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책마을을 가다](9) 스웨덴 쇠데르만란드 주(州)의 멜뢰사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0월 26일
-평화의 기원 켜켜이 ‘간이역 책숲’-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마을 한 복판에서 소떼들이 풀을 뜯고 젖을 빨며 거닐고 있다.

열려 있는 문을 밀고 들어서자 실내는 온통 붉은빛에 싸여 있다. 서가에 꽂힌 책도, 벽과 천장, 바닥, 커튼도 온통 붉었다. 마을 곳곳에서 탐스럽게 익어 나뒹구는 사과의 홍조를 닮았다. 그래서 창에 비치는, 초록이 채 가시지 않은 바깥 풍경은 더욱 광채를 띠며 첨단 LCD 화면처럼 번쩍였다. 피아노 위에 쌓인 책도 붉은 장정이다. 복도를 지나 그 다음 방으로 들어서자 깊은 호수 속으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이번에는 파란색으로 실내를 마무리했다. 부엌 겸 식당인데 선반과 조리대 위까지 책이 차지했다. 이렇게 2층 건물의 방마다 특색 있는 서재로 꾸몄다.

나무 계단 특유의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안주인 바르브로 에르게티가 내려왔다. 반색을 하며 이방인을 맞는 중년을 훌쩍 넘긴 부인은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수더분하기 그지없으나 안경을 고쳐 쓰거나 펜을 놀리며 대화를 끌어가는 부인은 빈틈없는 수완가의 몸짓과 눈빛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녀는 6년 전, 개점 당시 찾아온 책마을의 왕, 웨일스의 리처드 부스 이래 가장 멀리서 온 가장 귀한 손님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기야 사흘 밤낮을 달려온 끝이기는 했다.

부인은 우선 책마을을 꾸려가는 어려움에 대한 하소연부터 쏟아내었다. 또 이웃 나라 핀란드와 노르웨이의 책마을 사정도 자세히 들려주었다. 특히 이웃 나라에 비해 당국의 지원이 미미하다며 그 인색함을 탓했다. 이런저런 수혜를 받을 수 있는 민간단체로서 동호회가 조직되어 있고, 한 주일에 두 명씩 자원봉사자가 업무를 돕고 있지만 사람의 손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녀는 마치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지난 몇 해를 버텨온 용사처럼 열정과 자제를 뒤섞으며 대화에 몰두했다.

이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멜뢰사 간이역은 평화를 기원하는 책방으로 개조되었다.
그녀 자신의 모험담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녀는 전직 기자로 에티오피아에서 스무 해 넘게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의 에티오피아인 남편을 만나 함께 이곳에 정착했다. 멜뢰사라는 이 작은 촌을 ‘평화의 책마을’로 명명한 것은 부부의 간절한 인연도 한몫했다. 에티오피아의 그칠 줄 모르는 내전과 분쟁, 독재자의 통치가 빚어낸 참담한 현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전쟁 중이기는 마찬가지라며 서로 쓴웃음을 지었다. 동포끼리의 부끄러운 대치야 말할 나위도 없고 레바논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까지 전장에 젊은이들을 보내고 있다고.

아무튼 평화 책마을을 위한 그녀의 분전에 원군이 없지는 않았다. 바로 엊그제 발표된 노벨 생리학상과 의학상을 주관하는 카를린스카 의과대학의 저명한 스벤 브리톤 교수라는 결정적인 후원자가 있었다. 브리톤 교수는 감염의학의 권위자로, 에이즈 치료와 연구를 위해 에티오피아에서 머물던 중 그녀를 만났다. 얼마 남지않은 은퇴를 준비하면서 평화에 대한 간절한 기원을 인생의 끝까지 조금이나마 실천할 장을 만들어 보고 싶다며 의기투합했다. 브리톤 교수는 주민이 현저히 줄어들어 불과 수백 명 남짓한 이 마을의 옛 간이역(簡易驛) 건물을 사들였다. 기찻길 너머 안골 농장의 방치되었던 커다란 창고도 기증받은 책을 쌓아두는 보물창고로 변해갔다. 마을과 직결되는 플레인 역이 있는 마을에는 인기작가 로버트 아스바카 부부가 집필실 겸 서점을 열고 정착했다. 그러나 인구가 워낙 적다보니 학교 등과의 연계사업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인근에 왕국의 총리가 휴가를 보내는 별장지가 있지만 정객들이 책마을을 찾는 일은 드물다.

멜뢰사 책마을의 여장부, 바르브로 에르게티.
이렇다 할 급속한 발전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젊은이들은 기회만 되면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파리의 카페에서 일하거나, 유로디즈니랜드에서 불이익을 당하면서 합숙소 같은 곳에 기숙하며 박봉을 감수한다. 스칸디나비아 시골처녀들 또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블롱드’라는 비아냥거림마저 받지 않던가. 금발 미녀이건만 “머리는 텅 비었다”는 정당하지 않은 시샘과 놀림감이 되어야 한다. 이 모두가 타향살이의 서러움이다. 심지어 눈이라도 적게 오는 날에는 방학 때조차 학생들은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로 스키를 즐기러 떠난다. 물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알프스 이남에서 겨울을 나고, 여름 한동안만 고향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우리는 인터넷을 더듬어보기로 했다. 광통신이 깔리지 않아 전화선을 연결해 사용하고 있어 접속은 느려 터졌다. 그래도 마침내 경향신문 홈페이지에 지난 연재물의 그림이 뜨자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우리는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서로 안면이 있는 분들을 화제로 잠시 수다를 떨며 재미있어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녀는 늘어진 턱주름을 매만지며 겸연쩍어 했다. 그래서 “아 그거야 하느님의 귀한 선물 아닙니까”라고 위로해주자 그녀는 금세 숫처녀 같이 눈을 치켜뜨며 파안대소했다.

