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얼어 눈꽃으로 피어난 소백산의 정경


아침 일찍 죽령휴게소 식당에 들르니, 주인 내외가 아침 식사중이다. 해장국과 산채비빔밥으로 아침을 먹고 오르기 시작한 소백산. 두 시간 정도를 쉼없이 올라가니 해발 1,357m의 제2연화봉에 다다른다. 그곳 쉼터에서 바라본 소백산은 서쪽 경사면과 동쪽 경사면이 확연히 구분되는 장관이 연출된다.



밤새 내린 서리가 얼어 눈꽃으로 피어난 소백산 제2연화봉에서 연화봉 사이의 서쪽 경사면.





모자가 벗겨질 정도의 바람에도 꿈쩍 않는 눈꽃.



제2연화봉에서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 사이는 길 양쪽이 온통 눈꽃으로 덮여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소백산 천문대



자세한 산행기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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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1-1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핸폰으로 보내준 눈꽃 사진은 염장을 지르기에 충분했다우.... ㅎㅎ 남은 숨쉴틈도 없게 바빠 죽겠는데 말야!!
소백산은 여름에만 두번 등반했었는데 겨울 소백산도 가고싶네... 애들 크면 데려갈 수 있으려나 하다가 아 그땐 내가 체력이 안될거야라는 생각이.... 그 소백산 고개는 정말 죽음이었는데 말이죠. ㅎㅎ

내오랜꿈 2007-11-15 10:15   좋아요 0 | URL
5월에 철쭉꽃이 만발할 때 능선을 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만...
그리고 여건만 된다면 이번 겨울, 눈덮인 소백산 능선을 함 타보고도 싶고...
 


'텍스트 비판'을 넘어서는, 텍스트에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찾아내 대중에게 알려주는 것.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미디어 시대에 지식인 혹은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일 게다. 진중권이 핏대 높여 가며 말하는 주장의 핵심도 여기에 근간을 두고 있다(그런데, 여기서 전문가와 대중의 구분은 다층적이다. A라는 분야에서 대중에 불과한 사람이 B라는 분야에선 전문가가 될 수 있다. C라는 분야에서 박사 학위에 수십 권에 이르는 저술을 낸 세계적 석학도 D라는 분야에선 대중에 불과할 수 있다.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도 있고 대중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지식인(또는 전문가)이란 사람이 텍스트 언어의 해석에만 머물러 본질을 모르고 광분하는 대중을 호도하는 일을 거들고 있다면 그건 '쓰레기'다. '디워사태'때 김정란이 보인 행동은 '노비어천가'를 지어바치며 노무현을 향한 그의 사랑을 노래하던 것보다 정도가 좀 과했다. 사랑하는 임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야 개인의 '낭만적 사랑'이라 친다지만 초딩 수준의 애국심을 내세우는 대중들을 향한 '헌사'는 또 무엇인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논쟁을 두고, 마치 자신만이 가라타니가 제기한 문제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장정일의 태도는 후안무치의 극한이다. 그렇게 광범위한 독서를 자랑하는 그가 이명원 교수나 조영일, 권성우 씨의 글을 못 봤다는 게 말이 되는가? 황우석 박사의 사기극은 어디에서 출발했던가. '팩트'를 속이는 데서 출발한다. 그건 과학이나 문학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장정일에 대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식으로 옹호하는 전문가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말하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이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 잘못된 그 자체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사람의 방법을 문제 삼는 게 다반사다. 말이 과격하다느니, 싸가지가 없다느니, 그럼 니가 한번 만들어봐라느니... 정말 웃기는, '원숭이 지능' 수준의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아들, 딸 위장 급여 지급에 대해 말들이 많다. 뭐, 하도 비리나 의혹이 많은 인간인지라 이 정도 비리는 비리도 아니라는 반응도 있는 모양인데, 그게 한나라당 대변인실에서도 나온다고 하니 기가 찰 일이다. 이 정도는 해명할 비리축에 끼이지도 못한단다. 아래 몇 개 인용하는 이 문제에 대한 네티즌들의 댓글은 지금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생각해봐라. 수백억 재산에 건강보험료 1만3160원 내던 사람이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이며, 안하겠는가? 한국인들 생각을 안하는 거냐? 생각할 뇌가 없는 거냐? ”(<미디어다음> ‘산처럼’)

“BBK, 땅투기, 위장전입, 선거법 위반, 자녀 위장취업, 맛사지 등 수없는 의혹에도 국민의 50%가 넘게 지지하고 있어요. 국민이 원숭이 지능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지지율이잖아요.”(<미디어다음> ‘이방인’)

비리로 비리를 돌려막으니. 카드 돌려막기는 들어봤어도, (비리 돌려막기는 처음 들어본다-인용자) 오죽하면 대변인도 이 정도는 해명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고 하냐?”(<미디어다음> ‘jjykko’)

대중은 이리 앞서가는데, 소위 전문가의 축에 든다는 몇몇 인간들이 보이는 행태는 한심하기 그지 없다. 그야말로 '원숭이 지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을 보이니 말이다. 아래 진중권의 대담은 이런 측면에서 '네 말은 옳은데, 나는 네가 싫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지능을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텍스트이다. (내오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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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대타협? 삼성을 보세요"
[정치와 사람들① 진중권] "지지하는 대선후보는…오바마!"

정제혁/객원기자
출처 : <프레시안> 2007-11-12


  2007년 대선 정국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정초(定礎)선거'라고 말들을 하지만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눈에 별로 띄지 않는 역설적 특징이 지배합니다.

