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주화는 ‘약한’ 민주화
[좌파, 국가를 디자인하다] 사회 국가② - 그 결과는 자본 국가, 시장 국가
진보정치연구소 redian@redian.org
출처 : <레디앙> 2007-12-22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가 이번에 펴낸 책, 『사회 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후마니타스)는 한국 사회가 재설계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면서 ‘사회 국가’를 그 열쇠말로 제시한다.

 <레디앙>은 진보정치연구소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책 내용 가운데 서론과 결론 부분을 발췌해 몇 차례에 걸쳐 나눠서 싣는다. 이 책의 서문은 조승수 연구소 소장이 썼으며 내용은 장석준, 성은미, 조진한, 이상호, 정택상, 강병익 연구위원들이 맡아서 썼다.

내용 중 푸른 색의 제목은 원책자에 나온 것이며 검은 색의 굵은 글씨 제목은 편집진에서 임의로 붙인 것이다

<편집자 주>


2절 ‘약한’ 민주화의 결과는 자본 국가, 시장 국가

겉으로만 보면 한국의 민주화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중남미나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군부 세력은 이제 더 이상 한국 정치의 주요 변수가 아니다. 전두환, 노태우를 어떻게든 재판에 회부한 것도 예를 들어 칠레 같은 나라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대목이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는 죽을 때까지 어떠한 단죄도 받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또한 한 차례 정권 교체를 경험하기도 했다. 군부 독재 정권 시절 가장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던 야당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 보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혁명 비슷한 사건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한 거의 유일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중대한 문제점과 한계가 존재했다. 무슨 문제들이었는가? 우선 그 주인공에게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또한 그 의제에 문제가 있었다. 이제부터 그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민주화의 주역들이 분열되다

첫째, 민주화의 ‘주인공’의 문제를 살펴보자. 한국에서는 민주화를 위해 싸운 대중들이 곧바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 분열은 좀처럼 극복되지 못하고 점점 더 곪아들어 갔다.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노동자, 농민이 독자적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80년대 민주화 투쟁 당시에도 노동자 민중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의 주도권은 보수 야당이 쥐고 있었다. 치열한 학생운동이 있었고 85년 무렵부터는 민주노조운동도 불붙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민주화 운동의 정치적 상징은 김영삼, 김대중이었다.

   
▲ 1987년 대선 당시의 양김씨
 
그런데 198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이들 양김 씨가 대통령이 될 욕심에 보수 야당을 둘로 가르고 말았다. 그러자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더해 ‘지역’이라는 새로운 대립 구도가 등장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대의 아래 호남 민중이 따로 없었고 영남 민중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87년 대선 뒤부터는 (그리고 사실 지금까지도) 어떠한 다른 대의도 ‘지역’이라는 분열선을 쉽게 넘어서지 못했다.

운동권이라 불린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90년대 내내 선거만 다가올라 치면 이른바 ‘새로운 피의 수혈’이 있었다. 선거 때마다 재야 명망가들이나 학생운동 경력자들(세칭 ‘386’ 정치인들) 혹은 노동운동 상층 간부들이 김영삼, 김대중 중 어느 한 쪽에 줄을 대서 지역주의 보수정당의 공직자 배지를 단 것이다.

일단 이런 식으로 흡수되고 나면 모두들 지역주의의 들러리가 되거나 보수정치의 새로운 주역으로 거듭 났다.

이러한 주체의 분열은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에서도 나타났다. 새롭게 등장한 민주노조들은 하나같이 ‘기업별’ 노동조합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법적으로 그것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을 단 조직들이 기업 단위로 쪼개져 존재한다는 것은,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기업 단위로 분열된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초기에는 이러한 문제가 그렇게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대기업 노조든 중소기업 노동자든 모두 자본가와 국가의 극성스러운 탄압에 시달렸기 때문에 서로 활발한 연대 투쟁을 벌였고 동지라는 의식도 강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여러 가지 조건들이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한 쪽은 임금이 오르는데 다른 쪽은 그렇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어느 한 쪽이 임금이 오른 것 때문에 다른 쪽 노동자들이 고달파지는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 이런 현실이 부각되자 노동자들 내부의 분열 양상이 걷잡을 수 없이 강화되었다. 그래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를 요구할 주역인 노동계급이 스스로 분열의 덫에 빠져 제 역할을 못하는 형편이다.

엘리트들 사이의 타협이 민주화 과정을 지배하다

둘째, 민주화의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를 보자.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지배한 것은 상층 엘리트 간의 타협이었다. 비록 엄청난 대중 동원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지만, 그 정치적 과정은 항상 기득권 세력 간의 타협으로 끝났다.

87년 6월 전국의 거리는 역사책에 나오는 혁명의 순간을 방불케 했다. 어떤 때는 한 장소에 무려 100만 명 가까이 모이는 일도 있었다. 이런 기억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의 힘이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딱 여기까지 만이었다. 군중 동원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대신 정치적 방향을 결정한 것은 군부 정권과 보수 야당의 상층 엘리트들이었다. 그 예고편은 1986년 4월 30일의 청와대 3당 합의였다. 이 때 군부 정권과 보수 야당은 국회 합의를 통해 개헌을 추진한다는 데 합의했다.

여기서 우리는 ‘국회 합의’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당시 ‘국회’란 군부 독재 세력과 보수 야당 양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헌법 개정이라는 전 국민적 사안을 정권과 보수 야당만의 협상과 합의로 처리하겠다는 것. 여기서 빠져 있는 것은 결국 누구인가? 바로 정작 민주화 운동의 주역인 거리의 대중이다.

이러한 타협의 연장선 위에 6. 29 선언이 있다. 6. 29 선언은 거리의 대중에 대한 군부 정권의 ‘항복’ 선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단 위기부터 넘기고 보려고 보수 야당에게 타협을 제안한 것이기도 했다. 6. 29 선언 어디에도 민주화의 실질적 조치는 담겨 있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다만, 양김 씨에게 대통령 직선의 기회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제6공화국의 헌법은 4. 30 합의 그대로 기존 국회 원내 정당들 사이의 협상만으로 만들어졌다. 오로지 그 해 12월의 대통령 직선 일정에 맞추기 위해 가을에 밀실에서 전격적으로 새 헌법을 만든 것이다. 이 과정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 이행을 한 브라질과 비교해보자.

브라질에서는 민주 체제의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해 의회를 새로 소집했다. 이 의회는 ‘제헌의회’라 불렸다. 그리고 약 2년에 걸쳐 개헌 토론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 투쟁에 참여한 여러 사회 세력들의 요구가 의제에 올랐다.

개중에는 노동권의 신장을 원하는 노동조합들도 있었고, 농지 개혁을 바라는 농민운동 조직들도 있었다. 외채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도 있었고, 아마존 생태계를 지키자는 환경운동의 주장도 있었다.

지금의 브라질 헌법이 이들 요구를 완벽히 충족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우리와 비교해보면, 브라질에서는 적어도 대중의 목소리를 민주화 과정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87년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이후에 비슷하게 재연되었다. 노태우 정권 이후 등장한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은 모두 1992년의 3당 합당과 1997년의 DJP연합이라는, 군부 잔당들과의 타협에 기반을 두었다. 3당 합당이나 DJP연합이 족보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어쩌면 이들 야합은 87년 이후 한국 민주화 과정으로부터의 일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상 궤도 안에 있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사실 타협을 통한 민주화가 우리만의 사례는 아니다. 1970년대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도 비슷했다. 스페인에서는 1975년 독재자 프랑코가 죽고 나서 민주화 이행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도 역시 기존 지배 세력과 야당 사이의 타협에 따라 민주화의 방향과 일정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 때 스페인의 야당은 좌파정당인 사회노동당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좌파정당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도 협상에 참여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노동조합이 중요한 제도 정치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1996년 연말에 시작된 노동법 개악 반대 총파업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가 정치적 실체로 부상한 중대한 사건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결말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노동조합을 배제한 채 정부와 보수 야당만의 협상이 진행됐고, 그래서 원래의 노동법 개악안이 거의 그대로 다시 통과되었다.

