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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멈출 수 없다면 투쟁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을 모를 땐 삶의 다짐 자체가, 삶의 지속 그 자체가 투쟁일 수도 있는 것. 투쟁은 길을 묻지 승리의 가능성을 묻진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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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7. 유럽 팽창의 심성 - 아시아에 있는 신의 땅 ‘에덴’으로 돌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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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
) l 2007-11-21 21:53
https://blog.aladin.co.kr/729846193/1713857
아시아에 있는 신의 땅 ‘에덴’으로 돌아가리
문명과 바다 7. 유럽 팽창의 심성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11-09
» 11세기 유럽 지도로 위부터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나타낸다
많은 문명권이 원양 항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로 세계의 바다를 연결한 것은 유럽인들이었다. 왜 유럽인이 최초로 전지구적 해상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을까를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테지만, 유럽 문명 내면의 어떤 특이한 집단심성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꿈, 열망, 신념 혹은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사람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정신적 요소가 그들의 행동을 부추기지는 않았을까?
이와 관련해서 특기할 점이 중세 유럽 문명 내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지상낙원(paradise)’의 개념이다.
유럽인들은 아시아 동쪽 끝에 지상낙원인 ‘에덴동산’이 있을거라 믿었다. 이믿음은 마르코 폴로 등이 쓴 ‘여행기’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아시아는 놀라운 일들, 엄청난 부, 아름다움과 위험이 상존하는 곳으로 각인됐다. 유럽인들에게 아시아 정복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 ‘중세적 꿈’의 실현이며 신의 뜻을 받드는 종교적 과업이었다
» 유럽인들이 상상한 세계의 ‘괴물’ 종족들.
오늘날에는 낙원이라고 하면 아예 그 존재를 부정하든지, 혹은 이 세상이 아니라 사후(死後)에 가게 되는 또 다른 차원의 ‘장소’, 차라리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낙원’은 곧 ‘지상낙원’을 가리켰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에덴동산을 말한다. <성경>의 ‘창세기’에 아주 구체적으로 지리적 설명이 제시되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유럽인들은 지구상 어딘가에 에덴동산이 실재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그 지상낙원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중세 유럽의 구전 전통에 따르면, 노아는 죽을 때 이 세상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서 셈·함·야펫 세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시아는 셈에게, 아프리카는 함에게, 또 유럽은 야펫에게 돌아갔는데, 그 중 셈이 차지한 아시아가 가장 좋은 곳이었다. 이곳의 북쪽 경계는 티나 강(Tina, 돈 강), 남쪽 경계는 기혼 강(Guihon, 나일강)이며, 동쪽 끝에 에덴동산이 있고 중간에 시온 산이, 그리고 남쪽에 시나이 산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전승에 의하면 지상낙원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유럽 문명의 기저에는 원죄 의식이 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분노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낙원의 기쁨 대신 지옥의 공포를 안고 살게 되었다. 하느님과 함께 지극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던 지나간 황금시대에 대한 후회가 유럽인들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이러한 죄의식은 어떻게 해서든 지상낙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연결되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인들이 아시아를 향해 품고 있던 강력한 동경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지상낙원에 대한 향수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의 세계관은 이처럼 종교적인 내용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것은 또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직접 보고 왔다는 각종 ‘여행기’들에 의해 확인되고 더 강화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실제 그가 본 내용만이 아니라 그가 들었던 소문, 더 나아가서 그가 믿고 염원하는 것, 상상한 것까지 뒤섞여 있었다. 그가 그리는 아시아의 모습이 대개 엄청난 과장으로 부풀려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항주에는 모두 1만 2천 개의 돌다리가 있고, 게다가 이 다리의 아치가 얼마나 높은지 그 아래로 배들이 돛대를 접지 않고도 쉽게 지나다닐 수 있으며, 둘레가 2마일 정도인 광장들이 4마일마다 하나씩 있어서 이곳에 1주일에 사흘씩 4만~5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거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치핑구(일본)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금이 나는 곳”으로서 궁궐의 “보도들 역시 순금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두 손가락 정도나 된다.” 이처럼 그의 기록은 실제 사실과 전설이 혼재해 있었다.
