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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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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도록 기다렸던 책이다.

 예전에 스페인인 교수로부터 라틴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에스파이나와 로마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교수는 로마에 반해 라틴어를 전공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로마에 대한 이야기를 라틴어 강의보다 더 많이 들었다. 저음이 참 매력적인 사람이라 그 목소리로 황혼녘의 창문을 배경으로 키케로의 산문을 낭송할 땐 참으로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하루는 로마에 대해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 하나 있다면서 소개해줬는데 그것이 바로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일인자'였다.



 콜린 매컬로가 신부와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의 격정적인 로맨스를 보여줬던 '가시나무새'의 작가라는 걸 아는 우리들은 그녀가 로마에 대한 역사소설을 썼다는 것이 얼른 믿겨지지 않았고 더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로맨스와 역사 소설은 양 극단에 서 있는 문학이라고 생각했기에 과연 잘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교수는 그런 우리의 의심이 무색하게도 로마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라이벌 관계였던 마리우스와 술라의 이야기를 꽤나 현실감 넘치게 잘 담고 있다는 둥 칭찬이 자자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찾아 읽어볼 생각을 했는데 그 때는 이미 절판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교수의 말을 검증할 기회는 갖지 못했고 시간이 흐르고 나도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어느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최근에 우연히 문학동네 카페에 들렀는데 거기서  이 책의 블라인드 서평단을 모집하는 글을 보게 된 것이다. 블라인드 서평단이니만큼 당연히 작가도, 진짜 어떤 책인지도 밝히지 않고서 그저 약간의 내용만 소개해 놓았을뿐이었는데 그것만 보고도 난 그 책이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일인자'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일인자냐고 댓글로 남겼더니 담당자가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걸 보고 '이제야 이 책을 보게 되는구나!'하고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른다. 다행히 서평단에 선정되었고 그렇게 드디어(!) 읽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교수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의 기회를 가진 것이다.(생각난 김에 스페인에서 잘 살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교수님^^)


 여기서 '그래 기회를 가져보니 어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교수의 말대로였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제 겨우 1권을 읽었을뿐이지만 그래도 너무 재밌었다. 오래 기다렸던 것이니만큼 좀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는데 그런 내 맘과는 다르게 페이지가 어찌나 휙휙 넘어가던지 자못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과연 '가시나무새'로 3천만부를 팔아치워 대중성을 입증한 콜린 매컬로다웠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걸신들린 듯 읽게 되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그건 생동감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작품의 캐릭터나 상황의 묘사가 너무나 치밀하고 현실감 넘치면 '작품이 살아있다!'라는 말을 곧잘 하곤 한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은 딱 '로마의 일인자'를 위한 말이다. 캐릭터도, 그들이 활동하는 로마라는 공간도, 그들이 활약하는 이야기도 모두 4D로 체감하는 것처럼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콜린 매컬로의 철저한 고증과 상상력이 제대로 화학작용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래 콜린 매컬로는 한 작품에 꽤나 많은 공을 들이는 작가로 유명하다. '가시나무새'를 쓸 때도 그녀는 그 작품을 4년이나 구상했으며 다 쓰고 나서도 마음에 안 들어 10번이나 고쳐썼을 정도로 완벽주의를 고집했다. 그건 이 '로마의 일인자'도 마찬가지다.


 '가시나무새'를 냈던 시기에 자기처럼 '러브 스토리'란 작품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에릭 시걸에 영향을 받아(에릭 시걸은 원래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당시엔 라틴 문학을 강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영향으로 콜린 매컬로는 이 작품 이전에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트로이의 노래'도 쓴 바 있다.) 쓰게 된 이 작품을 위해 콜린 매컬로는 무려 13년이나 준비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로마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으며 때로는 나중에 나올 술라의 부하 장군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미트라다테스 원정을 조사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터키를 관통해 17,700km를 답사하기도 했다. 이 책이 로마인들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치밀하게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열정과 노력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건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로마사에 관심이 있다면 마리우스술라란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케사르의 전 세대로서 케사르에서 완성되는 1인 황제라는 전제왕정 시대의 맹아가 바로 이들에게서 발아되었으니까 말이다. 즉 원로원 중심의 공화국에서 황제가 다스리는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가장 중심인 인물인 것이다. 마리우스는 군인이 천직인 사람으로 오랜 전장 경험을 통해 군단의 중심을 120명의 마니풀루스에서 600명의 '코호르트'로 재편하여 후일 케사르가 제국을 건설하는데 가장 밑받침이 되었던 무장보병군단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며 술라는 비천한 몸으로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지략과 능력으로 로마의 일인자에 올라 수많은 정복활동으로 제국의 기틀을 다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국의 기틀을 다졌지만 원래는 둘 다 모두 결코 그만한 자리로 나갈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엄청난 재산에다 뛰어난 군인의 자질마저 갖췄지만 그리스어도 제대로 못하는 촌놈으로 취급받아 집정관이 되려는 자신의 야망을 번번이 접어야 했고 술라는 노예나 다를바 없는 천한 삶의 환경 때문에 엄청난 재산이 있어야만 가능한 로마 정계 진출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 한계를 극복한다. 그리고 로마인 모두가 오매불망 바라는 일인자 '프린켑스'의 자리에 그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거기에 대해서라면 마리우스보다 술라가 훨씬 입지전적이다. 마리우스야 원래 가진 것이 많았지만 술라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후일 생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었던 마리우스를 물리치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결국엔 독재관이 되어 스스로 황제라 칭하지 않았을 뿐 황제나 다를 바 없는 권력을 휘두르게 되니 인생이 정말 드라마틱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술라의 생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밑바닥 모습에서 시작하는 이 '로마의 일인자' 이야기가 여지없이 흥미로울 것이다. 더구나 콜린 매컬로는 더없이 생생하게 그를 그려내고 있으니. 하지만 모르는 이들에게는 좀전에 내가 술라에 대해 한 말이 분노를 자아낼 지도 모르겠다. 여기서의 술라는 그리 공감할만한 인물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추천사조차 마리우스를 카이사르의 선구자라는 둥 주인공처럼 대우하고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확실하게 드러나겠지만 주인공은 단연 술라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콜린 매컬로는 여기서 술라를 전혀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실제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갈 중심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엔 좀 냉정하다고 싶을 정도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래도 역사적 현실을 고려한 탓이 아닌가 한다. 당대 로마에서 그가 장차 걸어가게 될 삶의 모습과 현재 그의 처지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기에 분명 그만한 높이를 수직 상승하려면 부정한 수단을 취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술라는 독재관이 되었을 때 무려 9천명이나 되는 정적들을 학살함으로써 그의 잔혹한 면모를 드러낸 바도 있어서 그런 그라면 충분히 사용할만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마리우스가 주인공으로 강조될만큼 술라가 너무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라 앞으로 이 술라에 대한 독자들의 공감을 어떻게 얻어내느냐가 콜린 매컬로의 과제로 보인다. 내겐 시리즈에 대한 참으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이기도 하다.


