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지난 7월 22일 영국 범죄소설 작가 협회, 즉 CWA에서 그 해의 비 영어권 최고 장편소설에 주는 THE INTERNATIONAL DAGGER가 발표되었다. 수상작은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그들의 세번째 작품 'THREE SECONDS'였다. 이미 수상 경력이 화려했던데다 뉴욕타임즈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제목이 '라르손이 지핀 불 더욱 타오르게 하다'였다)를 따로이 할 만큼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은데 이 수상으로 이제 그 평판은 결정적이 되었다. 놀랍게도 만켈과 라르손과 똑같이 스웨덴 작가다. 게다가 라르손이 밀레니엄 1부 '용문신을 한 소녀' 로 수상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자신들의 데뷔작으로 이미 그 '글래스키 상(북유럽 최고 장르문학상)'을 수상한 바도 있었다. 마치 스웨덴의 은둔 고수를 하나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흥미로웠다. 그런데 때마침 글래스키 상을 수상했던 바로 그 데뷔작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그 작품이 바로 2005년에 나온 '비스트' 이다. 

 

  '비스트'는 표지에서 어느정도 추정되듯이 아동 성폭력을 주 테마로 하고 있다. 도입부 부터 아홉살 동갑내기 두 소녀를 유혹하여 무참하게 폭행 살인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범인은 이미 검거되어 재판까지 끝난 채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그러던 중 치료를 위해 밤에 호송 도중 그가 탈출한다. 뒤늦게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수색을 펼치지만 이미 그는 또 하나의 아이를 옛날과 똑같이 폭행하고 살해한 뒤이다. 아이의 이름은 '마리' 아이는 최근 이혼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빠 프레드리크는 오로지 딸 아이 하나만을 삶의 유일한 의미로 알고 살아가던 남자였다. 하지만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 앞에서 그에겐 이제 다른 하나가 오로지 그를 살아가게 해 줄 삶의 의지가 된다. 그것은 바로 '복수' 그는 스스로 '마리'의 죄값을 묻기 위해 범인을 찾아 나선다. 

 전직 저널리스트(만켈도 라르손도 모두 저널리스트 출신이었는데, 루슬룬드는 스웨덴 국영방송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었다.) 출신과 전직 범죄자 출신의 의기 투합이라는 기묘한 조합으로 구성된 이 공동 작가의 데뷔작을 단순히 오로지 독자의 감각을 사로잡을 목적으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로만 버무린 비정한 복수극 정도로만 생각하면 정말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동 성폭력 살인이라는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한 것도 단순히 독자의 관심을 잡아두겠다는 게 목적이 아니다. 아무튼 그 오해를 풀기 전에 일단 이 책의 독특한 서술 스타일에 대해 먼저 말해보려 한다. 이 소설의 스타일은 해닝 만켈과도 다르고 스티그 라르손과도 다르다. 아마도 같은 스웨덴 작가로서 '비스트'와 가장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한다면 '웃는 경관'으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마이 슈발과 펠 바르가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스웨덴 범죄소설의 신대륙을 열였던 그 전통에게로 회귀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이 '비스트'에서 보여주는 것은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소설의 거대한 서사에 함몰되지 않은 채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 세상이 그렇듯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고립된 인생 살이를 해 나가지만 결국 모이고 모여 역사가 되듯이 '비스트'도 이와 똑같이 등장인물 각자의 생각과 행동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것이다. 즉 이것은 여러 가지 목소리가 각자의 색깔로서 한데 모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자이크 그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비스트'의 스타일은 모자이크적이다. 따라서 여기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주인공도 없고 조연도 없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서사의 흐름에 따라 주연도 되고 조연도 되는 것이다. '비스트'를 읽는 우리들은 그러니까 마치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그 천사와 같은 것이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유영해 다니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사람의 머리에 대면 그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우리 역시도 '비스트'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마치 손가락을 등장인물의 머리에 댄 것 처럼 그 생각들을 읽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스타일을 취하면서 굳이 그렇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를 사용해야 했던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범죄 소설이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 앞서 말했던 그 오해를 본격적으로 풀 시간이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왜 이런 모자이크적 스타일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바로 그 이유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의 선택은 관계가 있다. 이 둘 모두가 사용된 이유는 '비스트'가 독자들에게 본질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타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때문에 작가들은 가장 많이 대중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아동 성폭력 살인 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즉 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특히나 만일 당신이 그에게 자녀를 희생당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를 묻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의 대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더우기 그 부모라 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소설 속 프레드리크 처럼 사적인 처벌도 얼마든지 수긍한다고. 사실 어느 부모가 희생당한 아이의 복수를 위해 범죄를 처단하는 아비를 욕할 것인가? 소설 속 한 형사마저(그 역시 똑같이 아버지이다.)  이렇게 울부짖는데 말이다. 

