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김밥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 근사록을 논하지 말라.

 

하늘에는 태양이나 별처럼 자체 발광하는 것들도 있지만, 달처럼 태양빛을 받아 반사하여 빛을 내는 경우도 있다.

언제부턴가 맨 앞에서, 스스로 빛을 낸다는 따위의 말들이 부담스러워졌다.

자체발광이나 주인공, 주체가 되는 삶도 멋지지만,
그것들이 빛나고 멋지기 위해서는,

어두운 부분은 물론이고 어둠과 빛의 경계가 되는 두리뭉실하고 모호한 배경들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달처럼 태양빛을 반사하여 빛을 내는 태양보다 어두운 달같은 것들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게 되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밝음이 환하고,

달은 태양빛을 반사해 내는 면적에 따라 밝기가 다르다.

내가 '제대로' 된 어둠이거나 들어온 빛을 '고스란히' 반사해 내는 반사경이었을때,

내 남편과 아이라는 밝음이 한층 빛날 수 있다.

어제 새벽에 일어나서 수련회 가는 아들을 위하여 김밥을 쌌다.

김에 밥을 얇게 펴고 여러가지 재료를 차곡차곡 얹어 돌돌 만 문장은 '하이데거'와 '기획 투사'였다.

 

나도 참 웃긴 것이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위해서 관련자료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않고,

중이 염불 외듯 김을 한장 깔고 '하이데거', 밥을 얇게 펴고 '기획투사',

여러가지 재료를 나란히 쪼로록 놓고  '하이데거', 김발로 돌돌 말아 꼭꼭 눌러 '기획 투사'

...이렇게 읊조리고 앉았었다.

 

기껏 정성 들여 김밥을 싸 3단 도시락에 넣었더니,

"엄마아~~~~~! 내가 어제 한 얘기 뭘로 들었어?

  제발 튀지않고 싶으니까...다른 애들처럼 호일에다가 김밥 한 줄 둘둘 말아달라고 그랬지~"
그러고보니, '둘둘~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요즘 아들과의 사이가 심하게 삐그덕거리다 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나 보다.

'정말 호일에다가 김밥 한 줄을 둘둘 말아가지고 가는 애들이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내 딴에는 새로운 시작이고 출발이라지만, 남들이 볼때는 눈 감고 귀 막고 소통을 거부하고 정 떼려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한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한 내가 참자',

또 다른 한손으로 가슴을 다독이며,

 '참을 인'忍'자 세번만 쓰자'

하고 자위하였다.

암튼 중간에 타협점이라고 찾은 것이 쓰고 버려도 아깝지 않은 재활용 용기였다.

 

 

 

 

그렇게 꿀꿀한 마음을 어떻게 갈고 닦아 보려고 집어든 책이 '근사록'이었다.

 

 

 

 

 

 

 

 근사록
 한형조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2년 1월

 


난 한 작가에게 필이 꽂히면 그 사람의 전작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한형조 님은 '허접한 꽃들의 축제'와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통하여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과거와 현대, 동ㆍ서양 할 것 없이 시대와 공간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하며 넘나드는 사상적 깊이에 매료되었었다.

게다가 수선 부리지 않는 글의 품새 또한 고고하기 이를때 없었다.

 

얼마전 웹서핑을 하다가 '근사록'의 저자 란에 그의 이름이 박혀있는 것을 보고 설레여 주문했었다.

근사록은 판본이나 해제를 달리해 가며 여러번 읽은 기억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읽은 기억만 있는지라, 체화하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에,

이 분의 것으로 보면 혹 문리가 트이듯이 어느 순간 훤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근데, 책을 받아보고 좀 실망을 했는데...여러명의 필진 중 대표 저자일 뿐이다.

 

한형조님은 서문에서부터 반짝거렸다.

' 다섯꼭지의 글은 그런 점에서 '해설'이라기보다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학이나 주자학은 역시나 '낯설다.' 이 기획은 그 낯설음을 덮지 않고, 생살로 확인해보고자 했다. 손쉬운 동조는 위험하고 쉬운 설득은 무력하다.

 혹, 그동안 유학을, 너무 이너 서클에서 '당연하게' 설교하지 않았을까. "한국의 전통이고, 거기 좋은 말씀만 가득하구나"의 안의함 같은 것. 무릇 이방의 사유는 이방의 것으로, '불가해하다'고 적어주는 곳, 거기가 소통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반대편의 경계도 잊지 않아야겠다. '낯설다'는 것이 혹 진리의 징후일 수도 있다.(7쪽)

 

이 책이 낯설다는 사람들을 위해 살짝만 얘기해보자면, 주자학의 입문서이자 교과서이다.

사서삼경 외에, '심경'과 이 '근사록'을 보탤 수 있겠다. 그런데도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책의 이름조차 생소할 터이니 주자학은 근 백년 사이에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제목의 '근사'는 논어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근사록, 덕성에 기반한 공동체, 그 유교적 구상'

자세히 보니 이 책의 제목은 그냥 '근사록'이 아니다.

그동안의 책들이 교과서적 진술의 화석으로만 남아있던 것을 우려하여, 그걸 넘어서고자 노력했단다.

무엇보다 지식이 삶에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주자가 '근사近思란 이름을 붙인 이유라고 못 받는다.

경험을 통해, 지식은 생명을 얻으므로 그 정신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단다.

다시말해, 교과서(근사록이겠지?)가 알려주지 않는 맥락과 지층을 엿보여주고,

시대가 정위해놓은 판단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며,

미래를 위해서 주자학적 사유가 던지는 교훈과 충격의 지점을 확인하고자 했단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주제 다섯가지를 설정했단다.

도, 공부, 가족, 사회, 국가가 그것인데....

그것은 각장마다

1장, 도와 형이상학,

2장, 공부와 마음통제, 심경과 상호보완

3장, 가정의 경영, 남녀의 역할 차이에 대한 음미

4장, 유교의 공동체적 세계관 - 주자학적 구상의 전체적 얼게, 혹은 조감도

5장, 국가와 통치에 관한 장, '자연'과 '무위' 위에 설정한 '이상주의'국가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그 태극이다. 그 태극이 움직여 최초의 움직임을 낳았다. (無極而太極  太極 動而生陽)

(31쪽)

 

퇴계 또한 같은 치지에서 자신의 필생의 역저 '성학십도' 맨 첫머리에 이 '태극도설'을 실었고,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이것부터 가르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멈추어서서 묻는다. "대체 자연이, 그 과정이 왜 인간의 길에 그토록 중요한가?" 여기 설명이 필요하다.

 주자학은 인간을 독립된 개인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파생으로 본다. 그 자연 안에서 개인들은 타자와, 흑은 가족으로 혹은 공동체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개인은 그런 점에서 사적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의 과정에 협력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장재의 '서명(西銘)'이 그 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길은 우선 '자신의 유주적 의미'(理)를 자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일상 속에서 그것은 두꺼운 먼지를 덮어쓰고 있고, 그 가능성(性) 또한 심각하게 녹슬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존재에 대해서 묻지 않게 되었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가 일상적 인간으로서의 '다스 만'(das man)의 소음과 타율 속에 망각'되었다고 말할 때, 나는 단박에 주자학을 떠올렸다.

