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잊혀진 국도를 위하여
[길위에서]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의 여행길4

노동효 / 자유기고가
출처 : <컬쳐뉴스> 2007년 11월 24일



나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기억에서 잊혀지고,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국도 위를 지나고 있었다. 소양호를 끼고 물 흐르듯 미끄러지는 길이 모롱이를 만날 때마다 넉넉한 여백을 안고 있는 동양화 화첩의 새 폭(幅)을 넘겼다. 서울(양구)방향 이정표가 新46번 국도 위로 옮겨지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까닭에, 아무도 다니지 않는 추곡~웅진 간 舊46번 국도.

내가 로드 페르몬에 중독된 후천성 샛길 증후군(Acquired Byroad Syndrome) 환자가 아니었더라면 늙은 어부 한 명 눈에 띄지 않는, 소양호 진경산수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없었으리라. 은둔하는 절경의 겨드랑이에서 새어 나오던 체취(Road Pheromone)를 맡던 순간 핸들을 급히 샛길로 꺽지 않았더라면, 올림픽 구호마냥 ‘보다 더 빨리! – Citius!’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만들어지고 있는 ‘터널에서 터널로 오가는 삶’에서 한번쯤은 일탈해보지 않겠니? 하고 킬킬거리던 샛길의 웃음 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나는 이 지면을 빌려 <길 위에서>란 여행기를 기고해왔는데, 누적된 졸고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내 글이 여행기로써 갖추어야 할 격식과 양식을 그다지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가는 길'은 이러저러하고, 그곳엔 이런 ‘음식점’이 있고, 저런 ‘휴게소’가 있어서 식사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식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어버린 데에는, 필자의 글에 혹 목적이 있다면 그것이 여행지를 안내하는 데 있지 않고 단지 독자들로 하여금 길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부추기는데 있으며, 한편 은둔하는 절경이 이런 저런 경로로 알려지고 나면 소수나마 '깊은 맛'을 오감으로 느끼고 돌아가던 장소가 다수가 몰려들면서 '얕은 맛' 조차 못 느끼고 돌아서는 장소로 변해버리는 까닭이다. 소문은 언제나 사람들만 몰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개발의 포크레인과 유흥업소와 놀이공원을 함께 데리고 오므로.

그러나, 이번 글에서 나는 여행기로써 양식과 격식을 갖춰 ‘가는 길’을 아주 소상히 안내하고, '휴게소’와 ‘음식점’에 대해서도 아주 소상히 밝힐 생각이다. 말하자면 이건 안내문이자 초대장 같은 것인데, 일단 그날 아침에 만난 야릇한 고양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요기(Yogi) 같은 길고양이 한 마리

낯선 곳에서 잠을 잘 때면, 이 나이에도 종종 몽정을 하는 나는 그날 아침, 다행이구나! 하고 마른 팬티를 아쉽게(?) 느끼며 침낭 속에서 빠져 나왔다. 밤새 그 누구도 <광치자연휴양림>에 무단잠입한 우리들을 찾아오지 않았고, 다만 어제 무단잠입하는 모습을 목격한 관리인의 눈을 피해 빠져나가는 길만 남아있었다. 물론 광치령을 내 늙은 로시난테를 타고 넘어갈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날 아침 혼자 햇살에 훤히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S라인의 고갯길 깊숙이 들어가 본 결과 조심해서 지난다 하더라도 무리일 듯 했다.억지로 넘다간 나뭇가지에 옆구리가 긁혀 상처투성이가 되는 정도에서 끝날 게 아니라, 내 늙은 로시난테의 배가 갈라지겠구나!

차로 다시 돌아온 나는 계곡으로 내려가 세수를 하고, 한 모금 물을 들이켰다. 첩첩산중 논밭도, 축사도 없는 물길을 따라 내려온 청정수는 웬만한 약수 저리가라! 하고 목젖을 타고 내려갔다. 찌르르 퍼지는 청량감. 산은 깊고, 물은 깨끗하니 얼씨구나 좋을시고! 나는 되(지)도 않는 노래를 즉흥으로 지어서 불러댔다. 그 남자 작사, 그 여자.....없다. 차문을 열고 침낭을 개는 사이 L형도 부시시 이불을 털며 일어났다.

