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크하르트가 보는 르네상스와 그 문제점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1>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②

강철구 / 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년 11월 27일


  3) 부르크하르트가 보는 르네상스와 그 문제점
  
  예술품으로서의 이탈리아 도시국가

  
▲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지도

  14-16세기의 이탈리아 반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부 지역은 많은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부는 로마교황이 다스리는 교황령이며, 남부는 나폴리 왕국의 영토였다.
  
  북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14세기에는 약 30개 정도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이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것들로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거의 맞먹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지중해 무역과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등 봉건국가의 왕들은 권력을 영주들과 나누어 갖고 있었으므로 큰 영토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시기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유럽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주장한다. 그 통치자들이 중세법이나 관습, 기독교 교리에 의지하지 않고 냉정한 정치적 타산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15세기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며 수많은 전제군주들이 몰락하고 용병대장들이 권력을 찬탈하는 일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들이 더욱 긴장하고 신중하며 계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 유명한 용병대장 가운데 한사람인 체자레 보르지아(Cesare Borgia, 1475? – 1507)

  부르크하르트는 이런 근대국가를 만드는 일에 가장 앞선 도시가 베네치아와 피렌체이며 특히 피렌체가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믿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정치적 원리와 이론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실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 (Niccoló Machiavelli, 1469~1527)

  이에는 날카로운 현실정치를 주장한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이 중요하다. 그가 자신의 <군주론>에서 군주들에게 사자와 같은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주문하며 정치에서 도덕적인 고려를 제거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최초의 근대국가로 규정하고 그것을 예술품으로까지 치켜올렸으나 근대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단지 도덕에서 벗어나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정치를 했으니 근대국가라는 것인데 그런 식의 막연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수십 개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했으므로 권모술수나 계산이 더 따를 수밖에는 없었으나 정치를 하는 데 종교적, 도덕적 명분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 중세시대에 유럽 다른 지역의 왕이나 봉건 영주들이 반드시 종교나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 것도 아니다. 종교적, 도덕적인 명분과 정치적 실용주의는 어디에나 섞여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를 특별한 경우로 볼 수는 없다.
  
  또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 면에서 중앙집권화, 행정의 합리화 등이 따라야 한다. 이념적으로도 국가주권의 개념이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근대국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
  
  부르크하르트는 또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조건이 근대적 개인주의가 나타날 완전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근대성을 중세의 지적, 문화적 후진성과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중세 사람들은 신앙심, 어린아이 같은 선입견, 망상에 싸여 있었고 자신을 오직 종족, 민족, 정파, 가족 등 집단 속의 존재로만 생각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한계가 가장 먼저 사라지고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말부터 인간의 개성이 넘쳐나기 시작하며 개인주의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는데 그것은 이탈리아가 중세의 억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이 강력하고 다방면의 재능을 가진 본성과 어울려 최고의 개성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만능인(l'uomo universale)'이다.
  
▲ <신곡>을 쓴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

▲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 마리아 노벨라 성당 (1456)

  
단테 같은 시인, 알베르티 같은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렇게 개인주의 위에 서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코스모폴리탄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고 개인의 업적에 따라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근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부르크하르트는 '개인'이나 '개인주의'에 대해 분명히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개인성의 개념이 반드시 스스로가 개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인간의 개인성은 완전성, 명예의 달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이나 자기반성 없이 개인성이 나타나기는 어렵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개인으로서 의식했다는 증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계속 집단 속에서 정체성을 느꼈다. 또 부르크하르트가 일찌감치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길드나 가문, 교회 등은 14, 15세기에도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적 자아'가 나타났다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게다가 이름을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자아의식과는 별 관계가 없다. 이름을 내거나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태도는 어느 시대 인간들에게서나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개인성을 말하며 그 주된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에 의해 크게 유명해진 위의 몇몇 예술가들의 예이다.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성을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도 자신의 주장에 근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분명해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 발을 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거도 부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슨 심보에서일까.
  