소외된 기(氣)는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둔감과 무기력을 노정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쳐가고, 다른 사람의 기쁘고 슬픈 일에도 동참하지 않는다. 표정이 없고, 얼굴이 굳어 있으며, 자신 속에 골몰하고 인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이 오래된 구습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본래의 감응의 자발성과 자연성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주자학은 그 목표를 위해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핵심은 자기 위주의 욕망과 왜곡된 습관 등을 고치고, 아울러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전체적 전망을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쉽지 않다. 또 사람 차이도 있다. 요순처럼 타고난 조건이 좋을 수도 있고, 인간 백정 도적처럼 도무지 대책 없는 유형도 있다. 보통은 자신의 노력만큼 이런저련 장애물이 즐어들고, 가려지고 묻혀 있던 본래의 자연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가령, 어른들이 지나가면 공경하는 마음이 들 것이고,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갈라치면 달려가서 구할 것이다.

ㆍㆍㆍㆍㆍㆍ

'근사록'의 도체편을 펴면, 기이하게도 이 체계가 '자연'에 대한 근본적 신뢰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노장의 믿음이기도 한데, 주자학 또한 동양의 오랜 전통에 맞게 자연을 최종적 원천,판관으로 알고, 그'절대'에 순응하는 것으로 인간의 일을 규정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 점에 고개를 젓는다. 인간의 일이 문제 해결의 연속이고, 사람 손이 가지 않고, '저절로' 잘 되는 일이 없는데, 정말 주자학은 '순진하게도', 물정 모르고 '자연의 자연성'에 최종적 귀의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32~33쪽)

 

조금 길지만 지문의 일부를 옮긴 이유는, 내가 김밥을 싸면서 읊조리던 '하이데거' '기획투사'와 묘하게 들어맞아서이다. 

 

제2장 공부 '생명의 의미에 대한 자각과 실천' 편까지는 읽었다.

내가 예전에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던 '주역, 인간의 법칙'을 쓰신 이창일 님이 쓰셨다.

 

'논어'가 '논어'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숙독을 통해 자신의 절실한 체험에서 확인되었을 때이다. '숙독이 완비' 되었다는 말은 성경의 구절들이 잘 익힌 음식처럼 맛이 우러난 것을 먹고, 잘 소화시킨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비록 독서를 위한 문자의 해독과 경전의 해석에서 엄밀한 문자학적 지식이 무시되지 않지만, 그것은 일의 반이지 목표가 될 수 없다. 젊어서 군서(群書)를 독파했던 정이천은, "나는 젊었을 때 책을 많이 읽기를 탐냈는데, 지금 많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름지기 성인의 말을 완미하여 마음 속에 기억한 연후에 힘써 행한다면 자득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완미하지 않으면 성경의 의미, 성인의 뜻, 일리(一理, 만물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치)는 파악되지 않는다.

 보통 독서인들의 주지주의를 지적하지만 정이천의 이와 같은 말은 반주지주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의 축적, 정보의 습득은 인식의 수평적 확대를 말하지만, 완미의 독서는 깊이의 수직적 측면 곧 체험의 깊이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지식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거나 양화된 정보의 수준을 평가하는 독서론은 이러한 깊이의 독서론을 측정할 수 없다. 전통의 독서 문화가 암송과 숙독을 위주로 한 이유를 알게 해 준다. (58쪽)

 

 

암튼 1장과 2장 까지 읽고 느낀 것은, 근사록은 체험철학이라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지식은 생명을 얻는다.

그냥 책상에 앉아 책을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몸을 놀리는 수고로움과 땀흘리는 신성함이 함께 우러졌을때 힘을 얻는다.

 

'천석군집 며느리뽑기대회'처럼 밥을 빌어 죽을 쑤어 먹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일부러 과대포장이나 예쁘게 담을려고 공을 들을 필요는 없다는 주의이다.

하지만, 있는 있는 도시락 놔두고 단지 튀는게 싫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장담할 수 없는 호일을 일부러 사다가 둘둘 말아가는 거 그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니다.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하는데, 노력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지...

무성의하고 대충대충 하는데도 노력 따위가 필요한 건 아니지 않겠나?

또 모르겠다, 지나치게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해 그것이 병을 불러 오는 경우라면...무성의하고 대충대충 하라고 하겠다만~

어째 영 꺼림칙하다.

 

그리고 어쨌든 봄비 내리는 아침이다.

 

 

 

 

 

이지형 두번째 소품집 - 봄의 기적
이지형 노래 / 해피로봇레코드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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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6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2-03-06 11:12   좋아요 0 | URL
근사한 리뷰인데요. ^^ 정말 근사해요. (짝짝짝)
세상에, 김밥을 말면서 하이데거와 기획투사를 읊조리는 엄마라니...
거기다, 포일에 말아달라는 쎄~한 아들 사이에 놓인 근사록이라니...

남자 아이들은 그런 게 있어요. 모범생 스탈로 도시락싸오면 초딩스럽다는...
아마도 애들이 다들 잘 먹었을 것입니다. 부러워 하면서요. ㅎㅎ

유교의 '자연'과 노자의 '자연'은 인용 의도가 다른 거 같아요.
유교는 '자연'의 법칙성 속에서 '종법'과 '양'의 두드러짐을 주워내고
노자는 '자연'의 무위함을 강조하는 식인 것처럼 말입니다.

一陽一陰之謂道... 이런 구절도 '양과 음'의 구별을 '도'라고 하는 건지, '한번 양이 되고 한번 음이 되는 원리'가 '도'라고 하는 건지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니 말이죠.
근사록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데, 이 책도 참고가 되겠네요. ^^

2012-03-06 12:19   좋아요 0 | URL
저런 김밥 도시락이라니 역시 모든 어머니의 사랑은 모든 자식에게 과분해요..ㅎㅎ (자식들은 늘 저렇게 말도 안 되게 투정하죠. 저만 해도 그런 경험 한 트럭이에요. -자식으로서..) / 그리고 너무 좋은 리뷰여요! 자연스럽고, 핵심적이고! 인용하신 글도 참 좋고요. ^^ 근사록 읽고 싶어졌습니다~

하늘바람 2012-03-06 13:25   좋아요 0 | URL
님의 내공을 어찌 따라가요. 정말 근사해요
아들은 징징 댔지만 엄마의 멋진 김밥을 두고두고 기억할 걸요
진짜로 호일에 둘둘 말아 주는 김밥만 싸 주는 엄마를 가진 아이는 평생 그립고 부러워할텐데
하이데거 학교 다닐때 살짝 읽어보았을떄 넘 어려웠어요.
지금은 제 자신이 수준이 아닌되어서

페크pek0501 2012-03-06 15:03   좋아요 0 | URL
저 위의 글샘님의 댓글에 동의합니다. 김밥을 말면서 하이데거와 기획투사라... 정말 멋져요.
그리고 재밌어요.ㅋㅋ
저도 짝짝짝~~~.

차트랑 2012-03-06 20:35   좋아요 0 | URL
동양의 고전을 접하기 시작한 것이 얼마되지 않아
양철나무꾼님의 페이퍼를 통해 도움을 얻고자합니다.
서재 즐겨찾기 추가해서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프레이야 2012-03-06 22:2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세실님에 이어서 님까지 김밥을~~~ 냠~
전 김밥 말아본 지가 언제 적 일인지 아득해요.
천국표 김밥으로 간단히 도시락에 넣어주던 불량엄마랍니다~ ^^

숲노래 2012-03-07 07:09   좋아요 0 | URL
옛 선비들은 책이나 생각을 넘어,
손에 쟁기와 호미와 낫을 쥐고
들판에서 일하고
집에서 기저귀와 걸레와 주걱과 부엌칼 들고 일했으면
"가까이 놓고 생각하기"와는 사뭇 달리
다른 삶이야기를 풀어냈으리라 믿어요..

