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식인론'에 관한 책이 갑자기 유행하는 느낌이다. 지난 번에 인용한 [지식인을 위한 변명] - 여전히 유효한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이나 [책과 삶] 침묵은 禁, 저항하고 비판하라 같은 책들...

라피에르의 이 책은 앞의 두 책과 같은 류의 '지식인론'에 관한 책은 아니다.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 등 총 6개의 장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는 것이 조금은 특이하다. 오히려 이 책보다 인상적인 것은 <교수신문>에 실렸던 김정한의 서평이었다.


지식의 ‘횡단자’들 조명 … 깊은 ‘쟁점’ 없어
기획서평_ 『다른 곳을 사유하자』
니콜 라피에르 지음 | 이세진 옮김 | 푸른숲 | 2007

김정한 / 서강대 박사수료·정치학
출처 : <교수신문> 2007년 10월 01일


 
자신의 존재조건 때문에 대학에서 밀려나거나 주변인으로 배제되고, 망명을 경험해야 했던 지식인들. 라피에르는 이들을 배제, 망명, 주변인의 경험을 통해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어 창조적인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던 지식인으로 명명하면서 이들이 펼친 ‘실천적 사유’의 흔적을 더듬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책에는 쟁점이 없다. 왼쪽부터 몽테뉴, 만하임, 벤야민, 아렌트, 베유.

책장을 정리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다양한 색깔을 지닌 책들을 깔끔하게 분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분과학문별로 책들을 분류하다보면, 어디에 꽂을지 애매해서 적당히 우겨 넣어야 할 책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한다. 어쩌면 분과학문의 경계를 벗어난 통합 연구의 필요성을 이보다 더 적절히 드러내주는 일상 사례도 없을 듯하다. 『다른 곳을 사유하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학·인류학·역사학 등을 아울러 다문화연구에 매진하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자,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다학문연구센터 공동책임자이며, <코뮈니카시옹>의 공동편집자인 저자의 소개말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행보를 따라가는 이 책도 다 읽은 다음 어떤 칸에 꽂아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정해진 길과 안정된 삶을 벗어나 사회적 위계와 국경을 횡단하며 “다른 곳을 사유하자”는 라피에르의 전언도 여기에 부합한다. 그것은 친숙한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이주하고 자유롭게 떠돌면서 외부의 사유를 견지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차별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회적 장벽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삶과 사유를 실천한 지식인들을 ‘노마드(nomad) 지식인’, ‘의식 있는 파리아(paria)’, ‘횡단자(traversier)’ 등으로 명명한다. 그들은 사회의 이방인이자 주변인이며 소수자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수많은 지식인들 가운데 비교적 낯익은 이름들만 추려보자면, 이 계보에 속하는 이들은 몽테뉴에서 시작해 짐멜, 벤야민, 아렌트, 만하임, 사이드, 베유 등을 거쳐, 호보(hobo, 뜨내기 노동자)와 디아스포라(diaspora) 및 서발턴(subaltern) 연구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 조건 때문에 대학에서 밀려나거나 주변인으로 배제되거나 유배·망명을 겪어야 했던 자들이고, 바로 그 때문에 학문의 경계와 국경선을 유랑하며 창조적인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라피에르에게 비판적 지식인은 곧 ‘이동한 사람’이다. 물론 ‘이동한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동일하지는 않다. 가령, ‘학출노동자’인 위장취업자는 강한 윤리와 용기를 갖고 노동자의 삶으로 이동하긴 했지만, 언젠가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제한적인 이동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계급 상승을 성취하는 전향자는 계급적 이동 과정에서 지적 창조성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공적 지식인으로서 지배 엘리트의 역할에 안주할 때 도식화된 시각과 진실 왜곡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이는 저자가 “전향자이자 전향자의 아들”인 부르디외를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이 책에서 그녀가 시종일관 비판하는 지식인은 부르디외가 유일한데, 그간 부르디외가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인식된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책은 엄격한 학술서가 아니라 에세이이며, 그것도 ‘프랑스 에세이’라는 데 유의해야 한다. 과학과 문학이 딱히 구별되지 않는 프랑스식 담론을, 수사학을 중시하는 에세이로 녹여냈다고 생각하면 대략 어떤 모습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지식인들의 삶은 주마간산 격이고, 삶과 사유의 관계도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따라서 오늘날의 정세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조건이나 역할 등과 같은 까다로운 쟁점에 관해 깊이 있는 논의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실망스럽겠지만, 저자 스스로 ‘기분 전환의 책’이라고 하듯이 에세이는 에세이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에세이로 즐기기만 하기에도 조금 껄끄러운 대목이 없지 않다. ‘좋았던 옛 시절’에 비판적 지식인은 곧 좌파 지식인이었고, 이는 좋든 싫든 하나의 역사로 남아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다른 곳을 사유하는’ 지식인의 계보에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곳을 사유한’ 좌파 지식인이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은 라피에르가 뭔가를 부당하게 생략한다는 의문이 들게 한다. 그들 또한 지배 욕망과 정착을 거부한 사회의 이방인·주변인·소수자일 뿐 아니라, 철학·경제학·정치학 등을 넘나들며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국제주의를 주창하며 국경선을 극복하고자 한 ‘이동한 사람’이 아닌가.

이에 대해 아마 라피에르는 좌파 지식인이 결국 ‘이동’을 중단하고 ‘정착’했다고 응수할 것이다. 예컨대 그녀는 부르디외 비판에서 드러나듯이 직접적인 현실 참여에 부정적이며, 또한 공산당에 가입한 루카치가 아니라 당 가입을 거부한 만하임에게 호의적이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식인이 되어 특정 당이나 계급을 방어하는 데 가담하지 않겠다는, 좀더 의미심장한 거부”를 선택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좌파 지식인과 노마드 지식인의 결정적인 차이는 당 가입 여부, 혹은 더 일반화시켜 말하자면 정치조직에 대한 태도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러나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이 연구실에서 다른 곳을 사유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면, 사회를 변화시키고 대중들과 마주치기 위해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조직(당이든 아니든)이 아닌가.

