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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읽다보니, 어쩐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 '남아있는 나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작품의 주된 사건들이 주로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그랬고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1958년이라는 시점에서 끝나는데 소설의 전체는 그 때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남아있는 나날'은 1956년에서 시작하고 그 소설 역시 주인공 집사 스티븐스가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렇게 시점과 진행 방식이 비슷했다. 주인공의 성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뱅크스 역시 스티븐스과 마찬가지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탐정이 되려하고 스티븐스는 '위대한 인간이 되는 열쇠는 위엄에 있다'라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그 위엄을 지키기 위해 완벽하고도 충실한 집사가 되려 한다. 그만큼 그들의 세계는 단일했고 또한 그랬기에 평안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10살 때, 상하이에서 살다가 부모님이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는 바람에 떠나기 싫었던 그 곳을 떠나 영국으로 와야 했다. 스티븐스 또한 나중에 나치 동조자로 밝혀지는 주인인 달링턴 경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하녀 캔턴을 쫓아냈을 때 옳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집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느라 방조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것이 그들 모두에게 풀어야 할 숙제가 되는 것도 같다.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부모님 실종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탐정이 되어 상하이로 떠나고 스티븐스는 캔턴을 찾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행을 한다. 그리고 모두 떠난 그 곳에서 그들이 정말로 알아야 했던 진실을 비로소 찾게 된다. 이 진실들이 껍질처럼 단단했던 자기 세계가 여지없이 허물어진 경험을 통해서 온다는 것도 동일하다.
'남아있는 나날'은 89년에 나왔다. 그것은 '대처리즘'으로 집약되는 힘있고 부유한 소수를 위하여 다수의 국민이 희생되었던(대처가 죽었을 때 영국 국민들은 죽음을 환영한다며 피켓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대처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컸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80년대의 영국을 엄격한 계급 구분이 진리라 믿는 집사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캐릭터를 통하여 우회해서 풍자하며 비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슷한 궤적을 보여주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무엇을 보려주려 함일까? 이 소설은 2000년에 나왔다. 그리고 이 소설은 37년의 난징대학살이라는 미증유의 비극을 낳았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일본 제국주의가 치열하게 교전하던 중국을 담고 있다. 영국과 동떨어진 곳에서의, 그렇게 관망이 가능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90년대에 일어난 미국과 이라크 전쟁을 얼른 떠올릴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의 한 장면은 아주 강하게 그 전쟁을 암시하기도 한다. 바로 225페이지에서 펼쳐지는 일본 군함의 포격 장면이다.
군중의 왁자지껄한 소음 너머 어딘가 먼 곳에서 아득한 대포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점점 알아차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을 뒤흔드는 요란한 굉음으로 그레이슨의 말이 중단되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손에 여전히 칵테일 잔을 든 채 미소를 짓거나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P. 255)
지금 이 곳은 상하이고 크리스토퍼는 외국인 거주 지역에서 개최된 영국인들의 파티에 참석한 상태다. 바로 근처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인용한 글에서처럼 파티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가로 날아가는 포탄을 쌍안경까지 가져와 마치 폭죽놀이를 구경하듯 웃고 떠들고 즐기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은 이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그가 처음 본 전쟁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저런 것이 전쟁이로군요. 아주 흥미로워요. 사상자도 꽤 많이 날 테지요?" 누군가가 무심히 말한다. "저쪽 차페이에는 사망자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며칠 더 저렇게 볶아 댈 테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조용해지겠지요."(P. 228)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전에 크리스토퍼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보복 살인을 뜻하는 '노란 뱀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영국 영사관 의전 담당인 맥도널드에게 도움을 구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런 것엔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그건 모두 중국인 사이의 문제랍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최선이지요."(P. 224) 그들이 무심한 방관자가 되어 웃고 떠들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나랑 상관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안전이 보장되는 외국인 거주 구역에 머물 수 있으니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전쟁은 나만 죽지 않으면 꽤나 흥미로운 볼거리라고. 그들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우리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장면이었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되었던가? 실제로 소설에서 묘사한 창가에서 보여지는 하늘로 곡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포격 장면은 바로 그것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 전쟁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TV 화면으로 다가왔다. 수백개의 미국 크루즈 미사일이 이라크 본토로 쏟아지는 장면이 마치 스포츠 중계를 하듯 전 세계로 방영되었다. 옛 세대처럼 전쟁을 실시간으로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대에게는 그것이 전쟁에 대한 첫 경험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보며 전쟁이 가진 비참함 보다는 스펙타클한 면에 압도되었고 크리스토퍼와 똑같은 질문을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들었던 대답을 그 때 우리 역시 들었다. 그것은 전쟁의 의미를 변화시켰다. 더 이상 그것은 살육과 비극으로 점철된 시궁창이 아니었다. 그저 화려하고 말초신경을 잔뜩 흥분시키는 스펙타클일 뿐이었다. 그 속에서 사유는 정지되었고 전쟁은 소비되기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크루즈 미사일 아래 희생당한 타인에 대한 생각은 없이 태연히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바로 그것을 가져오고 있다. '대처리즘'과 다를 바 없는 90년대를. 후쿠야마 프랜시스는 동구권의 몰락을 두고 헤겔이 말한 역사의 종언이 왔다고 떠들어 대었고 곳곳에서 이제 이념 따위는 내버리고 현실적인 욕망의 충족에나 충실하자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재잘거리고 있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있는 나날'의 세계로 다시 한 번 걸어들어가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말한다. 