 어쨌든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조차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았던 마리우스와 술라의 이야기를 이토록 상세히 들을 수 있는 것은 로마 제국 초창기의 모습을 보다 많이 알고자 하는 이들에겐 확실히 더없는 즐거움이다. 더구나 그 내면의 한 올 한 올마저 세밀하게 길어내어 그들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니 마치 그들이 채취라도 맡으려는 것처럼 책에다 더 코를 박게 된다. 


 솔직히 나는 마리우스와 술라를 삼국지의 주유와 공명 같다고도 느꼈다. 어디까지나 인품이 아니라 승패만 가지고 생각한 것이지만  분명 마리우스는 공명에 대해 주유가 이렇게 말하며 한탄했던 것처럼 똑같은 기분을 술라에게서 느꼈을 것이다.

 "하늘이 이 주유를 내리어 천하를 평정하고자 했다면 어찌하여 또 공명과 같은 자를 세상에 허락하였을까!"


 어쩌면 시오노 나나미도 콜린 매컬로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기분을 공유했을 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콜린 매컬로가 이 책을 썼을 때 왜 출판업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을까 아쉬워할 것임에 틀림없다. 콜린 매컬로가 고백하기를 '로마의 일인자'를 썼을 때 당시 매컬로의 출판업자들은 한결같이 이 책을 미워했다고 한다.

 '우리는 로마 이야기 따윈 관심 없어요. 우리가 원하는 건 오로지 가시나무새 아들의 이야기라구요!'


 하지만 매컬로는 굴하지 않고 이 이야기를 펴냈고 이제 사람들은 가시나무새 아들 이야기보다 로마의 일인자 뒷 얘기를 더 원하게 되었다. 원래 매컬로는 케사르의 암살을 끝으로 '로마의 일인자'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었지만 독자의 성원으로 계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모두 일곱 권의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원해도 그 뒷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올해 2015년 1월 그녀는 세상과 작별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대표작 '가시나무새' 머리말엔 다음과 같은 가시나무새에 대한 켈트족의 전설이 인용되어 있다.

 '가시나무새는 죽기 직전 일생에 단 한번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운다. 그 새는 알에서 깨어나 둥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단 한 번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가시나무를 찾아다닌다.'


 '로마의 일인자'는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녀가 이 작품에 쏟은 역량과 나타난 결실을 볼 때, 어쩌면 이 '로마의 일인자'야말로 그녀가 단 한 번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찾아다녔던 가시나무는 아니였을까 생각하게 된다.

 많이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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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2015-07-05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로마인 이야기를 읽을 때, 읽는 재미는 물론이고 시오노 나나미가 참 부러웠어요. 좋아하는 곳에서 좋아하는 것을 결국 해냈으니까요.

혹시라도 끝내지 못 할까 봐 전권을 다 쓸 때까지 병원에도 가지 않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정말 부럽더라고요.

<로마의 일인자>가 매컬로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은 너무 아쉽지만 이렇게 용기와 실력을 모두 갖춘 분들은 정말 존경스러워요. 이 책, 빨리 읽고 싶네요 ㅎ

ICE-9 2015-07-05 22:21   좋아요 0 | URL
로마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면 정말 강추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로마판 삼국지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재미와 로마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한 작품에 이만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작가들이 부러워지는군요.^^

stella.K 2015-07-0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콜린 매컬로우가 타계했군요. 그래서 리뷰 제목을 그리 정하신 거로군요.

