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 신화와 역사 사이에서
김후련 지음 / 책세상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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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하면서, 근대 일본 만들기는 시작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은 사실 근대의 창작물인 경우가 많다.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도 근대의 창작물이었다. 일본 고대와 중세의 작품을 가져다가 근대 민족국가 이데올로기에 알맞도록 다시 창작해낸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했다. 수 많은 일본인들과 동아시아의 수많은 젊은 영혼들이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비극을 겪었다.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라는 책은 일본의 신화가 어떻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새롭게 태어났는가를 깊이 있는 연구로 밝혀냈다. 저자 김후련의 안내를 받아 일본 천황제의 허상을 뜯어보자.

 

1. '무형의 형태', 신도

  일본의 토착 종교는 '신도'이다. 신의 길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신도는 우리 나라의 무속신앙과는 달리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무속신앙은 외부에서 들어온 불교와 크리스트교, 유교에 짖눌려 종교이기 보다는 '미신'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에 반해서 '신도'는 아직까지 살아남아 일본인들의 삶에 깊숙히 뿌리 내리고 있다. 합격을 기원하며 신사로 향하기도 하며, 결혼식을 신사에서 하는 일본인도 많다. '살아서는 신도, 죽어서는 불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사의 생명력은 강하다. 그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신유습합'과 '신불 습합'에 있었다. 불교이든 유교이든 신도는 이들 사상을 흡수하여 새롭게 태어났다. 불교가 탁월한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각지역의 토착신앙을 흡수하면서 발전했다면, 이러한 이론적 체계가 없었던 신도는 불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사'를 만들어냈으며, 외세가 침략할 때는 그들만의 '화이'사상을 만들어냈다. 이것을 '무형의 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형의 형'의 무서운 힘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다시 발휘된다. 조선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1942~1944)는 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신라에 강림했다는 고대 천황신화를 만든다.

 

  "여기 반도 2,500만의 원민족은 틀림없이 스사노오노미코토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다고 하면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후손인 내지(일본) 민족과 바로 뿌리가 같고 하나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알 수 있는 역사상으로나 그 후로나 피의 혼합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명치 43년(1910)의 성대에 아마테르사오미카미의 후손이신 메이지 천황에 의하여 스사노오의 후손인 조선이 병합된 것은 신대 말기의 신사가 더욱 철저히 완성적으로 다시 되풀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42쪽

 

  일본신화에 우리의 단군 신화를 흡수하려하는 조선 총독의 모습에서 그들의 집요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일본의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세운 일본에 의한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세운 조선 병합을 합리화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무형의 형'으로 새로운 외부의 사상을 흡수하는 신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테라스는 신도의 가장 근본적인 신이다. 일본의 신도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적혀있는 일본 신화를 호출하여 일본의 조선 점령을 합리화하려했다. 신화는 신대의 필요에 따라서 다시 호출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오용한다면 그 폐해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오늘 필요에 따라서 과거를 호출하고, 새롭게 신화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화를 믿으며 침략전쟁을 합리화한다.

  만약, 우리가 일본의 '신화 만들기'에 대항할 문화적 백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성공했다면 어떠했을까?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영화가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이 실패로 끝나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성공한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이다. 그러나, 우리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가공의 영화를 호출할 필요가 없다. 민족 말살 정책이 성공한 실제 나라가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류큐'국이다.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류큐'왕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복속된다. 황국신민화 정책이 조선 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하나의 현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된 류큐는 '일본인'으로서 침략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차별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류큐 민간인들은 군부에 의해서 '옥쇄'를 강요받았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천황을 위해서 옥쇄를 했지만, 류큐인이 지키려했던 쇼와 천황은 류큐를 미군기지로 사용하도록 미국에 넘긴다. 이때가 1947년이다. 일본으로부터 버림받은 류큐는 미군 기지로 인해서 발생하는 모순에 고통스러워하며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1972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일본사회에서 류큐는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차별을 받는다.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을 믿으며,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을 차별하는 야마토인에게 류큐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으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일본에 귀속되려는 '류큐인'을 보면서,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스레 절감한다. 문화적 백신이 없는 '류큐'인들은 계모에게 학대받으면서도 계모를 친모로 믿고 사랑을 받으려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 뿐일까?

 

2. 일본의 신화 만들기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여러 이유중에서,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믿는 능력을 꼽았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과 신화를 만들어 내고, 이를 진실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엄청난 수의 사피엔스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일본은 유발 하라리가 말한 '사피엔스'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민족이다. 일본의 신화 만들기는 고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서기'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천손이 규슈의 휴가에 강림했는데, 천손이 강림한 구지후루타케는 가야국의 수로왕이 강림한 구지봉에 해당한다. 김후련을 비롯한 많은 신화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구지후루'는 '구지'의 발음과 유사하며, '다케'는 구지봉의 '봉'에 해당하기에 일본신화의 천손강림과 가야의 김수로왕 강림신화는 같은 계열의 신화라 할 수 있다. 한반도인이 일본에 건너가 국가를 세웠다는 주장을 할수도 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기록을 외면한다. 일본 신화학자는 그들의 입맞에 맞는 기록만을 선택해서 호출한다.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이야기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 천황가의 뿌리가 한반도 일 수도 있다는 기록은 애써 왜면한다.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저술되던 시기 그들의 일본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일본은 신화를 다시 정리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동생인 스사노 미코토는 이즈모 전승에 따른다면, 일게 지방신이었다. 절대 황조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아니었다. 제우스가 바람둥이인 이유가 해당 지역의 토착신과 그 후손들이 제우스와 연결시키려다 보니, 제우스를 바람둥이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는 연구결과를 떠올린다면, 일본서기를 집필할 당시, 천황가의 일본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에서 신화가 다시 정리되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더욱 재미 있는 것은 일본서기 편찬시기 천황가의 일본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정리된 일본 신화가 근대시기에 다시 재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외팔주 사관'이다.

