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없는 ‘유령 사회주의’를 넘어
[김종철 집행위원장에게]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을 제안하며

최병천 / 한국사회민주주의 네트워크 기획담당
출처 : <레디앙> 2007 11 20


필자는 최근 이런 저런 이유로 권영길 의원실과 캠프 결합을 그만두고 사민주의에 공감하는 이들의 폭넓은 세력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한국 사회민주주의 네트워크'(약칭 ‘사민넷’. 추진위원장 유팔무)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열렸던 사민넷 워크숍 모습.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최근 ‘경남 사민주의연대’(준)이 성공적으로 출범하였다. 이외에도 현재 사민넷은 서울, 경기/인천, 부산, 강원 등에서 사민넷 지역조직의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얼마 전 사석에서 현재 민주노동당의 주요 정파인 '전진'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종철(존칭 생략)을 만났다. 김종철은 “사민주의자들이 세력화를 하는 것은 좋은데, 내용이 뭔지를 드러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또한 김종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사민주의’와 전진의 ‘사회주의’가 뭐가 다른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많이 하곤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김종철 집행위원장과 이후에 <레디앙> 등의 지면에서 공개적인 논쟁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자고 합의했다. 이 글의 탄생 배경이다. 

굳이 ‘전진’에게 공개 논쟁을 제안하는 이유 

이번 논쟁은 기본적으로 '전진'의 김종철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다른 ‘전진’ 활동가들의 논쟁 참여도 기대한다.

필자가 특별히 ‘전진’을 특정하는 것은 전진이 당내에서 ‘제1야당’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정파인데, 전진의 사회주의적 마인드로 인한 ‘이념적 편향성’이 오늘날 당이 어려움에 처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능한 여당에 대한 권력교체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언제나 야당이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참고로, 필자는 현재 민주노동당의 위기가 ‘사민주의적 마인드’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내 당권파와 제1야당 세력의 ‘이념적 편향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논쟁은 한 번의 글로 끝나지 않고 반론-재반론, 새로운 논점의 제기, 당내 문제와의 연동 등의 형태로 포괄적으로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1890년대 독일에서 세계사회주의 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소위 ‘수정주의 논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2007년 대한민국에서 세계사회주의 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논쟁이 이뤄지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풍부한’ 논쟁을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소련식 모델을 추구했던 80년대 PD 노선

통상적으로 구분하듯이 80년대 운동권은 크게 NL-PD로 구분되었다. NL은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북한을 기본 모델로 지향했다. 그리고 한반도 변혁이라는 관점에서 북의 ‘민주기지론’을 수용하며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북한과 연계하는 항미연북(抗美連北)노선을 취했다. 이 방침에는 현재도 변함이 없다. 그들에게 간첩단 사건과 심지어 핵 실험조차도 여전히 ‘변혁운동’의 일환이다.

반면, PD의 경우는 좀 달랐다. 이들은 맑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소련식 모델을 기본적으로 지향했다. 그렇기 때문에 NL과 달리 89년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 91년 소련의 붕괴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나 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군사독재의 종식은 더욱 커다란 사상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 당시를 겪었던 많은 PD계열 활동가들은 소련 모델의 붕괴 이후 원인분석과 평가, 그리고 대안적 전망을 갖지 못한 채 ‘생활 속으로’, 혹은 ‘현장 속으로’ 매몰된 경우가 많다. 소련 모델의 붕괴에 대한 원인 분석, 평가, 대안모색은 하나같이 굵직한 주제들이기에 활동가 개인이 정리하기에는 벅찬 것들이었다. 이렇게 ‘판단유보’ 상태에서 자꾸 세월은 쌓여가고 있는 셈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체제적’ 귀결 - 사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 

따라서 오늘날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묻어두었던 지점의 재확인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맑시즘의 등장 이후에 세계적으로 전개되었던 사회주의 운동은 그 표현에 아무리 현란한 수식어가 붙어 있었건, 결국 ‘체제’를 기준으로 볼 때 두 가지 이외에는 없었다. 한 가지는 유럽을 중심으로 했던 ‘사민주의 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중국/북한 등 반(半)봉건국가 혹은 저개발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했던 ‘공산주의 체제’이다.