어,벌써 해 떴네? 사람들 눈 뜨기 전에 나가야 할 텐데. 무단잠입은 좋았는데,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할 일이 자못 염려스런 아침 인사를 하며, L형은 이불 개고, 트렁크 열고, 이불을 쑤셔 넣고, 보조석에 앉았다. 지금이 딱 좋을 시간이에요. 식사 준비하고 밥상에 앉을 시간이니, 우리가 지나가도 모를 겁니다. 과연 그럴까? 물론 평일이고 보면 손님도 없고, 지나가 봐야 무단잠입한 우리 차량밖에 없을 그런 판이었다. 하하하, 믿어보세요. 관리소에서 지키고 있으면 어쩔 거야? 이미 볼 것 다 보고, 잘 것 다 잤겠다....웃는 얼굴에 침 뱉기야 하겠어요? 하하하

그러나 웃을 일도, 침 뱉을 사람도 없었다. 식사 준비하고 밥상에 앉아 TV 보고 있을, 딱 그 시간이었으니까. 거 봐요, 제 말이 맞죠? 그렇게 기분 좋게 <광치자연휴양림>을 빠져 나오는데, 어 저 녀석은 뭐야, 밤새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단 말이야? 지난밤 마주쳤던 고양이 한 마리가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요기(Yogi)처럼. 옆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고,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녀석은 도망가지 않았다. 올 녀석들이 오는 걸 보았고, 갈 녀석들이 가는 걸 지금 보고 있다는 식으로. 묘(妙)한 고양이(猫)였다. 내 너를 잊지 않으마!

추월차선도 갓길도 없는 왕복 2차선

강원도 양구에 들어서자 등굣길에 오른 학생들 버스정류장 앞에서 종종거리고, 갈 길 바쁜 차량들 쌩쌩 달려와 꽁무니에 바싹 달라붙곤 했다. 육중한 덩치의 대형트럭들 빵빵 뒤에서 컬렉션을 울려대기도 하고, 출근길이 급한 차량들 깜박깜박 길을 재촉하기도 했다. 시속 60Km가 규정속도인 도로였지만 시속60km를 유지하며 달리는 차량은 내 늙은 로시난테 밖에 없었다. 그래, 다들 바쁘니까. 왕복 2차선이고, 추월차선이 있지도 않고, 비켜설 갓길이 따로 있지도 않으니까. 나는 뒤 차량이 재촉하는 데로 가속페달을 밟다가 비켜설 약간의 공간이라도 있으면 비켜서곤 했다. 끼익

- 왜? 무슨 일이냐?
- 아, 그냥...뒤에 붙은 차량이 바쁜가 봐요.


나는 이제 전통한옥을 짓는 목수이자, 산악인이 된 L이 회사에 사직서를 쓰기 얼마 전에 겪었다던 한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꼭 그 한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퇴사를 결정하는 데 밀알이 되었던. 월요일 아침 L은 여느 날처럼 출근 버스를 탔다. 여느 날처럼 샐러리맨과 샐러리우먼과 학생들과 아주머니, 아저씨들로 가득한 차 안이었다. 버스는 40분 후 회사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는 사람들을 밀치고 나가 버스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문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 한 분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아주머니를 향해 짜증과 역정이 뒤섞인 말을 내뱉으며 아주머니를 '확' 밀치고 버스에서 내렸고, 헐레벌떡 달려가 간신히 출근카드를 찍을 수 있었다. 그 때,

-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자기모멸감이 양심을 찔렀다. 5분쯤 늦고, 10분쯤 늦으면 어떻다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내가 어머니보다 연세가 많으신 그 분에게 그렇게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단 말인가, 대체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무슨 생각으로, 무슨 짓을 하며 살고 있는 건가?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舊46번 국도

양구 방향에서 내려오던 31번 국도는 46번 국도를 만났고, 물가에 접하는가 싶더니 사명산(1,198m) 아래를 관통하는 웅진터널로 이어졌다. 그리고 웅진터널을 지나자마자 곧 바로 연결되는 수인터널. 웅진터널과 수인터널 사이 500미터. 오른쪽으로 난 샛길에서 로드 페르몬이 훅하고 끼쳤다. 나는 직감적으로 핸들을 꺾어버렸다. 그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네비게이션이 길을 벗어났다는 신호를 띄워 보냈다. 나는 커브를 주욱 그으며 내려가다 되돌아나가는 길을 그냥 지나쳤다. 다시 네비게이션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름도 떠오르지 있는 않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좌우로 펼쳐져 있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상야릇한 길이었다. 호수를 끼고 달리는 길은 아름답기 그지 없는데, 지나는 차량이 전혀 없는 것이다.

