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 대한제국 외교관에서 러시아 혁명군 장교까지, 잊혀진 영웅 이위종 열사를 찾아서
이승우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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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러시아어와 영어,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세계 시민, 이위종이 있었다. 그가 원했다면, 그는 자신의 재능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편안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활약한 3인의 특사 중에는 25세의 이위종이 있었다.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 러시아어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 시민들에게 알렸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조국을 위해서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거기까지였다. 이위종이 불현듯, 러시아로 가는 바람에 특사들의 입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위종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져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우라는 재야사학자는 4년여 동안의 끈질긴 탐구를 통해서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을 다시 복원해냈다.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이라는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그의 삶을 살펴보자. 


 우선, 이위종이 고종의 특사로 활동하다가 갑자기 러시아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아내 엘리자베타의 와병 소식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아내를 보살펴야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왜? 이때 아팟을까?라는 원망도 있었지만, 어쩌랴! 가장 소중한 아내인 것을..... 

  이위종은 다시 헤이그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을 근거로 미국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했다. 거중조정! 타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중재해주기로 약속했던 이 조항을 미국은 사뿐히 즈려밟고 갔다. 어떤 학자들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것은 "무모한 시도"라며 실패한 투쟁으로 보려는 자가 많다. 그러나 "적어도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가했던 국가들은 대한제국을 전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실패한 투쟁으로 볼 수 많은 없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계란이 깨진다할지라도, 적어도 바위는 계란 자국으로 올룩진다. 체면을 구긴 바위에게 계란의 투쟁은 의미없는 투쟁일 수 없다. '논어'에는 공자를 '안되는줄 알면서도 하려는 사람'이라 세상 사람들은 평했다고 쓰여있다. 안되는줄 알면서도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면 그길로 나아가야한다. 이위종은 그러한 사람이다. 아니, 우리의 독립운동가들 모두가 그러한 사람들이다. 

  이 책에는 이위종의 삶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위종의 삶과 함께 녹아들어 있다. 그중에서 나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째, 1908년 국내 진공작전의 좌영장을 맡은 엄인섭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안중근 의사와 함게 손가락을 자르며 조국독립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맹세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1911년 이후 밀정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동지의 뒤통수에 비수를 꽃았다. 

  두번째는 지금의 명동성당인 종현성당의 토지분쟁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서 600명의 신민회 회원들이 고통을 받아야했다는 사실이다. 안명근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빌렘신부는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서울에 있는 뮈텔 대주교에게 알렸다. 뮈텔 대주교는 아카시 모토지로에게 고발하였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600명의 신민회 회원이 일제에게 잡혀와서 105명이 구속되었다. 이중에는 백범 김구도 있었다. 결국, 뮈텔 대주교는 종현 성당 토지 분쟁 소송을 해결할 수 있었다. 1911년 1월 13일 영하 21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카시 모토지로는 뮈텔을 찾아왔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자신의 이름과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군의 이름으로 다시 감사하려 왔다." 뮈텔 대주교의 일기에 적혀있는 친일의 기록을 읽으며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명동성당에 이러한 친일의 역사가 새겨져있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면 우리 마음은 언제나 쓸쓸해진다.'라는 노암 촘스키의 말이 생각난다. 가장 믿어 의심치 않았던 독립운동의 영웅과 종교적 스승들에게 배신의 칼날을 받고 쓰러져가야했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영혼은 얼마나 슬펐을까?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특사 활동 이후 이위종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에는  그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져있다. 

  이위종의 삶은 그의 아버지 이범진의 행동으로 무거운 짊을 질머져야했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1911년 이범진의 자결은 이위종에게 조국 독립을 위해서 인생을 바치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의 울분을 참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일부 사람들은 의미 없는 죽음이라 폄하하기도한다. 과연, 그분들의 죽음이 헛된 것일까? 물론, 살아서 한명의 친일파, 한명의 일제의 앞잡이를 죽인다면 더 뜻 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의 자결로 모든 불명예가 자신들에게 돌아왔다고 생각했다."라는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의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범진의 죽음은 이위종의 삶을 독립 운동이라는 길로 빠져들게했다. 