그리고 이중에서 흔히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은 소련식 모델을 기본으로 했던 ‘공산주의 체제’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전진 활동가들은 소련식 모델에 대한 기본적인 답변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유럽식 사민주의 체제와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 - 다섯 가지 ‘역사적 변별점’

유럽식 사민주의 체제와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의 역사적 변별점은 다음과 같다. 아래 서술될 주요 논점들은 동시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전진의 김종철에게 필자가 ‘공개질문’을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첫째, PT독재에 대한 인정 유무이다. 혹자는 PT독재의 원래취지는 ‘노동자 민주주의’라고 다분히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완전히 주관적인 접근이다. PT독재론은 자본가 계급을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발상에 기초하며 그 핵심은 '다당제의 인정 여부'다.

둘째, 권력 획득 방식으로서의 폭력혁명론이다. 폭력혁명론에 대한 입장 역시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화해 불가능한 계급적 대립’으로 보며, 자본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사고방식에서 유래한다. 알다시피 80년대 NL이건 PD이건 모두 ‘폭력혁명’을 (먼 미래가 아닌) '당면한' 권력획득의 기본 방법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셋째, 중앙집중계획경제에 대한 입장이다. 소련의 경우 ‘고스플란’이라 불리는 조직에서 모든 재화의 가격과 물량까지도 전부 중앙집중계획경제 차원에서 실시되었다.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에서 관료제의 문제와 민주주의의 부재 문제는 단순한 관료들의 ‘품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경제체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중앙집중계획경제는 권력과 자원 그리고 정보의 집중을 전제하는 제도이다.

넷째, 시장/상품에 대한 불인정이다. 공산주의 체제는 시장과 상품을 폐지의 대상으로 사고했다. 시장과 상품은 그자체로 불온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다섯째, 전면적 국유화의 여부이다. 전통적인 공산주의 체제 옹호자들에게 국유화는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은 것으로 사고되었다.

다섯 가지 쟁점에 대한 사민주의자의 기본 입장

통상적으로 사민주의라고 하면 곧바로 붙는 말이 ‘개량주의’라는 낙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민주의는 ‘커밍아웃’의 대상이다. 상대방에게 ‘개량’이란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은 참으로 쉽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은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도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또한 ‘유치한’ 것이기도 하다.

김종철에게 공개 질문을 한 입장이니 분명하게 하기 위해 위의 다섯 가지 쟁점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밝힌다.

첫째, PT독재를 반대하며 다당제를 옹호한다.

둘째, 폭력혁명론을 반대하며 ‘의회’를 통한 평화적 방법으로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는 100년 전 베른슈타인 주장의 핵심이기도 하다.

셋째, 중앙집중계획경제를 분명하게 반대한다. 국가사회주의적 ‘독재체제’의 물적 토대이며 생산력의 저하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 시장과 상품은 인정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이 아니다. 시장은 특정한 조건에서 폐해가 있지만 또 다른 특정한 조건에서 시장은 오히려 바람직한 경우도 많다.

다섯째, 국유화는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 신중하게 실시되어야 한다. 경쟁과 혁신이 중요한 산업분야일수록 국유화는 신중해야 하며 보육, 의료, 교육, 주택, 노후복지 등의 ‘필수재화’의 경우 검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체없는 ‘유령 사회주의’를 넘어

사회주의라는 단어의 대중적 이미지가 안 좋아서 ‘민주적’이란 수식어를 붙여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다. 그 수식어를 변혁적으로 바꾸건, 혁명적으로 바꾸건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위 다섯 가지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실 실체가 존재하지 않고 급진적 정서만 존재하는 ‘유령 사회주의’에 다름 아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사민주의체제와 공산주의체제를 갈랐던 5가지 변별점 이외에 ‘새로운’ 변별점을 제시하는 것도 생산적인 방법이다.

위 다섯 가지 논점에 대한 김종철의 훌륭한 답변을 기대한다. 물론 답변과 함께 ‘새로운 논점’을 제기하는 것도 적극 환영한다.

     관련기사
· ‘폭력혁명’ 반대하면 ‘의회주의’ 뿐 · 사민주의, 진보진영 구심점 될 수 있다
· 이념 아니라 정파 리더십이 문제다 · 사회주의 이상 없이 사민주의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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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포럼] 삼성과 새만금

고미숙 / 연구공간 ‘수유+너머’연구원
출처 : <경향신문> 2007 12 02


변승업은 조선 후기, 장안 최고의 갑부였다. 승업이 늙으매 자손들에게 이렇게 경계하였다. “내 일찍이 수많은 공경대신들을 섬겨보았지만 나라의 권세를 잡고서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이치고 권세가 3대를 뻗는 이가 없더구나. 그러므로 나의 재산을 지금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후손들에게 큰 재앙이 미칠 게야.” 이에 재산을 세상에 두루 흩어버렸다. 그 후손이 번창하면서도 다들 가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에 나오는 대목이다. 국부를 한손에 거머쥐었음에도 그에 휘둘리지 않았던 것이다. 허생은 한술 더 떠 국제무역으로 100만냥을 벌여들었건만, 집으로 돌아갈 때 그의 손에는 단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국회 통과한 2개의 특별법-

