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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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3부가 드디어 나왔다. 3부의 제목은 '포르투나의 선택'. 첫 느낌은 감격이다. 결코 우리말로 만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맞다. '포르투나의 선택'은 초역이다. 이제야 술라의 말년과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부상을, 늘 그렇듯이 뛰어난 콜린 매컬로의 필치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포르투나의 선택' 1권은 모두 2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기원전 83년 4월부터 81년 5월까지 담는다.


 기원전 88년. 로마의 일인자 자리를 놓고 용호상박으로 다투고 있었던 마리우스와 술라. 그 때,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의 손길은 술라에게로 향했다.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가 아시아를 침략하여 로마의 속국들을 해방시키자 결국 그리스와 소아시아가 로마의 총독들을 살해하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 일로 인해 술라가 그것을 진압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져 드디어 꿈에 그리던 집정관이 되었던 것이다. 가장 밑바닥 계층에서,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로마의 일인자가 된 술라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반란을 진압하러 로마의 동부로 떠난다. 하지만 포르투나의 손길은 변덕스러웠으니, 말년의 뇌졸증으로 이성의 힘이 약해진 마리우스가 그런 술라를 질투하여, 술라가 로마를 비운 사이에 로마를 다시 장악하여 끝내 집정관을 자신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기량과 대중의 인기로 인해 하늘 아래 같이 존재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그동안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던 전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결국 술라는 그 때까지 로마 역사상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아피우스 가도를 따라 로마의 수도로 진격하는 일을 선택한다.


 기원전 83년. 다시 로마를 장악한 술라는 여전히 로마의 안전을 위협하는 동쪽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 이탈리아 남부에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포르투나의 손길은 또 다시 변덕을 부려 반대쪽을 향한다. 당시 다른 한 명의 집정관(아시다시피 로마는 집정관을 두 명 선출한다.)은 킨나였는데, 그는 술라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킨나는 술라가 로마에 없는 사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아프리카에 피해 있었던 마리우스를 로마에 오도록 한다. 마리우스는 로마에 오자마자 술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집정관 자리에서 축출한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드디어 집정관 자리에 일곱번째 오른다. 그의 삶을 오래도록 지배하고 있었던 예언은 그렇게 성취된다. 포르투나 여신의 손길이 이번에는 마리우스를 향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집정관에 오르고 얼마있지 않아 지병인 뇌졸증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만 것이다. 마리우스의 죽음과 함께 그 때까지 승기를 잡고 있었던 킨나의 운도 다하여 결국 부하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결국 포르투나는 술라의 손을 들어준 것일까?


 외견은 그렇게 보였다. 일단 마리우스가 죽은 현재 로마에는 더이상 술라의 라이벌이 될만한 인물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3부의 1권은 포르투나가 다시 한 번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독재관까지 되어 가장 정점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술라의 라이벌들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만큼 오만하고, 그만큼 야심이 크며 세상을 그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놀이터로 여기는 이들을.


 '들'이라고? 맞다. 복수()다. 두 명이니까. 그들이 바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다. 그들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훗날 '삼두 정치'로 같이 로마를 지배할 그들이. 그리고 마치 로마가 전제정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과도 같이, 원로원과 1인 통치를 두고 전면전을 펼칠 그들이 말이다. 이렇게 바야흐로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흥미로운 시간의 막이 올라가는 것이다.


 '로마의 일인자'를 선택하는 포르투나의 손길은 누구에게로 향하게 될까? 물론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다. 다들 인정한다. 카이사르가 없었다면 폼페이우스가 로마 최고의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폼페이우스마저 없었다면 술라가 그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우리는 콜린 매컬로의 손 끝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로마의 묘사를 통해 분명히 보게 된다. 포르투나는 언제, 어디서든 반전을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마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예언을 통해 카이사르가 자신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그것을 막기 위해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에게 절대 집정관에 오를 수 없게끔 무거운 굴레를 씌워버렸다. 현실 정치에 도저히 발을 내밀 수 없는 종교인, 즉 신관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로마 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던 카이사르에겐 오롯이 절망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말이다. 카이사르가 거기서 헤어날 방법은 없었다. 당시 로마의 절차상 신관에서 해방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신처럼 커다란 권력이 아니면 풀어줄 수 없는 사슬이었다. 하지만 정말 포르투나의 손길이 이 때부터 카이사르에게 있었던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이 절체절명에 다다른 순간에.


 사람의 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이 모인 집합으로써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 불가다. 술라의 권태가 낳은 변덕이 아니었다면 로마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어쩌면 황제마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카이사르라는 위상은 폼페이우스가 되었을 것이며 로마도 언제까지나 원로원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포르투나의 우연한 손짓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로마의 역사가 흘러가는 물줄기를 크게 바꿔버렸다. 누구도 볼품없는 노새를 타고 로마를 떠난 카이사르 앞에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포르투나가 무엇이기에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는가?

 포르투나가 자신과 함께 한다고 생각했던 술라는 포르투나를 이렇게 생각했다.

 

 "로마인인 술라는 신들이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형적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구체적인 사건들에 영향을 자신보다 열등한 다른 힘을 통제하는 구체적인 힘이라고 생각했다.(...) 신들은 자기들의 세계에서만큼 산 자들의 세계에서도 질서와 체계성을 원했다. 산 자의 세계가 질서 있고 체계적이면 힘들의 세계에서 질서와 체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행운과 복을 주고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덜 주며, 또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힘은 포르투나였다. 그리고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라 불리는 힘은 다른 모든 힘들의 총합이자, 사람들에게는 불가사의하나 힘들에게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그 힘들을 한데 묶는 결합조직이었다.(p. 291 ~ 292)


 이제 독재관이 된 술라는 포르투나에서 막시무스로 옮기려 한다. 만인지상의 권력을 차지했으니,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그 힘마저 가지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술라는 이 말을 한 뒤에 로마 최고 신관을 선거 없이 자신이 직접 뽑겠다고 하면서 그 전에 지금 특별 신관으로 있는 카이사르를 처형하겠다고 선언한다. 자신만큼 포르투나의 총애를 받는 존재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포르투나와 막시무스의 힘은 대비된다. 그리고 이런 대비를 통해 포르투나가 가진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도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견제와 균형이라는 것.


