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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밥 됩니까 - 여행작가 노중훈이 사랑한 골목 뒤꼍 할머니 식당 27곳 이야기
노중훈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즐겨듣는 아침 라디오 방송 채널이 TBS로 바뀌고,
토욜 아침마다 듣던 '노중훈의 여행의 맛' 대신 '라디오를 켜라'를 배경처럼 듣게 되었는데,
어느 수요일 '노중훈'이 나와서 방송을 하고 있는 거라,
완전 반가울 수밖에...
그 방송 끄뜨머리에 '노중훈'의 새 책 광고를 듣고 휘리릭 주문했다.
이 책의 '들어가며'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맛집'이란 단어를 좋아하지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 책에 나온 식당들을 찾아가 음식 품평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11쪽)
이 책이 나에게 안성맞춤인 이유이다.
맛이라면 귀신 같은 아들이 있을때는 맛집을 찾아다니는게, 식도락이, 가족의 취미였는데,
지금은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진 않는다.
하지만. 노중훈이나 몇몇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다보면 밥을 안먹어도 이내 가슴이 뜨뜻해지고 배가 불러오는지라,
책은 어떨지 궁금했나 보다.
말은 재밌게 하는데 글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글은 수려한데 수줍어하는 등의 이유로 말은 그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노중훈은 말솜씨 만큼 찬란한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직유를 이렇게 정직하게, 그러면서도 노래하듯 리듬을 실어 적절하게 구사하는 이를 본적이 없다.
ㆍㆍㆍㆍㆍㆍ어머니의 음식은 맑은 샘물 같고, 나긋한 살랑바람 같고, 가붓가붓한 새털구름 같고, 느슨한 면바지 같고, 보송보송한 차렵이불 같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고 먹어도 먹어도 속이 거북하지 않다.(31쪽)
빼어나고 맛깔스럽다.
이런 구절도 좋았다.
나날이 고단했고, 매일매일 매웠으며, 하루하루 고됐다.(100쪽)
주요리로 젓가락을 옮기자, 두툼한 비계를 달고 두툼하게 썰린 돼지고기 수육은 탄탄하기 이를 데 없다. 나태하고 물렁한 부분이 없어 저작의 기쁨이 충만하다. 그 자체로 완결성을 띠지만 어머니의 김치, 어머니의 장, 어머니의 젓갈과 상봉하면 그야말로 천의무봉이다.(104쪽)
"나는 여기서 술을 마시지 않아. 여긴 내 삶의 현장이야."
"싼 걸 먹는다고 저렴한 사람이 아니야. 사람마다 가치가 있어."
나는 성원식품의 단골이 되어 기쁘다.(116쪽)
"국물은 차분하고 단정하고 깔끔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어요. 맑은 계통이지 걸쭉한 국물이 아녜요. 하늘거리는 면발은 기계가 뽑아낸 듯 굵기가 똑같아요.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손 자주 들고 발표 잘 하고 목소리 크고 액션 큰 그런 친구들이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자기 자리를 조용하게 지키고 있는 학생, 그러면서 자기 일 옴팡지게 잘하는 친구, 뭐 그런 느낌이에요.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문양의 옷이 아니라 수수한 리넨셔츠 같은 칼국수죠.(208쪽)
위 대목은 노중훈의 진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라디오로 들으면서 무려 감격을 했었다.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에 게스트와 함께하거나,
누군가의 프로에 게스트로 나가 대담식으로 진행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책을 읽으니 웬걸,
'할매'라고 하는 어르신들에게 어떻게 말을 붙이고 섞여 가는지를 여우(?)처럼 잘 알고 있었다.
'들어줄 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알고,
어느 대목에서 추임새를 넣어야 하는지, 적절한 타이밍을 용하게 알고 있었다.
예전에 언젠가 넷상에서 프로필 사진을 봤을땐,
수더분하고 두루뭉술할 줄만 알았다.
프로필 사진이 모자를 써서 눈이 가려져 알 수 없었는데,
눈을 보게 되니 또 다른 느낌이다.
유튜브를 통해서 말하는 모습을 보니,
라디오를 통해서 듣던 목소리와는 또 다른 울림이 느껴진다.
뱃속 깊숙한 동굴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가슴에서 생각하던 것을 오래 둥글려 입안에 모았다가 비교적 가볍게 툭 내뱉는 느낌이었다.
이 가벼움이란 것이 건들거리는 가벼움이 아니라,
심각해지고 자칫 무거워지는 것을 경계하는 가벼움이었다.
상대의 말을 자르지 않되,
귀를 열고 듣고 있다는 호응의 추임새를 적당히 넣을 줄 아는,
낄.끼.빠.빠.를 정확히 안다.
마침 본 유튜브가 '1박2일 전북여행-금산여관'편이었다.
금산여관을 소개하는 것도 좋았지만 끝부분에 누군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거기 화음을 쌓는 걸 보고 다시 한번 그의 배려를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는데 화음을 쌓아 올리는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아래로 깔리는 화음을 받쳐주는 것은 더 더욱 쉽지않은 일일 것이다.
나서서 스스로 빛나는 별도 좋지만,
판을 깔아주고 빛날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주는 것도 충분히 멋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고,
나도 이쁘고 아름답고 똑 떨어지는 말이나 글을 구사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주고 누군가가 쓰는 글을 찬찬히 읽어주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소박하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은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