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김밥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 근사록을 논하지 말라.
하늘에는 태양이나 별처럼 자체 발광하는 것들도 있지만, 달처럼 태양빛을 받아 반사하여 빛을 내는 경우도 있다.
언제부턴가 맨 앞에서, 스스로 빛을 낸다는 따위의 말들이 부담스러워졌다.
자체발광이나 주인공, 주체가 되는 삶도 멋지지만,
그것들이 빛나고 멋지기 위해서는,
어두운 부분은 물론이고 어둠과 빛의 경계가 되는 두리뭉실하고 모호한 배경들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달처럼 태양빛을 반사하여 빛을 내는 태양보다 어두운 달같은 것들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게 되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밝음이 환하고,
달은 태양빛을 반사해 내는 면적에 따라 밝기가 다르다.
내가 '제대로' 된 어둠이거나 들어온 빛을 '고스란히' 반사해 내는 반사경이었을때,
내 남편과 아이라는 밝음이 한층 빛날 수 있다.
어제 새벽에 일어나서 수련회 가는 아들을 위하여 김밥을 쌌다.
김에 밥을 얇게 펴고 여러가지 재료를 차곡차곡 얹어 돌돌 만 문장은 '하이데거'와 '기획 투사'였다.
나도 참 웃긴 것이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위해서 관련자료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않고,
중이 염불 외듯 김을 한장 깔고 '하이데거', 밥을 얇게 펴고 '기획투사',
여러가지 재료를 나란히 쪼로록 놓고 '하이데거', 김발로 돌돌 말아 꼭꼭 눌러 '기획 투사'
...이렇게 읊조리고 앉았었다.
기껏 정성 들여 김밥을 싸 3단 도시락에 넣었더니,
"엄마아~~~~~! 내가 어제 한 얘기 뭘로 들었어?
제발 튀지않고 싶으니까...다른 애들처럼 호일에다가 김밥 한 줄 둘둘 말아달라고 그랬지~"
그러고보니, '둘둘~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요즘 아들과의 사이가 심하게 삐그덕거리다 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나 보다.
'정말 호일에다가 김밥 한 줄을 둘둘 말아가지고 가는 애들이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내 딴에는 새로운 시작이고 출발이라지만, 남들이 볼때는 눈 감고 귀 막고 소통을 거부하고 정 떼려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한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한 내가 참자',
또 다른 한손으로 가슴을 다독이며,
'참을 인'忍'자 세번만 쓰자'
하고 자위하였다.
암튼 중간에 타협점이라고 찾은 것이 쓰고 버려도 아깝지 않은 재활용 용기였다.

그렇게 꿀꿀한 마음을 어떻게 갈고 닦아 보려고 집어든 책이 '근사록'이었다.
근사록
한형조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2년 1월
난 한 작가에게 필이 꽂히면 그 사람의 전작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한형조 님은 '허접한 꽃들의 축제'와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통하여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과거와 현대, 동ㆍ서양 할 것 없이 시대와 공간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하며 넘나드는 사상적 깊이에 매료되었었다.
게다가 수선 부리지 않는 글의 품새 또한 고고하기 이를때 없었다.
얼마전 웹서핑을 하다가 '근사록'의 저자 란에 그의 이름이 박혀있는 것을 보고 설레여 주문했었다.
근사록은 판본이나 해제를 달리해 가며 여러번 읽은 기억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읽은 기억만 있는지라, 체화하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에,
이 분의 것으로 보면 혹 문리가 트이듯이 어느 순간 훤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근데, 책을 받아보고 좀 실망을 했는데...여러명의 필진 중 대표 저자일 뿐이다.
한형조님은 서문에서부터 반짝거렸다.
' 다섯꼭지의 글은 그런 점에서 '해설'이라기보다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학이나 주자학은 역시나 '낯설다.' 이 기획은 그 낯설음을 덮지 않고, 생살로 확인해보고자 했다. 손쉬운 동조는 위험하고 쉬운 설득은 무력하다.