 마리우스와 술라. 술라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

 포르투나의 손길이 한 인물에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녔던 것은 모두 모든 힘이 어디 하나로 결집되지 않게 하려는, 그렇게 다들 분담한 가운데 서로에 대한 견제를 통해 균형을 가져오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술라는 포르투나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포르투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말하는 카이사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포르투나 여신의 선택을 받은 건 나지! 내게는 늘 운이 따랐어. 하지만 거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기억하게. 포르투나는 질투심이 강하고 요구가 많은 애인이야."(p. 426)


 자신의 원수인 킨나의 딸과 결혼한 카이사르에게 이혼하라고 명령하는 술라 앞에서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며 당당하게 외쳐, 온전히 술라의 반대편에 서겠다고 선언한 카이사르는 이번에도 포르투나에 대해 다른 견해로 반박한다.


"무릇 애인이란 그래야 제맛이죠!"(p. 426)


 그는 질투와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태연히 선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역사적인 인물의 최후 만남이 끝났다. 한 쪽은 막시무스의 대변자가 되어, 다른 한 쪽은 포르투나의 대변자가 되어. 이 장면을 보면서 문득 소설에서 폼페이우스를 보며 바로가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혼란이 시작되기 전에는 누구나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을 보인다. 폼페이우스의 군사행동이 시작되고 적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 때, (카르보나 세르토리우스가 아닌) 술라와 대면할 때 폼페이우스는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시험일 것이다! 같은 편이든 아니든,늙은 황소와의 관계가 젊은 황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굽힐 것인가? 그는 굽힐 수 있는가?(p. 39)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도 진정한 시험을 치뤘다. 폼페이우스는 굽혔고, 카이사르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많은 것을 가졌던 폼페이우스는 더 많은 것을 가진 술라에게 굴복했고, 가진 것이 거의 없었던 카이사르는 대항했다. 그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1권은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술라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물리치며 로마로 입성하는 과정과 독재관이 되어 최고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 그리고 그런 술라에게 가담한 폼페이우스와 반대 편에 선 카이사르의 태동을 그린다. 더하여 앞에서 인용한 누구는 술라 최고의 실수라고 부르는 카이사르의 사면이라는 역사상 아주 중요한 장면까지. 단 한 순간도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더구나 1부와 2부에서 이미 넘치게 보여준 현란한 필력은 여기서도 여전히 빛을 발해 한층 더 그랬다. 하물며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들까지 등장해 생생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으니 어떻게 도중에 관둘 수 있을 것인가! 빛의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고 결국 얼른 2권을 읽고 싶다는 바람만 한가득 안은 채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술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바로에게 폼페이우스는 '술라 자신의 존엄'이라고 대답한다. 물질 만능주의였던 로마에서 술라는 유일하게 무형의 가치를 쫓는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의 존엄은 무력을 통해 지켜졌다. 그는 다른 로마의 일인자와 다르게 말년에 그 어떤 신변의 위험도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을 암살할만한 인물들을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재관이 되자마자 자기 눈에 가시 같았던 원로원과 기사 계급 사람들을 모두 2,600명 처형했다. 대부분은 원로원 보다 민회의 권위를 더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민중파 사람들이었다. 그 자신도 밑바닥 생활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타고난 혈통을 더 중시했다. 그는 귀족 중심의 공화정을 만들려 했고 그래서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어쩌면 그가 귀족정을 원했던 것은 마리우스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마리우스는 자신의 출신 문제도 있어서 민중파 쪽이었다. 술라를 지지했던 귀족들은 그의 권력을 등에 업고 로마와 이탈리아에 있는 마리우스 지지자들을 4,700명이나 살해했다. 술라의 존엄은 그렇게 지켜졌고 유지되었다. 수많은 반대자들의 피로써. 그가 추구하는 막시무스가 과연 어떻게 이뤄지는 힘인지 잘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3부의 여정은 자신의 존엄을 쫓는 이들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술라에 맞서서 포르투나를 따르는 카이사르는 어떻게 자신의 존엄을 만들어 갈 것인가? 카이사르 역시 술라처럼 최고 권력에 오른다. 하지만 그가 그런 자리에 올랐던 것은 마리우스를 따라 원로원에게 집중되는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친 표현일 수 있지만, 막시무스가 아닌 포르투나적인 힘의 실천이었다. 이제 거기에 이르는 여정이 2권 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빨리 만나고픈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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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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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저가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의 제목은 '살(Flesh)과 영혼'이었다고 한다.

 '시스터 캐리'라는 제목은 출간되기 1년 전, 드라이저의 친구인 아서 헨리의 조언으로 바꾼 것이었다. 원래의 제목으로 유추해 보건대, 드라이저는 이 소설을 캐리만의 이야기로 쓸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보다는 대도시의 출현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정착된 당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군상들에 대한 초상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자체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표면상의 주인공이라 할만한 캐리 못지 않게 이 소설에서 허스트우드가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한 까닭이다. 전반부는 캐리가, 후반부는 허스트우드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마냥 허튼 소리는 아닌 것이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윌리엄 와일러 역시도 캐리 보다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분한 허스트우드에 더 비중을 두고 영화 '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황혼'이란 제목으로 개봉되기도 했다.



 분명 허스트우드 말년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읽어보면 캐리의 이야기보다 허스트우드의 이야기가 좀 더 세밀하고 입체적이다. 드라이저는 출판 계약이 이뤄진 뒤에도 정식으로 출간될 때까지 계속 원고를 수정했다고 하는데 후반에서 보여주는 깊이가 초반에 비해 상당한 것을 보면 역시 허스트우드 부분을 많이 수정, 보완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어쨌든 내게 이 이야기는 캐리와 허스트우드의 양 갈래 이야기로 읽힌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캐리와 허스트우드 사이에 상당히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경로의 유사성.