» 마르코 폴로
중세 말부터 근대 초까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맨드빌 여행기>는 더 환상적이다. 단 한 번도 유럽 땅을 떠나본 적이 없는 이 작가는 기존의 여러 여행기들의 내용을 짜깁기해서 아시아를 몽환적으로 그렸다. 아시아 각지에는 두루미와 싸우는 피그미족, 개 대가리를 가진 사람, 머리는 없고 배에 눈이 달린 사람, 엄청나게 큰 발 하나만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양산처럼 사용하여 햇빛을 가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타프로반(Taprobane, 실론)에는 개만한 식인 개미들이 황금을 지키고 있다. 아시아는 놀라운 일로 가득 찬 곳이며, 최대의 부, 지극한 아름다움과 동시에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과연 이런 내용의 ‘여행기’들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놀랍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수백 번 판을 거듭하여 출판된 이 책들은 실제 여행 안내서 구실을 하였다. 콜럼버스도 마르코 폴로와 맨드빌의 여행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책들의 여백에는 그가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콜럼버스는 중세적인 세계관을 그대로 믿고 항해를 떠난 것이다. 맨드빌의 여정을 참고하여 유럽인이 상상한 세계의 모습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유럽에서 곧바로 동쪽으로 떠나면 예루살렘이 나온다. 그 다음에 인도의 여러 지역들을 거치게 되고 그 끝 부분에 전설의 기독교 왕국인 사제 요한 왕국이 나온다. 이 너머에 암흑의 땅이 있고 바로 그 다음에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지상낙원이 있다.’ 그러나 그곳은 인간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맨드빌도 그곳만은 가지 못했다고 기술한다.
» 마르코 폴로가 소개한 안다만제도 견두인들.
“그 어떤 살아 있는 사람도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 육로로는 그 안에 도달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황야에 사나운 짐승들이 있고 아무도 넘을 수 없는 산과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 바다를 통해 그곳에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파도가 너무나 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맨드빌은 여기에 아주 중요한 꼬리표를 달았다. “예외적으로 신의 특별한 은총을 통해서만 그곳에 항해해 갈 수 있다.” 콜럼버스가 바다를 통해 아시아의 동쪽 끝으로 직접 가겠다고 한 것은 분명 이 구절과 무관치 않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뒤에도 자신이 인도 혹은 일본 근처의 어느 섬에 도착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인 지상낙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계속 찾아 헤맸다. 실제로 그가 남미의 오리노코 강 어귀에서 거대한 민물의 흐름을 발견하자 이것이 지상낙원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강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인류가 다시 지상낙원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으며, 그러한 신의 뜻을 구현할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는 이슬람교도들을 전멸시키고 로마와 같은 세계제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유럽의 팽창은 중세적 꿈에서 동력을 길어왔다. 그것은 곧 이윤과 권력의 확보라는 세속적 성격으로 급격하게 변화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지배와 정복이 곧 신의 뜻이며 따라서 절대적으로 옳다는 종교적 색채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문명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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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당연한 근대문명과 부국강병 예찬 - 권력의 주구, 서정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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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
) l 2007-11-21 21:20
https://blog.aladin.co.kr/729846193/1713776
너무 당연한 근대문명과 부국강병 예찬
[석유문명과 예술] 권력의 주구, 서정주 시인
[박승옥 _ 시민발전 대표]
출처 : <컬쳐뉴스> 2007-11-17
▲ 서정주는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지낸 그렇고 그런 문단 권력자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본문에서
서정주라는 시인이 있다. 아마도 정현종보다도 더 유명하고 더 논란이 많은 시인일 것이다. 특히 그의 친일 행적과 시의 수준과 관련해서는 시 자체와 시인의 삶과는 분리해서 보아야 된다는 주장의 대표사례로서 늘 거론된다. 그런 분리론은 이 땅의 친일 민족반역자 문학인들에게는 그럴듯한 변명꺼리를 제공해주는 아주 편리한 면죄부인 셈이다.
그러나 시와 시인의 삶이 어찌 따로 분리될 수 있겠는가. 시인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다중인격 장애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어야만 하는가. 모름지기 시인이란 무당이나 영매처럼 다른 귀신이나 영혼이 늘 강림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는가. 결코 아니다. 시는 시인의 삶 그 자체일 뿐이다. 시는 사회 속에서 사는 시인의 경험과 삶이 체화되고 육화된 공동체의 열매일 뿐이다.