  지식인들은 이런 정치현실을 개탄하면서도 말을 아끼고, 대중들은 아직도 마음줄 곳을 찾지 못해 부유합니다. 은퇴한 '올드보이'들의 컴백, 각 세력들의 '묻지마 이합집산'이 그 틈을 비집고 활개를 칩니다. 40일이 채 남지 않은 올해 대선은 아마도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들이 줄거리를 엮지 않을까 싶어 걱정입니다.
  
  우리사회 각 분야에서 나름의 '눈'을 가진 인사들의 '입'을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해보려 합니다. 권력교체기의 정치란 현역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사람들>은 그런 취지에서 기획됐습니다. 선거, 그리고 우리사회의 변화에 대해 독자 여러분들도 한번쯤 생각해 볼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처럼 대중들의 호오가 뚜렷하게 갈리는 지식인도 드물다. 그에겐 '팬'이 많다. 동시에 그를 아주 미워하는 사람도 많다. 그는 두 가지 장점을 가진 사람이다. '합리성'과 '풍자'.
  
  박정희, 수구 냉전주의, 마초이즘, 기독교 근본주의, 좌파 내 전체주의적 경향, 황우석…. 지난 몇 년간 진 교수가 상대한 우리 사회의 우상들이다. 상식과 합리의 가치가 걸린 싸움터엔 항상 그가 있었다. 논리와 풍자로 담금질한 언어의 검을 날렵하게 휘두르며 상대를 제압했다. 그에 대한 상찬과 증오는 그런 전투의 결과다.
  
  정치평론에서도 일가견이 있는 그이지만, 처음 인터뷰 요청을 받고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 "정치평론에선 은퇴했다. 정치 얘기는 안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안을 수정했다. 문화 평론에 초점을 두고 우리 사회를 진단해보자고 했다.
  
  그는 황우석 사태와 '디 워' 논란에서 우리사회 '대중'들의 정신적 단면을 읽었다. 딱 떨어지는 정치 얘기가 아니어도 '대중의 욕망'에 기반해 그가 읽어낸 황우석과 심형래, 이명박 현상은 엄연히 정치적이다.
  
  지난해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한참 치솟을 때 논평가들은 "불가사의하다"고 했다.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 이유는 단순하다. 유권자들의 판단이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않을까? 진 교수를 '정치 인터뷰'에 초대한 이유다.
  
  황우석, 심형래, 이명박의 공통점
  
  "제 관심도 거기에 있어요. 별 볼 일 없는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영화 때문에 대중이 동원됐고, 동원된 대중이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다는 것, 그러면서 지성을 추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 말이에요."
  
  진 교수가 '디 워' 논란에 뛰어든 이유다. 그다운 직설화법이다. 그는 황우석 사태와 '디 워' 논란에서 우리 사회의 병리적 징후를 본다고 했다.
  
  "대중의 독재라는 현상이 나타났어요. 대중이 몰려다니고 패악질 하는 것이죠. 영웅이 아닌 전문가 집단에 대한 불신들, 그리고 '전문가들을 타도하자'는 구호들이 나오고 있어요. 일종의 디지털 파시즘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게 대중에게 권력을 준 것이거든요. 파시즘도 일종의 대중 독재였습니다. 비슷한 현상이 디지털 버전으로, 하나의 패러디처럼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과거의 파시즘과 비교하는 건 뭐하지만 메커니즘은 상당히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 ⓒ프레시안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린 글에서 진 교수는 '과개발된 인터넷과 저개발된 인문성'을 원인으로 꼽은 바 있다.
  
  "지금 대중을 움직이는 이데올로기는 독재시대의 그것과 같습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영웅주의에요. 첨단 매체가 과거의 수구적인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포섭된 결과 양자가 결합돼서 나타나고 있어요. 그게 문제라는 거죠. 과거에는 정권이 대중을 동원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대중들이 스스로를 동원한단 말이에요. 황우석 사태 때도 노무현 대통령은 오히려 말렸어요. 그런데 대중들이 스스로 동원했단 말이죠. '디 워' 논란도 마찬가지죠. 대중들의 자기 동원이라는 면에서요."
  
  사회심리적인 요인은 없을까. 대중들이 황우석 박사와 심형래 감독에게 갖는 정서적 연대감의 실체는 뭘까.
  
  "일반적으로 대중은 자신이 당한 고통과 억압의 원천을 인식하기 힘들 때 다른 방식으로 출구를 돌려버립니다. 반대급부를 얻는 거죠. 자기들 스스로 허구를 만들어요. '심형래가 약자다, 심형래가 소외 당했다, 무시 당했다'고 하죠. 그런데 이건 (심형래가 아니라) 대중들의 일상적인 체험입니다. 대중이야말로 많은 경우에 소외 당하고 억압 당하고 무시 당한단 말이죠. 이걸 심형래에 투사해버리는 거죠.
  
  심형래가 과연 소외당한 약자냐? 아니거든요. 최고의 인기 연예인이고, 소득도 가장 높았고, 대한민국 영화 제작자 중에서 가장 많은 자본을 모았고, 홍보에서도 가장 높은 미디어 노출도를 보여줬고, 대중으로부터 그렇게 사랑 받은 감독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결코 약자가 아니에요. 심형래와 대중은 급이 다릅니다. 심형래는 스타고 대중은 스타가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겐 자신의 처지를 투사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고, 거기에 심형래가 몇 마디 해준 말('내가 만든 건 아무도 보지 않아')이 빌미가 된 것이죠. 나머지는 대중이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황우석 사태 때도 똑같은 레토릭이 있었어요. '황우석은 의대가 아니라 수의대다', '서울대 다른 학자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다', '누가 황우석 박사를 도와줬느냐' 하는 식이었죠."
  