 캐리가 걷는 길은 나중에 허스트우드가 걷는 길과 같다. 캐리는 처음으로 본 도시의 모습에 넋을 잃고 드루에의 외모가 대변하는 화려한 도시적 삶에 매료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잠시 장밋빛 미래의 꿈을 선사하지만 이내 비루한 현실 앞에서 쉽게 시든다. 환경을 이루는 살(flesh)는 너무도 비대해서 영혼은 쉽게 초월의 자유를 포기하게 된다. 결국은 타협. 현실과의 부단한 타협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스로 날개를 쪼아 날 수 없게 된 새 키위와도 같이 욕망의 대가로 자유를 지불한 영혼에게 남은 것은 고독 밖에 없다.


 허스트우드도 다르지 않다. 캐리에 대한 그의 매혹은 언제 찾아왔던가? 연극에서 캐리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처음 캐리가 본 도시가 실제라기 보다는 환영에 가까운 불빛으로 환한 밤의 도시 모습이었듯이 허스트우드도 실제 캐리가 아닌, 연기로 만들어진 환영인 캐리의 모습에 반하는 것이다. 캐리와 허스트우드 둘 다,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실제 아닌 환상이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시작이 같았으니 그들이 걷는 길 또한 유사하다. 둘다 그들을 이끄는 것이 환상인 것이다. 캐리는 드루에게서 발현되는 환상을, 허스트우드는 캐리에게서 발현되는 환상에 이끌린다. 물론 그들을 유혹하는 환상은 같지 않다. 캐리를 유혹하는 것은 안정의 환상이고, 허스트우드를 유혹하는 것은 자유의 환상이다. 허스트우드는 보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 캐리라는 환상에 취한다. 그는 이미 캐리가 꿈꾸는 것을 이룬 사람이다. 하지만 드라이저는 캐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른 그조차도 환상의 노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통해 가지게 되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끝도 없이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대표하는 계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 가정에서의 위치 등등. 그는 자신이 속한 그 어느 자리에서도 타인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환상에 맞춰 살아야 한다. 즉 연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허스트우드는 캐리와 똑같다. 캐리가 연기를 통해 자신의 성공을 일궈낸 것과 똑같이 허스트우드도 정교한 연기를 통해 현재의 성공을 이뤄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캐리와 허스트우드는 돌림노래와 같으며 캐리의 미래는 허스트우드의 현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언젠가는 캐리도 더이상 타인을 위한 연기에 지쳐 허스트우드처럼 몰락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 소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해피엔딩도 열린 결말도 아닌 것이다.


 환상과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한 연기.

 내가 보기에 '시스터 캐리'에서 정말 중요한 키워드는 욕망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캐리가 하필이면 연기를 통해 자신의 안정을 획득하도록 설정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캐리와 허스트우드 모두 애초에 환상에 대한 매혹이 있다는 말을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욕망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을 통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라캉을 떠올리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주체에게 특정 대상을 욕망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환상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대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에게 존재하는 결여를 메우고자 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자면 먼저 동일시하려는 자신부터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정립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거울을 볼 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답은 나온다. 그 때의 우리들에게 거울에 비친 내가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보증해줄 참된 실재는 없다.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을 통합한 것이 얼굴이며 팔과 다리가 붙은 것이 신체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 줄 언어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언어가 우리의 인식을 어느 정도 구조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주체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재가 아닌 언어라는 허구, 그런 면에서 환상에 기대어 주체를 보정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욕망 또한 환상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생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언어가 먼저 있어 모든 것이 거기서 비롯되었듯이 태초에 환상이 있었다. 욕망은 그 빅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정확히 캐리와 허스트우드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왜 연기까지 끌어와야 했을까?

 환상의 정체 때문이다. 이 환상은 진실로 누구에게서 온 것인가? 캐리는 도시에게서, 허스트우드는 캐리에게서 얻었다. 하지만 정말은 거기에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까 환상이 이미 주체 성립 그 자체에서부터 기입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배우는 언어다. 언어는 내재의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내 외부의 것이다. 즉 우리의 주체는 이미 성립 당시부터 언어를 매개로 바깥의 시선에 노출되며 그에 맞춰 조형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자동인형처럼 조종하는 외부의 존재가 있다. 그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대타자'다. 환상은 거기서 비롯되고 그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대타자의 욕망 대로 살게 된다. 남들이 바라는 것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곳에서 연기의 숙명 또한 도래한다. 대타자는 주체 성립 당시에만 명령하지 않고 평생 내 옆에서 나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그의 언질을 기피하거나 시선에서 숨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가진 정체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말이다. 즉 정체성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대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우리는 살면서 자주 이렇게 묻곤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하지만 좀 전 주체 성립 자체에 이미 대타자가 관여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질문은 그대로 '대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이기도 하다. 즉 나의 정체성은 순수하게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타자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되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대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박이 바로 연기로 나타난다. 허스트우드에게 보듯이 정체성이 확고하면 할수록 우리의 연기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배우들은 자주 배역에 엄청 몰입하다보면 연기가 끝나더라도 그 배역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해 일상마저 힘들어지는 후유증을 겪는다고 고백한다. 헐리우드에서는 이를 위해 따로 정신과 상담의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네 삶도 배역이 본질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꾸만 추동시키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알고 보면 불안은 욕망의 좌절이 아니라 욕망을 뒷받침하는 틀이라 할 수 있는 환상이 뒤틀릴 때 생겨난다. 캐리의 불안은 도시에서의 삶과 드루에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멋진 곳과 남자가 아니라는 것, 그렇게 환상이 깨어질 때 생겨났고 허스트우드 역시도 가정이 자신이 꿈꾸던 것과 더이상 맞지 않다고 여겼을 때, 즉 환상이 좌초되었을 때 피어 올랐다. 그 때, 캐리는 연기와 허스트우드를 욕망했고 허스트우드는 캐리를 욕망했다. 환상의 틀이 뒤틀리면 은폐된 결여가 드러나고 불안은 거기로 흘러드는 물과 같다. 대타자는 주체가 완전히 물에 삼켜지기 전에 서둘러 그것을 메우려 하고 그럴 때 가장 좋은 효과를 나타내는 욕망의 진흙을 사용한다. 환상과 욕망 그리고 연기는 이렇게 연결되며 때문에 환상에 취하면 취할수록, 욕망에 따른 연기에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우리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모두 포식자 대타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스터 캐리'에는 캐리도 허스트우드도 패배자인 것이다. 진정한 승리자는 오직 하나, 그들에게 환상을 주고 연기를 강요한 대타자 밖에 없다. 드루에가 바로 그런 대타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드루에는 단 한 번도 대타자가 원하는 대로 연기를 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루에에겐 진정한 자아라는 게 없다. 자아라는 반대정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타자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란 어디까지나 동일시가 불가능한 대상을 말한다. 때문에 타자는 욕망을 낳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거울이 되어 대타자가 은폐한 내게 있는 결여를 비출 뿐이다. 진짜 자아는 오로지 그 결여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드루에에겐 복사된 자아, 가짜 자아 뿐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불안 또한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다. 환상의 뒤틀림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은 오히려 그래서 진정한 자아로 향해 가는 해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결국 영화 '매트릭스'에서 환상에 취한 파란 약을 먹을래, 아니면 결여를 가져오는 빨간 약을 먹을래 문제인 것 같다. 허스트우드는 결국 빨간 약을 먹는다. 그는 캐리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있었으나 거부한다. 캐리도 빨간 약을 먹는다. 자신을 매혹시켰던 허스트우드의 세계가 더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매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이런 세계에 행복은 더이상 없다고. 