서정주의 시에 대해 한국 최고의 시로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금도 나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솔직히 나는 서정주의 시를 읽고 한 번도 감흥을 느낀 적이 없다. 서정주의 친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고등학교 때 화사집이나 귀촉도 시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저 감정의 과잉이나 지나친 엄살 정도로 느끼곤 했다. 그리고 노자의 말대로 교언영색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사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백석과 지용을 비롯한 그야말로 빼어난 시인들이 북으로 가거나 빨치산으로 죽은 폐허 위에서, 1950년 이후 한동안 남한에 빼어난 시인들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극단의 반공 정신병동과도 같았던 남한 사회에서 빼어난 시인이라면 미치거나 감옥에 갇혀 있는 게 정상이었다. 이른바 문단이란 것을 만들고 문단권력을 휘두르며 문인입네 하는 작자들이란 백석과 정지용을 빨갱이라고 한국문학사에서 그 이름을 지우면서 한국문학 자체를 죽이고 있던, 문학을 팔아 계집질과 호의호식을 일삼던 파렴치범들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기행과 광기를 일삼았던 것이다.
서정주는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지낸 그렇고 그런 문단 권력자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일제 때는 천황을 칭송하더니 해방이 되면서는 재빨리 친미로 돌아서 이승만의 전기를 쓰는 놀라운 처세술을 발휘했다. 그리고는 역대 독재자를 칭송하는데 늘 앞장서면서 권력의 주구(똥개의 한자말) 노릇을 마다하지 않던 그렇고 그런 잡놈이었을 뿐이다. 때문에 베트남 파병 때 베트남 파병을 칭송하는 시를 쓰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새로 나갈 길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베트남뿐이다/ 베트남뿐이다”(「다시 비정의 산하에」, 한국일보, 1966. 8. 14)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까지 하면서 베트남을 침략했고 미군이 학살한 베트남인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고엽제 피해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천인공노할 미군의 만행이었고 밀라이 학살 등 미군의 민간인 학살도 널리 알려져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한국군도 이 명예롭지 못한 전쟁에서 자그마치 5천명이나 죽었다. 서정주는 젊은이들에게 그런 전쟁에 가서 기꺼이 죽으라고 선동시를 휘갈겨 댔던 것이다. 서정주의 자식이 월남전 참전 용사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서정주가 일제 때 쓴 친일시와 요즈음에는 ‘30만원밖에 없는’ 알거지가 되어버린 독재자 전두환 찬양시는 서정주의 시와 삶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관성을 늘 충실하게 견지하고 있음을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월남전에 가서 죽으라는 선동시는 일제 시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가미가제로 죽어가라고 선동한 시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 //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 공격대원 /귀국대원... //
수백척의 비행기와 / 대포와 폭발탄과 /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 그대 /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
장하도다 /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 산천이여 - 서정주, 「오장 마쓰이 송가」
<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얻으셨나니 //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 서정주, 「처음으로」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의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매
입, 개조하여 만든 서정주 문학관.
광주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상상 이상으로 잔인하고도 무참하게 죽어갔고, 수많은 젊은 피들이 전두환 살인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몸을 던지고 있을 그 때, 그 전두환의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서정주가 쓴 시를 보고 그때 나는 정말 먹은 것을 다 토할 정도로 꼭지가 돌았다. 1987년 6월항쟁 직전의 일이었다.
하여 나는 지금도 시는 시를 쓰는 사람의 삶과 분리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분리하려는 모든 언사는 사실 기만이자 문학의 호도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짓을 태연히 저지르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서정주의 이같은 일관성의 근본 뿌리는 서구 근대문명을 향한, 발전과 개발의 서구 산업문명에 대한 뿌리깊은 열광과 열등의식이었다. 흔히 젊은 시절 서정주는 서구 근대를 비판하고 현실의 속물세계에 맞서 술과 방랑을 통해 인간의 원초성과 영원성을 추구하는 에즈라 파운드 류의 모더니스트였다고 그럴 듯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지 어쩐지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위의 시에서 금방 볼 수 있듯 서정주는 늘 근대 서구의 거대한 물질문명과 부국강병의 국가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근대 신봉자였다. 서정주에게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질문이 필요없는 너무나 당연한 전제였다.