  이위종은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 된다. 러시아를 움직여 조국을 되찾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는 달리,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부전선에 투입된다. 1차 세계대전은 우리 역사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 조선인 이위종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에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화를 통해서 잘알려져 있지만, 1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 이위종이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 역사가 얼마나 파란만장한지를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위종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 군대의 장교가 된다. 이때 시베리아의 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연해주의 의병들을 하나로 규합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행방불명된다. 그래서 이위종의 죽음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졌다. 아카시 모토지로의 덧에 걸린 이위종은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조국 광복의 선봉장이 될 찰라에 생을 마감한다. 너무도 가슴이 아파왔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이 부분을 다르게 해석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다는 말이 된다.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했지 않은가! 혹시, 시베리아의 별이라며 명성이 자자한 이위종이 연해주의 의병을 하나로 모은 군대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면 소련의 입장에서도 경계 대상이었을 수도있다. 이위종 실종의 진실을 밝히려면, 일제뿐만 아니라 소련의 자료도 면밀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어디까지 나의 상상력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일제의 특무대가 이위종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가장 큰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 비숍은 연해주 지역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묘사하면서 "이곳의 조선인이 부유하게 된 것은 조선에서 처럼 민중의 피를 빠는 '면허 받은 흡혈귀' 같은 양반이나 관리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지적했다. 게으르고 지저분한 조선인이 '면허 받은 흡혈귀'가 없는 세상에서는 가장 근면하고 부유한 삶을 살아갔다. 거꾸로 말하자면, '면허 받은 흡혈귀'들에 의해서 조선의 발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면허 받은 흡혈귀' 중에서 상당수는 나라를 빼앗기자 일제에 빌붙어 동포의 피를 빨기 시작했다. 일제와 일제에 빌붙은 '면허 받은 흡혈귀'에 맞서서 조국 광복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른 이위종과 같은 별들이 있었다. 광복이 된 지금, 우리는 조국을 팔아버린 '면허 받은 흡혈귀'들이 다시 활개치도록 방조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고 싶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면허 받은 흡혈귀'를 감시하고, 조국을 위한 별이 되려할 때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선생은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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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얻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임정재 옮김 / 타커스(끌레마)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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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얻는 지혜'는 무엇일까? 좋은 인간관계를 위한 지혜를 얻고 싶은 마음에 책을 꺼내들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예수회 신부란다. 1601년 태어난 그의 저서가 4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읽히고 있다고하니, 한번 읽어 볼만한 책이라는 생각이든다. 그럼, 한번 책을 살펴보자.

 

 

1. 유가보다는 도가에 가까운 발타자르 그라시안

 

'사람을 얻는 지혜'를 읽다보면 유가와 도가를 비롯해서 동양의 사상가들이 전했던 인생의 지혜와 흡사한 것들이 많았다. 동양과 서양의 지혜가 서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기도했다. 그러면서도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동양의 어느 사상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만약 당신에게 악의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악의를 가진 사람에게 오히려 호의를 베풀어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라!'(17)고 말한다. 당신은 나에게 악의를 가진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것인가? 동양의 철학자 공자와 노자가 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우선, 노자의 말을 살펴보자. 도덕경63恩始章(은시장)하는 것이 없음을 실천하고, 일이 없음을 일삼으며, 맛이 없음을 맛보고, 작은 것을 크게 여기며 많은 것은 적게 여기니, 원수를 덕으로 갚는다(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라고 하였다. '원수를 덕으로 갚는다.'는 보원이덕(報怨以德)이라는 말이 놀랍도록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말과 일치한다.

반면, 공자는 논어헌문편에서 어떤 사람이 "은덕으로 원수에 보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그렇게 한다면 무엇으로 은덕에 보답하겠느냐? 정직함(곧음)으로 원수에 보답하고 은덕으로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다."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라고 말하였다. 나는 공자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에게 호의를 베품면, 그들은 오히려 그 사람을 이용한다. '어금니 아빠' 사건과 '가평 계곡 살인 사건'의 경우 타인의 동정과 호의를 범죄에 이용한 대표적 사건이다.

이밖에도 도덕경에서 보았던 글귀와 유사한 문장이 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양보는 뜻을 이루는 최고의 위장술이다.(22)""먼저 베풀고 보상은 나중에 받아라."(27)의 표현도 도덕경의 표현과 유사하다. 도덕경74장에 "남들로부터 존경 받으려거든 먼저 그들을 존중하라"는 문장이 있다. 물건을 움켜쥐려면 먼저 손을 펴야한다. 상대를 쓰러뜨리려면 먼저 상대를 일으켜세워야한다. 상대에게 얻으려면 먼저 상대에게 베풀어야한다. 노자와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생각은 놀랍도록 맞닿아있다. "나중에 베풀면 대가가 되지만 먼저 베풀면 호의가 된다."라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지혜는 약한듯 보이지만, 강함을 숨기고 있는 노자 철학을 보는듯하다.

오랫 동안 예수회 신부로 활동한 발타자르 그라시안이기에 현실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세상을 바라본 지혜가 노자의 철학과 통한 비결이 아닐까?