같은하늘 2012-03-08 00:18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좋은 글에서 아들의 싸~~한 반응이 제일 눈에 들어오네요.
지금은 엄마~엄마~~ 하면서 따르는 아들들도 그렇게 될텐데라는 생각에...

순오기 2012-03-08 10:38   좋아요 0 | URL
와우~~~ 교양있는 엄마란 이런 엄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페이퍼네요.^^
음악처럼, 정말 고맙습니다~~~~~꾸벅 인사하고픈!
 

그러니까 어제 생긴 일이었다.

" 내일 개학하면 바빠져서 엄마랑 놀 시간 없으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엄마랑 놀아줄게."

녀석은 인심 쓴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넘넘 심심하여 방바닥을 뒹굴던 그녀, 속으로 '올레이~'를 외쳤지만...

" 뭐가 필요한 건데...?

  너 올해부턴 교복 입어서 패션에 힘 안줘도 되잖아.

  글구 엄만 절대 니네 아빠랑 백화점 안 간다~"

하고 한번 그냥 튕겨 보았다.

 

" 흥, 가지 마라~.

  나 별로 필요한 것도 없고, 어제 두시까지 책 봐서 별로 가고 싶은 생각 없어.

  필요한 거야 내 용돈으로 사도 되고...

  난 그냥 내일부터 3년동안은 아들없는 셈 쳐야 할, 쓸쓸할 엄마를 생각해서...마지막으로 한번 엄마랑 놀아주려고 그랬지."

오히려 녀석이 기세 등등이다.

 

"암튼, 암만 아빠랑 백화점 안 가."

"엄마, 내가 엄마가 없어, 아님 아빠가 없어 또 시작할까?"

그녀는 엉덩이가 무거웠다.

바꾸어 말하면 움직이는걸 너무 싫어해서, 가족 놀이나 모임, 나들이 같은데 따라다니는걸 엄청 싫어했다.

어느날 녀석이,

"내가 엄마가 없어, 아님 아빠가 없어?

 엄마, 아빠 둘 다 안가면 나도 안 가."

하고 그녀의 감성을 자극해서 어쩔 수 없이 끌어냈던 대사를 날렸던게, 녀석의 자발적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얼마전이었다.

자전거에서 넘어서 머리가 깨졌을때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기기는 커녕, 프랑켄슈타인이란 별명을 지어준 녀석이었다.

녀석에게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운동신경 둔하고 굼뜬, 아주 귀찮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만으로도 녀석의 욕구는 충족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놀이나 모임, 나들이 같은데 엄마의 참여를 단서로 내걸었던 사람이, 그 녀석의 아빠였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됐거든~아빠랑 둘이 다녀오시게."

"쇼핑은 안 하고 그냥 밥만 먹고 오자고..."

이 쯤에서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오케이하고 말았다.

 

일산에 있는 페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정말 밥만 먹었다.

기다리는 동안 녀석은 앞으로 엄마 얼굴을 보기 힘들테니 폰 배경 화면으로 쓰겠다며 얼굴 사진을 한 장 박았고,

밥을 먹으면서 대화는 자연 새학기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는 중에 녀석은 몇가지 얘기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엄마, 나 야.자.하면 안 될까? 우리 반에 나 혼자 안 하는 거 같애~ㅠ.ㅠ"

녀석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마냥, 아빠의 얼굴과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빤, 너 하고 싶은대로 하는 거 찬성이야."

"남들이 다하고 안하고가 뭐 중요해? 니 마음이 중요한거지?

 남들 다하니까 안하면 왠지 불안해서 하는거라면 반대고,

 니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해 봐."

"학생이 공부하겠다는데, 부모가 반대하는 집은 우리집 밖에 없을거야."

녀석은 그녀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뭔가 할말이 더 있는 눈치이다.

"근데, 학교에서 공부가 제대로 되기는 하던?

 그리고 야자하게 되면, 지금 다니는 검도랑 드럼이랑, 기타랑 그딴 건 다 어떻게 할거야?"

"뭘 어떻게 해? 안 다니면 돼지."

"다니고 안 다니고는 니가 결정할 문젠데, 학교생활하면서 선생님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할래? 에네지와 열정 넘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말야."

"암튼, 난 수험생이야. 그딴 거 말고 공부하는 학원을 보내 줘."

 

"진짜 아빠가 일러준 대로 하니까...된다아~. ㅋ,ㅋ~."

화장실에 다녀오던 그녀는 이 낮고 경박한 웃음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은 요 며칠 그녀의 일탈과 우울을...아들의 고입, 그와 관련 늦은 귀가가 빚어내는 일종의 빈둥지증후군이 원인이라고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이름 붙이자면, 아빠의 코치에 의루어진 '야자를 허락받기 위한 엄마 비위 맞추기 대작전'쯤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폰 배경 화면에 그녀의 얼굴을 찍어 집어넣을 생각을 한 것부터가, 그녀의 취향을 정확히 읽어낸 것이 신통방통하다 했다.

다른건 몰라도 자식농사 하나는 잘 지었다고 우쭐해 하려던 순간이었다.

녀석이 그녀에게 넘버원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는 까닭이기도 했으며,

이는 바꾸어 말하면, 남편은 열길 물 속보다 깊다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말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몇 안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박세연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1월

 

 

소통을, 소통이 되길 꿈꾸는 내가 제일의 소울 푸드로 꼽는 것은 커피와 차(tea)이다.

항상 잔이 따라 다니고, 때에 따라서는 받침까지 따라 다니기도 한다.

쓸쓸하거나 외로울 것 같지는 않다.

설사 고독하더라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적어도 손에 들고 있는 동안은 그만큼의 따뜻함을 전할 수 있어서 이기도 하다.

내가 곁에 없어도, 내가 선물한 그 차를 마시는 동안만큼은 커피나 차의 온도 만큼의 따뜻함을 전할 수 있어서 좋다.

 

커피나 차처럼 곁에 있어서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던 건 아닌지...있을 때 잘 해야겠다.

새벽에 약이 올라 몰래 사진을 지워버리려고, 녀석의 핸드폰을 들여다 보던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누구란 말인가?

사랑하는 마음 한자락 있었다면 지 엄마를 저렇게 애꾸눈으로 찍어놓고 헤헤 거릴 수 있었을까?

 

암튼 다 잊고 훌훌 떨어버리고, 녀석의 처음을 응원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나는 성시경의 '처음'을 따라 부르며,

녀석 없는 날씨는 좀 꾸물거리지만 마음만은 더 없이 찬란한 '처음'을 시작해 보아야 겠다.

 

나의 손끝이 당신을 느꼈을 때 나는 당신의 향기에 취하여 오고 가는 세상 속의 모든 일들 사랑 하나로 멈추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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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2-03-02 13:08   좋아요 0 | URL
ㅎㅎ 우리집이랑 똑같이 내가 엄마가 없어, 아빠가 없어 놀이를 이용하는군요.
있을 때 잘해라... 만고의 불변의 진리죠. ^^
그나저나 아드님이 재주꾼이군요. 드럼에 기타에... 든든하시겠네요.