삼성과 새만금 - 두 개의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둘은 서로 무관하게 보이지만, ‘돈의 판타지’가 어떤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깊이 상통한다. 먼저, ‘새만금 특별법’에 따르면, 앞으로 무려 28조원을 간척사업에 투여할 작정이란다. 그 광활한 바다를 메우기 위해 남산 150개에 해당하는 산들을 제물로 바쳐야 할 모양이다. 이 일만도 기가 찰 노릇이지만, 더 황당한 건 그 다음, 거기에 무엇을 세울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골프장, 복합산업단지 등 온갖 허황한 망상들이 허공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대체 이 탐욕과 어리석음의 끝은 어디일까?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정치가들과 개발의 화신인 건설업자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쇠귀에 경 읽기’도 이젠 지쳤다. 우리를 깊은 좌절에 빠뜨리는 건 이 허황한 망상들을 떠받치고 있는, 소위 ‘전북의 민심’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동안 전북은 극심한 소외와 차별에 시달렸기 때문에 새만금 사업은 무조건 추진되어야 한다고. 지구의 온난화, 환경 재앙 따위엔 아예 귀를 막아 버린다. 갯벌의 가치와 생명력에 대해서는 숫제 눈을 감아 버린다. 오직 돈으로 한을 풀겠다는 일념뿐! 여기에는 이미 목적도, 방향도 없다. 따라서 이제 어떤 식의 논리도, 설득도 불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는 꼭 알려주고 싶다. 돈은 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고, 한을 더더욱 쌓아올릴 뿐이라는 것. 지금 벌어지는 삼성의 소용돌이가 그 명백한 증거다. 삼성은 세계가 알아주는 초일류 기업이(라고 한)다. 새만금에 들어갈 28조원이라는 돈도 어마어마하지만, 삼성이 주무르는 돈은 나 같은 사람한테는 ‘무량겁’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돈을 가졌는데도 왜 ‘더 많이, 더 오래’ 갖고 싶어지는 것일까. 그만큼 누렸으면 이제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법도 하건만 오히려 그 덫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으니 말이다. “처자식 빼고 다 바꿔라!” 한때 이건희 회장이 널리 유행시킨 구호다. 대부분 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뜻으로 새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곱씹어 보면, 그 속내에 열심히 돈을 긁어모아 처자식에게 물려주라는 뜻도 담겨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치졸한 방식으로 편법 증여와 비자금 조성을 꾀할 수 있단 말인가. 돈에 대한 집착에 빠지는 순간, 그 어떤 권위나 업적도 순식간에 추락하고 만다는 것 - 변승업과 허생은 이미 수 세기 전에 깨달은 바이건만, 21세기를 선도하는 초첨단기업이 이 소박한 원리에 대해 이토록 무지할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돈의 덫에 걸려 권위·업적 추락-

새만금 간척이 한풀이가 아니라 한을 더 한층 쌓아갈 수밖에 없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돈이 유일한 척도가 될 때, 그 돈은 자신의 증식을 가로막는 삶과 생명을 가차없이 짓밟아 버린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돈에 매달리게 되고. 그래도 좋다면, 대체 누가 그 ‘죽음의 질주’를 말릴 수 있으랴. 갈 때까지 가보는 수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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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바다’에 운명 싣고 떠돌다
문명과 바다 10. 원양항해: 위험으로 가득 찬 모험

▣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30일


» 난파 당한 배 / 세계 어디서든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해상 크로노미터
 

대항해시대에 선박과 항해술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사실 해상 위험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근대 초에 원양 항해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치르고 이루어진 극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교과서에서는 나침반이 널리 사용되면서 항해의 안전성이 크게 높아진 것처럼 서술하지만 이 말이 정확히 맞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나침반은 중국에서 개발되어 유럽으로 전해졌으나 정작 아시아의 바다에서는 별자리 관측 항해가 더 일반적이었다. 별자리 관측의 대표적인 도구는 인도양의 카말(kamal)이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 단순한 도구를 이용하여 별의 고도를 잼으로써 배가 어느 위도 상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고, 또 여러 항구의 위도가 미리 매듭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현재 위도 상에 어느 항구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방식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사용되었다. 현재 1835년에 몰디브 선원에게서, 또 1892년에 힌두 선원에게서 구한 실물이 보존되어 있다. 이에 비해 나침반은 보조적인 도구로서, 날이 흐려서 별자리를 관찰하기 어려운 때 사용하였다. 나침반이 유럽의 지중해에서 더 널리 이용되었던 이유도 지중해가 인도양보다 시계(視界)가 불량하여 별자리를 찾기가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별자리 관측이 나침반보다 더 믿을 만하고 더 유용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심지어 포르투갈인들이 아시아에 들어왔을 때 이들 역시 카말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 별자리 관측도구인 ‘카말’을 이용해 배의 위치를 파악하는 근대인.
 