좌파 지식인의 핵심 화두는 지식인과 노동계급의 마주침이었고, 공산당은 대중들과 마주치기 위한 필수 매개였다. 물론 좌파 지식인들은 스탈린주의와 냉전체제의 확립과정에서 탈당이나 침묵을 선택해야 했지만, 대중들과 마주치기 위해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여전히 진실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 치열했던 역사의 한 자락은, 일생 동안 ‘공산주의 지식인’으로 살아온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는 몰락해가는 중유럽을 경험하며 자유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지식인이 냉전체제에서 일어난 공산당의 학살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당을 떠나지 못했던 여정을 흥미롭게 드러낸다. 홉스봄이 마지막까지 강조하는 것도 정치조직이다. 좌파 지식인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는 정치조직이 없다면 지식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라피에르에게 되물을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은 끊임없는 외부의 사유를 통해 창조적인 지식의 영역을 넓혀가야 하며, 또한 정치조직을 매개로 한 대중들과의 마주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대학제도는 점차 지식인들의 연구공간에서 멀어지고 있고, 이미 오래 전에 설 자리를 잃은 공산당을 대신해 대중들과의 마주침을 담보해줄 정치조직의 존재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 책의 전언처럼 비판적 지식인이 곧 노마드 지식인이라면, 이제 그는 어디로 떠날 것인가. 비판적 지식인은 안정적인 연구 공간과 더불어 자신의 이론적·정치적 견해와 함께 할 수 있는 정치조직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대중들과 마주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김정한 / 서강대 박사수료·정치학



필자는 서강대에서 ‘91년 5월투쟁 연구: 대중과 폭력’으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대중운동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대중과 폭력: 1991년 5월의 기억』, 역서로는 『제국이라는 유령: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론 비판』, 『폭력의 세기』,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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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스쳐지나듯 일독했는데, 무엇인가 무릎을 칠만한 감탄 같은 건 없었다. 시간을 두고 다른 데리다 저작들을 맛본 뒤에 다시 한번 읽어보든지 해야겠다. 아래 인용하는 강우성 교수의 글은 읽기 시작할 무렵에 스크랩해둔 글인데, 솔직한 느낌을 말하자면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완전히 번역투의 말투, 자기 것으로 소화되지 못한 어려운 이론을 억지로 설명하는 말투다. 미국 르네상스 시대 문체 연구도 좋지만, 우리 말 문체도 좀 연구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재원의 글은 읽으면 바로 이해되는 글이리라.


해체와 마르크스주의의 때맞지 않은 조우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대중들의 공포』를 겹쳐 읽기 위한 사전준비


이재원(전문번역가)
출처 : <대학신문> 2007년 11월 17일


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데리다 지음┃진태원 옮김┃이제이북스┃400쪽┃1만9천원
대중들의 공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최원 옮김┃도서출판b┃588쪽┃2만8천원


▲ 삽화 : 차주영 기자


세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크 데리다의 관계는 꽤 막역하다. 가령 루이 알튀세르는 데리다의 ‘악어(cai­ man)’였고, 데리다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악어’였다(‘악어’란 이들의 모교인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자격시험 준비생들을 지도하는 과외교사의 별칭이었다). 그러나 세인들의 오해가 틀린 것도 아닌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관계는 겉보기에 그리 밀접하지 않았다.

물론 데리다가 1979년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렀고, 1982년에는 마이클 라이언이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라는 책을 발표해 데리다의 사유가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저서 전면에 처음 드러낸 것은 1993년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하면서였다.

프랑스의 역사적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사상이 조우할 수 있는 계기는 1972~1978년과 1983~1984년에 마련됐다. 1972년 공산당은 사회당과 공동강령을 발표했고(그 결과 1978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프랑스 야당의 제1좌파 자리를 사회당에게 내줘야 했다), 1976년에는 제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포기했으며, 1983년부터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대거 사회당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요컨대 이 기간 동안 공산당은 전후 이래로 프랑스 지성계에서 확고하게 누렸던 ‘어떤’ 권위를 잃었고, 그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옭아맸던 교조주의가 무너졌던 것이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데리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로에게 ‘말조심’하게 만들었던 ‘봉쇄장치’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알튀세르가 데리다를 우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두 편의 수고(手稿),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1982)과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1986)을 집필한 것도 이 무렵이다.

데리다의 이력에서 보면 더욱 더 직접적인 계기는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인 1990년에 찾아왔다. 이 해는 1985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발표했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이 동구권에서부터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서서히 종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는 점에서 진정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이었다. 이 가을의 끝자락이 겨울을 예고할 즈음인 1990년 초, 데리다는 전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그 뒤(『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외에도) 『다른 곶』(1991), 『법의 힘』(1994), 『우정의 정치학』(1994) 등 정치적 저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고 2007년, 이제 우리 앞에서도 데리다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조우가 ‘때맞지 않게’ 되풀이되고 있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가 각각 15년과 11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나란히 도착한 것이다(사실 『대중들의 공포』의 모태는 1994년 영어로 먼저 발표된 『대중들, 계급들, 관념들』이니 이 책 역시 약 15년의 세월을 건너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예전에 발표됐던 책들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이 조우가 ‘때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등장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의 토대, 즉 현실사회주의가 와해된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때맞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가 그때보다 훨씬 강고해진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더욱 더 때맞지 않은 것이리라. 게다가 발리바르라니, 누가 지금도 알튀세리앙들을 읽는단 말인가? 이 ‘때맞지 않음’은 단순한 ‘시대착오’가 아닐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이제부터 이 고유명사는 ‘동시대 마르크스주의’의 환유이다)의 조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 이전에 알튀세르가 주목했던 데리다의 개념들은 ‘여백(marges)’과 ‘산포(disse′mination)’였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들을 통해 일체의 목적론을 부정한 새로운 유물론, 즉 마주침의 우발성과 혁명의 필연성을 사유하는 유물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에서 라이언이 시도하고자 했던 바도 (비록 좀더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데리다와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일체의 ‘형이상학’(여기에는 실증주의, 자연주의, 객관주의 등을 비롯해 당/국가로 상징되는 중앙집권주의/중심주의, 자본주의의 신용체계 등이 모두 포함된다)에 대한 비판자라는 점에서 비교 가능하다는 것이 라이언의 전제였다.

발리바르도 형이상학의 해체라는 데리다의 테마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알튀세르나 라이언과 비슷하지만, 오히려 데리다의 방법론 자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다. 데리다와 발리바르가 공유하는 이 방법론, 흔히 우리가 ‘해체(deconstruction)’라고 부르는 이 방법론을 내 식으로 풀자면 ‘아포리아(aporia)의 드러냄’이다.