  "예를 들어, 한국타이어에서 여러 명이 죽었습니다. (원인은) 누가 봐도 뻔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얘기해보라고 하니 얘기를 못하죠. 블랙리스트에 오를까봐. 이런 독재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삼성 비자금 문제 터진 것 보세요. 그걸 폭로하기 위해 사제관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대중에게는 그런 공포감이 있다는 겁니다. 평소에 겪는 이런 공포들, 이것들은 어디론가 분사돼야 합니다. 그래서 분출될 명분을 찾는 겁니다. 그러다 분출될 곳을 찾았다 하면 이제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허구를 구성해서 사실로 만들어 버리고 또 믿어버리고, 그렇게 해서 공격성을 분출하는 데 대한 명분으로 삼게 되는 거죠."
  
  황우석 박사, 심형래 감독의 경우와 성격은 좀 다르지만 이명박 후보도 대중들로부터 제법 오랜 기간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 요지부동의 지지율 고공행진을 보고 사람들은 '묻지마 지지'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성공시대'를 약속한다는 점이다. 그걸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한 게 300조원(황 박사), 8조원(심 감독), 747(이 후보)이다.
  
  "GDP 2만 달러를 넘었다고 하지만 양극화는 심해지고 고용의 안정성은 뚝 떨어졌단 말이죠. 사람들에겐 그에 따른 불안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불안감을 해소시켜줄 누군가를 바라는 거죠. 그것만 해소시켜 준다면 도덕성이고 뭐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명박의 도덕성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듯이 심형래 영화에서는 미학성이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돈만 벌어주면 된다는 거죠. 문제는 도덕성 없이 경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선진국은 도덕성이 깨끗하잖아요. 커뮤니케이션이 효율적이라는 얘기거든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피드백이 잘 된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영화로 돈을 벌려면 영화가 (제대로) 되어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것도 없이 돈만 벌겠다고 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죠."
  
  대중의 욕망

▲ ⓒ프레시안
  황 박사와 심 감독은 '경쟁력'의 신화다. '우리도 미국을 이길 수 있다'는 것. 광개토대왕을 출연시킨 한미FTA 홍보 광고의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황우석 사태와 '디 워' 논란은 한미FTA 논란을 전후한 우리 사회의 어떤 정신적 상황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구질구질한 현실이 짜증나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우리 주변을 보세요.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어디 하나 만만한 나라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약자죠. (그래서 그런지) 거대함에 대한 선호가 존재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국가 모델은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처럼 작지만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에요.
  
  한미FTA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죠. 대중은 수세적인 게 아니라 치고 나가자는 정부의 선전을 믿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것하고 실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양자가 혼동되는 거죠. 될 수 있다는 건 현실입니다. 됐으면 좋겠다는 건 바램이고요. 원망과 현실에서 대중은 현실을 직시하는 게 아니라 원망을 본다는 거죠. 대중들에겐 욕망이 있어요."
  
  한미FTA에 대한 정부의 선전을 '믿고 싶어 하는' 대중의 심리상태가 존재한다는 것. 한미FTA 반대론자들은 대중이 협상의 진상을 알게 되면 여론이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진 교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럴까 싶은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유경쟁 이데올로기가 굉장히 강하거든요. 국가주의, 경쟁과 시장주의, 위아래로 사람 가르는 위계적인 문화. 이 세 가지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회적 유전인자가 되어버렸어요. 한미FTA 협상의 실제 내용이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졌다고 해서 여론이 지금과 크게 달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토론이 되는 걸 본다면 결과가 다를 수 있겠지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진 교수는 김정란 교수의 '디 워' 평론이 모종의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평론가는 대중을 고려하는 게 아니다. 평론가는 작품만 상대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내친 김에 그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상을 들어봤다.
  
  지식인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면 되는 겁니다. 난 (평론가로서의) 내 일을 했고, 미국에서 ('디 워'가 거둔 성적으로) 입증됐듯이, 제대로 했습니다. 심형래 감독은 자기 일을 제대로 못한 거죠. 그걸로 끝난 겁니다. 대중이 스스로 보면 되는 겁니다. 대중이 올바른 견해를 받아들이기 거부한다면 그건 대중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닙니다. 그들 손해지 내 손해가 아니에요."
  
  계몽적 지식인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기능적' 지식인을 말하는 듯 하다. 지식인의 계몽적 역할을 마다하는 그의 활동이 두드러진 계몽적 효과를 낳는 건 역설적이다.
  
  '디 워' 논란을 거치면서 진 교수는 좀 더 유명해졌다. 시쳇말로 대중적으로 '뜬' 것이다. '무르팍 도사'에서 출연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단다. 하지만 출연을 고사했다. "내 일의 연장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가 웃길 때는 특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웃기는 거예요. 그런데 개그 프로그램은 적어도 중학교 학생 이상은 웃겨야 되잖아요. 그건 또 다른 재주고 또 다른 재능입니다. 그리고 개그 프로그램의 웃음은 해학에서 나오거든요. 다 같이 웃는 거죠. 그러나 저는 공격을 통해 웃기거든요. 비평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을 보고 그걸 깨기 위해 까기 때문에 해학이 아니고 풍자입니다. 아프게 찌르는 거죠. 프로그램의 성격에 잘 맞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들('디 워' 옹호론자)의 마지막 논거, '저 녀석 뜨려고 한다'는 논거를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뜰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음으로써 말이죠."
  