19세기 조선이 근대화를 이루지 못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이후 근대화란 하나의 종교였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국가 목표였다.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방법은 달랐어도 근대화, 산업화, 라인강의 기적은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지고지선의 선이었으며 예민한 시인이 아니면 대부분의 문학인들은 당연히 근대추종자들이었다. 서정주도 마찬가지였다. 동양전통과 신라 문화는 서정주식의 유치한 오리엔탈리즘 기호품에 지나지 않았다.
『미당의 세계방랑기』(민예당, 1994)란 책을 보면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과시해서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5대양 6대주에 걸친 한 사람의 이만큼한 광범위한 여행도 내가 알기로는 세계문학사--아니 세계문화사상에서의 처음일 듯하니, 이것만큼은 떳떳한 한 보람으로 느낀다.
스스로 세계문학사와 세계문화사의 사건으로 칭하는 80노인의 이 우매한 치기에는 그저 낯간지러운 웃음만 나올 따름이다. 책의 내용이라고 해보았자 여행기라기보다는 대한민국 외교관과 상사주재원 만남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디 가서 대사관 직원 누구를 만났고 높은 사람 누가 자신에게 저녁을 대접했고 따위의 허접스런 얘기들 투성이다. 게다가 ‘세계문학사의 사건’인 5대양 6대주 여행을 하신 노시인의 역사인식과 안목은 그야말로 초등학생 수준도 안된다. 서정주에게는 서구의 근대와 한국의 산업화란 그야말로 일종의 자명한 명제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떤 성찰이나 언급의 필요성을 느낄 여지는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있다면 아메리카가 고구려의 식민지라는 코메디같은 국가주의의 망령뿐이다.
몽고나 만주나 시베리아 언저리에서 북쪽 아메리카의 알래스카 같은 데를 거쳐 차근차근 남쪽으로 여기까지 내려온 것은 아닌가 보고 있다... 이리 되면... 이 넓은 남북 아메리카 주는 또 옛날 우리 고구려 사람들의 식민지이기도 했다는 것 아닌가
이 테오티와칸이 이곳 수도였던 때의 왕들은 이 피라미드 위의 제단에다가 처음엔 오십 년만에 한 번씩 산 처녀의 심장을 가슴에서 도려내서 해와 달 앞에 바쳐왔던 것이나... 뒤에 아즈테가 족속들에게 그들이 패망한 건 바로 그런 그들의 죄의 벌이다. 이런 살벌한 잔인성이 오래 흥하는 일은 없는 것이니까...
위성사진을 보면 하늘길과 뱃길이 뚜렷하게 시꺼멓게 나온다.
비행기가 석유를 태운 연기와 선박이 태운 석유 매연 때문이
다. 특히 선박용 기름은 질이 제일 낮은 석유로서 지구온난화
를 더욱 가속시키는 주범 가운데 하나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와 서구 백인들이 저지른 피의 학살에 대한 무지는 그렇다고 치자. 아즈텍 인들의 제의는 잔인하고 일제 정신대의 만행은 잔인하지 않은 단순한 성매매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또 한국전쟁 당시의 그 무수한 치떨리는 살벌한 잔인성은 죄가 아니라 당연한 선의의 잔인성일까.
서정주가 5대양 6대주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물론 당연히 값싼 석유 때문이었다. 석유는 지금 이 순간 전세계에서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이 자그마치 3백만 명에 이르게 할 만큼 관광산업의 폭발과 함께 지구를 아주 작은 행성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2006년 한 해 동안 약 1천 2백만의 한국인이 해외관광을 가 138억 달러를 썼다. 전세계 해외관광객 수는 한 해 8억 명이 넘는다. 이 또한 석유와 자본주의가 만든 지속불가능한 이상한 한 때의 풍요, 한 때의 유행이다.
오늘날의 관광이란 혜초의 여행이나 김삿갓의 방랑과는 전혀 다르게 어느새 그나마 남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지구자원을 낭비하는 범죄행위로 변해버린지 오래이다. 예컨대 전세계 자동차가 소비하는 석유는 65억 인구가 음식물로 소비하는 에너지의 두배에 이른다.