 

2. 한비자의 지혜를 품은 발타자르 그라시안

도덕경에 대해서 최초로 주석을 달았던 사람이 바로 한비자이다. 그래서인지,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말은 한비자의 말과 유사한 점이 있다.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마라."(20)는 표현도 한비자가 군주가 신하를 대할 때 지켜야할 유의사항 중 하나로 제시했다. 군주는 신하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이지 말아야한다. 신하가 군주의 마음을 알게 되면 이를 이용하여 아첨하며 군주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군주는 신하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신하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의 지혜를 이용해야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도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용기를 절대 전부 드러내지 않는다."(51)고 말했다.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할 때, 타인은 우리를 더욱 존경하게 한다. 한비자가 군주에게 했던 당부를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우리에게 하고 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이러한 말도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진실의 날카로움은 유지하되 부드럽게 전달함으로써 상대방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128) 타인에게 직언을 하기가 얼마나 힘든가! 한비자는 '세난편'에서 진실로 군주에게 간하기가 어려운 현실을 토로했다. 한비자도 진시황제와 대화를 나눈 이후에 죽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군주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나누는 모험이다. 그러하기에 한비자에는 군주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가 서술되어 있고, 지혜롭게 자신의 의견을 군주에게 제시한 사례가 적혀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날카로움은 유지하되 부드럽게 전달"하라는 대화의 기술을 한비자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원칙을 아는 것과 이를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인가보다. 자동차의 운행원리를 아는 것과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 맞닿아있으면서도 같은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는 상대를 설득시킬때,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공감을 한 후에 자신의 말을 하라한다. 이것이 '날카로움'을 유지하면서 '부드럽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지혜가 아닐까?

 

3. 발타자르 그라시안! 동의할 수 없어요.

'신독'이라는 표현이 있다. 중학교 도덕시간에 혼자 방안에 있으면서도 사거리에 있는 것 처럼 조심히 행동하라는 교과서 내용을 배웠다. 마치 살얼음을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가라는 '신독'을 당연시 배웠는데, 국어선생님은 그렇게 살면 정신병에 걸린다고 말씀하셨다. 발타자르 그라시안도 비슷한 말을 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몸가짐을 조심하라."(65) 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표현을 읽으며, 이렇게까지 살아야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 시절, 국어선생님의 표현대로 이렇게 살면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된다. 이렇게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의 주장을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라"(152), "언제나 최선의 결정을 내려라(192)"는 표현은 좋은 표현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지,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비결은 무엇인지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누구인들 본질를 파악하고 싶지 않을까? 누구인들 최선의 결정을 내리려하지 않을까?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누구나 원하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그 목표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표현중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표현도 있다. "운의 흐름을 읽어라"(161)는 표현은 요행수를 추구하는 듯한 표현이라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도 이 표현은 거부감이 덜했다. 그러나, "지는 해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마라"라는 명제를 제시한 다음, "미인은 늙어서 추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적절한 시기에 거울을 깨뜨린다."라는 설명을 한 것은 너무도 황당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나이듦이 곧 추해지는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일까? 거울을 깨뜨리면 더 이상 '추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철학자 강신주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대중강연에서 '나이듦은 익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이듦을 거부하고 주름살을 추함으로 인식하지 않고, 인생의 지혜가 익어감으로 파악한 강신주와 나이듦을 추함으로 인식하고 이를 거부하려 거울을 깨뜨리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어리석음이 너무도 대비를 이룬다. 우리는 곱게 나이드는 지혜를 얻어야한다. 인생의 무상함을 거부하며 영생을 누리려하다가 오히려 일찍 죽음을 맞이한 시황제를 보면서 우리는 인생의 지혜를 얻어야할 것이다.

이밖에도 "백번 성공하는 것보다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138), " 실패의 책임을 다른 이에게 넘기는 것도 능력이다."(230)는 표현도 절대 공감할 수 없다. 실패가 없이 어찌 성공하길 바라겠는가! 아이가 넘어지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는가! 실패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비열함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다. 탁월한 철학자의 말이라도 버려야할 것과 취해야할 것이 있다.

 

4.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말 중에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지혜가 담긴말도 많다. 이를 살펴보자.

첫째, "신을 신성한 존재로 만드는 사람은 신상을 장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다."(15)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말이 옳다면, 인간에 대한 권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에게 권위가 있는 것을 그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대표로 인정할 수 없는 존재에게 풍자를 던진다면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 권위를 가질 수없다. 그가 그 자리에 있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존중하며 그의 권위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

둘째, "원칙을 지키는 사람과 어울려라"(110) 한국에서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을 융통성이 없다고 비난한다. 가장 부패한 후보가 당선되는 초유의 사태도 종종 일어 난다. 우리 사회의 탐욕이 얼마나 흘러넘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에 많은 사람들이 망연자실한다. 이러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칙을 지키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인격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려야한다. 근묵자흑이라했던가! 세상이 혼탁할 수록 원칙을 지키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자!

셋째, "사악한 고집쟁이는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130) 사악한자가 더 권세를 누리고, 세상이 사악한자에 빌붙어 탐욕을 채우려하고 있다. 겉으로는 고고한척하면서도 탐욕스러운 사람에게 투표하며 자신의 탐욕을 대리충족시키고 있다. 사악한 고집쟁이에게 진실을 말하려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탐욕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며 당당히 외치기까지 했다. 이제는 사악한 고집쟁이를 피하고 싶다.