혹, 그동안 유학을, 너무 이너 서클에서 '당연하게' 설교하지 않았을까. "한국의 전통이고, 거기 좋은 말씀만 가득하구나"의 안의함 같은 것. 무릇 이방의 사유는 이방의 것으로, '불가해하다'고 적어주는 곳, 거기가 소통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반대편의 경계도 잊지 않아야겠다. '낯설다'는 것이 혹 진리의 징후일 수도 있다.(7쪽)
이 책이 낯설다는 사람들을 위해 살짝만 얘기해보자면, 주자학의 입문서이자 교과서이다.
사서삼경 외에, '심경'과 이 '근사록'을 보탤 수 있겠다. 그런데도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책의 이름조차 생소할 터이니 주자학은 근 백년 사이에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제목의 '근사'는 논어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切問而近思]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근사록, 덕성에 기반한 공동체, 그 유교적 구상'
자세히 보니 이 책의 제목은 그냥 '근사록'이 아니다.
그동안의 책들이 교과서적 진술의 화석으로만 남아있던 것을 우려하여, 그걸 넘어서고자 노력했단다.
무엇보다 지식이 삶에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주자가 '근사近思란 이름을 붙인 이유라고 못 받는다.
경험을 통해, 지식은 생명을 얻으므로 그 정신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단다.
다시말해, 교과서(근사록이겠지?)가 알려주지 않는 맥락과 지층을 엿보여주고,
시대가 정위해놓은 판단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며,
미래를 위해서 주자학적 사유가 던지는 교훈과 충격의 지점을 확인하고자 했단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주제 다섯가지를 설정했단다.
도, 공부, 가족, 사회, 국가가 그것인데....
그것은 각장마다
1장, 도와 형이상학,
2장, 공부와 마음통제, 심경과 상호보완
3장, 가정의 경영, 남녀의 역할 차이에 대한 음미
4장, 유교의 공동체적 세계관 - 주자학적 구상의 전체적 얼게, 혹은 조감도
5장, 국가와 통치에 관한 장, '자연'과 '무위' 위에 설정한 '이상주의'국가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그 태극이다. 그 태극이 움직여 최초의 움직임을 낳았다. (無極而太極 太極 動而生陽)
(31쪽)
퇴계 또한 같은 치지에서 자신의 필생의 역저 '성학십도' 맨 첫머리에 이 '태극도설'을 실었고,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이것부터 가르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멈추어서서 묻는다. "대체 자연이, 그 과정이 왜 인간의 길에 그토록 중요한가?" 여기 설명이 필요하다.
주자학은 인간을 독립된 개인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파생으로 본다. 그 자연 안에서 개인들은 타자와, 흑은 가족으로 혹은 공동체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개인은 그런 점에서 사적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의 과정에 협력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장재의 '서명(西銘)'이 그 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길은 우선 '자신의 유주적 의미'(理)를 자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일상 속에서 그것은 두꺼운 먼지를 덮어쓰고 있고, 그 가능성(性) 또한 심각하게 녹슬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존재에 대해서 묻지 않게 되었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가 일상적 인간으로서의 '다스 만'(das man)의 소음과 타율 속에 망각'되었다고 말할 때, 나는 단박에 주자학을 떠올렸다.
소외된 기(氣)는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둔감과 무기력을 노정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쳐가고, 다른 사람의 기쁘고 슬픈 일에도 동참하지 않는다. 표정이 없고, 얼굴이 굳어 있으며, 자신 속에 골몰하고 인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이 오래된 구습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본래의 감응의 자발성과 자연성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주자학은 그 목표를 위해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핵심은 자기 위주의 욕망과 왜곡된 습관 등을 고치고, 아울러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전체적 전망을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쉽지 않다. 또 사람 차이도 있다. 요순처럼 타고난 조건이 좋을 수도 있고, 인간 백정 도적처럼 도무지 대책 없는 유형도 있다. 보통은 자신의 노력만큼 이런저련 장애물이 즐어들고, 가려지고 묻혀 있던 본래의 자연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가령, 어른들이 지나가면 공경하는 마음이 들 것이고,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갈라치면 달려가서 구할 것이다.