에나르 노렐리우스가 그린 ‘톰타르와 트롤’ 동화책의 삽화.
둥근 탁자가 가운데 놓인 응접실에 해당되는 방은 역시 현대문학이 주종이다. 놀랍도록 외국문학의 번역서가 많았다. 심미안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종종 미학적 논쟁을 주도했던 웅변적인 조수에 카르두치의 시편과 그 자신 고문헌학자였던 이탈리아 문인 루이지 피란델로가 사서를 영웅으로 내세운 매력적인 ‘고(故) 마티아 파스칼’ 등 불어로 읽어야 했던 걸작의 스웨덴 원본이 보였다. 10여년 전에 화단의 위작을 둘러싼 세계를 통념과 다른 시각에서 조명하는 소설 ‘진실을 예찬하며’를 발표했던 토르니 린드그렌의 책도 보였다.

여류작가 코너도 풍성하다.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셀마 라겔뢰프의 ‘닐스 홀게르손의 경이로운 스웨덴 여행’도, 케르스틴 에크만의 ‘스쿨레 숲의 산적’도 모두 스웨덴 원본을 만나니 조금 흥분되었다. 스웨덴 문인으로 서구에는 애독자가 많은 에크만은 이 산적 이야기를 스칸디나비아의 오래된 민중설화 ‘톰타르와 트롤’에서 빌려왔다. 난쟁이 우화로 대변되는 민중신화는 어느 나라에서나 반응이 좋다. 산적이든, 숲속의 공상적인 존재이든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모험담 속에서나마 그 소망을 이루기 때문일 듯하다. 그런 염원은 이 세상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또 결코 이뤄진 적도 없기는 하지만….

식당 창가에 파랗게 장정한 책들이 수북하다.
수십 년간 대중소설과 동화, 영화로 산업화한 ‘반지의 제왕’을 쓰면서 영국인 소설가 존 톨킨조차 난쟁이를 등장시킬 때 이 스칸디나비아 숲속의 해묵은 주인공들을 모델로 삼았다. 이렇게 난쟁이 설화의 원조 격인 톰타르와 트롤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우리는 비좁은 층계참을 돌아 지하로 내려섰다. 불을 켜자 5만여권이 넘는다는 장서가 첩첩산중이다. 또다른 작은 스웨덴 지하의 숲이었다. 톰타르와 트롤은 그 이본이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스톡홀름에는 이들의 이름을 딴 패션과 장난감 매장도 성업 중이지 않은가. 스웨덴 농가 곁에 더불어 살았다던 이 야생의 존재는 그 자연의 숭고함을 잃고 차츰 도시의 상품으로 길들여져 애완용 짐승처럼 어색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에르게티 부인은 그 이본 중 가장 널리 읽힌 그림책으로 사랑받는 에나르 노렐리우스의 삽화를 덧붙인 1960년대 판을 내게 선사했다. 통나무가 책을 읽고 이불처럼 펼쳐진 책속에 숨은 꼬마가 정답게 들어 있다. 책을 읽는 고목은 점점 더 책을 덜 읽는 사람을 점잖게 질책하는 유머러스한 수법이다.

그러나 이 집의 백미는 북극 라포니 지방의 유목민 사미족의 구술회상록이다. 또 올해 탄생 300주년을 맞아 스웨덴 전역과 유럽에서 그 영광을 되새기고 있는 식물학자 칼 폰 린네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 최고인 ‘라포니 여행기’를 꼽아야 한다. 이런 회상록과 여행기를 읽다보면 순록과 늑대의 울음소리 뒤로 숨어버린 저 전설적인 유목민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오후가 저물어 가는 문 밖의 햇살은 따사롭다. 대로변에서 아저씨들이 쇠공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길가의 가게로 들어가 커피를 청했다. 카페 한구석에는 주로 지역의 역사가 담긴 사진집과 문고판 소설이 놓여 있다. 가게를 보는 엄마와 함께 가게에 나와 있던 꼬마 알렉스와 잠시 놀아주었다. 애기 엄마는 젊은 금발의 미인이었지만, ‘블롱드’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회당이 주력이라며 진보성향인 이 지역에 관한 소중한 정보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고, 샌드위치를 준비하고, 유기농 잼을 만들고, 이방인의 출현은 드물지만 그럭저럭 알뜰살뜰 살아가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가게를 나서자 두 량의 열차가 지나가고 건널목이 열리면서 소떼가 느릿느릿 몰려들며 콧방귀를 뀌어댄다. 바로 그 앞의 작은 간이역은 완전히 서점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동네 사람들은 소떼와 이따금 지나가는 열차 승객에게 구경거리가 되면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하며 책을 읽을 것이다. 판잣집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마을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어도 땅바닥에 나뒹구는 사과를 집어 허벅지에 쓱쓱 문지른 다음 한입 베어 먹는 즐거움은 수십년도 더 된 기억 아니던가?

스웨덴 농촌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 ‘산딸기’의 거칠고 소박한 들판이 눈앞에 있다. 복분자를 빼닮은 산딸기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 책 창고가 있는 건넛마을로 접어드니 한 농가의 열린 창 밖으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활짝 열어 젖힌 또 다른 창고 앞에는 오래 된 펌프가 기념비처럼 서 있다. 그 창고 속에는 재활용품이 산더미 같다. 덤불과 사과나무 사이로 이따금 소울음이 들려왔다.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아메리카 서부의 통나무집을 연상시키는 가옥은 붉고 푸른 페인트로 덮여 있다. 마당 차고 앞에 길게 드러누워 있는 젊은 부부는 정담인지 희롱인지 아무튼 무엇인가 서로 나누고 있다.

