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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마츠모토 세이조로 대표되는 사회파 미스터리에 거의 장악되다시피 하던 일본 미스터리계에 다시금 본격(일본에서는 정통 미스터리를 '본격'이라 이른다.)의 부흥을 가져와 '신본격의 기수'라 이름 받은 아야츠지 유키토는 그의 신본격의 신호탄이자 데뷔작 '십각관의 살인'의 서두에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최신의 과학 수사기술이 명탐정들의 활약을 다 가져가 버렸다고. 맞는 말이다. CSI를 보라. 아무리 홈즈 같은 명탐정이 있더라도 거기 어디에 콧배기를 조금이라도 들이밀 여지가 있는가 . 바로 곁에 있더라도 CSI 대원들 그 누구도 명탐정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심문이니 대질 조차도 필요없다. CSI의 모토는 그거다. '제대로 된 과학적 수사 기술만 있다면 증인도 자백도 필요없다.'라는 것. 그들이 종종 용의자를 부르는 것도 사실은 DNA를 얻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현대에서 명탐정이 설 자리는 그렇게 좁아졌다. 때문에 명탐정을 등장시키고 싶은 작가는 어쩔 수 없이 '클로즈드 서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폭풍 속에 고립된 섬, 폭설 속에 고립된 산장 아니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 처럼 화산폭발로 인해 고립된 캠프 이렇게 말이다.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그렇게 해서 과학이라는 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 두뇌의 지적인 능력으로만 주어진 미스터리를 풀 수 있도록 말이다. 명탐정의 존재는 미스터리의 재미가 바로 지적 유희에 있음을 의미한다. '십각관의 살인' 첫 머리에서 유키토 했던 말 그대로 '자극적인 논리 게임'인 것이다.
이 게임을 위해서 미스터리 작가와 독자들은 그동안 '톰과 제리'식의 게임을 해왔다. '제리'인 미스터리 작가들은 계속 독자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참신한 트릭들을 개발해왔고 독자들은 거기에 속지않기위해 점점 교활한 '톰'이 되어야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뉴튼식 물리법칙에 지배를 받는 세상. 그 세상의 한계 때문에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트릭들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때로는 가스통 루르의 '노랑방의 비밀'이나 존 딕슨 카의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처럼 심리적 트릭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무한히 개발될 수는 없는 법. 결국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시작이 되었고 아야츠지 유키토 자신 역시 데뷔작에서 써야 했던 '서술 트릭'이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유키토의 작품 뿐 아니라(십각관의 살인, 미로관의 살인 정도가 해당될 것이다. 두번째 작품 시계관의 살인은 물리적 트릭을 쓴다.)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그 맛을 보았고 더하여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에 이르러서는 서술 트릭의 극한을 체험한 바가 있다.
'섬을 삼킨 돌고래' '최후의 끽연자'를 통해서는 그 풍자적인 재능을 '시간을 달리는 소녀' '파프리카'를 통해서는 그 SF적 역량을 여실히 느끼게 해줬던 IQ 178의 진짜 천재 쓰쓰이 야스타카의 그 수많은 작품중 단 세 개 밖에는 없다는 미스터리 작품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난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쓰쓰이 야스타카가 미스터리도 썼구나 하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봉인판은 세 번 만났는데 그 첫번째가 앞서 말했던 '살육에 이르는 병'으로 그건 띠지로 전체가 다 봉인된 형태였고 다른 하나가 북스피어에서 나온 빌 밸린져의 '이와 손톱'인데 그것은 결말 부분이 봉인된 상태였다. 지금 얘기하는 소설 '로트레크 살인사건' 역시도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는 형태다. '봉인'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기막힌 트릭이길래 이렇게 일부러 봉인까지 시켜놓았을까 하는 기대감. 과연 그 기대감으로 한껏 고양되어 눈에 힘을 주고 쓰쓰이 야스타카가 펼쳐 보이는 미스터리의 세계로 들어갔다.
제목 '로트레크(아마도 로트렉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 같다)' 처럼 이 소설의 화자는 여덟살 때 사촌의 우연한 실수로 크게 다쳐 그만 하반신이 영원히 성장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남자다. 그의 나이 28세 때, 그는 예전엔 자기 집 소유였으나 부친의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팔아버린 한 독일인 사업가가 지은 커다란 별장으로 초대된다. 거기에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옥문도' 처럼 아리따운 세 처자와 그녀들의 부모가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거기서 제1 제2 제3의 흉악한 살인이 일어난다. 독자의 임무는 '나'가 보여주는 사건의 정경을 잘 따라가면서 그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사건의 얼개를 밝혀준다. 잠재적 용의자들의 관계, 건물의 구조, 흉기의 존재까지. 일부러 숨기거나 미스디렉션을 유도하는 부분은 별로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공정하다. 동기도 파악 가능하고 모두 권총 살인인지라 깔끔하다. 즉 야스타카는 가장 주가 되는'트릭'만 빼고는 공정한 지적 스포츠가 되기 위하여 녹스의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트릭이 가져다 준 반전의 효과가 꽤나 커서 어쩌면 '이게 뭐야! 반칙 아냐!'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나도 범인을 맞히긴 했지만 이런 기발한 트릭은 정말 처음이다. 새삼 쓰쓰이 야스타카의 솜씨에 놀란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자면 야스타카는 절대 반칙을 쓰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에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했던 말을 토대로 추리를 했고 결국 두 번을 다시 꼼꼼이 읽고서야 봉인을 뜯기 전에 어느정도 트릭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지적 논리 게임을 좋아한다면 한 번 도전해 볼만한 게임인 것이다. 어떤가? 로트레크의 포스터들이 가득한 이 저택으로 한 번 초대되어 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