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도 없는데, 늘 바쁘게 산다. 그러다 어디 야외라도 나가 탁 트인 정경을 보기라도 하면, '이렇게 여유있게 살아야 되는데 말이야', 라며 읊조리기 일쑤다. 언젠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펼쳐 들었다가 얼마 못가 접고 만 기억이 있는데, 오늘 <대학신문>을 뒤지다 이동진씨의 에세이를 보게 되었다. 나도 마음 한구석엔 늘 <스모크>의 오기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 같은, 느림의 여유를 실천하고 싶은데, 언제나 망상으로 그치고 만다.

아래는 시간에 대한 이동진의 글과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정선태의 글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느림'을 주제로 한 책은 정말 많이도 나온 것 같다. 쿤데라의 <느림>이 유행한 지가 아주 오래 전 같이 아득하다. (그런데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읽기 힘들었나 보다. 4권까지 나와 있는데, 1권과 4권의 판매지수 차이가 200:1이다..-.-)


경쟁의 주술에서 해방시키는 게으름뱅이의 성전(聖典)

시간』 , 칼하인츠 A.가이슬러 지음┃박계수 옮김┃석필┃1만 2천원SPAN>


독서 에세이 - 이동진 / 대학신문 2007년 09월 15일 (토)

 


예전에 독자가 직접 우편으로 보내온 긴 편지 속 한 구절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 좋은데, 당신의 글은 왜 그렇게 슬프고 비관적이냐”는 말이었다. 글쎄. 물론 그것은 나의 타고난 본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시간에 대한 태도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과거밖에 없다. 시간이란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인식될 때는 항상 과거라는 형식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각하기에 너무 짧은 현재는 찰나로 경험되는 순간 과거의 영겁 속으로 사라져버리며, 미래는 파편 같은 현재를 거쳐 과거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을 맺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그 현재라는 시간의 파편이 지니는 현기증 나는 스피드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현재를) 사는 법’이라니. 칼하인츠 가이슬러의 『시간』은, 이를테면 시간이 우리 곁을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시간 속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책이다. 현재에 집중하는 저자의 시간관에 온전히 동의하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의외로 깊이와 재미가 대단해 점차 책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이 책의 내용은 시간 그 자체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기보다는 어떻게 시간 속을 통과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경시론(經時論)에 가깝다. 일종의 문명 비판서이기도 하다. ‘리듬’과 ‘느림’으로부터 ‘기다림’ ‘휴가’ ‘걷는 시간’까지 모두 2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시간에 대한 동서고금의 갖가지 레퍼런스를 붙여가며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서술해나간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인용사례들과 지은이 자신의 시간관이 마치 대화를 나누듯 자연스럽게 리듬을 이루며 한데 엮였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 차용되는 인용구들을 읽는 재미도 상당한데, 토마스 만의 『마의 산』부터 괴테의 여행기와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 헝가리의 우화와 오스트리아의 격언,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 가사에까지 이르는 구절들은 그 인용의 적절함과 내용의 풍부한 함의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가이슬러는 심지어 하나의 장을 시(詩)로 맺는 서정성도 보여준다. 다음 문장은 이 책이 어떤 스타일의 책인지를 그대로 요약한다. “시간이라는 기차에서,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앉아서 성급한 진보에 몸을 내맡긴 많은 사람들은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바람이 얼굴에 심하게 부딪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창문을 연 채 갈 수가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고교 시절 접했던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란 책 내용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러시아의 한 과학자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는데, 그는 최대한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분 단위로 시간표를 짜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 책은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시간을 절약하며 자신을 채찍질했던 사람이었기에 그 과학자가 그토록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는데, 순진하게도, 당시의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의 박약한 의지를 한탄하며 열등감만 한껏 늘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가이슬러의 ‘시간’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간은 돈이다”처럼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자책하게 만드는 ‘나쁜 금언’들의 위력을 저주하면서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해독제 역할을 한다. 이 책은 피터 드러커의 “시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것들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다” 같은 발언의 강력한 자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게으름뱅이의 성전(聖典)’같은 책이니까. 시간은 다뤄야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대형서점에 가보면,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선 시(時)테크를 제대로 해야 뒤쳐지지 않을 수 있다고 외치는 수많은 허접스런 처세서적들 중에서, 의외로 ‘느림의 철학’을 말하는 책들이 종종 눈에 띈다. 한때 국내에서도 인기를 누렸던 베스트셀러 『느리게 산다는 것』이란 책부터, 『느림의 지혜』, 『현명한 부모는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같은 책, 독일 작가 나돌니의 80년대 히트작 『느림』까지 정말 많은 서적들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런 책들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우리가 아찔한 속도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 책인 『느리게 산다는 것』이 정말 슬렁슬렁 프랑스적으로 진행되는(저자도 필시 게으름뱅이임에 틀림없는, 동어반복적이라서 심하게 말하면 한 챕터만 읽어도 되는) 전형적 에세이 형식인 데 비해, 독일 책인 『시간』은 독일인이 지은 책답게 무척 조직적이고 체계적인(그래서 적어두고 싶은 구절도 많고, 다 읽고 나서도 괜히 뭔가 많이 남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저작이라는 점이다. 난 『느리게 산다는 것』은 중간쯤까지 보다가 책을 던져버렸지만, 『시간』은 단시간에 완독했다. 그렇다면 사실 나는 ‘느림의 철학’에 동조하는 척하면서도, 독서에 있어서, 나아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여전히 조바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과 속도, 그 너머의 삶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정선태, 「시간과 속도, 그 너머의 삶」, 『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2002)