넷째, "부당한 상황에서도 화를 낼줄 모르면 무능한 사람이되고 만다."(208)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며 조금만 참으면 편한데 왜? 오지랖 넓게 나서냐고 말한다. 정의로운 사람이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는 현실을 바라보며 탄식이 나온다. 우리가 부당함을 당하면서도 이를 참고 편히 살아갈 수록, 그들은 우리를 개, 돼지로 취급한다. 참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때로는 진정한 분노가 덕()이다.

 

 

책은 거울이다. 자신의 고민을 가지고 책을 읽으며, 책속에 고민이 떠오르고 해답도 떠오른다. 요즘처럼 답답한 시기가 또 있을까? "자기 혼자만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미치는 것이 낫다."(112)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되게하려 노력하는 공자처럼 오늘을 바꾸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의 벽을 바라보며 답답한 마음을 끌어 안고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야하는 우리 소시민이기에 한권의 책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 책속에서 우리의 답답함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엄청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책속에서는 우리의 답답함에 한줄기 위안은 발견할 수 있다. 긴한숨을 쉬며 오늘도 새로운 한페이지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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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5-07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강나루 2022-05-07 21: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이하라 2022-05-07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강나루 2022-05-07 21: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5-07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되시길 기원합니다!

강나루 2022-05-07 21:3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러블리땡 2022-05-08 0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강나루 2022-05-08 18: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편안한밤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5-08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의 리뷰를 읽으며, 발타자르 그라시안에게서 마키아벨리적인 성향도 느끼게 됩니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가 여러모로 비교되기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예수회 신부출신인 그라시안에게서 바티칸의 금서로까지 여겨지는 마키아벨리의 면모가 느껴지는 것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강나루 2022-05-10 05:00   좋아요 2 | URL
그렇네요
동양철학자와 비교하려 했는데 마키아벨리와 비교하니 비슷한점이 많네요

scott 2022-05-09 16: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 축하합니다!
오월 행복한 일만 가득 ^ㅅ^

강나루 2022-05-10 04: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5-10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05-10 10: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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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 사색을 비롯해서, 신영복 선생이 쓰신 강의와 담론을 읽었다. 깊은 사색과 철학적 사유가 그리워 다시 신영복 선생의 '나무야 나무야'를 펼쳐 들었다. 얇고 그림도 많아서 부담 없이 펼쳐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전공이 역사고, 하는 일이 역사를 기르치는 일이라서 신영복 선생의 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일을 지나칠 수 없는 직업병이 도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거나, 소품이 시대와 맞지 않으면 그것이 거슬려서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러한 모습은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문 역사가가 아닌 신영복 선생의 글 속에서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 설명을 찾아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마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피라미드의 건설이 정치가 아니라, 피라미드의 해체가 정치라는 당신의 글귀"라는 문장이다. 많은 치적을 쌓기 위해서 무수한 인명을 해치고 백성을 괴롭혀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신영복 선생은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라미드의 건설이 정치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피라미드를 신영복 선생은 노예가 건설했다고 믿는다.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농민들이 농한기를 이용해서 건설했다. 건설의 댓가로 빵과 맥주를 받았다. 농민들로서는 농한기에 일자리와 먹을 것을 얻은 셈이다. 일종의 뉴딜정책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피라미드의 건설은 정치일 수 있다. '억강부약(抑强扶弱)'이 정치라면, 농민들에게 일자리와 먹을 것을 주는 피라미드 건설은 좋은 정치이다. 피라미드 건설이 정치이기에 이집트 문명이 그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

둘째, "'동의보감'의 찬술 자체가 허준의 기획이었고, 허준의 집필"이라는 문장이 나의 마음에 거슬렀다. 홀로 서는 나무는 없다. 나무가 더불어 숲을 이룰 때 나무는 나무로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허준이라는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동의보감'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 속에서 백성이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한 의서가 필요했다는 시대적 필요성에 동의한 수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허준과 같은 수 많은 나무들이 '동의보감' 저술에 참여했다. 소설 '동의보감'에서 허준을 괴롭혔던 양혜수도 그중 한사람이다. 내의원 의원들이 참여하다가 허준이 이를 유배지에서 완성한다. '동의보감' 저술을 허락한 선조와 완성된 '동의보감'을 출판할 수 있도록 명한 광해군도 그러한 나무 중에 하나이다.

신영복 선생은 허준을 가르쳐준 스승이 유의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설명이다. 물론, 허준이라는 나무가 홀로 태어날 수 없기에 유의태와 같은 스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준의 스승이 유의태는 아니다. 유의태는 허준이 태어난지 200년 이후의 인물이다. 시신을 해부했다는 설화도 허준 덕분에 의술의 혜택을 받게 된 민중들이 그 고마움을 갚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잡과라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추천에 의해서 내의원에 들어간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설은 소설일뿐 역사일 수 없다.