저는 의외로 예전에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재미없게 읽은지라 이 책 블라인드 서평단 모집도
별로 관심없었어요. 제가 역사 쪽은 또 약한 편이라. 근데 은근 후회되네요.ㅠ
가시나무 새는 영화도 보고 책으로도 읽었는데 도통 생각이 안 나네요.
저도 조만간 읽어 봐야겠네요.^^

ICE-9 2015-07-07 01:12   좋아요 0 | URL
네, 매컬로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 아쉬움없이 떠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 본 제목입니다^ ^
로마의 일인자는 사실 역사를 전혀 몰라도 즐기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해요. 사실 저도 시오노 나나미의 책은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없네요^ ^; 그랬기에 로마의 일인자는 그 시오노 나나미에게 부족한 부분, 그러니까 쉽고 즐겁게 그리고 아주 생생하게 로마의 이야기에 빠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질투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죠.^ ^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 `가시나무새`의 기억은 아련하기만 해서 언제고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
 
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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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여성성으로 생각하는 것들, 그러니까 다정함이나 보살핌 혹은 헌신 같은 것들 모두는 근대 유럽의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이라는 논의가 있다. 대량생산 체제가 됨으로써 보다 강도 높은 남성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직장과 가정을 분리시켰는데 그러다 보니 남성 노동자의 신경을 오로지 공장에만 집중시킬 필요가 커져서 가정의 관리 책임은 온전히 여성이 맡도록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장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테일러주의에 의하여 노동시간이 초단위까지 관리되고 포드주의로 인하여 생산 과정 전체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오로지 파편화 되고 반복된 노동만을 하던 노동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고 관리와 작업 방식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혁명을 경험했던 유럽은 그 불만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커기지 전에 해소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여성이 홀로 전적으로 관리하는 가정을 구현하여 탈출구로 삼으려 했다. 다시 말해 가정을 노동으로 지친 육신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따스하고 다정한 보금자리'라는 것으로 상징 조작을 한 것이다. 산업 혁명이 이루어진 19세기의 영국을 시작으로 가정을 이상향처럼 만드는 흐름은 생겨났다. 그리고 산업 혁명의 여파가 지나간 곳마다 어김없이 '가정의 이상화(化)' 작업 또한 병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정의 이미지에 대한 전말이다.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는 가정의 이미지는 이처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연히 여성의 이미지도 가공되었다. 가정이 진정으로 남성 노동자에게 쉼터가 되려면 무엇보다 여성을 거기에 맞도록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넘치고 언제나 다정하며 남성 노동자의 고민에 공감할 줄 아는 여성 유형이 채택되었다. 한 마디로 남성이 가장 편안히 가정에 거할 수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예전 영화 중에 니콜 키드만이 나왔던 '스텝포드 와이프'라는 것이 있다. 스텝포드 지역의 남편들이 아내를 세뇌하여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만든다는 줄거리인데 그 모습이 바로 19세기에 널리 보급시킨 여성의 이상적 모습과 판박이다. 단적으로 여전히 우리가 그 때 구축된 여성 모습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인데 그 기원이라 할 19세기 당시의 여성은 주로 '천사'의 이미지로 가공되었다. 19세기에 여성을 두고 가장 널리 유행한 말은 바로 '가정의 천사'였다. 이 말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도 나온다. 울프는 작가가 되기 위해 자신은 늘 출몰하는 유령과 싸워야 했는데 그건 바로 가정의 천사라는 유령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가정의 천사라는 유령은 자꾸만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사회에 순응하도록 유혹했다고 말이다. 그렇게 사회는 천사가 지니는 덕목을 여성에게 요구했고 천사야말로 여성이 되어야할 바람직한 모습이라며 널리 유포했다.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여성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남성의 요구에 철저히 맞춰서 말이다.


 여성의 존재는 지워졌다. 여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오로지 남성의 그림자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것도 남성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을 때만 겨우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여성의 욕망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계속 주장할 경우엔 죽음마저 가능할 정도의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아니, 그저 불응만 해도 학대와 폭행이 이어졌다. 당시 '가정의 이상화(化)' 작업은 가정의 사회로부터의 격리도 가져왔는데, 그것은 사회가 가정을 가장인 남성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사적 영역으로 인정해버리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아무리 가정 안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험한 꼴을 당해도 경찰은 개입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편의 당연한 권리로 존중해 버렸다예를 들어 당시의 유명한 영국 교수 트리벨리언이 쓴 '영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남자가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여겼으며 신분이 높건 낮건 아무런 수치심 없이 하는 일이었다.(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에서 인용)" 여성은 법의 보호는 커녕 호소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참는 것 뿐이었다. '가정의 천사'라는 미명 아래 정작 자신을 구원할 날개는 모조리 제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헨리크 입센이 '인형의 집' 원고 앞에다 적은 메모에 나온 말 그대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순전히 남성적인 사회에서, 법을 만드는 것도 남성이며 소송을 걸고 재판하는 사람들은 남성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일에 대해 판단한다.('인형의 집' 작품 해설 p.134에서 인용)