강희안, 「高士觀水圖」


풀과 나무가 드리워진 절벽 아래, 바위 위에 엎드린 채 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한가롭다거나 여유롭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은, 차라리 눈을 뜨고 꿈을 꾸는 듯한 모습. 그는 어디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한바탕 집중호우가 지나가고 난 오후, 다리를 꼬고 누워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저토록 ‘무심하게’ 무엇을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고,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을 본 적이 있기나 했던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또는 무엇이 그 한없는 게으름을 방해라도 했단 말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그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자본의 충직한 노예가 되기를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얘기한 것은 맑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였다. 그런데 그 아픈 충고를 들을 때조차도 우리는 가슴에 품은 휴대폰이 더욱 강렬하게 구속해 주기를 초조하게 바라지는 않았던가. 지독한 매저키스트! 그런 마당에 「고사관수도」라니.

한치의 에누리 없이 분절된 시간과 세밀하게 구획된 공간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모세혈관은 싱싱한 피로 숨쉬기를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폐로 정확하게 환산되는 시간의 채찍에 쫓겨 헐떡거리며 살아왔고 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여유롭게 그리고 느릿느릿 사는 것이야말로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명을 다시금 약동하게 하는 원천이다. 그런데 게으름과 느림은 이 현란한 자본의 제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격언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피에를 쌍소는 힘주어 말한다. 게으름과 느림은 이 황금의 성전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파기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대담한 도발이다.

하기야 러셀이 게으름을 드높이 찬양한 적이 있고, 밀란 쿤데라가 『느림』의 복권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이들에 비해 느림에 대한 쌍소의 견해는 훨씬 구체적이다.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기, ‘고급스러운’ 권태에 빠져보기, 꿈꾸기, 진득하니 기다리기, 낡은 시간 떠올리기, 술 한 잔의 지혜….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우리의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빈 칸을 채우면서 본다면 그다지 가벼운 것만도 아니다.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사람은 생명의 왕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폭군이자 독재자이다. 또는 삶의 또 다른 일부인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바보거나 천치다. 최고의 스피드야말로 최상의 미덕이라는 음험한 자본의 논리, 그 가증할 수사 전략을 간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이보그와 인간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말초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 삶이 원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전략의 이면을 투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무뎌진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때 필요한 무기가 느림이다. 물론 느림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느림과 빠름의 역동적 교직, 그리하여 드러나는 삶의 무늬, 이를 두고 ‘아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상투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해보자. “느림의 미학 또는 느림의 철학을 내면화함으로써 삶의 견인력을 확보할 것, ‘빨리빨리’라는 자본의 주문을 끊어버릴 것, 그리하여 황폐해진 나의 삶을 복원할 것!”

느림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삶의 조건이자 우리의 삶을 노예화하는 자본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거점이다. 곧 거부를 통해 해방을 꿈꾸는 사람은 느리게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왜?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쌍소의 말이다. 나른한 몽상과 한가로운 산책은 상상력을 뿜어내는 셈이다. 그 샘물을 길어올려 들이킬 때 속도에 지친 우리의 생명은 다시금 약동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다시금 「고사관수도」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나란히 놓고 그 사이에서 출렁이는 생명의 ‘힘’을 호흡할 일이다.

목차

001. 머리말...9
제1장..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19
1.. 한가로이 거닐기...41
2.. 듣기...53
3.. 고급스러운 권태...65
4.. 꿈꾸기...77
5.. 기다리기...85
6.. 내 마음의 시골 고향...97
7.. 글쓰기...107
8.. 포도주 한 잔의 지혜...117
9.. 모데라토 칸타빌레...129
제2장.. 리듬의 교체(막간의 시간)...139
제3장.. 과정. 유토피아와 충고...139
1.. 문화적 흥분...163
2.. 뒤늦은 도시 계획을 위해...179
3.. 분주하지 말기...201
4..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211
5.. 하루의 탄생...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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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The People United Will Never Be Defeated: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하지 않는다!)


'Konzert Fur Chile'(1998)

1973년 9월 11일, 이날은  칠레인민 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 전 인민들에게도 비극적인 날이었다. 칠레 최초로 합법적인 선거에 의해 당선되었던 Salvador Allende 의 사회주의 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로 무너진 것이다. 이후 벌어졌던 칠레의 현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칠레의 상징적인 저항 시인 Victor Jara는 체포되어 손가락이 부러지고 손목이 잘린 채 기관총에 난사 당해 죽음을 맞이했고, 칠레 음악 문화 운동의 대표적인 그룹이었던 인티 이이마니(Inti-Illimani)와 낄라파윤(Quilapayun)은 해외 망명길에 오른다.

그리고 1974년 5월 31일, 독일 에센에서 칠레의 상황을 알리는 콘서트가 열린다. 위의 두 그룹 뿐 아니라 빅토르 하라(Victor Jara)의 음악적 스승이었던 비올레타 파라(Violetta Para)의 딸 이사벨 파라(Isabel Parra), 파트리시오 가스티요(Patricio Castillo), 독일 록그룹 Floh De Cologne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 콘서트 공연실황을 담은 이 앨범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하라의 녹음된 음성과 함께, 'El Pueblo Unido : 하나된 민중', 'Plegaria a un labrador : 한 노동자를 위한 기도', 'Venceremos : 우리 승리하리라' 등 저항을 상징하는 명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실린 19곡 가운데 유일하게 첫번째 트랙만 빅토르 하라의 녹음된 음성이고 나머지는 모두 공연 실황이다.