2006년 추곡~수인, 수인~웅진 간 터널이 공식적으로 개통되면서 新46번 국도가 네비게이션에 등록되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GPS가 알려주는 데로 길을 오가는 사이 舊46번 국도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길이 되었다. 게다가 舊46번 국도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터널 속으로 5킬로미터 남짓 통과할 수 있는 직선거리를 S자 곡선을 그으며 에둘러 20킬로미터를 갈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더 빨리'출근하고, '보다 더 빨리'일하고, '보다 더 빨리'살아가야 하니까. Citius! Citius! Citius!

길이 잊혀지면서 그 길 위의 관광안내소도 잊혀졌다. <양구군관광안내소>앞 넓디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외장을 한 건물은 대형음식점까지 2층에 이고 번듯하게 서 있었지만, 인적 없는 건물의 3분의 1은 이미 담쟁이와 수풀로 뒤덮인 상태였다. 오고 가는 손님이 없으니, 사고 팔 물건도 없고, 안내하고 안내 받을 사람도 없다. 콘크리트와 벽돌과 간판으로 이루어진 인공구조물은 있는데 인류는 통째로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마치 데니 보일의 [28일 후]의 세계로 뚝 떨어진 기분이잖아. 여기 아무도 없어요? Hello, Is anybody there?...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길은 굽이를 지날 때마다 낯선 풍경을 아흔 아홉 첩 병풍마냥 펼쳐놓았다. 호수는 고요했고, 길가의 담쟁이들은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고, 철제 가로대는 이미 풀들로 뒤덮여있었다. 왕복 2차선 도로만이 하얗게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을 뿐, 내버려두자 자연은 스스로 자연을 회복하고 있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최악이고,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차선이며, 자연을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인간으로부터 잊혀진 탓에 스스로 치유기간을 갖고 있는 자연을 지나며 우리는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고, 길 한복판에 드러누워 해바라기를 하기도 했고, 드러누워 책을 읽기도 했다. 차도 한가운데에 엎드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다는 건 정말 최상의 행복이었다.

두팔 벌려 돌, 비, 꽃 그리고 사람을 안아요.

-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르고 있는지도,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두목, 언제나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을 수 있을까요? 두목,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은 책에는 뭐라고 씌어져 있습디까?


책장을 덮고, 다시 차에 올라 화폭을 넘기며 길을 가노라니 왼쪽으로 너른 마당이 있는 간이휴게소가 나왔다. 간판은 돈까스용 포크와 나이프 그림이 음식점 로고인양 박혀 있고, '추곡광'에 이은 글씨는 지읒과 이응이 반만 보일 정도로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떨어져 나가 있었다. 광으로 시작되는 단어로 ‘광장’ 말고는 이렇다 하게 떠올릴 단어가 없는 나로서는 지읒과 이응이 장字에서 떨어져 나온 자음들이라고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추곡광장휴게소.

휴게소 음식점 유리창에 지워지지 않은 글씨들을 살펴보니 한때는 감자가루수제비, 제육복음, 된장찌개, 심지어 양념숯불구이까지 팔던 곳이었던 모양인데, 이제는 주인도 객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L형과 나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싱크대 위엔 버려두고 간 식기와 주방기구들이, 작은 방 한 칸에는 오래된 이불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미 길도, 길 위의 휴게소도 깡그리 잊은 듯 했다. 달팽이관처럼 생긴 철제 회전계단을 밟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터널에서 빠져 나오는 新46번 국도가 내려다 보였다.

나는 느리게 가고 싶으면 느리게, 빨리 가고 싶으면 빠르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흘러가던 그 길 위에서 도시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정체된 88올림픽대로, 강변북로, 내부순환로, 외곽순환도로……출근길에 이리 치이고, 저리 밀리고, 앞차는 가지 않고, 뒤차는 빵빵대는 길에서 매일매일을 시달리는 사람들, ‘터널에서 터널로 오가는 삶’에서 빠져 나와 여기서 하루쯤 쉬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땅에서 걷고, 달리고, 사는 모든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아흔 아홉 첩 소양강 진경산수화를 감상하는 동안 차 한대 보지 못했구나. 내리막이 시작되며 新46번 국도와 만나는 출구 앞에 <추곡약수터> 이정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엔딩이로구나! 그때, 차량 한대가 좌회전을 하며 舊46번 국도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도대체 이 시간에 우리 말고 또 누가? 빈 택시였다. 운전기사는 차창 밖으로 날개 마냥 팔꿈치를 내밀고 있었고, 느릿느릿 슬로우 화면처럼 다가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택시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두 글자를 읽었는데 그러고 나자 마치 누군가가 만든 필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편영화의 제목인 양, 두 글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휴 무(쉴 休, 힘쓸 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왕들의 살인과 사극의 미화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출처 :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고금변증설
 
고금변증설 /

숙종 14년(1688) 11월12일의 일이다. <숙종실록>은 이날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임금이 사헌부 금리와 조례를 잡아다 내수사의 감옥에서 매를 쳐서 죽이라고 명했다.” 내수사는 임금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개인 창고에서 두 사람을 때려 죽이라 한 것이다.