셋째, "하곡이 정작 자르고 왔던 것은 당시 만연했던 이기론에 관한 공소한 논쟁"이라는 표현이다. 하곡 정재두가 강화도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기론 논쟁이 싫어서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하곡 정재두가 겉으로는 성리학자인 것 처럼 살았지만, 병이 들어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하자, 자신이 양명학자임을 밝혔다. 일종에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부담을 벗었기 때문일까? 하곡 정재두는 죽지 않고 병석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어쩌랴, 자신이 양명학자임을 밝혔으니, 주위의 성리학자들에게 배척을 당할 수 밖에....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던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양명학자임을 스스로 밝힌 그는 옥사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강화도로 찾아들었다. 신영복 선생의 표현이 진실일 수도 있으나, 나의 얇팍한 지식이 공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한다. 아는 것이 병이란다.

넷째, "황소가 당나라의 학정에 견디지 못하여 궐기한 농민장수인 한"이라는 문장이 눈에 거슬린다. 황소는 학정에 견디지 못해서 궐기한 농민 장수가 아니다. 그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다가 낙방하고는 반정부세력이된다. 이후, 소금 밀매업으로 큰 돈을 벌었던 황소는 소금 밀매업자는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당나라의 형벌에 불만을 갖게 된다. 소금밀매업자 왕선지가 난을 일으키자 그도 난을 일으킨다. 민란이 일어나면 무조건 농민이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것도 역사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상상으로 학습하는 자의 어리석음이다. 민란의 참여자 대다수가 농민일지라도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은 일자무식의 농민이 민란의 주도자가 될 수는 없다. 조직을 이끌려면 이론과 실제 두가지를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황소는 과거시험을 준비했을 정도로 머리에 학식이 있었으며, 소금밀매업을 통해서 조직을 움직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했기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할 수 있었다. 실사구시라는 말을 자주한다. 실제 역사가 그러한지 찾아본 이후에, 올바름을 탐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좌석을 구하려 분주히 버스를 헤매던 40대 여성이 드디어 자리를 차지했으나, 자리를 차지한 그때야 비로소 목적지를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일화를 읽으며, ‘우리 삶도 이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성공을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리다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그 무엇을 놓치고 말았음을 뒤늦게 깨닫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 내일을 위해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나는 오늘의 소중함을 잃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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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 석필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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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책을 소설책 처럼 쓸 수 있는자! 이덕일!!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한편의 소설책을 읽고 있는듯하다. 딱딱한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서술하는 그의 탁월한 글재주는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 그의 초기 작품을 읽어보고 싶던 차에, 올해 처음으로 도서관 업무를 맡게되었다. 폐기해야할 도서를 골라내던 중에 이덕일의 책을 발견했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표지 책날개에 있는 이덕일의 사진은 무척 애떼보였다. 이덕일 초기의 역사관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기에 책을 펼쳐들었다. 


1. 이덕일의 역사관의 변천을 살피다. 

  이덕일이 수많은 책을 썼다. 특히 조선시대를 소재로한 많은 역사책을 썼다. 그가 어떠한 책을 서술할지 그 맹아를 알 수 있는 책이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다. 이 책에는 윤휴에 대한 언급부터, 송시열, 정조 등등. 이덕일이 이 책을 서술한 이후에 저술하게될 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에 대한 평가가 이미 이책을 쓸때부터 확립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있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사람의 역사관은 바뀌기 마련이다. 이덕일은 이 책에서는 비교적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히 역사를 서술하려 노력했다. 이후 보이는 노론에 대한 맹렬한 비판보다는 소론과 남인에 대한 비판을 같이하면서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 노력했다. 


  "실제로 남인들이 서인들과 다른점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당쟁을 파국으로 이끌어간 세력은 이들 남인이었다."-261쪽


  이덕일이 남인을 이렇게 맹렬히 비판하니,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이덕일은 노론의 잔당들이 나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인의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리고 윤휴를 비롯한 인물들을 역사 서술의 소재로 사용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그런데, 그의 역사서술 초기에는 남인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덕일의 역사관이 확연히 변한 흥미로운 주제가 있다. 바로 북벌이다. 


"승승장구하는 청나라에 맞서 북벌을 단행하여 망한 명나라를 다시 세워줄 힘이 조선에 있을 수가 없었다. 명나라를 다시 세워줄 힘이 있으면 조선이나 다시 세우는데 써야했다."-236쪽


 이덕일은 '윤휴'에 관한 책을 쓰면서 서인들이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할 것 처럼 생각한다며 그들을 맹렬히 비판했다. 삼번의 난을 이용해서 조선이 같이 청을 공격한다면 북벌이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고 이덕일은 기대를 갖았다. 그런데,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에서는 '명나라를 다시 세워줄 힘이 있으면 조선이나 다시 세우는데 써야'한다며 북벌의 허구성을 맹렬히 지적한다. 사람이 나이를 들면, 보수적이면서 진취성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이덕일은 오히려 진취성이 더욱 강해졌다. 