한국의 민주화는 ‘약한’ 민주화였다

셋째, 민주화의 ‘의제’ 측면에서 나타난 문제를 보자. 한국의 민주화는 철저히 정치적 민주화의 좁은 틀 안에서 추진되었다. 사회 경제적 민주화는 관심에서 비껴났고, 더 나아가서는 최근까지도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민주노조의 활동이 각종 노동악법의 족쇄에 묶여 있었던 데서 잘 드러난다. 민주노조의 전국조직인 민주노총이 합법적 지위를 부여받은 게 불과 10년밖에 안 된다. 그나마도 공무원노조는 여전히 각종 제약 아래 놓여 노동조합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민주화 초기부터 사회 경제 민주화가 의제의 중심에 오른 사례들이 많이 있다. 위에서 이미 살펴본 스페인만 해도 그렇다. 프랑코 독재 정부가 물러나고 제일 먼저 추진한 것 중 하나가 노동조합의 권한 강화였다.

포르투갈은 더 했다. 포르투갈에서도 스페인과 같은 시기에 민주화가 시작됐는데, 스페인과 달리 민중 혁명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1976년에 개정된 이 나라의 헌법은 정치적 민주화뿐만 아니라 대중의 사회 경제적 권리 신장을 약속하는 내용들이 풍부히 담겼다. 그 중에는 심지어 자본가들이 노동자 파업에 맞서 직장을 폐쇄하는 것을 원천 금지하는 조항까지 있었다.

브라질 제헌의회에서도, 위에서 소개한 대로, 사회 경제 민주화 조치들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사안은 노동권의 완전한 보장이었다. 그래서 브라질의 새 헌법에는 120일의 유급 출산휴가, 노동시간 단축, 여성과 여타 가내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권 적용 확대 등 굉장히 구체적인 노동권 관련 조항이 담기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헌법의 내용으로는 좀 시시콜콜하다 싶을 정도로 상세하게 말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우리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는 지금까지도 정치 의제의 협소함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17대 국회에서도 그랬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한 이른바 ‘4대 개혁’ 안에는 서민들의 살림살이에 직접 보탬이 되는 사회 개혁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를 더 각박하게 만드는 비정규직 관련 악법이 허울 좋은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라는 명목으로 통과됐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들―주체의 분열, 엘리트간 타협의 과정, 의제의 편협함―은 한국의 민주화가 ‘허약한’ 민주화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어떤 점에서 ‘허약’했는가? 군부 독재 정권 아래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던 사회 세력들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댈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이들 기득권 세력의 이해를 조금이라도 침해할 수 있는 개혁은 거의 추진되지 못했다. 그 기득권 세력의 중심에 있는 게 바로 자본, 특히 ‘재벌’로 상징되는 거대 자본이다.

군부 독재의 뒤를 이은 자본 독재

자본에 맞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회 세력은 노동운동이었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조차도 기업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자본에게는 그렇게 두려운 도전자가 되지 못했다.

대기업 노동조합들의 치열한 쟁의 행위는 재벌 독점자본의 권력을 문제 삼는 게 아니었다. 단지 이들을 기업 단위 교섭 테이블에 불러들이기 위한 압박에 불과했다. 따라서 민주화 투쟁의 절정기에도 거대 자본의 권력은 거의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권력을 강화했다. 우선 80년대 중반 3저 호황으로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축적했다. 이제 한국의 독점 자본은 그들 스스로 초국적 자본으로 비상하길 꿈꾸기 시작했다. 또한 민주화도 대자본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군부 독재 정권이 힘이 약해지자 재벌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들은 국가보다 더 위에 군림하려 했다. 거대 자본이 직접 권력의 주역으로 나서고자 한 것이다. 이것을 현학적으로 표현한 게 “권력을 시장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구호가 곧 ‘자유화’였다.

97년 외환위기조차도 거대 자본의 힘을 누그러뜨리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굳게 다지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일부 재벌들이 퇴출당하기는 했지만, 이른바 ‘빅딜’을 계기로 삼성, 현대 등 극소수 거대 자본은 더욱 막강한 권력을 차지했다.

   
▲ 이건희 삼성 회장과 노무현 대통령 (사진=뉴시스)
 
급기야는 그 권력이 좁은 경제 영역을 넘어서 사회 구석구석으로까지 뻗어나가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삼성 공화국’이라는 자조 섞인 유행어까지 나돌게 됐다.

진보정치연구소는 2005년 5월 1일 발표한 보고서(장석준, 「기업지배사회를 넘어 노사관계의 전면 재편이 필요하다」)에서 이러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기업지배사회’라고 규정한 바 있다. 여기서 ‘기업’이란 말은 다름 아니라 ‘자본’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이 보고서는 기업지배사회를 “기업의(사실상은 지배적 기업, 즉 재벌 독점자본의) 단기적 이해와 편향된 가치가 사회 전체의 장기적 이해와 이에 대한 민주적 논의 결정 구조를 억압 왜곡하는 상황”이라고 정의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자본의 편협한 단기적 이해 때문에 사회의 다른 모든 가치와 이익, 저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 장부에 흑자 수치를 늘리기 위해 하청 중소기업의 제조 단가를 무조건 낮추라고 요구하는 게 바로 그런 횡포 아닌가? 수많은 젊은이와 여성들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그야말로 잠깐씩 쓰다가 소모품처럼 내버리는 것도 그런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뽑아낸 이윤으로 주식 배당금 잔치를 벌이고, 남는 돈을 부동산 투기에 쏟아 부어 불로소득을 누리는 게 다 그런 짓 아닌가?

이쯤 되면 민주주의의 1인1표I(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한다)의 원칙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그보다는 시장의 1원1표의 원칙(돈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권리를 누린다)과 주주총회의 1주1표의 원칙(주식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권리를 누린다)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게 옳겠다.

이것은 사실상 인민(demos)이 아니라 자본이 주인 노릇하는 국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한 마디로 ‘자본 국가’라고 부른다.

자본 국가는 기업지배사회의 정치적 측면(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을 좀 더 부각시킨 개념이다. 자본 국가는 자본의 권리가 사회의 다른 모든 권리들에 우선하는 정치 사회 체제다. 자본의 이윤 추구가 민중의 행복 추구에 우선하고, 소유권 경영권 행사가 다른 기본권의 보장보다 더 중요시되는 것이다.

자본 국가는 또한 ‘시장 국가’이기도 하다. 자본 국가에서는 자본의 고삐 풀린 자유가 활개 치는 ‘시장’ 영역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 비해 항상 우위에 서고, 더 나아가는 시장이 사회의 다른 부분을 자신의 식민지로까지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약한’ 민주화의 귀결은 ‘약한’ 민주 국가였고, 그 틈을 비집고 성장한 게 결국 자본 국가, 시장 국가다. 피를 흘린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엄한 자들이 제 뱃속을 채웠다.

그리고 이제 자본 국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오직 국내외 거대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골몰한다. 최근의 그 결정판이 바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한미 FTA는 단순한 무역협상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국내외 거대 자본의 입맛에 맞게 송두리째 바꾸려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혁명이다.

상황이 이러니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파도에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파괴적으로 휩쓸리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자본 국가, 시장 국가는 세계화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방어하려 하기보다는 도리어 앞장서서 다수 대중의 삶을 짓밟으며 자본의 권리를 늘릴 대로 늘린다. 양극화를 제어하기보다는 그것을 유례없이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사회학)도 한국 사회를 우리와 비슷한 각도에서 분석한다. 그는 작금의 한국 사회가 ‘기업사회’로 변해가고 지적한다. 김동춘이 정리하는 기업사회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자본의 고유한 권력인 생산 지휘권이 극대화되고 사회 영역으로 확대된다.