 이렇게 보니, 앞서 내가 한 말과는 달리 허스트우드와 캐리가 승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은 1900년에 벌써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현대인들을 가장 힘들게 할 것이 바로 욕망을 잉태하는 환상과 그 실현으로써의 연기라는 것을 간파한 드라이저가 매일 캐리와 허스트우드만큼이나 힘든 연기를 해야 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아는 사람만 보라며 슬쩍 내놓는 조언인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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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0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보면, 허스트우드나 캐리나 19세기 말의 인물이지만, 이미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보다 한단계 더 나간 인물이군요. 자본주의 사회를 힘겹게 버텨내야하는 우리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파란 약을 꿀꺽꿀꺽 먹지 않습니까. 헤르메스님의 눈으로 보니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라캉 이전에 이미 라캉 철학에 정통(?)했었는듯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리(re)뷰군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근데 혹시 저 영화 보셨어요? 저는 보고 싶은데...(영화에서는 허스트우드의 비참한 결말보다 그를 더 로맨틱하게 그리는 데 중점을 둔 것 같더군요.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ICE-9 2016-04-07 00:26   좋아요 0 | URL
읽다보니 아, 이거 라캉 식으로 읽으면 재밌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라캉이라는 주머니에 작품을 마구 우겨 넣어 보았습니다. 그래도 허점이 많죠? 하하^^
영화는 봤습니다. 영화는 정말 허스트우드 관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의 예로 캐리가 배우가 되는 것도 소설과 다르게 허스트우드와 사랑의 도피를 하고 허스트우드가 아직 이혼이 되지 않은 관계로 자신의 결혼이 중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의 충격으로 유산까지 한 뒤, 다시 말해 절망의 절망을 맛 본 끝에 도전하거든요. 거기다 허스트우드 또한 소설과 다르게 자신이 사랑하는 캐리에 대한 책임감으로 어떻게든 먹여 살리려 자존심까지 내던지고 일을 얻으려 정말 발버둥을 칩니다. 영화는 그 과정을 자세히 그리는데 그래서 마지막의 포기가 더욱 납득되죠. 그렇게 캐리 보다는 뒤늦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의 사랑과 몰락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식으로 dvd가 나왔습니다. 파라마운트로요. 슬프게도 저는 미소장입니다. 예전에 알라딘 직배 중고로 나온 것을 보고 구매했는데 불법 리핑 dvd가 와서 반품했거든요. ㅠ ㅠ (중국 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있더군요. 원하시면 주소 알려드릴게요. 화질도 별로고 중국 자막이 거슬리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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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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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사라마구가 지상에 남긴 최후의 노래, '카인'. 신약을 인간학적 차원에서 재해석했던 '예수복음'에 이어 다시 한 번 똑같은 입장에서 구약을 재해석 한 것이 바로 '카인'이다. 이 소설의 목적은 '예수복음'이 그랬듯, 구약을 지배하는 신성의 기운을 말끔히 지우고 아주 인간적인 입장에서 독재적이고 무자비한 여호와에게 항변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변호랄까. 그 변호인이 되는 것이 바로 '카인'이다. 그렇다고 소설에 카인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제사, 또한 바벨탑과 욥기 거기에 노아의 방주까지, 구약에서 유명한 이야기는 다 나온다. 그런데도 왜 '카인'인 것일까? 의문이 당연히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카인이 최초의 선악과 사건만 빼고 모든 사건에 다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카인만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구약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비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제 사라마구는 왜 카인을 그 모든 사건에 다 참여시켰던 것일까? 이유는 카인이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최초로 거역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남자라는 것이 중요하다. 사라마구가 카인에게 인간의 변호인 역할을 맡긴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스스로의 의지로 거역한 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서에서 자발적으로 탈주했기에 그에 항변하여 인간의 입장을 변호할 자격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어 거역한 아담은 왜 자격이 안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자발적이 아니라서 그렇다. 아담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하와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진정한 자발적 거역자는 하와였다. 사라마구는 그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독자가 여기에 또 한 번 더 가질 수 있는 의문, '촉발이라고 한다면 뱀이 먼저가 아니냐?'에 대한 대답과도 같이 이런 장면을 삽입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낙원에는 뱀이 없다. 주여, 낙원에 뱀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서 뱀이 나타나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래서 나는 말했죠. 아니, 그렇지 않아. 오직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 먹을 수 없어. 그걸 만지면 우리는 죽으니까. 뱀은 말을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쉭쉭 하는 소리나 낼 뿐이지. 여호와가 말했다. 내 꿈속의 뱀은 말을 했어요.(p. 18~19)