  고대의 부활과 인문주의
  
  우리는 보통 르네상스에 있어 고전고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대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르네상스 문화가 새롭게 꽃 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가 반드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대의 부활과 고전세계의 재발견이 르네상스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며 그리스 · 로마 문화는 이탈리아인들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는 단편적인 모방이나 편집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르네상스인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사실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그리스 · 로마 시대의 고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인문주의가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문법, 수사학, 시, 역사, 도덕철학의 5개 주제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런 주제를 연구하고 가르친 이탈리아의 학자, 시인, 성직자, 법률가, 관리, 공증인 들을 인문주의자(humanist)로 불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은 이런 인문주의자들이거나 그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인문주의는 상당히 잘못 이해되어 왔다. 그것을 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종교가 아니라 세속성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인문주의는 결코 세속적인 경향을 가진 것은 아니다.
  14세기 시인인 페트라르카를 포함해 지도적인 인문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종교적인 가치에 의해 행동했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는 실용적인 교과목이었다. 결코 철학으로 생각되지도 않았고 심각한 학문적인 주제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인문주의가 등장하고 호응을 받은 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체제가 로마 공화정과 비슷한 면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지배계급의 자식이나 형제들을 위한 교육에 그리스나 로마의 많은 저술들이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대의 문헌들이 다시 각광을 받아 수집, 번역되고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대 문물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학에서 가르친 것은 주로 중세 기독교 철학인 스콜라 철학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17세기까지도 유지되었다. 인문주의가 중세 철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르크하르트나 그 제자들처럼 인문주의를 철학으로 보고 철학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인문주의는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이나 사회적 이상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자연의 과학적 인식
  
  부르크하르트는 또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세계와 인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역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는 타고난 재능 덕이었다. 제노바 사람들은 이미 1291년에 대서양의 카나리아 군도를 발견했고 또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고대 문헌을 잘 알기 전에도 이 세상의 사물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부르크하르트는 고대의 지리학자들이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빨리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이것은 지리학뿐 아니라 자연과학 전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제 책과 전통의 억압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연의 탐구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이런 사이비 과학들에 대해 대체로 관용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 1304~1374)

▲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1313~1375)

  또 그는 이탈리아인들이 자연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 첫 번째 근대인들이라고 믿었다. '신곡'을 쓴 단테가 첫 인물이고 서정시인인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발견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기에 개인과 인간 본성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고대 문헌의 영향을 통해 새롭게 정의되고 채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과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인물이었으므로 이러한 그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중세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물활론적(物活論的)으로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생물체로 본 것이다. 근대인처럼 기계론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이는 다빈치나 단테, 알베르티 모두 마찬가지이다.
  
  또 이들은 자연도 중립적으로 보지 않고 가치 판단을 집어넣어 생각했으며, 따뜻한 것이 추운 것보다 좋고 나무가 돌보다 좋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 변화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르네상스 말기에 들어서서 수학적 방법에 의해 자연현상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자연현상 안에 숨어 있는 수학적 구조를 밝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간결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문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17세기 이후의 수학적 정신이 아니라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 속에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을 믿은 인물이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 체계가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믿어 아리스타르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후대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너무 복잡하게 변형된 것을 단순화, 순수화하려 한 것뿐이다.
  
  그가 1598년에 쓴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이 당시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렇게 그의 우주론이 중세적 우주론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천동설이나 그의 지동설이나 결함이 많아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태도는 17세기에 실험과 관찰을 보다 중시한 갈릴레이나, 자연세계를 수학적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본격적으로 한 데카르트와 뉴턴에 오면 달라진다. 이렇게 르네상스 과학은 17세기의 과학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계급의 해체와 종교적 요소의 쇠퇴
  
  부르크하르트는 신분의 해체가 분명히 그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믿었는데 그것은 특히 12세기 이후 귀족과 시민이 도시의 성벽 안에서 함께 살며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 수녀원장직들이 본질적으로 출신에 따라 주어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최고 수준의 사교생활에서는 신분의 구분이 모두 무시되었고 교육수준과 교양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어느 신분이나 가문에서 출생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상속재산을 받아 노닥거릴 여유를 갖는 것 외에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지위에 있었고 교육을 받은 상층계급의 여성은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 이탈리아의 사회적 지위가 신분과 가문이라기보다 교육과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근대적인 평등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가 신분 대신 계급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런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사실과는 맞지 않다. 당시의 이탈리아가 이웃 국가들보다 발전된 경제를 가졌고 더 복잡한 사회였던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신분제도에 크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도 여전했다. 여성은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것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성 인문주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주나 귀족 가문의 교육받은 일부 여성들도 결혼을 하면 그것으로 글 쓰는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니 여성이 남성과 같이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남녀가 평등했다는 말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피렌체 여인들의 모습. 르네상스기, 1610년에 한 프랑스 여행가는 피렌체 여인들이 창문을 통해서만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고 그들의 폐쇄된 삶을 증언하고 있다

▲ 피렌체시를 흐르는 아르노강

▲ 피렌체시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브루넬레스키(F.Brunelleschi)가 1436년에 그 거대한 돔을 완성했다.