2012-03-02 21:1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넘버원은 남편님이시군요.
울 아버지도 하시는 말씀이, "자식도 '한 다리 건너'고, 부인 옆에는 그래도 늘 남편인기라." (오늘 들은 말)
언젠가 예전에 하신 울 엄마 말씀은, 사람은 다 있어야 한대요. 친구도 자식도 남편도..(애인도?) 종류대로 다 필요로 하는 게 사람이라고. 전 없는 게 좀 많지만요.^^

cyrus 2012-03-02 22:31   좋아요 0 | URL
한창 공부만 해야 하는 시기에는 가끔씩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 같은 것도 해야된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힘들어도 꾹 참으면서 지냈거든요. 자기가 좋아하는 악기를 다룰 줄 안다면
쉴 때마다 연주하면 좋을거 같아요. 드럼이랑 기타라.. 혹시 학교에서 밴드부로 활동하시나요?
정말 아드님이 멋지네요. ^^

아이리시스 2012-03-03 14:4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양철나무꾼님 보면 평생 생각도 못했던 '아들'도 갖고 싶어요 ^________^
다 있어야 한다는 말에 저도 감동. 종류대로 다 필요한 것. 설령 지겨워지더라도요. 저는 없는 거 싫어서 기웃기웃 찾아볼래요ㅋㅋㅋ

달사르 2012-03-03 22:35   좋아요 0 | URL
아들과 아빠의 팀플레이가 멋집니다! 아빠가 아무리 작전을 잘 짜줘도 그걸 멋드러지게 표현해낸건 온전히 아들의 몫이니 전, 아들에게도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요. ^^

수험생 아들을 둬서 이래저래 마음이 쓰이겠어요. 저희 언니도 비슷한 경우인데 빈둥지증후군을 겪는지 옆에서 잘 지켜봐야겠습니닷!

순오기 2012-03-04 08:24   좋아요 0 | URL
이런 수를 쓸 줄도 아는 아드님은 비록 넘버원은 못돼도 이제 다 컷네요.^^

같은하늘 2012-03-06 02:50   좋아요 0 | URL
음... 아드님의 마음 씀씀이가 참~~~^^
우리 아들들도 이렇게 이쁘게 커야할텐데...
 

* 습관 : 1.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 
            2.<심리>학습된 행위가 되풀이되어 생기는, 비교적 고정된 반응 양식.

 

* 중독 : 1.생체가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일.

            2.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

            3.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

 

그러니까 어제 아주 낯선 장소와 상황에서 눈을 떴다.

그렇지 않아도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해서 고생을 하는데,

낯선 장소와 낯선 상황에서 눈을 뜬다는 것 자체가...뭔가 심상치않은 기류가 느껴졌다.
방의 풍경도 낯설었지만,

내 옆에 누워 있는 인물들도 의외였다.

동생의 딸인, 울보 공주들은 잠잘때 잠투정이 더 심해  내가 하나 뿐인 고모이긴 하지만 한번도 같이 자본 적이 없었다.

방문을 슬그머니 열고 거실로 나가니 거실 풍경은 더 가관이었다.
아빠와 남동생과 남편이 시체처럼 널부러져 있었다.

"아휴~"

하는 탄성의 원인이 그 광경을 보고서 였는지, 내 머리가 흔들려서였는지 확실치 않았다.

화장실을 찾아들던 나는, 때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던 동생의 처, 올케와 마주쳤다.

"형님, 일어나셨어요?"

평상시 같으면 나를 붙들어 세우고, 거실의 풍경에 대하여 열번은 '블라블라~'거리고도 남았을 올케와 나는 평소 죽이 잘 맞아 '형님'이라는 호칭 대신 언니, 동생하는 사이였다.  

난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닭살 돋게 웬 형님?"

하고 의아해 했다.

"어제, 아니 새벽에 형님이 그러셨잖아요."

올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심드렁하다.

"언니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셨잖아요!

 언니,동생은 피를 나눈 자매처럼 가까운 사이에나 사용하는 호칭이라고...

 우리 아빠 달랑 마른김에 깡소주 마시게 하는 못된 올케에게 언니로 불리우고 싶지 않다고 그러셨잖아요!"

사태파악을 채 못하고 애먼 눈을 이번엔 껌벅거렸다.

 

"저~언~혀 기억 안나는 거예요?"

나는 '저~언~혀'를 강조하기 위하여 고개를 위아래 끄덕이려다가 골이 흔들려 이내 멈칫거리고는 시선을 돌려 거실을 가리켰다.

"새벽에 저한테 전화하셔서, 울아빠가 마른김에 깡소주를 먹고 있는거 아냐고 하면서 막 우셨잖아요."

"고모부한테는 전화하셔서, 너네 아빠 우리 아빠 하면서 우셨대요."

"내가 초딩이야?"

"그러게 말예요. 아니면 고단수이던가...

 혼자 사신지 6개월밖에 안되는 니네 아빠한테는 왜 자주 연락하라고 하면서,

 평생 혼자 살다시피한 우리 아빠한테는 전화 한번  안하냐고 따지셨대요."

얘기인 즉슨, 엊그제 누군가를 만나러 나갔다가 음주를 해 주셨(?)고,

대부분의 음주는 약한 자와 길치에 대한 배려로다 동네에서 이루어지는데, 아니었나 보다.

귀가 길에 집과 두어정거장 떨어진 친정아버지 댁에 들르게 되었는데,

때마침 심심하셨던 아빠가 마른김에 깡소주를 드시고 계신 걸 보게 된다.

동네방네 전화해서 울고불고 통곡을 하고 난리를 치고는, 혼자서만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잠이 든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새벽에 자다가 전화를 받은 남동생 내외와 남편은 놀라서 달려왔고,

내가 한 얘기가 틀린 얘기는 아닌지라 각자 나름대로 회개와 성찰과 반성을 하고,

술파티를 하다가 저렇게 널부러지게 되었단다.

 

 

그렇게 그렇게...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낸  듯한 머릿속을 이리저리 조각맞추기를 하고 있을때, 이번엔 시아버님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셨다.

시아버님께서 내 핸드폰 번호를 알고 계시는지 조차 의문일 정도로 한번도 내게 먼저 전화를 하신 적이 없으셨다.

늘상 나를 향하여 말을 많이 아끼신다는 느낌이었고,

며느리를 부르는 호칭도, 박사도 아닌 나를 '서박'으로 부르셨다.

"...속은 좀 어떠냐?"

호칭은 생략하고,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셨다.
"네?...네."

"아범한테 콩나물국이라도 끓여달래서 먹어라. 딸깍."

 

 

"새벽에 사돈어른한테 전화해서 가관도 아니더라...내가 흉내 내보랴?

 아버님, 아버님 하지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아버님, 있잖아요...저희 친정 아빠는 말이죠~

 저희 올케한테 '아가야~'이렇게 다정하게 부르는데 말예요.

 아버님은 왜 저 박사도 아닌데 무뚝뚝하게 서박이라고 하세요?

 아버님은 제가 미우신거죠?"

아빠는 고개를 모로 꼬며 흉내를 낸다.

"아휴, 창피해~ㅠ.ㅠ 그래서?"
"아무리 미워도 대놓고 밉다고 하시겠니?

 역시 선비 집안은 뭐가 달라도 다르더라.

 대대로 선비 집안이어서 가정교육을 엄하게 받아놔서 그렇다...뭐, 그렇게 달래시는 거 같더라.

 넌, 거기다 대놓고...

 아버님, 저희도 양반 집안이예요.
 OO서씨 OO공파 OO대손이요,

 그렇지만 저희 아빠는 올케한테는 '아가야~', 저한테는 '따알~'이러고 부르세요.'이러더라구."

하면서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아올린다.

"ㅎ,ㅎ...아버님이 창피하시다고...형님 또 한번 그러시면, 짐 싸들고 애너벨리(유료 양로원)로 들어가신대요."

올케는 옆에서 깔깔거린다.