어떻든 위도는 개략적으로라도 알 수 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경도였다. 해상 사고 때문에 너무나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영국의 의회는 1714년 경도를 정확히 계산하는 문제를 해결한 사람에게 2만 파운드라는 거액의 상금을 주기로 의결했다(이 액수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백만 파운드, 곧 115억 원에 해당하니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도를 파악하려면 배가 위치한 곳의 시각과 동시에 기준 지역의 시각을 알면 된다. 두 지역의 시각을 알면 그 시간 차이를 지리적 거리로 환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배가 세계 어느 곳에 있더라도, 또 선상의 조건이 어떠하더라도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필요하다. 이 문제를 푼 사람은 영국의 시계공인 존 해리슨(1693~1776)으로서 그는 해상 크로노미터를 발명하여 1773년에 약속된 상금을 받았다. 따라서 그 이전 시기에는 현재 배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망망대해에서 헤매기 일쑤였으니, 원양항해가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었는지 알 만하다.

근대 초 원양항해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배들은 위도와 경도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망망대해를 표류했고 1500~1635년 리스본과 인도를 오간 배 중 20%가 침몰했다. 바다는 선원들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영국의 유명한 해군 지휘관 조지 앤슨(George Anson, 1697~1762)의 항해는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741년 앤슨은 센추리언 호를 타고 남아메리카 최남단을 돌아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향해 가다가 격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두 달 가까이 폭풍우에 시달리는 가운데 선원들에게서는 괴혈병 증세가 나타나서 매일 6~7명씩 사망하고 있었다. 드디어 폭풍우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급선무는 하루바삐 중간 기착지인 후안 페르난데스 섬(오늘날에는 로빈슨 크루소 섬이라고 불린다)을 찾아가서 신선한 물과 식량을 보충받아 지친 선원들을 살리는 일이었다.

앤슨은 자신의 배가 대략 남위 60도의 위도선을 따라 계속 서진하여 아메리카 최남단을 빠져 나와 약 200마일쯤 서쪽에 와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넓은 대양을 항해한다고 생각하면서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바로 정면에 육지가 나타났다. 그곳은 아메리카 최남단 지역의 서쪽 끝인 누아르 곶(Cape Noire)이었다. 이 배가 이미 대서양에 들어섰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폭풍우에 밀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다시 서쪽으로 더 항해한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후안 페르난데스 섬을 찾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선원들은 계속 죽어갔다. 이 배가 가까스로 후안 페르난데스 섬과 같은 남위 35도 상에 이르렀지만, 문제는 그 섬이 현 위치에서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앤슨은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 방향으로 필사의 항해를 했다. 그러나 섬은 나타나지 않았다. 암만해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으로 생각한 앤슨은 뱃머리를 반대로 돌려서 같은 위도를 따라 동쪽으로 항해해 갔다. 이틀 동안 항해해 갔을 때 눈앞에 산맥이 남북으로 달리는 남미 해안을 만나게 되었다. 충격적이지만 이틀 전에 뱃머리를 돌린 지점에서 조금만 더 항해했으면 섬이 나왔을 텐데 그때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배를 돌려 왔던 길을 다시 가야 했고, 이렇게 헤매는 사이에만 80명이 더 죽었다. 대항해시대 원양항해의 실상은 이랬던 것이다.

따라서 원양항해 때 사고 발생 비율이 극히 높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포르투갈의 해양사 전문가인 고디뉴(M. Godinho)가 리스본과 인도를 오가는 포르투갈 선박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모두 20개월 정도 소요되는 왕복항해 중에 사고가 날 가능성이 지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00~1635년 중 리스본을 출발하여 인도로 향한 배 852척 가운데 약 10%가 중간에 사고를 당했고, 인도에서 유럽으로 귀환하는 경우에는 14.7%가 사고를 당했다. 전체로 보면 리스본을 떠난 배 가운데 중간에 침몰한 배가 전부 169척으로서 사고율은 약 20%에 달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비행기 10대 중 2대 꼴로 추락하는 ‘대형사고’가 계속 터진 셈이다.