  
이런 면을 아는 데는 개인의 일기나 세금장부, 여러 기관들의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피렌체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실제 연구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는 별로 진보적인 변화를 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경제의 발전이나 자선 단체 같은 데에서 약간의 근대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옛날 모습이 대체로 유지되었다. 대가족제는 일반적이었고, 귀족들과 평민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피호관계라는 독특한 사회제도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 피렌체인의 가치관이 더 세속화된 것도 아니고 더 합리화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15세기 피렌체 시를 근대화나 진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이탈리아에서 종교적 요소가 약화되고 세속성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인들이 고대를 알게 된 이후 신성한 기독교적 이상을 위대한 역사를 숭배하는 것으로 대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람들을 비 신앙과 절망의 품으로 내몰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점성술, 마법 같은 미신적인 행위에서 구원을 얻으려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 르네상스기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점성술을 통해 그의 운명을 점쳤다. 목판화, 1587

  앞에서도 보았듯이 인문주의자들이 고대의 비기독교적 문화에 접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비종교적인 인물들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개혁 이전 이탈리아의 교회가 많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에 있었다. 그의 이런 반종교적 태도는 자신이 무신론자였던 것과 함께 19세기 후반 유럽의 일반적인 탈 기독교적 풍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상으로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에서 주장하는 여러 내용들이 많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의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으나 르네상스의 근대성을 뒷받침하는 다른 두 주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 문제와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것이다. 그것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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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에게 빠져봐 우리는 ‘아저씨 부대’
소녀시대·원더걸스 30~40대 남성 팬 몰고다녀
‘일본식 롤리타 취향’ ‘기존 남성문화 반발’ 분석


이재성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7일


» 원더걸스 / 사진 JYP엔터테이먼트 제공

지난 20일 서울의 한 서점에서 열린 ‘소녀시대’의 팬 사인회. 100여명 정도 모일 것으로 예상했던 주최쪽은 한꺼번에 1000여명의 팬이 몰려들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행사는 잠시 중단됐다. 이 중 90%가 남성들이었고, 그 절반이 30~40대였다.

원더걸스에 이어 소녀시대도 30~40대 아저씨들을 몰고 다니고 있다. 원더걸스 때만 해도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생각했던 문화계에서는 이들 ‘아저씨 부대’의 등장에 새삼 주목하고 있다. 10대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가요계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아저씨들이 댄스음악의 팬이 된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열광하는 대상은 음악 자체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보고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일본식 ‘소녀취향’의 한국적 변용으로 보는 시각이다. 음악평론가 강헌씨는 “(10년 전의) 에스이에스나 핑클과 다른 점은, 가수들은 더 어려지고, 팬들의 나이는 더 많아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더걸스 멤버들의 평균 나이는 17살, 소녀시대는 멤버 9명 전원이 고교생이다.

» 소녀시대 / SM엔터테이먼트 제공

음악평론가 김작가씨는 “80년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여동생 코드에 일본식의 롤리타 코드가 접목된 것”이라며 “아저씨들이 딸 같은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인터넷을 통해 유포된 롤리타 현상이 성인남성들의 은밀한 욕망으로 남아있다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광장으로 터져나왔다는 분석이다.

정치적인 분야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강헌씨는 “지금 30~40대가 격렬한 반응을 보여야할 대상은 대통령 선거인데, 이들이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는 증거”라며 “개혁의 실패로 인한 정치적 무력감, 신자유주의의 득세에 의한 경제적 박탈감 등 총체적인 패배주의가 소녀들에 대한 관심을 일탈적으로 부추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건전한 현상으로서 하나의 문화적 흐름을 이어갈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도 있다. 문화평론가 남재일씨는 “직장에서 회식하는 걸 싫어하는 등 기존 남성 문화에 반발심을 갖고 있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며 “자기 취향의 문화를 살릴 기회를 찾고 있던 이들의 실체가 대중 문화에 투사된 형태로 나오고 있는 현상”이라고 평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는 “지금의 30~40대의 일부는 90년대초 신세대 논쟁의 신세대에 해당하는 세대”라며 “이들은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세대로서, 새로운 문화시장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신세대 논쟁이 있었던 지난 92년 당시 신세대를 17~25살로 봤을 때, 15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3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의 나이가 됐다.

