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작가를 인식하게 된 건 재작년인가 노벨 문학상 때문이었겠고,
나와 독서 취향이 비슷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했었고,
책을 추천해주는 여러 사이트와 이동진의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에서도 소개되어 집어 들었지만,
책을 펼치고 몇 쪽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내 귀가 팔랑귀인건 아닌가, 또는 나의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들로 혼란스러웠었다.
사람들은 김화영의 번역이라고 하면 찬사를 아끼지 않던데, 나는 어쩐 일에선지 자꾸 삐그덕거리고 엇나가기만 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반양장)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마저 읽을 것인가 집어던질것인가 고민하며 책을 팔랑팔랑 뒤로 넘기던 중,
끝부분 김화영의 '해설'과 맨 뒤 도서 정보를 살펴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내가 가진 것은 개정판 5쇄(2013년 8월 21일)였는데,
2010년 4월에 김화영이 쓴 해설을 보면 그가 파트릭 모디아노를 처음 번역 소개한 것은 1978년이었단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고, 그사이 널리 알려졌고, ㆍㆍㆍㆍㆍㆍ이제 수십년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운 번역으로 새로운 독자들에게 이 매혹적인 소설을 다시 내보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271쪽)'고 소회를 밝히고 있는데~--;
책을 읽으며 1978년에 처음 번역이 된 후로 한번도 손 본 일이 없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었다.
백번 양보하여, 2010년 해설을 쓸 당시에 먼지만 떼어내고 새로 번역을 하지 않았던건 아닌가?
그런데 관점을 조금 바꾸니,
번역을 새로 하려고 시도는 하였으나 시늉에 그친 것이어도 그렇지만,
제대로 번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어도, 우울하긴 매한가지다.
불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내가, 번역을 가지고 툴툴거리니 의아해 하겠지만,
사실 내가 딴지를 거는 것들은 번역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것들이다.
가장 흔한 것이, 용어 사용 방식이 일관되지 않은 것이다.
제목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도 책을 다 읽고난 후라면 '어두운'보다는 '희미한'이나 '아련한' 따위가 적절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미묘한 어감은 차치하기로 하자.
폴 두메르 가(街)(10쪽)
아나톨 드 라 포르주 가(16쪽)
부티크 옵스퀴르 가(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88쪽)
를 보면 알겠지만,
어디에는 원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적었고, 어디에는 억지로 우리말로 번역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 둘 사이엔 아무런 일관성도 없어 보인다. 즉, 마음대로다.
처음 9쪽의 '우유빛의 전등 불빛'이, 77쪽에서 젖빛 램프로 번역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놀라웠던 건, 이 책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장치일수도 있는 '전화번호부와 연감'을 나중에는 '사교계신사록' 또는 '신사록'이란 용어로 번역해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지난 오십년 동안의 각종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것들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작업도구라고 위트는 몇 번이나 내게 말하곤 했었다. 그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감동적인 도서관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페이지마다에는 오직 그것들만이 증언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들과 세계들이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10쪽)
나는 옛날 전화번호부들, 그리고 그보다 좀더 근래의 것들을 열람하면서 발견되는 것이 있을때마다 노트를 한다.ㆍㆍㆍㆍㆍㆍ이런 것이 기록된 사교계 신사록은 삼십여 년 전 것이다.(77쪽)
내 앞에는 신사록들과 전화번호부들이 가지런히 꽂힌 선반이 있다.(106쪽)
그애를 안 적이 있으세요?(136쪽)
같은 경우는 번역할때 흔히 보게 되는 오류이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불어번역자라고 일컬어지는 그에게선 보고 싶지 않은 문장이었다.
나는 건물의 문을 지나서 시간제한등을 켰다. 낡은 바닥돌이 검은 색과 회색의 장미 무늬였던 복도, 쇠로 된 그물, 받침벽, 노란 벽의 우편함들, 그리고 여전히 풍기는 저 돼지기름 냄새.(141쪽)
위 문장에서 '시간제한등'이란 단어도 생소했지만, 앞뒤에서 수식해주는 말들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서 더 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120쪽)
심근은 불수의근인데 내가 마음대로 두근거리게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쯤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소소한것까지 따지다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용어 사용 방식을 통일시키지 않은 것과 어법과 관련된 기본적인 것 몇 가지만 언급하였다.
이런 것들부터 어긋나 버리니, 아무리 좋은 소설이라고 할 지라도 내용을 알아먹을 수가 없고 감정이입 될 턱이 없다.