목가적인 풍경의 전형이다. 하지만 풍경이 제 아무리 흉중을 숨기고, 그 침묵이 제 아무리 진솔하다고 한들, 인간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해 주는 법은 없다. 그 넌지시 손짓하는 무서운 암시 때문에 자연은 그토록 숭고해 보이면서도 때때로 파렴치해 보인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이웃 마을에 사는 동호회장 아주머니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붉고 둥근 카펫을 현관 밖에 새로 깔았다며 에르게티 부인은 다시 한번 넉살을 부렸다. 찰칵거리는 소음도 없이 어느 순간에 찍히는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우리는 그 순간에 딱 어울리는 표정을 지어보려고 나름대로 쑥스럽게 숨을 죽였다.

〈글·사진 정진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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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깊이읽기]영웅 되고픈 욕망, 과학사기의 근원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02일
▲ 엄청난 배신-과학에서의 사기… 호레이드 저드슨|전파과학사


 
‘다시 그 가을이 돌아왔다. 2년 전 이맘 때부터 인터넷을 통해 황우석 전 교수의 난자 위반 윤리, 논문 진위 문제가 알려졌다. PD 수첩팀이 황우석 박사의 연구 윤리를 문제 삼기 시작한 지 벌써 2년. 조사 결과는 과학과 상관이 없었을 뿐 아무 죄 없는 일반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뿌리치고 진실의 편에 손을 들어 주었다.

왜 난데없이 다시 “황우석 스캔들”이냐고? 잊혀져야 할 시점에 나 자신, 그 누구보다 곤혹스럽다. 황우석 사태는 결국 내 교수 생활의 색깔까지 바꾸고 말았다. 나는 윤리 전문가가 아닌데 요즘은 가끔 연구 윤리 교육과 자문을 ‘부업’처럼 하게 되고 말았다. 결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고,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지당하신 말씀들 때문에, 또 두 해 전 당시 서울대 총장에게 황우석 박사의 논문 진위 문제를 조사해 달라고 했다는 그 운명 같은 ‘인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찔끔찔끔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해주다 보니, 내 인생의 색깔이 원하던 것과 조금 달라졌다.

인연은 계속되었다.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에서는 일반 대중을 위한 과학 양서를 번역하여 출판해오고 있다. 2004년부터 학회의 출판 위원을 맡았던 나는 학회 사업으로 번역할 책을 찾고 있었다. 첫해는 나의 게으름으로 출판 사업에 차질을 빚었다. 그 이듬해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연구 윤리에 대한 책만 찾아다녔다.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는 황우석 사태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논문 조작에 가담했던 중요 인사들이 학회의 회원들이었으며, 국민 영웅 시절 황우석 박사는 학회의 윤리위원장을 거쳐 부회장까지 지냈다. 2004년이 가기 마지막날, 사태를 파악한 학회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냈으나, 학회가 책임을 벗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위조, 변조, 표절 등의 연구 윤리 위반 행위들은 황우석 스캔들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을 그 혹독한 겨울을 나면서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회를 대표하여 책을 펴내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과학계 연구 윤리에 관한 책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 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저드슨은 분자생물학의 탄생을 생생하게 기록한 과학계 최고의 베스트셀러 ‘창조의 제8일’의 작가이다. 박사학위 과정 때 지도 교수는 갓 대학원에 들어온 내게 그 책을 권했다. 그 책을 읽으며 과학도로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주저없이 나는 그 책을 번역하자고 덤벼들었다. 저드슨은 분자생물학의 태동 이후를 타임지의 과학기자의 눈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과학사를 공부하여 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통찰력으로 각 사건을 취재해가며 쓴 책이라면, 당연히 신뢰할 만했다. 그렇게해서 어렵사리 번역 판권을 확보하고 한 번의 좌절 후 이한음씨의 번역으로 2년이 걸려 책이 완성되었다.

저드슨은 과학에서의 사기를 ‘엄청난 배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장 정직해야 할 과학이 경제, 언론, 스포츠, 종교에서의 사기와 같은 유형과 형태를 지님으로써, 그 여파는 훨씬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섭게도 불특정 다수의 생명과 건강을 담보로 하기도 한다. 저드슨은 과학 사기의 원인과 그 유형을 사회 문화적 배경, 무소불위가 된 과학 권력, 동료 논문 심사 시스템의 문제 등을 짚어가며 분석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생물학에서의 사기 사건들을 다루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형태가 우리가 겪은 황우석 사태와 흡사하다. 이것이 교훈이었던 것이다. 과학 사기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이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 욕망을 부채질하는 다양한 사회적 원인이 있었다. 그 원인을 알면 예방책도 나오는 법이다. 부끄러워 숨기기보다는 처절하게 분석하고 거듭 반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우석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비단 아직도 계속 언론에 등장하는 그의 행보나 시위를 멈추지 않는 그의 추종자들만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최근 학력 위조 사건, 최고 기업들의 비자금, 회계 부정, 기자들의 날조 기사, 종교집단의 위선과 탈선 등…. 사례는 널려 있으며 세상을 뒤흔드는 모든 거짓은 과학계의 사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본질을 들여다보면, 모든 사기의 유형은 같다고 저드슨은 이야기한다.

그래서 진부하다는 비난을 받아가며 즐겁지 않은 책, ‘엄청난 배신-과학에서의 사기’를 펴낼 수밖에 없었다. 황우석 사태를 처음부터 지켜본 같은 대학의 후배 교수이자 같은 학회의 회원으로서 참회의 마음으로 이 책을 내게 되었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과학계에 국한하지 않는다. 사실은 참이 참으로 통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같은 울림을 얻으리라 확신한다.