 노르웨이의 작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1879년에 출간되었으니 바로 그런 시기에 집필된 작품이다. 따라서 그 때의 시대상이 작품에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을 남성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가정의 천사'라 불렀듯이, 이 희극에서 남편 헬메르 토르발이 아내 노라를 귀엽고 철없는 이미지를 한껏 강조하는 '종달새'나 '다람쥐'로 부르는 것도 그렇고, 초반 노라의 관심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어떻게 집안을 꾸밀 것인가에만 맞춰져 있는데 그 또한 당시 사회가 남성이 보다 쾌적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여성에게 높은 청결 의식과 집을 아름답게 꾸밀 것을 요구한 것과 일맥상통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안주인인 노라에겐 정작 돈을 관리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조차 마음대로 사먹지 못할 정도로 남편에게 통제당하는데, 이것 역시 남자에게 재정 관리 권리를 몰아주기 위해 여성의 낭비벽과 약한 자기 통제력을 강조했던 시대상의 반영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형의 집'을 읽으면서 19세기 여성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 적나라한 현실을 목도할 수 있다. 당시는 지식인들조차 여성에게 신은 지적 능력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공공연히 떠들던 시절이었다. 남성만이 쓸 수 있었던 펜을 들고 자기 표현을 하는 여성들은 히스테리적 광기의 소유자로 치부되어 압도적인 비난을 받았고 인격적인 모독과 함께 존재마저 묵살되는 일이 흔했다. 그것이 보편적인 남성의 모습이었다. 실낙원을 쓴 존 밀턴도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한 존 스튜어트 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그만큼 용기 있는 작품이었고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쓴 '페르 귄트'처럼 사회의 상식에 매몰되지 않는 분방한 자유주의자인데다 '민중의 적'처럼 사회 변혁 의식 또한 높은 그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모습은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노라'에게도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 초반의 노라는 남편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인형처럼 보이지만 10년만에 만난 여자 친구 크리스티네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사실 노라는 남편의 통제를 잘 받지 않으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어느 여성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노라에 대한 인식은 변하는데 노라가 크리스티네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는 사실 우리에게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노라 : 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구나. 다들 내가 진지한 일은 아무 것도 못한다고 생각하지.(P.24) 

 

 노라는 사실 자유분방하고 적극적인 존재였다. 더우기 그 적극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당시 여성은 남편의 허락 없이는 일절 돈 거래를 하지 못했는데 노라는 남편을 살리기 위하여 아버지의 서명까지 위조해서 이탈리아에서의 요양에 필요한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에 유포되었던 수동적인 여성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고자 그 사실을 혼자만의 비밀로 꼭꼭 숨겨두는데 결국 이것이 나중에 가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남편의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닐스 크로그스타드란 남자가 불미한 일로 해고할 위험에 처하자 노라에게 위조 서명된 대출 건을 빌미로 남편에게 해고 철회를 부탁하도록 협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이 닥차지 가녀는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노라 : 아, 이런! 나에게 겁을 주려고 하다니! 하지만 나도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아.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나는 사랑 때문에 한 일이잖아.(P. 47)


 그러나 아무리 이런 그녀이더라도 이 상황의 타개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가정을 지키려면 남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로써 입센은 거꾸로 드러낸다. 제아무리 강한 여성이더라도 가정의 굴레에 빠져 있는 한 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만큼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끝내 그 사실은 남편에게 들통나고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낸다. 남편을 위해서, 오직 사랑 때문에 한 일이었지만 남편은 그것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로 인해 자신이 바깥 사회에서 받게 될 위신의 타격만 걱정할 뿐이다. 남편은 노라가 그동안 현숙한 아내의 연기를 했을 뿐이며 진실은 사기꾼이었다고 비난한다.


 헬메르 : 아, 깨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팔 년 내내... 나의 기쁨이며 자랑이었던 그녀가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 아니 그보다 더한 범죄자였다니!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이렇게 흉한 일이었다니! 아아! (P.108)


 헬메르 토르발은 그동안 노라가 연극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같은 순간 노라도 깨닫는다. 자신이 남편 말마따나 정말로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아내의 모습을 연기했다는 것을. 그렇게 그녀가 소중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이 한낱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온전한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존재로 있어야 한다면 그가 있는 곳은 어디나 거짓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짜 집이 아닌 '인형의 집'.


 그 집 속에서 그녀는 인형이었다. 그것도 남성 중심의 사회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 그녀는 그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가 보호와 안정을 원한 탓이기도 했다. 인어공주의 계약과도 같이 말이다. 인어공주는 자신이 욕망하는 왕자와 맺어지기 위해 자신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목소리와 사람의 다리를 맞바꾼다. 목소리라는 자신의 주체성을 희생하고 사람의 다리라는 사회의 규격에다 자신을 끼워맞춘 것이다. 노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사회가 바라는 여성의 모습이 되기 위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포기했다. 알량한 안정과 보호를 이유로 말이다. 모든 것을 잃고난 지금에서아 비로소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있을 수 없다면 보호와 안정 또한 소용 없다는 것을. 인형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 보호도 안정도 진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때문에 그녀는 제발 남아달라는 남편의 애걸에도 불구하고 뛰쳐 나간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서. 그녀의 표현대로 하자면 '온전히 자유롭기 위하여'


 이처럼 '인형의 집'에서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과 진정한 자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입센이 여성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시대를 앞서서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현재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도 여성에게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아직도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다. 뭔가 목소리를 낼라치면 남자들에게서 곧잘 '히스테리 부리는 거냐?'는 말과 함께 손쉽게 묵살되거나 심하면 온갖 여성 혐오적인 반응마저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반응없이 여성의 목소리를 온전히 듣게 하는 것. 여성 학자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여성을 경청할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재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것은 19세기의 여성들이 사회가 인위적으로 조작한 모습을 자신의 본성으로 여기고 맞춰나갔듯이 현재의 여성들 또한 여전히 그 때의 유물이라 해도 좋을 '여성스러움'의 굴레에 갇혀 있는 지금엔 특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제2의 성'으로 페미니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바 있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여자들이 자신의 나약함이 아닌 강인함을 사랑하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게 가능해지는 날, 그날 비로소 사랑은 남자들에게 그런 것처럼 여자들에게도 치명적인 위험이 아닌 삶의 근원이 될 것이다.(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 P. 217'에서 인용 ) 