 

  "국토 창조 신화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 일본은 세계를 축소해 놓은 것이라는 '외팔주사관'으로 재생산된다. (중략)외팔주사관은 기무라 다카타로가 주장한 것으로 (중략) 고대 세계사의 인명과 지명에 일본의 그것을 조합시켜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에 군림하는 거대 국가 일본을 창조해낸 것이다.기무라의 주장에 따르면 태고의 일본은 결코 극동의 작은 섬이 아니었으며, 현재의 일본은 옛날에 세계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본의 지리를 세밀하게 축소해 일본 열도에 투영시킨 것이다."-33쪽

 

  군국주의 시대, 일본의 침략주의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한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신화를 다시 정리하고 새롭게 해석해오고 있다. 문제는 이를 진실로 믿는다는 것이다. 일본 천황가가 중요시 여기는 '삼종신기'라는 것이 있다. 천황가가 하늘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옥과 청동검, 거울을 뜻한다. 그러나, 남북조시기 삼종신기 일부는 사라졌다. 엄밀히 말하면 삼종신기는 중세에 다시 말들어진 것이다. 더욱이 '삼종시기'라는 말은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삼종신기'는 중세의 신국 사상과 근세의 국학과 미토학, 근대 천황제 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끊임 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말이 있다. 전통은 필요에 의해서 근대에 만들어진 산물이다. 만들어진 전통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화에 의해서 인간이 노예가 되어 죽어가는 비극을 우리는 직시해야한다.

 

3. 만들어진 '신화'가 인간을 잡아 먹고...

  SF영화에는 인간이 만든 바이러스 혹은 생명체, AI가 인간을 지배하거나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설정이 흔히 있다.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 도리어 인간을 해친다는 설정은 SF영화에서만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이 만든 '신화'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일이 인류 역사에서는 실제로 발생했으니까 말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군국주의 광기에 휩싸인 '카미카제 특공대'를 떠올리며,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카미카제 특공대'가 태어나기 위해서 일본은 중세 시기부터 준비를 했다. 하야시 라잔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타고나지도 않은 부귀와 수명을 바라는 것은 이에 어긋난다. .... 이루어지지도 않은 소원을 꾀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다. 그런 자는 돼먹지 못한 일을 생각해내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행하여 죄를 지음으로써 결국에는 몸을 망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라서는 안 될 도리가 되는 까닭이다."-(삼덕초)1643년 이후-하야시라잔

 

  '바라서는 안될 도리'라는 말은, 각자 자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한다는 것이다. 한번도 왕조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나라 '일본'은 각자 자신의 신분에서,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했다. 우리처럼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서 상승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만세일계'라는 신화는 일본의 안정성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정체된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하야시 라잔이 말했듯이, 자신의 신분에 벗어나서 '바라서는 안될 도리'를 바라지 않았다.

  근대에는 니토베 이나조에 의해서 '일본의 영혼, 무사도'라는 책이 씌여진다. 서구인들에게 일본을 소개하기 위해서 영어로 씌여진 이 책을 통해서, 일본인들은 새로운 신화를 만든다. 주군의 명령에 목숨을 내놓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무사도'라 포장하고, 생명력이 가득한 '핀사쿠라'의 모습이 아닌, 천황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죽음으로 뛰어드는 '지는 사쿠라'로 행동하길 강요받는다. 그리고 수 많은 일본인들을 '지는 사쿠라'가 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광기에 미토학의 국체론이 한몫한다. 후지타 도코(1806~1855)는 "세번 죽음을 각오하면 죽지 않는다."라고 시작하는 '회천시사'를 남긴다. 이 시는 막부말기 지사들이 즐겨 낭송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 '회천(가이텐)'이라 불렸던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에게 전승된다.

  군국주의 광기는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았다. 군국주의 광기를 만들려는 자들에 의해서 과거의 불행한 유산들이 소환된다. 여기에 시류에 영합하며, 순응하는 일본의 국민성이 더해진다. 여기에 신공화후 신화와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신화가 다시 등장하여 침략전쟁에 힘을 불어 넣는다. 국가 통치권의 주체는 국가자체이고 천황은 국가의 최고기관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할 권능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는 미노베 다쓰기치의 천황기관설 마져도 불경죄로 여겨졌고, 급기야는 우익인사의 통탄을 맞기도 했다. 이것이 일본의 광기에 부레이크를 사라지게 했다. 단테의 '신국론'-지옥편에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다."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times of great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라는 말을 우리는 되새겨야한다. 수많은 젊은이 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전쟁에 내몰렸다. 잘못된 방향으로 돌진하는 일제를 바로잡지 못한 댓가는 일본의 시민과 동아시아의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으로 막을 내렸다.

 

4. 광기를 죽이는 방법

  아베내각이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략에 날을 세우고 있다. 아베는 그의 외할아버지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가 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 일본의 광기를 죽이는 방법이 없을까?

  일본의 침략적 망언들을 들을 때 마다, 우리는 정부가 강하게 일본에 대응해주기를 바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우리 땅 독도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 김후련은 이것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왜? 일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천황이 한국에 오려면 과거사에 사죄하라'라는 내용의 말을 한적이 있다. 김후련의 지적에 따르면 이는 쇼와 천황과 헤이세이 천황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본의 극우들이 준동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고 한다. 즉, 헤이세이 천황은 '천황가의 혈통에 백제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고 밝힌 사람이다. 헤이세이 천황을 한국에 초대하고 그로 하여금 서대문 형무소에 참배하게 하는 노련한 외교력을 발휘했다면 한일관계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경화에 반대하는 그를 비난함으로써, 우리의 우군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을 적군으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일본인 모두를 적으로 삼지 않고, 일본의 양심있는 시민과 연대하여 일본사회의 광기를 누그러 뜨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셈이다.

 "NO Japan"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중에 하나는, 아베를 중심으로한 일본 극우파를 우리의 적으로 삼고, 일본 시민을 적으로 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과거의 행동방식으로는 일본의 광기를 없앨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성숙된 대처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김후련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시기, 한국과 중국이 반발하자, 야스쿠니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일본인들이 야스쿠니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의 망언과 망령된 행동에 우리가 과도하게 대응한다면 결과적으로 일본 극우세력에게 힘이 된다는 주장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극한 분노가 일본극우를 살찌운다는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한국의 언론은 외교의 장과 학문의 장에서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다룰수 있도록 비켜나 있어야 한다." - 51쪽

 

 일본 정치가들의 말령된 행동을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것은 언론의 당연한 책무이다. 적절한 시기에 망언을 하고, 이를 통해서 주변국의 반반을 유도하여 일본내의 극우파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얻는 그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성숙해야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논리적이면서도 냉철하게 일본에 대응해야한다. 극도의 자제력이 필요한 장기전에 대비할 준비가 우리는 되어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본다.