  황우석 사태나 '디 워' 논란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거대한 이익에는 열광하는데 정작 구체적인 이해가 달린 타산에는 둔감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저는 구술문화의 습성이라고 봐요. 예를 들어 보험을 파는 사람이 왔어요. 한 사람은 와서 '이 보험의 특성은 뭐고요, 저것은 어떤 혜택과 한계가 있고요' 하는 식으로 꼼꼼하게 약관대로 설명해요. 다른 사람은 와서 '아이구 이번에 아드님 중간고사 잘 봤어요?' 하고 물어요. 어느 쪽이 유리할까요. 후자란 말이에요. 그런 코드가 있다는 거예요.
  
  얼마 전 '맞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인 비판'인가 하는 책이 인터넷에 뜬 걸 잠깐 봤는데, 일본 사람이 재밌는 얘기를 했더라고요. 한국 사람하고 계약을 했는데 납기일 안에 납기가 안 됐답니다. 그래서 한국 사장에게 전화했더니 '우리도 밤을 새워가며 작업하고 있다', 그러더래요. 이 일본 사람은 황당한 거죠. '누가 너희들보고 밤새라고 했느냐'는 거지요.
  
  심형래 감독도 그러잖아요. '밤새서 라면 먹으면서 CG 만들었는데…' 이렇게 말하거든요. 왜 라면을 먹습니까, 밥을 먹어야지. 그리고 밤을 새면 안 되죠. 제대로 자가면서 8시간 노동해야지. 그리고 박봉. 박봉 주면 안 되거든요. 제대로 돈을 줘야 CG가 발달하지. 라면 먹고, 밤새 작업하고, 나중에 영화 잘 되면 30억씩 줄게, 이건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게 통한단 말이에요, 한국 사회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지기보다는 정감적이라는 거예요. 이건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볼 때 효율적이지가 않잖아요."
  
  애국의 결실은?

▲ ⓒ프레시안
  진 교수는 지난해 11월 한 강연에서 '영상문화' 시대에 진보진영은 여전히 '텍스트' 혹은 '문자문화'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었다. 그런데 요즘 그는 '텍스트'가 거세되었다고 '영상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진 교수는 '문자문화'의 성취에 기초한 '영상문화'를 온전한 문화적 진화로 보고 있다. 그를 기준삼아 강조점을 달리 하며 이쪽 저쪽을 비판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영상문화는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영상문화입니다. 텍스트 기반 없이 영상문화로 넘어가는 건 문자문화 이전으로 후퇴하는 겁니다. 반면 텍스트를 바탕으로 영상문화 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문자문화보다 진화한 의식상태로 넘어가는 거죠. 지금은 영상문화로 넘어갔지만 텍스트의 합리성이 없다보니까 신화적인 의식으로 퇴행하잖아요. 요즘 드라마를 보세요. 다 역사드라마잖아요. 반면 진보진영 같은 경우 아직 텍스트 문화에 머물러 있죠."
  
  그는 이제 '영상'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텍스트' 비판에서 '영상비판'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게 '영상문화' 시대에 지식인과 비평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했다.
  
  "지금 문자를 못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상을 못 읽는 사람은 많아요. 로맹 가리가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영상을 못 읽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죠. 소통수단 자체가 영상으로 바뀌고 있어요. 그런데 영상은 항상 문자를 깔고 있다는 말이에요. 프로그램을 깔고 있는 거죠. 이 프로그램을 읽어내지 못하면 영화 '매트릭스' 속의 주민이 되는 겁니다. 남이 짠 프로그램을 자기의 세계로 알고 살아가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디 워' 논란으로 누가 돈 벌었겠어요. 내가 볼 때 쇼박스입니다. 심형래 감독 돈 번 것 하나도 없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에서 번 돈을 미국에서 마케팅 비용으로 다 썼어요. 거기다 영화 제작할 때 미국 배우 썼죠, 미국에서 음악 썼죠, 미국에서 CG 보정했죠, 미국에서 촬영했죠. 제작비도 미국에서 썼단 말이에요. '달러 벌어다 준다' 그랬는데, 실제로는 달러를 쓴 것이거든요. 그리고 ('디 워'가 미국에서) 한국 영화의 위치를 높였느냐. 그것도 아니죠. 쏟아지는 악평들을 봐요. 한국영화가 애써 쌓아놓은 것까지 깎아먹은 거 아닙니까.
  
  사람들 열심히 애국했잖아요. 그 애국의 결실을 누가 가져갔느냐는 거예요. 얼마 전 심형래 팬 카페 가보니까 '디 워' 열 번 보기 운동을 해요.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두세 번 보면 질리거든요. 고문이에요. 게다가 ('디 워'는) 서사가 복잡한 영화가 아니잖아요. 또 간접관람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뭐냐면, 아마도, 누군가 100번 봤다고 하는데, 표만 사는 것 같아요, 인터넷에서. 극장에 안 가고요. 심형래 감독을 돕는다고 그렇게 하는 건데, 그 돈이 심형래 감독에게 들어가느냐? 아니거든요. 돈을 버는 건 누구냐. 쇼박스와 극장이에요. 애국을 하는데 돈은 누가 챙기느냐는 겁니다. 이게 프로그램을 읽는다는 문제예요. 산수만 계산해도 나오는 문제인데, 이걸 못 읽는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 미국 애들은 외국 영화를 안 봐요. 외국 영화의 전체 점유율이 2% 밖에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심형래 씨가 올바로 판단한 건 두 가지예요. 미국 사람들이 자막 붙으면 일단 안 본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괴수영화 같은 걸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블록버스터가 될 수 없죠. '괴수영화'는 특정한 취향의 영화잖아요. 그렇다면 목표를 현실적으로 가졌어야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장사를 할 수 있는 영화는 미국영화 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면 미국 문화가 전 세계 인간들의 문화거든요. 그런 저변이 있기 때문에 미국 영화가 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거예요. 한국영화가 그런 상태가 되어 있느냐?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심형래 감독은 대본을 한국말로 써서 영어로 옮기면 될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는데, 그게 얼마나 어색합니까. 쉽게 말하면 미국 사람하고 싸우는 데 멱살 붙잡고 '하우 올드 아 유' '유 해브 노 파더?' 하는 격이거든요. 이건 미국화 하는 게 아니죠.
  