  북벌에 대한 생각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천했다면, 혜경궁에 대한 이해는 심화되었다.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롯해서 이덕일의 책에서 '한중록'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 혜경궁이 자신의 가문을 복권시키기 위해서 쓴것이 한중록이며, 그녀는 남편보다는 당파를 선택한 냉혹한 여인이라 이덕일은 평가했다. 그런데, '한중록'에 대한 심도있는 사료비판을 찾아볼 수 없어서 이덕일의 주장에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에는 한중록에 대한 명밀한 사료비판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정조가 혜경궁의 집안을 멸문지화 시킬수밖에 없는 이유와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음에도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이를 부인한 점을 지적하는 이덕일의 날카로움이 빛났다. 탁월한 이덕일의 사료분석과 그의 혜안에 감탄하며, 한편으로는 남편보다 당파를 선택한 그녀의 냉혹함에 몸서리가 쳐온다. 

  이밖에도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이 책에서는 긍정하고 있으나, 이후의 저술에서는 서인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로 규정한다. 크고 작은 역사관의 변천을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어 읽은 내내 즐거웠다. 


2. 날카로운 이덕일의 역사 논평

  이덕일의 책이 여타 작가와 다른 점은 그의 날카로운 역사 논평이 살아있다는 점이다. 이덕일의 시퍼렇게 날이 서있는 역사 논평을 살펴보자.

  일명 기레기 신문에서 자주 사용하는 양비론을 이덕일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양비론에는 정치 자체를 둘다 나쁜 세력끼리의 싸움으로 격하함으로써 특정한 정치적 이득을 얻고자하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45쪽


 "둘다 나쁘다"라는 정치 혐오를 불러 일으키는 세력은 이 사회를 퇴보시키려는 수구세력이다. 그들은 정치 혐오증을 불러일으켜, 대중이 정치에 관심 없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나라를 망쳐도 대중 잠자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쟁 자체가 없으면 이익을 보는 세력"은 누구이겠는가? 바로 수구세력이다. 우리는 현실이 괴로울 수록 옥석을 가리며 정치에 관심을 갖아야한다. 정치에 관심이 없어지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민중이다. 

  안빈낙도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이덕일은 송순의 '명앙정가'를 소개하며 조선시대 양반들의 위선을 매섭게 지적한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간 달한 간에 청풍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447쪽


  어떠한가? 안빈낙도를 즐기는 조선 선비의 모습이 떠오르는가? 나도 그러했다. 그런데, 이덕일의 설명을 듣고는 조선 시대 양반 사대부의 위선이 떠오르게 되었다. 송순의 분재기를 보면 장녀에게만 노비 41명과 전답 1백 53두락을 주었다. 장녀에게 이정도 주었으니, 8명의 자손들에게 준것 까지 생각하면 송순은 대지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재산 규모가 "나 한 간달 한 간 청풍 한 간"에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는 읊조림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는 데 있다."-448쪽


  공상적 안빈낙도와 세속적 현실이 송순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불편함 없이 동거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청빈함을 노래하지만, 그들은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갔다. 조선시대 공상적 안빈낙도를 노래하는 양반들에게서 현실에서도 안빈낙도를 즐기리라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해본다. 이덕일의 혜안에 다시금 감탄한다. 



  오랜만에 이덕일의 책을 읽어 내려갔다. 조선시대 당쟁을 서술한 역사책을 읽어내려가다보면, 오늘의 정치를 나도모르게 떠올린다. 율곡 이이가 수미법을 주장했다. 그런데, 율곡의 학맥을 이었다고 자칭하는 서인들은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는 김육을 비난한다. 현실의 이익 앞에서 자신의 학맥에 배치되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집값을 하향 안정화하겠다는 여당 후보의 말을 싫어하며, 집값이 뛰어 올라 부동산투기로 한몫 벌어보려는 우리 이웃의 탐욕이 떠오른다. 영조에게 노론 대신이 양반에게도 포를 걷으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협박성 말을 들으면서, 집값이 올라 부동산 세금이 늘었다며 보수당에 투표하는 동료를 떠올렸다. 가진자가 더 많이 갖기를 바라며, 대의 보다는 사익을 앞세우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붕당정치가 자당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민생도 군주도 안하무인으로 대하는 파국으로 치달았듯이, 지금 당장 나의 집값을 올리는데 이익을 준다면 매국노에게도 투표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진 어리석은자들이 출현하지는 않을지 진지하게 걱정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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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2-04-17 2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우리안의 식민사관 읽고있는중인데 이덕일 책이야기가 나와서.