데리다는 ‘정치적 전환’을 감행하기 전에도 늘 아포리아에 주목해왔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을 해체할 때 즐겨 쓴 방식이 바로 이것, 즉 일체의 형이상학적 담론에 내재된 논리적 궁지(또는 결정불가능성/계산불가능성)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발리바르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개념들, 요컨대 이데올로기, 계급, 당/국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이해해왔던 방식대로의 정치 개념 그 자체가 다다를 수밖에 없는 아포리아를 드러냄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내부에서부터 ‘해체’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대중들의 공포』에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의 이런 유사점이 책 제목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령’이 아닌 유령‘들’, ‘대중’이 아닌 대중‘들’로 표기된 제목에서부터. 복수(複數)로 표기된 이 두 단어는 그 자체의 양면성/양가성을 드러낸다(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데리다의 개념은 오히려 ‘파르마콘’[pharmakon]이다). 가령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무력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그 유령의 유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우리는 유령을 지켜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괴롭혔던/괴롭히고 있는 유령을 넘어서야 함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우리는 유령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극복해야 한다”). 발리바르 역시 『대중들의 공포』에서 지배계급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혁명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 주목함과 동시에(“우리는 대중들의 급진성을 믿어야 한다”) 지배계급의 권력에 공포를 느껴 수동적이 되는 ‘반동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게도 눈길을 돌린다(“우리는 대중들의 수동성을 주시해야 한다”).

어쨌거나 데리다나 발리바르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들의 연구 대상이 불러오는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포리아를 끌어안음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때맞지 않게’ 도착한 이 두 책의 조우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데리다는 당대의 정치지형 내에서 ‘타자’로 존재하고 있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끌어안음으로써 종교적인 것과 정치의 관계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갔고, 발리바르는 대중들의 야누스적 얼굴을 끌어안음으로써 반폭력/시민인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때맞지 않음’을 단순한 ‘시대착오’의 일회적 에피소드로 끝낼지, ‘새로운 가능성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으로 만들지는 이제 이 두 책을 읽을 우리의 몫이다.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는 ‘해체론’의 실천성
>>확대서평 _ 『마르크스의 유령들』


출처 : <교수신문> 2007년 10월 29일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된 1993년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1992)으로 대표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부활’이 횡행하던 시점이었다. 역자가 요약하듯 당시는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적 세계질서가 세력을 과시하면서 국내에서는 갓 출범한 문민정부가 세계화’의 논리를 주창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또한 영미 학계에서 이른바 해체론을 비롯한 ‘이론’의 전반적인 퇴조가 거론되기 시작하던 시점과도 겹쳤다. 위기의식의 발로였을지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데리다가 역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던 마르크스를 다시 불러낸 데는 복합적인 시대의 요청과 그 나름의 진지한 문제의식이 함께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하필 왜 마르크스이고 더구나 그의 유령들인가?

데리다의 논의가 기대고 있는 근거는 우선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유령을 언급한 1848년 유럽의 상황과 이 책이 출판된 1993년 시점의 세계 사이의 시대적 유비관계이다. 어쩌면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진단이 여기에도 적용가능할지 모르겠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라는 긴급한 질문 앞에서 데리다가 “이미 보았다는 느낌이 주는 곤혹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아니 각종 종말론의 범람 앞에서 데리다가 목격하는 것은 역사의 희극적인 반복이 아니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대착오”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이 선친의 유령에 대고 맹세한 뒤 읊조리는 저 유명한 대사,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가 데리다의 마르크스론을 이끄는 화두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햄릿과 마르크스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 역시 ‘이음매가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원초적인 타락”을 증언할 뿐이다.

왜 마르크스인가

그런데 선왕 햄릿의 유령과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경우에도 그러했듯이, 문제는 이 시대착오적인 타락, 이러한 어긋남 혹은 탈구가 “무언가가 썩어 있는” 전체주의의 징후인 동시에 법률주의와 도덕주의를 넘어서는 해체불가능한 정의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공간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마르크스(주의)가 징후로 불러내기는 했지만 가능성의 공간으로까지 발견하지는 못한 지점들을 사유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 곧 “비가시적으로 가시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데리다가 지적하듯, “정의의 탈-총체화의 조건인 필연적인 어긋남은 현재의 조건이며, 동시에 현존자 및 현존자의 현존의 조건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과도한 절망이나 맹목적인 푸닥거리는 데리다의 의제에 들어있지 않다.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정당한 애도작업을 통해서만 불러내는 것이 가능한데, 햄릿이 아버지의 환영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듯 마치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가상적 유령들이 내리는 명령을 정의와 책임이라는 해체의 해체 불가능한 조건들에 대한 사유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유령학(Hauntology)의 필요성

특히 데리다에게 살아 있는 현재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껏 진정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유령 타자들의 도래가 바로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망령들에 의해 억압된 정의의 본 모습이며, 이는 혼란스런 이데올로기들 중에서 진리를 판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신념과 결별하는 일과 통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분석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남아 있지만, 무수한 근대적 또는 탈근대적 부인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기획 또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기획을 정초하는 마르크스주의 존재론이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아적 종말론을 포함하고, 포함해야 하며, 포함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불충분”한 성격을 노정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환영들이 출몰하는 탈구된 현재의 상황은 마르크스의 정신을 부활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한 번도 주제화되지 못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도래를 표시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사실 이데올로기와 진리를 확연히 구분 가능한 것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이 책 전체에 걸쳐 마르크스의 망령들과 마르크스의 정신을 구별하려는 데리다의 입장을 집약시켜 주고 있는데, 이는 자칫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성과 현실사회주의-특히 스탈린주의-의 억압성 간의 역사적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적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낯익은 비판으로 오인될 소지도 많다. 테리 이글턴이 후쿠야마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두고 “정치적으로 가장 명시적일 때 가장 인상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에 특정한 마르크스주의의 형태들을 포함시킨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라기보다, 데리다가 제기하는 정의와 책임의 문제가 마르크스주의 정치학 및 정치 일반에 과연 얼마나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하느냐일 것이다. ‘탈구’의 이중성을 거듭 상기시키는 데리다의 발언은 프롤레타리아 및 노동자에 한정되지 않는 모든 억압된 유령들, 즉 계급, 국가, 성, 인종을 초월한 모든 역사적인 타자들에 대한 정의에 의거해 마르크스주의를 전화하자는 쪽에 가깝다. 데리다가 자신의 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에 답하며 부연하듯이, 문제는 분석과 정치적 참여의 새로운 차원, 곧 사회적 차이들과 사회적 세력들의 대립을 가로지르는 정치적 참여의 필요성이다.