그러나 대중음악평론가 서정민갑씨는 이런 현상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음악 외적인 것들이 음악을 대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위험스럽다고 생각한다”며 “음악적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이런 현상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강헌씨도 “이 아저씨들은 음반도 사지 않고 눈요기만 하려고 한다”며 “오래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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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저씨들은 음반도 사지 않고 눈요기만 하려고 한다.” 눈요기하러 시간 죽여가며 사인회에 참석한다? 이 아저씨들과 거의 동년배인 난 왜 이해가 안 되지?

참, 취향들 독특하시네. 난 나이가 들어가니까 재즈나 뭐 그런 류의 음악이 좋아지던데... 댄스음악으로 회귀한다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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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1-2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복입은 아저씨들이 애들 사인 받으려고 1,000명이나 줄 서 있는 모습이 갑자기 상상이 팍 되는데 말이죠? 근데 왜 이렇게 웃기고 서글퍼보일까? ㅎㅎ

내오랜꿈 2007-11-28 13:38   좋아요 0 | URL
난, 상상이 잘 안 된다.-.-. 한번 더 생각해보면 박진영이나, 이수만이나 대중문화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꿰뚫어보고 있다는 말이잖아. 그게 '진정한' 대중문화의 흐름인지 '만들어진' 대중문화인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거실 책장 넣었다면서? 조만간 한번 방문해야 되겠네.

마늘빵 2007-11-2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다른 연예들과 같이 귀엽네, 정도가 제 느낌입니다. -_- 별 다를 거 없는데. 너무 여기저기서 난리를 치니 더 부풀려진듯.

내오랜꿈 2007-11-28 17:16   좋아요 0 | URL
아프님은 가서 사인받아도 됩니다.
아저씨 아니잖아요..^^;
 

유럽의 도시는 특수하다고?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9>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③

강철구 / 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년 11월 20일


  4. 다른 대륙의 도시들

  이슬람권의 도시들


  서양학자들은 이슬람권의 도시들을 전통적으로 매우 경시해 왔다. 이들 지역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유목민들로 도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유목민들은 표류하는 종족들로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도시들에는 경제활동이 있다 해도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기생적인 것이라고 본다. 주변의 농촌을 뜯어 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 별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상업 활동에 큰 가치를 두지 않은 기독교 사회와 달리 이슬람 사회는 처음부터 상업의 존재를 인정했고 상인에게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것은 그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상인 출신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슬람교가 상업 활동에 제약이 되지는 않았다.
  
▲ 마호메트(Muhammad, 570~632)

  이미 10세기에 후옴미아드 왕조의 수도로서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던 코르도바의 인구는 50만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는 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최대의 도시였다.
  
  또 14세기 전반에는 이집트의 카이로가 크게 번성했다. 이 도시도 중국의 항주(杭州)와 함께 세계 최대의 도시로 그 인구도 약 50만에 달했다. 이집트에는 이 외에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개의 대도시가 나일강을 따라 발전했다.
  
  카이로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과 함께 세계무역로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이집트가 유럽과 인도, 중국을 잇는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로와 인근 지역에는 상업, 국제무역 외에 수공업도 매우 발전했다. 면직이나 린넨 같은 직조업이 발달하여 대량으로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그밖에 설탕산업이나 야금업, 무기제조, 유리, 도자기, 가죽제품 등 많은 산업이 발전했다.
  
  또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룩정권은 각종 산업을 일으키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경제에 약간의 통제를 가한 것은 사실이나 이집트인의 경제활동에 제약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이슬람권에서는 계약, 동업, 중개제도, 장부의 기장, 신용제도 같은 상관습이 잘 발달했고 그 중 많은 것이 유럽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이슬람 지역을 반자본주의적으로, 이슬람도시를 정치적, 종교적 도시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 16세기 이슬람 상인들의 모습

  중국의 도시들
  
  서양 사람들은 중국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부정하고 그 정치적, 행정적 성격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 도시들의 경우보다 더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중국도시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9-10세기에 인구가 증가하며 남부 해안 지역에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산업발전과 무역의 증가 때문이다. 특히 13세기인 남송 시대에는 농업 생산성, 산업기술,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도 발전했다. 당시 양자강 하류의 항주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가장 발전한 도시였다. 전국으로부터 상인들이 몰려들었을 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도 많은 무역업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는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이븐 바투타.

