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책마을을 가다](9) 스웨덴 쇠데르만란드 주(州)의 멜뢰사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0월 26일
-평화의 기원 켜켜이 ‘간이역 책숲’-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마을 한 복판에서 소떼들이 풀을 뜯고 젖을 빨며 거닐고 있다.

열려 있는 문을 밀고 들어서자 실내는 온통 붉은빛에 싸여 있다. 서가에 꽂힌 책도, 벽과 천장, 바닥, 커튼도 온통 붉었다. 마을 곳곳에서 탐스럽게 익어 나뒹구는 사과의 홍조를 닮았다. 그래서 창에 비치는, 초록이 채 가시지 않은 바깥 풍경은 더욱 광채를 띠며 첨단 LCD 화면처럼 번쩍였다. 피아노 위에 쌓인 책도 붉은 장정이다. 복도를 지나 그 다음 방으로 들어서자 깊은 호수 속으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이번에는 파란색으로 실내를 마무리했다. 부엌 겸 식당인데 선반과 조리대 위까지 책이 차지했다. 이렇게 2층 건물의 방마다 특색 있는 서재로 꾸몄다.

나무 계단 특유의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안주인 바르브로 에르게티가 내려왔다. 반색을 하며 이방인을 맞는 중년을 훌쩍 넘긴 부인은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수더분하기 그지없으나 안경을 고쳐 쓰거나 펜을 놀리며 대화를 끌어가는 부인은 빈틈없는 수완가의 몸짓과 눈빛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녀는 6년 전, 개점 당시 찾아온 책마을의 왕, 웨일스의 리처드 부스 이래 가장 멀리서 온 가장 귀한 손님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기야 사흘 밤낮을 달려온 끝이기는 했다.

부인은 우선 책마을을 꾸려가는 어려움에 대한 하소연부터 쏟아내었다. 또 이웃 나라 핀란드와 노르웨이의 책마을 사정도 자세히 들려주었다. 특히 이웃 나라에 비해 당국의 지원이 미미하다며 그 인색함을 탓했다. 이런저런 수혜를 받을 수 있는 민간단체로서 동호회가 조직되어 있고, 한 주일에 두 명씩 자원봉사자가 업무를 돕고 있지만 사람의 손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녀는 마치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지난 몇 해를 버텨온 용사처럼 열정과 자제를 뒤섞으며 대화에 몰두했다.

이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멜뢰사 간이역은 평화를 기원하는 책방으로 개조되었다.
그녀 자신의 모험담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녀는 전직 기자로 에티오피아에서 스무 해 넘게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의 에티오피아인 남편을 만나 함께 이곳에 정착했다. 멜뢰사라는 이 작은 촌을 ‘평화의 책마을’로 명명한 것은 부부의 간절한 인연도 한몫했다. 에티오피아의 그칠 줄 모르는 내전과 분쟁, 독재자의 통치가 빚어낸 참담한 현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전쟁 중이기는 마찬가지라며 서로 쓴웃음을 지었다. 동포끼리의 부끄러운 대치야 말할 나위도 없고 레바논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까지 전장에 젊은이들을 보내고 있다고.

아무튼 평화 책마을을 위한 그녀의 분전에 원군이 없지는 않았다. 바로 엊그제 발표된 노벨 생리학상과 의학상을 주관하는 카를린스카 의과대학의 저명한 스벤 브리톤 교수라는 결정적인 후원자가 있었다. 브리톤 교수는 감염의학의 권위자로, 에이즈 치료와 연구를 위해 에티오피아에서 머물던 중 그녀를 만났다. 얼마 남지않은 은퇴를 준비하면서 평화에 대한 간절한 기원을 인생의 끝까지 조금이나마 실천할 장을 만들어 보고 싶다며 의기투합했다. 브리톤 교수는 주민이 현저히 줄어들어 불과 수백 명 남짓한 이 마을의 옛 간이역(簡易驛) 건물을 사들였다. 기찻길 너머 안골 농장의 방치되었던 커다란 창고도 기증받은 책을 쌓아두는 보물창고로 변해갔다. 마을과 직결되는 플레인 역이 있는 마을에는 인기작가 로버트 아스바카 부부가 집필실 겸 서점을 열고 정착했다. 그러나 인구가 워낙 적다보니 학교 등과의 연계사업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인근에 왕국의 총리가 휴가를 보내는 별장지가 있지만 정객들이 책마을을 찾는 일은 드물다.