  이 일을 하면서 항상 저 자신이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아마 개중에는 잘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이지 아닙니다! (...)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선생을 감시하고, 선생이 10년 동안 수감될 곳으로 호송해가야 하는 저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껴지는지 말입니다. 솔직히 제가 경찰치고 거의 욕을 안 하는 편이긴 하지만 정말...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씨발,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경찰은 프레드리크가 그 범죄자를 처단한 것을 정의롭다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범죄자가 되어 처벌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 그야말로 부정의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는 법을 수호하는 경찰이지만 오히려 법이 전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울부짖는 것이다. 심판은 언제나 정의와 관계된 문제다. 우리는 타자를 심판할 때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비스트'에 그렇게 공분을 일으킬 자극적 소재를 사용한 것은 그 '심판의 즉각성'을 문제삼기 위함이다. 보통 그런 케이스의 경우 우리는 종종 너무도 쉽게 타자를 심판하지 않는가. 아마도 이러한 경향 때문에 비스트의 작가들은 일부러 가장 분노를 자아내고 바로 심판의 칼날이 날아드는 이런 소재를 택하여 그렇게 즉각적이고 단정적인 심판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케 만드는 것이리라.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일까? 행여 우리가 제대로 심판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냥 그대로 남아있게 될 것인가?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수 많은 질문들이 '비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목소리들에서 흘러나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귓가로 스며든다. 읽으면서 우리들은 정말로 타자를 심판하는 것에 관하여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내 톨스토이가 한 단편의 제목으로 썼던 그 말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신은 진실을 알지만 그러나 때를 기다리신다." 

   심판의 쉽지 않음은 우리의 정보가 딱히 부족해서도 인식 능력이 모자라서만은 아니다. 거기엔 또 하나의 제약 사유가 있음을 작가들은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 자체가 가하는 제약이다. 과연 언제나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했던 스웨덴 작가 출신답게 그들은 하나의 심판이 그대로 행해졌을 경우 일으키게 될 예측 못할 사회 전체로 일어나는 파급효과가 어떻게 심판을 어렵게 만드는지 또한 잘 보여준다. 여기서 그들이 왜 스타일을 굳이 '모자이크적'으로 했는지 그 이유가 돌연 드러난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을 독자에게 들려 줌으로써 독자에게 보다 가능한 모든 견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심판이 그렇게 쉽지 않음이 바로 사람과 사람이 담쟁이 덩굴 처럼 얽혀 하나의 긴밀하게 짜여진 네트워크 같은 사회라서 어떤 하나의 결정이 마치 '나비효과' 처럼 사회 전체에 무시하지 못할 파급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쉽고도 간결한 문체에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자 삶의 한 토막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보여주기에 전혀 지루함이 없이 몰입해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는지라 조금은 가볍게 접근하려 했다가 큰 코 다쳤다. 데뷔작이지만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주제를 녹여내는 내공은 만만치 않았고 또한 은근히 깔려있는 주제가 진지하기 그지 없어 왠지 스릴러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회학 보고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엔 주 소재인 아동 성폭력 말고도 동성애 같은 다른 사회 차별적 요소들도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보다 핵심적으로 비스트는 그 '심판'의 근저에 깔린 '차별'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는 사실이 너희는 우리보다 저열하다로 곧장 연결되는 그런 '차별' 말이다. 바로 그 차별이 파시즘의 토대임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비스트'의 작가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파시즘과 작품을 통해 맞서 싸웠던 해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의 경향을 그들 역시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쉽게 읽히지만 만만치 않은 깊이와 여운을 맛보게 해 준 작품. 그들의 후속작이 정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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