 지금 여성의 진실은 남성의 언어로 많이 오염되어 있다. 여성 자신만의 언어로 그것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진정한 소통과 이해 역시 가능해질 것이다. 그 때까지 여성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남성이 엮어놓은 조작과 왜곡의 그물을 자를 언어의 칼을 벼리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선구안적인 시각으로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왜 '인형의 집'이 결코 저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현재도 얼마든지 경청할만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여성 스스로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만개하는 그 날까지 '인형의 집'은 언제까지나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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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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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보니, 어쩐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 '남아있는 나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작품의 주된 사건들이 주로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그랬고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1958년이라는 시점에서 끝나는데 소설의 전체는 그 때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남아있는 나날'은 1956년에서 시작하고 그 소설 역시 주인공 집사 스티븐스가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렇게 시점과 진행 방식이 비슷했다. 주인공의 성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뱅크스 역시 스티븐스과 마찬가지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탐정이 되려하고 스티븐스는 '위대한 인간이 되는 열쇠는 위엄에 있다'라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그 위엄을 지키기 위해 완벽하고도 충실한 집사가 되려 한다. 그만큼 그들의 세계는 단일했고 또한 그랬기에 평안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10살 때, 상하이에서 살다가 부모님이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는 바람에 떠나기 싫었던 그 곳을 떠나 영국으로 와야 했다. 스티븐스 또한 나중에 나치 동조자로 밝혀지는 주인인 달링턴 경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하녀 캔턴을 쫓아냈을 때 옳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집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느라 방조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것이 그들 모두에게 풀어야 할 숙제가 되는 것도 같다.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부모님 실종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탐정이 되어 상하이로 떠나고 스티븐스는 캔턴을 찾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행을 한다. 그리고 모두 떠난 그 곳에서 그들이 정말로 알아야 했던 진실을 비로소 찾게 된다. 이 진실들이 껍질처럼 단단했던 자기 세계가 여지없이 허물어진 경험을 통해서 온다는 것도 동일하다.




 '남아있는 나날'은 89년에 나왔다. 그것은 '대처리즘'으로 집약되는 힘있고 부유한 소수를 위하여 다수의 국민이 희생되었던(대처가 죽었을 때 영국 국민들은 죽음을 환영한다며 피켓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대처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컸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80년대의 영국을 엄격한 계급 구분이 진리라 믿는 집사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캐릭터를 통하여 우회해서 풍자하며 비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슷한 궤적을 보여주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무엇을 보려주려 함일까? 이 소설은 2000년에 나왔다. 그리고 이 소설은 37년의 난징대학살이라는 미증유의 비극을 낳았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일본 제국주의가 치열하게 교전하던 중국을 담고 있다. 영국과 동떨어진 곳에서의, 그렇게 관망이 가능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90년대에 일어난 미국과 이라크 전쟁을 얼른 떠올릴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의 한 장면은 아주 강하게 그 전쟁을 암시하기도 한다. 바로 225페이지에서 펼쳐지는 일본 군함의 포격 장면이다.


 군중의 왁자지껄한 소음 너머 어딘가 먼 곳에서 아득한 대포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점점 알아차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을 뒤흔드는 요란한 굉음으로 그레이슨의 말이 중단되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손에 여전히 칵테일 잔을 든 채 미소를 짓거나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P. 255)