〈이현숙|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내오랜꿈 ------------------------------------------------------

호레이드 저드슨의 책 발간에 때맞춰 국내 과학계에서도 황우석 사태의 본질과 그것이 가능했던 '과학사회-네트워크'에 대해 분석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황우석 사태. 벌써 2년이나 되었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벌써'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리라. 황우석 사태는 사실 끝난 적이 없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윗글에서 언급되는, 아직 그를 추종하는 집단들이 인터넷이나 현실 공간에서 활동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황우석 사태의 본질, '맹신'과 '애국'으로 무장한 폭력성을 얼마 전 <디워> 사태를 통해서 다시 한번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국익, 애국을 위해서라면 침략전쟁 파병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는 시민의식을 가진 나라에서 파시즘은 그들 시민들 가슴 속에 언제든 부화할 수 있게끔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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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실은 음악을 만난 반가움
[음반리뷰]《Once》OST

안석희 / 작곡가
출처:<컬쳐뉴스> 2007-10-31


《Once》OST 자켓
▲ 《Once》OST 자켓
예전 리뷰에서 조약골의 새 음반 《평화란 무엇인가》를 소개하며 ‘Just Folk’ 라는 말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노래와 인터뷰로 짜나가는 평택평화항쟁의 음악 다큐멘터리 <평화란 무엇인가>는 포크만으로 충분했다. 이번 《Once》OST 음반을 들으면서 나는 다시 이 말을 떠올린다. 주위의 무수한 호평과 권유에도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나는 그 영상과 스토리가 주는 감동을 아직은 모른다. OST 음반의 가장 큰 강점은 영화의 스토리와 영상이 주는 감동이 음악에 더해져 한층 더 깊은 울림으로 증폭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음반에 실린 13곡의 노래를 주루룩 이어 들으면서 나는 슬쩍 이런 생각이 들었다. ‘Just Music’, 음악으로 충분해.

<원스>의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 아일랜드 그룹 ‘더 프레임즈 The Frames’의 리드보컬이자 싱어송라이터인 글렌 한사드 Glen Hansard. 그리고 여자 주인공인 체코 출신의 뮤지션 마르게타 이글로바 Marketa Irglova. 이 두 사람이 엮어가는 음악만으로 나는 이 영화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쓸쓸함, 진실함, 그 열정과 어긋남, 비탄과 격정 그리고 그 애잔한 그리움. 뜨거운 불길과 차가운 물살을 가르고 벼려지는 주인공들의 성장기.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한 이야기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이 음반에 담긴 노래들은 해설이 그리 필요치 않다. 노랫말이 무얼 말하는 지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노래들은 편하게 귀에 감겨오고 음악은 알기 쉽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포크, 혹은 조금 모던한 포크 록의 곡들. 음악적으로 풀어 이야기할 것도 별로 없다. 아일랜드 영화음악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 때 유행이었던 아이리쉬 민속음악의 요소를 차용한 곡도 없다. 음반의 한 곡인 <Gold>에서 슬쩍 흔적을 드러낼 뿐이다. 두 사람이 다루는 악기인 기타와 피아노 이 두 악기의 어울림이 주를 이루고 여기에 절제된 현악기와 드럼과 베이스를 얹는 소박한 편성의 곡들이 번갈아 이어진다. 멜로디의 여운이 오래 남는 느린 템포의 첫 곡 <Falling Slowly>와 유일하게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한 전형적인 포크록 편성의 <Trying To Pull Myself Away>의 악기 구성이 최대치이다. 이 단출한 편성이 두 사람 목소리가 가진 절절한 감정의 결을 잘 드러내주는 최선의 방법이다.

▲ 영화 <원스>의 한 장면
물론 이 노래들은 영화의 수록곡이라는 덕을 본다. <Say To Me Now>, <Leave>를 비롯한 몇 몇 곡의 노래와 연주는 보통의 음반이었다면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과잉, 속칭 오버로 들리겠지만 여기서는 이런 절규가 주인공이 느끼는 깊은 감정을 잘 표현해준다. 음반에 그대로 싣기 쉽지 않은 거친 기타 스트로크 연주와 외침에 가까운 목소리가 외려 진솔한 감정을 가감 없이 효과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사운드나 형식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 방식을 실험하고 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개척자들의 노력이 대중음악의 진정성의 한 축을 이룬다면, 익숙한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한 개인의 진실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태도를 더 중시하는 방식들이 진정성의 다른 한 축을 이룬다. 《Once》OST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올 상반기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삽입곡 <마리아>의 빅히트를 보며 가수가 아닌 배우가 부른 영화 삽입곡이 상반기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다는 대중음악계의 당혹감도 읽을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라는 매체의 강력한 힘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대중들의 욕망을 읽어내고 담아내는 데 영화의 기획이 한 발 앞섰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통로로 빈번히 이야기된 대중음악의 위축은 다른 말로 뒤집어보면 대중음악계의 기획이 대중들의 욕망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대중음악계와 영화계를 비교해서 누가 더 낫다 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잘 짚어냈다면 그건 왜일까라는 점을 조금 더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음악영화라 볼 수 있는 <즐거운 인생>과 이 <Once>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있는 주제가 되리라. 다만 이건 이 리뷰의 허용치를 넘어서는 일이다.)

어찌되었건《Once》OST음반은 감동의 많은 부분을 영화에 기대고 있다 해도 그 음악만으로 충분한 울림을 준다. 그 울림의 핵심에는 익숙한 동어반복의 지루함과 아는 사람들만 알아듣는 일방통행식의 소통에 지쳐 더 이상 따라가기를 포기한 대중들에게 다시금 음악의 의미를 되살려주는 소통의 힘에 있다. 그래서 언어의 벽을 훌쩍 넘어선다. 원래 노래나 음악이 우리네 삶과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부분들이 다 노래가 된다는 것을. 내가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말로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노래한다는 걸 새삼 다시 일깨워준다. 말이 되지 못한 그 웅얼거림들이 음악에 실려 마음에 와 부딪혀 푸르게 잎을 틔운다. 겨울 초입에 마음을 실을 음악들을 하나 더 가지게 되어 반갑다. 그게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먼 아일랜드 - 더블린의 이야기라 해도 말이다.



