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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우리가 흔히 여성성으로 생각하는 것들, 그러니까 다정함이나 보살핌 혹은 헌신 같은 것들 모두는 근대 유럽의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이라는 논의가 있다. 대량생산 체제가 됨으로써 보다 강도 높은 남성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직장과 가정을 분리시켰는데 그러다 보니 남성 노동자의 신경을 오로지 공장에만 집중시킬 필요가 커져서 가정의 관리 책임은 온전히 여성이 맡도록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장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테일러주의에 의하여 노동시간이 초단위까지 관리되고 포드주의로 인하여 생산 과정 전체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오로지 파편화 되고 반복된 노동만을 하던 노동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고 관리와 작업 방식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혁명을 경험했던 유럽은 그 불만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커기지 전에 해소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여성이 홀로 전적으로 관리하는 가정을 구현하여 탈출구로 삼으려 했다. 다시 말해 가정을 노동으로 지친 육신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따스하고 다정한 보금자리'라는 것으로 상징 조작을 한 것이다. 산업 혁명이 이루어진 19세기의 영국을 시작으로 가정을 이상향처럼 만드는 흐름은 생겨났다. 그리고 산업 혁명의 여파가 지나간 곳마다 어김없이 '가정의 이상화(理想化)' 작업 또한 병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정의 이미지에 대한 전말이다.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는 가정의 이미지는 이처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연히 여성의 이미지도 가공되었다. 가정이 진정으로 남성 노동자에게 쉼터가 되려면 무엇보다 여성을 거기에 맞도록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넘치고 언제나 다정하며 남성 노동자의 고민에 공감할 줄 아는 여성 유형이 채택되었다. 한 마디로 남성이 가장 편안히 가정에 거할 수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예전 영화 중에 니콜 키드만이 나왔던 '스텝포드 와이프'라는 것이 있다. 스텝포드 지역의 남편들이 아내를 세뇌하여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만든다는 줄거리인데 그 모습이 바로 19세기에 널리 보급시킨 여성의 이상적 모습과 판박이다. 단적으로 여전히 우리가 그 때 구축된 여성 모습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인데 그 기원이라 할 19세기 당시의 여성은 주로 '천사'의 이미지로 가공되었다. 19세기에 여성을 두고 가장 널리 유행한 말은 바로 '가정의 천사'였다. 이 말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도 나온다. 울프는 작가가 되기 위해 자신은 늘 출몰하는 유령과 싸워야 했는데 그건 바로 가정의 천사라는 유령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가정의 천사라는 유령은 자꾸만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사회에 순응하도록 유혹했다고 말이다. 그렇게 사회는 천사가 지니는 덕목을 여성에게 요구했고 천사야말로 여성이 되어야할 바람직한 모습이라며 널리 유포했다.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여성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남성의 요구에 철저히 맞춰서 말이다.
여성의 존재는 지워졌다. 여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오로지 남성의 그림자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것도 남성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을 때만 겨우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여성의 욕망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계속 주장할 경우엔 죽음마저 가능할 정도의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아니, 그저 불응만 해도 학대와 폭행이 이어졌다. 당시 '가정의 이상화(理想化)' 작업은 가정의 사회로부터의 격리도 가져왔는데, 그것은 사회가 가정을 가장인 남성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사적 영역으로 인정해버리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아무리 가정 안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험한 꼴을 당해도 경찰은 개입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편의 당연한 권리로 존중해 버렸다. 예를 들어 당시의 유명한 영국 교수 트리벨리언이 쓴 '영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남자가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여겼으며 신분이 높건 낮건 아무런 수치심 없이 하는 일이었다.(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에서 인용)" 여성은 법의 보호는 커녕 호소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참는 것 뿐이었다. '가정의 천사'라는 미명 아래 정작 자신을 구원할 날개는 모조리 제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헨리크 입센이 '인형의 집' 원고 앞에다 적은 메모에 나온 말 그대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순전히 남성적인 사회에서, 법을 만드는 것도 남성이며 소송을 걸고 재판하는 사람들은 남성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일에 대해 판단한다.('인형의 집' 작품 해설 p.134에서 인용)
노르웨이의 작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1879년에 출간되었으니 바로 그런 시기에 집필된 작품이다. 따라서 그 때의 시대상이 작품에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을 남성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가정의 천사'라 불렀듯이, 이 희극에서 남편 헬메르 토르발이 아내 노라를 귀엽고 철없는 이미지를 한껏 강조하는 '종달새'나 '다람쥐'로 부르는 것도 그렇고, 초반 노라의 관심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어떻게 집안을 꾸밀 것인가에만 맞춰져 있는데 그 또한 당시 사회가 남성이 보다 쾌적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여성에게 높은 청결 의식과 집을 아름답게 꾸밀 것을 요구한 것과 일맥상통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안주인인 노라에겐 정작 돈을 관리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조차 마음대로 사먹지 못할 정도로 남편에게 통제당하는데, 이것 역시 남자에게 재정 관리 권리를 몰아주기 위해 여성의 낭비벽과 약한 자기 통제력을 강조했던 시대상의 반영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형의 집'을 읽으면서 19세기 여성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 적나라한 현실을 목도할 수 있다. 당시는 지식인들조차 여성에게 신은 지적 능력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공공연히 떠들던 시절이었다. 남성만이 쓸 수 있었던 펜을 들고 자기 표현을 하는 여성들은 히스테리적 광기의 소유자로 치부되어 압도적인 비난을 받았고 인격적인 모독과 함께 존재마저 묵살되는 일이 흔했다. 그것이 보편적인 남성의 모습이었다. 실낙원을 쓴 존 밀턴도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한 존 스튜어트 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그만큼 용기 있는 작품이었고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쓴 '페르 귄트'처럼 사회의 상식에 매몰되지 않는 분방한 자유주의자인데다 '민중의 적'처럼 사회 변혁 의식 또한 높은 그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모습은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노라'에게도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 초반의 노라는 남편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인형처럼 보이지만 10년만에 만난 여자 친구 크리스티네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사실 노라는 남편의 통제를 잘 받지 않으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어느 여성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노라에 대한 인식은 변하는데 노라가 크리스티네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는 사실 우리에게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노라 : 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구나. 다들 내가 진지한 일은 아무 것도 못한다고 생각하지.(P.24)
