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분이 전화를 해줘서 이글루스라는 곳에 들어갔고 거기서 어느 고매하신 분이 쓴, 중복리뷰에 대한 글을 읽었다. 주제만 들어도 멀미가 나는 그 사건이 알라딘을 장식할 때 글을 쓴 분은 태국에 계셨단다. 그래서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그 글의 첫마디에 난 그저 웃어버렸다. 태국이 아닌 시베리아에 있었다면 사태를 냉정하게 보실 수 있었을테고, 소말리아에 갔었으면 헝그리정신을 가지고 사태를 파악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하필 태국에 가는 바람에 코끼리 다리밖에 못봤을까.
아무튼 그 글은 알라딘의 중복리뷰 논쟁이 자기 생각과 달리 돌아갔다고 이야기하며, 그 원인이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알라디너들의 한국병이란다. 이런 글이 올라오자 평소 싸움질에 굶주렸던 분들이 아주 난리가 나버렸다. imax와 위서가 등 그 당시 전우들이 좋아라고 달려들었고, 지네들끼리 “(당시) 문제제기한 분들도 대단한 분이세요!” 이래가면서 덕담을 주고받는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다보니 잠시 숙연해지게 된다. 알라딘을 패거리주의라고 욕하면서 자기네들끼리 패거리를 지어 서로 덕담을 하는 풍경이란!
가끔 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은 아주 대단한 정의를 실천하는 양 굴면서, 별 것도 아닌 것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 자기 앞가림이나 잘 할 것이지 오순도순 모여 잘 놀고 있는 공간에 들어가 정의의 깃발을 휘두르며 난리 부르스를 치는 사람들. 자기 뜻이 관철되건 말건, 그 공간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것으로 그들은 만족한다. 크로넨버그인가 하는 감독이 이들을 알았다면 그들을 주인공으로 ‘폭력의 역사’ 속편을 찍자고 할 거다.
중복리뷰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그 패거리는 합숙을 하며 어떻게 공격을 할 것인가, 선봉은 누가 맡을 것인가를 사전에 모의했단다. 결국 거칠기로 유명한 iamx가 포문을 열었고, 나머지는 열심히 댓글로 지원했다. 그네들이 원한 건 전쟁이었을 뿐, 논쟁은 애당초 관심 밖이었다. 당시 위서가가 여대생님과 펼친 댓글전쟁은 왜 그네들을 예의바르게 대해주지 말아야 하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알라딘서도 활약하고 계신 어떤 훌륭한 분은 “이번 공격의 목표는 정군님이었는데 엉뚱하게도 여대생님마저 쫓겨났다”며 악어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가 어찌나 안타까워하는지 내 가슴이 다 아팠다 (너무 가슴이 아파 그와는 두번다시 연락을 안하고 있다).
‘정의’라는 고매한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사실 그네들의 속셈은 별 게 없다. 알라딘이라는 곳이 화기애애한데 그걸 못참겠다는 것, 적립금을 받을만한 리뷰를 쓸 능력이 없다는 것, 평소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던 이를 쫓아내고 싶다는 욕망. 사태가 대충 마무리되자 그네들은 원래 있던 한분을 제외하고 일제히 알라딘을 떠났지만, 그 싸움의 후유증을 감당해야 하는 건 남은 알라디너들의 몫이었다. 그때의 상처가 대충 아물어갈 시점인 8월, 다시금 그네들 중 하나가 거기에 관한 글을 올린 건 폭력에 대한 그들의 집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시 우리의 착오는 그네들이 정상적인 네티즌이라 생각하고 대꾸를 해준 거였고, 응전에 신이 난 그네들은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싸움에 임했다. 그 경험에서 우리는 배웠어야 하고, 말해봤자 결론도 안날 그런 일에 신경을 끄고 원래 살던대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워낙 예의가 바르신 아프락사스님이 벌써 중복리뷰에 대해 글을 쓰셨다. 사태가 다시 재발할 조짐이 보여 심히 무섭다. 우리, 제발 그네들을 무시합시다. 지나친 예의는 건강에 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