 이렇게 사라마구는 여자의 거역이 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 의지에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하와의 모습 혹은 위치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러한 여성의 자리는 소설 전체에 걸쳐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아의 며느리처럼 가부장제에 완전히 포섭된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성적 질서의 바깥에 독립적으로 자리해서는 남성과 대등 혹은 더 우월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와가 그렇고 나중에 카인이 만나는 릴리스도 그러하다. 그런데 구약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 릴리스란 이름에 좀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구약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릴리스란 이름이 적어도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릴리스란 이름이 참 재밌는 것이 원래 아담의 첫 아내로 알려진 여자의 이름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잘 읽어보면 모순된 점이 보인다. 1장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하면서 2장에선 여자가 아담 이후에 창조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순 때문에 옛 신학자들은 아담과 동시에 창조된 여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그녀의 이름을 릴리스라 지었다. 그들이 그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 이름이 당시 전승된 많은 서양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여 남자를 유혹하여 파괴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팜므파탈의 대명사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와와 릴리스는 여호와와 대척점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 한 마디로 여호와가 대변하는 남성 질서를 전복시키려는 존재들 말이다. 일부러 전복이란 단어를  쓴 것은 릴리스의 행위 때문이다. 그녀가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은 아담과의 잠자리 위치 때문이었다. 릴리스는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계속 아담의 아래에서 성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항변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인류 최초의 저항자가 되었다. 육체 상하의 자리바꿈이니 문자 그대로 전복인 것이다.


사라마구도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릴리스는 카인이 살인 후 최초로 가게 되는 도시에서 여왕으로 군림하여 그녀의 거처엔 남편조차 그녀의 허락을 얻고서야 들어올 수 있는 것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남성 질서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공간에서 그녀는 향락을 마음껏 누리면서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마음껏 과시한다. 릴리스의 전복을 그대로 구현해 놓은 것과 같다. 한 마디로 릴리스의 거처는 절대적인 여성 해방의 공간에 다름 아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카인이 누군가 자신을 위해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방에 벽을 쌓아 성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말하자면 카인은 인류 최초의 도시 건설자였던 셈이다. 도시는 인간 문명의 대표적 산물이다. 에덴 동산이 온전한 신의 공간이라면 도시는 온전한 인간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신과 카인이 대척점이듯, 에덴 동산과 도시는 정반대에 자리한다. 도시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모두 여호와에게 파괴당한다는 점에서도 이 같은 특성을 거꾸로 강조하고 있다. '살인한 남자'로 하나님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거역한 인류 최초의 존재인 카인이 만든 도시를 릴리스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카인이 릴리스가 대표하는 질서에 속해있으며(다시 말해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으며) 하와가 했고 릴리스도 했던 독립된 주체를 갈망하는 인간주의적 항변에 참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더구나 그 릴리스의 공간에서 카인은 기꺼이 스스로를 종속된 존재로 자처하여 여호와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여호와는 남자를 지배자의 위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카인이 남자라는 게 중요해진다. 그는 여성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으로 여호와의 질서를 전복하며 '여성화된 남자'가 되어 여호와 질서의 구멍을 만든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다. 곳곳에서 카인은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엔 여호와 질서 자체를 자신의 구멍 안으로 삼켜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쓴 바와 같이 난 '카인'을 페미니즘 소설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엔 정치적 의미도 투영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소설 속 여호와는 아무리 봐도 독재자로 보이는 까닭이다.

 이 때, 생각나는 소설은 사라마구의 '눈 뜬 자들의 도시'이다.


 '눈 뜬 자들의 도시'는 다시 창궐하는 우익을 우려의 시선으로 보는 소설로 지금과 같은 우리나라 상황에선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사라마구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우익이 다시금 창궐하게 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그 난감을 소설로 표현한 것이 바로 '눈 뜬 자들의 도시'이다. 내 생각에 '죽음의 중지'나 '예수 복음' 그리고 '카인'과 같은 일련의 성경 재해석은 바로 이 난감을 가져온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혼돈을 먼저 겪은 그가 우리를 위해서 마련한 안내서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엔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하나의 태도가 있다. 그것을 집약한 존재가 바로 카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카인'은 '눈 뜬 자들의 도시' 이후 그가 찾아온 길의 모범 답안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라마구, 그는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한 셈이다. 카인의 태도에 대해선 앞에서 내내 얘기했으니 여기서 다시 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한 번 직접 읽어보시라는 한 마디로 족할 것 같다. 그러면 명확하게 아시게 될 것이니까. 그리고 이런 시대에 왜 사라마구가 카인과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고 천명했는 지도.


 소설은 사라마구의 마지막 노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너무나 아쉽게도 짧다. 읽기엔 별 부담이 없다. 거기다 너무 재밌다. 아마도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 시간 사라마구의 소설을 읽어 온 한 사람으로서 기꺼이 추천드리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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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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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닝 만켈의 백조의 노래, '불안한 낙원'을 읽었다. 내게 이 작품은 조국 스웨덴을 떠나 오래도록 아프리카에 정착했던 그 자신의 마음을 많이 투영한 것으로 보였다. 헤닝 만켈은 자신을 세계적 거장의 위치로 격상시켜준 장본인인 '발란더' 형사 시리즈로 유명하다. 스웨덴에선 이미 여러 차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졌고 심지어 영국에서마저 케네스 브래너 주연의 드라마로 방영될만큼 인기와 작품성이 검증된, 말하자면 전세계적으로 성공한 시리즈다. 이 시리즈의 첫 작품 '얼굴 없는 살인자'는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한 부부의 살인사건을 출발점으로 하여 스웨덴에서의 극우의 부상과 더불어 점점 늘어나는 인종 차별을 예민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렇게 시리즈를 시작했던 헤닝 만켈은 그 뒤로도 시리즈 내내 꾸준하게 인종 차별이란 주제를 이어갔는데 그런 이유로 헤닝 만켈이 아프리카에 정착했던 것도 어쩌면 인종 차별의 부상으로 드러나 버린 스웨덴의 민낯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무엇보다 이번에 '불안한 낙원'을 읽고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여성, 한나 뢴스트렘 또한 헤닝 만켈처럼 스웨덴에서 아프리카로 떠난다.1904년. 그 때는 스웨덴에 굶주림이 만연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기근이었다. 산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던 한나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한 명의 입이라도 덜려는 어머니에 의해 도시로 떠나라고 강요 받는다. 가족이 처한 상황을 너무나 잘 이해하지만 한나는 선뜻 어머니의 명령을 따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도 두렵기 때문이다.


