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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평점 :
우로보로스(Ouroboros)! 책 표지에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우로보르스가 등장한다. 시작이 끝이요. 끝이 곧 시작을 의미하며, 무한한 순환과 윤회의 상징인 우로보로스가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우로보로스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과 결혼하며 혼자 임신하고 스스로를 죽인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뜻하기도하며 하나의 몰락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니체가 몰락시키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일까?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신을 부정하고 신을 죽이는 것은 우로보로스가 자신의 꼬리를 먹어 치우는 것과 같지 않을까? 니체는 신의 노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너무도 읽기 힘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1. 크리스트교의 신을 죽이다!!
서양에서 신은 보통 크리스트교의 신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God'는 하느님을 뜻하고, 'god'는 잡신을 뜻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잡신이라기 보다는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을 뜻한다. 그리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줄기차게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을 비판한다.
아, 형제들이여, 내가 창조한 이 신들은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이었다! ... 고통과 무능, 이것이 모든 저편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54쪽
"신들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 귀있는자는 들을지어다.-330쪽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가 한 말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이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이라는 주장! 그리고 고통과 무능이 지옥과 천국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은 크리스트교가 가지는 종교적 근거를 송두리채 무너뜨린다. 더욱이 시장에서 줄타기하다가 사고를 당해서 죽어가는 광대에게 차라투스크라는 '악마도 지옥도 없네'라며 헛된 종교적 망상을 부정하는 말을 내뱉었다. 종교를 비판하는 자들은 '종교가 불안 장사를 한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종교인들이 저지르는 불안장사를 비판하며 신을 죽이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인간이 만든 신이 존재한다하더라도 하나의 유일신만 존재한다는 크리스트교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성경 문구를 페러디하여 일갈한다. 크리스트교의 핵심인 유일신 사상을 니체는 무너뜨리고 있다! "변절자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십계명의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마라!'라는 조항을 비판한다. 신이 자기의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심지어 '그에게 아이가 있기나 한가'라는 의문을 제시하며 신을 비꼬고 있다. 니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참으로 천천히 죽을 것을 설교하는자들이 존경하는 저 히브리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가 이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선하고 의로운자들의 증오와 함께 히브리사람들의 눈물과 비애뿐이었다.-136쪽
그는 너무 일찍죽었다. 내 나이 만큼만 살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는 철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귀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137쪽
인간이 존재한 이래 인간은 너무도 즐기지 못했다. 나의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162쪽
크리스트교가 유대교와 다른 것은 예수의 죽음과 그의 부활이다. 창세기에 시작된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씼었다는 크리스트교의 원죄론은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금기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는 크리스트교의 원죄론과 예수의 부활을 철저히 부정한다.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의 때 이른 죽음'과 함께 '증오'의 불길을 만든다. 결국 십자군에서 부터 시작하여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만행의 근본 뿌리가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낙인이었다. '히브리사람들의 눈물과 비애'가 인류의 역사 속에 깊게 상처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니체는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니체는 젊은 예수와 성숙한 예수를 분리하여 예수가 내 나이만큼만 살았더라면 예수의 가르침을 예수가 스스로 철회할 것이라는 파격적 주장을 했다. 아울러, 인간의 원죄를 들먹이며 금욕을 강조하는 크리스찬들에게 니체는 '너무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원죄라고 일갈한다! 크리스찬들 중에서 니체의 서적들을 금서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니체의 파격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그들의 생각이 일면 이해되기도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사상이 많은 사상가들과 일반인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그의 책을 탐독하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힘을 가진 크리스트교 세력에 대한 비판과 진실을 니체가 대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의 억측이 그대들의 창조적 의지보다 멀리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156쪽
