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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ㅣ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4.3과 광주는 무겁고 아프다. 삼풍과 세월호와 이태원은 끔찍하고 비통하다. 한국전쟁은 내 경우, 안타깝고 슬프지만 심정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는 비극이다. 가까운 친인척 중에 이산가족이 생겼다든가 집안살림이 망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유령의 시간>이 나왔을 때 골라 들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번에 <유령의 시간> 개정판을 읽은 것도 한국전쟁보다는 김이정 작가의 개인사에 궁금증이 생겨서였다.
알다시피 <유령의 시간>은 김이정 작가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자서전 원고를 발견하고 그 일기를 완성하려는 염원으로 완성한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김이섭이다. 이섭과 함께 화자의 역할을 하는 딸 지형이 김이정 작가의 분신이고.
나한테 <유령의 시간>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인연에 전력하다 스러진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맑은 이마를 가진 진과 결혼해 세 아이를 낳은 이섭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활동한 게 발각되어 감옥에 가면서 가족을 다 잃게 된다. 소문에는 진이 북으로 간 남편 이섭을 따라 북으로 가는 행렬에 끼었다고 한다.
이섭은 지형 남매의 엄마가 되는 박미자와 결혼한 뒤에도 북으로 갔다는 첫 아내 진과 세 아이를 잊지 못해 박미자와는 혼인 신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박미자와 지형 남매를 위해 몸이 쓰러질 때까지 일한다. 온 마음과 몸을 바쳐 자신이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심지어 진과 헤어졌으면서도 그녀의 아버지인 장인과도 평생 연을 끊지 않고 서로 끔찍이 생각하고 위한다. 미련하달까 지극하달까, 암튼.
더 나아가 이섭은 어린 시절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괴롭히는 운식이가 “네가 나뭇가지 거둬가는 바람에 내가 주워갈 게 없다”는 억지스러운 말에 가진 자로서의 잘못(?)을 크게 깨닫는데 세월이 흘러 선박회사 사장이 된 운식을 만나서는 “내가 가졌던 것을 운식이가 가지게 되어서 마음이 편하다”라고 마음을 토로한다. 운식과의 만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풀어야 할 숙제로 간직했던 셈인데, 이것은 자신의 운명을 통째로 말아먹게 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마음에서도 드러난다. 이섭은 자신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공산당 조직에 합류한 것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유령처럼 살아왔지만, 가진 것을 나누어 다 같이 잘살자는 사회주의 사상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다는 생각을 놓지 않는다. 물론 대학교수가 되어 자기 인생을 깔끔하게 정돈해서 살아가는 친구 앞에서 자신이 몽상주의자였을 뿐이라고 자학하긴 하지만 그건 고통 속에서 지르는 비명일 터다.
이 소설의 서두에서 새우양식업을 하는 이섭은 새벽녘 바닷가에 서서 혹시라도 올지 모를 그들을 기다리며 두려움과 설렘으로 떠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설이 끝나갈 때는 막내딸 지우가 죽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두 장면은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 독자로서 나는 이 두 장면이 하나의 비극으로 뭉쳐서 다가왔고 지우의 죽음에 이르러 무너지는 이섭처럼 마음이 무너져 눈물을 쏟아냈다. 이섭이 살아낸 시간에 ‘유령의 시간’이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붙였는지 작가 김이정이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이 이섭만의 시간이 아니었던 거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이섭은 사회안전법이라는 국가폭력에 뇌혈관이 터지면서 쓰러진다. 이 소설의 화자로서 아버지 이섭의 생을 지켜본 지형은 바람부는 호지(새우양식장으로 물 고인 웅덩이) 밑에서 온 몸으로 물결을 버텨내던 새우를 떠올린다. 이섭을 차갑고 어두운 곳에 갇혀버린 한 마리 등 굽은 새우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소설을 끝낸 김이정 작가는 후기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너무 작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염려한다. 염려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섭의 생애는 멀어졌던 한국전쟁의 비극을 이 시대로 소환한 소설적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이섭은 마음을 저미게 하는 한 시대의 주인공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