2. 정치, 사회가 기업 활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봉사하는 역할을 한다.

3. 기업의 생산성이 곧 국가나 사회의 생산성으로 간주된다.

4. 1인1표의 원리가 아닌 소유 지분만큼의 권리 원칙이 기업 외의 사회 조직에도 적용된다.

5. 대기업 및 기업가 단체가 단순한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영역에까지 간섭한다.

6. 정치 활동, 정책 활동, 법원, 미디어 등은 주로 대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7. 국민, 시민, 주민 혹은 기업의 판매망 안의 모든 사람들은 곧 소비자로 불린다.

8. 모든 정부, 사회 조직의 우두머리는 경영자 CEO를 이상적인 역할 모델로 설정한다.

9. 조직의 목표가 기업과는 가장 거리가 먼 조직, 예를 들면 교회와 학교까지도 기업의 모델을 따라서 자신을 재조직한다.

10. 정치, 사회 엘리트층까지도 주로 기업 경영자 출신이 차지하게 된다.

11. 노조활동은 대체로 기업 경영의 방해물로 간주된다.

12. 행정부는 기업조직을 모델로 한다. 정부 부처 중에서는 경제 부처가 다른 모든 부처를 압도한다.

13. 경제학이 사회과학 중의 사회과학이 되고, 또다시 회계학과 경영학이 경제학을 대신한다.

14. 경쟁력이 없는 것은 곧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된다. 공공성은 곧 무책임과 동일시된다.

(김동춘,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 ‘기업사회’로의 변화를 중심으로」,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 길, 2006.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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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대'가 된 민주노동당
[제2창당운동을 시작하자②] 평등파 역시 철저히 자기 비판해야
 
출처:<레디앙> 2007년 12월 28일 장석준 / 진보정치연구소
       

1-2. 원내 진출 이후 불거진 문제들

원내 진출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민주노동당을 옥죄기 시작한 문제들도 있다. 이들 문제가 위에 지적한 민주노동당의 근본 문제들과 서로 얽히면서 당은 최악의 침체와 곤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③ 원내 정당이 되고 나서 목표 상실 상태가 됐다

민주노동당 초기의 에너지는 ‘원내 진출’이라는 간명하고 절절한 당면 목표에서 나왔다. 원외 정당을 4년 넘게 유지하고 결국에는 원외에서 원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게 만든 저력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거기에는 88년 총선부터 계속된 원내 진출 실패에 대한 설욕 의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막상 원내에 진출하고 나자 이제는 그 정도의 뚜렷한 당면 목표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목표가 없는 조직은 활력을 잃고 결국 부패하고 만다. 그런데 원내 진출 이후의 민주노동당이 딱 이 신세였다. 물론 이러한 진공 상태에 대응하려고 ‘집권’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상태나 실력을 보면 너무나 허황한 이야기였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결국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 그만큼 부족했던 탓이었다. 이념, 노선 문제를 우회하고 봉합해온 결과였던 것이다.

18대 총선을 앞둔 지금, 이 목표 상실 상태는 가장 타락하고 희극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든 비례대표 후보 자리를 차지해서 원내에 진출하고 보자는 흐름이 당을 지배하고 있다. 반면 지역구 출마는 다들 기피한다. 지금 민주노동당은 운동권이 국회의 얼마 안 되는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투전판과도 같은 신세다. 그러니 자민련의 좌파판이라는, ‘좌민련’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것도 억울한 일만은 아니다.

④ 17대 국회에서 민중의 기대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원내 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에 대한 민중의 기대와 시대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17대 국회에서 대중이 진보정당에게 바란 것은 한나라당, 열린우리당과는 전혀 다른 내용과 형식의 정치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양극화로 고통받는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이었고, 그들에게 새로운 정치 의식 획득과 조직화의 기회를 여는 일이었다.

사실 민주노동당의 모든 역량을 여기에 집중한다 해도 될까 말까 한 엄청난 과제였다. 그래서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했던가? 17대 국회에 들어가자마자 노무현 정부의 ‘4대 개혁’을 도와주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다.

   
▲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의 4대 개혁에 ‘2중대’로서 ‘올인’했다. (사진=뉴시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대중에게 ‘열린우리당 2중대’, 이른바 ‘범여권’의 일부로 낙인찍혔다. 아니, 당 지도부 안에는 ‘열린우리당 2중대’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세력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 낙인은 17대 국회 내내, 그리고 대선을 치른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통합신당의 추락과 함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도 동반 추락했다.

민주노총에만 기대는 조합주의 정치에 갇혀서 제대로 시도하지 못한 일도 많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게 비정규직, 저소득층에게 다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방기한 것이다. 비정규직 악법을 막는 투쟁에서도 항상 민주노총과의 협의에만 무게를 두었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직접 대화하려는 노력은 적었다.

17대 국회 진출 직후부터 ‘빈곤과의 전쟁’에 당력을 모으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몇몇 개인의 발상으로만 그쳤다. 그래서 급기야는 “민주노동당은 가난한 사람들의 당이 아니라 중간층(노동계급의 극히 일부나 지식인)의 당이 아니냐”는 비판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지금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뿐만 아니라 17대 국회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 환멸의 대상 안에는 민주노동당도 포함돼 있다.

⑤ 국회의원을 확보하고 나서도 진보적 대중정치의 전형을 창출하지 못했다

원내 진출의 의의는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진보적 대중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일구는 데 있었다. 물론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몇 대중 정치인이 성장했고, 제도 정치의 ABC도 마스터했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삼성 재벌과 정면 대결했고, 노동자, 농민의 문제로 국회 단상을 점거하는 낯선 광경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에 대중정치의 새로운 전형이라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대신 당의 관심과 역량이 일방적으로 국회의원들에게 쏠렸다.

당직공직분리제 등의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피할 수 없었다. 국회의원들에게 마치 만능 해결사와도 같은 역할을 기대했고, 당의 정치 계획은 국회 의사 일정에 종속되었다. 민주노총 같은 대중조직 역시 국회의원을 제도 정치에 파견한 ‘협상 대표’ 쯤으로 바라보았다.

고전적으로 표현하면 이것은 의회주의 편향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당내의 비판에도 어떤 한계가 있었다. 의회주의에 가두 투쟁을 대립시키는 식의 도식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의회주의 편향에 대한 비판이 항상 상투적인 대안의 제시로 귀결되곤 했다. 의원들이 가두 투쟁에 참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거나 국회 안에서 상임위나 단상 점거 농성을 벌일 때 좀 더 격렬하게 해야 했다는 식의 주장이 그 전형적 사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분석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희화화된 논의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17대 원내 활동에서 짚어야 할 핵심적인 오류와 한계는 다음의 두 가지 지점이다.

첫째, 원내 활동의 힘을 노동운동의 새로운 조직화와 연결하지 못한 점. 민주노동당은 원내 활동과 대중투쟁의 결합을 이야기하면서 그 ‘대중투쟁’을 항상 기존 노동조합 중심으로만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와의 새로운 접촉이자 그들의 조직화였다.

어차피 17대 국회 임기는 정규직, 대기업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의 한 세대가 침체의 최저점에까지 도달한 시기였다. 그렇다면 과거 민주노조운동의 아련한 추억에 얽매이기보다는 새로운 노동자 투쟁의 주인공이 될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보다 주목했어야 했다. 국회의원들이 그 조직화의 살아 있는 계기들이 되어야 했다. 허나 그 시도조차 제대로 못했다.

둘째, 원내 활동의 힘을 지역의 새로운 운동과 연결하지 못한 점. 일단 국회에 진출하고 나자 지방 정치는 당의 주된 관심에서 밀려났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비록 여의도의 국회에서는 한 동안 제3당이었을지 모르지만, 지역에서는 결코 한 번도 그 정도 위상을 확보하지 못했다.