 지금 이 곳은 상하이고 크리스토퍼는 외국인 거주 지역에서 개최된 영국인들의 파티에 참석한 상태다. 바로 근처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인용한 글에서처럼 파티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가로 날아가는 포탄을 쌍안경까지 가져와 마치 폭죽놀이를 구경하듯 웃고 떠들고 즐기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은 이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그가 처음 본 전쟁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저런 것이 전쟁이로군요. 아주 흥미로워요. 사상자도 꽤 많이 날 테지요?" 누군가가 무심히 말한다. "저쪽 차페이에는 사망자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며칠 더 저렇게 볶아 댈 테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조용해지겠지요."(P. 228)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전에 크리스토퍼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보복 살인을 뜻하는 '노란 뱀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영국 영사관 의전 담당인 맥도널드에게 도움을 구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런 것엔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그건 모두 중국인 사이의 문제랍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최선이지요."(P. 224) 그들이 무심한 방관자가 되어 웃고 떠들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나랑 상관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안전이 보장되는 외국인 거주 구역에 머물 수 있으니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전쟁은 나만 죽지 않으면 꽤나 흥미로운 볼거리라고. 그들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우리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장면이었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되었던가? 실제로 소설에서 묘사한 창가에서 보여지는 하늘로 곡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포격 장면은 바로 그것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 전쟁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TV 화면으로 다가왔다. 수백개의 미국 크루즈 미사일이 이라크 본토로 쏟아지는 장면이 마치 스포츠 중계를 하듯 전 세계로 방영되었다. 옛 세대처럼 전쟁을 실시간으로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대에게는 그것이 전쟁에 대한 첫 경험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보며 전쟁이 가진 비참함 보다는 스펙타클한 면에 압도되었고 크리스토퍼와 똑같은 질문을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들었던 대답을 그 때 우리 역시 들었다. 그것은 전쟁의 의미를 변화시켰다. 더 이상 그것은 살육과 비극으로 점철된 시궁창이 아니었다. 그저 화려하고 말초신경을 잔뜩 흥분시키는 스펙타클일 뿐이었다. 그 속에서 사유는 정지되었고 전쟁은 소비되기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크루즈 미사일 아래 희생당한 타인에 대한 생각은 없이 태연히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바로 그것을 가져오고 있다. '대처리즘'과 다를 바 없는 90년대를. 후쿠야마 프랜시스는 동구권의 몰락을 두고 헤겔이 말한 역사의 종언이 왔다고 떠들어 대었고 곳곳에서 이제 이념 따위는 내버리고 현실적인 욕망의 충족에나 충실하자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재잘거리고 있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있는 나날'의 세계로 다시 한 번 걸어들어가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말한다. 우리가 안전과 안락이 보장된 (소설에서는 '공동조계'라고 부르는) 외국인 거주 구역을 보편 세계라 여기고 머무르려 하거나 추구하는 한 결코 언제까지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이 소설은 내가 속한 세계를 전부라 믿어 그 너머를 보려하지 않기에 타자가 겪는 아픔, 당하는 비극에 무심해 버린 우리 모두를 아프게 찌르고 있다. 실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가 그렇다. 단식하는 유족들 앞에서 어묵을 먹고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 부르는 이들을 보라.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소설 속 영국인들과 다르지 않다. 자신들은 절대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세계의 경계선은 절대로 허물어지지 않고 비극은 오로지 경계선 밖에서만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는 경계선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는 확신이 그들을 파렴치할 정도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과연 그 경계선이 튼튼한가 반문한다. 소설에서 외국인 거주 구역은 다양한 공간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는 크리스토퍼가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떠오르는 자신이 공부했던 집 안의 '도서실'이 그러하고, 그가 탐정으로 성공을 거두고 세실 경을 처음 만났던 사교 파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공간들은 결코 단단하지 않다. 모두 뜻하지 않게 허물어진다. 완벽하게 고요와 집중이 보장되었던 도서실은 부모님의 싸움으로 평온이 무너지고 사교 파티는 배제된 여인, 세라 헤밍스가 일으킨 소란으로 으스러진다. 그 어느 곳도 자신의 경계선을 올곶이 지켜내지 못한다. 크리스토퍼의 어머니는 집에서 납치당하고 '공동조계'조차 전쟁 중에 허물어진다. 결국 경계선이 확실하다는 믿음은 작위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우리들을 타인의 아픔에 냉담한 괴물로 만드는 진짜 이유를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가 한 발 물러나도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노라 핑계를 대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실제 원인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었다. 우리가 그걸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 자체가 우리에게 책임을 가지도록 한다고 말했다. 타인에게 현상된 고통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뭔가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건 곧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나를 희생하는 길이다. 우리는 그러기 싫었다. 책임을 떠맡기 싫었다. 그래서 핑계를 대었다. "세계가 이런 걸 어쩌란 말이야!" 아편 밀수를 두고 비난하는 아내에게 크리스토퍼의 아버지가 그랬듯이.(그것이 도서실의 평온이 깨어진 사건이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은 우리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고 있어요! 우리 모두를 말이에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요!" 말했다. 아버지의 목소리 역시 성이 나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방어적이고 자포자기한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오. 결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란 말이오." 그러다 어떤 시점에서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건 너무 심하군! 난 필립이 아니란 말이오. 난 그런 식으로 생겨 먹은 인간이 아니라고. 정말 너무하군. 너무 심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의 음성에는 뭔가가, 무시무시한 체념 같은 것이 있었다.(P.104)


 거기에 대해 가즈오 이시구로의 마음을 대변하여 어머니는 이렇게 비난한다.


 "당신은 그런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아요? 이런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같은 페이지)


 이것이야말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심이다. 왜냐하면 이건 소설이 보여주는 최후의 진실이고 거기서 크리스토퍼 뱅크스의 삶조차 (자신은 몰랐지만) 사실은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해 왔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부는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사악한 부가 가능하려면 착취 당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크리스토퍼 어머니가 그렇고 상하이의 공동 조계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토끼굴이 또한 그러하다. 경계선에 대한 확신이 작위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크리스토퍼와 그 어머니의 관계처럼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보다 광범위한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 운동화가 동남아시아의 아동 노동 착취를 통해 만들어지고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굶주리는 것이 사실은 서방 세계의 육류 소비로 인한 사료 작물의 재배로 곡물을 재배할 땅이 부족해서이듯 말이다. 그렇게 희생당하고 있는 토끼굴 같은 공간은 이미 우리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그것을 보여준다. 상하이에서의 어린 시절 친구 아키라 집에 있는 하인 링 텐의 방이 그러하고 상하이로 다시 돌아와 찾아가 본 어릴 때의 집은 아예 중국인 가족이 들어와 살고 있다. 그들은 도처에 있다. 크리스토퍼의 어머니가 갇혀 있다는 옌 친 노인의 맞은 편 집처럼 바로 지근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안 볼 수가 없다. 안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가 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잘못 아냐! 그들이 책임져야지 뭐."하면서. 이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려고 말이다.


 그러므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시야의 열림'이다. 아니, 알고도 못 본 척 한 것이니 '시야의 강제'라고 해야 할까? 보게 만드는 것이다. 보도록 하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당하는 비극을. 그것이 설령 아무리 멀리 있는 것이라 한들 말이다. 여기에 대한 관심, 사유를 하도록 만드는 것. 나는 그것이 가즈오 이시구로가 크리스토퍼 뱅크스의 회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나오는 크리스토퍼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에게 굉장한 울림을 갖는 것이다.


