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2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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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오랜 전국시대는 무수한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많은 요괴들을 낳았고 또한 애니미즘적 성향이 강한 일본 특성상 한 번 생성된 요괴들은 쉬이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일본 산천이나 계곡 혹은 논밭이나 마을 어귀 그 어디에서나 그 오랜 지난했던 전쟁의 역사 동안 비극의 씨앗들은 뿌려졌을 것이며 희생자의 피와 눈물 그리고 원념으로 요괴들은 태어나고 자라났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 요괴란 한 개인의 비극적 삶이 죽은자의 목소리가 되어 산자들에게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점차 사회가 안정되어가자 이제 그 호소의 배경이 되었던 비극의 이야기는 잊혀지고 남은 건 다만 눈에 보이는 그 괴이하고 흉물스런 몰골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오히려 사회가 안정될 수록 요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점점 공포의 대상이 된다. 어느새 사람의 탈을 벗고 괴물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불안했던 그 시대 그러니까 항상적인 죽음과 기근 그리고 병마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그 시대에서 요괴가 태어난 이야기는 곧 듣는 자, 그렇게 산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산자들의 운명과 요괴가 되어버린 자들이 운명이 그리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괴는 측은과 동정의 대상이었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공동운명체였기에. 하지만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워지자 이제 죽은자들의 이야기는 점점 산자들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 '저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현재의 안정과 풍요는 과거의 불안정과 빈곤을 두려워하게 되는 법. 가까이 하게 되면 다시금 옛날로 그렇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과거를 기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염의 공포인 것이다. 현대가 왜 위생과 청소의 신화에 빠져들게 되었는가? 바로 더러움과 쓰레기들이 그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들을 자꾸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용의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자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래된 것, 낡은 것은 재빨리 제거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약하고 초라한 자신들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약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 그렇게 자부하는 그들에게 과거의 모습은 약점이 된다. 불리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흔적을 지운다. 매일 몸을 씻고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청소하는 것이다. 전염의 공포는 건강 때문이 아니다. 비로소 획득한 이 새로운 정체성을 과거의 유령들로 부터 온전히 보호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이건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마저도 그렇다. 개인이 스스로 약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라고 최면을 걸듯 사회도 그렇게 성원들에게 최면을 건다. 폭력적으로 통일을 이루거나 권력을 잡아 태어난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권력의 기반이 그리 강고하지 못한 탓에 그 사회는 안정을 보다 희구하면 할 수록 과거의 잔재를 더욱 더 일소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기반이 약할 수록 권력은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이제 막 태어났다는 그 '새로움'을 더욱 더 강조할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의 정당성은 과거의 비난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 사회에 있어 과거는 오로지 제거의 대상이다.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를 그 몸에 간직하고 있는 요괴들 역시 기피와 혐오 그리고 공포의 대상으로 낙인 찍힌다. 오로지 배척하기 위하여 배척할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 그 태평성대 에도 시대에 요괴들은 그렇게 눈과 입을 빼앗기고 설 자리를 잃었다. 해서 요괴의 이야기를 채록한다는 것은 바로 그 몸에 각인된 과거의 잔여를 모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 안정과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무시되고 버려진 수많은 '다른 자'로 낙인 찍힌 그들의 신음과 눈물 그리고 호소를 모으는 것이다.  

  '항설백물어'의 요괴 이야기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요괴의 배제는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렇게 개인들에 의해서 배제되어 버려진 요괴이야기들이 주로 모여있는 게 저번에 나온 '항설백물어'라고 한다면 이번에 나온 속편 항설백물어는 사회적 차원에서 배제되고 활용되는 요괴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괴들은 이제 모든 이야기를 잃고 단순히 흉물스런 그 껍데기만 남았다. 물론 그건 요괴 탓이 아니다. 요괴 스스로 그 가면을 쓴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을 다른 것으로 낙인 찍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막아버린 산자들이, 풍요와 편리에 취해 타인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기로 결심하고 눈감아버린 산자들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그들에게 씌워준 가면인 것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처럼. 

  '너희들이 그렇게 무서운 가면을 써야 내 마음놓고 너희들을 싫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무 죄책감 없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들의 '가면 씌우기'는 사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나 똑 같은 것이다. 온갖 색깔론, 지역주의,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한 각종 신분 지위 성별에 따른 모든 차별들에 다는 이유들. 그것들 역시도 우리가 눈앞에 현존하는 타인의 고통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시하기 위하여 씌워주는 요괴의 가면인 것이다. 그러니까 기피, 혐오 그리고 공포 같은 것들은 사실 외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괴물은, 요괴는 그 자체로는 공포스럽지 않다. 우리가 상처입지 않고 무시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혐오나 공포의 가면을 씌워주기 전 까지는. 

  그렇게 요괴는 껍데기만 남는다. 어렵게 얘기해서 '두려움'의 기표만 남는다. 실체는 없다. 길가에 떨어진 이름표와 같은 것이다. 남은 건 이름뿐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사회는 이런 걸 좋아한다. 주워다가 내치고 싶은 사람, 몰아내고 싶은 무리가 생기면 달아만 주면 되니까. 그리고는 손가락질을 하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요괴다!" 사람들이 돌아본다. 사회가 그 중 하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 너 요즘 아프지?"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거 얘네들 때문이야." 하면서 이름표를 붙인 무리를 가리킨다. 사람들 눈이 번쩍 뜨인다. 그리고 또 하나를 불러서 "얘. 너  요즘 일이 잘 안되지?" "응. 힘들어 죽겠어." "그것도 얘네들 때문이다~" "뭐!" 사람들 코가 벌렁인다. 이번엔 모두에게 말한다. "여러분, 우리 요즘 너무 가난해졌죠?" "그래, 그래!" "그것도 애네들 때문이에요!" "정말? 네 이녀석들을!!"  사람들의 입이 일그러지며 이제 이름표를 단 무리에게로 몰려간다. 그 때 사회는 뒤로 냉큼 물러나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요걸로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사회는 그 안정을 위해 반드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요괴는 바로 이것을 위한 가장 1차적 희생양의 기표인 것이다.

  '항설백물어' 속편은 바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노뎃포'로 부터 에필로그와도 같은 '로진노리'까지 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사회에서의 요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그 요괴가 어떻게 사회에서 생산되고 이용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긴밀하게 엮이어져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쩐지 독자를 계몽하려는 듯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서 마냥 지루할 것 같지만 하하! 그렇다면 여기서 작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 작가가 누군가?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를 썼던 바로 그 교고쿠 나쓰히코다. 요괴이야기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 사회학 미학 이론을 마구 버무려 끊임없이 풀어내는 수다로 독자의 오감과 정신을 휘몰아쳐대던 필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한 마디로 괜한 걱정이라는 말씀이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광골의 꿈'에서 실망한 나머지 조금은 반쯤 접어두고 보는 작가였는데 이번의 작품으로 완전히 다시금 신뢰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와 더불어 이 작품을 나만의 개인적인 나쓰히코 베스트 3로 꼽아본다. '노뎃포'의 작은 이야기로 부터 시작해서 뼈대를 세우고 살을 채워 점점 그 스케일을 불려가는 솜씨가 만만찮다. 스케일이 방대해지는데도 아귀마저 딱딱 떨어지니 절묘하다. 한 마디로 당신이 나쓰히코의 팬이라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상투적이라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다. 속편도 이리 대단하거늘 이 다음 '후편'은 일본 최고의 대중소설에게 준다는 나오키 상마저 수상했다고 한다.(세상에 어느 정도로 괴물스런 작품인거야?) 정말 기대가 된다. 빨리 출간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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