 

 

  헤이안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천황은 일본을 직접다스렸다. 그러나, 막부시대가 개막되면서 천황은 막부의 등살에 기를 펴지 못했다. 특히 에도 막부시기가 되면, 천황은 황궁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다이묘가 직접 천황을 만날 수 없었으며, 정치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천황의 세력은 날로 약화되어 즉위식 조차 제대로 치룰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치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이 아내의 친구를 비롯한 주변인과의 관계를 끊어 놓가 고립시키듯이, 막부의 쇼군은 천황을 세상과 단절시켜 놓았다.

  고립된 천황을 다시 세상밖으로 끌어낸 것이 사쓰마번과 죠슈번의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들은 천황이라는 신화를 다시 소환하여 동아시아를 전쟁의 광기로 몰아 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갓다.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서 오키나와에서는 옥같이 부서지라는 '옥쇄'작전이 전개되었다. 오키나와의 히메유리 위령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우리 본토 일본인이 오키나와에 가면 꼭 히메유리 탑을 찾아 머리를 조아리는 까닭은 오키나와가 본토를 위해 산화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 피해의 궁국적인 모습을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중략)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그것은 자신의 '무죄증명'이며 용서의 장소이고 감미롭고 감상적인 장소, 이제는 평화의 눈물을 흘리 수 있는 장소이다."-418쪽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천황제의 광기 속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볼 뿐, 가해자로 직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후련은 강연이 끝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일본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과거사를 직시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한국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의연하게 과거사를 털어내고 한일의 미래를 향해 일보 앞으로 전진하기 바란다."-552쪽

 

 

 김후련의 말에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이다. 김후련의 말이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후련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해결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기에 우리는 그녀의 말에 귀기울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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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20-06-07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후련의 말을 다시 읽어봅니다. 아쉽게도 의연함과 냉정함을 요구하는 이들이 불매운동을 자제력 없는 감정 대응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강나루 2020-06-07 17:45   좋아요 1 | URL
냉정과 열정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네요
암튼 노재펜은 냉정하고도 의연한 대처였어요
 
사자와 생쥐가 한 번도 생각 못 한 것들
전김해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1학년 시절, 교과서에 '사자와 생쥐' 동화가 실려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읽었던 아련한 기억이 '사자와 생쥐가 한번도 생각 못한 것들'을 친근하게 만들었다. 사자가 생쥐에게 친구가 될 것을 청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곳곳에 숨어 있는 삽화들도 이 책에 대한 친근감을 더해준다.

 

'사자와 생쥐'이야기를 확장시켜 모험을 떠나는 설정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바다사자를 친구로 만나고, '선녀와 나뭇꾼'을 만난다. 서양의 '사자와 생쥐' 이야기가 우리의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로 이어지는 설정은 더욱 흥미롭다.

 

그러나,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는 미투운동 이후, 나뭇꾼을 혼인을 빙자해서 여성을 납치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에 마음 한구석이 못내 불편했다. 암튼, 선녀도 나뭇꾼을 사랑했기에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에 대한 시비는 넘어가자.

 

하늘 나라 옥황상제의 말이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라. 이 경험은 너에게 연민, 겸손, 배려, 용서, 뉘우침, 인내, 절제와 같은 진귀한 보물들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지니고 오너라. 그 사랑은 목숨마저 아낌없이 줄 수 있는 희생이니라. 이 우주를 통틀어서 희생보다 더 귀하고 숭고한 가치는 없단다."

 

여성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한생명을 품고 낳아 기르는 것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일이다. N번방 사건, 정준영 사건 등으로 세상이 험악해지는 요즘. 여성을 왜? 범죄로 부터 보호해야하는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하는 구절이다. 한여성은 이 사회의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보호를 받아야한다.

 

어른인 내가 읽었지만, 우리집 아이들이 흥미있어했다. 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사자와 생쥐', '선녀와 나뭇꾼'이야기이다보니, 더욱 친근한가 보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뤄지는 요즘,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은 어른과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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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5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6 0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민 교수의 의학세계사 - 주술사부타 AI 의사까지, 세계사의 지형을 바꾼 의학의 결정적 장면들!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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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사를 재미있게 쓴다? 이런 기대는 처음부터하지 않았다. 코로나19 펜데믹시대에 의학에 대한 기초 교양을 쌓기 위해서 책을 펼쳤을 때, 갑자기 '외치'라는 신석기인을 등장시켜, 시간여향을 한다는 발상은 수준 낮은 책으로 보이기 까지 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의학서적의 딱딱함을 사라지고, 재미있는 의학사가 펼쳐졌다. 기존 의학사 책에서 볼 수 없는 방식의 서술은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달리 재미있는 책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자, 이 책만의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서민교수가 글을 잘 쓴다는 세간의 평가가 헛소문이 아니였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재미와 알찬 내용이라는 두가지 토끼를 잡은 '서민 교수의 의학 세계사'라는 책의 매력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오늘의 진보적 지식이 내일도 진보적 지식일 수 있을까?

 갈레노스라는 의학자를 아는가? 갈레노스는 고대의학을 완성하고, 실험 생리학을 창시한 사람이다. 그는 로마시대 위대한 의사였다. 그의 의학은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의학지식이 쌓여가는데도 갈레노스가 주장한 이론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이에 대항하는 학설을 철저히 무시하는 카르텔이 형성되었다. 갈레노스가 체액 불균형이 질병을 일으키며, 사혈을 통해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사람이 파라셀수스다. 그는 갈레노스에 대항한 댓가로 바젤대학교수 자리에서 쫓겨냐야 했다. 용감히 자신의 주장을 하는 고집강한 파라셀수스는 외치가 보는 앞에서 경비원에 의해서 대학밖으로 쫓겨났다.

  한시대의 진보적 학자의 주장이 다음 세대에서 기득권자의 이익을 지키는 보수의 성벽으로 변한 못브을 바라보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학문은 끊임 없이 토론과 대화가 오고가야한다. 비판이 허락되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다. 파라셀수스는 죽어가는 의학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 발악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무시 뿐이었다.

