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굳이 프랑스의 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매니아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설을 즐겨 읽다보면 나도 한 번 작가가 되어볼까 하는 유혹이 들게 마련이다. 한 번은 그 유혹이 정말 강하여 도전해보자 생각했고 도움이라도 좀 받을까 하여 마침 발간되었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한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가의 신념'이란 책을 펼쳤다. 그러다 뒤늦게 이 책을 보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에서 다름아닌 이 대목을 만났던 것이다.


 얼마 전 '허클베리 핀' 신판을 읽으면서 내가 이 소설의 구절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 제임스 T 파렐의 '스터즈 로니건' 삼부작을 다시 읽으면서도 내가 그 구절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마 에밀리 디킨슨이 자기 시를 아는 것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신념' p. 39)


 읽자마자 '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사람이야 기계야? 무시무시한 기억력이었다. '허클베리 핀'은 아주 두껍다. 거기다 온갖 미국 방언까지 있다. 스티건 로니건 삼부작은 또 어떠한가? 페이퍼백 판으로도 페이지 수가 무려 896 쪽에 이른다. 정말 상당한 분량인 것이다. 그런데 이걸 몽땅 암기하고 있단 말이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도 대부분 암기하고 있다는 고백이 있다. 그러니 절망했다. 과연 이 정도의 기억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작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나는 꿈을 접었다. 그 때부터 나는 좋은 작가는 괴물 같은 자들만 되는 것이라 여겼다. 천부적 재능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스탠 리의 코믹인 '엑스맨'에 나오는 돌연변이 초능력자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래, 그것이 '작가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 어떤 외경심이라고 해도 좋다. 신탁을 받는 무녀와도 같이 그들이 하는 말을 고이 새겨 들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랬기 때문에 내게 경이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작가들의 인터뷰로 가득한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는 것은 한 마디로 올림푸스 신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또 어떤 어마무시한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놀랄 준비를 미리 하고서.


 생각해 보면 정말 이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란 일방향이었다.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는다. 그건 창출과 향유의 관계요, 송신과 수신의 관계였으며 생산과 소비의 관계였다. 지금도 여전히 작품의 해석에 대한 권위는 우선적으로 작가에게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독자란 작가가 새겨 놓은 의미를 캐내기만 할 뿐, 작가 이상으로 작품의 의미를 새롭게 창출하지는 못하는 존재였다. 한 마디로 독자는 소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만나게 된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설의 전체적인 부분을 일단 그려놓고 시작한다는 오르한 파묵을 제외하고는 모든 작가들이 정작 작품을 쓸 때조차 이 다음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확실히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움베르토 에코는 같은 페이지를 수십 번 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고는 엉망진창이라 고치고 또 고쳐야 했다고 고백했으며 폴 오스터는 자신의 작품 '거대한 폐허'에 등장하는 인물의 말을 빌려 '책은 무지에서 태어난다'고 말했다. 이언 메큐언은 문장이나 문단이 끊임없이 수정되는 방식을 좋아해서 타자기 보다 컴퓨터를 선호했고 필립 로스는 새 책을 준비할 때는 그 책에서 이야기할 문제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여야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가는 작품 안에서 자신이 철학을 명확히 표현할 권리를 버려야 한다고 단언했고 레이먼드 카버는 매일매일 연속해서 열 시간, 열 두 시간, 열 다섯 시간을 앉아 글을 쓰지만 그 중 많은 시간을 수정하고 다시 쓰는 데 할애한다고 얘기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글쓰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 흐르듯 쉽게 쓰이는 정신 상태라는 건 없으니 자신은 그저 꾸준히 글 쓰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고 고백했으며 작가를 우물에 비유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특히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작가는 자신이 꿈꾸는 완벽함에 필적할 수 없으며 자신은 불가능한 일에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동시대 작가들을 평가한다고 하면서 '소리와 분노'를 쓸 당시 몇 번이나 이리저리 고쳐도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미진함이 남아서 애를 먹었는데 출판되고 1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결할 수 있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하는가 하면 소설가는 소설을 시작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어떤 사건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 지에 대해 항상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EM 포스터 조차 때때로 등장인물이 자신의 계획으로부터 도망을 친 경험을 한다고 털어 놓았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조차 없는 미노타우루스의 미궁과도 같이 그 때 그 때 떠오른 영감이라는 희미한 횃불에 의존한 채,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출구를 찾아 나아가듯 수없이 반복된 시행착오가 빚어낸 결과였다. 여기서 주목하게 된 것은 그들이 출구를 찾았던 순간은 늘 자기 작품의 독자가 되었을 때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작가라는 신분이 순전히 생산한 것이라기 보다는 작가와 독자라는 이중 역할을 오가며 상호 협력한 결실에 더 가까웠다. 작가 혼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다. 유정에서 뭔가 제대로 된 것을 길어내려면 어디까지나 독자의 협력이 필요했다. 결국 작가와 독자는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의 관계였고 동반자였다. 의미는 홀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 나가는 창조의 여정 자체였다. 열 네살 때 같이 소풍을 간 친구가 갑자기 발생한 낙뢰에 맞아 죽은 것을 목격한 뒤로 세상 만사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은 폴 오스터가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이 맞는지 알기 위해 '전미 청취자 사연 프로젝트'를 통해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던 것처럼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도 말한다. '소설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다. 소설 안에서의 성찰은 본질적으로 가설에 불과하다. (p. 296) 설령 소설가들이 자신들이 사상을 표한한다고 한들 철학적인 주장이라기 보다는 역설이나 즉흥성을 가지고 하는 지적 유희의 습작에 불과하다(p. 297)'고 말이다. 결국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고 해도 그것은 완결된 게 아닌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따른다면 이제 독자의 참여를 기다리는, 비유하자면 보드 게임 판이 놓인 것과 같다. 작가는 문장의 조합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놀기 위한 기본적 규칙을 정해 놓았을 뿐이고 그 진정한 의미는 참여한 독자들의 플레이로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쓰는 것에 비해 종종 열등한 행위로 오해되곤 한다.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으로 확인가능한 구체적인 결과물을 남기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작가란 무엇인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읽는 것도 작가의 글쓰기만큼이나 능동적인 행위였다. 가필이란 형태이든, 수정이란 형태이든, 그것 나름의 의미 경로를 만들어 나가면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독자 자신의 작품을 말이다. 세상의 누구나 저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듯이 읽는다는 행위도 자신만의 책을 쓰는 일이었다. 포크너의 말마따나 이야기로 자신의 불멸을 보장받는 것은 굳이 작가만의 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우리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도 허락된 권리였다.