 "내 앞날이 어떨지 전혀 모르겠어요."(p. 42)


 이 말을 하기 전에 한나는 엄마 엘렌에게 바다에 대해 묻고 있었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바다를 본 아버지는 그저 크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다라는 커다란 세계, 그리고 그것의 정체 불명은 그대로 가족이라는 폐쇄적이고 작은 세계를 떠나 더 크고 한껏 개방되어 있어 그만큼 정체가 쉽사리 파악되지 않는 도시로 가는 것에 대한 불안을 은연 중 반영한다. 여기서 더 주목할 지점은 가정이 단일한 정체성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다. 거기는 이방인들이 가득한 도시이며 그런 면에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바다는 그것을 좀 더 강조한 공간이다. 바다는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나의 진짜 두려움이 정작 거기에 있다는 게, 바로 다음의 말에서 나타난다.


 "다른 사람들과 한 집에서 살게 될까요?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될까요?"(같은 곳)


 그녀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공존이다. 이것은 그대로 인종 편견에 사로잡힌 스웨덴을 암시한다. 이런 한나에게 엄마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야무지게 나무란다.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 분명한 것 하나는 여기 남으면 미래 자체가 없다는 거야."(p. 42)


 엄마의 말이 소설의 주제를 이루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더하여 헤닝 만켈이 스웨덴을 떠났던 이유도 이와 똑같지 않았을까 싶다. 점점 하나의 정체성만 고집하고 강요하려 드는 스웨덴에 미래 자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시에 있고, 바다에 있는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곳,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고 그것을 타자를 위해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곳. 실제 한나가 정착하게 되는 아프리카에서 그녀는 그렇게 된다. 헤닝 만켈은 무엇보다 세 차례나 변하는 그녀의 이름을 통해 이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긍정의 의미를 가진다. 마치 아프리카로 떠난 작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과도 같이.


 하지만 그게 다일까? 보다 좋은 곳을 찾아서 떠난다는 것만으로 족한 것일까?


 헤닝 만켈은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스웨덴을 떠나온 자신을 반추하면서 과연 이 길만이 있었던 것인지 성찰했던 것 같다. '불안한 낙원'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 때문에 붙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앞에 붙은 '불안한'은 낙원 그 자체만으로 좋은 것인지 은근히 동요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누구나 낙원으로 떠나고 싶어한다. 낙원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기 훨씬 전의 고대 그리스에도 아르카디아란 낙원이 있었다. 서양만이 아니다. 동양에서도 고대에서부터 이상향은 있어왔다. 이런 면에서 유토피아의 희구는 인간의 본성상 욕구라 말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집단적 차원에서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라면 어떨까? 그저 나 혼자 여기의 현실이 어둡고 미래가 없다고 해서 내버려두고 낙원을 찾아 떠나기만 하면 괜찮은 것일까? 여기에 윤리적 위험은 없을까? 헤닝 만켈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불안한 낙원'이 정말 말하고픈 핵심이다. 한나 뢴스트렘의 삶은 내가 있을 낙원은 저 너머가 아니라 바로-여기에 있다고 깊이 깨닫게 해주는 작품인 것이다. 만켈은 한나의 삶을 통해 나의 향유가 아닌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을 강조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그 현실을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말년의 만켈은 스웨덴에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홀로 아프리카로 와버린 것을 조금은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 마음을 한나에게 의탁해 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은 아닐런 지.무엇보다 소설 후반에 나오는 한나의 선택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 선택은 내게도 꽤나 깊은 울림을 남겼다.


 나 역시 예전의 만켈처럼 헬조선인 이 나라를 그저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안 보면 그만이라고, 나만이라도 구하자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금 나는 정청래 의원의 필리버스터 연설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굳이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요즘 이렇게 필리버스터의 연설을 듣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어떤 운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안한 낙원'을 다 읽었을 때, 난 과연 이대로 여기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만 혼자 잘 살자고 떠나는게 옳은 일일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필리버스터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나만큼이나 희망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 희망의 빛을 지연시키려 애쓰고 있는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빛에서 위로 받고 그 빛을 좀 더 크고 밝게 만들기 위해 찾아올 이들을 위해. 한나의 아프리카 호텔처럼. 한나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하고 있는 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들의 말을 두 귀로 직접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흘러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었을 때'와 같이 자주 울컥했고 은수미 의원이 트위터에 올린 그녀의 연설에 감동되어 새벽 기차를 타고 마산에서 온 여고생 이야기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배재정 의원이 인용한 한 중학생 덕후 소녀의 글도 그랬다. 그 어린 영혼들을 지켜주지 못해 정말 많이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하지 못했던 세월호의 아이들처럼. 배재정 의원은 우리 후세대까지 이런 아픔을 물려줘야 하냐고 말했다. 맞다. 이런 아픔은, 이런 불법은 우리 때에서 끝나야 한다. 그들의 낙원은 결코 불안해서는 안된다. 지금 나는 그것만 생각하려 한다. 그것을 위해 나는 뭘 해야 하는 가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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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부아르 오르부아르 3부작 1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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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를 읽으면서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생각났다.