  그리고 한국적인 것을 말하는데, 영화에 아리랑 넣으면 한국적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리랑은 우리한테도 멀어요. 우리가 요즘 아리랑 부릅니까. 오히려 영화 '괴물'에서 변희봉이 소녀 영정 앞에서 막 울면서 '네 덕분에 우리 가족이 다 모였구나' 하고 말하는 그 순간 '저거야말로 한국적이다'는 느낌을 받죠. 이런 게 감각이고, 또 어필하거든요.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실질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방법을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건 하나도 없고 염원만 있어요. 그러면서 (성공을 위해) 실질적으로 해야 할 것, 깐깐한 비평, 수준 높은 관객, 이런 것을 갖출 생각은 전혀 안 해요. 얘기도 못 꺼내게 해요. 오로지 미국으로 나간다, 이런 게 주술적 태도라는 거죠. 주술시대에는 믿어버리면 돼요. 소원이니까. 자기의 원망을 실질적으로 이룰 길을 찾는다는 게 바로 문자문화의 합리성이죠. 항상 관찰하고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하고 법칙을 발견하고 그걸 이용해서 뜻을 이룬단 말이죠. 그런데 지금 보세요.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발터 벤야민이 기생충인가"

▲ ⓒ프레시안
  '디 워' 논란은 지식인들 간의 논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출판사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 김규항 씨는 '디 워' 논란은 평론가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폭발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평론가란 '평론가와 평론가 지망생, 그리고 인텔리들끼리 읽는 평론'을 쓰는 평론가를 뜻한다. 그들은 대중의 취향을 '경멸'하는 것으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한다. 일종의 문화적 '구별짓기'인 셈인데, '디 워'의 맥락을 떠나서 보면 이런 비판에 경청할 대목도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많은 비평을 접해보지 않아서 잘 몰라요. 그런데 어디에나 문제는 있죠. 90년대 사회비평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개별 비평이 잘 됐느냐, 안 됐느냐를 따져야지 포괄적으로 '쓸 데 없다'는 식으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되는 거죠. 그리고 (90년대 이후)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비평으로 온 건 잘한 거예요. 그럼 뭐하라는 겁니까. 일본 같은 경우 전공투 세대가 다양한 문화 영역으로 갔기 때문에 일본 문화의 수준이 높아진 것이거든요. 지금 한국영화의 경우에도 386이니까 이 만큼이라도 나오는 겁니다."
  
  그의 비판은 김규항 씨의 '평론가론'에 관한 것으로 이어졌다. 진 교수 특유의 독설이 불을 뿜었다. 앞서 김규항 씨는 지난 8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평론가란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다"고 규정한 바 있다.
  
  "김규항이 평론가를 기생충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자기는 메타 기생충이에요. 평론가를 씹으면서 크는, 그야말로 메타 기생충이죠. (김규항 씨가) 평론을 생각하는 게 굉장히 무서운 게, 평론은 그 자체가 생산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왜 기생충입니까? 예술가들은 평론가들 아니면 못 떠요. 평론가들이 쓰는 평론, 그건 문학이에요. 그게 생산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보고 기생충이라고 하면 심형래 지지자들하고 뭐가 다르냐는 겁니다. '네가 만들어봐' 이런 식이잖아요.
  
  자동차 검사하는 사람이 차를 보고 '이게 문제고 저게 문제고 그러니 교체해야 돼요' 했더니 '네가 만들어봐', '너는 기생충이야' 이렇게 말하는 게 말이 됩니까. 따져보세요. 국가주의 코드, 시장주의 코드, 영웅주의 코드, 떼로 몰려다니면서 패악질 하는 것, 이게 민중입니까, 파시즘적 군중입니까"
  
  "진보는 새들의 매스게임"
  
  지난해부터 진보 위기 담론이 계속되고 있다. 진 교수가 생각하는 진보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선형적 시간관에 입각한 진보 관념은 타당성을 잃었다고 했다.
  
  "저는 '진보냐 보수냐' 하는 과거의 기준들은 타당성을 잃었다고 봐요. 역사주의 의식이란 건 약화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늘 그렇게 생각했죠. 과거를 기억하고 피억압자의 기억을 조직하는 게 과거의 역사이고, 그건 현재를 위한 것이고, 현재는 또 미래의 해방된 사회를 위해서 희생돼야 할 것이다, 하고 말이죠. 모든 것의 최종적 의미가 미래에 도달되는 사회에 있는 것을 '역사적 텔로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텔로스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단 말이죠. 그럴 때 과연 과거와 같은 진보의 개념이란 게 성립될 수 있느냐는 거죠. 요즘 '수구진보'라는 말을 많이 하죠. 영상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텍스트 문화에 있는 사람들이 덜 진화한 측면이 있는 거예요. 그걸 아마도 수구성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면서도 진보적이고요. '수구진보'라는 말은 굉장히 정확한 말입니다."
  
  그는 '진보'는 창의성의 경쟁이라고 했다.
  