침몰 사고 기록을 보면 선원들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다. 1662년 2월 11일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아른헴(Arnhem) 호가 귀국길에서 침몰 사고를 당했을 때 폴케르트 에버르츠(Volckert Evertsz)라는 사람이 생존해서 기록을 남겼다. 구명선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서 위험하게 되자 선장은 주저 없이 선원 40명을 추려서 바다에 던졌다. 이를 본 목사가 “신께서 원하시면 우리 모두를 살려주실 것입니다”라며 항의하였다. 그러나 구명선에 있던 선원들은 “영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겠지만 실제 위험이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더 잘 압니다” 하고 대꾸하더니 13명을 더 바다에 던졌다. 그때 아주 수영에 능한 암본 출신의 무슬림 선원 한 명이 헤엄쳐 와서 뱃전을 잡았다. 배 안의 선원들은 그 사람의 손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며 배에 오르지 못하게 막았고, 결국 이 사람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 배는 그 후에도 5명을 더 바다에 던지고 나서 9일 뒤에야 모리셔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양항해의 발전의 이면에는 지극히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 위험성은 고스란히 선원들에게 떨어졌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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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배제한 사회변혁 ‘순진한 발상’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30일


» 민족주의는 누구에 의해 어떤 국면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애국주의’와 ‘저항운동’의 상이한 면모를 보인다. 지난해 누리꾼들이 개최한 황우석 박사 지지 집회(왼쪽)와 지난 3월 열린 한미에프티에이 반대시위.(왼쪽).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4. ‘민족’은 대중의 생존기반

지난 3주 동안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민족과 탈민족의 관점에 서서 논쟁을 펼쳤다. 안병욱 교수는 한국 사회가 오래 유지해온 공동체적 유대관계야말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면서 세계화 시대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으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다.

박 교수와 임 교수는 탈민족 담론을 펼쳤다. 박 교수는 조선 말기까지 한국 사회가 동질성보다는 다양성이 두드러졌다면서 민족 관념의 실체를 부인했다. 그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 모순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면서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임 교수는 신자유주의는 서울과 뉴욕의 중심이 연합하는 지배엘리트의 국제주의 네트워크를 표상한다면서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지배엘리트 간의 국제적 네트워크에 대한 인식을 흐리고,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고 지적했다.

김동춘 교수는 이 글에서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가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양상을 점점 지니게 되었다면서도,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단위를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고 했다.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힘이기에 이를 병리적인 것 혹은 ‘특수한 것’으로만 간주하는 시각은 사태의 한 쪽 측면만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 주에는 안병욱 교수가 그동안 제기된 탈민족 시각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시 정리해 보여준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민족의 개념에는 종족적 동질성과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 곧 민족에는 초역사적·자연적 성격이 언제나 전제되는 경향이 있지만, 시민권의 보유자라는 의미 역시 포함되어 있다. 유럽 등 서구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위는 전쟁 등 봉건질서의 해체와 근대 헌법과 시민권 형성 국면에서 만들어졌고, 자국이 제국주의 침략국으로 나서면서 훨씬 강화되었지만, 근대화·산업화에 실패한 주변부에서는 민족국가 실현의 이상 속에서 만들어진 측면이 크다.

민족주의는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적 응집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유사종교인데, 그것이 민족의 자연적 성격을 강조할 경우에는 우익보수주의 혹은 극우 파시즘의 양상을 지닐 수 있고, 주권·시민권 확보의 내용을 강조하면 제국주의·시장주의에 의해 붕괴된 ‘공동체’ 복원이라는 이상을 지니기도 한다. 특히 과거 식민지·종속국의 민족주의는 정치공동체 혹은 ‘사회 만들기’ 프로젝트였다.

어떤 경우든 민족주의는 국가 혹은 사회 내에서 계급적·사회적 차별이 없다고 가정하고 있다. 파시즘의 쓰라린 기억을 가진 서구에서 ‘민족주의’는 주로 부정적 현상을 지칭한다. 이 경우 국가 주도의 민족주의는 애국주의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한데, 어떤 경우든지 내부의 정치적 억압, 계급 간의 대립을 축소하고 대중을 국가에 복종시키기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사회 내의 소수자나 소외된 자들을 억압·기만하기 위한 체제유지적 이데올로기만은 아닌데, 근대 민족국가 수립운동은 헌법적 질서, 시민권 확보, 사회의 공공성 유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주권의 상실, 민족국가의 부재는 약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다. 일제 식민지,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체제가 누구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는가를 반추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대중들의 실천으로서 민족주의는 그들의 생존조건을 지키기 위한 운동의 양상을 지니기도 한다.