  산욕열의 원인이 부검한 의사가 손을 씻지 않고 산모를 만졌기 때문이라 주장한 제멜바이스도 파라셀수스아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이라는 책에서는 제멜바이스가 동료들로 부터 무시를 당한 것이, 산모의 죽음이 의사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라고 주장했다. 반면, 서민교수는 제멜바이스의 성격탓으로 돌리고 있다. 파라셀수스와 갈레노스는 앞선 의료 지식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으며, 오만하고 화를 잘 냈기에 동료 의사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어느 글 맞을까? 두 입장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으로 판단된다. 잘못된 기존 의학지식에 도전하려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말할 수 밖에 없으며, 자신의 기존 지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동료 의사를 좋은 모습으로 볼리 없다. 한비자 '세난편'에 유세의 힘듬을 지적한 글이 있다. 상대를 설득하려면, 상대의 심리를 비롯한 갖가지 것들을 고려하여 조심스럽게 말해야한다. 이것은 유세가가 군주에게 하는 말에만 해당하지 않았다. 동료의사들에게 새로운 의학지식을 말할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이 일이라가 보다는, 인간관계라는 푸념이 있는 것처럼, 좋은 의학지식을 개발하는 것 못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의학지식을 동료 의사들에게 잘 설명하는 것이었다.

 

2. 누구를 위한 의학 발전인가?

의학이 발전하면, 많은 인류가 보다 건강하게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의학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생체실험을 보면, 과연 누구를 위한 의학 벌전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나치나 일제에 의해서 행해진 생체실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94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는 829명의 임산불르 대상으로 한 방사능 실험이 있었으며, 1932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600명을 대상으로 매독실험을 시작했다. 무려 40년 동안 진행된 이 실험 기간 동안 그들은 페니실린이라는 치료제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체 고통을 당해야했다. 과학자나 의사들이 '의학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비윤리적인 생체심험을 현대에도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과학은 발전하는데, 인간의 윤리는 과연 발전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그렇다면, 지금은 의학계의 비윤리성이 사라졌을까? 세계적 제약 회사가 제3세 국가에게 남몰래 행하는 신약 실험을 비롯해서, 중국 사형수 장기적출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의학계의 아니, 인간의 윤리의식은 발전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중국 사형수의 몸에서 적출된 장기는 서구의 돈많은 사람들에게 이식된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덕성 조차 무시하는 현실을 바라보면 심한 자괴감을 갖게 한다. 특히, 중국 사형수의 장기를 밀매매하는 소위 '서구 선진국'이라는 사람들에게 제3세계의 인류는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가 보다. 미국에서 싼값에 장기 이식을 받을 수 있다는 꾐에 빠진 '외치'는 장기 밀매 업자에게 납치되어 서서히 정신이 혼미해져간다. 사실은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외치'의 모습이 우리 인류의 도덕의식은 아닐까?

 

3. 민간요법에서 새로운 신약을 얻을 수는 없을까?

대학시절 의대를 다니는 형과 기숙사에서 한방을 썼을 때가 있다. 그형에게 한의사와 손을 잡고, 한의학을 현대화 할 생각은 없는가? 라는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한의사가 뭘안다고 그들과 손을잡나?"라는 말을 했다. 병원에 잘못된 한약을 먹고 실려온 사람이 많고, 한약재들의 상당수가 몰핀계열이기에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부작용이 많다는 주장이다. 어려서부터 침과 한약으로 치료를 받아온 나로서는 의대생 형의 말이 매우 낯설었다. 사실 한의학과 양의학의 싸움이 심한 곳이 우리 대한민국이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양의사와 한의사의 목표라면, 질병과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힘을 합쳐야할 텐데 둘의 사이는 너무도 멀다. '세계 인구의 4분의 3이 약초로 치료하는 전통의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세계 보건 기구의 발표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의학은 인류에게 현대의학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의료 혜택을 주고 있다.

  현대의학이 한의학을 비롯한 민간요법을 현대화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서민교수는 시간과 돈의 문제도 보고 있다. 민간요법이 '이 식물을 먹어 몸에 좋대'라고 표현한다면, 현대 의학은 '이 식물에서 추출한 A라는 성분을 먹으면 암이 나을 확률이 70%야'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과학적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연구와 광범위한 실험이 있어야한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양의사가 한의학적 처방을 할 수 없다.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세계적 펜데믹 상태에 빠져든 지구인을 위해서, 기존의 한약재 속의 치료물질을 추출하여 의학발전에 기여하는 방법이 계속되길 바란다. 전통적 한의학의 언어를 현대 의학적 언어로 바꾸어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기여한다면 해볼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4.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한 것인 사실일까?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했다는 영애를 누리는 것은 당여하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벤저민 제스터라는 농부가 그의 가족에게 종두법을 접종했으며, 존 퓨스터도 "우두도 천연두를 막아주는 게 아닌가?"라고 동료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벤저민 제스터와 존 퓨스터에게 당연히 돌아가야할 종두법 개발자라는 영예가 제너에게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벤저민 제스터는 가족에게만 우두 접종을 했으며, 존 퓨스터는 마마접종으로 돈버는 일에만 몰두하여 우두백신에 대한 연구는 하지 않았다.

  반면 제너는 영국 전역을 돌며 자신의 이론을 증명했고 논문으로 발표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라는 법학 격언이 있다. 아무리 우두를 처음 개발한 자가 벤저민 제스터와 존 퓨스터라 할지라도, 자신의 업적을 인류를 위해서 보급시키지 않았다면, 종두법 개발자라는 영예를 누릴 자격이 없다. 우리는 의술을 자기 가족만의 안정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부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자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적 영예를 얻기 이전에 이미 가족과 부로써 충분히 혜택을 누렸을 테니까 말이다.

 

 

심장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 시간여행을 시작한 '외치'는 대한민국에서 수술을 받는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이 탁월한 의료시스템과 세계 최고의 의료보험제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는데 돈이 들지는 않지만,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서 너무도 오래 기다려야하는 영국, 민간의료보험에게 의료현장을 맡긴 미국의 경우는 치료를 받는데 너무도 돈이 많이 들어 가난한 사람은 제대로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의료보험 시스템은 코로나 19가 일으킨 혼란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의료인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질본의 활약, 그리고 의료보험 시스템이 한국을 구했다. 만약 의료 민영화를 하려했던 보수 정권이 계속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우리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아갈 뻔했다.