  "가치판단이 다원화됐다는 거죠. 신자유주의를 해야 된다는 사람들의 판단이 있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의 판단이 있고, 둘 중 어느 게 더 옳은가, 그른가 하는 건 참 대답이 안 나온다는 거죠. 이걸 인정해야 됩니다. '난 이게 옳다고 생각하지만 저 사람은 저게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물론 옳고 그른 것은 싸워서 결판나는 문제이지만, 많은 경우 가치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결판이 안 나거든요. 그런 싸움에서는 오히려 미학적 기준이 강화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산하는 담론이 더욱 생산적이고, 내가 현실을 설명하는 방식이 현실을 보다 무모순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요. '내 담론은 네 것과 달리 아주 새로운 측면에서 보게 해 준다'든지, 정보가치가 있다든지, 이런 방향으로 경쟁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진보고요.
  
  요컨대, 담론은 새들의 매스게임이라는 거예요. 천수만에서 새들이 날아다닐 때 명령하는 새가 없죠. 옆의 새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것, 장애물이 나오면 피할 것, 하는 몇 가지 지식들만 있죠. 그처럼 서로 배운 독립된 개인들이 우리가 에티켓이라고 말하는 것만 유지한 채 각자 창의성을 발휘하면 그 결과로서 누구도 인풋하지 않았던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흔히 창발이라고 부르죠."
  
  정치 얘기는 사양한다는 그였지만 합리성과 풍자의 소양을 갖춘 몇 안되는 평론가를 만난 터라 방앗간 지나는 참새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번 대선에서 지지하는 후보는 있나요?' "버락 오마바를 지지합니다." 그냥 같이 웃었다.
  
  "민노당을 찍을 뻔 했는데 민노당도 정파 문제가 걸린 거 아니에요? 이번에는 아마 안 찍을 것 같아요. 이회창을 찍을까 하는 생각도 있고(웃음). 이명박이 되면 운하를 팔 것 같단 말이야. 이 사람 운하 진짜 팝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정말 '창'을 찍을까?(웃음)."
  
  비판적 지지론에 대해 물었다. 역시 그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비판적 지지? 그럼 '창(이회창)'한테 몰아줍시다. 어차피 정동영 안 되잖아. 그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그렇죠. 이명박 막으려면 창한테 몰아줘야지. 창한테 몰아줍시다. 정동영한테 표 보내주지 말고. 정동영은 사퇴하라고 해야죠(웃음). 코메디죠 코메디."
  
  "삼성을 보세요!"

▲ ⓒ프레시안
  마지막으로 바람직한 국가모델에 대해 물었다. "유럽식 사회국가모델"이라고 짤막하게 답한 진 교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프레시안에 이종태라는 사람이 이상한 글('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변')을 썼던데, 그 사람 왜 그래요?" 한다. 그러곤 곧 장하준 교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진 교수는 언젠가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공동저자인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 등과 TV토론을 한 적이 있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를 놓고 두 진영이 충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 교수는 "이 얘기는 꼭 써주세요. 내가 따로 글을 쓸 시간이 없으니까"라고 했다.
  
  "장하준 씨가 재벌과의 사회적 대타협 얘기하잖아요? 삼성을 보라는 거예요, 지금. 과연 대타협의 문제냐는 겁니다. 삼성이 노조를 인정 안 하는 겁니다. 타협 한 번 해보라고 해요. 어떤 타협안이 가능한지. 그리고 스웨덴에도 재벌이 있다? 스웨덴 재벌하고 한국 재벌이 같으냐는 겁니다. (재벌의 성격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스웨덴은 입헌군주국이고 우리나라는 봉건군주국이에요. 재벌 체제가 완전히 다른데 같다고 하고. 그리고 그나마도 스웨덴이 전 세계에서 유일한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재벌 해체하자고 한다는데 해체할 힘이 있습니까. 해체 안 됩니다, 결코. 재벌 해체한다는 게 기업군을 해체한다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진 교수는 국가의 경제조정적 개입을 사회주의적 요소로 보는 건 '황당하다'며 장 교수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박정희가 사회주의적이었다? 절대로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세 가지를 다 할 수 있습니다. 국가주의적 통제를 할 수 있어요. 파시즘처럼. 그러다 완전 자유주의로 갈 수도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뉴딜식 사회복지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는 겁니다. 이 세 가지는 자본주의가 택할 수 있는 옵션에 속하지 '어느 게 사회주의냐',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국가가 경제에 조정적 개입을 하는 체제가 아니라 사회복지적 개입을 하는 체제거든요. 그런데 저 사람들 얘기하는 건 경제조정적 개입이에요. 그걸 사회주의로 본다는 게 황당하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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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논설위원칼럼]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김유선 /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1 13


» 김유선/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이 글을 남기고 얼마 안 가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고 외치며 스스로의 몸을 불살랐다. 1970년 11월13일 오늘, 스물두 살 전태일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당시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안게 만들었으며, 오늘날 민주노조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70년대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하던 민주노조 운동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잡았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개선되고 노동시간은 단축되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태일 열사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은 37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법정 유급휴가조차 갖지 못하는 노동자가 800만명에 이르고, 법정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200만명에 이른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에 대해서는 걸핏하면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정부와 재계, 수구언론도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노동현실에는 애써 눈을 감는다.

지난달 27일에는 20년 넘게 전봇대를 오르며 고압선과 함께 살아온 비정규직 건설노동자 정해진이 “전기원 노동자 파업은 정당하다”고 외치며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남들처럼 주5일제도 아닌 격주 토요휴무제를 요구하며 넉달 넘게 파업했음에도 단체협약조차 타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이, 마흔여섯 살 정해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또 한 명의 전태일이 다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해진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숱한 노동자들의 죽음 소식에 우리 사회가 불감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

엊그제 일요일에는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1988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과 노동법 개정을 목표로 시작된 전국노동자대회는 지난 20년 동안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치러진 노동계 최대 행사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정부가 원천봉쇄하더라도 경찰과 숨바꼭질하면서 전국노동자대회를 치러냈고, 문민정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불허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참여정부는 올해 노동자대회를 원천봉쇄함으로써 20년 전통의 전국노동자대회에 새로운 역사를 보탰다. ‘문민정부 이후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 원천봉쇄’. 경찰은 도심의 극심한 교통체증과 시민불편 운운하며 집회금지를 통고했고, 노동부 등 네 부처 장관은 연명으로 담화문을 발표했으며, 지방에서는 대회 참가자 상경을 원천봉쇄했다.