우리가 안전과 안락이 보장된 (소설에서는 '공동조계'라고 부르는) 외국인 거주 구역을 보편 세계라 여기고 머무르려 하거나 추구하는 한 결코 언제까지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이 소설은 내가 속한 세계를 전부라 믿어 그 너머를 보려하지 않기에 타자가 겪는 아픔, 당하는 비극에 무심해 버린 우리 모두를 아프게 찌르고 있다. 실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가 그렇다. 단식하는 유족들 앞에서 어묵을 먹고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 부르는 이들을 보라.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소설 속 영국인들과 다르지 않다. 자신들은 절대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세계의 경계선은 절대로 허물어지지 않고 비극은 오로지 경계선 밖에서만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는 경계선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는 확신이 그들을 파렴치할 정도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과연 그 경계선이 튼튼한가 반문한다. 소설에서 외국인 거주 구역은 다양한 공간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는 크리스토퍼가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떠오르는 자신이 공부했던 집 안의 '도서실'이 그러하고, 그가 탐정으로 성공을 거두고 세실 경을 처음 만났던 사교 파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공간들은 결코 단단하지 않다. 모두 뜻하지 않게 허물어진다. 완벽하게 고요와 집중이 보장되었던 도서실은 부모님의 싸움으로 평온이 무너지고 사교 파티는 배제된 여인, 세라 헤밍스가 일으킨 소란으로 으스러진다. 그 어느 곳도 자신의 경계선을 올곶이 지켜내지 못한다. 크리스토퍼의 어머니는 집에서 납치당하고 '공동조계'조차 전쟁 중에 허물어진다. 결국 경계선이 확실하다는 믿음은 작위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우리들을 타인의 아픔에 냉담한 괴물로 만드는 진짜 이유를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가 한 발 물러나도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노라 핑계를 대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실제 원인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었다. 우리가 그걸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 자체가 우리에게 책임을 가지도록 한다고 말했다. 타인에게 현상된 고통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뭔가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건 곧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나를 희생하는 길이다. 우리는 그러기 싫었다. 책임을 떠맡기 싫었다. 그래서 핑계를 대었다. "세계가 이런 걸 어쩌란 말이야!" 아편 밀수를 두고 비난하는 아내에게 크리스토퍼의 아버지가 그랬듯이.(그것이 도서실의 평온이 깨어진 사건이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은 우리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고 있어요! 우리 모두를 말이에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요!" 말했다. 아버지의 목소리 역시 성이 나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방어적이고 자포자기한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오. 결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란 말이오." 그러다 어떤 시점에서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건 너무 심하군! 난 필립이 아니란 말이오. 난 그런 식으로 생겨 먹은 인간이 아니라고. 정말 너무하군. 너무 심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의 음성에는 뭔가가, 무시무시한 체념 같은 것이 있었다.(P.104)
거기에 대해 가즈오 이시구로의 마음을 대변하여 어머니는 이렇게 비난한다.
"당신은 그런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아요? 이런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같은 페이지)
이것이야말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심이다. 왜냐하면 이건 소설이 보여주는 최후의 진실이고 거기서 크리스토퍼 뱅크스의 삶조차 (자신은 몰랐지만) 사실은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해 왔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부는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사악한 부가 가능하려면 착취 당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크리스토퍼 어머니가 그렇고 상하이의 공동 조계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토끼굴이 또한 그러하다. 경계선에 대한 확신이 작위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크리스토퍼와 그 어머니의 관계처럼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보다 광범위한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 운동화가 동남아시아의 아동 노동 착취를 통해 만들어지고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굶주리는 것이 사실은 서방 세계의 육류 소비로 인한 사료 작물의 재배로 곡물을 재배할 땅이 부족해서이듯 말이다. 그렇게 희생당하고 있는 토끼굴 같은 공간은 이미 우리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그것을 보여준다. 상하이에서의 어린 시절 친구 아키라 집에 있는 하인 링 텐의 방이 그러하고 상하이로 다시 돌아와 찾아가 본 어릴 때의 집은 아예 중국인 가족이 들어와 살고 있다. 그들은 도처에 있다. 크리스토퍼의 어머니가 갇혀 있다는 옌 친 노인의 맞은 편 집처럼 바로 지근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안 볼 수가 없다. 안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가 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잘못 아냐! 그들이 책임져야지 뭐."하면서. 이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려고 말이다.
그러므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시야의 열림'이다. 아니, 알고도 못 본 척 한 것이니 '시야의 강제'라고 해야 할까? 보게 만드는 것이다. 보도록 하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당하는 비극을. 그것이 설령 아무리 멀리 있는 것이라 한들 말이다. 여기에 대한 관심, 사유를 하도록 만드는 것. 나는 그것이 가즈오 이시구로가 크리스토퍼 뱅크스의 회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나오는 크리스토퍼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에게 굉장한 울림을 갖는 것이다.
이런 필생의 관심사에 속박당하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사라진 부모의 그림자를 오랜 세월 뒤쫓으면서 고아로서 세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기 전까지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P. 441)
이런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 타인의 비극을 나와 별개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필생의 관심사로 만드는 것. 부모의 그림자처럼 비록 보이지 않을 지라도 세상의 그 어떤 타인의 아픔이든 나와 이어져 있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그것을 뒤쫓게 만드는 것. 그렇게 우리를 고아로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모든 것이며 제목인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 투영된 진심이다. 읽고나면 이제 우리는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말처럼 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P. 442)' 여기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여전히 현재형인 '세월호 참사'가 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스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 늦게 자각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