안석희 _ 작곡가, 노리단 예술감독
유인혁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노래를 만들었다. 지금은 하자센터 노리단Noridan에서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나무를 깎고 플라스틱 파이프를 자르고 쇠를 갈아서 악기를 만드는 일도 하고 있다.


요즘은 책이나 음반을 주문하면 거의 대부분 다음 날 배송된다. 너무 빨리 받아도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주문한 음반 가운데 《Once》OST를 두세 번 들었는데, 역시 이 음반은 영화라는 매체에 의존하고 있는 노래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잡한 선율이 아니라 보이스 그 자체의 강한 느낌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이 음반은 충분히 권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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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난 박노자의 이런 글쓰기에 반대한다. '동아시아 근현대탐험' 연작시리즈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고대사와 같은 한국 역사 해석의 문제는 박노자 보다 더 전문가도 많을 뿐더러 이 정도 글을 쓸 사람은 넘쳐날 것이다.

그의 강점이 무엇일까? 서구 유럽에서는 기본적인 '베이스'에 해당하는데, 여기 한국에서는 엄청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것들, 이런 것들을 한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박노자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심사숙고해보길 권하고 싶다. 솔직히 이건 원고료 챙기기 위해 쓰는 글밖에 안 된다고 혹평하고 싶다.




<한겨레21> 제683호 2007년11월01일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정치적 의도에 따라, 시대마다 달라지는 단군…수염 긴 할아버지에 대한 흠모를 강요할 필요 있나

‘우리 모두의 기원은 어디인가?’ 인간은 개인 차원에서도 자신의 뿌리에 대해 늘 궁금해하지만, 집단 차원에서도 그 뿌리를 찾아서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다. 대가족을 단위로 했던 과거 사회에서는, 뿌리에 대한 궁금증은 종족 내지 인류의 시조를 찾는 일로 이어지곤 했다. 중국 같으면 거인 반고(盤古)가 죽어서 그 사체가 강산과 해, 달로 변화됐다는 이야기부터 만물을 창조했다는 여신 여와(女媧) 이야기까지 다양한 창세 신화들이 존재하고, 일본 같으면 이미 8세기 초의 문헌에서 남신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여신 이자나미(伊邪那美) 사이의 섹스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아주 야한 창세 담론이 발견된다. 한국이라고 해서 창세신화가 없을 리 없다. 하늘의 신 천지왕과 땅의 여신 총명 부인의 결연 등을 다루는 제주의 무가 ‘천지왕 본풀이’ 정도면 훌륭한 창세, 시조 신화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이런 유형의 민간 신화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공식적’ 문헌에 잘 수록되지 않았다. 못된 부자 수명장자를 하늘 신이 혼내주는 사뭇 반란적 내용을 관료나 승려들이 좋아할 이유도 없었지만, 유교나 불교의 관념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조야하게 보이기도 했다. 결국 조선의 주류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기원에 대한 신화적 설명으로는 단군신화라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가 가장 유서 깊었다. 건국 신화, 즉 ‘국가 이야기’가 종족의 기원까지도 설명해주는 독특한 상황은, 한반도 역사에서 ‘국가’가 점하는 매우 특별한 지위를 보여준다.


△ 서울 남산 단군사당에 있는 단군상. 노년의 남성 통치자를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삼는 것이 여성이나 서민, 어린이들이 평등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가.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무시한 신라, 부활시킨 고려

텍스트란 결국 해석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같은 텍스트에 정반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같은 성경에서 보수주의자는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강조하는가 하면 사회주의자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만큼 부자가 하나님 나라로 가기 어렵다”는 말을 강조한다. 단군신화도 마찬가지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읽는지에 따라서 그 모습을 계속 바꾸어갔다. 그러한 차원에서는 그 신화의 원형을 찾기란 힘들기 그지없다. 게다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신화의 전승에 오랜 기간이 공백기로 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일단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라고 가정한다면 기원전 108년의 고조선 멸망 이후에는 단군 이야기가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계속 구전됐으리라 추측해야 할 것이다. 그 지방이 하늘 신(해모수)과 땅과 물의 여신(하백의 딸)의 결합에 대한 비슷한 내용의 신화를 갖고 있었던 고구려의 중심지가 됐을 때 단군신화와 해모수-주몽 신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인용된 ‘단군본기’에 의하면 단군이 하백의 딸과 결혼해 아들 부루를 낳았다는데, 이 부분은 두 신화가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단군 이야기가 신라와 5세기 후반부터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던 고구려-발해에서 전해지기에, 통일신라 말기까지 신라 금석문에서 단군에 대한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최치원 같은 신라의 대표적 불교 지식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은 석가모니의 종족과 같다. 우리 말은 불교의 원어인 범어와 그 발음이 통하다” 하여 신라를 부처와 인연이 있는 땅으로 선전했지만, 단군을 포함한 북방계 전승에 대해 하등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즉, 지금 ‘한민족의 시조 신화’로 인식되는 단군 이야기는 고려의 건국까지만 해도 한반도 남부 쪽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북부 쪽만의 지역 신화이었다.