남편은,

"너 어제 나 모르는 누굴 만나더니, 뭔가 사줄 받은게 틀림없어."하며 툴툴거린다.

올케는 나중에야,

"언니, 난 술 취한 언니 모습 처음 보지만...그래서 언니가 오히려 인간적이랄까...더 가깝게 느껴졌어요."

라고 한다.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따윈 지금 중요한게 아니다.

술을 먹고 필림이 끊기는 건 알콜리즘의 시초이다. 

예전부터 술을 아무리 먹어도 행동이나 자세가 그다지 흐트러지지 않아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술을 끊어야 하는데...이제 끊기엔 술이 너무 달다.

 

습관이나 중독이나 되풀이된다는 점에선 같다.

단지 장애나 병적이나 비정상 상태일태 우리는 '중독'이라고 이름 붙인다.

술이 중독이 아닌 습관이 되게 할 방법은 정녕 없는건가?

 

 

 

 

 

 

 

 

 

 뜨겁게 안녕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몸이라는게, 조금 놀아보면 그 맛을 기가 막히게 알아서 계속 편하게 살려고 그래요. 자꾸자꾸 게으름 피우게 놔두면 막 놀고 자빠지고 싶어 해. 아주 습관이 돼서 놀려고만 드니까 좀 후둘겨 패서라도 움직여줘야 돼요.ㆍㆍㆍㆍㆍㆍ그래야 아 이거 내가 해야 되는구나, 싶어서 하지.(104쪽)


김현진은 지금 알콜 치료 전문 기관에서 치료를 받는단다.

그녀의 책을 읽다보면 술은 술이상의 어떤 것, 이를테면 '소울 푸드'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때문에 중독되지만 않는다면 습관정도는 공존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말이다.

 

ㆍㆍㆍㆍㆍㆍ의사선생님은 독을 한 컵 마시나 한 병 마시나 뭐가 다르냐고 대꾸했다. 사실 그 말이 맞았다. 그리고 얼울할 것도 없었다. 평생 마실 술을 지난 십 년 동안 죄다 마셔 버렸으니까. 내 몫뿐이 아니라 평생 술 한잔 입에 대지 않고 살아오신 부모님 몫까지 카드빚 당겨쓰듯 싹 쓸어 마셨으니 끊어도 억울할 것 없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이를 악물고 버틴다. 그 좋아하는 술을 어떻게 끊느냐고, 같이 술 마시고 싶다고 간 크게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맙기는 한데 사실은, 너무 사랑해서 차마 가까이 갈 수 없는 마음을 아십니까. 이 애절한 마음을.(256쪽)

 

김현진의 '뜨겁게 안녕'의 부제가 '88만원 세대 에세이스트 김현진이 전하는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이다.

88만원 세대하면, 우석훈이 생각나고, 우석훈의 새 책 '1인분 인생' 도 나올 예정이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수필집이란다, 기대된다.

 

 

 

 

 

 

 

 

  1인분 인생
  우석훈 지음 / 상상너머 /

  2012년 2월

 

 

보람의 의미와 보람의 가치, 우린 그걸 너무 잊고 살아가고 있다. 개인들에게 ‘보람 있는 삶’이 사라진 자리를 ‘보람상조’가 대신 채우고 있는 게 아닌가? 뭘 해야 보람 있는지는, 그거야말로 “그때그때달라요”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보람 있는 삶을 살겠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순간, 행복은 파랑새와 같은 것이라는 걸 문득 깨달을지도 모른다. 참 멋진 얘기 아닌가? 집 안에 있는 파랑새를 두고 세상을 헤매고 다녔던 치르치르와 미치르처럼 “돈 좀 원 없이 있으면 좋겠다”고 IMF 이후 10년을 “부자 되세요”를 입에 달고 살았던 우리들은 하마터면 집 안에 있는 파랑새를 굶겨죽일 뻔했다.(193쪽)

 

 지금 즐겁지 못한 삶이 언젠가 즐거울 수 있을까? 지금 즐거운 사람이 나중에 즐겁게 공부할 수 있고, 또 즐거운 일들로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고통을 참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행복은 그리고 마음의 평온은 그렇게 해서 오지 않는다. 지금 행복해야 나중에도 행복하고, 지금 행복을 찾지 못하면, 영원히 행복을 찾지 못한다. 자신이 고통을 참고 있으므로 남에게도 고통을 참으라고 말하는 사람. 아마 그 사람이 지옥에 먼저 가지 않을까?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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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7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2-02-27 20:19   좋아요 0 | URL
자연스럽게 그려주신 풍경이 전 왜 부러울까요?
한번도 그래 본적이 없고 그럴리 없는 옆지기, 그럴리 없는 시댁 그래서 일까요
그런데 그렇게 술을 많이 드셨는데 속 괜찮으세요?

쉽싸리 2012-02-27 20:34   좋아요 0 | URL
흠, 술 자시고 그럴 정도는 좀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약간 자제하심이...
매일 조금씩? 마시는 것도 좋아요. ㅎㅎ 그러면 습관 됩니다.

2012-02-28 00:12   좋아요 0 | URL
ㅋㅋ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위가 넘 안좋아서 알콜릭도 될 수 없는 사람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ㅠ

마노아 2012-02-27 21:59   좋아요 0 | URL
진정 취중진담이었나봐요. 그래도 하고 싶은 말 다 하셔서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건강 조심이요!!!

잘잘라 2012-02-27 22:23   좋아요 0 | URL
후후훗. 김동률의 취중진담, 오랜만에 불러봅니다.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안나, 불안해할지도 몰라아아앙~~~

프레이야 2012-02-27 23:20   좋아요 0 | URL
헉, 양철나무꾼님 필름이 끊어져 기억이 안 나실 정도면 좀..
그래도 이쁘게 다들 봐 주시는 거 보면 그동안 님이 어떻게 하고 살아오셨는지 감이 오네요.^^
제 동서도 일전에 술 취해 완전 필름 끊기고 난리난 적 있는데 저와 다른 사람 한 명만 그 현장을 똑똑히
기억하거든요. 그래도 동서가 워낙 착하게 잘 해와서 이해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어요, 제가요.

아무개 2012-02-28 10:13   좋아요 0 | URL
김현진씨 책 읽고 오히려 더 술이 땡겨서...금주중이라는 작가를 꼬드겨서 함께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었어요^^:::
두달정도 하루도 안 쉬고 마셔 본적도 있고, 아닐땐 일주일에 4일 이상 계속 마셔왔는데 이주전쯤 부터 왜인지 술이..글쎄 맛이 없는겁니다. 심지어 엊그제 제 생일엔 생맥주 두잔으로 끝을 냈어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술이 안땡기니까...내가 죽을때가 됐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ㅜ..ㅜ 습관과 중독은 어휘상의 차이일 뿐이지 특히나 술 문제에 있어서는 습관은 곧 중독이 될 바로 아주 바로 전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위험하죠.... 저도 술마시거나 책보거나 그게 제 여가의 전부이거든요.그래서 뭔가 몸을 움직이는 활동적인 일을 찾아보려고 노력중이에요.

글샘 2012-03-01 20:40   좋아요 0 | URL
음악이 정말 열정적이고 뜨겁네요. 술마시고 필름 끊어지는 일이야 병가지 상사이거늘... ^^
나중을 위해 고통을 참고 있으라고 말하는 사람... 그래요, 지옥으로 보냅시다. ㅎㅎ

같은하늘 2012-03-06 02:52   좋아요 0 | URL
취중진담~~~~~~
저도 얼마전 무지하게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방법을 써 볼걸 그랬나보네요.
만약 그랬다면 우리시어머니는 어떤 반응이 나오셨을까? ^^;;
 

 '불혹(不惑 ), 혹은 부록 ( 附錄 )'
                          - 강 윤 후 -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이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전에 '닮은 듯 다른, 다른듯 닮은' 페이퍼 때도 슬쩍 얘기한 거지만...