  의학기술은 계속 발전한다. 그러나, 의료 윤리와 의료 시스템이 계속 발전한다고 장담할수는 없다. 선진국의 돈많은 부자를 살리기 위해서 제약회사가 돈없는 제3세계에서 신약실험을 한다던가, 앞선 의료 시스템에라 믿었던 유럽과 미국의 의료시스템이 코로나 19앞에서 무기력한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제 무엇을 위해서 의학과 의료시스템을 발전시켜야하는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해야할 때이다.  

ps. 서민교수가 재미있는 의학사 책을 썼지만, 옥의 티가 보인다. '외치'가 시간 여행하는 모습들이 SF 소설에 비해서 조금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책이 SF소설이 아니기에 이쯤은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의학사 책인데, "유의태 밑에서 배우겠다고 간청했던 허준"(80쪽)이라는 표현은 심각한 오류이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다루었듯이, 유의태는 유이태가 본명이며, 허준이 태어난진 백여년 이후에 태어난 의원이었다. 전설을 사실로 믿고 의학사를 서술한 점은 심각한 문제점이다. 이 옥의티를 수정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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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 세계사 - 세상을 설득한 명연설 50편으로 현대사를 읽다
앤드루 버넷 지음, 정미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말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많은 대중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현명한 리더는 명연설로 그들을 행동으로 이끈다. 베나지르 부토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인용해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키는자들에게 예약된 자리이다."라고 말했다. 현실의 불의를 보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복지부동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이 말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 세상이 변하려면 대다수의 대중을 움직여야한다. 그들이 자신의 가슴속에 담겨져 있는 정의에 대한 정의라는 불꽃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스피치 세계사'에서는 나약한 대중들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거인을 일깨우는 명연설 50편이 실려 있다. 때로는 수준이 낮고 지루한 연설도 있지만, 때로는 나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만기도 했다. 그 연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우리의 가슴과 심장을 깨우는 연설.

 

"나의 재능을 모르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요즘 학생들이 진로 관련된 상담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들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회에서 요구하는 안정된 직업, 혹은 사회에서 선망하는 직업을 선택한다.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기 보다는 사회나 부모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구로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 사회가 열망하는 의사라는 꿈을 이루고도,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혁명가가 된 사람이 있다. 체 게바라!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평했다.

 

"우리는 한 인간의 생명이 세계 최고 갑부의 모든 재산을 합한 것보다 백만배는 더 귀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닭았습니다."-177

 

사회적 명성과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의사가 되기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일에 종사하기 위해서 의사가 되었고, 보다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세계의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그는 살아 있다.

우리사회에는 체 게바라와 같이 생명을 존중하는 숭고한 의사가 얼마나 될까? 뉴스에 나오는 함량 미달의 의사들과, 동료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의대생들을 보며 절망감을 가졌다. 그런데, 코로나 19 사태가 벌어지고, 대구가 위기에 빠지자, 병원문을 닫고 대구로 달려간 의료진들을 보며 세상은 살만하다는 생각을 갖았다. 묵묵히 자신의 삶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인술을 펼치는 그들의 숭고함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아마도, 사회적 명성을 따라서, 사회적 부를 따라서 의대에 진학한 학생이라 하더라도, 학생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숭고함이 위기의 상황속에 빛을 발했으리라.

가슴을 고통치게 만드는 일에 자신의 운명을 바친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스티브 잡스이다.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상세히 말한다. 자신이 입양아였으며, 양부모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노동자였다. 결국, 평생 모은 돈을 자신의 대학 학자금으로 써야하는 양부모를 생각해서 6개월만에 대학을 중퇴한다. 그후, 자신의 가슴을 끌어당기는 캘리그라피 수업을 듣는다. 이는 매킨토시 설계에 유용하게 쓰여진다. 돈이 되는 일을 쫓아다니는 평범한 학생들에 비해서 그는 자신의 가슴을 끌어당기는 일에 열정을 불살랐다.

 

"사소한 일들이 이어져 길을 내준다고 믿으면 가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자신감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351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355

 

사회적 욕망과, 부모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연설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은 스스로 많은 시간과 열정, 노력을 쏟아 붓게 된다. 비록 많은 돈을 벌어주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스탠포드 대학생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내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고, 들려주고 있는 말을 그의 삶에 녹여서 말하고 있었다.

 

2. 대중을 악의 길로 이끄는 연설의 힘

 

우리의 열정을 일깨우는 명연설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명연설로 독일인을 비롯한 유럽의 무고한 시민들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사람이 있다. 바로 히틀러다. 그리고 그의 밑에서 앞장서서 독일인을 전쟁터로 떠민 사람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하인리히 힘러도 그중 한사람이다. 그는 친위대 장교를 모아 놓고, 유대민족을 말살하겠다고 당당히 연설을 한다.

 

"이런 과업을 끝까지 완수해 나가면서도 인간의 나약함은 벗어던진 가운데 인간성을 지키기란 우리로서도 힘든 일이지만, 그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영광의 한 페이지를 역사에 남기는 일이다."-96

 

이미 인간성을 잃어버린 나치가 인간성을 말하니 참으로 가소로울 뿐이다. 이 연설을 들으며, 용기 있게 "아니요"를 외친 사람은 없다. 독일의 상당수 시민들은 나치편이 되어 '신념'을 갖고 행동했다. 대중 선동에 놀아난 사람도 있고, 나치의 신념을 자신의 신념으로 만든 사람도 있다.

니체가 '악마와 싸우는 사람은 악마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악마를 들여다보면, 악마도 우리의 심연을 들어다 본다.'라는 말을 했다. 히틀러와 싸우는 스탈린도 히틀러와 닮아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히틀러와 스탈린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노동자는 독일 파시즘에 대항하는 이 애국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자유와 명예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분발해야합니다."-85

 

이오지프 스탈린은 독일 히틀러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노동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스탈린은 재능 있는 군 지휘관을 숙청하고 독일 침공 가능성을 말하는 자를 죽였다. 스탈린 자신의 잘못은 말하지 않고 독일의 공격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가 '모든 노동자는 독일 파시즘에 대항'하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세계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죽음으로서 악의 세력은 사라졌을까? 니체의 말처럼, 나치에 혹독히 당한 유대인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던 죄악을 학습했다. 2천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을 힘으로 몰아내고 장벽을 쌓고 심지어는 폭격을 당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언덕에 올라 바라보며 환호한다. 나치라는 악마와 싸우면서 나치가 유대인의 심연을 바라보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 책에 다비드 벤구리온의 연설이 실려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용맹의 길을 개통합니다."라는 연설을 설명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침히 짓밟히 있는 현실을 '현장 속으로'에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단순히 연설만을 모아 놓는다면, 잡탕을 면치 못한다. 제대로 된 관점을 가지고 진실을 말해야한다는 점을 저자가 유념하길 바란다.