  송대에도 상공업이 발전했으나 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명나라 때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곡물이나 면, 견 같은 상업 작물의 교역이 활성화되며 전국적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들도 상품 생산과 분배의 거점으로서 주변 지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대에도 경제성장은 지속되었고 따라서 인구증가, 도시화도 계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남경의 인구는 100만, 북경도 60만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명, 청대에는 행정과 전연 관계없는 상업, 산업도시도 많다. 경덕진(景德鎭) 같은 도시는 유럽에 자기를 수출한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산업도시이다. 또 양자강 하류지역과 태호(太湖) 지역에는 면직물, 견직물을 주로 생산하는 수십 개의 산업도시들이 있었다.
  
  특히 최근에 이루어진 양자강 하류의 큰 도시인 한구(漢口)에 대한 연구를 보면 베버와 같은 식으로 중국 도시를 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이 도시는 행정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며 전적으로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시킨 상업도시로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다.
  
▲ 윗부분의 도시가 한구(漢口)이고, 시계 방향으로 호광총독의 관청이 있 던 행정도시 무창(武昌), 작은 도시가 한양(漢陽).

▲ 15세기 초에 건설된 북경(北京)시의 모습

  일본, 인도, 아프리카의 도시들
  
  일본의 도시도 경제발전에 따라 16세기 이래 크게 성장했다. 그리하여 1825년에 이르면 인구 1만 이상의 도시가 82개에 이르고 도시인구는 모두 367만 명으로 추산 된다. 이런 도시화율은 18세기의 서유럽과 별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에 오사카와 교토의 인구는 40만-50만이고 지금의 도쿄인 에도(江戶)의 인구는 근 100만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도시화도 경제발전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 도시들 가운데 많은 것이 봉건영주가 자리 잡은 성곽도시이기는 하나 그것을 반드시 행정도시로 보기는 어렵다. 경제적 성격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 1680년경,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시. 나가사키시는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 는 창구역할을 한 도시이다.

  인도도 인도양 지역의 중심 국가로 일찍부터 경제가 발전하며 도시도 발달했다. 17세기에 아그라, 델리, 라홀 같은 무굴제국의 주요도시들의 인구는 50만명에 육박했고 인구 20만명을 넘는 무역항들도 많았다.
  
  아프리카의 경우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프리카가 원래 미개하여 지금 보이는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아마도 유럽 사람들이 식민지를 만들며 건설되었을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서양의 중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미 많은 도시들이 자생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1200년경에 인구 2만 이상의 도시가 31개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것이 1400년에는 35개로 늘었고 1600년에 30개로 약간 줄었다가 1800년이 되면 21개로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1200-1400년 시기의 이런 도시 숫자는 아프리카가 도시화라는 점에서 유럽에 크게 뒤떨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600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판도 안에 있던 인구 2만 이상의 도시는 16개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진출하며 아프리카인의 자생적인 정치, 경제할동이 위축되고 그리하여 도시도 크게 줄어든 것으로 생각된다.
  
  5. 유럽의 중세 도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빈약한 유럽 도시들

  
  지금까지 유럽의 중세도시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또 다른 지역의 도시들이 어땠는지 간략히 살펴보았다. 유럽 도시들의 특징은 우선 그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도시들만이 10만 정도의 인구를 갖고 있었고 알프스 북쪽에서는 파리만이 10만 정도였다.
▲ 프랑스 리용

  그러면 이렇게 규모가 작은 유럽 도시들이 근대에 들어와 어떻게 급격하게 성장했는지 런던을 예로 들어보자. 런던은 17세기에 들어와 유럽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그러나 중세시기에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임에도 인구가 4만 정도였다. 조선 초의 14세기 말 한양이 10만 이상이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작은 도시이다.
  
  1563년에도 9만 3천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힘입어 급성장하기 시작한다. 1580년에 12만 3천, 1593-95년 사이에 15만 2천, 1632년에는 31만7천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1700년에는 70만으로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된다.
  