위성사진을 보면 하늘길과 뱃길이 뚜렷하게 시꺼멓게 나온다. 비행기가 석유를 태운 연기와 선박이 태운 석유 매연 때문이다. 특히 선박용 기름은 질이 제일 낮은 석유로서 지구온난화를 더욱 가속시키는 주범 가운데 하나이다.
진보를 주장하는 작가들, 심지어는 자연을 노래하고 드넓은 바다를 말하는 작가들 가운데에도 이런 근대 중독, 석유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이다. ‘대양을 향한 작가들’이라는 모임이 있다. 현대상선이 공짜로 제공하는 7만톤급 정도의 대형 컨테이너 배를 타고 해양체험을 하고 난 뒤 이들이 쓴 글들을 보면, 이른바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에 대한 국가예찬과 근대 산업문명, 석유문명의 거대함에 압도된 작가들의 그 언어 감수성과 해양문학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허튼 몸짓과 엄살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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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옥
은 구로동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10여 년 동안 시골을 돌아다님. 지금은 에너지전환 운동 시민기업인 시민발전 일과 전태일기념사업회 일을 하면서 기고와 강연으로 한국 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일하고 있음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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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문명과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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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富’ 와 ‘貧’ 의 무덤덤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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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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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 2007-11-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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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인도, ‘富’ 와 ‘貧’ 의 무덤덤한 동거
뭄바이·방갈로르·델리 | 김주현 기자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16일
-상업·금융 중심도시 뭄바이 현장-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곳이 있다. 같은 장소지만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차원은 제각각이다.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고층 건물이 우뚝 솟아있는 바로 옆에 찢어진 천막이 붙어 있다. 거리를 오가는 ‘거지’들은 화려한 레스토랑을 봐도 무덤덤하다. 부자들은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빈곤을 끼고 살지만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인도의 고성장을 주도하는 부유층은 주연 배우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빈곤층은 그저 스쳐가는 관객에 불과하다.
인도 뭄바이 시내 중심가 시장 입구의 낡은 건물에 화려한 광고판이 걸려 있다. 경제발전과 빈곤심화라는 인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뭄바이/김주현기자
지난달 31일 인도의 경제수도 뭄바이를 방문했다. 뭄바이는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250여년간 인도의 상업·금융 기능을 해왔던 경제수도다. 인도의 면화가 유럽으로 수출되는 통로로 인도 전체 물동량의 50%가 뭄바이를 거친다. 인도 100대 기업 중 41개, 10대 기업의 8개가 뭄바이에 몰려있다. 인도시장을 노리는 전 세계 기업과 금융자본도 뭄바이를 빼고선 상상하기 힘들다.
경제수도 뭄바이는 ‘자본의 집약’을 빼면 두 가지가 유명하다. 인도 최대의 빨래터 ‘도비가트’와 아시아 최대의 슬럼가인 ‘다라비’가 뭄바이에 있다. 경제발전과 빈부격차 심화라는 인도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도시다.
다라비에서 만난 스크터탄 아부둘 세익(55)은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하루 세 끼를 거르지 않고 먹는 것”이다. 그에게는 인도 경제가 발전하고 그 과실이 골고루 분배되는 것은 남의 문제다.
다라비에서 쿨리(노동자)로 20년째 일한다는 한 남자는 “장래희망이나 꿈 같은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해봤자 될 것도 아니다”라고 털어놨다. 짐을 한번 날라줄 때마다 50루피(약 1165원)를 받는 데 일이 없어 심심찮게 굶기도 한다는 그는 “이렇게 사는 것도 행복”이라고 말했다. 나비 뭄바이에서 구루로 사람들의 관상을 봐주는 것을 업으로 한다는 두갈은 “삶은 허상”이라며 “허상에 얽매이기보다 진아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의 궁핍한 삶은 허상에 불과해 이를 벗어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인도 뭄바이 도심에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대형 송유관 옆에 하층민들이 천막을 짓고 살고 있다. 뭄바이/김주현기자
인도 정부도 극빈층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고 줄어들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수도 델리에서 만난 재경부 수바 라오 차관은 “하루 2달러 이하를 버는 극빈층은 7억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지만 통계를 보면 많이 감소했다”고 말했다. 저소득 극빈층을 대상으로 한 공공근로 사업과 무직자에 대한 취업알선제도 등으로 극빈층이 줄어들고 있다는 주장이다.