선하고 의로운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자기 자신의 덕을 만들어 내는 자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단다. 그들은 고독한 자를 증오한다. ... 성스러운 단순함도 조심하라! 그들에게 단순하지 않은 모든 것은 신성하지 않다. 그들은 불놀이를, 화형의 장작 더미를 좋아한다.-120쪽
한때 의심은 악이었고 자아에 대한 의지도 악이었다. 그대 병든자도 악이었다. 그때 병든자는 이단자가 되었고, 마녀가 되었다.-71쪽
그들은 자신이 가는 길에 핏자국을 남겨 놓았으며, 어리석게도 피로써 진리를 증명한다고 가르쳤다. -169쪽
여기 성직자들이 있다. ... 그들은 사악한적들이다. 그들의 겸손보다 더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없다. ... 그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들을 굴레에 묶어 놓았다. 거짓 가치와 망상의 굴레다! 아, 누군가가 그들을 구원자에게서 구원해줄 것인가! -166~167쪽
그대들에게 적이 있다면 그 악을 선으로 갚지는 마라. 그것은 적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적이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했음을 보여주어라 -127쪽
니체는 신을 부정하며 신을 죽였다. 중세 신중심의 암흑사회를 부정하고 근대 혹은 미래 사회의 창조적 인간! 초인을 예찬한다. 하나의 신을 창조할 수 없다면 모든 신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니체! 그러면서 그는 '하지만 그대들은 초인을 창조할 수 있다.'라며 우리를 격려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시기 마을의 한 할머니가 '예수의 종이되어 선교활동하라!'며 나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권유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난히도 그 말이 싫었다. '자유인인 내가 어찌 노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니체는 나와 같은 생각을 먼저했다. 신중심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노예로 사는 최후의 인간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항상 새로운 인간! 초인이 되어야한다.
신중심의 무지의 시대가 가고 이성이라는 등불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는 현대 사회이기에 신을 부정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 만약 중세 서양 사회에서 내가 '신의 종이되라'는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면 나는 '불놀이를, 화형의 장작 더미를' 좋아하는 크리스찬들에 의해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자신의 신만이 의롭다고 말하는 자, 단순하게 맹목적으로 신을 따르라는 노예 근성을 심어주는 자들은 '성스러운 단순함'으로 세상을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지옥으로 만든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를 구세주라고 믿으며 크리스트교를 정립한자들이 이 망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크리스트교로부터 구원할 것을 니체는 주문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십자군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희생했는가! 크리스트교의 배타성과 폭력성, 야만성을 비판하며 니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물속에 뛰어든다해도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며 반문한다. 마녀사냥, 이단 화형, 종교박해에 맞선 순교 등, 이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니체는 '내게 구역질을 일으킨다.'라고 일갈했다.
니체는 마태복음 5장에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구절을 더 탁월한 문구를 비판한다. 니체에게는 크리스찬들이 오른뺨을 맞고도 왼뺨을 들이대는 행동은 위선적인 행동이거나 무기력한 노예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니체는 '전혀 복수하지 않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복수하는것이 더 인간적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적이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했음을 보여주'는 행동일 것이다.
니체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목사이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프란치스카 윌러도 목사의 딸이다.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에서 크리스트교를 맹렬히 비판하는 니체가 만들어졌다. 니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안티크리스찬일까?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일까?
2. 크리스트교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다.
니체는 자신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제5복음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분명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는 '나는 이러한 약속의 땅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모든 나무 중에서 가장 나쁜 나무, 곧 십자가가 자라났기 때문이다.'(365쪽)라는 반기독교적인 내용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가득차 있다. '안티크리스트' 혹은 '적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책까지 저술한 니체가 자신의 책을 크리스트교의 4복음서에 이은 제5복음서라고 말하는 자체가 모순으로 들릴 수 있다.
니체와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한국의 철학자가 있다. 바로 도올 김용옥이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자 철학자로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대중강연에서 한국의 기독교를 많이 비판한다. 그의 실날한 비판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눈쌀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도올 김용옥의 삶과 그의 강의를 통해서 니체의 사상을 유추해 보았다.