이 앨범에서도 드러나지만, 다른 곡들에 비해 빅토로 하라의 음성은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그의 삶의 색채에 비해 한없이 부드럽고 유연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중현, 한대수, 양희은의 틈바구니 속에서 김민기의 음성을 듣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 앨범에 나오는 곡 가운데 3곡을 링크시킨다. 첫번재 자동으로 플레이되는 곡은 두 망명 그룹 Inti-Iiimani 와 Quilapayun이 부르는 'El Pueblo Unido : 하나된 인민', 두번째 곡은 Quilapayun이 부르는 'Plegaria A Un Labrador : 노동자에게 바치는 기도'다. 원래 이 곡 'Plegaria A Un Labrador'는 Victor Jara가 1969년 제1회 누에바 깐시온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부른 우승곡이다. 세번째 곡은 빅토르 하라의 시에 Claudio Iturra가 가사를 붙이고 클래식 작곡가인 Sergio Ortega가 곡을 붙인 대표적인 운동권 노래 'Venceremos : 우리는 승리하리라'를 참가자 전원이 부른다.


Plegaria A Un Labrador : 노동자에게 바치는 기도

일어서서 태양과 바람과 물의 원천인 산을 보아라
강줄기를 바꾸는 네 영혼의 씨를 뿌려라
일어서서 네 형제에게 내밀 수 있는 너의 손을 보아라
우리는 피로 맺고 함께 갈 것이다
오늘이 그날이다
우리는 미래를 만들 수 있다
비참한 우리는 주인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정의와 평등의 나라가 다가온다
산길의 야생화를 흔드는 바람처럼 불어야 한다
불 같이 나의 총을 치워야 한다
우리에게 투쟁을 위한 용기와 힘을 준 대지 위에 마침내 이뤄질 것이다


Venceremos : 우리는 승리하리라


조국의 깊은 시련으로부터
민중의 외침이 일어나네
이미 새로운 여명이 밝아와
모든 칠레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네
불멸케 하는 모범을 보여준
한 용맹한 군인을 기억하며
우리는 죽음에 맞서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
농부들, 군인들, 광부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여성과
학생, 노동자들이여
우리는 반드시 이룩할 것이다
영광의 땅에 씨를 뿌리자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린다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파시즘의 비극을 이겨내리라


El Pueblo Unido : 하나된 인민

A hope has crushed
A future fell in ruins
You think you had victory
But beaten men
Will rise again
We know
That night turns into day
Defeat turns into victory
A united people
Can't be trampled down
The masters must retreat
Because nothing can
Withstand our unity
So answer, you masters
Who ploughs your land
Who brings up the copper
From the mountains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희망이 파괴되고
미래는 좌절되고
당신은 당신이 승리했다 생각하지만
그러나 좌절한 사람들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안다
밤이 낮으로 변한다는 것을
패배가 승리로 바뀐다는 것을
단결한 민중은
짓밟힐 수 없다는 것을.
지배자들은 반드시 물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우리의 단결에 견뎌낼 수 없기에.
그러니 답하라, 당신 지배자여
누가 당신의 땅을 경작하는가
누가 광산에서 구리를
캐내는가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El Pueblo Unido : 단결된 인민은 패배하지 않는다
Inti-Illimani / Quilapayun

[Konzert Fur Chile] - (1974/1998, Plane)



Plegaris A Un Labrador (Live) : 노동자를 위한 기도 - Quilapayun

[Konzert Fur Chile] - (1974/1998, Plane)



Verceremos (Live) : 우리는 승리하리라 - Alle Kunstler

[Konzert Fur Chile] - (1974/1998, P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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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 "엥똘레랑스에 대하여"에서 인용한 글의 출처부터 밝히자면, 아래에 전문인용을 해둔 대로 <한겨레21>이다. 보시다시피 **가 인용한 부분은 박노자의 칼럼 중 일정 부분을 따온 것이다. 뭐, 전체적인 논지를 이해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단지 내가 이런 형태로 정식 글을 쓰게 된 것은 **가 그 글의 모두에 쓴 다음의 문장 때문이다.

"글 내용도 나의 습자지만한 지식을 바로잡아 주는 내용이었던지라"

여기서 바로잡아 주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그 짧은 글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박노자의 컬럼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홍세화가 프랑스적 관용으로 언급한 똘레랑스는 서로 동일선 상에서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게 들어 있기에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똘레랑스(Tolerance)'의 출발은 앙리4세의 '낭뜨 칙령'에서 유래되는데, 가톨릭만 허용하던 프랑스가 프로테스탄트도 종교로 허용하면서 쓴 말이라고 한다. 여기서 유추되듯이 똘레랑스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이다.

"당신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

이러한 똘레랑스의 정치적 의미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총선에서 극우파 르펜의 부상에 프랑스나 독일이 한 목소리로 우려를 표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를 실천-대표적으로 이민자 추방-으로 옮기는 극우파를 경계하는 목소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똘레랑스가 무조건적인 관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똘레랑스를 단순하게 우리말의 '관용'이나 '자선', '너그로움' 등과 동일시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차이'를 모르면서 무슨 시혜나 베풀듯이 던져주는 적선하는 행위는 아니라는 점.