멜뢰사 책마을의 여장부, 바르브로 에르게티.
이렇다 할 급속한 발전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젊은이들은 기회만 되면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파리의 카페에서 일하거나, 유로디즈니랜드에서 불이익을 당하면서 합숙소 같은 곳에 기숙하며 박봉을 감수한다. 스칸디나비아 시골처녀들 또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블롱드’라는 비아냥거림마저 받지 않던가. 금발 미녀이건만 “머리는 텅 비었다”는 정당하지 않은 시샘과 놀림감이 되어야 한다. 이 모두가 타향살이의 서러움이다. 심지어 눈이라도 적게 오는 날에는 방학 때조차 학생들은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로 스키를 즐기러 떠난다. 물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알프스 이남에서 겨울을 나고, 여름 한동안만 고향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우리는 인터넷을 더듬어보기로 했다. 광통신이 깔리지 않아 전화선을 연결해 사용하고 있어 접속은 느려 터졌다. 그래도 마침내 경향신문 홈페이지에 지난 연재물의 그림이 뜨자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우리는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서로 안면이 있는 분들을 화제로 잠시 수다를 떨며 재미있어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녀는 늘어진 턱주름을 매만지며 겸연쩍어 했다. 그래서 “아 그거야 하느님의 귀한 선물 아닙니까”라고 위로해주자 그녀는 금세 숫처녀 같이 눈을 치켜뜨며 파안대소했다.

에나르 노렐리우스가 그린 ‘톰타르와 트롤’ 동화책의 삽화.
둥근 탁자가 가운데 놓인 응접실에 해당되는 방은 역시 현대문학이 주종이다. 놀랍도록 외국문학의 번역서가 많았다. 심미안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종종 미학적 논쟁을 주도했던 웅변적인 조수에 카르두치의 시편과 그 자신 고문헌학자였던 이탈리아 문인 루이지 피란델로가 사서를 영웅으로 내세운 매력적인 ‘고(故) 마티아 파스칼’ 등 불어로 읽어야 했던 걸작의 스웨덴 원본이 보였다. 10여년 전에 화단의 위작을 둘러싼 세계를 통념과 다른 시각에서 조명하는 소설 ‘진실을 예찬하며’를 발표했던 토르니 린드그렌의 책도 보였다.

여류작가 코너도 풍성하다.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셀마 라겔뢰프의 ‘닐스 홀게르손의 경이로운 스웨덴 여행’도, 케르스틴 에크만의 ‘스쿨레 숲의 산적’도 모두 스웨덴 원본을 만나니 조금 흥분되었다. 스웨덴 문인으로 서구에는 애독자가 많은 에크만은 이 산적 이야기를 스칸디나비아의 오래된 민중설화 ‘톰타르와 트롤’에서 빌려왔다. 난쟁이 우화로 대변되는 민중신화는 어느 나라에서나 반응이 좋다. 산적이든, 숲속의 공상적인 존재이든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모험담 속에서나마 그 소망을 이루기 때문일 듯하다. 그런 염원은 이 세상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또 결코 이뤄진 적도 없기는 하지만….