ㆍㆍㆍㆍㆍㆍ
'근사록'의 도체편을 펴면, 기이하게도 이 체계가 '자연'에 대한 근본적 신뢰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노장의 믿음이기도 한데, 주자학 또한 동양의 오랜 전통에 맞게 자연을 최종적 원천,판관으로 알고, 그'절대'에 순응하는 것으로 인간의 일을 규정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 점에 고개를 젓는다. 인간의 일이 문제 해결의 연속이고, 사람 손이 가지 않고, '저절로' 잘 되는 일이 없는데, 정말 주자학은 '순진하게도', 물정 모르고 '자연의 자연성'에 최종적 귀의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32~33쪽)
조금 길지만 지문의 일부를 옮긴 이유는, 내가 김밥을 싸면서 읊조리던 '하이데거' '기획투사'와 묘하게 들어맞아서이다.
제2장 공부 '생명의 의미에 대한 자각과 실천' 편까지는 읽었다.
내가 예전에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던 '주역, 인간의 법칙'을 쓰신 이창일 님이 쓰셨다.
'논어'가 '논어'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숙독을 통해 자신의 절실한 체험에서 확인되었을 때이다. '숙독이 완비' 되었다는 말은 성경의 구절들이 잘 익힌 음식처럼 맛이 우러난 것을 먹고, 잘 소화시킨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비록 독서를 위한 문자의 해독과 경전의 해석에서 엄밀한 문자학적 지식이 무시되지 않지만, 그것은 일의 반이지 목표가 될 수 없다. 젊어서 군서(群書)를 독파했던 정이천은, "나는 젊었을 때 책을 많이 읽기를 탐냈는데, 지금 많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름지기 성인의 말을 완미하여 마음 속에 기억한 연후에 힘써 행한다면 자득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완미하지 않으면 성경의 의미, 성인의 뜻, 일리(一理, 만물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치)는 파악되지 않는다.
보통 독서인들의 주지주의를 지적하지만 정이천의 이와 같은 말은 반주지주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의 축적, 정보의 습득은 인식의 수평적 확대를 말하지만, 완미의 독서는 깊이의 수직적 측면 곧 체험의 깊이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지식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거나 양화된 정보의 수준을 평가하는 독서론은 이러한 깊이의 독서론을 측정할 수 없다. 전통의 독서 문화가 암송과 숙독을 위주로 한 이유를 알게 해 준다. (58쪽)
암튼 1장과 2장 까지 읽고 느낀 것은, 근사록은 체험철학이라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지식은 생명을 얻는다.
그냥 책상에 앉아 책을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몸을 놀리는 수고로움과 땀흘리는 신성함이 함께 우러졌을때 힘을 얻는다.
'천석군집 며느리뽑기대회'처럼 밥을 빌어 죽을 쑤어 먹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일부러 과대포장이나 예쁘게 담을려고 공을 들을 필요는 없다는 주의이다.
하지만, 있는 있는 도시락 놔두고 단지 튀는게 싫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장담할 수 없는 호일을 일부러 사다가 둘둘 말아가는 거 그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니다.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하는데, 노력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지...
무성의하고 대충대충 하는데도 노력 따위가 필요한 건 아니지 않겠나?
또 모르겠다, 지나치게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해 그것이 병을 불러 오는 경우라면...무성의하고 대충대충 하라고 하겠다만~
어째 영 꺼림칙하다.
그리고 어쨌든 봄비 내리는 아침이다.
이지형 두번째 소품집 - 봄의 기적
이지형 노래 / 해피로봇레코드 / 2010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