해체론은 어디로?

요컨대 데리다의 유령학은 “이질적인 것 그 자체가 서로 결합하는 곳에, 탈구와 분산 혹은 차이를 손상시키지 않고 타자의 이질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놓는 일”이 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데리다의 탈구 개념에 내장된 ‘존재의 불가능성’ 때문에 사회주의의 이상을 물질적인 사회 내에 실현하려는 미래의 모든 시도들이 선험적으로 실패할 운명에 처했다는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비판은 데리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과도한 인정일망정 정확한 사태 판단은 아니다. 따라서 탈구의 독특성에 공감한다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전 지구에 걸쳐 모든 남성과 여성들은 오늘날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들”이고 오늘날처럼 기술적인 것과 미디어가 환원불가능해진 현재 상황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지식인의 책무가 된다.

그런 뜻에서 해체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만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정신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시도이며, 어떠한 해체에도 환원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해체의 가능성 그 자체로서의 해체불가능한 것, 다시 말해 “어떤 구조적인 메시아주의의 형식성, 종교 없는 메시아주의, 심지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며 어떤 법이나 권리, 나아가 인권과도 구별되는 정의의 이념이자 현재 통용되고 규정되는 속성과 구별되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추구하는 시도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비판적 (탈)전유를 데리다가 해체론자로서 구상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원격기술과학 시대의 10대 재앙들-실업, 이민, 무역전쟁, 자유 시장, 외환부채, 무기거래, 핵무기, 종족내전, 국제 폭력조직, 국제법의 비실효성-은 데리다가 내린 가장 현실적인 정치적 판단인데, 이러한 난제들은 과연 탈구의 징후인 동시에 ‘메시아적 긍정’의 가능성을 지칭하고 있는가.

데리다는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의 승리가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서 마르크스를 들고 나와 그 정신의 필요성을 들춘다. 그림은 레닌 동상이 철거되는 장면.

마르크스주의의 자기비판과 메시아적인 정신에 공감하는 지식인들이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해 연합하는 느슨한 ‘우애의 연대’는 제도나 조직이 없는 결합이다. 따라서 이 연대가 탈구된 현대 사회에서 어떤 종류의 정치력을 발휘할 것인가는 의문의 여지가 많고, 대다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반론도 이점에 집중돼 있다. 마르크스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해체론과 연결 짓는 고리인 ‘탈구’ 개념은 원격기술과학 시대에 어김없이 관철되는 ‘텅 빈 보편성’의 구조에 대한 사유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발상의 소산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이음매가 어긋난 현실에 존재하는 무수한 주체들의 낱낱이 해체된 현실도 가리킨다. 물론 이러한 이중적 탈구 자체는 하나의 전략적 선택이자 정의의 가능조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10대 난제를 꼽는 데리다의 진단을 평가하건대, 정치성과 정의의 가능 조건이자 불가능의 조건에 대한 해체론적 사유의 틀이 ‘해석’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실천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해체론자의 실천이 아니라 해체론 자체의 실천성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는 것이다.

끝으로, 재출간된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기존의 번역, 내지는 중역들이 회피한 데리다의 독특한 언어에 한층 살갑게 다가갈 수 있는 길잡이의 역할에 손색이 없다. 다만 역자의 방대하고 꼼꼼한 주석과 용어해설 및 원문에 충실한 번역 덕택에 복합적인 데리다의 진면목을 추적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지만, 때로는 독서를 늦추고 사유를 더디게 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역자 자신의 재전유 노력이 좀 더 묻어나는, 좀 더 우리 입맛에 맞는 번역을 기대해본다.

강우성 / 한성대·영문학

필자는 ‘에머슨과 미국 르네상스 시대의 문체 연구’로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미국문학사』, 『이론 이후 삶: 데리다와 현대이론을 말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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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평 2008-04-01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히면 뭐하나 내용은 하나도 없는데...쩝.
 

달러 약세가 전 지구를 울고 웃게 만들고 있다. 그저께 인도의 타지마할 입장료 중 일정한 액수를 달러로 받던 인도 정부가 이를 폐기하고 전액을 루피로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전엔 세계적 모델인 지첼 번천이 모델료를 달러가 아니라 유로로 결제해 달라고 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리고 상당히 오래 전에 베네수엘라 등은 석유 수출대금을 유로로만 결제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미국의 상징이기도 한 달러화가 왜 이리 됐을까? 물론 달러화의 약세는 '쌍둥이 적자'를 해소하려는 미국의 약달러화 용인 정책이 어느 정도 깔려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일련의 사태는 그저 약달러화 용인이라는 정책적 차원에서 이해되기에는 석연찮은 점들이 있는 것 같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은 바로 이런 미국의 위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전의 '임페리얼리즘'이 인식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세 개의 글들은 네그리와 하트의 이 <제국>을 둘러싼 논쟁들이다.



제국주의는 과거형, 지구제국은 미래형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①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③

출처 : <한겨레한겨레> 2007 09 14


» 이진경 교수는 유럽연합의 출현과 남미의 좌파 정권 연대 시도 등을 들며 현 세계 체제는 ‘지구 제국’이 아니라 복수의 국가적 연합이 경쟁·적대하거나 때로는 협조하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③ 제3의 시각 ‘과잉제국주의’

논쟁의 첫 주제에 대해 조정환 성공회대 강사와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지난 두 주 상반된 논지를 펼쳤다. 조 강사는 미국이 농업국 아프간에 수천억 달러의 전비를 쏟아붓고 있는 ‘역설’을 들며 국가주권의 확장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제국주의론으로는 21세기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지구제국’이 국민국가를 넘어 전지구적으로 주권질서를 구축하고 있다고 그는 본다. 반면 정 교수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을 침공한 것은 유럽과 러시아, 중국 등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 패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또 제국론은 세계적 불균등 발전과 양극화와도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세계화 시대에도 국민국가와 국민주권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주체임을 지적했다.