그럼에도 전국노동자대회는 치러졌다. 서울 남대문에서 시청까지 거리에서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는 동안,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광화문까지 거리에서는 집회 참가자 수와 맞먹는 2만여 전경이 도심의 교통체증과 시민불편을 야기했다. 1990년에는 노태우 정권이 집회에 최루탄으로 대응했는데, 2007년 참여정부는 물대포와 도심 상공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회를 방해하는 헬리콥터로 대응 방식을 바꾼 데서 그나마 위안을 찾아야 할까?

과연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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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포럼] 당신들만의 ‘법치’

출처: <경향신문> 2007년 11월 11일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길거리를 덮은 광경이 아니더라도 두꺼워진 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차다. 이때쯤이면 따뜻한 온기가 소중해지기 마련인데, ‘법치와 공권력이 무너져 불법집회와 파업이 만연하다’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체감기온이 더 뚝 떨어진다.

2007년 11월 9일 현재 파업 발생건수는 전년대비 20.6% 줄어들었고 근로손실일수는 무려 59.8% 감소하였다. 파업발생 건수가 덜 줄어든 것은 대기업 정규직의 파업은 대폭 감소하였지만, 비정규직 및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올 한해만 해도 이랜드를 비롯하여 코스콤, 울산건설플랜트,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울산과학대·안동대·창원대·청주대·광주시청 등의 청소용역 등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의 쟁의가 지속되었고, KTX, 기륭전자, 르네상스호텔 등은 최소한 1년 이상 미해결 상태이다. 개인적인 분신·자살까지 고려한다면 사회적 취약계층의 저항이나 연대집회가 ‘법치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낳는 요인 중 하나이겠지만 진짜 법치실종은 다른 곳에 있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는 것은 헌법 전문에 보장된 조항이며 그런 점에서 한국은 법치주의 국가이다. 문제는 국민의 특정 집단이 ‘자유와 권리’에서는 배제되고 ‘책임과 의무의 완수’만 요구받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에게는 ‘차별없이 일할 권리’가 거의 없다. 분명히 취업하였는데 이들의 4대 보험 가입률은 40% 수준이고 시간외수당, 퇴직연금 등 각종 기업복지로부터도 차별받는다. “생리휴가 내겠다고 했다가는 다음번에 재계약이 안되”고 “산전산후 휴가 받는 사람 못보았는데요”가 현실이다. 또한 비정규직에게는 ‘차별없이 요구할 자유’가 없다. 노조를 만들었다가는 해고되기 일쑤고 법원 문턱은 유달리 높다. 게다가 ‘차별없이 투표할 권리’도 없는데 대통령선거일이 법정유급휴일이 아닌지라 선거일에 투표하자면 하루 일당을 포기해야 하는 노동자가 최대 800만명이다.

각종 정부통계에서도 비정규직은 잘 잡히지 않는다. 비정규직에 대한 인구조사가 시작된 것이 2000년 8월부터이지만 그나마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은 현 통계조사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비정규 근로가 애시당초 정규근로가 ‘아닌’ 집단범주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일 리가 없다. 결국 누구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함께 하는 것’이라면 비정규직에게 존재의 이유는 ‘인정받는 것’이다. 자유와 권리를 가진 자로서 그리하여 책임과 의무를 완수할 수 있는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으로서.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헤겔을 원용하면서 사회의 윤리적인 발전이 기존 사회에서는 범죄로 낙인된 ‘인정투쟁’, 명예회복 투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즉 비정규직의 저항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가진 인격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자신의 노동 및 개인적 능력에 대한 사회적 거부가 반복되는 것에 대한 굴욕감과 분노의 표현이며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사회가 한 단계 높은 도덕적인 수준으로, 선진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이다. 따라서 법치주의 국가는 개인에게 책임과 의무의 완수를 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자유와 권리의 보장을 명시하고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 전자만을 강조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특정집단과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종의 폭력이 된다.

1970년 11월 전태일이 노동자들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분신하였을 때 ‘법치’는 책임과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7년 뒤인 2007년 11월의 ‘법치’도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책임과 의무만을 강조한다. 인정투쟁이 아무리 사회의 도덕적 발전의 계기라 하더라도 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사람들의 아픔은 찬바람보다 더 살을 에인다. 당신들만의 법치가 아닌 모두의 법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법치를 기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은수미/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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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늘이 11월 1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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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할 수 없는 ‘문학 종언’ 경고

<인터넷한겨레> 2007 11 09

» 〈근대문학의 종언〉
 
장정일의 책 속 이슈 / 〈근대문학의 종언〉
가라타니 고진 지음·조영일 옮김/도서출판b·2만원


일본계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기세 좋게 선언한 ‘역사의 종언’이 농담이 되고부터, 한국인들은 어떠한 일본제(製) ‘종언’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이 될까?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활동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작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우리나라 문학계의 냉소를 보면, 그런 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종언은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주장은 간명하다. 근대 이전의 세계는 다수의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제국의 범위는 몇 개의 언어 권역과 일치한다. 동아시아라면 한자, 유럽이라면 라틴어, 이슬람이라면 아라비아어라는 식이다. ‘문자언어’의 성격이 강했던 이 세계어들은 제국의 주변부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읽고 쓰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제국은 수많은 지역 국가로 분절되기 시작했고, 근대 국가란 다름 아닌 ‘언문일치’의 국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 국가 만들기에 기여한다.