그러나 평양 지역을 영토화해 신라와 고구려 양쪽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졌던 고려의 건국으로 사정이 바뀌었다. 개성 지역의 영주로서 고려 왕씨의 문중 전승 자체도 일부 측면에서 단군 이야기와 상통했다. <고려사>의 첫 부분에 실려 있는 <편년통록>의 전승에 의하면, 왕건 가문의 시조로 받들어진 ‘성골 장군’ 호경(虎景)이라는 전설적 인물은 백두산을 비롯한 산천을 구경하고 범의 모습을 한 구룡산의 여(女)산신과 결합을 이룬 뒤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물론 이는 단군신화의 복제판은 아니지만 백두산을 언급한 것이나 범이나 호랑이의 모습을 띤 여신과 결합한다는 줄거리, 그리고 “산신이 돼 산속으로 사라졌다”는 결말은 단군신화와 같은 유형의 북방계 전승을 연상시키긴 한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왕운기>에서 단군 이야기의 근거로 삼는 ‘단군본기’(혹은 그냥 ‘본기’)는 10세기쯤에 쓰였으리라 여겨지는 고려 초 <구삼국사>(지금 전해지지 않는 삼국시대 역사의 서술)의 일부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려왕조 치하인 10세기에 단군 이야기가 한반도에서 비로소 ‘구전’에서 ‘필기’의 형태로 그 모습을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평양 세력의 반란을 진압한 이로서 평양 쪽의 전승을 꺼렸던 김부식이 <구삼국사>를 자료로 삼아 <삼국사기>를 만들었을 때 북방계 문화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고조선과 단군 이야기를 제외시켜 고려 초기, 중기의 단군 의식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 평양의 단군릉. 1940년대 후반에 이승만 정권이 단군 숭배 분위기를 만들어 통치 명분을 다지려 했듯이, 이북 정권도 단군릉 복원을 통해 실추된 위신을 다시 세우려 했다.

1270~80년대에 이르러 상황이 다시 한 번 확 바뀐다. 몽골에 대한 항쟁이 끝나고 고려가 몽골 제국의 제후국이 됨에 따라 몽골와 개성 사이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인식이 고조됐다. 단군 전승의 발원지인 평양은 1270년 원나라가 고려로부터 빼앗아 직할구역으로 삼았다가 129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돌려주었는데, 20년 동안 ‘실지’(失地)였던 평양에 대해 고려 문인들의 관심과 애착은 절로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이제 막을 내린 최씨 무신정권하에서 고려의 큰 약점으로서 지방에서의 국가 통합 의식의 부족이 노출됐다. 1202년 경주에서 지역세력들이 ‘신라 부흥’을 들고 일어났는가 하면, 1217년에 평양의 세력들이 ‘고구려 부흥’을 시도했다 진압되고, 1237년 전라도에서 ‘백제 부흥’까지 시도됐다. 고려왕조에 대한 지방민의 귀속 의식이 그 정도로 약했던 것인데, 과거의 삼국을 하나로 묶는 어떤 표상이 고려 중앙의 지배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우연치 않게 바로 이 시기에 일연과 이승휴가 잘못하면 영원히 잃을지도 모를 평양 지역의 단군 전승을 ‘해동 전체’의 기원 신화로 부각시킨 것이다. 일연이 승려이었기에 “우리 모두의 기원”을 찾는 방법도 불교적이었다. 단군의 할아버지 격인 하늘 신이 불경에서 부처를 늘 지켜주고 부처의 설법에 귀의하는 제석환인, 즉 인도의 천신 인드라(Indra)로 그려지고, 그 인드라의 아들 환웅이 땅으로 내려가려 할 때에 불교에서 부처와 보살의 염원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간(즉, 중생)에 대한 홍익”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중생에 대한 ‘홍익’ 내지 ‘요익’(饒益)이 대승불교에서 보살도 정신의 요체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가지려는 웅녀가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를 주원(呪願)했다고 하는데, 이는 불가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도’의 동의어다. 말하자면 일연에게 단군은 불교에서 말하는 ‘신중’(神衆) 중의 하나로 인식된 듯했다.

조선초 유교 학자들에겐 ‘성현’

반면에, 고조선에 대한 인식의 고조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만든 쿠데타의 정통성을 확립시키려 했던 조선 초기의 관변 유교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단군은 더 이상 ‘인드라의 손자’가 아닌 유교적 의미의 ‘성현’이었다. 그러기에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허황하기 그지없는 웅녀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단군 관련 기사를 인용하지도 않고 “단웅천왕(환웅)이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하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시켜 아들을 낳게 하니 이는 바로 단군”이라는 <제왕운기>의 내용을 대신 인용했다. 샤머니즘의 냄새가 나는 동물 이야기는 선비의 관점에서 “나라 기원에 대한 언설”로서 제격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로 내려갈수록 유학자들의 단군 의식은 ‘얌전해지기’만 했다. 예컨대 안정복(1712∼91)은 그의 <동사강목>(1778)에서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됐다”는 말에 대해서 “허황하다”고 평하고, 평양 부근에 단군묘가 있다는 것을 “따를 수 없는 속설”로 봤다. 안정복의 책에서 제석환인도 웅녀도 빠져 있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유학자들이 애써 단군신화의 ‘불순한 요소’들을 ‘순화’하려 노력했지만, 민간에서는 그 반대로 무당들이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으로 모시고 단군을 특히 ‘무조’(巫祖), 즉 조선 무당의 시조로 숭배했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단군은 두 개 문화 권력의 싸움의 장이 됐다. 1929년에 ‘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을 지어 발표한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같은 “과학적 근대 사학자”들을 내세웠던 일제는, 단군신화를 “13세기 후반에 날조된 이야기”로 봤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단군 연구에 힘을 쏟았던 최남선은 ‘단군’을 “하늘을 대표하는 고대 종교 지도자의 호칭”으로 인식해 단군의 종교인 ‘빛의 숭배’가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고 못박았는가 하면, 신채호는 일찌감치 단군조선을 ‘정복왕조’로 파악해 단군을 “뛰어난 정복자”로 묘사했다. 결국 담론 생산자마다 그 필요성에 따라서 단군의 상을 역사에서 지우거나 ‘시의적절한’ 단군의 이미지를 그렸다고 봐야 한다.


△ 단군의 표준 영정.