지역 당조직들이 중심이 된 학교 급식 조례 제정 운동이 일부 원내 활동과 결합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니셔티브는 당의 지역조직에서 나왔지 원내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국회의원 활동을 지방의원이나 당 지역조직 활동과 결합시켜 새로운 전국 정치의 모델을 만들려는 시도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17대 국회가 거의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진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서야 지역의 영세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카드 수수료 인하 운동이 그 맹아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⑥ 진보적 지방 정치에 대한 비전이나 계획이 없음을 드러냈다

위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에 진보적 지방 정치의 전망과 고민이 부족했다는 점과 직결된다. 창당 후 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지방 정치에 대한 양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양 편향은 그 어느 것도 지방 정치의 독자적 의의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극히 왜곡된 시각만을 갖는다.

한 가지 편향은 지방 정치를 단순히 중앙 의회로 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 경우에 지방 정치는 지역구에서 총선 표를 확보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또 하나의 편향은 당의 지역 활동을 기존의 전국적 운동의 연장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당 지역조직들이 여전히 기존 운동권 단체 활동을 반복하는 것(가두 서명 작업이나 집회 동원 등)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2006년 지방선거 결과로 심각하게 드러났다. 특히 민주노동당의 아성이라던 울산에서 그랬다.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와 동구에서 8년간이나 여당으로 있었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민주노동당의 이름을 내걸고 집권한 것만 4년이 넘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지방 정치의 모델을 보란 듯이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내부 정파 투쟁 때문에 그런 문제점들을 미연에 발견해서 시정하려는 노력조차 게을리 했다.

여기에 깔려 있는 근본 문제는 지방 정치를 중앙 정치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진보적 지방 정치의 비전도, 그 방침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 지역조직의 책임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책임은 중앙당에 있다. 중앙당은 울산을 지역구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선거 상의 거점으로만 여겼다.

그래서 차기 선거에 해가 될 사고만 일어나지 않으면 좋다는 식으로 울산의 지방자치에 접근하거나 아니면 아예 방치해버렸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정치관이 한국 정치 전반의 구태(지방이 중앙에 휩쓸려 들어가는 이른바 ‘소용돌이의 정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⑦ 당의 조직 혁신이 지체되었다

민주노동당 조직 전반을 크게 손봐야 한다는 요구는 이미 2003년부터 있었다. 2003년의 당 발전특위 보고서, 2005년 당직 선거 과정에서 나온 여러 정책들, 2006년 외부 전문가들에게 의뢰한 당 조직 컨설팅 보고서 등이 다 그런 요구들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 당 조직의 기본 골격에 손을 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사실 진보정당운동은 자기 조직에 대해 창조적 파괴를 거듭해야 한다. 진보정당이 대중의 신뢰를 얻는 것은 그 이념과 정책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혁신적인 조직 체계와 그 운영을 보여주는 것도 대중의 호응을 얻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실제 민주노동당의 역사가 이 사실을 웅변한다. 민주노동당은 한국 정치에서 최초로 진성당원제도, 당직자와 공직 후보의 민주적 선출, 당비를 통한 당 운영 등 혁신적 조직 실험을 벌여 대중의 신망을 얻었었다.

그런데 정작 원내에 진출하여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모으게 된 이후에는 이런 혁신적 실험을 더 이상 보여주지 못했다. 조직 체계에 손을 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당 내의 정파적 이해였다. 조직 체계가 당 내 권력 투쟁의 유불리와 직결되기 때문에 패권적 정파가 조직 혁신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민주노동당은 조직 체계의 측면에서도 더 이상 ‘진보’정당임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⑧ 당원들이 극히 수동화되었다

진보정당의 활력은 당원으로부터 나온다. 원내 진출 이전까지는 민주노동당도 그랬다. 하지만,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원내 진출’이라는 당면 목표를 상실(?)하자, 당원들의 활력도 크게 떨어졌다.

더구나 민주노동당이 지나치게 민주노총이나 국회의원들에게 의존하는 활동에 머물고 이념적 퇴행의 모습까지 보이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당원들은 당 밖의 지지 대중과 마찬가지로 언론을 통해서만 당을 접할 뿐 당의 일상 활동에 참여할 구체적인 계기들을 제공받지 못했다. 그저 당직자나 공직 후보를 뽑을 때 선거권을 행사하거나, 당비나 특별 당비 내라면 호주머니를 털 따름이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나타나는 유권자의 협소한 권리나 의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진보정당의 당내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민주노동당에 그나마 존재하는 직접, 참여 민주주의가 오직 투표 민주주의뿐이라는 점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는 직접, 참여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투표 민주주의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깊이 뿌리 내렸다. 대중의 참여를 항상 공직자에 대한 직접 투표권 행사로 왜소화시켜온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민주노동당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 안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가? 투표 과정에서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든 형식적 다수의 지위를 차지하기만 하면 그 임기 동안에는 피선출자 마음대로 활동해도 좋다는 분위기가 당을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는 조직적인 부정 선거 양상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우열을 논하기 힘들다. 투표 민주주의 외에 다른 직접, 참여 민주주의의 경로가 활성화되지 못하면, 이렇게 민주주의의 정반대 양상, 즉 형식적 다수결을 악용한 사실상의 소수 독재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소수의 독재는 다시 당원들 사이에 실망과 좌절, 자포자기의 심정을 부추긴다. 그렇게 되면 당원들 중 일부가 개별 탈당을 통해 자신들의 불만을 ‘최종적으로’ 표출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이들이 당을 떠나면 당원들 사이에서는 수동적 분위기가 가일층 고조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소수의 독재는 더욱더 확고하게 보장된다.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2006년 말 북한 핵 사태와 이른바 일심회 사건 때부터 이러한 악순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은 당원 교육을 강화하고 당원 참여의 기회를 열려는 노력은 없이 재정 확보 차원에서 당원 수를 무차별로 늘리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 당원 확대는 이제 재정 사업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것은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다 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고참 당원들에 대고 휘두르는 마지막 주먹질이나 마찬가지다.

⑨ 지도력 성장이 지체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지도력 결핍으로 고통받았다.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정당이라면 마땅히 대중으로부터 정치적 지도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창당 당시 민주노동당에는 대중조직 활동이나 소규모 정파 활동을 통해 성장한 간부층이 존재했을 뿐, 대중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없었다.

원내 진출 이후 상황은 조금 바뀌었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대중적 정치 지도력의 빈 곳을 채울 몇몇 대중 정치인들을 갖게 됐다. 비록 지금 당장은 만족스러운 지도력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 그렇게 성장하리라 기대를 걸어봄직한 후보군들을 확보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그러한 잠재력을 실질적인 정치 지도력으로 대중들에게 인정받을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그 기회는 바로 올해의 대선 후보 당내 경선이었다. 올해의 대선 후보 경선은 당의 대중 정치인들이 명실상부한 차세대 지도력으로 부상하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성장의 기회는 ‘부자연스러운’ 개입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대선에서 대중이 진보정당에게 기대했던 답(그것은 정책이나 슬로건 이전에 그것을 상징하는 지도력으로 표현된다)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어쩌면 대중의 기대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마지막’ 배반이었을지 모른다.

⑩ 양대 진영의 투쟁과 구조적 담합 속에 당이 자기 교정 능력을 상실했다

2004년 이후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종북파를 중심으로 한 진영(세칭 ‘자주파’)과 그 반대파들의 진영(세칭 ‘평등파’) 사이에 대결이 계속됐다. 양대 진영 사이의 투쟁에는 두 가지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

첫 번째 측면은 이 투쟁에 민주노동당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 시대의 요구에 맞춰 기민하게 움직일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내 투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종북파의 무능과 전횡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지금 민주노동당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결국 당내 투쟁을 더욱 격화시킨다. 당 밖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활동이 그저 당내 파벌 싸움으로만 보이기 쉽다. 이것은 또 다른 악순환이다.