‘민족주의’눈 두개의 얼굴 지녀
국가 주도하면 ‘애국주의’ 양상
대중 실천하면 ‘저항운동’ 면모


그래서 민족주의는 누구에 의해, 어떤 정치경제 국면에서, 어느 정도의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매우 상이한 성격을 지닌다. 과거의 저항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인권·자유의 가치를 내장했지만,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는 전쟁·폭력·차별과 결합된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자본가적 국가주도하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있는데, 중화민족주의는 중국의 자본주의화와 더불어 기지개를 펴고 있다. 중화민족주의는 외적으로는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수단의 다르푸르 학살과 미얀마의 인권탄압을 묵인하고 있고, 내적으로는 소수자나 노동자 탄압, 언론 통제를 수반한다. 그래서 반제국주의에서 출발했으나 이제는 국가주도의 성장주의의 내용을 갖는 중화민족주의는 동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의 우경화보다 더 위험한 정치적 힘이다.

그 동안 반식민지·반외세·분단극복의 내용을 갖고서 저항 이데올로기로 기능해 왔던 한국의 민족주의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점차 보수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있다. 1990년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는 분단 통일 민족주의의 측면보다는 일종의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양상을 점점 지니게 되었다. 민족주의의 보수화·우경화는 앞에서 시민권·주권 확보의 측면을 강조하기보다는 민족의 자연적 성격을 강조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이익과 자본의 이해를 강조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난번의 황우석 사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 따라잡아서 1등 하기, 경제지상주의, 국가주의 등 민족주의의 모든 부정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나타난 황우석 신드롬은 민족주의의 맹목적 성격과 위험성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그러나 한국이 자본의 수출국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 민족주의가 이제 퇴영적 측면만 갖는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과거 식민지 시절의 저항 민족주의가 제국주의/경제주의에 의해 자유와 시민권이 억압되는 현실을 벗어나서 새로운 국민국가 곧 사회를 건설하려는 열망을 담고 있었듯이, 오늘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신자유주의 광풍에 맞서서 대중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는 요구는 모두 국가 재형성 혹은 사회 재형성의 과제를 포함하고 있다. 분단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반도에서 민족주의가 여전히 진보적 요소를 약간이나마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터인데, 어쨌든 분단극복과 통일국가건설의 지향이 인권·평화·민주주의· 공공성 확보와 같은 가치의 인도를 받는 한 그것은 진보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의 최대의 수혜자는 남북한의 민중들일 것이다.

최근 ‘국가주의’ 우경화 뚜렷하나
민족은 관념 아닌 구체·사회적 힘
통일민족주의 수혜자는 남북한 민중


물론 현재의 지구화 국면에서 설사 남북화해와 분단체제의 제한적 극복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자본의 프로젝트일 가능성이 크고, 그 후 만들어질 사회가 지역·세대·계층으로 극도로 차별화된 사회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의 지구화가 곧 지구적 대안 설정, 지구적 운동의 연대를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단위를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세계경제, 지구화된 질서 속에서도 쉽게 이전되거나 사라지지 않으면서 대중의 정신적·물질적 생존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그것이 오늘날 민족(국가)의 실제 내용이다. 문화와 언어, 자연자원, 기술과 교육 인프라, 사회복지 시스템, 중소기업을 포함한 영세기업, 노동자와 농민 및 그들의 재생산 기반, 역사적 기억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정책·제도·정치의 기반이 되는 무시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구체적인 사회적 힘이다. 따라서 민족, 민족주의를 병리적인 것 혹은 ‘특수한 것’으로만 간주하는 자유주의와 탈국가주의 좌파 시각은 사태의 한 쪽 측면만 강조한다. 물론 이제 자본의 수출국이 되고 다인종 국가로 변해가고 있는 한국에게 과거식의 단일민족의 신화나 자민족중심주의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공격은 미국발 대자본의 이해에 기초한 경우가 많다는 점, 과거 제국주의 논리의 현대판인 자유무역, 시장만능주의가 그것을 즐긴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의 중화민족주의와 일본의 우익민족주의의 틈바구니에서 경제적 생존과 문화적 자존을 도모해야 하는 한국인들에게 반미 통일 민족주의가 대안인가, 아니면 동아시아 시민사회 수립, 노동자의 연대가 대안인가? 이에 대한 답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한국 민중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방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남북한 간 전쟁과 갈등을 막는 것, 우리가 원하지 않게 전쟁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첫째요, 한반도를 아우르는 헌법적 정치단위가 수립되어 경제적 약자들을 법이나 제도로 보호해 주는 것이 둘째요, 성장주의 독재의 뒤안길에서 소외된 중국·동아시아 인민들의 처지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고, 공동의 이상을 향해 연대를 하는 것이 셋째다.