그러나 박노자가 말하는 '똘레랑스'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자기들 동일성 내에서 통용되던 '편협한' 똘레랑스를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첫째는 '백인-남성'이라는 동일성내에서 통용되던 자기들만의 똘레랑스에 대한 비판이고, 둘째는 '똘레랑스'의 외연을 전통적인 의미에서 통용되는 것보다 확장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경제적 토대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통용되는 '똘레랑스'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이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박노자의 글을 읽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홍세화가 말했던 프랑스적 똘레랑스는 전혀 이상한 것이 되고 마는 셈이지. 하지만 나도 물론 박노자의 견해에 동의하기는 하지. 맞는 말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 아니겠나.

(p.s.)그리고 논술이 단순한 '스킬'이 아님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고... 공부 좀 제대로 하고 가르치셔. 나 같으면, 그렇게 인용되어 나오면 출처가 어디고 전문 인용인지 축약 인용인지 확인하고 가르치겠다. 아,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톨레랑스, 유럽의 새빨간 거짓말

전후 장기 호황기에 사회적 가치로 받아들였으나 70년대 이후 무슬림 차별 심해져…‘똘레랑스의 꽃’ 노르웨이에서도 가혹한 배제의 매카니즘이 지배하는 건 마찬가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 <한겨레21> 제587호 2005년11월30일


‘유럽적 톨레랑스’와 같은 표현은 필자의 귀에 거슬린다. 세계의 주요 문명권 중 17~18세기까지만 해도 후진이었던 유럽에서 톨레랑스가 가장 부족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유대인들은 신분적인 불평등은 따르더라도 박해받는 일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이슬람 신도들과 공존은 주변부의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20세기까지 상상할 수 없었고 유대인들은 박해와 멸시 속에 떨면서 살았다.

조선 후기의 천주교 개종자들이 노비를 해방시켜 신앙적 동지로 만들고 백정들과 같이 기도하는 등 해방적 색채를 띠었지만 이것은 ‘유럽 종교의 덕’이 아니라 신분제도의 철폐가 과제였던 시대의 특수성으로 인한 일이었다. 같은 시기에 백인 천주교 성직자들은 중남미에서 흑인·인디언의 노예노동을 긍정하고 신분적 경계선들을 신성시했다. 60년 전까지 유럽 사회는 톨레랑스를 가치로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타 지역보다 훨씬 더 잔혹한 인종·종교·문화적 배제·차별의 메커니즘을 개발·가동했다.

경계선 바깥의 단기계약 노예들



△ 저숙련 노동시장에서마저 쫓겨난 이슬람 출신 이민자들은 학력 축적을 통한 신분 상승도 어렵다. 청소 용역일을 하고 있는 유럽의 한 이주 노동자. (사진/ EPA)

계몽주의의 보편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톨레랑스가 사회적 가치로 받아들여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데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다. 파시즘의 광기에 반발하는 측면도 있었고 노동계급의 꾸준한 투쟁도 성과를 거뒀지만 무엇보다 1945~73년 전례 없던 장기 호황기의 분위기에서 지배자들이 각종 소수자들을 ‘다원적 시민사회’ 영역으로 끌어들여 포섭하려 한 것이다. 호황의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파트너’로 삼아 잉여가치의 일부분을 나눠줄 여유도 있었고 끊임없이 새 노동력이 필요했다.

현재 유럽연합 총인구의 약 5.5%에 이르는 이슬람계 인구는 그때 알제리 출신들의 프랑스 이민, 모로코 출신들의 네덜란드 이민, 터키 출신들의 독일 이민 등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제가 잘 돌아가던 당시의 유럽에서는 노동력에 대한 갈증이 심해서 1960년대 말의 독일의 경우 해마다 난민 신청자의 85%에게 체류 허가를 내주는 것이 보통 일이었다. 난민에게 비교적으로 덜 잔혹한 노르웨이에서마저 80%의 신청자가 퇴짜를 맞는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신화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그때가 바로 ‘톨레랑스의 황금기’였는데 그때라 해도 국가적 이해관계가 걸리는 문제에서는 하등의 톨레랑스도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알제리의 독립전쟁 시절(1954~62)에 공산당을 제외한 프랑스의 일체 주요 정치세력들은 처음부터 탄압을 위한 무력 사용에 동의했고, 공산당마저도 사르트르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실망하는 가운데 적극적 반전운동을 펼치지 않았다.

그런데 유럽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1970년대 오일쇼크와 성장률·이윤율 둔화, 1970~80년대 탈산업화 시작과 1990년대부터 제조업의 동유럽, 중국 등지로 본격적 이전 등으로 미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감됐고, 1990년대 이후 동유럽 등지의 ‘문화·인종적으로 동질적’ 노동의 단기적 수입·이용의 가능성으로 인해 주로 미숙련·준숙련인 이슬람 계통의 이민자들은 일감을 놓치게 되었다. 피부색이 달라도 유럽 여권을 가지고 유럽 현지 수준의 월급을 요구하고 노조에까지 가입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아프리카·중동 출신을 쓰느니 차라리 우크라이나 출신을 6개월간 들여와 한 달에 700~800달러만 주고 실컷 부려먹은 뒤에 보내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현대판 ‘경계선 바깥의 단기 계약의 노예’들이 도저히 맡을 수 없는 일부 분야(택시업 등)를 빼고 저숙련 노동시장에서 구축을 당한 이슬람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길은 학력 축적을 통한 신분 상승인데 가족의 문화 자본(공부를 장려하는 고학력 집안의 분위기 등)이 빈약한데다 ‘주류’ 사회에서 인종주의가 내면화돼 있는 상황이라 그것도 어려웠다.