제3의 논자인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이번 글에서 자본운동의 전지구화가 아직 국민국가의 전지구화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제국론과는 다른 시각이다. 그는 유럽연합이나 남미 좌파 집권 국가들의 연대 시도 등을 들며 현 세계 체제를 복수의 국가적 연합들이 경쟁·적대 혹은 협조하는 구조로 파악한다. 그는 이 체제를 ‘과잉제국주의(overimperialism)’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 복수의 국가들이 하나의 제국주의적 연합체로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이는 훨씬 확장된 규모의 제국주의 사이의 관계 체계라는 것이다. 지식논쟁의 다음 주제는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론’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국가 단위의 제국주의 지났지만 미국 정점으로 한 제국은 시기상조
현 단계는 유럽연합·소련·중국과 협조-적대 공존하는 ‘과잉제국주의’


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국민국가 단위의 제국주의 체제와 다른 새로운 단계로 넘어갔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을 인정한다. 자본이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어 생산하고 축적하는 새로운 단계로 이행했다는 주장 역시 인정한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하나의 중심에 의해 통합되고, 주요8개국(G8)을 비롯한 몇몇 선진국들에 의해 구성되는 ‘귀족정’을 통해 경제적으로 관리되는 하나의 단일한 ‘제국’을 형성했다는 말은 인정하기 어렵다. 미국의 경제적 약화가 군사적 지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곤 하지만, 약해진 경제적 능력이 언제까지 군사적 지배력을 떠받쳐줄 것인지도 의문이다. 사회주의와의 대결구도가 일국적 권력을 넘어서는 ‘제국적’ 권력을 촉발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사회주의 붕괴는 그러한 통합요인의 소멸 내지 약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특히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지도력이 별로 먹히지 않았던 것은 미국의 군사적 지배력이 단일한 중심이라는 말을 믿기 어렵게 한다. 반면 국가연합으로서 유럽연합의 출현은 아메리카연합(미국)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 중심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리고 이란이나 베네수엘라에서 달러 아닌 유로로 결제되는 석유시장의 출현 조짐은, 유럽연합의 경제력이 약해진 미국 경제력과 보완 관계가 아니라 대체·경쟁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제국이 전 지구적 권력 네트워크라는 점에서 제국의 권력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고, 따라서 제국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더더욱 인정하기 어렵다. 반대로 제국의 권력은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디든 그것이 작동하지 않은 구멍들, 외부들이 광범하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외부가 없다면, 네그리가 그토록 강조하는 다중이나 저항적 대중의 형성은 불가능한 게 아닐까? 역으로 그 모든 저항의 지점들, 저항이 발생하는 모든 지점들이 제국적 권력의 외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 유사한 이유에서, 제국 안에서 국민국가를 저항의 거점으로 삼는 것이 무익할 뿐 아니라 유해하다고 하는 주장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 물론 국민적 차원에서 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삼는 것이 혁명의 핵심고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령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의 존재가 제국 체제 안에서 제국과 대결하는 데 별 다른 의미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심지어 중국이나 쿠바 같은 사회주의 국가나, 이란 같은 반미국가의 존재 또한, 제국적 체제 안에서 의미 없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주의와 다른 단계의 현 세계체제를 일단 네그리처럼 ‘제국적 체제’라고 본다고 해도, 그 체제는 미국과 그 ‘귀족’들과는 다른, 쉽게 통제되지 않고 종종 적대적이기도 한 국가들, 그리고 러시아나 중국처럼 많은 경우 협조자로 행동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닌 국가들이 공존하는 체제다. 그 국가들은 제국적 국가들과는 다른 특이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이들 국가는 제국적 체제 안에 포함되는 경우에도 제국의 ‘내부’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혁명을 통해서든 선거를 통해서든 제국적 체제 안에 제국적 국가와 다른 종류의 특이점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제국적 체제를 약화시키거나 교란시키고 그것에 대한 저항의 전선을 형성하는 데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인터넷 발달로 자본은 전지구화
국민국가는 여전히 국민관리 주체
초국민적 정치·경제연합 가능성 커
언젠가는 지구제국 시대 올 수도


확실히 일국적 국가 간의 경쟁이나 적대로 세계체제에서 국가들의 움직임을 설명할 순 없다. 이전의 세계체제가 제국주의적 ‘탈영토화’조차 국민국가적 영토성의 확장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은 국민국가적 영토성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영토화가 국민국가로부터 ‘탈영토화되는’(벗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내적으로는 자본의 이윤율 저하가 일국 내에서는 극복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 외적으로는 이를 이런저런 식민주의적 방식으로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러한 한계지점을 넘어서기 위해서 자본은 국민적 영토성을 넘어선 새로운 생산 및 착취 형태를 창안한다. 거기서 일차적인 기초가 되었던 것은 컴퓨터와 디지털화, 그리고 인터넷을 비롯한 전지구적 소통수단의 창안이었다. 인터넷과 통신수단의 발전은 대중들의 활동범위는 물론이고 자본의 활동범위를 전지구적 스케일로 확대했다. 하나의 독립적 네트워크로서 존재하는 자본은 이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탈국민화된 형태로 존재한다. 삼성이 한국 자본이고, 도요타는 일본 자본이라는 관념은 이러한 변화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물론 초국적 자본도 국적을 갖는다. 그러나 증식에 유리한 국적을 갖는다. 따라서 자본은 많은 국적을 갖는다. 자본에게는 원래 국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경우는 이와 나란히 가기 어렵다. 자본은 이윤을 일차적 관리대상으로 하지만, 국민국가는 ‘국민’이란 범위의 ‘인구/주민’을 관리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탈국민화되는 만큼 노동력의 이동도 커졌지만, 그것은 여전히 국가장치에 의해 절단되고 국적을 이용해 과잉착취된다. 이주자란 국경을 이용해 과잉착취되는 노동자들의 이름이다. 또한 국민의 ‘생존’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 역시 국민국가가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항목이다. 예컨대 ‘생존’의 문제를 경제적 발전의 문제로 이해하기에,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을 끌어들이는 게 국가로선 주민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아, 일부 주민(가령 농민)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투자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다. 곧 여전히 국민국가는 전략적 판단의 주체로 존속하고 있다. 주민의 관리, 주권의 관리 문제는 국민국가의 독자성에 더 강하게 연루되어 있다.