친구야, 자기랑 나랑은 많이 닮은 듯 하지만 달라.

그걸 개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고, 다른 이름으로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 거지만...

나이 마흔을 넘긴 아줌들의 그것은, 좀 거칠게 얘기하면 '고집'쯤 되지 않을까?

 

그렇게 놓고 본다면, 자기랑 나랑은 물과 오일쯤이 아닐까 싶어.

그냥 놓고봤을때는 별반 달라보이지 않지만,

기전이나 성질로 들어가면 하나는 불을 끄고, 다른 하나는 돋우어 아주 큰 차이가 나버리지.

 

물이 오일을 알기 위해서는 오일 가까이 가보아야 하고,

오일 역시 물을 알기 위해서는 물 가까이 가보아야 하겠지만...

이 둘은 기전이나 성질이 완전히 틀린 고로, 번지고 스며 물드는 따윈 꿈도 꿀 수 없겠지.

물과 오일이 서로에게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거울 삼아 자신이 물임을, 또는 오일임을 자각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자기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 준 적이 별로 없어.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의 그 많은 친구들 중 내 곁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다섯 손가락이 남는다는 말도 했던 것 같아.

난 유리로 만든 병 안에 나를 담아놓고 그걸로 모자라서 마개로 꼭꼭 막아두기도 하고 말야.

근데, 한번씩 술을 먹고 코가 삐뚤어지면 마개 간수를 제대로 못하게 되고...

그럴때마다 한 번씩 나의 내적 자아가 됐든지, 아직 내가 화해를 못했을지도 모르는 '내면아이'가 됐든지,

한번씩 튀어나오게 되고,

그런 걸 자기답게 놓치지 않고 있다가...

내가 힘들어 할때 같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해결책을 고심하고 하는걸 보면...정말 미안하고 고맙다.

 

그걸 자긴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더구나.

 

같은 원을 뱅뱅 도는 지인들의 흔적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점점 더 깊은 진흙 패임을 남기면서 걸어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계속 반복되는 흔적은 점점 밑으로 깊어져, 자연적으로 진흙 담장이 생성되고, 그럼으로써 길에서 벗어나 샛길이나 다른 길, 또는 드넓은 초원으로 들어서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또한 흔적 곁의 진흙 담장으로 인해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기 어려워지고, 내 세상은 오직 좁은 길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길은 날이 갈수록 질척해지고, 그만큼 걷기도 힘들다.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만, 결국 같은 자리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 됐든...숱하게 많은 고민 중 내가 자기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그건 자기가 내 고민을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친하거나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조차 구체화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말고 할게 없기 때문이야.

 

일례로 (나의 불면증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동네에 나타나진 않지만) 아직도 새벽에 깨어 있을 때가 많아.

몸이 힘들면 잠을 좀 잘 수 있겠지 싶어,

일을 더 열심히 하게되고, 몸을 더 혹사시키게 되고 했었는데...

일을 하면서 몸이 힘들고 괴로운 걸 넘어서,

가진 자들의 부에 일조하고 결탁한다는데서 오는 자괴감으로 마음마저 괴로워져 어쩌지 못하지만,

나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속물이어서 그런 부가 가져다 주는 편리함을 거부하지도 못하는 것이지.

 

그러니, 이 일이 나의 천직인지를 놓고 수천번, 수만번 고민하고 힘들어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들이...

매사에 결단성있으며 분명하고 똑부러지는 자기가 보기에는 속이 상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겠지.

그런데 자기야, 나 자신조차 구체화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자기가 무엇인가 해줄 수 없는 무력감을 절감할 필요는 없어.

가끔 모른척하고 거리를 둔다거나,

나도 모르는 내 "내면아이"를 대신해서 팍팍 화를 낸다거나 하는 건 한번씩 눈감아 줄게.

 

이쯤이면, 눈치 빠른 친구야.

내가 처음 저 시를 들먹인 이유를 알겠지.

요즘은 '세살이면 에고(ego)가 생긴다'잖아.

어떤 환자의 경우에 의사의 처방도 우숩고 먹혀들어가지 않기 일쑤이더라.

자기가 지금 자기의 분야에서 첫발을 내딛어

자기가 아끼는 나에게 어떻게든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의욕에 넘쳐서 라는 걸 알겠지만,

내 개성과 정체성 쯤으로 생각하고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면 안될까?

 

친구야.

그러니 자기가 제시한 그 문제를 자기 방식대로 해결한다면,

자기 입맛에 맞는 순하디 순한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후에도 온전히 내 개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맹숭맹숭한 내가 전처럼 자기와 어울릴 수있고, 얘기가 통할 수 있고, 재미있을까?

 

지금이 최대한 열어보인거야.

그 이상 바란다면, 욕심쟁이라고 불러줄테야.

더 궁금한게 있고, 그래도 꼭 알아야겠고, 그래서 바꿔놔야겠으면...

날 취하게 하여 마개를 열고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수밖에~ㅠ.ㅠ

 

이 물음, 쉬운듯 하면서...답하기 힘들더라.

 

인간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 늘, 누군가를.

인간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 한번 내 안에 들이면 쭈욱~

인간에게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 때론, 냉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인간에 나도 포함됩니까?----> 때때로

 

 

실은, 난  '우울한 편지'의 아래 구절의 마인드를 가장 좋아해.

옛날에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들었지.

 

어리숙하다 해도
나약하다 해도
강인하다 해도
지혜롭다 해도
그대는 아는 가요 아는 가요
내겐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

 

 

                쓸쓸한 날에
                           - 강 윤 후 -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들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 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打電하는 것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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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2-21 18:43   좋아요 0 | URL
서로서로 좋은 마음 오래오래 이어가시리라 믿어요~

달사르 2012-02-21 22:17   좋아요 0 | URL
빨간색 질문에 제 대답도 양철나무꾼님과 같네요. 때때로, 라는 대답도 어쩔 땐 감사하게 느낄 때도 있으니 말이죠.

캬..우울한 편지..끝네주네요. 유재하의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무개 2012-02-22 09:58   좋아요 0 | URL
친구라고 부르고 쓸수 있는 사람의 존재만으로 눈물나게 고마울때도 있더라구요. 무엇을 해주거나 해주지 않거나..그냥 친구 고마워..라고 할수 있는것 만으로도 말입니다. 친구가 그런거라 잖아요.. 내 등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자!

2012-02-22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2-22 12:16   좋아요 0 | URL
시가 참 좋고 님의 글도 좋습니다.

친구란 ? - (루이스는 이어서 이런 말도 했다. "친구 사이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정해 놓은 의무에서 자유롭고, 질투하는 일이 없고, 필요한 자격 조건도 없으며, 매우 정신적인 차원에 속한다. 천사들 사이에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다.")<소셜 애니멀> 316쪽.

요즘 읽고 있는 책이라서 옮겨 봤어요. 친구란 멋지잖아요. ㅋ
 

새벽에 메일 한통을 열어보고 심기일전(心機一轉)의 마음을 먹고 앉아 있다.

다른 곳은 벌써 태양의 기운 가득한 봄인가 본데, 나만 아직 한겨울이었나 보다.