도올 김용옥의 대중강연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2,3'에는 크리스트교에 대한 도올의 생각이 잘 묻어 있다. 도올은 불교가 상좌부불교(소승불교)에서 모든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의 위대성은 대승불교에서 신의 반열에 올린 부처를 스스로 부정하는 단계로 까지 발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가 중국땅에 이르자 선불교로 발전한다. 임제스님은 '살불살조(殺佛殺祖)'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부처의 종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 누구나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는 다른 불교의 위대성을 보여준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통해서 이루려한 최종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니체는 크리스트교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크리스트교의 뿌리를 살폈다. 니체가 주목한 크리스트교의 뿌리는 옹졸한 민족종교인 유대교가 아니라 유대교와 크리스트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에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발음이 차라투스트라인점에 유의한다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빌려 크리스찬들에게 크리스트교를 새롭게 선불교의 단계로 발전시켜야한다는 계시를 주려했다는 주장이 이해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을 내려오면서 늙은 성자를 보며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라고 한탄한다. 성자는 신을 사랑하지만 시대는 변하여 중세 신중심의 낡은 시대에서 이성 중심의 근대가 되었다. 더 이상 인간은 신의 노예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신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야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속세를 떠나서 깨달음을 얻기 보다는 세속에 살면서 깨달음을 얻어야한다.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진리는 진정한 진리라할 수 없다. 니체는 늙은 성자 처럼 현실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는 크리스찬들에게 신은 죽었다며 현실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절대신을 믿는 크리스찬들에게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크리스트교를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곳곳에서 '~파멸해야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파멸', '몰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니체! 그러나 '파멸'과 '몰락'을 니체는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동양 사상에서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이라는 관점을 떠올린다면 '파멸'과 '몰락'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인도 힌두교의 시바신이 세상을 파괴해야 브라흐만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듯이, 기존의 체계를 파괴해야만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신의 노예로 살 것을 강요하는 크리스트교도들이 신은 죽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받아들일 때만이 크리스트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선불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만 자신이 부처요 조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니체는 크리스트교가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이제는 선불교의 단계로 발전해야한다고 일갈하는듯하다.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 믿는 크리스찬들이 선불교로까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신을 죽여야한다는 것이다.
그럼, 신이 죽은 그자리에 누가 있어야할까? 신을 죽인 인간이 이제는 새로운 신을 그 자리에 앉혀야할까? 니체는 '초인'을 말하다. 내가 이해한 초인은,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자, 자신을 거듭나게하는 자이다. 고사성어로 표현하면,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의 노예로 사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새롭게 태어나려 끊임 없이 노력하는자! 그 사람이 '초인'이라면 이는 불교의 부처나 보살로 볼 수 있다. '그대들은 모든 구세주보다 더 위대한 자들에 의해 구원받아야한다.'(-170쪽) 는 니체의 말은 구세주에 의탁해서 구원을 받기 보다는 스스로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려는 초인이 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부처가 되라는 말과 같다.
고귀한자는 새로운 것과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한다. 반면에 선한자는 옛것을 원하며 옛것이 보존되기를 원한다.-79쪽
고귀한자는 예수를 비롯해서 석가모니와 무하마드와 같은 분들이다. 그에 비해서 선한자는 중세 교황과 타락한 성직자들 처럼 고귀한자의 힘을 빌어 권력을 누리고 그 권력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니체가 한명의 진정한 크리스찬이 있었으나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말했듯이, 진정한 크리스찬은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고귀한자의 힘을 빌려 권력을 누리려는 '선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크리스트교를 타락시켰다. 니체는 인간 권력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이를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진정한 크리스찬이 되려면 예수의 추종자가 되지 말고 예수처럼 삶을 살아가라는 절규이다.