 '오르부아르'의 주인공 알베르 마야르는 내게 꼭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인공 맥머피처럼 보였다. 맥머피는 온전한 정신이었지만 수감 생활을 수월하게 하려고 미친 것처럼 꾸며 한 정신병동으로 이송된다. 하지만 이제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겠구나 싶었던 그의 생각은 거기서 보기좋게 빗나가 버리고 만다. 그 곳의 책임자인 수간호사 레취르가 환자들의 자유를 마구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환자들은 레취르에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다. 맥머피는 그걸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들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저렇게도 쉽게 포기하는 것일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맥머피는 주위 환자들을 움직여 저항하려 한다. 하지만 레취르는 만만치 않다. 화려한 언변과 교묘한 책략으로 맥머피의 저항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려 간다. 그러나 맥머피가 진짜 힘들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환자들이 레취르가 만든 세계에 너무 적응되어 버린 나머지 바꿀 의지를 전혀 가지지 않는 것이다. 판단도, 의지도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에 너무 길들여진 그들이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부추기는 맥머피를 오히려 원망하기까지 한다. 그가 나타나기전까지는 편안하게 살고 있었는데 왜 힘들게 하냐면서. 그들은 지시로 강요받는 삶을 안정이라 여기고 예속을 자유라 생각한다. 자신의 부리로 자기 날개를 쪼아 날 수 없게 되어버린 키위처럼 그들은 지금의 세계를 절대라 여기고 그 둥지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것이 맥머피를 고립시킨 결정적인 이유였고 결국 맥머피마저 그들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맥머피가 알베르 마야르와 자꾸만 겹쳤던 것은 알베르가 걸어가는 길도 그리 다르지 않았던 탓이다. 시대의 불의에 저항도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책임도 떠 맡았지만 결국엔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에두아르의 사기에 가담하고 도피를 택한다. 맞다. 한 개인이 시대를 이기기란 어렵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세상엔 세 가지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한 편엔 레취르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 편엔 맥머피와 같이 타인의 공존과 해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은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를 지언정 그래도 모두 능동적인 인물들이다. 어쨌든 스스로 자기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려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한 편에 서 있는 이들은 이와 정반대의 사람들이다. 레취르에게 동조했던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도 않고 남이 이끄는 대로 한없이 끌려가기만 하는,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만일 레취르와 맥머피가 벌이는 투쟁을 게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런 수동적인 존재들을 판돈으로 놓고 얼마나 자기 쪽으로 가져오느냐를 두고 벌이는 포커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편하지만 자유 없는 감옥을 주려 하고, 또 누구는 척박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주려 한다. 만일 당신이 판돈의 일부라면 어디에 속하고 싶을까?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도 다르지 않다.

 한 편에 레취르와 다를 바 없는 앙리 도네프라델이 있다면 정반대 편에 맥머피라 할만한 알베르 마야르와 에두아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 나오는 환자들과 다를 바 없는 프랑스 국민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하나도 모른다. 그래서 그저 앙리와 알베르 그리고 에두아르가 벌이는 거짓과 사기에 놀아나기만 한다. 그런데 이런 거짓과 사기는 조제프 메를랭이 보여준 바와 같이 적절한 관심과 적극적인 판단과 행위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휘둘리기만 했던 것이다. 맥머피는 그런 그들의 희생자였다.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그런 맥머피의 동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는 그런 프랑스 국민들에 대한 복수라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 초반에서 앙리는 전쟁에서 전과를 올려 자신의 신분 상승을 꾀하기 위해 곧 전쟁이 끝나는데도 일부러 병사들을 차출해서 정찰을 보내고는 그 중 둘을 살해하여 적군에게 살해된 것처럼 꾸며 그 보복 차원에서 자신의 부대원들을 독일군과 싸우게 한다. 바로 그 진격에서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커다란 비극을 겪는다. 알베르는 앙리에게 죽을 뻔하고 에두아르는 포탄에 얼굴 일부분이 문자 그대로 날아가 버린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지만 다 읽고 보니 실은 여기에 르메트르가 '오르부아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다 드러나 있었다. 여기서 주의해 볼 것은 알베르와 에두아르가 비극을 당하게 된 계기다. 그들은 앙리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돌진하지 않았다. 자신이 마주한 상황 앞에서 스스로 생각을 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알베르는 문득 발견한 앙리가 조작한 시체의 자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여 멈춰서선 진실을 찾는 행위를 했으며 에두아르는 앙리가 알베르를 파묻은 흔적을 보고 스스로 거기에 병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되돌아가 온 힘을 다해 그를 구해낸다. 이렇게 그들은 비슷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을 수동적으로 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실천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앙리의 명령에 무작정 달려간 다른 병사들과 달랐다. 전쟁은 상황이 절대적 힘을 가진다. 명령 불복종은 무조건 총살이듯 전황이 한 개인의 의지를 압도한다. 알베르와 앙리가 있던 부대의 최고 지휘자인 장군조차 상황 때문에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개인을 결박해도 송곳처럼 뛰쳐 나오는 이들이 있다. 그건 앙리처럼 순전히 개인적 욕망에 따른 것일 수도 있고, 알베르와 에두아르처럼 진실을 알려는 마음 혹은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주체인 개인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 역사란 그런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지도 모른다. '오르부아르'는 그런 개인들에게 실컷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앙리와 그 반대에 서 있는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이야기를 비슷한 비중으로 읽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순수한 주체성으로 가득한 존재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그렇다면 르메트르가 '오르부아르'를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려고 하는 지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가 당한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가져왔던 것. 바로 수동성의 파국이란 것을 말이다.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가 복수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바로 그런 수동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그로부터 이익을 보려는 소수의 획책으로 벌어진다. 다수는 그저 거대한 파고 앞의 작은 조각배처럼 휘말릴 뿐이다. 그들이 애국에 무분별하게 선동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결국 자신들마저 파멸시킬 전쟁을 막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았기에 그들은 죽었고 자신의 무덤조차 온전히 가지지 못하고 함부로 묻힌 것이다. 전쟁은 다수의 맹종 그리고 수동적인 방관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리고 이는 전쟁을 벌이려는 소수가 전쟁이 오로지 소수인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할 뿐인데도 마치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선전하여 가능해진 것으로 이런 소수의 선전, 선동은 그대로 사기와 마찬가지다. '오르부아르'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이 사기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개인의 의지를 가없이 억압하는 상황의 가장 대표적 존재인 전쟁 자체가 사기인 것이다. 조지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벌였을 때 그 이유로 든 이라크의 생화학 무기 보유가 사기로 드러났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사기에 사기로 대응해 사기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하지만 르메트르는 이들의 방법에 동조하지는 않는다. 르메트르는 마키아벨리가 아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건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를 앙리의 사기와 병치시키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결국 알베르와 에두아르가 아무리 선의로 자신들의 수단을 정당화하려 해도 앙리와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에두아르의 가면과 죽음이 이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깨진 얼굴'의 에두아르는 사기가 벌어지는 동안 자신의 기분에 따라 이런 저런 가면을 바꿔 쓴다. 이것은 이유야 어쨌든 거짓을 말하기로 한 이상, 그 거짓 안에서 자신의 진실을 찾아낼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런 면에서 광기는 그에게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에두아르와 알베르 모두 프랑스에 머물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르메트르가 독자들에게 그들의 길이 결코 올바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에두아르는 죽어서 프랑스에 머무를 수 없고, 알베르는 도피해야 해서 머무를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그렇기에 여기서 조제프 메를랭의 존재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의 길이 르메트르가 생각하는 참된 길이다. 이는 또한 진정한 주체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어디까지나 타인에 대한 책임을 적극적으로 떠맡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길이기도 하다. 조제프 메를랭이 그렇다. 그는 앙리가 획책하던 무덤 사기를 성실한 조사로 알아챈 유일한 사람이다. 앙리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뇌물로 십만 프랑이나 제시했지만 누구보다더 보잘 것 없었고 무능력했던 조제프 메를랭은 넘어가지 않는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지만, 사실 이 공동묘지들은 그를 너무 가슴 아프게 했다. 이곳은 그가 아무도 원치 않은 이 직위에 임명되고 나서 세 번째로 감사하는 묘지였다. 전쟁을 식량 제한과 식민지부의 공문들로만 접했던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 공동 묘지 방문은 실로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그의 뿌리 깊은 인간 혐오증이 뒤흔들렸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지구는 늘 대재앙이나 역병으로 황폐화되기 일쑤고, 전쟁은 이 둘의 조합에 불과하다. 그를 탄환처럼 꿰뚫은 것은 죽은 이들의 나이였다. 대재앙은 만인을 죽이고 역병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이지만, 젊은이들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은 오직 전쟁뿐인 것이다.(p. 320)