백인 청소부를 본 적이 없다네

프랑스 대졸자 중에서 이슬람 계통들의 실업률이 유럽인 토박이보다 3배 이상 높다는 것은 과연 본인들이 못나서인가? 인종차별 방지법이 있어도 유럽 고용주들이 성명란에 ‘아흐마드’나 ‘모하메드’라고 적혀 있는 이력서를 맨 뒤로 밀어놓는 일은 몸에 밴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이용 가치를 상실해 게토에 몰려 사회복지망에 의존해서 살게 된 이슬람 계통 빈민 이민자들에게 정치적 이용 가치가 붙어버렸다. 덴마크·네덜란드 등지의 극우 정권들은 반이슬람 광풍을 이용해 집권했고 이민자 청년들을 ‘쓰레기 인간’으로 명명해 구설수에 오른 프랑스의 내무부 장관 사르코지도 같은 전략을 구사해 대통령직을 노리고 있다. 톨레랑스는 빈 명분이 됐고 앵톨레랑스(불관용)야말로 정치판에서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그러면 ‘톨레랑스의 꽃’으로 불리는 북유럽 노르웨이의 상황은 어떤가? 복지정책이 프랑스보다 포괄적이고, 학교에서 이슬람 여성들이 즐겨 입는 차도르(너울)를 금지해 이슬람 계통 이민자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프랑스와는 달리 다문화 정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고 전체적인 실업률이 프랑스보다 거의 3배 낮기에 이민자 청년 폭동이 아직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차별과 배제의 장치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된다. 전체 노르웨이 인구 가운데 실업자가 보통 3~4%밖에 안 되는데, 이민자의 실업률이 9~10%이고 그중에서도 아프리카 계통 이민자의 실업률은 거의 15~17%다. 그럼 실업을 면한 이민자가 잡을 수 있는 직장은 어떤 것일까? 오슬로 주민의 약 25%가 주로 이슬람 계통에 속하는 이민자나 그 후손이지만 오슬로대학교에서 이슬람권 출신 이민자나 그 후손이 교수가 되는 경우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다.


△ 게이트 구르메 노동자들의 시위, 회사가 이민자 여성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자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사진/ EPA)



그 대신 필자가 오슬로대에서 재직하고 있는 5년여 동안 노르웨이 토박이나 백인 이민자가 대학교에서 청소부 일을 맡은 것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여태까지 본 청소부들은 다 피부색이 짙은 이민자였고 그중 대부분은 이슬람권 출신이었다. 이민자들과 그 후손이 가방끈이 짧아서 그런 것일까? 물론 학력 격차도 크지만 이민자들의 학력을 노르웨이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킨다. 오슬로에서 택시를 탈 때, 이라크·코소보·소말리아 등지에서 학사나 석사 학위를 받아도 그 학력을(수업 연한과 질의 구체적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노르웨이에서 인정받지 못해 핸들을 잡게 된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노르웨이 안에서 대학을 나와도 ‘이슬람식 이름’에 대한 혐오 어린 시선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슬로대를 졸업한 파키스탄 계통의 학생 중에서 장기 실업자가 토박이보다 2배나 많다는 것은 학력을 구제의 동아줄로 삼아 빈곤의 수렁을 벗어나려는 유럽의 무슬림에게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보여준다.

게이트 구르메 노동자들이 보여준 희망

침체기와 첨예해진 경쟁 시대에 유럽 지배자들에게 톨레랑스는 허구다. 그러나 만약 유럽의 백인 노동계급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는 연대만이 살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에 나선다면 톨레랑스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 지난 여름에 영국항공(BA) 기내식 납품업체 게이트 구르메가 주로 이민자 여성인 수백 명의 노동자를 전격적으로 정리해고하자, 주로 백인 남성인 수화물 처리 노동자들이 주동이 되어 들고일어나 런던공항이 마비돼 악덕 기업주인 영국항공사가 4천파운드 정도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요즘 특히 신자유주의의 공격이 거친 영국에서 이와 같은 연대 투쟁의 고무적인 사례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톨레랑스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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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21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왜 야밤에 시비걸고 있으셔.... 내보기에 점순이 글이 별 문제 없더만...
뭐 원문 확인 안한 죄까지 묻는다면 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까칠하시구만요.
푹 주무시고 글좀 부드럽게 쓰셔... ㅎㅎㅎ

근데 두사람 덕분에 제대로 정리 안됐던 홍세화와 박노자의 차이를 정리했음. 오래도록 공부안한티 팍팍 나누만...(나 말이우 ㅠ.ㅠ) 근데 지난번에 얘기한 부커진 재밌게 읽고 있어요. 에 공부 안한 티가 너무 나서 읽는데 좀 힘겨워 하고 있긴 하지만.... 좋은 책 소개는 고마워요.
아 글구 사과따러는 갈거유? 11월 10일쯤이 될 것 같은데....