▲엘리자베스 I세 (Elizabeth I, 1533 ~ 1603)

▲ 15세기 말 헨리 7세 시대의 런던

▲ 스페인의 무적함대

  잉글랜드가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대서양의 패권을 장악했고,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므로 런던시의 급성장은 잉글랜드인의 해외진출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에 대서양 무역이 활성화되며 노예무역 등을 통해 잉글랜드 경제가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런던시가 대표적이지만 많은 유럽도시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직접 연결되는 유럽 도시의 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 이전 유럽도시들의 모습은 별로 인상적이 아니다. 아시아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도시의 규모도 작고 인구도 훨씬 적다.
  
  이렇게 도시가 빈약했다는 것은 중세시기에 유럽에서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규모도 작고 숫자도 많지 않은 유럽도시들이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규모로 이야기하기 어려우니까 도시의 자유니 뭐니 하며 성격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유럽도시의 특수성은 잘못된 주장
  
  그러나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도시들이 봉건적 체제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도시가 왕이나 영주로부터 특허장을 얻어 약간의 자율성을 얻었지만 오랜 역사 속에 수백 개의 특허장을 확보한 도시라 해도 그것이 도시의 완전한 자율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는 특허장을 도시민이 왕이나 영주와 싸워 얻은 결과로 보았으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보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그것이 영주들의 이해관계와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영주들이 강요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특허장과 도시의 자유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도시들은 왕이나 영주들의 소유권, 법적 관할권에 의해 복잡하게 분할되어 있었다. 그러니 도시가 누리는 자율이라는 것이 그 가운데 남겨 있는 작은 틈새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15세기 이후에는 유럽에서 왕권이 강해지며 도시의 행정권, 사법권이 점차 왕의 관리들에게 넘어간다. 따라서 그나마의 자율성마저 잃게 된다.
  
  근대 유럽의 정치적 자유는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18세기 말 이후의 산물이다. 또 유럽도시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 받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중세도시의 전통과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 도시의 성격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정치적 성격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고 아시아 경제가 18세기까지도 유럽보다 훨씬 발전했으며 활력 있었다는 주장도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럽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유럽도시와 아시아 도시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너무 지나치게 유럽 도시의 특수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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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무엇이 문제인가?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0>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①

강철구 / 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년 11월 22일


  1) 르네상스, 무엇이 문제인가
  
  근대의 시작으로서의 르네상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은 르네상스기 미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과 같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보이는 세련된 아름다움은 르네상스 문화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오늘날 르네상스는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호텔이나 술집 이름에도 붙어 있을 정도이다. 그것은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세련된 것, 아름다움, 근대적인 것 등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로 재생, 부흥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의 같은 의미를 갖는 리네시타(Rinescita)에서 온 것으로 19세기 중반부터 하나의 시대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서양사에서 르네상스란 보통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그리스 · 로마의 고전고대 문화에 기초해 새로운 근대문화가 발전한 시기를 가리킨다. 유럽에서는 5세기에 로마제국이 몰락하고 나서 오랜 문화적 암흑시대가 있었는데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고대문화가 되살아남으로써 근대를 향한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인들은 르네상스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전환점으로 받아들인다. 또 18세기의 계몽사상과 함께 유럽의 정신문화 발전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단계로 생각한다. 그러니 서양 사람들이 르네상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매우 독특한 사람들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들이 방금 빠져 나왔다고 믿은 중세의 '암흑시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는 자신들이 발전시키고 있던 위대한 웅변이나 시, 조각, 회화들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중세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로 규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스위스 역사가인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이다. 그가 1860년에 낸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라는 책에서 르네상스를 중세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로, 또 근대의 출발점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와 그가 쓴『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 1860

  그의 이런 규정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르네상스는 그 후 하나의 시대 개념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보통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주로 부르크하르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인들은 르네상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나?
  
  그러면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었고, 인문주의라는 학문을 통해 고대의 세속적인 가치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의 억압을 분쇄했고, 신분제를 해체함으로써 인간중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었으며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를 다졌을 뿐 아니라 새로운 근대적 예술 양식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 호이징하 (Johan Huizinga, 1872~1945)와 그가 쓴『중세의 가을』, 1919