요컨대 국민국가는 자본의 탈국민화와 나란히 탈국민화되지 않으며, 자본의 운동과 리듬을 맞추려 하지만 그것과 함께 움직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자본 운동의 전 지구화가 국민국가의 전 지구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자본 또한 국가적 경계를 이용하여 착취하며, 필요에 따라 국가들을 선택한다. 따라서 국민적 경계로부터 탈영토화된 경제적·정치적 권력-네트워크가 전 지구적 통합체로 나아간다는 것은 성급한 추상적 추론이다. 그렇지만 복수의 국가들 간에 새로운 통합이나 연합, 연결의 필요성이 증대한 것은 분명하다. 곧 초국민적 연합의 정치·경제적 형태가 출현할 가능성은 매우 커졌음이 분명하다. 유럽연합의 출현이 지닌 의미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성공 가능성은 아주 미약하지만, 남미의 몇몇 좌익적 성향의 국가들에서 제기되고 있는 연대의 제안들 또한 미국과 거리를 둔 국가적 연합의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미국이 중국의 성장에 대해 경계를 높이며 견제하려는 것 역시 자국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는 또 하나의 거점의 가능성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복수의 국가적 연합들이 경쟁하기도 하고 적대하기도 하며 때로는 협조하기도 하는 체제. 이를 일단 ‘과잉제국주의(overimperialism)’라고 부르자. 무엇보다, 이질적인 위상을 지닌 복수의 국가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제국주의적 연합체로 응축되어 성립되는 체제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이전보다 훨씬 확장된 스케일의 제국주의 간의 관계체계일 것이고, 제국주의를 넘어선 단계의 제국주의 체제일 것이다.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이진경 교수는 1963년생이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코뮨주의’란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있으며, 생명의 경제·정치학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의 맑스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노마디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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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제국’은 허상이다, 제국주의 되레 격화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①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②

출처 : <한겨레한겨레> 2007 09 07


» 지난 6월 독일 하일리겐담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 ② 왜 제국주의인가

조정환 성공회대 강사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오늘날 주권은 일국적 수준을 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구축되고 있다면서 제국주의론은 제국론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국주의론으로는 미국이 아프간 전쟁으로 빚더미에 몰리게 된 역설을 설명할 수 없다면서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강대한 용병국가로서 지구에 산재한 미군들뿐만 아니라 동맹국 군대들을 지구제국을 지키는 용병으로 결합함(이른바 ‘연합군’)으로써 군사적 헤게모니를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씨는 제국의 시대에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해방운동은 더는 유효한 투쟁전략이 아니며, 자본에 대항하는 다중들의 투쟁을 전지구적 수준으로 연결하는 연합운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논지에 대해 이번주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반론을 펼친다. 정 교수는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이 현재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구성 주체라고 본다. 다수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 국민국가를 매개로 지정학적·군사적 경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을 침공한 것도 유럽과 러시아, 중국 등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의 패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다음주에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펼칠 예정이다. 강성만 기자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하는 논쟁은 언뜻 보기에 매우 현학적인 논쟁인 것처럼 보인다. ‘주의’라는 말이 있거나 없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다르다는 말인가? 하지만 ‘제국’과 ‘제국주의’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한다면 이 논쟁은 오늘날 세계체제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선, ‘제국’(Empire)은 대문자로 시작되는 단수 고유명사인 데 반해, ‘제국주의’는 복수의 보통명사인 제국주의들(imperialisms)을 함축하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제국주의론은 그동안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는 미국·유럽연합·일본·러시아·중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그러한 강대국과 약소국의 지배-예속 관계가 주된 특징이라고 본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모순은 각 국민국가 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제국주의 국가와 피억압 민족의 첨예한 대립이 중층적 구조를 이룬다.

세계화 불구 국민국가·국민주권이
여전히 자본주의체제 핵심주체
전지구적 주권 출현은 불가능
자본들간의 경쟁이 다극화했을 뿐…


반면, 네그리와 하트, 조정환 등 제국론자들은 오늘날 세계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같은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세계제국, 곧 일종의 세계국가 시대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제국론으로 보면, 사회의 모순 구조는 세계제국 혹은 ‘전지구적 주권’과 세계 ‘다중’의 대립 구도로 단순화된다. 물론 제국론은 이런 단순화된 대립 구도를 이른바 ‘왕정-귀족정-민주정’의 3층 구조의 비유로 보완하려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전체 구도를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이른바 ‘전지구적 주권’이며,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다.

제국론과는 반대로, 제국주의론은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이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구성 주체라고 본다. 국민국가와 국민주권의 소멸과 이른바 ‘전지구적 주권’의 출현은 제국론자들의 관념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구상이며,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의 변증법’ 때문에 현실화할 수 없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의 변증법’이 뜻하는 바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다수 자본들 간의 경쟁이 자본의 국제화와 경제적 차원의 경쟁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국가(‘자본의 국가화’)를 매개로 지정학적·군사적 경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체제의 위계적 구조와 불균등성은 더 강화된다.

제국주의론의 이런 기본 인식은 지난 세기에는 물론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세계대전이라는 형태로 폭발했던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격렬한 경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라는 형태로 지속됐고, 1989~91년 옛 소련 블록 붕괴 이후에는 좀더 다극화한 제국주의들 간의 경쟁으로 격화하고 있다. 최근의 사례가 다름 아닌 2001년 9·11을 기화로 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및 점령과 이를 둘러싼 서유럽·러시아·중국 등과의 갈등이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다는 부시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점령한 진정한 목적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석유가 매장돼 있는 이라크에 미국의 경쟁자인 유럽과 러시아, 중국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또,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 은닉을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것도 실은 옛 소련 블록 붕괴 이후 중동 지역과 함께 전략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른 중앙아시아·서아시아 지역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 등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조정환은 미국의 이러한 행동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비용이 석유 확보 등에서 기대했던 경제적 이득을 초과하고, 이 때문에 미국의 재정적자가 악화돼, 미국이 경제적으로 더 취약해지고 있다는 것이 그가 드는 이유이다. 조정환이 보기에 미국 군대는 ‘지구제국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다중들의 세금’으로 고용된 ‘전지구적 용병대’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의 두 논리, 곧 경제적 경쟁의 논리와 지정학적 경쟁의 논리(영국 역사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권력의 영토적 논리’라고 부른 것)가 서로 상대적 독자성을 지닌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자를 전자로 환원한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아프간 침공은
서유럽·러시아·중국과의 갈등 탓
제 3세계 구별 사라진다는 주장도
세계적 불균등·양극화 현상과 모순


조정환의 주장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인정하는 마이클 하트 같은 원조 제국론자의 인식과도 상충된다. 하트는 2001년 이후 부시 정권의 제국주의적 행동은 9·11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태로 말미암아, 지난 세기 말 이후, 특히 클린턴 정권 때부터 진행된 제국으로의 이행 궤도로부터 일시적으로 일탈한 것이고, 곧 제 궤도로 복귀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본다.