사건의 원인은 이렇다. 10월27일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뒷날의 장희빈이 경종을 낳은 것이다. 장씨의 친정어머니가 산후조리를 돕느라 궁궐을 들락거렸다. 친정의 수발이 무슨 잘못이랴. 출입할 때 팔인교를 탄 것이 화근이었다. 당상관의 처가 아니면 지붕 있는 가마, 곧 유옥교를 탈 수 없는 법인데, 장씨의 어머니는 역관의 처였다. 조선시대의 법도로 보아, 유옥교는 참람한 것이었다. 더욱이 여덟 사람이 매는 가마는 분수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고종 때 대원군을 예우한 것이 팔인교였다.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사헌부의 하속인 금리와 조례를 보내어 장씨 어머니의 종을 잡아다 다스리고 상소를 올렸다. 숙종에게 그 참람한 짓거리를 법에 따라 처분하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정비인 민비에게서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28살의 젊은 왕은 첫아들을 안고 한참 싱글벙글하고 있다가 상소문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었다. 천인이니 뭐니 하지만, 아들을 낳아준 여자의 어머니, 따지자면 곧 장모가 아닌가. 하지만 이익수를 처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전후 사정을 빤히 알면서 사주한 사람을 밝히라고 환관을 시켜 사헌부의 졸개인 금리와 조례에게 혹형을 가하게 한 것이다. 형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두 사람은 목숨을 잃는다.

분풀이로 사람을 죽인 숙종은 성급한 분노로 죄 없는 사람이 죽었다면서 자책하고, 죽은 두 사람의 가족을 돌보아 주라고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기록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죽은 두 사람의 가족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가족이 몇이나 있었을까. 연로한 어버이는 없었을까.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었으리라. 그들이 죽은 날, 그 집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 가족들은 분노했을까, 아니면 임금의 위세에 떨며 침묵했을 것인가. 주변의 친지는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숙종의 ‘살인’에 대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항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숙종은 자신의 애정놀음에 애꿎은 목숨들을 짓밟았다. 숙종 뿐이랴, 조선 왕들은 개인적 권력욕망을 위해 살인을 서슴치 않는 인간들이었다. 오늘날 사극은 대부분 왕이 중심에 놓이는 궁중이야기다. 화려한 구경거리와 흥미로운 이야기에 몰입하는 동안 우리는 전제군주제의 본질은 보지 못한채 전제권력을 소유한 왕의 존재에 대해 거부감없이 선호한다.

왕이 일시적 분노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우연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숙종이 장희빈에게서 본 첫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서두르자 서인들이 반대한다. 숙종은 이들을 숙청하고 남인들을 불러들인다. 이 과정에서 고문으로 죽거나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받고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기사환국, 1689). 5년 뒤 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식자 내쫓았던 민비를 복위시킨다. 남인은 다시 내쫓겼고 서인은 복권된다(갑술옥사, 1694). 5년 전과 같이 숱한 사람이 또 목숨을 잃었음은 불문가지다. 군주 한 사람의 애정놀음에 애꿎은 목숨들이 저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왕이란 이런 존재다. 살인의 죄에서 면제된 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을 할 수 있는 인간, 살인을 하고도 태연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왕이다. 이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살인자들이 조선의 왕이다. 정상적 인간이 아닌 것이다. 태종은 왕이 되기 위해 형(정종)을 내쫓고 이복동생 둘을 죽인다. 세조는 어떤가.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내쫓은 뒤 죽이고, 자신의 동생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도 죽여버린다. 어떤 명분을 댄다 해도 이 살인의 동기가 절대권력을 향한 그의 개인적 욕망이었음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성종은 자신의 맏아들을 낳은 아내를 내쫓아 죽였다. 그의 맏아들 곧 연산군이 뒷날 저지른 살인과 패륜의 동기는 다분히 성종이 제공했던 것이다. 중종은 어떤가. 형인 연산군을 내쫓고 왕이 된 뒤 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위시한 신하들을 무수히 죽인다. 광해군은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을 죽였고,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을 죽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숙종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때 끔찍이 사랑했던 자신의 아내 장희빈을 죽이고, 영조는 맏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인다.

어떤가. 이들이 정상인으로 보이는가. 또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목도한 정조가 과연 정상인이었을까?