그러고보니 입춘도 지났고, 아들은 봄방학이라는 걸 했고, 백화점 봄맞이 세일에 들어갔고...

그래도 봄인가 보다...고 하기엔 아직 "난" 너무 춥다.(서울 아침 기온 영하8도)

 

그동안 우리 부부는 손발이, 또는 쿵짝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각자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달라서, 

상의없이도 그 분야는 그 사람의 몫이 되곤 했었다.

그 분야를 나눌때 구시대적이고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여자 일, 남자 일 따위로 나누거나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근데, 아들 졸업식에서 일을 쳤다.

 

나도 덜렁대지는 않지만, 꼼꼼함으론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남편 덕에...뭘 챙겨본 적이 없다.

취미가 되었든 운동이나 봉사가 되었든,

정기적으로 無價紙를 발행하는 사람의 카메라 가방에 글쎄...카메라는 없고 렌즈만 한가득 들어 있더란 말이다.

남편은 카메라 가방만 들고다니며 잔뜩 폼을 잡고,

정작 사진은 어떤 영화감독이 폼잡고 영화까지 만들었다고 광고하던 그 핸드폰으로 찍었는데...

소위 애들이 말하는 '쪽 팔린다'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더라, ㅋ~.

 

그동안 남편이 잘하는 것, 주특기엔 손을 안대고 살았다.

그래서 청소도 젬병이고(나 앉는 자리만 손으로 쓰윽 문지르고 앉는다.)

남편이 모르는 비밀도 몇가지 갖고 있는데,

내가 납땜기 들고 진공관 앰프 만드는걸 얼마나 좋아하는 줄도,

그 열기에 계란 후라이를 해먹을 정도라는 것도,

대학 방송국 신입생때, 기자재 정리를 하며 얼차려를 제대로 받아 라인 정리의 달인이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시동생들과 컴 용어로 대화를 나누는게 부러워, 컴활 2급 자격증을 땄는데 그것도 아마 모르지 싶다.

청소는 계속 남편이 잘하도록 놔둘 생각이고,

이제 남편이 모르는 비밀 목록에, 사진 한가지를 더 집어넣어야 하는게 아닌가 심사숙고 중이다.

 

아무리 꼼꼼하고 사진이 좋다고 하더라도,

다 큰 어른이 중딩아들 졸업식이라고 멜랑꼬리해져서 카메라도 안챙기는 걸 보면,

고딩 졸업식땐 무슨 일이 생길지 안봐도 비디오, 줄줄이 청사진이지 싶다.

 

이 동네에도 숨은  고수들이 계신데...

된장님은 책에 일가견이 있으실 뿐 아니라 사진도 글도 이미 프로이시고...

중전, oren, 차좋아 , 마녀고양이의 어머니 등등...은 그냥 내 맘대로 이분들의 사진이 좋다.

 

그렇다면 당장 사진을 배워서 무엇을 찍고 싶은데...?

하고 묻는다면 말이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식으로 멋지게,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없고, 원하는 곳에 갈 수 없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ㆍㆍㆍㆍㆍㆍ

학교와 교사 화가들로부터 배운 것은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결국 나는 타인은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나의 그림을 그렸다."

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실은 내게 메일을 보내준 누군가에게...

흰눈을 한가득 선물하고, 대신 밝은 태양 봄 기운을 넉넉히 얻어오고 싶어서이다.

 

흠~

밝은 태양, 봄기운이라고 하면...

사진처럼 고차원적이고 시간 오래걸리는 거 말고, 단방으로 해결되는 비법이 있긴 한데...

 

아기의 웃음소리.

-->내가 이 나이에? 이건 좀 무리수.

대리만족 시킬 조카가 있긴 한데, 웃음소리를 듣기 위하여 울음소리를 견뎌야 하니 패쓰하고~

 

이게 가장 쉽고 적절할 것 같은데...(난 이걸로 택해야 겠음)

봄 햇살 넉넉히 받고 자란 상추와 각종 쌈에 흰 쌀밥을 얹고, 쌈장 조금, 두툼한 삼겹살 노릇하게 구워 입 크기 만하게 싸서...

입을 한껏 벌리고 소주를 곁들여  '크~'하는 추임새는 필수.

봄동 겉절이가 있으면 쌀밥에 그냥 올려먹어도 그만인데...(추릅~군침 돈다.)

 

무슨 얘길 하다가 여기까지 왔더라~

사진!

그래서 구한 책이 박태희 님의 '사진과 책'이다.

 

 

 

 

 

 

 

 

  사진과 책
  박태희 지음 / 안목 /

  2011년 12월

 

사진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진가 14명의 사진집을 소개하고 사진집에 실린 사진 작품들의  해설과 더불어 삶과 연관된 사진의 본질에 대한 한 사진가의 개인적 사유를 담은 책으로,

2011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1인출판사지원사업' 당선작으로 좀 의미있는 책이기도 하다.

 

박태희님은 들어가는 말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내게 사진공부란 사진책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사진책을 펼치면 꿈속을 걷듯이 현재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난 완전히 다른 세계가 전개되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진책을 만나는 경우는 살면서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는 딱 고만큼의 확률로 찾아들었다. 담벼락 뒤에 숨어 남몰래 흠모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것처럼 나는 이런 사진책을 곁에 두고 밀애의 감정에 젖어들곤 했다.ㆍㆍㆍㆍㆍㆍ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서로의 인간성을 공유하려 했고, 도처에서 펼쳐진 켜켜한 삶의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묵상했다. 창조적인 독자는 사진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며 볼 때마다 새로워지는 감정의 변화들 속에서 고민하고 성장한다.ㆍㆍㆍㆍㆍㆍ진정한 사진은 우리의 시선을 넓고 깊게 만들어 지난한 삶의 과정을 통과하는데 등불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암튼, 사진 책 한권 얼렁뚱땅 봤다고 하여 사진을 잘 찍게 될 것 같지는 않고...

내 시선을 넓고 깊게 만드는데 일조하여,

담벼락 뒤에 숨어 남몰래 흠모는 아니더라도,

태양빛을 넉넉히 나눠 오고 흰눈을 한가득 선물하고픈 마음이 들게는 했다.

 

실은, 요즘 난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을 궁리 중이다.

구차하고 궁색하게 지지부지 설명하느라 애쓰지 않고, 어떻게 내 마음을 전할 수는 없을까?

그걸 또 다른 사진작가 '김아타'는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설명을 한다는 것은 대화에서 실패한 경우다.

 

설명을 한다는 것은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이유를 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다. 대화는 자신을 이해시키거나 타인의 이해를 돕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화의 사전적인 의미일 뿐이다. 대화는 타인으로 인하여 나를 비워내는 행위이며 타他로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행위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행위다. 끝없이 나를 비워내는 과정을 거치면 어느 순간, 환하고 밝은 세계가 빈 공간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대화의 본질인 새로움이다. 이 주석도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공감과 소통이긴 하지만,

더듬이를 그쪽을 향하여 열어두고,

같은 음역대로 얘기하기 위하여 주파수를 맞추느라 애쓰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어놓았는데 그쪽에서도 똑같은 소통법을 구사하여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 

다시 말해,

'무얼하든 그와 함께라면 소통이고 즐거움이고'에서 '그'를 제외하고,

나 혼자 해서도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을 찾아 반짝거리면서 하다가,

또 자기가 해서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을 반짝거리면서 하는,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태희님의 <사진과 책>중,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조지아 오키프'편을 보고 오래오래 황홀해 하였다.