두 번째 측면은 좀 역설적이다. 그것은 투쟁의 이면에 양대 진영 사이의 구조적 담합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양대 진영은 민주노동당의 유지를 위해 서로에 대한 문제제기나 비판을 적당한 수준에서 봉합해왔다. 혹은 스스로 비판과 공격의 한계선을 그어놓고 그것을 넘어서길 꺼렸다. 그래서 뜻 있는 당원들은 종북파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정면 비판을 꺼리는 평등파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작년 말의 북한 핵 사태다. 평등파는 중앙위원회에서 퇴장하는 등 격렬한 항의를 했지만, 이것이 집요하게 계속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항의의 목소리가 조선 사회민주당의 방북 초청에 묻혀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이런 투쟁과 담합의 모순된 공존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자기 교정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당 혁신의 모든 노력은 종북파의 완강한 방해 속에서 결국은 항상 당내 투쟁 양상으로 귀결되고 만다. 당 혁신 투쟁이 곧 정파 투쟁으로 인식되고 마는 이 악순환을 넘어설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평등파 역시 그 한계가 컸다.

따라서 이른바 평등파 역시 철저히 자기 비판해야 한다. 평등파도 민주노동당이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데 한 몫 했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종북파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에 민주노동당이라는 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보수적 본능 때문에 비판을 자제하거나 겉핥기식 비판에 안주해왔다.

또한 원내 활동이 보인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소홀히 했다. 중앙 정치에 대한 편중과 진보적 지방 정치의 비전 결핍이라는 문제에서 평등파도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종북파의 재정적 무능이나 회계 부정에는 비록 댈 게 아니지만 평등파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법인 카드의 개인적 유용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따라서 당의 환골탈태는 종북파에 대한 비판으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평등파 역시 스스로를 쇄신해야 한다. (오렌지색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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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철도공사는 KTX승무원 사용자"
법원 판결, 노동부 주장 뒤집어…노정권 불법 부채질

박점규 현장기자
출처 : <프레시안> 2007-12-27


“한국철도공사는 KTX 여승무원들의 채용에서부터 실무수습, 교육, 승객서비스 업무의 수행, 평가 등 모든 측면에서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실질적으로 KTX 여승무원들을 지휘·감독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한국철도공사는 KTX 여승무원들에 대한 관계에서 실질적으로 ‘사용자’의 지위에 있다”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19개월째 파업과 투쟁을 벌여 공공부분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된 KTX 여승무원들의 실질적인 사용자는 철도공사라는 법원의 첫 번째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단독(재판장 구회근)은 지난 12월 20일 철도노조 KTX 여승무원지부 민세원 지부장의 업무방해에 대한 판결문에서 “한국철도공사는 KTX 여승무원들에 대한 관계에서 실질적으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 2조 소정의 ‘사용자’의 지위에 있다”고 판결했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내오랜꿈 ----------------------------------------------------------------------------

난 KTX란 말만 들어도 욕이 나올 정도로 안 좋은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애초의 기억부터가 안 좋다. 사업선정시 가장 조건이 좋았던(가격, 기술이전 등 모든 면에서) 독일 고속철도 'ICE(이체)'를 탈락시키고 'TGV(떼제베)'를 선택한 것부터 노태우 정권의 최대 비리사업의 하나란 점에서 그렇다. 경주 통과 노선 설정의 문제도 그렇고, 그 결과 천성산 터널 문제기 불거졌던 것 역시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완공되고 난 뒤엔 KTX 승무원 파업문제까지. 도대체 언제부터였던가, KTX 승무원 파업이.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여승무원을 두고도 노무현, 이상수, 이철이란 인간들은 목구멍에 밥이 잘 넘어갔는가 모르겠다. 이들이 누구던가? 과거엔 민청학련의 주역이자 민주투사였고, 노동악법 철폐를 외치던 인권변호사들 아니었든가? 지금은 참여정부의 대빵이자 철도공사의 사장이자 참여정부의 노동부 장관 아니던가. 이렇게 이 인간들 셋 모두가 지금의 KTX 여승무원 파업사태와 맞물려 있다. 차~암 나... 대통령, 노동부장관, 철도공사 사장이라니...

그래서 난 KTX란 말만 들어도 '인간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아래 글은 이상수가 노동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한국일보에 '특별기고'했던 글이다. "여성인력을 경제성장의 엔진으로"으로 삼아야 한다나 어쩐다나... )


[특별기고] 여성인력 경제성장 엔진으로 - 이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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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 미래는 '좌민련'이다"
[제2창당운동을 시작하자①] 민주노총 의존, 종북주의 청산
 
출처:<레디앙> 2007년 12월 27일 장석준 / 진보정치연구소 redian@redian.org
 
대선 직후 민주노동당 안팎에서는 현재의 민주노동당 구조를 깨고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하자는 주장이 연이어 터져나오고 있다. 여러 언론과 학계에서는 자주파의 낙후성으로 인해 민주노동당이 질곡에 빠져 있다는 진단 아래 자주파와 평등파가 분당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에 비해 민주노동당 내부에서의 논의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선 몇 달 전부터 개별 당원들의 탈당과 분당 요구가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조직적 논의는 적은 편이며, 몇몇 인사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타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노동당 또는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분당-창당 논의의 결론이 어떤 방향으로 귀결될지라도 공개적으로 점검되고 공방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레디앙>은 이런 취지에서 지금까지 나온 분당-창당론 중 가장 체계적인 글인, 진보정치연구소 장석준 상임기획위원의 '제2창당운동을 시작하자'를 다섯 차례로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주>

① 창당 시기부터 곪아온 문제들
② 원내 진출 이후 불거진 문제들
③ 미래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들
④ 새로운 방향, 제2창당운동에 나서자 1
⑤ 새로운 방향, 제2창당운동에 나서자 2


1. 민주노동당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평가해야 한다

원내 활동 4년에도 불구하고 2002년 대선보다 득표 절대치나 득표율 모두 뒤졌다. 원내 제3당이라면서, 창당한 지 3개월 된 정당의 후보에게 한참 밀렸다. 그 후보가 얻은 지지의 상당 부분은 민주노동당 지지층이었다. 이것보다 더 참담한 결과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대선 후보 경선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고, 코리아연방공화국 논란으로 나타난 정책 기조의 혼란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단지 대선 대응 과정만 평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대선 결과는 민주노동당이 최초로 제도 정치권의 일부로 활동한 17대 국회 4년의 결과와 직결된다. 그리고 17대 국회 활동은 다시 민주노동당의 창당 이후 7년의 활동 방향과 직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노동당의 지난 10여 년 역사 전반을 재평가해야만 한다.

넉 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 대한 대응도 이러한 재평가에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 총선까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이 작업을 미룰 이유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총선이라는 대중의 심판을 앞두고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집약적으로 민주노동당의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하여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러한 재구성 과정 없이는 ‘진보적인’ 정치 세력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책임성을 갖춘’ 정치 세력으로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1-1. 창당 시기부터 곪아온 문제들

우선 민주노동당의 창당 시기부터 당 안에 잠재해 있다가 이후 서서히 당의 발전을 발목 잡은 문제들이 있다. 어쩌면 이것들이야말로 당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① 민주노총 의존 체질: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으로 대신해왔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이 가장 먼저 뿌리 내려야 할 지반은 노동계급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그 이름에서부터 ‘노동’을 표방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관임을 자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민주노총 의존으로 대신했다. 사진은 금년 1월 열렸던 양 조직 관계에 대한 토론회 (사진=진보정치)
 
한데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민주노총과의 ‘조직형식적’ 관계로 대신했다. 독자적으로 노동자 당원을 모집하려 노력하기보다는 민주노총 정치위원회에 그 역할을 떠맡겼다. 선거 자금 마련도 민주노총에 크게 의존했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노동 정치는 당의 독자적 목표 설정이나 기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의 정책을 단순히 대변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사실 민주노동당의 기본 골격은 진보정당의 표준형, 즉 독일 사회민주당 유형에 해당한다. 당 강령에 동의하는 노동자(와 근로 대중)가 개인적으로 입당하는 체계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이념과 정책, 독자적인 노동 정치 활동의 결과로 노동자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맞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러한 독자적 활동과 인정의 체계를 기피했다. 대신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으로 이를 대신해왔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현실은 영국 노동당 유형, 즉 노동조합의 집단적 지지에 크게 의존하는 진보정당 형태에 가까워졌다. 그러면서도 영국 노동당형 진보정당들에서 나타나는 노동조합 조합원의 집단 입당 제도는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과거 일본 사회당과 가까워지고 만다. 과거 일본 사회당은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총평, 그것도 총평의 상층 간부들에 대한 의존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일단 총평이 흔들리자 수십 년간 제2당의 지위를 점하던 당 자체가 무참히 붕괴하고 말았다.