내오랜꿈 2007-09-21 03:00   좋아요 0 | URL
으, 점순이 글이 문제 있나, 없나를 구분 못할 정도로 짧아서 파악하기 힘드니까 포괄적인 의미에서 내가 시간 낭비해가면서 이걸 쓴 거지... 하여튼 요새 애들 고생한다니까, 이런 선생들한테 배우고 있으니...ㅋㅋ

내 생각엔 홍세화와 박노자의 '차이'는 딱 하나 같애. '이방인' 홍세화와 '현지인' 박노자.

추구하는 이념의 순수성이나 가치에 있어서는 박노자보다 홍세화가 오히려 더 근본주의적 좌파라고 볼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의 글들을 거의 대부분 읽어 본 내 생각에는 확실다고 생각해. 하지만, 유독 유럽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똘레랑스'를 이해하는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느냐. 그에 바로 '현지인'과 '이방인'이 느끼는 차이라는 것이지.

이 '잘난' 대한민국, 그것도 70년대의 폭압적 분위기에서 살다 망명길에 오른 엘리트 한국인이 바라본 프랑스 사회는 어떤 것이겠어? 그야말로 대한민국에 비한다면 '천국' 아니었겠어? 이게 '똘레랑스'에 대한 두 사람의 이해의 차이를 가져오는 이유인 것 같아.

난, 언제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옥이가 문제네... 10월이 아니고 11월이면 갈수 있을 것 같네... 요새 이 아줌씨 정신 없네.

 


천황, 스포츠 국가를 세우다

흉악한 전범 이미지를 벗기 위해 아낌없는 후원자가 되어 서민 사이로 납시다…국가가 주도권을 장악해‘자율적 개인’이 산산조각난 사연은 한국과는 무관한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 <한겨레21> 제643호 2007/01/11


“그러면 자전거를 내일 사실 것이지요?” 2006년 9월 초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대학에 초빙 교수로 가게 된 필자가 현지에서 들은 첫 질문 중 하나였다. 후쿠오카에 도착하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것은 그곳에서 노르웨이 이상으로 일상화돼 있었다. 학생들은 물론 노인들까지도 자전거와 절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자전거뿐인가? 필자의 숙소 건너편에 있는 초등학교의 실내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은 물론 외부인까지도 검도를 즐겼고, 옆의 공원에서는 동네 노인들의 야구 연습 시간이 진행됐다. 필자도 열심히 다녔던 옆 동네의 운동 시설은, 수영부터 가라테까지 온갖 종목들을 즐기려는 주민들로 붐비기만 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필자가 본 일본인들의 대중적인 체육 생활에서 ‘선진 사회’의 면모를 좀 엿볼 수 있었다.


△ 일본의 국민체육대회 같은 행사들은 피지배민을 ‘국민’으로 포섭해 독립적인 개인이나 어떤 특정 계급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율적 의식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스포츠를 즐겨라, 그게 진정한 극일

물론 체육이 가장 대중화된 사회를 찾으려면, 이는 노동 시간이 무리하게 긴 일본은 아닐 것이다. 체육 활동 참여도는 프랑스에서는 74%에 달하지만 일본에서는 60%가 안 된다. 일본에 비해 양극화로 더 많은 고통을 받는 한국에서는 체육 활동을 즐길 만한 여유를 가진 이들이 약 30%밖에 되지 않으며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첨부할 필요가 있는가? 2002년의 월드컵을 앞두고도 각급 정부 예산의 0.16%만을 체육에 이용했던 한국에 비해서 체육 예산의 비중이 0.6%에 달하는 일본은 시민 건강이 훨씬 더 잘 배려되는 곳이지만, 노르웨이는 체육 예산의 비율이 1.6%에 달한다. 유럽 사민주의 국가에 미달하긴 하지만, 일본은 그래도 고강도의 기계적인 노동에 지친 대중의 ‘움직임 욕구’ ‘유희 욕구’를 스포츠를 통해 어느 정도 충족해주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축구에서 일본과 ‘붙기’만 하면 ‘국민 감정’이 억제할 수 없을 만큼 폭발되지만, 고교 축구팀 수가 한국보다 40배(!)나 많은 일본만큼 한국의 ‘고딩’들도 수능의 악몽에서 벗어나 여가를 즐겨야 진정한 의미의 ‘극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농경 노동과 걷기, 승마 등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시간과 강도가 줄어드는 근대에 접어들어서는, 스포츠라는 인위적 ‘대체물’의 발전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스포츠가 어느 사회에서도 ‘자연발생적으로’ 도입되지 않고 늘 주류 지식인이나 국가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정형화·보편화된다는 것이다. 근대 스포츠가 그 모양을 갖춘 19세기의 주류 지식인과 국가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유산 계급의 대표자인 지식인들은, 많은 경우 스포츠를 팀워크 속에서 희생과 복종을 잘 익히고, 사회주의나 평화주의와 같은 ‘불온사상’에 물들 여유가 없는 ‘건전한 신체 속의 건전한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했다.