제국주의자의 추악한 모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은 "국가로서 우리의 존립은 석유에 달렸"다고 강조하며, 수에즈 운하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파병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평화주의자로 살며 평화를 위해 힘쓰고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평화를 위해 협상"해왔다고 강변한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유산인 '수에즈 운하'를 지키기 위해서 침략전쟁을 하면서도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는 영국 신사의 위선적인 모습에 구역질이 난다. 중국에 아편을 팔았던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자유무역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중국을 공격한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이다. 보수당 당수 해럴드 맥밀런의 연설은 오만한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식민지 영토 곳곳에서는 현재 자치제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 자부심을 가져 마땅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 길로 들어서게 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156

 

수많은 제3세계 국가를 침략하고 자원을 약탈하고, 그들을 노예로 만든 대영제국이 과거의 반성과 배상을 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침략 덕분에 피식민지 국가가 잠에서 깨어나 앞으로 아가고 있다고 괴변을 펼치고 있다. '백인의 짐'이라고 영국 제국주의를 미화시켰던 제국주의 유산을 그들은 청소하지 않고 있다. 반성이 없는 오늘은 과거의 잘못을 내일에 펼쳐 놓을 것이다.

 

3. 대중에게 희망을 주는 리더의 말

희망은 어둠속에서 빛을 보는 것과 같다. 현실은 어둠속에 있지만, 리더는 그곳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말을 해야한다. 리더가 어떠한 비젼을 제시하느냐에 따라서, 대중은 절망할 수도,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1939년 네빌 체임벌린은 라디오 방송으로 독일과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영국국민에게 설명했다. 국민들로서는 1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연설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대공항 시기 프랭클린 루스밸트의 연설일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단 하나,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47

 

노변담화로 알려진 루스밸트의 연설은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미국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다. 연설을 하는 루스밸트 자신이 소아마비를 앓았기에 미국인들은 그의 말에 더욱 신뢰감을 갖았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세계는 제2의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이 어둠의 터널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루스밸트가 말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단 하나,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효율적인 방역을 통해서 안전한 대한민국, 방역 선진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고 있는 지금, 한국의 지도자들도 우리가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으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우리가 선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들 가슴에 심어주어야할 것이다. 현실이 아무리 캄캄하더라도 한줄기 희망이 주어진다면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말로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경우도 있다.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처칠로 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밸트는 처음에 비시 정부를 인정하기도 했다. 비시 정부를 중심으로 프랑스를 바라보면, 프랑스는 나치의 피해국가가 아니라, 나치 협력국가라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프랑스군이 파리에 먼저 입성하면서 샤를 드골은 프랑스 역사에 남을 만한 명연설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파리를 장악했던 적이 우리에게 항복을 선언했으므로 프랑스는 다시 파리의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102

 

연합군의 압도적인 힘에 의지해서 파리를 해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가 머뭇거리는 사이 파리를 점령한 샤를 드골은, 이 명연설을 통해서 그들만의 '신화'를 완성했다. 이 신화로 인해서, 프랑스는 나치 협력국에서, 나치 피해국으로 자리 이동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해서, 우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독수리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샤를 드골이 했던 명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고, 강대국의 손아귀에 한반도의 운명을 내맞길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을 보면서 우리는 왜? 그러하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냉전시대가 도래한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소련과 북한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소련이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하며 독립국가 연합으로 재탄생했다면, 북한은 지금도 김일성 개인숭배를 거쳐서, 백두혈통이라는 신화를 통해서 북한인민을 다스리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스탈린은 설득하고 설명하고 끈기 있게 협력하는 식이 아니라 자기 개념을 강요하고 자기 의견에 절대적 복종을 요구했습니다."-128

"차르들 조차 본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133

"동지 여러분, 개인숭배를 단호하고 확실하게 뿌리 뽑아야 합니다."-134

 

스탈린 치하의 혹독한 폭압정치 속에 살아던 민중들로서는 스탈린이 죽었다 하더라도 스탈린을 비판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때, 용기 있는 리더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이겨내야 홀로 설 수 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격하시킴으로서, 소련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롭게 독립국가 연합 혹은 러시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북한은 3대 세습을 하면서 김일성의 그림자에 그대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다. 소련이라는 껍데기를 버리고 러시아로 다시 태어났듯이, 북한도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그늘에 안주한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 넘어 홀로설 수 없다. 리더의 용기 있는 한마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북한의 물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인가?

 

4. 희망을 주는 약자들의 외침

강자의 명연설에는 힘이 있지만, 약자의 명연설에는 감동이 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있다. 그들의 외침이 사회를 바꿔 놓기도 하지만, 공허한 메아리만을 남길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약자의 메아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꼽자면, 여성을 빼 놓을 수 있다. 물론, 남성보다 더 많은 힘과 권력을 쥔 여성도 있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사회적 약자인 것은 사실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힌 여성이 있다. 바로 애멀린 팽크허스트이다.

 

"국가의 통치에 여성의 관점이 반영될 수 있도록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져야 합니다."-16

"남성 유권자와 남성 입법자 들은 남성의 욕구를 우선시하며 여성의 욕구는 무시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투표권을 얻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이런 현상이 계속될 것입니다."-20

 

투표권은 권력이다. 투표권이 없는 존재는 정치인으로부터 아무런 관심을 얻지 못한다. 시골 경로당에 밥을 해먹으라고 돈과 쌀이 정부로부터 나온다. 경로당에 대한 복지가 이렇게 잘되어 있는 것은 노인들이 투표권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투표권이 없었을 때, 여성의 일에 관심을 갖을 정치인이 몇이나 되었을까? 그들은 여성의 일에 관심도, 이해도 할 수 없었다. 이 연설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어떤 미혼모가 가정부 일을 다니느라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식을 유기한 죄로 3개월 형에 처해졌다. 남자들로 구성된 치안판사단은 미혼모의 급여에도 관심이 없었고, 미혼모의 남편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미혼모가 자녀를 양육해야한다는 사실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미혼모의 사례는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대변할 대표를 국회에 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려준다. 고양이가 쥐를 위한 법을 만들리 없다. 한나 아렌트도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말했듯이,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비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이 괴로울수록 사회적 약자는 정치에 관심을 갖아야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현실은 더욱 괴로워질 것이다.