일본 사회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의 민주노총 의존 체질도 당의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창당 당시부터 진보정당답지 않게 이념과 노선에 대한 고민이 적었다. 당 안에서 정파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오히려 과도하게 이념에 집착하는 당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 정반대다. 당원들 사이에서 이념과 노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는 게 진짜 문제다. 그래서 과거의 낡은 이념을 고집하는 정파가 당을 지배하거나 그것이 분란의 원인이 되는 일이 벌어지고 그게 바깥에는 ‘이념 집착’으로 보이는 것이다.

또한, 이미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민주노동당의 노동 정치는 드높은 전망과 넓은 시야 그리고 활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당의 노동 정치 활동을 단지 제도 정치 공간에서 민주노총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바라본다. 굳이 말한다면, ‘(노동)조합주의 정치’라 할까?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인가? 민주노총이 노동계급 전체의 대변자임을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자 민주노동당 역시 그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가장 뼈아픈 것은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조직 노동운동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민주노동당과 이들 사이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정당임을 인정받고는 있으나 여기에서 ‘노동자’란 전체 노동자의 1/10도 안 되는 조직 노동자들만을 의미한다. 그들은 대부분 정규직, 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더욱 늘어만 가는 노동계급의 또 다른 부분들은 민주노동당을 자신들의 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은 독자적인 노동 정치 모델을 만들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 흔히 17대 국회에서 비정규직 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 입법을 막는 데 실패한 책임만을 묻는데,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당은 이런 문제들, 가령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현장 노동자들을 직접 교육하고 조직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원내에 진출하고 나서도 역시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으로 ‘때우려’ 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이후 더욱 왜곡되고 심지어는 희화화되기까지 했다. 민주노동당은 세액공제제도에 따른 정치후원금 모집 사업마저도 민주노총에 기댔다. 민주노동당의 재정이 위기에 닥칠 때마다 당은 민주노총을 재정 사업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이쯤 되면 재정 지원과 표 동원을 중심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미국 민주당과 미국 노총(AFL-CIO) 사이의 관계와 도대체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② 이념적 퇴행: 스탈린주의, 스탈린주의의 한반도판, 종북주의, 민족지상주의가 당을 지배하기 시작하다

창당 당시부터 민주노동당 안에는 이른바 자주민주통일(‘자민통’) 경향이 존재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에 기반해서 창당했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다. 민주노총 안에는 자민통 경향의 활동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따라서 바로 그 민주노총의 정치적 대변자로서 출발한 민주노동당 안에도 자민통 경향이 존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민주노동당은 자민통 경향이 그 동안 북한 체제에 대해 보여온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당 강령에 북 체제에 대한 비판적 언급(국가사회주의의 오류 비판, 북한이 특히 경직된 국가 사회주의 체제라는 점에 대한 지적 등)을 담았다.

하지만 자민통 경향이 점차 조직적으로 대거 입당하면서 이러한 창당 당시의 약속이 그 의미를 잃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이후부터는 자민통 경향이 각종 당내 선거 때마다 특유의 조직력으로 다수를 점했다. 그래서 당 강령 내용을 거북해 하는 세력이 지도부 내 다수파가 되는 모순된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자민통 경향이 일단 지도부 내 다수파가 되자 이들 사이에 잠재해 있던 낡고 그릇된 이념 성향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원내 진출로 민주노동당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시점에 당은 오히려 창당 당시에 비해 지극히 퇴행적인 이념과 노선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퇴행의 첫 번째 사례는 스탈린주의다. 스탈린주의는 20세기에 전 세계 진보 세력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던 낡은 이념 전통이다. 스탈린주의 경향은 사회주의를 일당 독재와 명령 경제와 같은 것으로 보고(민주노동당 강령은 이를 ‘국가 사회주의의 오류’라 부른다), 당운동 안에서도 그러한 관료 독재 행태를 그대로 실천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또 단계론적 변혁론을 고수한다. 그래서 먼 미래의 단계에서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단계에서는 자본가나 우파의 일부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87년 이후 한국 운동권을 지배해온 ‘비판적 지지’의 고질병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자민통 경향은 스탈린주의의 낡은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를 당 전체에 강요했다. 그래서 노무현의 연립정부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서슴지 않고 나왔다.

당 정책위 의장이 한편으로는 그게 마치 급진성의 보증 수표라도 되는 양 국유화를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간층의 이반을 낳을 수 있다며 ‘입시 폐지’에 반대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연출됐다. 또한 주요 당 기관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것만으로 패권적이고 관료적인 당 운영을 일삼는 일이 어느덧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민주노동당과 민중운동 전체를 불임의 논쟁에 빠뜨린 한국진보연대 문제도 그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진보연대를 만들고 그 안에 무리하게 당을 집어넣으려 한 데는 공동전선에 대한 독특한 시각이 자리한다. 모든 대중조직들을 한 울타리에 몰아넣고 그 안에 관료 체계를 만들기만 하면 민중의 단결이 이뤄진다는 발상. 한국진보연대를 추진한 당내 세력은 이러한 낡은 발상에 사회운동들을 모두 뜯어 맞추려 했다.

이 때문에, 구체적인 쟁점들을 둘러싼 진보정당과 다양한 사회운동들 사이의 실질적 연대는 오히려 관심에서 멀어졌다. 한국진보연대의 틀에 자신을 뜯어 맞출 수 없는 사회운동들은 당과의 관계에서 항상 2차적 혹은 주변적인 위치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고약한 것은 한국의 스탈린주의가 다른 나라의 일반적 타락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스탈린주의의 보편적 형태 그 이상이다. 우리에게 문제는, 스탈린주의를 봉건적 잔재와 결합시킨 그 가장 퇴행적인 형태, 즉 북한판 스탈린주의(이른바 유일사상)다. 그래서 북한을 북한의 현실 그대로 ‘군사’ ‘왕조’ 집단이라고 칭하는 것이 당 안에서 징계 운운의 대상이 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북한 체제와 그 선전을 맹족적으로 추종하는 종북주의 경향은 작년 말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 동안은 자민통 경향 안에 종북주의의 유령이 숨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만 있었을 뿐이다. 그게 민주노동당을 귀신 들게 만들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안이한 태도였다. 2006년 말 북한 핵 사태와 이른바 일심회 사건은 이제까지 민주노동당이 겪은 최대, 최악의 타격이었다. 당 정책위 의장이란 사람이 자위권 차원의 핵무장은 필요하다는 망언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당의 고위 간부가 북한 정보 당국에게 당의 정보들을 넘긴 게 발각됐다.

   
▲ 시대착오적 종북주의가 민주노동당을 지배한다. 사진은 북핵 실험 직후 방북한 민주노동당 대표단과 조선사회민주당의 만찬 (사진=진보정치)
 
그런데 당의 어떠한 공식 기관을 통해서도 이런 상황을 시정하려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도부 내 다수파는 이러한 작태들을 옹호하기까지 함으로써 당을 지배하는 거대한 종북주의 블록의 실체를 드러냈다. 이제 더 이상 자민통 그룹의 어떤 편향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앞에 버티고 선 것은 종북파였다!