스포츠의 규율화 기능에 국가도 무관심할 리 없었다. 영국에서 1880년부터 초등 교육이 의무화되자 많은 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퇴역 군인들이 고용됐다. 그들은 교련에 가까운 체육으로 남자아이들 ‘군인 만들기’에 나섰다. 보수적 관료, 귀족들의 비호를 받았던 ‘남아훈련협회’(Lads’ Drill Association)라는 어용 체육 단체의 대표자인 미드 경이 1907년 아예 교련을 각급 학교에서 의무화해 국회에서 노동당과 자유당에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자유주의의 본고장이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에서도 체육에 이와 같은 ‘그늘’이 따라다녔다면 권위주의적 근대화를 단행해온 일본은 과연 어땠는가? 천황제 국가를 빼면 일본 체육의 역사를 진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 ‘이미지 세탁’이라 할까? 히로히토는 군국 일본의 수장으로서 군복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는데 1945년 직후에는 서민적이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1940년대 후반의 일본. 맥아더 장군 등 미국 보수파의 도움으로 천황제가 패전 이후에도 살아남았으나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띤 신”(아라히토가미·現人神)이 아니라고 ‘인간 선언’한 히로히토는 수많은 진보파들에게 흉악한 전범으로만 인식됐다. 흔들린 황실의 권위를 어떻게 복원시키는가? 히로히토는 스포츠야말로 ‘국민의 상징’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극대화하는 최적의 ‘국민 통합’ 방책이라 판단하고, 아낌없이 ‘국민적 스포츠 후원자’의 이미지 만들기에 투자를 했다. ‘국민적 단결’을 목적으로 1946년부터 일본체육협회가 ‘국민체육대회’(속칭 ‘국대’)라는 전국적인 아마추어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했는데, 그 제3회부터 종합적으로 가장 많은 우승자들을 낸 지방에 ‘천황배(杯)’가, 그리고 가장 많은 여성 우승자를 낸 지방에 ‘황후배(杯)’가 각각 ‘하사’되기 시작했다.

땀과 환성을 정치적으로 계산하다

천황이 상금을 ‘하사’할 뿐만 아니라 제4회의 ‘국대’부터 친히 관람해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전범 중의 전범이었던 히로히토가 이제는 ‘평화로운 스포츠 애호가’로서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국내외에 과시했다. 국대뿐만 아니라 동서대항 축구대회와 전국 연식 야구대회, 도쿄 육(六) 대학의 야구리그나 전국 농구대회 등 1940년대 후반의 주된 스포츠 이벤트에 ‘천황의 친람(親覽)’과 ‘천황배’ 또는 각종 황족들의 상패 ‘하사’와 같은 ‘특전’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그 당시 사진들을 보면, 관중은 천황과 황후를 향해 그야말로 외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1945년 이전에 특별한 제단에 봉안된 사진으로만 ‘뵈올 수’ 있었던 ‘그분’이 이렇게 ‘서민적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시민 사이로 다가오자 “과연 나의 가족이 왜 전쟁터에서 죽어야 했느냐”는 질문을 하려는 마음이 절로 녹는 것이었다.

1958년에 일본이 아시아경기대회를 도쿄에서 개최한 것은, 경제가 부흥한 새로운 위상을 과시해 올림픽 유치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때에 1964년의 올림픽을 도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1960년 6월에 미-일 안보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격렬한 데모에 30만 명 이상이 나서는 등 그 당시 일본은 갈등투성이의 사회였지만 도쿄 올림픽은 국내외에 경제 부흥으로 윤택해진 일본 생활의 ‘다테마에’(建前·실제와 크게 다를 수 있는 표면적 모습)를 과시함으로써 알게 모르게 보수 쪽의 입장을 강화했다. 선수들이 흘리는 땀, 관객이 보내는 환성에 국가가 계산적으로 정치적 투자를 했던 것이다.

1945년 이후의 대중적 스포츠는 천황의 사진을 ‘멋있게’ 걸어놓을 수 있는 신흥 부국 일본의 ‘쇼윈도’이자 토건 국가의 ‘황금알 낳는 거위’였다.

1945년 이전 스포츠는 무엇보다 군국주의적·천황주의적 세뇌의 장으로 전폭적으로 이용됐다. 1885년부터 일본 학교의 체육이 기존의 경(輕)체조 위주에서 병식 체조 위주로 바뀌었는데, 1913년 문부성의 훈령으로 학교 병식 체조는 교련의 요소를 내포하게 됐다. 모든 남학생들에게 군사 교육을 하려는 영국 보수주의자들의 열망은, 바로 일본에서 실천에 옮겨졌다. 1931년부터 학교에서 체조와 교련에다 검도나 유도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했다. ‘강인하고 건전한 심신의 선량한 황민’을 만들기 위해 위로부터 보급됐다가 일제 패망 이후 ‘군국주의적 스포츠’로서 금지됐던 유도가 1964년 도쿄에서 올림픽 종목으로 화려한 ‘컴백’을 이루었을 때에,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를 보도했던 기자들이 과연 이 스포츠의 아름답지 못한 ‘과거’를 의식하기나 했을까?

‘스포츠가 문명인의 필수’라는 관념은, 국가가 1924년 ‘명치절’(明治節·메이지 천황의 탄생기념일, 11월3일)을 ‘국민체육의 날’로 선포해 ‘불온사상 전염 방지’의 의미에서 모든 학교에서 그 날을 기해 대대적인 스포츠 행사를 치르게 하지 않았다면 가능했겠는가? 오늘날 고이즈미나 아베 총리 유의 정객들이 그렇게도 좋아한다는 ‘애국 교육’의 원형은, ‘스포츠열’을 통해 ‘딴 생각’을 가질 여유를 주지 않고 전쟁과 노동에 쓸 만한 단단한 몸, 명령 듣기에 익숙해진 굳은 뇌를 만드는 1920~30년대의 ‘스포츠 진흥’이었다.