방송국마다 사극을 방영한다. 어느 시대를 대상으로 삼든 거개 왕이 중심에 놓이는 궁중의 이야기다. 궁중의 복색과 살림살이 등 화려한 구경거리는 물론이고, 거기에 흥미진진한 스토리까지 제공한다. 보통의 우리네는 그것을 보고 하루의 고단함을 잊는다. 한데, 사극은 오락거리로 끝나지 않는다. 사극은 역사를 교육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왕이 주인공인 사극은 중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면서 중세에 관한 모종의 이미지를 국민의 대뇌에 심는다. 드라마에 몰입해 있는 동안 우리는 전제권력을 소유한 왕의 존재, 나아가 살인을 해도 무방한 전제권력의 존재를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긍정한다. 그리하여 전제권력을 추구했던 어떤 왕을 두고, 만약 그가 음모에 의해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하였을 것이라는 황당한 상상을 낳기까지 한다. 과연 그럴까.

» 고금변증설 / 강명관 부산대 교수
 
생각해 보시라. 전제군주인 왕의 최대의 목표는, 전제권력의 획득과 유지, 강화에 있다. 이를 위해 백성과 신하는 물론이고 피붙이의 살해도 서슴지 않는 비정상적인 인간이 왕이다. 전제군주제의 국가는 곧 왕의 것이다. 왕이 도장을 찍으면 나라와 백성이 하루아침에 남의 나라와 백성이 되는 것을, 우리는 ‘한일합방’에서 경험한 바 있다. 이것이 전근대의 전제군주제의 본질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어찌하여 왕을 이렇게 좋아할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대포로 무장한 유럽, 세계를 약탈하다
문명과 바다 9. 폭력의 세계화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해적선이 상선을 공격하는 모습.
 

유럽인들이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대륙으로 팽창해 간 것은 세계사의 불균형의 첫 출발점이라 할 만하다. 장기적으로 유럽의 힘이 전세계에 미치게 되는 과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출발점에서 보면 유럽이 중국이나 이슬람권 같은 다른 문명권보다 더 부유하지는 않았다. 유럽은 힘이 넘쳐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을 찾아서 해외로 나아간 것이다. 세계는 유럽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유럽은 세계를 필요로 했다. 말하자면 이때 유럽은 ‘프롤레타리아 대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 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 각 문명권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었을까? 분명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유럽인들의 가공할 폭력이었다.

총포와 화약을 발명한 것은 중국이지만, 이를 배에 장착해 ‘떠다니는 폭력’으로 세계를 휘저은 것은 유럽이었다. 아메리카·아프리카·동남아 해상을 접수한 유럽배들은 상거래뿐 아니라 노략질도 일삼았다. 강력하고 체계적인 폭력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이질적인 문명권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한 무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세계 여러 문명 간의 만남은 대개 평화적이기보다는 폭력적이기 십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럽의 팽창은 유독 폭력성이 강했다. 1502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두 번째로 캘리컷에 도착했을 때, 그는 무슬림 선단을 격침시킨 다음 800명의 귀와 코, 손을 잘라서 이 지역 지배자에게 보내면서 카레라이스를 해먹으라고 말했다. 그의 선단의 선장 한 명은 무슬림 상인 한 명을 붙잡아서 채찍질하여 그가 실신하자 입에 오물을 넣고 일부러 무슬림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 조각으로 입을 막음으로써 모욕을 가했다.

유럽인들이 해외에서 강력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대포이다. 윌리엄 맥닐 같은 연구자는 다른 지역보다도 유럽에서 선박과 대포가 성공적으로 결합한 것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결정적 요소 중의 하나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이 총포와 화약이 제일 먼저 개발된 곳은 중국이었다. 또 선상에서 총포를 사용하는 것 역시 중국이 가장 앞서 있었다. 선상에서 총포를 사용한 최초의 기록은 쿠빌라이의 제2차 일본 원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상으로 누가 최초로 사용했냐는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얼마나 유효하게 사용했는가이다. 사실 중국 정부는 1550년대에 총포가 왜구를 막는 데에 효율적이지 않다고 단정했고, 이후 중국은 칼이나 창 같은 전통적인 무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결과 중국 해군의 힘이 약화되어서 조만간 왜구의 침입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서양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유럽에서는 선상에서 대포를 사용하는 방식이 크게 발달했다. 유럽 해군이 터키 해군을 격파한 레판토 해전(1571)이나 영국 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해전(1588)에서는 함포가 승패를 결정지었다.