식당 창가에 파랗게 장정한 책들이 수북하다.
수십 년간 대중소설과 동화, 영화로 산업화한 ‘반지의 제왕’을 쓰면서 영국인 소설가 존 톨킨조차 난쟁이를 등장시킬 때 이 스칸디나비아 숲속의 해묵은 주인공들을 모델로 삼았다. 이렇게 난쟁이 설화의 원조 격인 톰타르와 트롤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우리는 비좁은 층계참을 돌아 지하로 내려섰다. 불을 켜자 5만여권이 넘는다는 장서가 첩첩산중이다. 또다른 작은 스웨덴 지하의 숲이었다. 톰타르와 트롤은 그 이본이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스톡홀름에는 이들의 이름을 딴 패션과 장난감 매장도 성업 중이지 않은가. 스웨덴 농가 곁에 더불어 살았다던 이 야생의 존재는 그 자연의 숭고함을 잃고 차츰 도시의 상품으로 길들여져 애완용 짐승처럼 어색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에르게티 부인은 그 이본 중 가장 널리 읽힌 그림책으로 사랑받는 에나르 노렐리우스의 삽화를 덧붙인 1960년대 판을 내게 선사했다. 통나무가 책을 읽고 이불처럼 펼쳐진 책속에 숨은 꼬마가 정답게 들어 있다. 책을 읽는 고목은 점점 더 책을 덜 읽는 사람을 점잖게 질책하는 유머러스한 수법이다.

그러나 이 집의 백미는 북극 라포니 지방의 유목민 사미족의 구술회상록이다. 또 올해 탄생 300주년을 맞아 스웨덴 전역과 유럽에서 그 영광을 되새기고 있는 식물학자 칼 폰 린네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 최고인 ‘라포니 여행기’를 꼽아야 한다. 이런 회상록과 여행기를 읽다보면 순록과 늑대의 울음소리 뒤로 숨어버린 저 전설적인 유목민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오후가 저물어 가는 문 밖의 햇살은 따사롭다. 대로변에서 아저씨들이 쇠공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길가의 가게로 들어가 커피를 청했다. 카페 한구석에는 주로 지역의 역사가 담긴 사진집과 문고판 소설이 놓여 있다. 가게를 보는 엄마와 함께 가게에 나와 있던 꼬마 알렉스와 잠시 놀아주었다. 애기 엄마는 젊은 금발의 미인이었지만, ‘블롱드’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회당이 주력이라며 진보성향인 이 지역에 관한 소중한 정보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고, 샌드위치를 준비하고, 유기농 잼을 만들고, 이방인의 출현은 드물지만 그럭저럭 알뜰살뜰 살아가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가게를 나서자 두 량의 열차가 지나가고 건널목이 열리면서 소떼가 느릿느릿 몰려들며 콧방귀를 뀌어댄다. 바로 그 앞의 작은 간이역은 완전히 서점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동네 사람들은 소떼와 이따금 지나가는 열차 승객에게 구경거리가 되면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하며 책을 읽을 것이다. 판잣집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마을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어도 땅바닥에 나뒹구는 사과를 집어 허벅지에 쓱쓱 문지른 다음 한입 베어 먹는 즐거움은 수십년도 더 된 기억 아니던가?

스웨덴 농촌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 ‘산딸기’의 거칠고 소박한 들판이 눈앞에 있다. 복분자를 빼닮은 산딸기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 책 창고가 있는 건넛마을로 접어드니 한 농가의 열린 창 밖으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활짝 열어 젖힌 또 다른 창고 앞에는 오래 된 펌프가 기념비처럼 서 있다. 그 창고 속에는 재활용품이 산더미 같다. 덤불과 사과나무 사이로 이따금 소울음이 들려왔다.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아메리카 서부의 통나무집을 연상시키는 가옥은 붉고 푸른 페인트로 덮여 있다. 마당 차고 앞에 길게 드러누워 있는 젊은 부부는 정담인지 희롱인지 아무튼 무엇인가 서로 나누고 있다.

목가적인 풍경의 전형이다. 하지만 풍경이 제 아무리 흉중을 숨기고, 그 침묵이 제 아무리 진솔하다고 한들, 인간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해 주는 법은 없다. 그 넌지시 손짓하는 무서운 암시 때문에 자연은 그토록 숭고해 보이면서도 때때로 파렴치해 보인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이웃 마을에 사는 동호회장 아주머니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붉고 둥근 카펫을 현관 밖에 새로 깔았다며 에르게티 부인은 다시 한번 넉살을 부렸다. 찰칵거리는 소음도 없이 어느 순간에 찍히는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우리는 그 순간에 딱 어울리는 표정을 지어보려고 나름대로 쑥스럽게 숨을 죽였다.

〈글·사진 정진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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