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不惑 ), 혹은 부록 ( 附錄 )'
                          - 강 윤 후 -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이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전에 '닮은 듯 다른, 다른듯 닮은' 페이퍼 때도 슬쩍 얘기한 거지만...

친구야, 자기랑 나랑은 많이 닮은 듯 하지만 달라.

그걸 개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고, 다른 이름으로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 거지만...

나이 마흔을 넘긴 아줌들의 그것은, 좀 거칠게 얘기하면 '고집'쯤 되지 않을까?

 

그렇게 놓고 본다면, 자기랑 나랑은 물과 오일쯤이 아닐까 싶어.

그냥 놓고봤을때는 별반 달라보이지 않지만,

기전이나 성질로 들어가면 하나는 불을 끄고, 다른 하나는 돋우어 아주 큰 차이가 나버리지.

 

물이 오일을 알기 위해서는 오일 가까이 가보아야 하고,

오일 역시 물을 알기 위해서는 물 가까이 가보아야 하겠지만...

이 둘은 기전이나 성질이 완전히 틀린 고로, 번지고 스며 물드는 따윈 꿈도 꿀 수 없겠지.

물과 오일이 서로에게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거울 삼아 자신이 물임을, 또는 오일임을 자각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자기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 준 적이 별로 없어.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의 그 많은 친구들 중 내 곁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다섯 손가락이 남는다는 말도 했던 것 같아.

난 유리로 만든 병 안에 나를 담아놓고 그걸로 모자라서 마개로 꼭꼭 막아두기도 하고 말야.

근데, 한번씩 술을 먹고 코가 삐뚤어지면 마개 간수를 제대로 못하게 되고...

그럴때마다 한 번씩 나의 내적 자아가 됐든지, 아직 내가 화해를 못했을지도 모르는 '내면아이'가 됐든지,

한번씩 튀어나오게 되고,

그런 걸 자기답게 놓치지 않고 있다가...

내가 힘들어 할때 같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해결책을 고심하고 하는걸 보면...정말 미안하고 고맙다.

 

그걸 자긴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더구나.

 

같은 원을 뱅뱅 도는 지인들의 흔적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점점 더 깊은 진흙 패임을 남기면서 걸어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계속 반복되는 흔적은 점점 밑으로 깊어져, 자연적으로 진흙 담장이 생성되고, 그럼으로써 길에서 벗어나 샛길이나 다른 길, 또는 드넓은 초원으로 들어서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또한 흔적 곁의 진흙 담장으로 인해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기 어려워지고, 내 세상은 오직 좁은 길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길은 날이 갈수록 질척해지고, 그만큼 걷기도 힘들다.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만, 결국 같은 자리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 됐든...숱하게 많은 고민 중 내가 자기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그건 자기가 내 고민을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친하거나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조차 구체화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말고 할게 없기 때문이야.

 

일례로 (나의 불면증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동네에 나타나진 않지만) 아직도 새벽에 깨어 있을 때가 많아.

몸이 힘들면 잠을 좀 잘 수 있겠지 싶어,

일을 더 열심히 하게되고, 몸을 더 혹사시키게 되고 했었는데...

일을 하면서 몸이 힘들고 괴로운 걸 넘어서,

가진 자들의 부에 일조하고 결탁한다는데서 오는 자괴감으로 마음마저 괴로워져 어쩌지 못하지만,

나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속물이어서 그런 부가 가져다 주는 편리함을 거부하지도 못하는 것이지.

 

그러니, 이 일이 나의 천직인지를 놓고 수천번, 수만번 고민하고 힘들어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들이...

매사에 결단성있으며 분명하고 똑부러지는 자기가 보기에는 속이 상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겠지.

그런데 자기야, 나 자신조차 구체화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자기가 무엇인가 해줄 수 없는 무력감을 절감할 필요는 없어.

가끔 모른척하고 거리를 둔다거나,

나도 모르는 내 "내면아이"를 대신해서 팍팍 화를 낸다거나 하는 건 한번씩 눈감아 줄게.

 

이쯤이면, 눈치 빠른 친구야.

내가 처음 저 시를 들먹인 이유를 알겠지.

요즘은 '세살이면 에고(ego)가 생긴다'잖아.

어떤 환자의 경우에 의사의 처방도 우숩고 먹혀들어가지 않기 일쑤이더라.

자기가 지금 자기의 분야에서 첫발을 내딛어

자기가 아끼는 나에게 어떻게든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의욕에 넘쳐서 라는 걸 알겠지만,

내 개성과 정체성 쯤으로 생각하고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면 안될까?

 

친구야.

그러니 자기가 제시한 그 문제를 자기 방식대로 해결한다면,

자기 입맛에 맞는 순하디 순한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후에도 온전히 내 개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맹숭맹숭한 내가 전처럼 자기와 어울릴 수있고, 얘기가 통할 수 있고, 재미있을까?

 

지금이 최대한 열어보인거야.

그 이상 바란다면, 욕심쟁이라고 불러줄테야.

더 궁금한게 있고, 그래도 꼭 알아야겠고, 그래서 바꿔놔야겠으면...

날 취하게 하여 마개를 열고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수밖에~ㅠ.ㅠ

 

이 물음, 쉬운듯 하면서...답하기 힘들더라.

 

인간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 늘, 누군가를.

인간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 한번 내 안에 들이면 쭈욱~

인간에게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 때론, 냉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인간에 나도 포함됩니까?----> 때때로

 

 

실은, 난  '우울한 편지'의 아래 구절의 마인드를 가장 좋아해.

옛날에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들었지.

 

어리숙하다 해도
나약하다 해도
강인하다 해도
지혜롭다 해도
그대는 아는 가요 아는 가요
내겐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

 

 

                쓸쓸한 날에
                           - 강 윤 후 -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들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 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打電하는 것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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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2-21 18:43   좋아요 0 | URL
서로서로 좋은 마음 오래오래 이어가시리라 믿어요~

달사르 2012-02-21 22:17   좋아요 0 | URL
빨간색 질문에 제 대답도 양철나무꾼님과 같네요. 때때로, 라는 대답도 어쩔 땐 감사하게 느낄 때도 있으니 말이죠.

캬..우울한 편지..끝네주네요. 유재하의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무개 2012-02-22 09:58   좋아요 0 | URL
친구라고 부르고 쓸수 있는 사람의 존재만으로 눈물나게 고마울때도 있더라구요. 무엇을 해주거나 해주지 않거나..그냥 친구 고마워..라고 할수 있는것 만으로도 말입니다. 친구가 그런거라 잖아요.. 내 등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자!

2012-02-22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2-22 12:16   좋아요 0 | URL
시가 참 좋고 님의 글도 좋습니다.

친구란 ? - (루이스는 이어서 이런 말도 했다. "친구 사이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정해 놓은 의무에서 자유롭고, 질투하는 일이 없고, 필요한 자격 조건도 없으며, 매우 정신적인 차원에 속한다. 천사들 사이에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다.")<소셜 애니멀> 316쪽.

요즘 읽고 있는 책이라서 옮겨 봤어요. 친구란 멋지잖아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