애국 교육의 원형은 1920~30년대의 스포츠 진흥

스포츠란 개인이 심신을 스스로 ‘개조’해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근대적인 규율성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여가 활동이다. 따라서 스포츠에서의 주도권을 국가와 자본이 장악할 경우, ‘자율적 개인’이라는 또 하나의 근대적인 꿈은 산산조각 나게 된다. 이는 과연 역대 권위주의 정권에 이용돼온 한국 스포츠와 무관한 이야기인가? 과연 군부에 의해서 태권도가 만들어지고 보급됐던 것은, 1945년 이전에 일본 유도의 창설과 보급의 동기와 그렇게 달랐는가? 과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학교 체육 수업의 형태는, 일본이 1880년대 후반부터 진행해온 군사주의적 훈육을 많이 벗어났던가? 그리고 최근의 월드컵까지 각종 스포츠 이벤트의 관(官) 쪽 이용 형태는, 1940년대 후반에 히로히토가 벌였던 ‘쇼’들과 과연 달랐던가? 일본이란 거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1. <スポ-ツと政治> 사카우에 야수히로(坂上康博), 東京: 山川出版社, 2001.
2. <戰後日本のスポ-ツ政策: その構造と展開> 세키 하루나미(?春南), 東京: 大修館書店, 1997.
3. ‘2002년 월드컵과 스포츠 문화’(<경제와 사회> 제54호, 2002년 여름, 35∼57쪽), 안민석
4. J. A. Mangan, Viking, Harmondsworth,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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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인에게서 천황이란 자기네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천황에게 열광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직후 천황의 존재를 알리는 <어론서(御論書)>나 <인민고론>등이 나오고 이를 각 현에 보급시켜 교육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정확하게 표현하면 하급 무사들의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산죠 사네토미 등이 이른바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높은 신분인 다이묘를 억누르기 위해 천황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곧 메이지 유신 정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취한 정책에 불과한 게 오늘날 일본의 근대천황제라는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가리야 데쓰의 <일본인과 천황>의 핵심 주제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상과 같다. 다 읽고 나면 여러 가지로 쓸 게 많은 책 같은데, 일본 내에서도 천황제를 건드리는 문제제기가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천황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각 조직의 '두목'들이 밀실에 모여 앉아 각 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각을 구성하고 차기 총리를 결정하는 지금의 일본정치는 변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건 곧 아직 일본에 진정한 주권 민주주의가 실현된 적이 없다는 걸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진보적 지식을 억누르는 하나의 멍에 같은 것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베 이후에 누가 일본 총리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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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혁명이 만나는 길은?
체르니세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건인가』 표지


‘혁명이 성공하고 실연을 당하면 행복할까? 불행할까?’ 80년대를 통과하면서 반쯤은 장난으로 던져보았던 질문이다. 혁명이 사랑을 흡수해버렸던 80년대나 사랑의 위세 앞에 혁명이 실종된 지금 이 시대나 ‘사랑과 혁명의 함수관계’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신파조로 말해, 혁명을 꿈꾸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혁명이 망각되는, 이 이분법적 회로를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 물음에 대한 아름다운 보고서다. 진정 놀라운 것은 이 소설이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그것도 유형지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이념투쟁이 거센 시절, 혁명을 꿈꾸다 갇힌 수인의 몸으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쓸 수 있다니. 그는 사랑의 습속을 바꾸는 일, 그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아니, 사랑의 습속을 바꾸지 못하는 혁명은 결국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과연 그가 그려내는 사랑은 ‘전복적’이다. 숙명적 엇갈림, 배신과 복수, 권태 아니면 변태로 점철되는 그런 류의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 사랑이 어떻게 눈부신 생의 환희를 분출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또 다른 ‘인연의 장’을 증식시켜 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주인공 베라와 그의 연인들은 슬픔과 연민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사랑, 늘 무언가를 하지 못하도록 붙들어매는 그런 수동적 사랑을 거부한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이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해 ‘기쁨의 능동적 촉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능동적 에너지가 외부로 흘러 넘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베라가 운영하는 ‘코뮨’은 말하자면 그 사랑이 일으킨 분자적 공명의 장인 것이다.

그래서 베라가 남편 로뿌호프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 끼르사노프와 두번째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은 멜로적 삼각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벽을 계속 넘어서는 혁명, 아니 더 나아가 장엄한 구도의 파노라마가 된다.

뜨겁게 사랑하되 결코 한 순간에 머무르지 않는, 무상한 인생의 바다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유목적’ 여정으로서의 사랑, 그에 비한다면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강철 같은 습속의 굴레들을 기꺼이(?) 수락하는 우리 시대의 사랑은, 오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사랑과 혁명, 아니 구도가 그대로 일치하는 길이 그토록 가까이 있건만.

고미숙, 「사랑과 혁명이 난나는 길은?」『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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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말 90년대 초반, 이 책은 소위 말하는 ‘오르그’의 필독서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사랑이 뭔지 쥐뿔도 모르던 시절--뭐 지금이라고 사랑에 대해 아는 게 뭐 그리 달라졌을까만--딱딱한 이론서만 보다 외도한다는 기분으로 읽었던 책이다. 지금은 대강의 얼개만 기억날 뿐 스토리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내 방 책꽂이 어딘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텐데,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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