그러나, 9·11 이후 부시 정권에서 노골화된 제국주의적 거대 세계 전략은, 1992년 국방부의 〈국방계획지침〉과 1997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에서 보듯이, 이미 9·11 이전부터 준비되었으며, 일방주의적 제국주의보다 다자주의적 제국에 가깝다는 이유로 제국론자들이 선호하는 클린턴 정권에 의해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 실행에 옮겨졌다. 제국론자들은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다.

제국론은 ‘제3세계’라는 개념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한다. 제국의 시대에는 제1세계/제2세계/제3세계 같은 구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3세계는 제1세계 안으로 들어가 그 중심에 게토와 슬럼으로 자리 잡았고, 제1세계는 제3세계에 이전되어 주식시장, 은행, 마천루 같은 형태로 되어, 이제 중심과 주변, 남과 북은 서로 가까이 접근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북 분할이 소멸되고 있다는 제국론의 주장은 수많은 실증 연구들에서 확인되는 세계적 불균등 발전, 세계적 양극화라는 오늘날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제국론은 오늘날 세계에서는 국민국가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다고 본다. 그래서, 독립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거나 유지하려는 민족주의는 아무런 진보적 의의도 없으며, 제국의 경향을 거스르는 역사적 반동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점령에 대항하는 이라크인들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 문제가 여전히 현재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투쟁은 제국주의적 억압에 맞서 민족자결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므로 테러와 같은 잘못된 전술과 잘못된 정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투쟁을 제국주의 반대자들은 지지해야 한다.

제국주의, 미국 제국주의 또는 줄여 말해 ‘미제’라는 말은 1970년대만 하더라도 ‘빨갱이’의 ‘삐라’에서나 볼 수 있는 불온한 용어였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오늘날은 미국의 지배계급 중 핵심 집단인 네오콘 자신이 스스로 제국주의자임을 내놓고 자랑스럽게 자임한다. 자신이 제국주의라고 ‘커밍아웃’한 21세기 ‘벌거벗은 자본주의’에 다시 제국이라는 포스트모던한 옷을 입혀 주고, 이것이 제국주의에 비해 더 낫다며 변호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제국론은 진보의 담론으로서 자격을 상실한다.

정성진/경상대 교수

» 정성진/경상대 교수
 
 
* 정성진 교수는 1957년생이며 현재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방법에 의거한 현대 한국경제 분석과 대안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 구상 및 대안사회운동론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 등이 있습니다.

강성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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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약세가 전 지구를 울고 웃게 만들고 있다. 그저께 인도의 타지마할 입장료 중 일정한 액수를 달러로 받던 인도 정부가 이를 폐기하고 전액을 루피로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전엔 세계적 모델인 지첼 번천이 모델료를 달러가 아니라 유로로 결제해 달라고 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리고 상당히 오래 전에 베네수엘라 등은 석유 수출대금을 유로로만 결제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미국의 상징이기도 한 달러화가 왜 이리 됐을까? 물론 달러화의 약세는 '쌍둥이 적자'를 해소하려는 미국의 약달러화 용인 정책이 어느 정도 깔려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일련의 사태는 그저 약달러화 용인이라는 정책적 차원에서 이해되기에는 석연찮은 점들이 있는 것 같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은 바로 이런 미국의 위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전의 '임페리얼리즘'이 인식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세 개의 글들은 네그리와 하트의 이 <제국>을 둘러싼 논쟁들이다.



제국주의는 죽었다, 21세기는 지구제국 시대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①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①

출처 : <한겨레한겨레> 2007 08 31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 ① 왜 제국인가

이번주부터 매주 한차례씩 학계의 주요 쟁점을 보는 전문 연구자들의 각기 다른 시각을 엮어 내보낸다.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시사성 있는 쟁점에 대해 그 논리의 틀거리와 각기 다른 논지의 차이를 세밀히 들여다볼 계획이다. 풍부한 논리 소개로 해당 주제에 대한 독자 이해도를 높이고자 원칙적으로 매주 한 꼭지의 글로 한 면을 채우기로 했다. 시리즈의 첫번째 쟁점은 ‘제국이냐 제국주의냐’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책 〈제국〉이 지난 2000년 출간된 이후, 이 주제는 여러 나라에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됐다. 지은이들은 현재의 전지구적 권력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제국’을 내세운다. “경제적 문화적 교환들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고 권력의 중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국민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제국주의론’은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제국주의론’에 사망 선고를 내린 셈이다. 이들은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등장으로 미국 등 어떤 국민국가도 오늘날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제국’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오늘의 세계는 미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이며, 이른바 세계화란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지배의 확장 과정일 뿐”이라고 논박한다. 제국론의 지지자인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의 글에 이어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제국주의론의 견해에서 반론을 펼치며, 이후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제시한다. 강성만 기자



지구는 미국을 정점으로 한 ‘제국’
미국은 한·일·유럽 등 거느리고
일개의 국가 넘어 주권질서 구축
탈레반의 한국인 인질도 이 때문


왜 미국은 양귀비가 주요 산품일 뿐인 농업국 아프가니스탄에 수천억 달러의 전비를 쏟아붓고 있는가?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이나 독일인이 어째서 탈레반의 인질로 이용될 수 있는가?

‘전지구적 주권질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주권의 확장메커니즘을 설명했던 ‘제국주의론’은 20세기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이었지만 탈식민화가 전개된 20세기 후반부터는 적실성을 잃기 시작했다.