셰일라 딕시트 델리주 수상은 “어린이 대부분을 학교에 보내 교육을 통해 빈곤문제를 당대에 끝낼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며 “특히 여성·여아·어린이를 위한 의료와 교육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딕시트 수상은 “델리시의 경우 무료교육을 하지만, 매년 전국에서 50만명씩 몰려드는 사람들의 문제는 시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발을 뺐다.
이런 제도는 빈곤층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일거리를 찾아 시골에서 뭄바이로 왔다는 우샤(10·여)는 “학교에 가서 배워야 잘 살 수 있지 않냐”는 질문에 “거지도 직업”이라며 “공부하기 싫다”고 말했다.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말이다.
인도 국영 TV인 두르달산의 동글 디렉터는 “경제와 빈곤 등의 문제를 다루지만 방송이 대안을 제시하고 직접 선도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인도 지도층들은 빈부격차 문제가 개선되고 있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인도경제인연합회(CII) 비크람 바드샤 사무총장은 “빈곤층의 문제는 어느 나라나 겪는 것”이라며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딕시트 주지사나 라오 차관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런 태도는 어찌보면 한국 공무원들의 ‘복지부동’과 비슷하다. 인도인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책임지기를 싫어한다. 공무원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기자가 한국언론재단과 인도 정부를 통해서 인도중앙은행(RBI) 총재와 몇달 전부터 면담 약속을 잡았는데 약속시간까지 아무런 말이 없다가 면담 장소에 도착하니까 그제서야 세계은행 총재가 와서 면담이 불가능하다고 털어놨다. 미리 시간을 조율할 수 있었지만 가만히 있다가 불가항력임을 강조했다. 그것이 인도라는 것이다.
인도 실리콘밸리라는 방갈로르도 비슷하다. 인도의 정보기술(IT) 본산이라지만 전력이 부족해 기업과 공장마다 자가발전기와 대형 축전기를 갖고 있다. 거리는 배수가 안돼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고, 인터넷은 자주 끊겨 기업마다 자체적인 위성 인터넷 수신기를 통해 사업을 하는 데도 “그래도 발전하는 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한다.
바드샤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인도에 오면 인도식 ‘스탠더드’를 따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기업 등 외국 기업이 동남아 등에 진출할 때처럼 하면 안된다”면서 인도식 관점을 강조했다. 인도는 인도 나름의 해법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인도뭄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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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회는 갑자기 오지않아... 지난 10년도 의미있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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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
) l 2007-11-2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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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회는 갑자기 오지않아... 지난 10년도 의미있는 시간”
[한겨레가 만난 사람]
정년퇴임 앞둔 김수행 서울대 교수
출처 : <한겨레> 2007년 11월 20일
» 김수행 서울대 교수
우리 학계의 대표적인 마르크스경제학자인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내년 2월 정년퇴임한다. 1989년 47살에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뒤 19년만에 교단을 떠난다. 임용과 마찬가지로 퇴임이라는 그의 거취도 큰 관심의 대상이다.
자본론이 여전히 금서인 시절인 노태우 정권때 그가 서울대에 임용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대학원 재학생의 50% 이상을 차지했던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학생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후임을 놓고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김 교수는 마르크스경제학자가 후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류경제학자인 상당수 동료 교수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내년 3월 이후 후임자 채용 원칙을 정하기로 한 것은 이런 대립관계의 성격을 반영하는 어정쩡한 타협으로 읽힌다.
오는 22일 오후 5시 서울대 호암교수센터 컨벤션센터 2층에서 정년기념식 및 기념논문집 봉정식을 여는 김 교수를 16일 연구실에서 만났다.