지은이에 의하면 근대문학이란 어느 장르도 아닌, 소설을 가리킨다. 소설은 신학이나 철학과 같은 이성 능력이 아닌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 생긴 시민계급에게 지적·도덕적 발견을 실어 나른다. 제국과 세계어라는 구심력에서 벗어나서만 비로소 쓰여지는 ‘언문일치’의 소설은 ‘공감’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묶고,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 예컨대 일제 시대의 젊은이로 하여금 계몽과 해방의 주먹을 부르쥐게 했던 것은 이광수의 <무정>이고, 심훈의 <상록수>였다.

근대소설은 그 발생에서부터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 밖에서 종교가 추구하지 못하는 진실을 추구했고, 또 정치는 아니지만 정치의 영역 밖에서 정치가 억압하는 진실을 드러내 왔다.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성공한 혁명이 곧바로 제도가 되어버리는 어느 정치혁명보다 더 혁명적이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는 정치혁명이 보수화될 때 문학은 “영구혁명”을 계속한다고 했던 것이지만, 어느날 문학이 사회적 임무나 도덕적 과제를 벗어버린다면 그것도 ‘근대문학’일 수 있을까?

» 장정일의 책 속 이슈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성취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 문학은 대중문화에 투항하거나, 과민한 자의식만을 표현한다. 거기서 작가와 평론가들은 대학과 출판계에 안주하거나 투신하여 스스로 제도가 됨으로써, 사회적 ‘공감’ 능력을 잃게 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의 종언’이 한국에서도 감지된다면서 “1990년대에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고 썼지만, 최원식의 말대로 “내가 알기론 김종철을 제외하고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한겨레> 10월 27일치 19면). 하지만 그걸 책잡아 ‘종언’이 주는 문제의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오만이다. 근 15년 동안 한국 문학이나 문학평론가들은 <녹색평론>을 능가하는 어떤 사회적 의제도 만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문학계를 떠난 그만이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무엇을 반증하는 것일까?

장정일 소설가


내오랜꿈 ----------------------------------------------------------------

장정일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논점의 옳고 그름은 논외로 한다. 도입부인 첫번째 문단만 검토 한다.

"일본계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기세 좋게 선언한 ‘역사의 종언’이 농담이 되고부터, 한국인들은 어떠한 일본제(製) ‘종언’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이 될까?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활동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작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우리나라 문학계의 냉소를 보면, 그런 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종언은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 - 장정일, 위의 글

[근대문학의 종언] 논쟁1 - 이젠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 조영일

[근대문학의 종언] 논쟁3 -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 권성우

위의 두 글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정일은 인용한 문단처럼 완전한 엉터리 전제를 도입하면서 마치 훈계하는 듯한 논조로 시작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장정일의 국어독해능력이 '빵점'이거나 의도적인 '조작'이다. 그가 조금 아래의 문단에서 최원식 교수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한겨레>에 연재된 다른 두 사람 조영일, 권성우 씨의 글을 읽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조영일, 권성우 씨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에 냉소를 보내지도,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의 상황은 아니라고 무시한 적도 없다.

"오히려, 가라타니의 지적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확히 한국문학을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 중략)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문학이 문학시스템에 맞게 ‘그들만의 문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사회·역사적 변화를 통해 다양화되기보다는 제도가 만들어놓은 ‘문학성’에 의해 획일화되어버린 것이다." - 조영일, 위의 글

"오히려 가라타니의 명제는 지금 이 시대 한국문학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채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 일반의 종언이 아니라,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드는 비판적 문학의 근본적 위기쯤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 중략) 역설적인 맥락에서 늘 자명성에 대한 회의를 강조하는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명제는 실상 우리에게 스스로가 속하거나 편승하고 있는 문단시스템과 거대언론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권성우, 위의 글

조영일, 권성우 씨의 입장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누구도 가라타니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냉소를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장정일은 두 사람의 글 어디에서 그러한 냉소를 읽은 것일까? 참으로 신통방통한 재주를 지닌 장정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 더 하자면 장정일이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건 사회과학에서 상식에 속하는 내용이거나, 조영일 씨가 앞선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들이다. 장정일의 같잖은 오만함은 한마디로 꼴불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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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투쓰리쇼 2010-12-04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신 말처럼, 장정일이 당신이 인용해 놓은 조영일과 권성우의 글을 몰랐으리란 전제가 가능하지 않다면 - 장정일이 저 두 글을 읽지 않았을 리가 없지. 왜냐하면 장정일은 두 글이 실린 신문의 오랜 고정 필자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일은 왜 한국 문학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고언은 무시됐다'고 썼을까?

그건 한국 문학 주류 속에서 권성우와 조영일의 지분이 미미하기 때문이고, 두 사람만의 메아리로는 부족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지.

하므로 여기서는 장정일의 '오만'을 얘기할 게 아니라, '의리'없음을 얘기해야지 더 그럴듯하겠지. 즉은, 이왕 쓰는 글, 권성우와 조영일을 한번쯤 언급해 주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글쓰는 사람들은 서로 의리 없거든. 권성우와 조영일에게 물을 수 있으면, 물어봐. 서로을 동지라고 생각하고, 서로 각별히 인용해 주는지? 그러니 장정일에게만 '의리'를 물을 필요도 없겠지.

내 오랜 꿈씨, 한번 봐. 상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있으면, 당신도 저 책을 한번 요약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