음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이덕일을 첨접했어서 잘팔리는 글 쓰는 작가인가 하며 긴가민가 그랬던적이 있었거든요. 잘 몰라서. (김진명 책 읽다 뒷통수 맞은기억도 있고해서)
근데 또 생각해보면 작가의 역사책으로 좀더 역사에 관심갖는 계기가 돼서 이후 좀 편하게 생각하고 읽게됐어요.

강나루 2022-04-17 21:01   좋아요 1 | URL
이덕일을 기존 강단사학자들은 유사사학자라면 비판하지요.
저의 입장에서는 이덕일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상당히 공감가는 주장이 많아요. 특히 독립운동사와 조선시대에 관한 주장은 이덕일의 주장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어요.
singri님, 즐거운 독서하세요^^

2022-04-18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22-04-18 03:58   좋아요 1 | URL
네 이덕일의 모든 주정이 맘에 들 수는 없지요.
좋은 저작들을 골라 봐야죠.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
 
쟁점 한국사 : 전근대편 쟁점 한국사
한명기 외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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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선생님들이 역사교에게 하는 말이 있다. '역사과목은 한번 교재연구하면 다시 교재연구를 하지 않아도 되니 좋겠다.! 역사가 바뀔리 없으니 말이야'라는 말을 부러운듯 말한다. 그 선생님 주변에는 게으른 역사교사밖에 없던가, 아니면 역사도 바뀐다는 사실을 모르는 우둔한 교사일 것이다. 역사도 바뀐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국사'라는 과목과 현직에 발령받고 가르치기 시작한 '국사'과목,그리고 지금 가르치고 있는 '한국사'과목의 내용이 다르다. 교과서가 바뀌었는데, 교재연구를 하지 않고 수업에 들어가면,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임용고사를 준비할때는 분명,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6천년경 부터 시작되었다고 공부했다. 그런데, 임용을 받고 난 후 받아든 교과서에서는 나의 지식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교육과정이 바뀐 새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8천년경으로 변경되어있었다. 신석기 시대의 시작연대는 교과서가 바뀌면서 순식간에 2천년이나 수직상승했다. 쟁점한국사는 바로 그러한 책이었다. 


  송호정 교수의 '우리 고대사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와 강종훈 교수의 '신라의 여왕 출현, 어떻게 가능했나'라는 글의 내용은 이미 오래전서부터 알고 있는 내용이라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채웅석 박사의 문벌 사회의 빛과 그림자'라는 글은 이번에 새로 바뀐 한국사 교과서를 접해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보길 추천한다. 새 교과서에서는 고려시대의 지배층을 더 이상 '문벌 귀족'이라 지칭하지 않는다. 고려 사회에 대해서는 '관료제설'과 '귀족제설'이 대립하고 있었다. 한치의 양보도없이 치열하게 서로를 공격하며, 상대방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눈길도 마주치려하지 않는다고 지적던 고려시대사 전공 교수님의 강의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고려시대의 치열한 쟁점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교과서에 '문벌 귀족'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문벌'이라는 단어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과거제가 엄존했던 고려시대를 '문벌 귀족' 사회로 보는 것은 분명한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고려시대를 관료제 사회로 보기에는 공음전과 음서제의 힘이 너무도 강력해다. 양극단의 시각을 제거하면 '문벌'이라는 단어가 합리적으로 다가온다. 앞세대의 치열한 논쟁이 사라지고 이제 후학들이 새로운 학설로 새롭게 교과서를 서술했다. 

  이러한 시각은 도현철 박사의 '원 간섭기를 어떻게 볼것인가.'라는 글에서도 묻어난다. 최씨정권이 몽골과 항쟁하기 위해서 강화도로 천도했고, 수전에 약한 몽골군은 강화도 점령을 포기하고 내륙을 휩쓸고 돌아갔다. 라는 서술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도현철은 그것이 허구임을 지적한다. 몽골군은 다국적군이기에 강화도를 점령하려 마음먹었다면, 충분히 점령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강화도로 답사를 갔을 때, 동양사 전공 교수님도 지적했었다. 교수님은 한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의 시각이 너무도 협소하다고 일갈했다.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하게 투영되다보니, 우리의 시각에서 역사를 논할 뿐, 몽골의 입장을 고려한 객관적인 연구가 되지 못했다. 도현철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원 간섭기의 고려왕들은 유난히도 함량미달의 군주가 많았다. 아들과 권력투쟁을 하는가하면, 닥치는데로 성폭행을 하다가 원에 끌려가 비참하게 죽은 왕까지.... 고려의 왕에게 유교를 통해서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하려고 고려 유학자들은 노력했다. "국가 개조와 유교적 문명사회 건설"이라는 목표 속에서 고려의 유학자들은 몽골지배기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반면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민족의 자주성이라는 명제 속에서 역사를 바라보면서 원 간섭기를 암흑의 시대로 보았다. 역사를 어느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원간섭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그렇다고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글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임기환의 '연개소문과 김춘추, 국운을 바꾼 선택'과 이정철의 '조선 정치의 저력, 당쟁과 대동법'이 바로 그러한 글이다. 