 이런 필생의 관심사에 속박당하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사라진 부모의 그림자를 오랜 세월 뒤쫓으면서 고아로서 세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기 전까지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P. 441)


 이런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 타인의 비극을 나와 별개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필생의 관심사로 만드는 것. 부모의 그림자처럼 비록 보이지 않을 지라도 세상의 그 어떤 타인의 아픔이든 나와 이어져 있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그것을 뒤쫓게 만드는 것. 그렇게 우리를 고아로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모든 것이며 제목인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 투영된 진심이다. 읽고나면 이제 우리는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말처럼 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P. 442)' 여기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여전히 현재형인 '세월호 참사'가 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스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 늦게 자각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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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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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프랑스의 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매니아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설을 즐겨 읽다보면 나도 한 번 작가가 되어볼까 하는 유혹이 들게 마련이다. 한 번은 그 유혹이 정말 강하여 도전해보자 생각했고 도움이라도 좀 받을까 하여 마침 발간되었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한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가의 신념'이란 책을 펼쳤다. 그러다 뒤늦게 이 책을 보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에서 다름아닌 이 대목을 만났던 것이다.


 얼마 전 '허클베리 핀' 신판을 읽으면서 내가 이 소설의 구절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 제임스 T 파렐의 '스터즈 로니건' 삼부작을 다시 읽으면서도 내가 그 구절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마 에밀리 디킨슨이 자기 시를 아는 것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신념' p. 39)


 읽자마자 '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사람이야 기계야? 무시무시한 기억력이었다. '허클베리 핀'은 아주 두껍다. 거기다 온갖 미국 방언까지 있다. 스티건 로니건 삼부작은 또 어떠한가? 페이퍼백 판으로도 페이지 수가 무려 896 쪽에 이른다. 정말 상당한 분량인 것이다. 그런데 이걸 몽땅 암기하고 있단 말이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도 대부분 암기하고 있다는 고백이 있다. 그러니 절망했다. 과연 이 정도의 기억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작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나는 꿈을 접었다. 그 때부터 나는 좋은 작가는 괴물 같은 자들만 되는 것이라 여겼다. 천부적 재능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스탠 리의 코믹인 '엑스맨'에 나오는 돌연변이 초능력자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래, 그것이 '작가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 어떤 외경심이라고 해도 좋다. 신탁을 받는 무녀와도 같이 그들이 하는 말을 고이 새겨 들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랬기 때문에 내게 경이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작가들의 인터뷰로 가득한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는 것은 한 마디로 올림푸스 신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또 어떤 어마무시한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놀랄 준비를 미리 하고서.


 생각해 보면 정말 이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란 일방향이었다.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는다. 그건 창출과 향유의 관계요, 송신과 수신의 관계였으며 생산과 소비의 관계였다. 지금도 여전히 작품의 해석에 대한 권위는 우선적으로 작가에게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독자란 작가가 새겨 놓은 의미를 캐내기만 할 뿐, 작가 이상으로 작품의 의미를 새롭게 창출하지는 못하는 존재였다. 한 마디로 독자는 소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만나게 된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설의 전체적인 부분을 일단 그려놓고 시작한다는 오르한 파묵을 제외하고는 모든 작가들이 정작 작품을 쓸 때조차 이 다음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확실히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움베르토 에코는 같은 페이지를 수십 번 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고는 엉망진창이라 고치고 또 고쳐야 했다고 고백했으며 폴 오스터는 자신의 작품 '거대한 폐허'에 등장하는 인물의 말을 빌려 '책은 무지에서 태어난다'고 말했다. 이언 메큐언은 문장이나 문단이 끊임없이 수정되는 방식을 좋아해서 타자기 보다 컴퓨터를 선호했고 필립 로스는 새 책을 준비할 때는 그 책에서 이야기할 문제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여야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가는 작품 안에서 자신이 철학을 명확히 표현할 권리를 버려야 한다고 단언했고 레이먼드 카버는 매일매일 연속해서 열 시간, 열 두 시간, 열 다섯 시간을 앉아 글을 쓰지만 그 중 많은 시간을 수정하고 다시 쓰는 데 할애한다고 얘기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글쓰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 흐르듯 쉽게 쓰이는 정신 상태라는 건 없으니 자신은 그저 꾸준히 글 쓰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고 고백했으며 작가를 우물에 비유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특히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작가는 자신이 꿈꾸는 완벽함에 필적할 수 없으며 자신은 불가능한 일에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동시대 작가들을 평가한다고 하면서 '소리와 분노'를 쓸 당시 몇 번이나 이리저리 고쳐도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미진함이 남아서 애를 먹었는데 출판되고 1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결할 수 있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하는가 하면 소설가는 소설을 시작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어떤 사건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 지에 대해 항상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EM 포스터 조차 때때로 등장인물이 자신의 계획으로부터 도망을 친 경험을 한다고 털어 놓았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조차 없는 미노타우루스의 미궁과도 같이 그 때 그 때 떠오른 영감이라는 희미한 횃불에 의존한 채,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출구를 찾아 나아가듯 수없이 반복된 시행착오가 빚어낸 결과였다. 여기서 주목하게 된 것은 그들이 출구를 찾았던 순간은 늘 자기 작품의 독자가 되었을 때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작가라는 신분이 순전히 생산한 것이라기 보다는 작가와 독자라는 이중 역할을 오가며 상호 협력한 결실에 더 가까웠다. 작가 혼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다. 유정에서 뭔가 제대로 된 것을 길어내려면 어디까지나 독자의 협력이 필요했다. 결국 작가와 독자는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의 관계였고 동반자였다. 의미는 홀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 나가는 창조의 여정 자체였다. 열 네살 때 같이 소풍을 간 친구가 갑자기 발생한 낙뢰에 맞아 죽은 것을 목격한 뒤로 세상 만사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은 폴 오스터가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이 맞는지 알기 위해 '전미 청취자 사연 프로젝트'를 통해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던 것처럼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도 말한다. '소설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다. 소설 안에서의 성찰은 본질적으로 가설에 불과하다. (p. 296) 설령 소설가들이 자신들이 사상을 표한한다고 한들 철학적인 주장이라기 보다는 역설이나 즉흥성을 가지고 하는 지적 유희의 습작에 불과하다(p. 297)'고 말이다. 결국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고 해도 그것은 완결된 게 아닌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따른다면 이제 독자의 참여를 기다리는, 비유하자면 보드 게임 판이 놓인 것과 같다. 작가는 문장의 조합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놀기 위한 기본적 규칙을 정해 놓았을 뿐이고 그 진정한 의미는 참여한 독자들의 플레이로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쓰는 것에 비해 종종 열등한 행위로 오해되곤 한다.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으로 확인가능한 구체적인 결과물을 남기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작가란 무엇인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읽는 것도 작가의 글쓰기만큼이나 능동적인 행위였다. 가필이란 형태이든, 수정이란 형태이든, 그것 나름의 의미 경로를 만들어 나가면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독자 자신의 작품을 말이다. 세상의 누구나 저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듯이 읽는다는 행위도 자신만의 책을 쓰는 일이었다. 포크너의 말마따나 이야기로 자신의 불멸을 보장받는 것은 굳이 작가만의 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우리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도 허락된 권리였다.