» 네덜란드 선박(가운데)을 공격하는 포르투갈 선박들.
 
 

사실 배에 포를 장착하는 것은 해결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난제였다. 갑판 위에서 대포를 발사하면 배의 균형이 깨져서 매우 위험하게 된다. 따라서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무거운 대포를 흘수선(吃水線, 선체가 수면에 닿는 선)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선체 내부에서 포를 발사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선체의 양면에 방수 처리를 한 포문(gunport)을 내야 했다. 또 대포를 발사하면 포탄이 발사되는 것과 같은 크기의 엄청난 반동력이 일어난다. 이 되튀는 힘을 잘 처리하지 못할 경우 몇 번 포를 쏘면 배가 깨지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퀴를 이용하여 충격을 완화시키는 장치인 왕복대(truck carriage)이다. 이런 일련의 발전 끝에 유럽 배와 다른 지역의 배 사이에는 무장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생겨났다.

강력한 대포로 무장한 채 세계의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유럽 선박은 ‘떠돌아다니는 폭력’ 그 자체였다. 다른 지역의 배들은 유럽에서 들어온 이 가공할 무력 집단 앞에서 전전긍긍했다. 비교적 평화로운 자유교역 지역이었던 인도양에서는 배를 단단하게 지을 필요가 없어서 선체가 약했기 때문에 대포를 설치하기도 힘들고, 또 상대의 포 공격에 대단히 취약했다. 자연히 유럽 선박들은 인도양에 들어오자마자 무력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점은 포르투갈 선박이 인도양에 가서 처음 벌인 해전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났다. 1509년 디우(Diu) 전투에서 알부케르크가 지휘하는 포르투갈 선단은 이집트와 구자라트 지방 간 연합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인도항로를 확보하였다. 이후 인도양의 배들은 포르투갈의 통제를 이리저리 피해 다녀야 했다.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 해안지역의 일부 세력들(대표적인 것이 명청 교체기에 대만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 연안 지역을 위협하면서 한때 명나라의 회복을 기도했던 정성공(鄭成功)의 세력집단이다)처럼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지역이 없지 않지만 이는 예외에 속하며, 전반적으로 유럽 해상 세력은 아메리카·아프리카·동남아시아에서 제해권을 잡았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점은 유럽 세력은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였을 뿐 광활한 내륙 지역을 장악할 만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거점들을 지배하고 그 다음에 그 거점들 간의 해로를 확실하게 지배하는 것이다. 이 체제를 소위 ‘상업거점제국(Trading-Post Empire)’이라고 부르는데, 포르투갈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그들이 확보한 여러 거점들에서 매매 활동을 하고 또 그들이 통제하는 해로를 통해 상품을 수송하였다. 우리는 이 거래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해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 현지 상인들과 거래를 하지만 동시에 무력을 통한 약탈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국제거래의 안전성이 비교적 확실하게 지켜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시대에 상업과 약탈은 구분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선들도 지나가는 다른 배의 무장이 약해 보이면 서슴없이 해적 행위를 했다. 이런 식으로 포르투갈 선박들은 그들이 확보한 해로 상에서 무력을 이용한 강탈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골적인 약탈 대신 조금 더 세련되고 체계적인 방식이 발전해 나왔다. 소위 카르타스(Cartaz, 통행증) 제도가 그것이다. 그들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현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특정 항로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통행증을 발행하였다. 통행증을 판매하여 수익을 얻는 점 외에도, 그들의 사업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인이나 상품의 통과를 막는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를 두고 여러 학자들은 전(前)산업화 시대에 유럽인들이 전세계에 수출한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이 대포의 힘을 앞세워 팽창해 나가면서 이전보다 더 강력하고 더 체계적인 폭력이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근대의 세계화는 우선 ‘폭력의 세계화’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팀버튼은 디즈니에 애니메이터로 입사하게 된다. 디즈니와 팀버튼. 우리가 알고 있는 팀버튼이 과연 디즈니와 어울리는 조합이었을까?

디즈니에 있는 동안 <빈센트>와 <프랑켄 위니>라는 2편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되는데, 예상대로(?) 디즈니는 팀버튼이 만든 <프랑켄 위니>의 전국배급을 거부한다. 알다시피 그는 결코 디즈니에 어울릴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 이 <프랑켄 위니>는 이후 펼쳐지게 될 팀버튼의 영화세계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동화적 상상력에 의한 세계가 펼쳐지지만, 이상하게도 그 세계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난다. 저게 과연 어린이들의 동화세계가 맞나 싶을 만큼...