김동춘 교수는 1959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을 주제로 하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과거사 정리 및 한국사회의 기업사회화 현상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근대의 그늘>(2000년) <전쟁과 사회>(2000) <미국의 엔진>(2004) <1987년 이후 한국사회 성찰>(2006)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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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꾸하는 펑크의 방식
[음반리뷰] 럭스 《The Ruckus Army》와 썩스터프 《Rough Times Ahead》


나도원 / 대중음악전문기자
출처 : <컬쳐뉴스> 2007 10 26


1968년 유럽의 대학생들은 ‘금지를 금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든 기성권위를 부정했다. 당시 19살의 이탈리아 대학생 카를로 페트리니도 신좌파의 세례를 받은 ‘68운동’의 일원이었다. 20대를 혁명가로, 30대를 음식평론가로 보낸 페트리니는 86년 패스트푸드의 세계화에 맞서 ‘음식 혁명가’로 재변신한다. 환경·전통의 보존과 느림의 미식을 강조하는 그는 ‘슬로푸드’ 운동으로 속도 맹종의 권위에 도전했다. 토속 농법과 종자를 찾아내 지키고, 제철 제땅에서 이슬맞고 자란 것들로만 맛있게 만들어 먹자는 것이다.

펑크가 가진 세계관의 스펙트럼은 '좌우' 180도에 가까울 정도로 각이 크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은 럭스와 스컹크 동료들
▲ 펑크가 가진 세계관의 스펙트럼은 '좌우' 180도에 가까울 정도로 각이 크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은 럭스와 스컹크 동료들

[포용과 묵인의 차이는 인식과 반성의 선행 여부에 있다. 거쳐야할 단계를 건너뛴 것은 포용일 수 없음에도 확성기는 종종 두루뭉술하게 이런 구호를 내뱉는다. 비단 정치구호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펑크는 한국에 인디 씬이 형성될 즈음 펑크가 붐을 이루면서 가장 먼저 매체의 주목을 받았고, 마치 인디를 대표하는 것처럼 되어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매체들이 인디·클럽 문화를 ‘젊은이들의 반항적인 분출구’ 따위로 단순화하는 데에 이용되었으며, 보수적인 음악인들은 펑크를 음악적으로는 말할 게 없는 장르로 오해했다. 그리고 팝음악을 제국주의의 무기 정도로만 인식하는 경직된 사고의 소유자들은 펑크가 세계 노동자 계급의 공용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다. 물론 펑크가 가진 세계관의 스펙트럼은 ‘좌우’ 180도에 가까울 정도로 각이 크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몇몇의 태도와 음악적 행보는 오해를 가중시켰다. 크라잉넛은 논외로 하더라도 《청년폭도맹진가》(2000)로 기성체제에 통렬한 한방을 휘두른 노브레인의 변화에는 투항이라는 비판이 가해질만했다. 하지만 선의를 가장한 선정주의와 상업주의가 상식화된 세상, 즉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전쟁과 폭력이 스펙터클로 서비스되는 문화 속에서, 녹아버린 펑크의 조각들은 충분한 표본이 되지 못한다. 거품 아래에 가려져 있던 모습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거품이 꺼져가는 동안 스컹크레이블, GMC, 타운홀레코드, 유니온웨이를 비롯하여 각 지역의 공동체들은 연대와 경쟁을 통하여 서로를 잊지 않고 서로를 잇고 있었다. 럭스(Rux)도 9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무수한 펑크밴드들 중 하나였지만, 그 진가는 붐이 잦아들고 매체의 주목도 약해진 이후에야 드러났다. 썩스터프(Suck Stuff) 역시 그랬다.