니체의 사상은 불교와 너무도 유사한 점이 많다. 그의 말들과 논리들은 불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그의 핵심 사상인 영원회귀 사상 또한 불교의 윤회와 비슷하다. 니체는 말한다. 만약 악령이 어느 날 당신에게 다가와서 네가 살고 있고 살아왔던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고 제안한다면 과연 당신을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영원히 반복될 수 있는 삶이라는 문구에 윤회의 수레바퀴가 떠오른다. 물론, 니체의 영원회귀가 윤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가설로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도 좋을 만큼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라는 니체의 제안일 뿐이다. '프레임'을 쓴, 최인철 교수가 현재를 잘 살아가고 싶다면 지금 이 삶이 2번째로 주어진 삶이라고 생각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제안했다. 니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 삶이 몇만년을 다시 반복해서 살아도 좋을 만큼 현재를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하있다.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말하고 있다 .
니체의 사상이 불교에서 많은 힌트 혹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니체가 모든 불교를 긍정한 것은 아니다. 81쪽에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니체는 '노란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노란 사람들은 노란 가사를 입은 승려를 뜻한다. '병자나 노인이나 시체와 마주치면 그들은 즉시 '삶은 부정되었다.'라고 말한다.'라고 지적하며 자신이 죽음을 설교하는자들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불교도들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육욕은 죄다.', '삶은 고통일 뿐이다.'라고 지적하며 불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니체의 모습이 무척 낯설어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찬이 예수이듯이, 진정한 불교도는 부처일 수 밖에 없다. 기존 종교조직에 의탁해서 그 권위로 먹고 살려하며, 그 종교의 노예로 살려는 사람들을 니체는 비판한다.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려한다면 스스로 예수가 되려해야하며, 스스로 부처가 되려해야한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초인'인 것이다.
크리스트교도인들의 숫자가 시간이 지날 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예견된 것이다. 더 이상 신의 종이되기를 원하는 자가 줄어들고 있다. 스스로 초인이되려는 자가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크리스트교가 다시 태어나려면 니체의 말에 귀기울여야할 것이다.
3. 초인을 꿈꾸다.
'비밀로 가득찬 숨은 신이있다. 참으로 그는 아들에게 올 때 조차 샛길로 왔다. 그리하여 그의 신앙의 문에는 간음이란 것이 있게된 것이다.'(146쪽)라며 니체는 노골적으로 크리스트교를 비판한다. 신은 죽었으며, 신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초인이 되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그렇다면 초인이 되려면 어찌해야할까? 초인은 어떠한 존재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평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평등의 설교자'를 격멸하며 그들을 치명적인 독이 있는 타란툴라와 같은 존재로 보았다.
설령 내가 자신의 오류를 밟고 걸어 다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들은 감히 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233쪽
시장에서는 아무도 우월한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거기서 말하고 싶은가. 좋다! 하지만 천민은 눈을 깜박이며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라고.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신 앞에서라고!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었다. -502~505쪽
만인이 법앞에 평등하다면, 법질서가 붕괴된 사회에서는 평등은 사라진다. 만인이 신앞에 평등하다면 신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평등도 사라진다. 우월한 인간과 천민 사이에 구분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고위 공직자가 법위에 군림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신은 사라졌다. 우리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 인간들 사이에서 지적 수준과 판단력, 정의감이 평등하지 않다.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수준 이하의 후보에게 투표한 자가 있지 않은가! 인간이 평등하지 않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화를 쓰고 있지 않은가!
니체는 인간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 인간의 맨 아래에는 천민이 자리하고 있다. '권력의 천민, 문필의 천민, 그리고 쾌락의 천민들과 함께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179쪽)'라고 외치며 천민을 경멸한다. 니체가 말한 천민이 우리사회에서도 널려 있지 않은가? 권력에 아부하며 국민을 속이는 언론의 천민, 검찰의 천민, 돈의 천민, 무속의 천민 ... 삶을 주인으로 살기 보다는 권력과 돈, 탐욕을 위해서 노예로 살기를 즐거워하는자들이 바로 천민인 것이다. 그러한 천민을 니체는 경멸하고 있다.
