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포럼] 삼성과 새만금
고미숙 / 연구공간 ‘수유+너머’연구원
출처 : <경향신문> 2007 12 02
변승업은 조선 후기, 장안 최고의 갑부였다. 승업이 늙으매 자손들에게 이렇게 경계하였다. “내 일찍이 수많은 공경대신들을 섬겨보았지만 나라의 권세를 잡고서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이치고 권세가 3대를 뻗는 이가 없더구나. 그러므로 나의 재산을 지금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후손들에게 큰 재앙이 미칠 게야.” 이에 재산을 세상에 두루 흩어버렸다. 그 후손이 번창하면서도 다들 가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에 나오는 대목이다. 국부를 한손에 거머쥐었음에도 그에 휘둘리지 않았던 것이다. 허생은 한술 더 떠 국제무역으로 100만냥을 벌여들었건만, 집으로 돌아갈 때 그의 손에는 단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국회 통과한 2개의 특별법-
삼성과 새만금 - 두 개의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둘은 서로 무관하게 보이지만, ‘돈의 판타지’가 어떤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깊이 상통한다. 먼저, ‘새만금 특별법’에 따르면, 앞으로 무려 28조원을 간척사업에 투여할 작정이란다. 그 광활한 바다를 메우기 위해 남산 150개에 해당하는 산들을 제물로 바쳐야 할 모양이다. 이 일만도 기가 찰 노릇이지만, 더 황당한 건 그 다음, 거기에 무엇을 세울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골프장, 복합산업단지 등 온갖 허황한 망상들이 허공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대체 이 탐욕과 어리석음의 끝은 어디일까?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정치가들과 개발의 화신인 건설업자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쇠귀에 경 읽기’도 이젠 지쳤다. 우리를 깊은 좌절에 빠뜨리는 건 이 허황한 망상들을 떠받치고 있는, 소위 ‘전북의 민심’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동안 전북은 극심한 소외와 차별에 시달렸기 때문에 새만금 사업은 무조건 추진되어야 한다고. 지구의 온난화, 환경 재앙 따위엔 아예 귀를 막아 버린다. 갯벌의 가치와 생명력에 대해서는 숫제 눈을 감아 버린다. 오직 돈으로 한을 풀겠다는 일념뿐! 여기에는 이미 목적도, 방향도 없다. 따라서 이제 어떤 식의 논리도, 설득도 불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는 꼭 알려주고 싶다. 돈은 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고, 한을 더더욱 쌓아올릴 뿐이라는 것. 지금 벌어지는 삼성의 소용돌이가 그 명백한 증거다. 삼성은 세계가 알아주는 초일류 기업이(라고 한)다. 새만금에 들어갈 28조원이라는 돈도 어마어마하지만, 삼성이 주무르는 돈은 나 같은 사람한테는 ‘무량겁’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돈을 가졌는데도 왜 ‘더 많이, 더 오래’ 갖고 싶어지는 것일까. 그만큼 누렸으면 이제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법도 하건만 오히려 그 덫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으니 말이다. “처자식 빼고 다 바꿔라!” 한때 이건희 회장이 널리 유행시킨 구호다. 대부분 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뜻으로 새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곱씹어 보면, 그 속내에 열심히 돈을 긁어모아 처자식에게 물려주라는 뜻도 담겨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치졸한 방식으로 편법 증여와 비자금 조성을 꾀할 수 있단 말인가. 돈에 대한 집착에 빠지는 순간, 그 어떤 권위나 업적도 순식간에 추락하고 만다는 것 - 변승업과 허생은 이미 수 세기 전에 깨달은 바이건만, 21세기를 선도하는 초첨단기업이 이 소박한 원리에 대해 이토록 무지할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돈의 덫에 걸려 권위·업적 추락-
새만금 간척이 한풀이가 아니라 한을 더 한층 쌓아갈 수밖에 없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돈이 유일한 척도가 될 때, 그 돈은 자신의 증식을 가로막는 삶과 생명을 가차없이 짓밟아 버린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돈에 매달리게 되고. 그래도 좋다면, 대체 누가 그 ‘죽음의 질주’를 말릴 수 있으랴. 갈 때까지 가보는 수밖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