국제사회의 약자로 눈을 돌려보자. 국제사회의 약자는 팔레스타인을 꼽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폭력 앞에 무참히 당하고만 있어야하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는 해도 도움의 손길을 내주지는 않는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국가 수반은 비정부기구 대표로서는 최초로 유엔 총회에 연설자로 초청받았다.

 

"오늘 저는 올리브 가지와 자유 전사의 총을 들고 왔습니다. 이 가지가 제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243

 

누가 자신의 몸에 폭탄을 짊어지고 스위치를 누르고 싶겠는가? 우리는 테러라는 현상만을 보고 폭력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 폭력 너머에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은 보지 못한다. 돌과 불타는 타이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어린이에게 소총사격을 하는 이스라엘 병사를 보라. 팔레스타인 사람이 자고 있는 집을 갑자기 포크레인으로 밀어 버리는 이스라엘인들을 보라. 팔레스타인을 폭격하는 모습을 보며 환호하는 그들을 보면서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제발 우리가 테러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도록 도움을 달라고 절규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여성 정치인 베나지르 부토는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세계 여성회의에서 국제사회의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정의는 정치적 자유이자, 경제적 독립이자, 사회적 평등입니다."-322

 

그렇다. 팔레스타인은 정치적 자유가 없고, 여성은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평등이 제공되고 있지 않다.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라는 부토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일제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되찾고 나서, 민주주의만을 외쳤다. 민주화만 되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이상향으로 가기위한 다리에 불과했다. '스피치 세계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명연설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다. 더 이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게 하는 연설이다.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어울려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꿈꾸는 것이 더 이상 꿈이 아닌 세상이 도래하길 바래본다.

 

'스피치 세계사'는 세계적 명연설을 모아 놓았다. 같은 명연설이라 할지라도,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없는 명문장이지만,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경우, 제국주의적 냄새가 물신 풍기는 상한 음식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이 책의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사회를 보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한문장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겠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아일랜드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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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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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도올 김용옥은 그 무게를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도마복음'을 만나면서 그 무게를 벗어 던졌다. 자신을 무겁게 억누르는 한국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참다운 예수의 모습이 아니란 사실을 '도마복음'을 통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의 치열한 사상탐구의 모습에서 나의 고통을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가난한 집안의 나는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야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다니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이러한 나는 그들에게 왕따를 당하기 좋은 아이였다. 때로는 구타를 당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2학년 담임 선생은 이러한 나를 부던히 싫어했다. 학교에서 실시한 IQ 검사에서 우수한 지능지수가 나오자, 그는 나를 2시간 동안 두둘겨 패면서 컨닝을 했다고 자백하라며 다그쳤다. 두시간 동안 맞으면서도 나는 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당시 내 주변에 있었던 학생들은 나보다 IQ가 낮게 나온 학생들 뿐이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찾으면서, 자신보다 약하고, 가난한 나를 무참히도 짖밟았던 이들이 '크리스찬들'이었다. '낮은 곳으로 임하라'라는 성경의 말은 그들 세계에서만 통하는 말이었다. 위선적인 기독교를 보면서, 세상을 살아왔다. 그때, 도올 김용옥을 만났다. 그는 당당히 한국 기독교의 위선적인 모습에 강한 일갈을 가하며 나의 가슴에 감동의 물줄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도마복음'을 만났다. 적을 때려 눞히려면, 적의 논리를 알아야한다. 한국의 크리스찬들이 왜곡하는 예수를 바로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어린시절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치유받고 싶었다. 그래서 곧바로 '도마복음2'를 읽어 내려갔다.

  하루에 한문장, 때로는 한주에 한문장, 때로는 한달에 한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연습장에 영어 원문을 적으며, 모르는 단어는 찾아가며 읽었다. 때로는 새로운 환희에 무릎을 쳤고, 때로는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한국의 '크리스찬들'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무엇일까? 이제 참다운 예수를 만나보자.

 

 

1. 믿으면 진실을 볼 것이다! 라는 크리스찬들의 거짓말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초등학교 시절, 산골짜기 까지 선교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집에 허락받지도 않고 들어와 포교를 했다. 나의 이성적 질문에 그들은 "믿으면 진실을 볼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이 있다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질문에도 그들은 "하느님을 믿으세요"라는 말만을 할뿐이다. 이 질문은 '크리스찬인 당신들이 실은 나를 왕따시키고, 나를 구타하고 있소. 만약 신이 있다면, 불쌍한 나를 왜? 구원하지 않소?'라는 질문이었다.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이비신자들과 다를바가 없었다. 현실의 문제에 뿌리두지 못하고, 공허한 말들만을 늘어 놓는 그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나, '도마복음'은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해석하라'(interpretation) 도마는 말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자신이 직접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예수의 쌍둥이 '도마'다운 말이다. 그렇다. 한국 기독교는 깨달아야한다. 끊임 없이 재해석 되고, 끊임 없이 질문을 하고, 질문에 답해야하거늘 그들은 거대한 예수의 그늘을 무기삼아 질문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석하지 못하게 강요한다. 참다운 예수와 만나는 첫 관문은 끊임 없이 해석하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도마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었다. 스스로 해석하라!! 그러면 진리를 만나게 되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2. 천국은 하늘에 있지 않다! 크리스찬들의 두번째 거짓말!!

  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도다'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집에온 포교자들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포교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 믿고 천국가세요"라고 말한다. '천국'을 풀어보면, '하늘 나라'이다. 하늘에는 구름과 공기밖에 없는데, 무슨 천국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천국에 가는 조건은 교회에 다니는 것뿐이라는 괴변도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학교 1학년 시기, 수학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포교를 했다. 한 친구가 질문했다.

"그럼, 우리 조상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지옥에 갔겠네요."

당돌한 친구의 질문에 수학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는님이 보기에는 한줌도 안되는 존재들이에요."