‘자본론’ 금서 시절 임용돼 19년간 ‘마르크스’ 대표 학자
최근 학생들 관심 부쩍 늘어 “시장주의 한계 공감한 탓”
퇴임 논문서 ‘새 사회’ 제안 “재벌기업 국유화로 시작해 생산 사회화 점진적 이뤄야”
퇴임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그에게 가장 절실한 주제는 ‘마르크스 경제학’이다. 올해 2학기 그의 학부 강의인 ‘현대마르크스경제학’ 수강생은 100명이다. 이 정도면 다른 강좌에 비해 대형 강의다. 하지만 그는 “너무 적다”고 했다. 분명 수강생 1천명이 대형강의실을 꽉 채웠던 ‘호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렇지만 최근 1~2년 마르크스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 지난해 2학기 같은 강좌 수강생이 41명으로 바닥을 친 이후 46, 63 등 조금씩 수가 늘어나고 있다.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경제 사정이 굉장히 나빠졌습니다. 실업자가 늘고 양극화가 많이 진행되고 있으면서 노동계급 탄압은 심해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시장주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론적으로 해명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죠. 시장에 맡기면 다 해결된다는 주류경제학으로는 이론적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대표로 있는 가칭 사회과학대학원의 수강생도 지난 1학기 첫 개강때는 등록생수가 30명이었으나 2학기때는 80명으로 늘었다고 했다. 이 대학원은 그가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마르크스 강좌 위주의 커리큘럼으로 학교 바깥에서 ‘교육운동’을 벌이고 있는 둥지이다.
그와 제자들이 정년퇴임을 기념해 펴낸 논문집 이름이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신정완 편, 서울대출판부)이다. 마르크스경제학을 전공한 정성진 경상대 교수·강남훈 한신대 교수를 포함해 진보학자 16명이 자본주의 이후 새 사회의 상을 놓고 다양한 층위의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새로운 사회는 갑자기 오는 게 아닙니다. 사회 전체를 뜯어 고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그는 자본주의 이후 세상으로 가는 길을 말하면서 ‘점진적 과정’을 강조했다. “운동하는 세력이 하나씩 쟁취하면서 자심감이 생기고 또 쟁취 과정에서 운영 능력이 커져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10년 민주화 세력의 집권은 분명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평가한다. “시민운동이나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 이런 것들이 축적되면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자 상당수가 노동자를 타락시킨다면서 배척하는 ‘사민주의’ 아이디어도, 그는 적극 수용한다. “독일과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는 정부가 개입해서 민간의 이윤추구를 줄이고 학교와 병원을 공짜로 하는 등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실업과 양극화 해결은 어렵습니다.” 이 과정은 또 민중들이 다가올 새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값진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가 그리는 새 사회의 그림은 무엇일까?
그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궁극적 그림’을 이렇게 요약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생산의 사회화’라는 개념이 나올 것이라고 봅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성격이 강해지기 때문에 생산이 사회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생산이 사회화되면 이익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관리하고 나누어 먹고 공유하는 그런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모든 공장을 다 사회화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에 현 단계에서 재벌 기업의 국유화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봤다. “자본이 발달하면서, 독점·재벌이 생깁니다. 이것을 사회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쉽습니다. (삼성 회장인) 이건희는 회사 주식의 1% 미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재벌은 사회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재벌 국유화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이야기가 됩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이 펴고 있는 ‘재벌활용론’은 재벌의 독점력을 키우는 결과만 낳을 뿐이라고 했다. “국내 재벌이든 외국자본이든 자본의 기본은 이윤추구입니다. 재벌도 한국에서 이익 보지 못하면 다른나라로 갑니다. 재벌이 외국자본과 경쟁해서 한국경제와 민중을 돕는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모든 국민이 기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세금을 많이 거두어야 합니다. 수출산업 위주의 경제성장으로 실업을 해결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선 고용이 필요한 게 아니라 최신 기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없다고 했다. 세금을 더 내야 자살하려는 사람도 살릴 수 있고 사회도 따뜻해지는 데 세금 몇만원 올리겠다고 하면 보수 신문들은 한목소리로 복지비용이라면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영국은 지금의 우리 소득수준에 비해 훨씬 낮았던 1948년에 병원과 학교를 무료로 했고 완전고용 달성, 복지국가 건설을 뼈대로 하는 사회적 합의를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사회적 합의는 고작 자본가의 이윤을 늘려주는 그런 것입니다.”
퇴임 이후 계획을 물었다.
”사회과학대학원 강의에 전력할 것입니다. 가능하면 마르크스 전집을 우리말로 옮기고 싶습니다. 모두 60권 분량인데 국내에는 6권 정도가 번역되어 있을 뿐입니다.”