천민 위에는 누가 있을까? '우월한 인간'이 있다. 그러나 우월한 인간은 천민으로 언제나 떨어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신을 만들어내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에 재미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1부~3부가 차라투스트라의 경구(잠언)들로 역여있다면, 4부는 소설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두명의 왕, 일자리 잃은 교황, 사악한 마술사,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인자, 늙은 예언자, 정신의 양심을 지닌자, 더없이 추착한자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영토인 동굴에 모여 만찬을 즐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우월한 인간이라 부르며 자신의 동굴로 인도했으나, 그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없는 사이에 나귀를 신으로 만들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분노했다. 그리고 사자의 울부짖음이 들리자 순식간에 그들은 사라졌다.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이다. .... 우월한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 좋다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라고 되뇌이며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보며 동굴을 떠났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동굴로 초대했던 우월한 인간은 초인이 되지 못하고 천민의 나락으로 떨어진 겁쟁이들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그들에 대한 연민을 거둬들인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니체가 말한 우월한 인간이다. 언제나 진실을 보았으나, 그 진실을 잊어 버리고 다시 타락의 길에 빠져든다. 박근혜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그녀의 무능력함과 탐욕스러움에 분노하여 많은 우월한 인간이 탄핵의 촛불을 들었다. 그런데, 5년 후에 다시 최악의 선택을 했다. 그러하기에 니체는 이러한 우월한 인간에 대한 동정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인간은 무엇일까? 바로 '초인'이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가지 변신을 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낙타 - 사자 - 아이' 이다. 낙타는 짐을 잔득 실고 사막을 횡단한다. 주인의 말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이러한 존재는 천민이나 중세 시대 신의 노예와 비슷한 존재들이다. 종처럼 주인의 말에 순종할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한다. 낙타의 상태에서 깨어나서 사자가 된자는 용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한 이빨과 발톱으로 주장한다. 그렇다고 사자가 초인인 것은 아니다. 사자는 아이가 되어야한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 강한 사자가 부드러운 아이가 되어야 '자신의 세계를 얻'을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가 되어야 초인이 될 수 있다. 민주화 운동가를 만나본 사람들은 '평소에 이렇게 조용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자가 어떻게 서슬퍼런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의 요구를 강하게 주장하는 투사가 되었는가?'라며 의아해한다. 진정한 초인은 아이의 부드러움과 아이의 가능성과 창조성을 품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한 '초인'을 보다 자세히 탐구해보자. 니체가 칭찬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초인의 모습일 것이다. 니체가 이상으로 여긴 인간상을 추적해보자.
이제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146쪽
언제나 학생으로 머물러 있는자는 선생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내게서 월계관을 잡아채려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나를 숭배한다. 어느날 그 숭배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입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146쪽
삶은 언제나 자신을 거듭해서 극복해야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덜거덕거리는 표지가 되어야한다. -185쪽
초인은 거급해서 극복해야하는 그 무엇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자, 보다 새로운 자가 되려고 끊임 없이 노력하는 자이다. 임제스님의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사자후 처럼, 스승을 넘어선 존재가 되기 위해서 끊임 없이 노력하는 자이다. 스승의 제자로만 남아있으려는 자는 영원히 스승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자는 사이비교의 신도로 전락할 우려가 많은 노예이다.
니체는 용기를 예찬한다. 용기는 초인이 갖추어야할 기본중에 기본이다.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야말로. 모든 공격 속에는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승리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283쪽
용기는 죽음 조차 죽인다.-284쪽
뱀이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간 그 양치기는 누구인가? ...어쨌든 양치기는 내가 고함을 쳐 말한 대로 물어뜯었다. 제대로 물어뜯었다! 뱀 대가리를 저 멀리 뱉어버렸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섰다. 더는 양치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변화한 자, 빛에 둘러싸인자로서 그는 웃고 있었다. -288쪽
뱀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뱀의 대가리를 물어 뜯는 용기를 가진자를 니체는 예찬했다. 더러움에 맞서 싸우는 용기는 니체의 말대로 '죽음 조차 죽인다.' 어떠한 두려움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자가 초인이다. 용기 있는 초인은 타인이 만든 선과 악의 구분도 붕괴 시킨다.