  이런 주장이 비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호이징하라는 유명한 네덜란드 역사가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많은 중세사가들은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중세적 특징들이 많이 나타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르네상스를 부르크하르트가 처음 주장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전문 역사가 사이에는 옹호하는 사람보다는 비판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럼에도 그가 만든 틀의 큰 테두리는 상당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매혹되지 않으면 르네상스가 아니다'라는 말이나 '유럽은 그들(인문주의자)이 부르짖은 인간성의 능력과 지성에 대한 신뢰를 결코 잃은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의 삶과 사상에 있어 가장 큰 영감으로 남아 있다'는 최근 서양학자들의 말은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서양 사람들의 자부심을 만족시켜줄 소지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14세기부터 유럽에는 근대 문화적 요소가 나타났고 그 결과 유럽은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빨리 근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르네상스가 바로 근대세계에서의 서양문화의 우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큰 생명력은 이렇게 그의 주장 속에 담겨 있는 유럽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르네상스는 아직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을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르네상스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찬양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2) 부르크하르트의 인물과 역사를 보는 태도
  
  보수적인 역사가 부르크하르트

  
▲ 바젤(Basel)시

  부르크하르트는 1818년에 스위스의 바젤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기에 독일의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역사학자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바젤 대학의 역사학 교수가 되었고 80세라는 긴 수명을 누렸다.
  
  그를 저명한 역사가로 만들어준 책이 40대 초에 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이다. 이 책은 쉽고 재미있으며 하나의 시대로서의 르네상스의 특징을 그 나름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르네상스를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기본서적에 속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검소하게 살았으며 정치를 믿지 않았고 돈에 무심했다. 또 작지만 코스모폴리탄적인 분위기가 가득 차 있었던 바젤을 매우 사랑했다. 그 도시가 유럽 문명의 진정한 요소들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부르크하르트가 교수로 재직했던 바젤 대학

  르네상스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태도는 그의 타고난 정신적인 기질이나 역사를 연구하는 방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는 성격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던 국가 사이의 군사적 경쟁이나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산업화에 따른 물질적 진보를 매우 싫어했다. 그것이 그가 역사에서 높이 평가하는 문화적 가치들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술이나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 강한 애착을 보인 것도, 또 문화사를 연구의 주된 주제로 삼은 것도 이런 관심 때문일 것이다. 반면 경제와 관련된 사항들은 별로 다루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역사연구에서 하나의 결함이다. 경제와의 관계를 빼고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 그가 역사를 연구하는 방식도 일반 역사가들과는 좀 다르다. 역사연구를 좀 더 창조적인 작업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직관적인 역사쓰기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의 제자들로부터 헤겔철학을 배우고 랑케로부터는 직접 역사학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 독일 지식인 사회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이들의 학문으로부터 별 자극을 받지 않았다. 학문적인 성향이 그들과 달랐던 탓이다.
  
  그는 우선 헤겔식의 '역사철학'을 거부했다. 헤겔은 역사란 '자유의 정신'이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역사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거부한 것이다. 역사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고 철학적 개념이니 그럴만하다.
  
  또 객관적 역사 쓰기를 목표로 하는 랑케의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도 거부했다. 랑케의 목표는 과거의 일어났던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들의 원인과 경과, 결과를 사료를 뒤져 꼼꼼하게 따지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면 객관적인 역사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를 오히려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신이 다루는 시대의 정신을 생생하게 상상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역사가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적인 역사가들이 하듯이, 역사책에 사료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주(註)를 꼼꼼히 붙이는 지루한 일 따위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해 봤자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구성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사물을 보고 순간적으로 얻는 느낌인 직관이 역사를 이해하는데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렇게 역사를 쓰는 방식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의 창조적이고 독특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료에 근거해서 엄격하고 쓰지 않으므로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잘못하면 역사의 모습을 크게 왜곡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의 주장이 독창적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지만 학문적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이런 아마츄어리즘은 당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 오늘날 그의 연구가 심각한 비판대 위에 서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면 르네상스에 대한 그의 주장과 문제점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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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CD를 정리하다가 언젠가 '재고정리'(?) 뭐 이런 거 할 때 구입한 뒤 쳐박아뒀던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발견했다. 목차를 훑어보다 눈에 익숙한 '하바네라'가 들어왔다. 익숙한 이유는 순전히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카르멘』 - 그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내가 EBS 『주말의 명화』를 가끔씩 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보는 이유는 언젠가 보긴 봤었지만 자꾸만 잊혀져 가는 영화들을, 그리고 감독들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난주 상영작은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

'카르멘'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 원작 소설이나 이를 바탕으로 작곡한 비제의 오페라를 본 사람들은 또 드물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물론 읽거나 본 적이 없다. 오페라야 뭐 내 수준에 언감생심이겠지만, 원작 소설 역시 몇 번인가 읽어볼 생각은 했었지만, 결국 손이 가지 않았다. 읽지도 않았지만 여러 매체를 통해 그 내용을 너무 뻔히 알고 있다는 선입견도 작용했고, 걸작이라고 선전되는 외국의 번역체 소설을 읽어서 감흥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는 개인적인 경험 역시 한 몫 했으리라.