'조지아 오키프'가 직접 고른 51장의 사진과 직접 쓴 서문으로 구성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아흔이었다. 스티글리츠가 세상을 떠난지 30여년이 지난 후였다. 이 책은 사진 책이 만들어진 이래 가장 아름다운 사진집으로 꼽힐 정도로 인쇄와 내용면에서 기념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97년 재발간된 사진집에는 멭,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소장하고 있던 30장의 사진이 부록에 추가되었고 비로소 조지아 오키프 컬렉션의 전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사진은 나의 정열이며 진실에 대한 탐구는 나의 강박관념이다."  -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

 

조지아 오키프 뮤지엄 바로가기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야 이미 사진계의 거장이었고,

조지아 오키프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만나서 그를 발판으로 거듭났다고 회자되기도 한다.

 

언젠가 카쉬전에서 '조지아 오키프'를 봤을때도 여운이 오래 남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조지아 오키프'를 모델로 찍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카쉬전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사진을 통해서도 충분히 공감이나 소통 같은 것을 전할 수 있구나, 교감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

말하지 않고도 마음을 충분히 전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아직 사진을 시작조차 않고,

고작 사진 책 한권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지만,

말로는 오해나 곡해가 빈번한 세상이지만,

잘만 하면 이런 소박한 페이퍼 하나로도...

'흰눈을 한가득 선물하고, 대신 밝은 태양 봄 기운을 넉넉히 얻어올 수 있겠다' 야무진 꿈을 꾸어 본다.

 

난 개인적으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보다는 그의 사진 속의 조지아 오키프가 더,

조지아 오키프의 사진보다는 그녀의 실물과 그녀의 작품세계가 더, 좋지만...그 얘긴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해야 할 것 같다.

 

여지껏 어렵게 한 얘기를 김아타의 그것으로 옮겨 보면 이렇다.

정체성正體性이란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외항선이나 군함 같은 큰 배와 항공기에는 자이로gyro라는 것이 있다.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키고 자이로는 수평과 평형성을 유지하게 한다. 선박이나 항공기의 기울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하는 장치가 자이로인데, 특히 야간 운항하는 군용 제트기에 자이로가 없으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자이로는 언제나 자신의 중심을 먼저 잡아야 배나 항공기의 중심을 확인할 수 있다. 약 20년 전 일본 도예의 전설로 불리는 14대 심수관이 서울에서 세미나를 할 때이다. 물론 그의 조상이 조선 사람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가 세미나에서 정체성에 대하여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 그가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 심수관이 어린 그에게 바늘을 가져오게 하여 물레 위에 있는 흙 한가운데에다 꽂고 물레를 돌렸다. "바늘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느냐?" 흙 한가운데에서 돌고 있는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어린 그가 대답했다. "움직이지 않는데요."

아들의 답에 아버지 심수관이 말했다.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찾아 가거라." 그말을 들은 어린 그는 나이 마흔이 가까울 무렵에 가서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아버지로 이어져오던 도공 심수관의 반열에 오른다.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의 물리적인 현상이 자이로이며, 정신적인 현상이 아이덴티티다. 정체성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성숙해 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떤 경우에도 환경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의 나이 마흔이면 정체성을 찾을 연륜이며, 역설적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는 데 4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체성과 나이가 비례하지는 않는다. 나이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된다고 해서 누구나 정체성이 확고해지는 것은 아니다.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동중정動中靜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인다'는 정중동靜中動과 같은 말이다. 동중정이 아이덴티티의 물리적인 현상이라면, 정중동은 아이덴티티의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루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다.

아니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이제 일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 순간 순간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함을 찾기로 하였다.

이 일이 나의 평생 천직이라는 생각 대신,

일을 하면서 하늘이 주신 소임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에 감사하기로 한다.

 

그러고 나니, 창밖은 아직 추운 겨울이어도...

봄 햇살 넉넉히 받고 자란 상추와 각종 쌈에 흰 쌀밥을 얹고, 쌈장 조금, 두툼한 삼겹살 노릇하게 구워 입 크기 만하게 싸서 먹는 동안만큼은...태양의 기운 가득한 봄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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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2-16 18:24   좋아요 0 | URL
사진은 작가들이 찍지 않아요.
사진을 좋아하며 찍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붙이는 이름이 작가예요.

졸업사진은 즐거이 찍으셨겠지요~

알케 2012-02-16 19:34   좋아요 0 | URL
이젠 사진까지 가시는군요. 전직 주말 사진가로서 저의 사진 잠언서는 존 버거 할배의 책들이죠. 테크닉은 김주원의 책들 좋아요. 저도 나름 오디오필인데 진공관 납땜은 ㄷ ㄷ재즈도 많으셔요

cyrus 2012-02-16 21:59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 카메라에 푹 빠지셨네요.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언젠가 따뜻한 봄 기운이 가득찬 시기가 찾아오면 멋진 봄 풍경 사진 부탁 드려도 될까요? ^^;;

순오기 2012-02-17 06:11   좋아요 0 | URL
이젠 배추와 봄동을 확실히 구별하시나요?^^
배추가 겨울 난다고 봄동이 된다는 분도 있어서...ㅋㅋ
사진까지 넘보는 양철나무꾼님의 영역은 대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요.

2012-02-17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2-02-17 10:47   좋아요 0 | URL
순간 박희태로 읽은 1인입니다. ㅎㅎ. 저도 애들이 태어난 다음에 찍기 시작했는데 친구가 말리더군요. 그냥 똑딱이 써라. DSLR 카메라 살거면 사람만 찍어라. 절대 풍경 찍지 마라. 풍경을 찍더라도 새는 찍지 마라. 패가 망신의 지름길이다....그 친구도 풍경까지만 찍고 있습니다. ㅎㅎ

2012-02-17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보 2012-02-17 16:50   좋아요 0 | URL
저도 사진 참 좋아하는데, 요즘은 아이가 자라고 엄마가 우울모드라 사진찍는일이 줄어들었지만 날이 풀리면 아이 손잡고 어디라도 다니려고요,,,,우리 옆지기가 가지고 싶어하는 진공관 앰프 친구네 집에 갔더니 있더라구요 이사 가면서 아저씨가 구입한거라는데 옆지기가 얼마나 부러워하던지,,

하늘바람 2012-02-17 18:20   좋아요 0 | URL
뜨게질도 고수신데 사진까지 재주가 넘 많으시면 샘이 많아져요.
아드님 졸업이었네요 축하드려요 맨입 멘트만 날려서 넘 죄송한 마음뿐~
ㅠㅠ

프레이야 2012-02-18 18:36   좋아요 0 | URL
하나뿐인 귀한 아들 졸업 축하해요^^
님도 고생하셨어요. 어려운 시간을 함께 건너가는 것이죠, 특히 사춘기 아이 키우는 일은.

달사르 2012-02-21 22:22   좋아요 0 | URL
ㅎㅎ 이 포스팅은 진작에 읽고 박태희 님 책 주문 들어갔습니다요. 박태희 님 이전 책 <사막의 꽃>을 무척 감동깊게 읽었거든요. 그래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ㅎ

양철나무꾼님의 비밀목록이 추가되는 걸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는 포스팅입니닷! >.<

2012-02-24 22:30   좋아요 0 | URL
우와 왠지 양철님과 봄기운 느껴지는 삼겹살 쌈과 소주 1잔, 하고 싶어지는 글인데요!
저도 천직! 하지 말고, 이 순간의 소임! 하고,,
또 봄! 하지 말고, 이 먹을 것 속의 봄볕! 하면서 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