한국 문학의 국제화나, 외국 문학의 한국화가 갈 길은 멀고도 요원하기만 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의 '맨부커 인터네셔널 상'수상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분위기를 바꾸어,
종편의 텔레비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인기였던 건 잃어버린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미로처럼 좁은 비탈길이나 골목길을 이리저리 걷다보면 막다른 골목이 나오고,
그 좁은 골목에 담장과 대문을 나란히 하고 고만고만 집들이 있고, 고만고만한 동네 꼬마 녀석들이 있었다.
누구네 집 쌀독이 비었는지, 누구네 집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 동네 통장이나 반장이 아니어도 훤히 알았고,
동네 어귀의 평상은 온갖 '~카더라'하는 소문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지만,
혼자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거나 먹을게 없어 배곯아죽는 야박한 인심은 피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언제부턴가 1인 가족이 특별할게 없는 삶의 형태가 되었으며,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의 형태라고 하더라도 하루에 1,2끼 정도 혼자 밥먹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주거형태도 변하여 아파트, 빌라, 다세대 다가구 주택, 원룸 뿐만 아니라,
고시원이나 쪽방촌 등 특수한 주거형태에 사는 사람도 많아졌고,
그 사람들 모두를 이웃으로 일일이 기억하기엔 역부족이다.
때로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거나,
마무것도 기억 못하는 치매어르신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
오히려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억해야만 하는 정보들이 넘쳐난다.
이 책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중 화자인 '기 볼랑'과 탐정 '콘스탄틴 폰 위트'는 생애 한부분의 기억을 잃어버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간판은 흥신소라고 되어 있고, 호칭은 탐정이라고 되어 있는 묘한 번역이다.홍신소는 소장이고, 탐정사무소는 탐정일것 같은데, 끙~(,.))
난 1987년에 고딩이었던 고로, 6월 10일 무렵의 우리나라 상황을 최근에야 비교적 자세히 들었는데,
이 책의 그것들과 닮은 듯도 하고,
어찌보면 요즘 우리나라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는 듯한 착각에도 빠져드는 것이,
두번의 큰 전쟁의 정점에 있었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전쟁과 망명자, 국경, 위조된 여권 따위는 자유, 민주주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고,
1987년 6월의 우리나라는 독재와 외력에 항거하는 그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그 전쟁으로 인한 폐해의 한가지를 쟁점으로 하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쟁이 진행중인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이 책에 나오는 '기 롤랑'이라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오히려 '콘스탄틴 폰 위트'처럼 어디 휴양 도시에서 말년을 조용히 늙어가는 쪽을 택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기 롤랑이 어떤 이유에서 기억을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것과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이전의 기억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쩜 살아가는데 더 편리하거나 유리하기 때문에,
그의 무의식이 그로 하여금 기억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사주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트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안개 속을 더듬거리는 그에게 기 롤랑이라는 신분을 만들어 주고,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라'고 했지만,
은퇴 후 니스로 가서 어린 시절을 하나하나 되살리게 되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
기 롤랑의 지난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맞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모두 틀리기도 하는데,
삶에 있어서 '기준과 방향성'이 같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청춘들에게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건 잠시 미뤄 두어도 좋겠다.
지금 현재, 여기에서, 이 순간을 살면 되는 것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도, 언제일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도, 연연해 하는 순간 집착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은퇴 후,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에서라도, 하루하루가 똑같은 모습으로만 흘러간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겠다.
거리를 가다가 우연히 삼십 년이나 못 보았던 사람이라든가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안개속을 더듬는 듯한 흐릿한 기억도 쓸모가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가지, 인간이란 제 멋대로인 존재들이어서,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들은 진정한 나이며,
타인이 보는 나는, 과연 나의 본 모습일까?
우리는 엄청나게 큰 코끼리를 눈 감고 만지면서,
누군가는 코끼리의 다리를, 누군가는 코끼리의 코를, 누군가는 몸통을 만지면서, 코끼리 전체라고 우기는 눈뜬 장님들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타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지랖 넓게 너무 깊숙히 관여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들이 보는 사람이 기 볼랑이 찾는 그 사람이라는 정확한 근거가 없으면서도 섣부르게 판단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상처를 꽁꽁 사매서 곪아터지게 할 것이 아니라,
잘 소독해주고 바람도 통하고 세월의 더께도 앉게 해주고,
딱지도 앉았다 떨어지고,
그리하여 나무에 단단히 박힌 옹이처럼 고통을 이겨낸 자리마다 굳은 살로 자라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