북한판 스탈린주의와 그 남한판인 종북주의의 저변에는 또 민족지상주의라는 위험한 흐름이 도사리고 있다. 본래 스탈린주의 안에는 국가주의의 요소가 있고, 이것은 쉽게 민족주의와 결합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판 스탈린주의에서는 이게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우리민족제일주의가 그 최신판이다.

우리민족제일주의가 담고 있는 배외주의는 파시즘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독도 사태 때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에서 독도에 공수부대를 파견하자는, 보수정당도 생각 못할 발상이 튀어나오거나, 당내 일각에서 이주노동자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 돌출하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정당이 되고 나서 대중이 줄곧 목격한 게 이러한 모습들이었다. 진보의 희망을 싹틔우는 것은 고사하고 상상도 못할 퇴행적 작태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홍세화 선생이나 최장집 교수 같은 민주노동당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평가해도 할 말이 없다.

진보정당은 오로지 미래의 대안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으로 평가받고 거기에서 힘을 얻는다. 어떠한 억압에 직면하든, 어떠한 역경에 부딪히든 이것 하나로 버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동당이 잃어버린 게 바로 이 자부심이다. 살아서 버틸 최후의 힘, 그것을 박탈당한 신세다.

낡고 그릇된 이념들이 당을 지배하기 때문에 반대로 21세기의 새로운 진보의 흐름은 민주노동당에 함께 하는 데 높은 문턱을 절감한다. ‘입시 폐지’ 논란에서 드러나듯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전망을 구체적인 쟁점들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리고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그 발걸음을 민주노동당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민주노동당 안의 협소한 노동조합주의 정치도 한 몫을 한다. 하지만 가장 완강한 벽은 종북파가 보여주는 국가주의, 가부장주의, 민족지상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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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을 몸담고 있던 정당인데, 내 기억에 요즘 같이 자신의 치부를 다 까놓고 논쟁을 한 적이 없었다. 2005년도에 새 지도부 구성을 두고 잠시 있었지만, 대중 앞에 드러내놓고 이야기 곤란한 것은 그냥 덮어두자는 분위기였다.

혼자 고고하고 고상한 사람들에게야 최근 언급되는 이야기들이, '그래 니들이 그렇지, 뭐' 하며 냉소의 대상밖에 안 되겠지만, 그래도 진흙탕 속에서 싸워 온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자산들이다. 강건너 불구경하듯 싸잡아 '양비론'을 펼치는 부류 보다는 대가리 깨지더라도 치고받고 싸우는 게 진보의 미래를 위해 건설적이지 않을까?

'좌민련'의 구체적 의미는 이번 글에서는 나오지 않았는데, 마지막 문단의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그 발걸음을 민주노동당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언급에서 그 답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서구 유럽의 경우 전통적으로 사민당, 사회당 등 좌파정당들과 그 행보를 같이 한다.

본격적인 코멘트는 이 시리즈가 다 나오고 난 다음에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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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2007-12-2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저놈의 당명부터 바꿨으면 한다.
 

“사형제는 인권 문제…보수 정부도 집행 힘들 것”
‘실질적 사형폐지국 한국’ 안경환-공지영 대담

정리/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영상/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12-24


» 안경환(왼쪽) 국가인권위원장과 소설가 공지영씨가 지난 20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사형제 폐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실질적 사형폐지국 한국’ 안경환-공지영 대담

2007년 12월30일. 사형수들은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국제앰네스티는 사형제가 존재하더라도 10년 이상 집행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사실상 사형폐지 국가’로 분류한다.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게 김영삼 정부 시절인 97년 12월30일이니, 앞으로 일주일만 지나면 우리도 사형제 폐지 국가로 공인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과 사형제 문제를 다룬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작가 공지영씨가 지난 20일 인권위원회에서 만나 사형제 폐지의 쟁점과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안경환-공지영 대담



공지영(이하 공)=보수 정권이 들어섰다. 앞으로도 사형 집행 중단이 계속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안경환(이하 안)=어떤 정부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가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시대 흐름이나 보편적 가치를 돌려놓을 수는 없다. 인권은 좌도 우도 아니고,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특히 사형제는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 인간성의 문제,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어떤 정부가 들어선다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형을 통해 사회의 정치적 변화, 인간의 근본 변화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흔한 말로 전쟁과 혁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이 유일한 정의인 시대가 있었다. 항상 사형은 전쟁이나 극단적 사회 소요 속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선거를 통해서 정부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는 시대다. 앞으로도 그렇다. 시대적 흐름이 사형제 폐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를 돌릴 수 없다. 사형제 폐지의 길에 대해서는 장애물이 없다.

공=저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사형 집행이 많이 이뤄졌을 때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텍사스 주지사를 할 때였다. 그 다음이 현 대통령인 아들 조지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를 할 때였다. 둘 모두 보수성향의 대통령들이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인권은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고 말씀 하셨지만, 여전히 보수 사회에서는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묵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때부터 사형 집행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노무현 정부도 이를 승계했지만 이명박 당선자는 사형제 폐지와 관련해 어떤 공약을 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안경환 인권위원장
국제사회 대세 역행 어려워 폐지안해 미·일 존경 못받아
인혁당 사건등 오판 난점 완전 폐지 정치적 결단해야


»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안=미국은 주지사가 사형 집행을 명할 권한이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형 집행은 법무부장관에게 위임돼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론 주민이나 국민들의 생각이 어떤가에 의해 이들의 결정도 이뤄진다. 가령 국민들의 지지가 없다면 집행을 잘 안 한다. 텍사스에서 사형 집행이 많았던 것은 그곳 사람들의 정서가 그렇게 표현돼 왔기 때문이고, 텍사스는 다른 주에 비해 형벌 체계가 엄하고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법무부장관이 서명을 해도, 대통령 생각 못지않게 중요한 게 국민의 생각이다. 이미 국제사회에서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돼가는 상태에서 어떤 정부가 여기에 반대되는 일을 하겠는가. 국제사회에선 사형제에 따라 그 국가의 전체적 인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사형집행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집행이 이뤄지면 인권위는 문 닫아야 한다.(웃음)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라는 것이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느냐, 무겁게 여기느냐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 생명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유럽의 경우 진보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형제 폐지가 늘지 않았나.

안=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사회가 만일 사형제 폐지를 진보 역사의 발전 속에 놓아두고 보수 역사의 발전에서는 정체시킨다면 우리사회 젊은 층의 보수 현상에는 장래가 없다.

공=말씀을 듣고 보니 안심이 되는 것 같다. 지금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활동하며 사형수를 만나고 있다. 사실은 내용적 폐지 뿐 아니라 실질적(법적) 폐지도 원하고 있다. 한 사형수의 경우 13년 동안 사형수로 남아 있다. 20대에 들어와서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사형만 기다리고 있다. 사형제가 내용적으로라도 폐지가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들에게 노동을 하게 해줘야 한다.