수학 선생님의 대답에 나는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신들과 같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는 무리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수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논리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들이 믿는 신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이되니, 스스로를 크리스찬이라는 말하면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그들의 말은 스스로의 종교를 부정하는 일이다. 지하철에서 종종 듣게 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도마복음 속에 우리가 만나는 예수가 본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예수님은 말하신다.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새가 먼저 천국에 갈 것이요. 천국이 바다에 있다면, 물고기가 천국에 먼저 이를 것이다.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도 있다. 그렇다. 우리 안에 천국이 있고, 우리 밖에 천국이 있다.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자! 우리가 하찬케 여기는 주변의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자! 예수님은 진정으로 한국 기독교를 위해서 꾸짖고 있다. 귀가 있는 자여, 들어라!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의 말씀을.....

 

3. 종말론을 짖거리는 자여, 거짓된 말을 그만둘 지어다. 크리스찬들의 세번째 거짓말

The followers said to Jesus, "Tell us how our end will be." Jesus said, "Have you discovered the beginning, the, so that you are seeking the end? You see, where the beginning is the end will be. Blessed is the one who stands at the beginning: That one will know the end and will not teste death."(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마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안히라리라.")

  거리에서 포교하는 자들이 자주하는 말이 있다. "심판의 시간이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큰 목소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해대는 말들을 들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언어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것도 죽음을 무기삼아 공포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우리는 광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한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때로는 성조기나, 이스라엘깃발을 들고 나타난다. 코로나 19의 확산 위험 속에서도 집회를 하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떠들어 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과연 진정한 예수님은 그들을 어찌 평가할 것인지 궁금하다.

  도마복음 속에서 만난 참된 예수의 모습은 한국 교회에서 만나는 예수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종말론을 말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시작을 발견하였느냐?라고 반문한다. 시작도 보지 못한 것들이 끝을 말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철학자 강신주가 대중강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죽음을 걱정하기 보다는, 꽃이 질것을 걱정하기 보다는 꽃피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종말론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오늘, 나의 삶을 꽃피우기 위해서 노력하자. 오늘을 꽃피운다면, 아니, 최소한 오늘을 꽃피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면, 내일 종말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아쉬움은 남을리 없다.

 

4. 예수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하는말,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Jesus said to them, "If you fast, you will bring sin upon yourselves; and if you pray, you will be condemned; and if you give alms, you will do harm to your sprits."(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구제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을 끼치리라.")

 어느 교회가 아프카니스탄에 선교단을 파견하여 교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은 사건이 있었다. 여행을 자제하라는 안내판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던 그들은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후로, 한국의 크리스찬들은 반성을 했을까? 아니면, 위험한 지역에 선교를 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을까?

  선교하고, 기도하고, 이웃을 구제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는 우리에게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고 말한다. 진정한 마음에서 일어난 순수한 금식, 순수한 기도, 순수한 희사가 아니라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도마복음 속 예수는 말한다. 그런데, 지난 몇달 동안 언론에 비친 기독교는 어떠했는가? 코로나 19의 확산 위험 속에서 종교 집회를 자제해달라는 질본의 호소를 뒤로하고 주일예배를 강행했다. 결국, 교회 집단 간염이라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단이라고 말하는 모교회가 종교집회를 통해서 코로나19를 집단 간염시켰다. 이러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기도하지 말라! '너희는 정죄되리라'

 

5.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홀로 서라!

Jesus said, "Perhaps people think that I have come to cast peace upon the world. They do not know that I have come to cast conflicts upon the earth: fire, sword, and war. For there will be five in a house: there will be thre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father against son and son against father, and they will stand alone."(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땅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

도마복음을 읽다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중에 한 구절이 바로 이 부분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기보다는 충돌을 선사하러 왔다. 가정에서 아비와 아들이 충돌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선다. 아들은 아버지라는 거대한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살아갈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충돌을 통해서 이들은 홀로설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발달단계상의 과정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각기 홀로서게 될리라.'라는 말을 통해서, 타인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국 기독교가 신자들을 교회에 혹은 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는 엄청난 말씀이다.  숫타니파타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들은 통하는 것이 있나보다. 그래, 정복한 왕국을 버리고 가는 왕처럼, 그대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라!

 

도올 김용옥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서술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다음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이라는 말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성령에 의하여 쓰여진 특수한 문헌이며 인간의 지혜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이러한 황당한 거짓말로부터 우리는 해방되어야한다."-381쪽

 

성경을 '인간의 창작물'로 보는 도올의 모습은 대학시절 내가 품었던 의문과도 일맥상통한다. 대학교 3학년 시절, 한국 사상사시간이었다. 교수님은 한국 사상사를 강의하는 중간 중간 성경을 말하며 은연중에 포교를 했다. 한국 사상사를 보다 밀도 있게 듣고 싶었던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질문했다.

"종교가 시대의 위에 있어야합니까? 시대가 종교의 위에 있어야합니까?"

나의 질문을 교수님이 이해하지 못하자, 나는 달리 질문했다.

"시대가 변하면 교리도 변해야합니까, 아니면, 시대가 변해도 교리는 변하면 안됩니까?"

교수님이 답하셨다.

"종교에는 부활과 같은 영적인 것이 있기에 함부로 말할수 없죠"

나는 반박했다.

"부활은 포교를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교수님은 순간 말을 얼버무리더니, 나의 이름을 물었다. 순간, '나의 학점은 날라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나의 학점을 A+를 주었다. 교수님은 성경도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로 사료비판을 해야한다는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도올 김용옥도 '도마복음'을 풀이하면서 성서는 재해석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한다고 울부짖고 있다. 그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지난날 부던히도 내가 외쳤던 말들이 메아리쳐 들려왔다. 도올은 '도마복음 2'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신을 믿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것도 자유이다."-382쪽

 

나는 어린 시절부터 급우들로부터, 거리의 포교자들로부터 나의 자유를 압살당해왔다. 그들은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나를 대접했다. 나는 신자가 되고 싶지 않은데 나를 신자로 만들려 폭력을 가하기 까지 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폭력이다. 논어에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己所不欲勿施于人)'이라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데로 남을 대접한다면, 그것은 폭력의 모습을 띈다. 진정으로 인본주의를 실천하려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논어의 황금율을 가슴에 새겨야한다. 그럴때만이 진정한 평화가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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