선과 악에서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우선 파괴자가 되어 가치를 파괴해야한다. 이렇게 하여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 그러나 최고의 선은 창조적인 선이다. -213쪽
굶주리고 난폭해지고 고독해지고 신을 믿지 않는자. 사자가의 의지는 스스로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노예의 행복에서 해방되고, 신들의 경배에서 구제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남을 두렵게하고, 위대하면서 고독해지는 것. 진실된자들의 의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189~190쪽
선이 악이되는 시대! 악이 선이되는 시대! 선과 악의 개념 자체가 그 시대 지배이데올로기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다산(多産)이 무지한 국민들의 모습이었던 것이, 지금 다산은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무엇이 변하였는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변했을 뿐이다. 변한 것은 없다. 초인은 선과 악을 창조적으로 파괴한다. 누군가에 의해서 주입된 선악이 아니라, 자신이 선악을 새롭게 규정한다. 그러하기에 신에 의지해 살기 보다는 사자처럼 당당하게 살아간다. 신의 노예이기 보다는 고독한 초인의 길을 선택하길 니체는 염원한다.
그렇다면 초인의 뒷모습은 어떠할까?
인간들 사이에서 배고픔과 갈증으로 죽고 싶지 않은자는 어떠한 잔으로든 마실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깨끗하게 남아 있고자하는 자는 더러운 물로도 씻을 줄 알아야한다.-262쪽
권력이 자비를 베풀고 눈에 보이는 세계로 내려올 때, 나는 그러한 하강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217쪽
나는 삶을 완성하는 죽음. 산자에게 가시가 되고 굳은 맹세가 될 죽음을 그대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삶을 완성하는 자는 희망에 차 있는 자들과 맹세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승리에 찬 죽음을 맞는다. ... 나는 그대들에게 나의 죽음을 권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134~135쪽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자 한다면 어떠한 잔도 가려서는 안되며, 깨끗하게 살기 위기 위해서는 어떠한 물로도 씻을 줄 알아야한다. 정치를 하려면 구정물에 손을 담글 각오를 해야하는 것처럼! 초인은 눈앞에 더러움을 피하려 대의를 망각하지 않는다. 권력을 쥐고 나서는 칼을 쥔 망나니 처럼 폭주하지 않는다. 자비를 베풀고 서민들 사이로 내려올 때 우리는 그러한 지도자를 사랑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러했던 것 처럼! 죽음을 대할 때도 초인은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본다. 마치 이순신 장군 처럼 죽음에 임해서도 당당하며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승리에 찬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임진왜란도 끝났다. 그렇게 초인은 떠나가는 뒷모습도 아름답다.
인간이라고 모두 같은 인간이 아니다. 삶이라고 모두 같은 삶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초인과 같은 고귀한 삶을 살고자한다면 지금 당장! 끊임 없이 새롭게 거듭나려 노력해야한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만이 '더는 천상의 모래밭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머리를 처들'(56쪽~57쪽)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중학생에 다닐때, 천원짜리 '작은 책'이 있었다. 천원으로 유명한 책들을 살 수 있었다. 그때 산책중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도 있었다. 재미있는 소설책으로 알고 샀던 그 책은 너무도 어려웠다. 서문과 니체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는 책장을 덮어 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은 대단한 학생이라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다. 다시 한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도전장을 던졌다. 쉽지 않은 독서의 시간이었다. 문장이 이해되지 않아서 같은 문장을 몇번씩이나 반복해서 읽기도 했으며, 한쳅터를 읽고 나서는 전혀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서 다시 한번 읽은 쳅터도 너무도 많았다. 그렇게 힘들게 읽으면서 뿌듯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그렇게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이해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도 발견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74쪽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물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한다. -20쪽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삶에 익숙해지기 보다는 사랑에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랑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바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독일어 경구들로 이루어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생각날때 마다 펼쳐 읽으며 가슴속에 담을 문장을 찾아야겠다. 그러면 그 문장은 나의 가슴에 별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