안=현재 우리나라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수감 중인 사람은 64명이다. 사형을 집행한 최후의 예가 10년 전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사형폐지 국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법적으로 사형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주는 심리적 차이가 크다. 언젠가 우리가 분명하게 사형제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국민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아직은 사형제를 완전히 없애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의 저항이 있다. 따라서 완전히 폐지는 국민 전체의 찬성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공=프랑스도 과거 미테랑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으로 사형제를 폐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형제 폐지 운동에 동참하다 보면, 사형제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사형제 폐지를 국민들은 얼핏 사형수를 용서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의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일 뿐이고 다른 형벌은 가해진다. 그것을 마치 용서라는 가치와 혼동해서 ‘절대 저런 인간은 용서해선 안된다’는 식의 감정적인 접근이 많다. 이런 부분에 대한 홍보가 안 된 것 같다. 또 하나는 사형제가 있어야 살인 범죄를 줄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나 역시 죽음의 형벌이 어느 정도 살인에 이르는 범죄를 제어할 것으로 믿었지만, 공부를 해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뮈가 ‘만약에 죽음의 형벌이 무서워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처음부터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안=이미 인류는 오래전부터 사형을 인간이 가진 편견 중 하나라는 주장을 해왔다. 사형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보면, 잘못한 사람에 대해 벌을 내리느냐 마느냐는 것인데, 사형제의 난점 중 가장 큰 것은 첫째 항상 오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에서 보듯이 한번 오판이 내려지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둘째는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내릴 때 피해자가 벌을 내리느냐 아니면 피해자를 대신해 국가가 내리느냐를 놓고 보면, 개인 대신 국가가 벌을 내리는 것으로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 왔다. 그러나 국가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도 벌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이럴 때 피해자가 느끼는 보복의 감정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 문제다. 사형의 경우, 직접 피해자는 없고 가족 등 간접 피해자가 있다. 그런 경우 둘 사이 피해의 정도가 분명 다르다. 피해자 가족 입장에서 볼 경우 가해자에 대한 용서를 통해 도덕적 성취감도 있을 것이다. 셋째는 처벌의 경우도 마지막까지 가해자에게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모든 측면에서 볼 때 사형제가 계속 이어지기는 힘들다. 흔히 사형제가 폐지되면 사회적 위험을 얘기하지만 가해자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도 그를 사회에서 격리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

공지영 작가
부시 부자 주지사때 집행최다 보수사회에 대한 두려움 커
잘 산다고 다 선진국 아냐 사형수도 노동하게 해줘야


» 작가 공지영씨.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공=살인만큼 나쁜 죄가 어린이 성범죄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아이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면 어떤 감정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똑같이 성폭력으로 응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독 살인죄에 대해서만 사형으로 응징하는 것이 상당히 비현대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유영철 사건 때 첫 피해자의 가족인 고정원씨는 지금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하고 있다. 오히려 유영철을 용서하면서 본인도 해방이 됐다고 한다. 문제는 사건 장소에서 경찰이 철수한 이후 하다못해 가정에서 살인이 발생했을 경우 핏자국을 닦는 것조차 국가에서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안의 부재로 인해 피해를 당했을 때 그분들에 대한 피해 보상이나 정신적 충격에 대한 뒷받침 없이, 그저 운이 없어서 피해를 당한 것으로 방치되고 있다.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도 함께 논의를 해야 한다.

안=국가가 형벌권을 가질 때는 형벌에 부수되는 사후관리도 함께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 소홀할 수 있다. 사형제를 두고 있으면 흉악 범죄가 줄어든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 이에 대한 통계는 없다. 영국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유형을 300가지를 뒀다. 그러나 실제로 법은 두고 있지만 집행은 그때그때 자의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사형을 면죄해 주는 방법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성직자의 면책 특권이다. 옛날엔 교회 관련 범죄가 많았다. 그래서 성직자가 마지막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자로부터 잘못을 참회한다는 고백을 듣고나면 성직자가 사형을 면죄해 줬다. 참회의 증거는 성경의 한 구절을 라틴어로 외워서 말할 수 있느냐였다. 이는 어찌보면 특권층에 대한 혜택이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사형수를 나라밖으로 보내는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의 조지아주다. 사형을 면죄해 주는 대신 몇년 동안 유형지로 보내는 것이다. 이후 미국이 독립하고 보낼 데가 없다보니 개척한 곳이 호주다. 마찬가지로 실제 사형제는 가지고 있어도 집행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점점 더 사형을 줄여나가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유형수를 줄이고 집행을 줄여나가는 게 추세다. 흔히 국제사회에선 사형폐지 국가를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미국, 일본, 싱가포르는 모두 선진국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형제를 아직 두고 있다. 단순히 잘 산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지표와 인권 지표가 맞물려야 한다. 그래서 위 세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공=일본 교도관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교도행정에 관해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일본에 대해 약간의 우월감도 느꼈다.

안=그런 나라에서도 갈수록 사형 집행이 줄고 있다. 미국은 연방제이기 때문에 현재 사형제를 가진 주가 점점 줄고 있다. 텍사스주가 미국 전체 사형 집행의 절반을 차지한다. 싱가포르와 일본도 점차 줄여가는 추세다. 유럽의 경우 유럽연합 가입조건 가운데 하나가 사형제 폐지다.

공=터키가 사형제를 폐지하지 않아 유럽연합 가입이 보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인권위원회가 지난 2005년 정부에 사형제 폐지를 권고한 것도 우리사회가 국제적인 추세에 대한 인식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국제 사회의 상당 부분이 사형제 폐지를 권하고 있고, 그들이 늘 한국의 인권 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게 사형제와 대체복무제(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국가보안법이다. 사실 그런 거 없어도 우리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취임했을 때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당시 반 총장이 사담 후세인의 사형을 놓고 ‘사형은 각 나라가 알아서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가 난리가 났다. 당시 유엔의 기본 입장이 사형 폐지 권고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외교부장관까지 지낸 분이 그럴 정도로, 우리나라가 인권에 대한 국제 규범을 잘 모르고 있다.

공=현재 3년째 사형수 10명을 만나오고 있다. 그 중 2명은 사형이 확정된 지금도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10년 정도 이들을 격리해 놓고 종교위원들이 맡아서 사랑의 세례를 퍼붓다보니 요즘엔 그 사람들이 (바깥 사람보다) 고상해졌다. 10년 정도 사람이 죄를 지을 기회 없이 돈 때문에 세파에 시달리지도 않으니까 어떤 면에선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눈빛이 더 맑다. 이런 사람들을 사형시킨다면 나로서는 너무 끔직한 일이다. 나도 처음엔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기 위해 그들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 갔지만, 이젠 인간이 사랑을 통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깨달았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그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 느꼈다. 그래서 더욱 더 사형제가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안=누구나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사형수가 교화돼 가는 것도 있지만, 이는 결국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성숙이기도 하다. 즉 간접 피해자인 가족 입장에서 보더라도 결국 그들에 대한 용서는 자기 성숙의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사형제 폐지를 통해 스스로의 성숙을 이룰 수 있다. 몇년 전에 캄보디아 감옥을 간 적이 있다. 그곳은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사형제가 없다. 사형수와 일반 죄수 사이에 표정의 차이가 있는데, 사형의 위협이 없다 보니 그곳에서 만난 죄수들의 표정은 훨씬 달랐다.

공=그런 말씀을 듣고 보니까 갑자기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이 든다. 잘 사는 나라가 곧 선진국이 아니라는 말도 되새겨 진다.

안=사형제 폐지 법안이 이미 오래 전 국회에 상정됐다. 다수가 서명을 했지만 구체적인 ‘액션’을 못 취하고 있을 뿐이다. 사형제 폐지를 법적으로 명문화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무엇보다 사형제 폐지 여론을 홍보하는데 공지영 작가의 역할이 컸다.

공=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출연한 배우들과 함께 사형수를 만났다. 배우들도 사형수를 만나면서 사형제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을 봤다. 사형수들 역시 그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배우와 사형수 그리고 작가인 나 사이에 끝없는 교감들이 있더라. 나로서는 이런 글을 통해 단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문학적 평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안=어느 사회든 인간이 지닌 가장 원초적 본능은 복수의 본능이다. 이를 극화시킨 게 사형이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사회에서는 사형이 오히려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점점 사회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일상적 생활로 변해갈 때는 자연적으로 극적 효과가 줄어들게 돼 있다. 옛날에 사형을 공개적으로 집행한 것은 사람들이 심심하다보니 이를 통해 일종의 이벤트를 연 것과 비슷했다. 전쟁과 혁명이 있던 시절이었다. 이제 그런 시대를 가리켜 ‘야만의 시대’라고 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시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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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2007-12-2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이상 '야만의 시대'는 아니겠으나, '사형제 폐지'라는 인권적 가치실현에 만족하기에는 이놈의 사회가 너무 지랄 같다...

2007-12-26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