고도 동성애 같은 다른 사회 차별적 요소들도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보다 핵심적으로 비스트는 그 '심판'의 근저에 깔린 '차별'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는 사실이 너희는 우리보다 저열하다로 곧장 연결되는 그런 '차별' 말이다. 바로 그 차별이 파시즘의 토대임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비스트'의 작가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파시즘과 작품을 통해 맞서 싸웠던 해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의 경향을 그들 역시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쉽게 읽히지만 만만치 않은 깊이와 여운을 맛보게 해 준 작품. 그들의 후속작이 정말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마츠모토 세이조로 대표되는 사회파 미스터리에 거의 장악되다시피 하던 일본 미스터리계에 다시금 본격(일본에서는 정통 미스터리를 '본격'이라 이른다.)의 부흥을 가져와 '신본격의 기수'라 이름 받은 아야츠지 유키토는 그의 신본격의 신호탄이자 데뷔작 '십각관의 살인'의 서두에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최신의 과학 수사기술이 명탐정들의 활약을 다 가져가 버렸다고. 맞는 말이다. CSI를 보라. 아무리 홈즈 같은 명탐정이 있더라도 거기 어디에 콧배기를 조금이라도 들이밀 여지가 있는가 . 바로 곁에 있더라도 CSI 대원들 그 누구도 명탐정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심문이니 대질 조차도 필요없다. CSI의 모토는 그거다. '제대로 된 과학적 수사 기술만 있다면 증인도 자백도 필요없다.'라는 것. 그들이 종종 용의자를 부르는 것도 사실은 DNA를 얻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현대에서 명탐정이 설 자리는 그렇게 좁아졌다. 때문에 명탐정을 등장시키고 싶은 작가는 어쩔 수 없이 '클로즈드 서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폭풍 속에 고립된 섬, 폭설 속에 고립된 산장 아니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 처럼 화산폭발로 인해 고립된 캠프 이렇게 말이다.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그렇게 해서 과학이라는 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 두뇌의 지적인 능력으로만 주어진 미스터리를 풀 수 있도록 말이다. 명탐정의 존재는 미스터리의 재미가 바로 지적 유희에 있음을 의미한다. '십각관의 살인' 첫 머리에서 유키토 했던 말 그대로 '자극적인 논리 게임'인 것이다. 

  이 게임을 위해서 미스터리 작가와 독자들은 그동안 '톰과 제리'식의 게임을 해왔다. '제리'인 미스터리 작가들은 계속 독자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참신한 트릭들을 개발해왔고 독자들은 거기에 속지않기위해 점점 교활한 '톰'이 되어야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뉴튼식 물리법칙에 지배를 받는 세상. 그 세상의 한계 때문에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트릭들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때로는 가스통 루르의 '노랑방의 비밀'이나 존 딕슨 카의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처럼 심리적 트릭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무한히 개발될 수는 없는 법. 결국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시작이 되었고 아야츠지 유키토 자신 역시 데뷔작에서 써야 했던 '서술 트릭'이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유키토의 작품 뿐 아니라(십각관의 살인, 미로관의 살인 정도가 해당될 것이다. 두번째 작품 시계관의 살인은 물리적 트릭을 쓴다.)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그 맛을 보았고 더하여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에 이르러서는 서술 트릭의 극한을 체험한 바가 있다. 

 '섬을 삼킨 돌고래' '최후의 끽연자'를 통해서는 그 풍자적인 재능을 '시간을 달리는 소녀' '파프리카'를 통해서는 그 SF적 역량을 여실히 느끼게 해줬던 IQ 178의 진짜 천재 쓰쓰이 야스타카의 그 수많은 작품중 단 세 개 밖에는 없다는 미스터리 작품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난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쓰쓰이 야스타카가 미스터리도 썼구나 하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봉인판은 세 번 만났는데 그 첫번째가 앞서 말했던 '살육에 이르는 병'으로 그건 띠지로 전체가 다 봉인된 형태였고 다른 하나가 북스피어에서 나온 빌 밸린져의 '이와 손톱'인데 그것은 결말 부분이 봉인된 상태였다. 지금 얘기하는 소설 '로트레크 살인사건' 역시도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는 형태다. '봉인'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기막힌 트릭이길래 이렇게 일부러 봉인까지 시켜놓았을까 하는 기대감. 과연 그 기대감으로 한껏 고양되어 눈에 힘을 주고 쓰쓰이 야스타카가 펼쳐 보이는 미스터리의 세계로 들어갔다.  

  

  제목 '로트레크(아마도 로트렉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 같다)' 처럼 이 소설의 화자는 여덟살 때 사촌의 우연한 실수로 크게 다쳐 그만 하반신이 영원히 성장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남자다. 그의 나이 28세 때, 그는 예전엔 자기 집 소유였으나 부친의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팔아버린 한 독일인 사업가가 지은 커다란 별장으로 초대된다. 거기에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옥문도' 처럼 아리따운 세 처자와 그녀들의 부모가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거기서 제1 제2 제3의 흉악한 살인이 일어난다. 독자의 임무는 '나'가 보여주는 사건의 정경을 잘 따라가면서 그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사건의 얼개를 밝혀준다. 잠재적 용의자들의 관계, 건물의 구조, 흉기의 존재까지. 일부러 숨기거나 미스디렉션을 유도하는 부분은 별로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공정하다. 동기도 파악 가능하고 모두 권총 살인인지라 깔끔하다.  즉 야스타카는 가장 주가 되는'트릭'만 빼고는 공정한 지적 스포츠가 되기 위하여 녹스의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트릭이 가져다 준 반전의 효과가 꽤나 커서 어쩌면 '이게 뭐야! 반칙 아냐!'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나도 범인을 맞히긴 했지만 이런 기발한 트릭은 정말 처음이다. 새삼 쓰쓰이 야스타카의 솜씨에 놀란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자면 야스타카는 절대 반칙을 쓰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에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했던 말을 토대로 추리를 했고 결국 두 번을 다시 꼼꼼이 읽고서야 봉인을 뜯기 전에 어느정도 트릭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지적 논리 게임을 좋아한다면 한 번 도전해 볼만한 게임인 것이다. 어떤가? 로트레크의 포스터들이 가득한 이 저택으로 한 번  초대되어 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름이 2011-08-18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 미스터리 소설은 트릭의 종류를 모르고 읽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의 트릭을 비롯하여 서평 자체에 몇몇 작품의 트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네요. 저는 위에 나온 책을 다 읽었으니 상관없지만 모르시는 분이 이 서평을 읽고 나면 소설의 재미가 반감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평에서 지적하신 책들을 읽으신 분이 이 책을 읽으면 미리 대비를 하겠죠. 깜짝 놀랄 진상이야말로 이 책의 묘미이니, 제목과 내용에 수정을 해 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ICE-9 2011-08-18 13:11   좋아요 0 | URL
리뷰 쓸 때는 트릭의 종류 정도는 밝혀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사실 트릭의 종류를 알면 더욱 더 미스터리 풀기에 매달리게 하는 동기 유발이 될 수 있으니까요.)만 말씀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수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수정 했습니다. 무엇보다 리뷰가 읽는 이의 기쁨을 빼앗아서는 안되니까요. 말씀 감사합니다.^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31 | 13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