 그는 전쟁에서 아무 이유없이 희생당한 젊은이들을 기억하고 거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한 것이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생각하거나 관심가지지 않았던 그들을 말이다. 그들만큼이나 관심받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했던 조제프 메를랭.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를랭, 그만은 그들을 기억하고 적어도 그들의 죽음에 걸맞는 존엄을 찾아주려 했다. 그가 앙리의 부정을 보고하는 보고서에 그가 받은 십만 프랑 지폐를 하나하나씩 모두 붙였던 것은 그 지폐 하나로 치환되어 버린 프랑스 젊은이들의 죽음을 부디 기억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메를랭을 통해 르메트르는 '오르부아르'의 여정을 끝낸 우리가 이제 어디로 시선을 향해야 하는 지 확실하게 가리켜 준다.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넘어 기꺼이 타인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 그것을 실천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함을, 바로 그 때에 진정 자유로워지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그것을 행한 당사자인 나라는 것을 말이다. 르메트르가 에필로그의 마지막을 굳이 메를랭으로 맺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설령 '오르부아르'에 나온 모든 이들을 잊더라도 이 사람만은 기억하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포기하고 그만한 부정을 바로 잡았으나 그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고 비루하기만 하다. 그러나 르메트르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그는 상황에 떠밀리지 않음을. 설사 계속 보잘것 없고 약한 존재로 남을 지라도 늘 자기 뜻대로 생각하고 행위하면서 시대가 망각에 빠뜨리려는 타인들을 기억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애쓴다는 것을. 그가 결국 생소뵈르 군사 묘지의 관리인이 된 것은 그런 그의 실천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러한 르메트르의 진심은 시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세월호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명징하게 울린다. 우리들에게 세월호에서 숨진 아이들은 메를랭에게 프랑스의 젊은 전사자들과 같다. 기억해야 하고 우리가 책임을 기꺼이 떠맡아 그를 위해 뭐든 실천해야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오르부아르'는 그런 의지를 우리들에게 불러 일으킨다. 화가 마티스의 그림과 같은 선명함과 귀스타브 쿠르베의 리얼리즘적인 세밀함으로 그런 의지를 더욱 벼리게 만든다. 얼마전 세월호 청문회가 있었다. 중계 방송을 통해 변명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가해자들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얼른 망각에 묻어 버리는 것. 그런 그들의 모습은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증인인 알베르를 묻었던 앙리 그대로였으며 그들이 누구이며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기보다 하루라도 빨리 묻고 그것으로 서둘러 망각하려 했던 프랑스 모습 그대로였다. 에두아르의 존재하지 않는 추모 기념비는 아마도 프랑스의 그러한 거짓된 추모를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에두아르의 사기는 우리들에게도 보내는 경고요, 복수의 예고가 될 것이다.


 놀랍도록 경탄하며 읽었다. 둔중한 마음의 울림을 겪었다. '오르부아르'가 그랬던 것은 분명 자꾸만 환기되는 세월호의 참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그 비극 앞에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오르부아르'가 내내 묻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생각하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만 쉽지 않다. 알베르가 앙리 때문에 흙 속에 묻혀 있을 때 그는 포격의 여파로 날아온 말머리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살린 그 말 머리를 선명하게 기억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나아갈 곳은 알지만 도대체 어떻게 걸어가야 할 지 얼른 그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 지금의 나처럼.

 그러니 나도 알베르만큼이나 어서 그 말머리를 찾고 싶다. 그것을 찾을 때까지 '오르부아르' 곁에서 꾸준히 사유하련다. 주체와 책임 그리고 실천을 화두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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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0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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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 0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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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6 0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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