신제국주의론,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탈식민주의론 등은 그것의 부적실함을 메우고자 만든 이론들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세계는 더는 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물론 제국주의 현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초강대국 미국이 ‘국익’을 위하여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작은 나라들을 침략·점령한 뒤 석유·가스와 같은 자원을 약탈하거나 그 수송로를 매설하고 무기를 비롯한 상품을 팔고 자본을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을 제치고 소련 제국주의와의 냉전에서 승리한 뒤 점점 더 거대한 제국주의 초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일면적이다. 그것이 감추는 다른 면들이 있다. 예컨대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한 전비는 점령을 통한 자원 확보나 상품 수출을 통해 볼 수 있는 이익을 훨씬 초과한다. 게다가 전후 ‘국가건설’ 프로젝트에 거대한 자금이 원조로 제공되어야 한다. 저항이 끝나지 않음으로써 전쟁은 항구화하고 전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 행동은 미국 자신을 연간 7000억 달러의 무역적자와 연간 4000억 달러의 재정적자를 기록하며 평균 매일 20억 달러를 차입해야 하고 또 매일 50억 달러의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빚더미 국가’로 만들어 놓는다. 제국주의론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제국주의론의 좀더 발전된 판본은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설명한다. 그 종속국의 범위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독일과 같은 이전의 적대국, 그리고 프랑스·영국과 같은 옛 제국주의 맹주국들도 포함할 만큼 넓다. 동맹국들을 거느리는 데 드는 높은 비용 때문에 미국의 부채는 부단히 증가한다. 그래서 빌 보너의 〈부채의 제국〉, 에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 차머스 존슨의 〈제국의 슬픔〉 등은 미 제국의 불가피한 몰락을 예언한다.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등장을 보지 못하고 국민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이상의 이론들은 미국의 군사적 강대화와 경제적 취약화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실천적으로 제국주의론은 민족해방을 아직도 유효한 투쟁전략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미국에 맞섰던 사담 후세인을 군사적으로 지지할 뿐만 아니라 탈레반을 민족해방운동의 전위대로 지지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테러와 납치도 민족해방운동의 부득이한 전술일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도 반제국주의 보루로 보일 것이다. 반면 미 제국론은 미국의 붕괴를 예상하면서 미국을 대체할 대안제국(가령 유럽이나 중국)을 상상하는 데 머무른다. 이러한 정치학이 가져올 퇴행적 결과를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듯 이들이 국가행동에 정치의 초점을 맞추는 한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다중들의 국경을 넘는 전지구적 연합운동의 중요성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구제국 최상층에 미국의 무력
그 아래 G8·나토·WHO 등 복무
기타 국가·엔지오들이 맨밑 민주층
정리해고 등 ‘다중과 전쟁’ 일상화


사태를 근본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해하자면 오늘날 주권이 일국적 수준을 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구축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은 주권의 이러한 전지구적 구성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을 제공한다. 각 층에 각 3단의 작은 계단을 가진 3층 피라미드의 주권 구성체 그림에서 미국은 피라미드적 주권 질서의 최상층, 최상단에서 전지구적 무력사용에 대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미국은 강대한 용병국가로서 지구에 산재한 미군들뿐만 아니라 동맹국의 군대들을 지구제국을 지키는 용병으로 결합함(이른바 ‘연합군’)으로써 군사적 헤게모니를 행사한다. 한국의 파병도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미국 대통령은 이런 의미에서 전지구적 용병대의 우두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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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로 전지구적 통화수단을 통제하면서 국제거래를 조절하는 일단의 국가들의 연합체(주요8국, 파리클럽과 런던클럽, 세계경제포럼 등). 그 아래 단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처럼 군사적 혹은 재정적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국제단체들이 놓인다. 이상이 제국을 ‘통합’하는 군주층이다. 그 아래의 귀족층은 초국적 기업들 및 시장을 조직하는 세력들(세계무역기구, 세계은행 등과 같은 국제경제기구들)과 국지적으로 영토화된 국민국가들(유럽연합 등)에 의해 ‘절합’되어 있다. 이것이 귀족층이다. 그 아래의 민주층에 전지구적 권력배치에서 민중의 이해를 ‘대의’하는 집단들이 놓인다. 유엔을 통해 다중을 대의하는 국민국가들, 미디어들, 그리고 비정부기구(NGO)들 등이 그것이다.

등장하고 있는 전지구적 주권질서에 대한 이 그림은, 수많은 크고 작은 권력체들이 위계질서화된 그물 속에 마디들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물 주권기계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중이야말로 오늘날 지구적 삶의 생산자라는 사실의 인식에 근거해야 한다. 전지구적 주권기계의 기능은 다중의 삶활력을 권력흐름으로 뒤바꾸는 것이다. 민주층의 대의회로를 거친 그 힘들을 귀족층에서 마디마디 절합하면 군주층이 통합하여 단일한 세계명령(보편공리)으로 만든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는 자본 착취의 무제한 자유를, 테러에 대한 영구전쟁은 다중의 삶자유에 대한 무한한 억압을 공리화한다. 이 명령기제를 통해 다중의 생산적 활력은 제국주권의 동력으로 포획된다.

요컨대 제국의 재생산은 다중으로 하여금 창조적으로 살되 공포와 예속 속에서 살게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정리해고, 비정규직화와 같은 사회적 갈등들은 물론이고 외형상 국가간 전쟁형태를 띠는 갈등조차 실제로는 다중에 대한 제국의 전쟁, 곧 전지구적 내전이다. 21세기의 전쟁들은 자본의 이러한 필요에 따라 각층 각단의 주권마디들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 지지 아래 일상적·보편적·항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구제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군대는 지구상 어느 오지라도 파견된다. 그런데 그에 수반되는 전비는 누가 치르는가? 미국은 동맹국들로부터 전비를 거두는데 이것은 해당국 다중들의 세금에서 나온다. 미국 자신의 전비는 부채(국채판매)로 충당하는데 미국의 국채를 구입하는 것은 중국이나 한국 같은 여러 나라이며, 그 주요 자금은 국민들의 연금·기금·보험료·저축 등이다. 결국 전세계의 다중들이 다중 자신을 공격하는 제국의 전쟁에 전비를 치르는 셈이다.

미국의 부채는 미국이 붕괴되지 않는 한에서만, 아니 전쟁 강국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만 다른 부채를 통해 상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결국 전지구적 전쟁질서로 말미암아 미국은 부단히 ‘제국주의적’ 행동을 일삼게 되고 그것은 다중의 건강과 노년, 다시 말해 생존과 안전을 볼모로 잡는다.

이 착종되고 역설적인 상황을 깨뜨릴 대안은 무엇인가? 그 답은 오늘날의 전지구적 주권질서 자체가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중 자신이 다양한 수준에서 벌이고 있는 투쟁들을 지구적 수준에서 연결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길이다. 투쟁하는 다중의 지구적 네트워크의 길을 열어감에서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실재성을 보지 못하는 제국주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조정환/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 조정환/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조정환씨는
1956년에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현재 ‘자율평론’ 상임만사(만드는 사람), 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성공회대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등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탈근대적 사회운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분야와 관련해 <제국기계 비판>(갈무리, 2005)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 등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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