영화로 나온 『카르멘』 역시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대여섯 편은 되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과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카르멘』일 것이다(우연인지도 몰라도 둘 다 1983년에 제작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고다르의 『카르멘』을 더 흥미롭게 봤었지만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은 플라멩고 춤 하나만으로도 꼭 한번은 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왜 하필 '카르멘'과 '플라멩고'의 결합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찾아본 사우라 감독의 영화는 그렇게 많진 않은데, 『사냥』, 『사촌 안젤리카』,  『질주』,  『까마귀 기르기』, 그리고 『카르멘』.

카르멘에 스페인의 전통춤 플라멩고를 결합시킨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모든 영화는 철저하게 스페인의 전통과 역사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우라 감독의 초기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사냥』(1965)은 토끼사냥에 몰입하는 무리의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역사와 프랑코 정권하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우라 감독의 스페인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이슈는 『사촌 안젤리카』(1974)에서도 계속되는데, 폭압적인 정치상황(=프랑코 독재정권시절하의 스페인에 대한 은유)을 겪어낸 한 남자의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이다.

이렇게 자국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통해 명성을 쌓은, 이 스페인의 국민감독은 말년에 이르러서도 그의 문제의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1996년작 『까마귀 기르기』. 이 작품에서도 프랑코 독재정권이 스페인 사회에 미친 영향을 한 평범한 가족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자이크처럼 맞물린 흥미로운 구성을 통해 과거(프랑코 독재정권하 스페인)를 오늘의 스페인에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결정판은 『질주』라 할 수 있다.  사우라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고집스러울 만큼 '과거'를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질주』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묘사한 몇 안 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가 던지는 질문은 단 한 가지. 독재정권이 끝나면 당장 평화와 자유가 오는 것일까?, 라는 것.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네 명의 젊은이들이 벌이는 은행강도 사건을 소재로 삼아, 사우라 감독은 프랑코 정권 '이후' 80년대 스페인 사회가 체험한 무기력과 좌절감을 그려낸다. 원제인 '빨리빨리(Deprisa, Deprisa)'가 말하는 역설은 결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탄식을 은유한다고 한다. 1981년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황금곰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우라 감독의 모든 영화는 '은유'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래서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는 힘든 '필모그라피'를 지닌 감독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 『카르멘』은 이런 걱정을 붙들어매도 괜찮을 흥미로운 작품이다.

『카르멘』은 프랑스의 작곡가 비제의 오페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써, 스페인의 전통춤인 플라멩고의 마술적인 안무와 열정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카르멘'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이 보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흡인력 있는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

영화의 스토리는 너무나 단순하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플라멩고 춤으로 각색해 무대에 올리려는 안무가와 카르멘역을 맡은 댄서가 극의 내용과 똑같은 형식의 비극으로 치닫는다는 이야기를 무용극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더 덧붙일래야 덧붙일 건덕지 하나 없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헷갈리는 지점이 생겨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액자소설'의 형식처럼 극의 내용과 영화적 현실이 혼동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바로 이 지점, 곧 플라멩고의 영혼을 울리는 진실성과 비제의 오페라가 갖는 허구성과의 대립에서 생겨나는 현실과 환상을 오고가는 미묘한 움직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상영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플라멩고 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멩고가 무엇인지, 춤 같은 것에 관심없는 사람은 볼 필요도 없는 영화가 아니냐고? 천만에. 극단적인 플라멩고 혐오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열정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플라멩고와 이를 절묘하게 포착해낸 사우라 감독의 뛰어난 카메라워크 그리고 두 주인공의 연기에 몰입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카르멘』이기 때문이다.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복잡한 구성과 화려하면서도 대담한 영상으로 스페인의 어두웠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작품들을 주로 만들어온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플라멩고 3부작 중 두번째 작품 『카르멘』. 그 사랑과 영혼의 춤이 시작되는 무대 위로 한 번 떠나보시길...

2004 01 07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 '하바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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