글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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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김수행 선생이 좀더 잘했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특히 서울대 사회과학 대학원에 적을 뒀던, 대다수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전공자들이 하는 이야기다. 본인 말고 잘된 사람이 없다는 푸념들... 그 자리에 다른 사람, 예컨대 정운영 선생 같은 분이 왔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들... 하긴 뭐 작금의 상황이 김수행 선생 혼자만의 책임일까만, 아쉬운 김에 김수행 선생한테 하는 말들이리라.
선생의 앞날에 새로운 축복이 있기를 기대한다.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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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칼럼]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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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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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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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 2007-11-2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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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칼럼]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홍세화 기자
출처 : <한겨레> 2007년 11월 20일
» 홍세화 기획위원
삼성과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는 우리 시대 성공과 출세의 아이콘이다. 공히 사익 추구의 성공을 바탕으로 나라의 공적 부분을 넘보고 장악하려 한다. 사익을 더욱 창출하기 위해서다. 그들의 유일한 주군인 ‘돈’을 향한 열성과 집념은 전방위적이다. 삼성의 촉수는 청와대, 검찰, 금융감독원, 국세청, 언론, 대학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돈으로 하수인을 만드는 데 머물지 않고 모든 공적기관에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효과도 거둔다. ‘양화’들은 주변으로 밀려나 패배자가 되고, 삼성은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고도 승리자로 남는다. 위장전입, 각종 투기 의혹에 자녀 위장취업까지 이명박 후보의 치부를 향한 일상 또한 전방위적이고 조건반사적이다. 돈을 주인으로 모신 그가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고, 삼성이 온갖 비리와 불법을 저지르고도 끄떡하지 않을 수 있는 배경에는 ‘경제’라는 주술이 있다.
경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인간과 사회를 위한, 인간존재와 인간관계를 위한 것이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인간과 사회가 경제를 위한 것으로 전락할 때, 돈은 법과 질서 위에 군림하고 인성은 실추되고 인간관계는 파괴된다. 법질서는 본디 명쾌하고 단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자조하면서도, 마지막 기댈 곳으로 법과 질서를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라는 주술은 이미 사회구성원들의 정신을 무장해제시켰다.
오랜 가난은 분단현실과 함께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발판이자 재벌 발흥의 근거였다.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던 독재권력에 대한 기억은 민주화 과정에서 퇴색해 갔지만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이라 자찬하는 이들에 대한 경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독재자를 물리친 시민의식은 ‘경제’ 주역 앞에서 점점 더 작아졌다. 이 변화 속에서 뱀처럼 대처한 삼성은 제국이 되었고, 국민은 ‘자발적 복종’으로, 정권은 ‘적극적 엄호’로 답했다. 삼성의 괴력과 이른바 탁월한 경영능력이란 돈이면 다 되는 세태를 의심하지 않고 십분 활용한 집요함에서 비롯된다.
이회창 후보의 자식 병역문제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주었던 지난 대선에 견줘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가 별로 움직이지 않고, 삼성 특검 요구에 거대 여야 정당이 시늉만 보이고 청와대가 딴죽을 걸어 ‘불법·비리를 저질러도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는 논리로 결국 이명박 후보를 돕고 있는데도 공분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 대부분이 경제동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리에 있었다면 모두 그들처럼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을지라도 그 부정과 비리를 비난할 줄 알았던 과거에 비해, 오늘은 ‘경제’라는 한마디 앞에서 아예 부정과 비리까지 두둔하게 된 것이다. 이미 장래 희망으로 ‘부자’와 ‘시이오’(CEO)를 꼽는 아이들에게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고 가르치고,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무서운 학습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혁’정권의 학습효과인 ‘그놈이 그놈’이라는, 그래서 어차피 그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다는 인식도 한몫 크게 거들었겠지만,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사회는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인간은 선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추악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없다고 했지만, 과연 더 추락할 데가 있기라도 한 것인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민변·참여연대의 활동, 철학자들의 격문은 우리에게 ‘의지로 낙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아가 사익 추구 집단보다 더 집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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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경제학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는 걸 실감한다. '의지로 낙관'하며 견디는 건 어쩐지 자기위안을 위한 최면 같다...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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