 실은 요즘 읽는다는 것에 많은 회의가 들었다. 나날이 실망스럽기만한 세상의 풍경을 목도하면서 책을 읽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책으로 알게된 것 때문에 더 괴롭기만 했을 뿐. 어쩌면 나 역시도 읽는 행위 자체를 너무 실리적으로만 바라본 것은 아닌지 싶다. 읽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능동적 창조이며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성장하듯이 나 자신을 부단히 성장시키는 행위인데도 말이다. 그것을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닫는다. 다시금 열심히 읽어 볼 생각을 한다. 문득 하루키도, 오스터도, 마르케스도, 로스도, 카버도 매일 꾸준히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읽기도 마찬가지이리라. 시작을 조이스 캐롤 오츠로 했으니 끝도 그녀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나에게 '빅엿'을 선사했던 바로 그 책, '작가의 신념'에서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이상적으로 볼 때 글쓰기는 열정적이지만 뒤죽박죽이기 십상인 개인적인 통찰과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범주화와 가치 평가에 재빠른 공동 세계와의 균형이기 때문에 이 글쓰기라는 예술은 기술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기술이 없다면 예술은 개인적인 것일 뿐이다. 예술이 없다면 기술은 돈벌이만을 위한 것일 뿐이다.(...) 젊거나 갓 시작하는 작가들은 끊임없이 고전과 현대 작품 양쪽을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 이 기술의 역사 속에 푹 빠져보지 않은 작가는 '창조적 노력의 95%가 열정뿐인 개인'인 아마추어로 영영 남게 되기 때문이다."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는 말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문득 깨닫는다. 그녀가 나를 좌절케 했던 그 괴물 같은 기억력에 대해 말한 것은 무엇보다도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역시 그녀 자신이 훌륭한 독서가였기 때문에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읽기는 중요하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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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30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소설 쓰는 사람만 가리키는 것은 아닐 텐데, 작가 하면 소설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어떤 글보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겠죠 재미있게 읽으니 쓰고 싶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작가는 쓰지 않으면 못견디는 사람인지도 모르죠 그런 게 있다면 좋을 텐데, 저는 늘 쓸 게 없어, 하는 생각을 하니까요 책을 읽은 다음에 늘 그러는군요 어쩌다 가끔 좋은 게 떠오르기도 하지만,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은 좋은데 글로 나타내면 어쩐지 이상해지기도 해서...

많이 외우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넓게 읽어야 하는 건 맞을 텐데, 저는 그렇게 못하고 있네요 ‘책 읽기의 즐거움은 그것이 별 쓸모가 없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는 말도 있더군요 책 읽기 자체를 즐기면 좋겠죠 저도 그렇게 못하기도 하는데, 싫어하지 않으니 여전히 읽는 거겠죠

여러 작가들이 하는 말 들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

ICE-9 2015-05-01 06:14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하면 저도 아직 글만큼 힘든 게 없어요. 그래서 더욱 작가들이 대단해 보이죠. 어떻게 저렇게 몇 시간이고 주구장창 쓸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그런데 확실히 늘 쓰다보면 좀 더 글쓰기가 쉬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백지 상태지만 뭔가 끄적이다 보면 신기하게도 줄기가 잡히고 아귀가 맞아가는 느낌을 받곤 해요. 그럴 땐 어떤 쾌감까지 느끼겠더군요. 어쨌든 열심히 읽어 볼 생각입니다. 작가들의 말을 듣고 싶으시다면 단연코 이 작가란 무엇인가를 추천드리고 싶어요. 정말 들을 게 많았어요^ ^

AgalmA 2015-04-30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스 캐럴 오츠 리뷰가 있는 [작가란 무엇인가 2]가 아닌 [작가란 무엇인가1]로 풀어나가시다니 재밌습니다.

ICE-9 2015-05-01 06:16   좋아요 0 | URL
와, Agalma님 말씀 감사합니다. 캐롤 오츠야 인터뷰보다 직접 쓴 `작가의 신념` 제게 너무 커다란 충격을 줘서 그렇게 풀어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