노라는 사실 자유분방하고 적극적인 존재였다. 더우기 그 적극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당시 여성은 남편의 허락 없이는 일절 돈 거래를 하지 못했는데 노라는 남편을 살리기 위하여 아버지의 서명까지 위조해서 이탈리아에서의 요양에 필요한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에 유포되었던 수동적인 여성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고자 그 사실을 혼자만의 비밀로 꼭꼭 숨겨두는데 결국 이것이 나중에 가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남편의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닐스 크로그스타드란 남자가 불미한 일로 해고할 위험에 처하자 노라에게 위조 서명된 대출 건을 빌미로 남편에게 해고 철회를 부탁하도록 협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이 닥차지 가녀는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노라 : 아, 이런! 나에게 겁을 주려고 하다니! 하지만 나도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아.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나는 사랑 때문에 한 일이잖아.(P. 47)
그러나 아무리 이런 그녀이더라도 이 상황의 타개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가정을 지키려면 남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로써 입센은 거꾸로 드러낸다. 제아무리 강한 여성이더라도 가정의 굴레에 빠져 있는 한 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만큼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끝내 그 사실은 남편에게 들통나고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낸다. 남편을 위해서, 오직 사랑 때문에 한 일이었지만 남편은 그것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로 인해 자신이 바깥 사회에서 받게 될 위신의 타격만 걱정할 뿐이다. 남편은 노라가 그동안 현숙한 아내의 연기를 했을 뿐이며 진실은 사기꾼이었다고 비난한다.
헬메르 : 아, 깨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팔 년 내내... 나의 기쁨이며 자랑이었던 그녀가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 아니 그보다 더한 범죄자였다니!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이렇게 흉한 일이었다니! 아아! (P.108)
헬메르 토르발은 그동안 노라가 연극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같은 순간 노라도 깨닫는다. 자신이 남편 말마따나 정말로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아내의 모습을 연기했다는 것을. 그렇게 그녀가 소중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이 한낱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온전한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존재로 있어야 한다면 그가 있는 곳은 어디나 거짓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짜 집이 아닌 '인형의 집'.
그 집 속에서 그녀는 인형이었다. 그것도 남성 중심의 사회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 그녀는 그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가 보호와 안정을 원한 탓이기도 했다. 인어공주의 계약과도 같이 말이다. 인어공주는 자신이 욕망하는 왕자와 맺어지기 위해 자신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목소리와 사람의 다리를 맞바꾼다. 목소리라는 자신의 주체성을 희생하고 사람의 다리라는 사회의 규격에다 자신을 끼워맞춘 것이다. 노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사회가 바라는 여성의 모습이 되기 위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포기했다. 알량한 안정과 보호를 이유로 말이다. 모든 것을 잃고난 지금에서아 비로소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있을 수 없다면 보호와 안정 또한 소용 없다는 것을. 인형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 보호도 안정도 진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때문에 그녀는 제발 남아달라는 남편의 애걸에도 불구하고 뛰쳐 나간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서. 그녀의 표현대로 하자면 '온전히 자유롭기 위하여'
이처럼 '인형의 집'에서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과 진정한 자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입센이 여성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시대를 앞서서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현재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도 여성에게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아직도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다. 뭔가 목소리를 낼라치면 남자들에게서 곧잘 '히스테리 부리는 거냐?'는 말과 함께 손쉽게 묵살되거나 심하면 온갖 여성 혐오적인 반응마저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반응없이 여성의 목소리를 온전히 듣게 하는 것. 여성 학자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여성을 경청할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재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것은 19세기의 여성들이 사회가 인위적으로 조작한 모습을 자신의 본성으로 여기고 맞춰나갔듯이 현재의 여성들 또한 여전히 그 때의 유물이라 해도 좋을 '여성스러움'의 굴레에 갇혀 있는 지금엔 특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제2의 성'으로 페미니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바 있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여자들이 자신의 나약함이 아닌 강인함을 사랑하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게 가능해지는 날, 그날 비로소 사랑은 남자들에게 그런 것처럼 여자들에게도 치명적인 위험이 아닌 삶의 근원이 될 것이다.(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 P. 217'에서 인용 )
지금 여성의 진실은 남성의 언어로 많이 오염되어 있다. 여성 자신만의 언어로 그것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진정한 소통과 이해 역시 가능해질 것이다. 그 때까지 여성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남성이 엮어놓은 조작과 왜곡의 그물을 자를 언어의 칼을 벼리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선구안적인 시각으로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왜 '인형의 집'이 결코 저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현재도 얼마든지 경청할만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여성 스스로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만개하는 그 날까지 '인형의 집'은 언제까지나 현재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