권력을 상징화하는 ‘시조’의 초상

일제의 압박에 맞서서 “위대한 장군 단군”이나 “고대의 종교 문화 대표자 단군”을 믿을 필요성도 이미 없어졌고, 단군을 “우리 모두의 할아버지”로 설정해 가족국가에 대한 충성을 국민들에게 강요했던 독재도 이미 갔다. 일연의 시대에야 “우리들의 시조” 이야기에서 여성인 웅녀를 동물의 모습으로 그려놓은데다 단순히 단군을 낳고 나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부차적인 요소로 묘사해 환인, 환웅, 단군 셋을 다 ‘당당한 남성’으로 서술하는 것은 ‘당연지사’였겠지만, 양성평등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과연 여학생들에게 수염이 긴 노년의 남성으로 그려진 단군에 대한 흠모를 강요할 필요가 있는가? 더군다나 최남선 이후로 통설화된 주장대로 ‘단군’이란 고조선의 제사장 내지 군주의 칭호, 즉 일반명사라면 ‘단군의 영정’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게 된다. 굳이 그 실재성을 확인할 수 없는 상고사 인물들에 대한 학습을 통해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시키자면 여성인데다 고구려와 백제 양쪽과 관련이 있는 소서노(召西奴)의 가상적 모습을 교과서에 실어 ‘단군 할아버지의 영정’을 대체케 하는 것이 조금 낫지 않겠는가? 우리가 ‘시조’의 초상화를 그릴 때 결국 우리 사이의 권력과 권위의 구도를 상징화해 그린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을 마치고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를 새로 연재합니다. 민족주의로 덧칠된 고대사 인물들을 다시 조명하고,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우리의 편협한 역사관을 비판하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단군, 만들어진 신화> 송호정, 산처럼, 2004
2. <단군과 고조선사> 노태돈 편저, 사계절, 2002
3. <일본인들의 단군 연구> 신종원 엮음,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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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달콤함 ‘한 사람의 혁명’으로 거부하라
 출처 : <한겨레신문> 2007 11 02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계절별로 농촌생활을 묘사한 중세의 달력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18세기 달력 그림 가운데 10월에 포도주를 담그는 모습.(왼쪽) 호이나키(오른쪽)는 인류 미래의 희망을 근대 산업문명 이전의 자급적 소농경제에서 찾았다. 녹색평론사 제공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리 호이나키 지음·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1만3000원

진보가 이룩한 억압적 시스템 비판
단순 거부 아닌 ‘나’의 대항 방법 모색하며
‘인간다운 삶’ 회복 위한 적극적 저항 주장


우리는 길을 제대로 들어선 걸까? 진보와 발전이라는 화두는 여전히 유효할까?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 애먼 헤나시는 1917년 그의 나이 24살 때 징병을 거부하다 체포돼 2년 징역을 살았다. 교도소에서 금요일마다 썩은 생선이 나오자 비폭력 저항을 조직했다. 누군가가 예산을 착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싸움은 성공적이었으나 헤나시는 폭동을 꾀했다는 이유로 징벌 먹방에 여덟 달이나 갇혔다. 거기서 허용된 유일한 책 〈성경〉을 읽으며 그는 기독교 아나키스트가 됐다. 정치·사회적 부패가 너무 뿌리깊은 미국 사회를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려면 엘리트 교체 정도가 아니라 ‘진정한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진정한 혁명이라니? 헤나시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나는, 만약 내게 용기가 있다면,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오늘 당장 살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사회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자기자신의 변화를 위한 시도다.” 바로 “한 사람의 혁명(one-man revolution)”이었다. 헤나시는 일용노동자로 살면서 세금납부를 거부하고 군비경쟁에 항의하는 등 ‘만악의 근원’인 국가에 대한 저항을 실천에 옮겼고 1970년 사형 반대 단식투쟁과 피켓시위를 하다 쓰러져 죽을 때까지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부랑자와 건달들을 돌봤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에서 지은이 리 호이나키는 헤나시를 ‘거룩한 바보’라고 불렀다. 그런 바보들이 있기에 세상은 이나마라도 유지되고 있고, 그들 덕에 우리가 세계의 정체, 그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게 호이나키의 생각이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그는 실천에 옮겼다. “한 사람의 혁명”이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정복하고 착취하라”는 선동에 국민 다수가 “매수당한” 조국 미국의 부도덕성과 근대 산업문명 자체에 일찍부터 회의를 품었던 그는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가 8년 만에 돌아왔다. 7년간 몸담았던 대학에서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가 됐을 때 바로 가족과 상의해 일리노이주 남부 두메산골로 농사를 지으러 다시 떠나버렸다. 그에게 근대세계는 ‘진보’할수록 빈곤과 전쟁이 창궐하고 물질적 안락과 편의성이 증대할수록 인간이 제도와 기술과 전문가들의 노예가 돼버리는 역설적인 세상이었다. 그는 과감하게 ‘아니오’ 쪽을 택했다. 떠나려면 고액봉급자가 누릴 수 있는 근대문명의 달콤한 혜택과 특권들을 다 버려야 한다.

미국이 바그다드를 공습한 날 독일에 있던 그는 “석유전쟁을 중단하라!”고 외치는 반전시위에 참가했다. 하지만 어쩐지 공허했다. “일반적으로 시위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 참가자들 사이에 일시적인 고양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소비주의와 시장경제, 말하자면 세상 전체를 옭아매고 있는 근대경제시스템, 근대문명의 틀을 수용함으로써 그것을 주도해온 미국의 전쟁행위에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나는 오늘 내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전쟁의 문제도, 미국 정치엘리트들의 부패도, 외국 지도자들의 무기력도, 경제를 위한 에너지원의 통제에 관한 문제도 아니라는 걸 느낀다. 문제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 자신,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산업·기술 사회는 하나의 인공적인 우주를 창조해내기 위하여 지구와 그 생물들을 착취한다는 기본원칙에 근거해 있다. 만약 내가 오늘의 경제와 국가와 그 기관들에서 드러나는 현대사회의 근본적인 파괴성을 받아들이고 즐긴다면 나는 ‘창조의 세계’, 진정한 세계로부터 절연돼 있는 것이다.”