<프랑켄위니>의 전국배급 거부로 디즈니와의 관계를 끝낸 팀버튼은 워너 브러더스로 옮겨 첫장편영화 에서 <피위의 대 모험(Pee-wee's Big Adventure)>(85년)을 만들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후 그가 만든 영화목록을 나열해보면,

<비틀 쥬스(Beetlejuice)>(1988)
<배트맨(Batman)>(1989)
<가위손 (Edward Scissorhands)>(1990)
<배트맨 2(Batman Returns)>(1992)
<크리스마스의 악몽 (The Nightmare Before Christmas)>(1993)
<에드 우드(Ed Wood)>(1994)
<화성침공(Mars Attacks!)>(1996)
<슬리피 할로우(Sleepy Hollow)>(1999)
<혹성탈출>(2001)
<빅 피쉬 (Big Fish)>(2003)
<찰리와 초콜릿 공장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2005)
<유령 신부 (Corpse Bride)>(2005)
<스위니 토드 (Sweeney Todd)(2008 예정)> 등이다. 이외에도 제작을 맡은 영화도 다수 있다. 대표적으로 <배트맨 포에버 (Batman Forever, 1995)>.

헐리우드의 아웃사이더 팀버튼, 그의 세계가 궁금한 사람은 책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


괴짜 감독‘팀’ 흥행의 ‘버튼’ 누르다

허미경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팀 버튼 감독.
 
 

〈고딕의 영상시인 팀 버튼〉
크리스티안 프라가 엮음·김현우 옮김·마음산책 펴냄·1만4000원


헐리우드 아웃사이더 팀 버튼 감독 인터뷰 모음
상처받은 감수성이 만든 영상미학 밑거름
세계관·제작 과정 한눈에 볼 기회


혹시, 팀 버튼이라는 영화감독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 유명한 <가위손>도, <배트맨>도, <크리스마스 악몽>도, 가족에게 사랑 받는 아이들에 대한 묘한 질투심이 일렁였던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그다지 마뜩찮았던 이라면, 글쎄, 다소 기괴한 스타일에 만화 같은 ‘과장된 감수성’을 보여주는 이 괴퍅한 감독의 인터뷰 모음집을 들춰보지 않아도 되겠다.

음울한 고딕풍 이미지와 대인기피증. 뾰족뾰족한 중세식 건물로부터 검정 반짝이옷을 입고 걸어나올 것만 같은 캐릭터들. 조울증적인 심리상태, 괴물, 어눌함 따위의 어휘들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아웃사이더’로 둥지를 틀어온 팀 버튼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그의 영화에는 유독 괴물이나 귀신, 악마, 괴짜가 단골로 등장하는데, 얼핏 보면 하품 나오게 아무 일도 나지 않을 듯싶은 ‘안온한’ 교외 주택가가 주무대다. 괴짜, 혹은 괴물에 대한 탐닉은 그의 영화세계의 큰 결을 이룬다. 어린시절 안온한 캘리포니아 버뱅크 교외지역에서, 부모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부모를 이해하지 못한 채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을 피신처 삼아 자신만의 성을 쌓고 자랐던 이력은 그 밑천이다. 그에게는 폭탄 맞은 머리에 썩은 이빨을 한 <비틀 주스>의 유령(마이클 키튼)이나, 어린이들을 골려주는 걸 꽤나 즐기는 윌리 웡카(조니 뎁), 고담시(뉴욕)를 무대로 ‘괴물 대전’을 벌이는 배트맨(마이클 키튼)이나 조커(잭 니컬슨)나 매한가지. 그 자신인 셈이다.

“나는 그게 좋아요. (괴물과 나를) 완전히 동일시합니다. 아이들이 다 그렇죠. 아이들은 늘 괴물 하나를 정해서 제멋대로 상상하고 그러지 않나요?”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특이한 것은 왠지 선병질적이고 말 붙이기 무서울 것 같은 이 아웃사이더 감수성이 다수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는 점이다.‘할리우드 영화공장의 아웃사이더’라는 자의반 타의반 규정이 무색하게 그는 할리우드 흥행 감독의 명성을 이어왔다.

» 〈고딕의 영상시인 팀 버튼〉
 
 
영화판 평자들이 그에게 후했던 것도 아니었다. 1988년 <비틀 주스>가 나왔을 때, <뉴욕타임스>는 머리가 졸아든 유령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영화라고 비아냥댔다. 주지하다시피, “머리가 졸아든 유령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수백만 명이나 있었다.”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찌그러진 머리를 사람들은 아주 좋아했고, 팀 버튼은 개봉 2주 만에 3200만달러의 수익을 뽑았다.