 실은 요즘 읽는다는 것에 많은 회의가 들었다. 나날이 실망스럽기만한 세상의 풍경을 목도하면서 책을 읽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책으로 알게된 것 때문에 더 괴롭기만 했을 뿐. 어쩌면 나 역시도 읽는 행위 자체를 너무 실리적으로만 바라본 것은 아닌지 싶다. 읽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능동적 창조이며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성장하듯이 나 자신을 부단히 성장시키는 행위인데도 말이다. 그것을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닫는다. 다시금 열심히 읽어 볼 생각을 한다. 문득 하루키도, 오스터도, 마르케스도, 로스도, 카버도 매일 꾸준히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읽기도 마찬가지이리라. 시작을 조이스 캐롤 오츠로 했으니 끝도 그녀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나에게 '빅엿'을 선사했던 바로 그 책, '작가의 신념'에서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이상적으로 볼 때 글쓰기는 열정적이지만 뒤죽박죽이기 십상인 개인적인 통찰과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범주화와 가치 평가에 재빠른 공동 세계와의 균형이기 때문에 이 글쓰기라는 예술은 기술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기술이 없다면 예술은 개인적인 것일 뿐이다. 예술이 없다면 기술은 돈벌이만을 위한 것일 뿐이다.(...) 젊거나 갓 시작하는 작가들은 끊임없이 고전과 현대 작품 양쪽을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 이 기술의 역사 속에 푹 빠져보지 않은 작가는 '창조적 노력의 95%가 열정뿐인 개인'인 아마추어로 영영 남게 되기 때문이다."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는 말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문득 깨닫는다. 그녀가 나를 좌절케 했던 그 괴물 같은 기억력에 대해 말한 것은 무엇보다도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역시 그녀 자신이 훌륭한 독서가였기 때문에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읽기는 중요하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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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30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소설 쓰는 사람만 가리키는 것은 아닐 텐데, 작가 하면 소설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어떤 글보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겠죠 재미있게 읽으니 쓰고 싶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작가는 쓰지 않으면 못견디는 사람인지도 모르죠 그런 게 있다면 좋을 텐데, 저는 늘 쓸 게 없어, 하는 생각을 하니까요 책을 읽은 다음에 늘 그러는군요 어쩌다 가끔 좋은 게 떠오르기도 하지만,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은 좋은데 글로 나타내면 어쩐지 이상해지기도 해서...

많이 외우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넓게 읽어야 하는 건 맞을 텐데, 저는 그렇게 못하고 있네요 ‘책 읽기의 즐거움은 그것이 별 쓸모가 없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는 말도 있더군요 책 읽기 자체를 즐기면 좋겠죠 저도 그렇게 못하기도 하는데, 싫어하지 않으니 여전히 읽는 거겠죠

여러 작가들이 하는 말 들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

ICE-9 2015-05-01 06:14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하면 저도 아직 글만큼 힘든 게 없어요. 그래서 더욱 작가들이 대단해 보이죠. 어떻게 저렇게 몇 시간이고 주구장창 쓸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그런데 확실히 늘 쓰다보면 좀 더 글쓰기가 쉬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백지 상태지만 뭔가 끄적이다 보면 신기하게도 줄기가 잡히고 아귀가 맞아가는 느낌을 받곤 해요. 그럴 땐 어떤 쾌감까지 느끼겠더군요. 어쨌든 열심히 읽어 볼 생각입니다. 작가들의 말을 듣고 싶으시다면 단연코 이 작가란 무엇인가를 추천드리고 싶어요. 정말 들을 게 많았어요^ ^

AgalmA 2015-04-30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스 캐럴 오츠 리뷰가 있는 [작가란 무엇인가 2]가 아닌 [작가란 무엇인가1]로 풀어나가시다니 재밌습니다.

ICE-9 2015-05-01 06:16   좋아요 0 | URL
와, Agalma님 말씀 감사합니다. 캐롤 오츠야 인터뷰보다 직접 쓴 `작가의 신념` 제게 너무 커다란 충격을 줘서 그렇게 풀어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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