  임기환은 '연개소문과 김춘추, 국운을 바꾼 선택'이라는 글에서 연개소문을 비판하고 당태종을 두둔한다. 우선 연개소문을 비판하면서 연개소문이 자주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가 대당강경책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나라로부터 도교를 받아들이는등 화평정책을 쓴 점을 지적하며, 연개소문이 자주적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없음을 지적한다. 이부분은 읽는 순간, 나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쿠데타를 일으킨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바로 대외적인 강경책을 실시할 수는 없다. 내부의 체제정비를 끝낸 후에야 비로서 대외적인 강경책을 추진할 수 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국제정치 속에서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전술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여 상대방을 비판하는 근거로 삼은 임기환의 논리가 너무도 초라해보인다. 

  임기환의 논리는 당태종을 두둔하는 부분에서 최고조의 웃음을 선사한다. 당태종은 스스로를 중원과 막북의 유일한 지배자인 황제 천가한이라고 칭했고, "그는 만백성 위에 중화적법과 질서를 구현하는 자신의 치세에 왕을 죽이고 권력을 독단하는 연개소문 같은 대역죄인이 있음을 용납할 수 없었다."라며 당태종의 입장을 변호한다. 순간, 임기환의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햇갈렸다. 당태종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해서 황제자리를 빼앗은 인물이 아닌가! 패륜을 저지른자가 연개소문을 '대역죄인'이라고 말할 자격이있을까? 우리속담에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말이 있다. 당태종은 '똥묻은 개'가 아닌가! 그런데, 한국의 유명대학 교수인 임기환은 연개소문을 꾸짖고 당태종의 입장을 변호한다. 우리 학계에 국적이 의심스러운자가 있다는 이덕일의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정철의 '조선 정치의 저력, 당쟁과 대동법'도 나를 실망시켰다. 이정철은 대동법 시행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하면서,양반 지주의 저항 때문에  대동법 실시가 늦어진 것이 아니고 주장한다. "조선시대에는 사회적 발언권이 재산과 비례하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당시 공동체의 공공선을 대표하는 이는 지주가 아니라 사림이었다. 대동법 성립의 가장 큰 반대세력 또한 그들이었다."라고 지적한다. 이정철은 양반 지주와 사림이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런데, 묻고 싶다. 양반 지주와 사림이 별개인가? 조선시대에 글공부를 하려면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한다. 또한, 중소지주층이 자식을 공부시켜 과거에 합격시키면 그들은 출세하며, 조선후기에 그들은 사림이된다. 양반 지주와 사림은 완전히 동일체가 될수는 없어도, 상당부분이 중첩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이정철은 분리하기 힘든 양반 지주와 사림을 분리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밀려온다. 

  이번 대선을 떠올려보자. 보수당이 승리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강력한 것은 집값때문이다. 내 주변에 어느 분은 자신은 아무일도 하지 않았는데 집값이 올라 세금을 내야했다며, 여당 후보를 "양아치"라고 말했다. 또 어떤 집없는 사람은 자신도 내집을 마련해서 집값이 올라가길 바라는데, 이재명은 "안정 하향"을 시키겠다고 한다며 그를 싫어했다. 집값이 우상향하기를 바라는 가진자와 가진자의 마음을 가진 못가진자의 합작품이 바로 지금의 대선결과이다. 그렇다. 대동법은 대단한 개혁임에는 틀림없다. 사림의 도덕적인 담론도 그들의 경제적 욕구를 무시하고 말할 수 없다. 조선시대 근엄한 성리학이 자리잡은 시대로 알지만, 엄연히 춘화가 유행했던 사회이다. 근엄함 속에 숨겨진 욕망을 무시하고 역사를 바로 볼 수 없다. 이정철은 이를 놓쳐버렸다. 


역사는 시대에 따라 다시 쓰여진다. 쌍둥이 사이에도 세대차를 느끼는 시대이다. 오늘 내가 바라본 역사가 내일도 같으리라 보장할 수 없듯이, 오늘 읽은 '쟁점 한국사-전근대편'이 절대적인 진리일 수 없다. 오늘을 바로 보기 위해서 어제의 역사를 바로보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설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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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03-20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중간에 끊겼습니다..

강나루 2022-03-20 21:27   좋아요 0 | URL
중간에 날라가서 다시 썼어요.

singri 2022-03-20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찜하고 오니 리뷰가 있어서 깜짝 놀랐네요. 이런 자세한 설명을 듣는 역사시간. 👍 잘 읽고갑니다.


강나루 2022-03-21 04: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