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어제 생긴 일이었다.
" 내일 개학하면 바빠져서 엄마랑 놀 시간 없으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엄마랑 놀아줄게."
녀석은 인심 쓴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넘넘 심심하여 방바닥을 뒹굴던 그녀, 속으로 '올레이~'를 외쳤지만...
" 뭐가 필요한 건데...?
너 올해부턴 교복 입어서 패션에 힘 안줘도 되잖아.
글구 엄만 절대 니네 아빠랑 백화점 안 간다~"
하고 한번 그냥 튕겨 보았다.
" 흥, 가지 마라~.
나 별로 필요한 것도 없고, 어제 두시까지 책 봐서 별로 가고 싶은 생각 없어.
필요한 거야 내 용돈으로 사도 되고...
난 그냥 내일부터 3년동안은 아들없는 셈 쳐야 할, 쓸쓸할 엄마를 생각해서...마지막으로 한번 엄마랑 놀아주려고 그랬지."
오히려 녀석이 기세 등등이다.
"암튼, 암만 아빠랑 백화점 안 가."
"엄마, 내가 엄마가 없어, 아님 아빠가 없어 또 시작할까?"
그녀는 엉덩이가 무거웠다.
바꾸어 말하면 움직이는걸 너무 싫어해서, 가족 놀이나 모임, 나들이 같은데 따라다니는걸 엄청 싫어했다.
어느날 녀석이,
"내가 엄마가 없어, 아님 아빠가 없어?
엄마, 아빠 둘 다 안가면 나도 안 가."
하고 그녀의 감성을 자극해서 어쩔 수 없이 끌어냈던 대사를 날렸던게, 녀석의 자발적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얼마전이었다.
자전거에서 넘어서 머리가 깨졌을때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기기는 커녕, 프랑켄슈타인이란 별명을 지어준 녀석이었다.
녀석에게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운동신경 둔하고 굼뜬, 아주 귀찮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만으로도 녀석의 욕구는 충족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놀이나 모임, 나들이 같은데 엄마의 참여를 단서로 내걸었던 사람이, 그 녀석의 아빠였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됐거든~아빠랑 둘이 다녀오시게."
"쇼핑은 안 하고 그냥 밥만 먹고 오자고..."
이 쯤에서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오케이하고 말았다.
일산에 있는 페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정말 밥만 먹었다.
기다리는 동안 녀석은 앞으로 엄마 얼굴을 보기 힘들테니 폰 배경 화면으로 쓰겠다며 얼굴 사진을 한 장 박았고,
밥을 먹으면서 대화는 자연 새학기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는 중에 녀석은 몇가지 얘기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엄마, 나 야.자.하면 안 될까? 우리 반에 나 혼자 안 하는 거 같애~ㅠ.ㅠ"
녀석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마냥, 아빠의 얼굴과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빤, 너 하고 싶은대로 하는 거 찬성이야."
"남들이 다하고 안하고가 뭐 중요해? 니 마음이 중요한거지?
남들 다하니까 안하면 왠지 불안해서 하는거라면 반대고,
니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해 봐."
"학생이 공부하겠다는데, 부모가 반대하는 집은 우리집 밖에 없을거야."
녀석은 그녀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뭔가 할말이 더 있는 눈치이다.
"근데, 학교에서 공부가 제대로 되기는 하던?
그리고 야자하게 되면, 지금 다니는 검도랑 드럼이랑, 기타랑 그딴 건 다 어떻게 할거야?"
"뭘 어떻게 해? 안 다니면 돼지."
"다니고 안 다니고는 니가 결정할 문젠데, 학교생활하면서 선생님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할래? 에네지와 열정 넘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말야."
"암튼, 난 수험생이야. 그딴 거 말고 공부하는 학원을 보내 줘."
"진짜 아빠가 일러준 대로 하니까...된다아~. ㅋ,ㅋ~."
화장실에 다녀오던 그녀는 이 낮고 경박한 웃음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은 요 며칠 그녀의 일탈과 우울을...아들의 고입, 그와 관련 늦은 귀가가 빚어내는 일종의 빈둥지증후군이 원인이라고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이름 붙이자면, 아빠의 코치에 의루어진 '야자를 허락받기 위한 엄마 비위 맞추기 대작전'쯤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폰 배경 화면에 그녀의 얼굴을 찍어 집어넣을 생각을 한 것부터가, 그녀의 취향을 정확히 읽어낸 것이 신통방통하다 했다.
다른건 몰라도 자식농사 하나는 잘 지었다고 우쭐해 하려던 순간이었다.
녀석이 그녀에게 넘버원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는 까닭이기도 했으며,
이는 바꾸어 말하면, 남편은 열길 물 속보다 깊다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말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몇 안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잔
박세연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1월
소통을, 소통이 되길 꿈꾸는 내가 제일의 소울 푸드로 꼽는 것은 커피와 차(tea)이다.
항상 잔이 따라 다니고, 때에 따라서는 받침까지 따라 다니기도 한다.
쓸쓸하거나 외로울 것 같지는 않다.
설사 고독하더라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적어도 손에 들고 있는 동안은 그만큼의 따뜻함을 전할 수 있어서 이기도 하다.
내가 곁에 없어도, 내가 선물한 그 차를 마시는 동안만큼은 커피나 차의 온도 만큼의 따뜻함을 전할 수 있어서 좋다.
커피나 차처럼 곁에 있어서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던 건 아닌지...있을 때 잘 해야겠다.
새벽에 약이 올라 몰래 사진을 지워버리려고, 녀석의 핸드폰을 들여다 보던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누구란 말인가?
사랑하는 마음 한자락 있었다면 지 엄마를 저렇게 애꾸눈으로 찍어놓고 헤헤 거릴 수 있었을까?
암튼 다 잊고 훌훌 떨어버리고, 녀석의 처음을 응원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나는 성시경의 '처음'을 따라 부르며,
녀석 없는 날씨는 좀 꾸물거리지만 마음만은 더 없이 찬란한 '처음'을 시작해 보아야 겠다.
나의 손끝이 당신을 느꼈을 때 나는 당신의 향기에 취하여 오고 가는 세상 속의 모든 일들 사랑 하나로 멈추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