<고딕의 영상시인 팀 버튼>은 2005년 미국에서 나온 <팀버튼 인터뷰>를 옮긴 책이다. 각기 다른 필자들이 쓴 14편의 인터뷰가 담겼다. 1988년부터 2005년까지 20년에 이르는 시간에 걸쳐 쓰인 글들이어서, 하나하나 읽노라면 그의 어눌한 말투 사이로, ‘현실과 황당함 사이의 독특한 경계’에 놓여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비결을 엿볼 수 있다. 인터뷰마다 소개되는 그의 영화 목록들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공장의 영화제작 공정도 들여다 보인다. 팀 버튼 자신의 말대로 “말 못하는 유아들이 그림을 그려 자기 자신을 표현”하듯,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의 괴짜성을 극대화할 줄 아는 영리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비롯해 4편의 영화를 함께 찍은 배우 조니 뎁은 팀 버튼의 분신으로 불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돌 스타로 잘 나가던 조니 뎁을 팀 버튼이 괴상망칙하게 망가뜨리고 있다고 섭섭해 하는 이라면 이 책을 꼭 들춰봐도 좋겠다. 책 곳곳에 조니 뎁의 인터뷰와 에피소드들이 숨어 있으니까.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사진 마을산책 제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부당한 권위에 ‘똥침’ 위대한 손가락

정재승 /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갈릴레오의 손가락〉
 
정재승의 책으로 만난 과학 /

〈갈릴레오의 손가락〉
피터 앳킨스 지음·이한음 옮김/이레·2만8000원


의학 분야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쏟아내는 계관시인이 올리버 색스라면, 과학 분야에선 피터 앳킨스가 있다. 그의 글엔 불필요한 사족이 파고들 여지가 없는 정갈함이 있고, 원자에서부터 우주를 관통하는 놀라운 통찰력이 있다. 그가 쓴 <천지창조(The Creation)>나 <원소의 왕국>을 읽고 있으면 그의 재기발랄함에 탄성을 지르며 문장마다 밑줄을 긋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공들여 쓴 <갈릴레오의 손가락>은 과학적 호기심이 가득 찬 사람을 사로잡을 책이다. 특히나 이 책은 과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나 앞으로 그러길 희망하는 고등학생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책인데, 이 책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착상 열 가지가 가지런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제목인 ‘갈릴레오의 손가락’의 뜻부터 의미심장하다. 1737년 3월 12일 갈릴레오의 시신을 피렌체의 한 성당으로 이장할 때 손가락을 떼어내 피렌체의 박물관에 보관하게 되었는데, 손가락을 담은 통을 받치고 있는 좌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 있다고 한다.

“이 손가락을 하찮게 여기지 마라. 별들의 행로를 추적하고 인류가 결코 본 적이 없던 천체들을 알려준 손가락이니. 깨질 듯한 유리알로 만든 작은 기구를 들어 저 높은 신들의 처소에 오르기 위해 헛되이 산을 쌓았던 그 옛날 젊은 티탄들의 힘을 처음으로 넘어선 손가락이니.”

이 좌대의 표현대로, 갈릴레오는 과학사상 처음으로 ‘검증되지 않은 권위’를 부정했고 세계의 본질을 실험과 분석을 통해 이해하려 했던 전환 시대의 상징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손가락은 모든 과학의 흔적을 품고 있다. 갈릴레오는 자연을 단순화해서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새로운 착상을 했으며, 그의 접근 방법은 오늘날 근대과학의 모태가 되었다. 이 책은 그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해서, 자연의 복잡한 진화, 그 근원인 디엔에이(DNA), 그 외에도 에너지, 복잡계, 엔트로피, 대칭성, 양자, 우주론 등 자연을 바라보는 과학적 사고의 착상을 가져다준 주요개념 열 가지를 꼽는다.

» 정재승의 책으로 만난 과학
 
그의 책을 읽다보면, ‘진화는 자연선택을 통해 이뤄진다’나 ‘에너지는 보존된다’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대칭하는 것은 아름답다’ ‘우주는 팽창한다’ 등 과학자들에겐 널리 알려진 사실조차 얼마나 깊은 통찰력을 품고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마지막 장인 ‘산술’부분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우주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진실은 이 우주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지만, 저자는 산술적 추론에는 한계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자연을 관통하는 ‘궁극의 이론’을 발견하게 될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과학의 추론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신을 향했던 갈릴레오의 손가락이 앞으로 우리를 향하는 일이 없도록 겸손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과학 또한 ‘검증되지 않은 부당한 권위’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