 
»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
 
 
그가 일리노이 오지로 들어간 것은 근대산업문명 시스템을 거부한다는 데만 초점을 맞춘 소극적인 차원은 아니었다. 산업화한 미국 농업도 이윤을 좇아 기계와 화학물질을 대량으로 동원하는 대규모 기업농, ‘과학영농’이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땅을 죽이고 자연을 죽임으로써 농사의 토대를 죽이고 있다고 호이나키는 비판한다. 소규모 자급농, 곧 독립 자영농만이 자연을 살리고 인간의 영성, 삶의 기쁨과 의미를 되찾아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오지행은 인간과 자연 본연의 모습,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도전의 몸짓이기도 한 것이다.

호이나키는 날카로운 근대 비판 사상가요 교육혁명가였던 이반 일리치의 절친한 벗이자 동지였다. 옮긴이 김종철 전 영남대 교수는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일리치의 근본사상을 한 개인의 자전적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낸 뛰어난 이야기체의 담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들이야말로 〈녹색평론〉이 추구해온 가치의 구현자들이 아닌가. 3년 전 김 전 교수도 “오늘날 가장 특권적인 직업”인 대학교수 자리를 버렸는데, 그때 호이나키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도 ‘한 사람의 혁명’을 생각했을까.


[책과 삶]이 땅에 뿌리내린 지식인이 되기 위하여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02일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녹색평론사

‘좋은 삶’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다. 그 답은 간단히 말해 땅과 사람이다. 그건 너무 ‘당연한’ 진리 아니겠느냐고도 하겠고, 지금 같은 세상에 참 한가한 얘기한다는 사람도 있겠다. 저자 리 호이나키(79)는 제도 학문적 차원에서 UCLA 정치학 박사다. 또한 그는 미국의 ‘농부’이자 ‘지식인’이다.

이야기는 저자가 42살이던 1970년 로스앤젤레스의 서늘한 대학 강의실에서 박사학위 논문자격시험을 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마지막 문제를 풀던 중 저자는 창 밖으로 흥분한 학생 무리가 무서운 추격자를 피하려는 듯 건물 옆으로 급히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무서운 추격자는 최루탄 가스와 곤봉을 손에 든 전경들이었다. 그때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저자는 40줄에 대학교수로서의 새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시험지를 응시했다. 마지막 문제를 풀 수 없었다. “우리 정부가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미지의 민족에 대해 가하고 있는 야만적인 공격을 내가 계속 못 본 체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랜 방황 끝에 자신을 위해 구축했던 안락한 세계가 그날 아침 그렇게 무너졌다. 진정 ‘애국심’이 강했던 그는 미국의 불의에 대한 항의 표시로 가족과 함께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 몇해 후 그는 미국 일리노이에 학생들과 함께 커리큘럼을 짜는 실험대학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는다. “뿌리 뽑힌 지식인이야말로 근대의 저주 중 하나라고 확신했던”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접어뒀던 박사논문을 마무리하고, 결국 정년보장 교수가 됐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가 그 실험대학마저도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수들은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전문직업인이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문외한들에게 어떠한 종류이든 통제를 받아야” 하고 “교수들은 어떤 활동이라도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궁리해야 한다”고 믿는 그로서는 교수들이 노조를 만드는 그 모습에서 큰 회의를 느꼈다. 이제 그가 갈 곳은 농촌이었다.

지식인이 정의(正義)에 이르는 길은 땅에 뿌리 내리고 사는 삶을 이해할 때라야 가능하다. 그림은 농산물을 수확하는 중세 유럽인들의 모습을 담은 달력 그림. ‘7월’을 뜻하는 ‘Julius’가 적혀 있다.
농촌에서 살기로 하자 비로소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무엇이 내가 사랑하는 이 땅(미국)을 병들게 하고 있는지. 정부와 대학, 기업은 과학과 효율, 합리라는 이름으로 과연 무슨 짓을 해왔는지. “농부를 산업노동자로 탈바꿈시키도록 고안된, 모두 폭력성에 가득찬 정치적·과학적·상업적 프로그램은 대부분 자료상으로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통계와 도표가 아니라 실제로 영향을 받은 땅과 사람들을 보면, 그 성공의 비용이 어떤 것인가. 편견없이 볼 때, 거기에는 산업적 효율성과 경제적 경쟁 논리가 잔인하게 강제된 현실이 드러난다.” 그가 땅으로 갔을 때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삶의 한 방식’으로써의 농사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농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삶’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현대인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비자 또는 관광객이라는 경제 인간으로밖에 살 수 없는 것인가. 저자라고 해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땅과 사람들이 서로 이어져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가 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거룩한 바보’들에서 희망을 찾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책을 쓰고, 대학 강단에도 다시 섰다. 어느 한순간도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성찰을 멈추지 않는 저자는 모든 지식인이, 모든 현대인이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뿌리 내린’ 지식인인가, ‘뿌리 뽑힌’ 지식인인가 스스로 묻게 한다.

리 호이나키
이 책에는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정년을 앞두고 대학을 뛰쳐나와 서울에 터잡고 주말마다 지방 강연을 다니며 농민들에게 “제발 자녀들 꼬임에 빠져 땅을 팔지 마십시오”라는 복음을 전도하고 다니는 옮긴이(김종철)의 삶이 그대로 투영돼 있지 않나 한다. 옮긴이는 6년에 걸쳐 이 책을 번역했다. 다른 시급한 일-가령 한·미 FTA-에 그때그때 대응하기도 해야했기에 이 책의 번역이 예정보다 오래 걸렸지만, 지난 6년간 그의 머릿속에는 이 책이 한시도 떠나질 않았단다. 1만3000원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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