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 대한제국 외교관에서 러시아 혁명군 장교까지, 잊혀진 영웅 이위종 열사를 찾아서
이승우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러시아어와 영어,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세계 시민, 이위종이 있었다. 그가 원했다면, 그는 자신의 재능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편안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활약한 3인의 특사 중에는 25세의 이위종이 있었다.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 러시아어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 시민들에게 알렸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조국을 위해서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거기까지였다. 이위종이 불현듯, 러시아로 가는 바람에 특사들의 입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위종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져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우라는 재야사학자는 4년여 동안의 끈질긴 탐구를 통해서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을 다시 복원해냈다.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이라는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그의 삶을 살펴보자. 


 우선, 이위종이 고종의 특사로 활동하다가 갑자기 러시아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아내 엘리자베타의 와병 소식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아내를 보살펴야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왜? 이때 아팟을까?라는 원망도 있었지만, 어쩌랴! 가장 소중한 아내인 것을..... 

  이위종은 다시 헤이그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을 근거로 미국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했다. 거중조정! 타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중재해주기로 약속했던 이 조항을 미국은 사뿐히 즈려밟고 갔다. 어떤 학자들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것은 "무모한 시도"라며 실패한 투쟁으로 보려는 자가 많다. 그러나 "적어도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가했던 국가들은 대한제국을 전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실패한 투쟁으로 볼 수 많은 없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계란이 깨진다할지라도, 적어도 바위는 계란 자국으로 올룩진다. 체면을 구긴 바위에게 계란의 투쟁은 의미없는 투쟁일 수 없다. '논어'에는 공자를 '안되는줄 알면서도 하려는 사람'이라 세상 사람들은 평했다고 쓰여있다. 안되는줄 알면서도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면 그길로 나아가야한다. 이위종은 그러한 사람이다. 아니, 우리의 독립운동가들 모두가 그러한 사람들이다. 

  이 책에는 이위종의 삶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위종의 삶과 함께 녹아들어 있다. 그중에서 나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째, 1908년 국내 진공작전의 좌영장을 맡은 엄인섭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안중근 의사와 함게 손가락을 자르며 조국독립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맹세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1911년 이후 밀정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동지의 뒤통수에 비수를 꽃았다. 

  두번째는 지금의 명동성당인 종현성당의 토지분쟁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서 600명의 신민회 회원들이 고통을 받아야했다는 사실이다. 안명근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빌렘신부는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서울에 있는 뮈텔 대주교에게 알렸다. 뮈텔 대주교는 아카시 모토지로에게 고발하였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600명의 신민회 회원이 일제에게 잡혀와서 105명이 구속되었다. 이중에는 백범 김구도 있었다. 결국, 뮈텔 대주교는 종현 성당 토지 분쟁 소송을 해결할 수 있었다. 1911년 1월 13일 영하 21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카시 모토지로는 뮈텔을 찾아왔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자신의 이름과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군의 이름으로 다시 감사하려 왔다." 뮈텔 대주교의 일기에 적혀있는 친일의 기록을 읽으며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명동성당에 이러한 친일의 역사가 새겨져있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면 우리 마음은 언제나 쓸쓸해진다.'라는 노암 촘스키의 말이 생각난다. 가장 믿어 의심치 않았던 독립운동의 영웅과 종교적 스승들에게 배신의 칼날을 받고 쓰러져가야했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영혼은 얼마나 슬펐을까?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특사 활동 이후 이위종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에는  그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져있다. 

  이위종의 삶은 그의 아버지 이범진의 행동으로 무거운 짊을 질머져야했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1911년 이범진의 자결은 이위종에게 조국 독립을 위해서 인생을 바치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의 울분을 참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일부 사람들은 의미 없는 죽음이라 폄하하기도한다. 과연, 그분들의 죽음이 헛된 것일까? 물론, 살아서 한명의 친일파, 한명의 일제의 앞잡이를 죽인다면 더 뜻 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의 자결로 모든 불명예가 자신들에게 돌아왔다고 생각했다."라는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의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범진의 죽음은 이위종의 삶을 독립 운동이라는 길로 빠져들게했다. 

  이위종은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 된다. 러시아를 움직여 조국을 되찾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는 달리,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부전선에 투입된다. 1차 세계대전은 우리 역사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 조선인 이위종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에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화를 통해서 잘알려져 있지만, 1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 이위종이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 역사가 얼마나 파란만장한지를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위종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 군대의 장교가 된다. 이때 시베리아의 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연해주의 의병들을 하나로 규합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행방불명된다. 그래서 이위종의 죽음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졌다. 아카시 모토지로의 덧에 걸린 이위종은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조국 광복의 선봉장이 될 찰라에 생을 마감한다. 너무도 가슴이 아파왔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이 부분을 다르게 해석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다는 말이 된다.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했지 않은가! 혹시, 시베리아의 별이라며 명성이 자자한 이위종이 연해주의 의병을 하나로 모은 군대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면 소련의 입장에서도 경계 대상이었을 수도있다. 이위종 실종의 진실을 밝히려면, 일제뿐만 아니라 소련의 자료도 면밀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어디까지 나의 상상력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일제의 특무대가 이위종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가장 큰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 비숍은 연해주 지역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묘사하면서 "이곳의 조선인이 부유하게 된 것은 조선에서 처럼 민중의 피를 빠는 '면허 받은 흡혈귀' 같은 양반이나 관리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지적했다. 게으르고 지저분한 조선인이 '면허 받은 흡혈귀'가 없는 세상에서는 가장 근면하고 부유한 삶을 살아갔다. 거꾸로 말하자면, '면허 받은 흡혈귀'들에 의해서 조선의 발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면허 받은 흡혈귀' 중에서 상당수는 나라를 빼앗기자 일제에 빌붙어 동포의 피를 빨기 시작했다. 일제와 일제에 빌붙은 '면허 받은 흡혈귀'에 맞서서 조국 광복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른 이위종과 같은 별들이 있었다. 광복이 된 지금, 우리는 조국을 팔아버린 '면허 받은 흡혈귀'들이 다시 활개치도록 방조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고 싶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면허 받은 흡혈귀'를 감시하고, 조국을 위한 별이 되려할 때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선생은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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