럭스의 걸작인 《우린 어디로 가는가》(2004)를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힘들어도 잘 버텨왔지만 앞으로가 문제인 걸 어떻게 또 견디라고” <부둣가>에서 토로했고, “지금껏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었건만 … 이제 와서 돌아봤더니 나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병신이라니”라며 <세상의 중심>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언제나 이 자리에서>에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나 잘 알기에 오늘도 또다시 일어선다”라고 다짐했다. 진정한 ‘대변’이었다. 신실함이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왜 진정성을 이야기하는지, 태도만 있고 음악은 없는 펑크 또한 왜 공허한지를 보여주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 럭스《The Ruckus Army》(2007)
그런데 기대하지도 못한 비평적 찬사와 주목에 럭스는 적잖이 부담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의도적으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한다. 그런 의도가 있었던 EP 《Another Conception》(2004)마저 젊은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말았으니까. 이처럼 좋든 싫든 현재의 한국 펑크를 대표하는 밴드로 지목받고 있을 때 럭스는 예기치 못한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는데, 주지하다시피 화살은 그들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라이브 클럽과 댄스 클럽을 구별하지 못한 무책임한 보도와 비난이 뒤따랐고,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클럽 일제 단속을 언급했다가 라이브 클럽으로부터 직접 와서 한번 보라는 초대를 받는 일도 있었다. 어쨌든 이슈가 아니라 음악과 행동으로 인정받았던 럭스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 앨범에 대한 기대에 “부담스럽다”고 럭스의 리더 원종희는 말해왔다. 모르긴 해도 두 번째 정규앨범 《The Ruckus Army》(2007)에는 부담이 어떤 식으로든, 최소한 의식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식으로라도 작용했을 것이다. 동료를 응원하는 <Our Life, Our Stage>이나 긴 기타 연주가 삽입된 <세상의 중심에서>는 럭스답게 음악과 메시지를 놓치지 않은 곡들이다. 미디어와 비평가들을 포함한 외부의 시선에 직접 대꾸하는 듯한 <21 & 56 & 45>도 있다. 그런데 한편에는 그들의 것이 맞는가 싶은 곡들이 적지 않다. 확신 대신 인간적 공허함을 숨기지 않고 때론 자조적 긍정으로까지 보이는 모습은 왠지 좀 여위어 보인다. 그렇다면 고집스러운 두 번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그럼에도 럭스가 어떤 단계 속에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음반을 내줄 회사가 없어 스스로 ‘스컹크레이블’을 만들고, 공연할 무대를 찾기 힘들어 라이브 클럽 ‘스컹크헬’을 스스로 세웠다. 이상은 현실과 불일치하기에 이상이다. 이 둘의 일치를 위해 스스로 토대를 만들어온 것이다. 또한 스컹크에는 럭스를 중심으로 신실한 태도와 음악적 성과를 함께 중시하는 펑크 음악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외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여전히 <Fight for Your Identity>에서 “국가를 위한 승리의 희생, 또 국가경제를 위한 교육인적자원, 이용하는 자와 이용당하는 자, 빼앗기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를 말한다. 스스로 자신을 다그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너무 너그럽거나 게을러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 썩스터프 《Rough Times Ahead》(2007)
“우린 저지당했어. 우린 반역자야”라고 노래하는 썩스터프의 《Rough Times Ahead》(2007)에는 그 아쉬움을 채우는 울림이 있다. 《City Rebels》(2006) 이후 두 번째 정규앨범인 《Rough Times Ahead》는 근래에 발표된 펑크 계열 앨범들 가운데에서 기타 리프와 멜로디, 그리고 코드의 연결이 단연 돋보인다. 럭스에서도 활동한 바 있는 미국인 청년 폴 브리키가 구성원으로 참여한 썩스터프의 연주는 이른바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면이 있다. <Rough Time Ahead>와 <Where I Belong>의 컨트리 펑크는 무척 흥미롭고, 13스텝스와 49몰핀스의 탁월한 드럼연주자였던 류명훈이 가세한 조합은 <This Wasteland>처럼 근사한 펑크연주로 이어진다.

또한 <우리 그 밑에 있다면>에서처럼 위악적이지만 분명한 어조를 지닌 유철환의 노래와 ‘비문’에 가까움에도 힘이 강한 가사의 결합은 썩스터프의 미덕이다. 단순하지만 감동적인 멜로디와 코러스가 인상적인 <선택받은 자여>는 기억할만한 펑크 곡이다. 이 결과물은 재료를 노출시킨 건축물과 같고, 핏줄을 드러낸 팔과 같다. ‘생각하는 펑크’를 강조하는 유철환은 원종희와 함께 ‘스컹크 헬’을 운영해왔으며, 그간 적극적인 움직임을 모색해왔다. 벽은 보호를 위해 존재하기도 하고 감금의 용도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그림이 걸리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벽이 치열한 음악을 태어나도록 한 것이다.

윤리를 스스로 세워야하는 원점의 시대이다. 그러다보니 경우에 따라선 방향이 모호해질 수 있고, 더구나 모호함은 포괄적인 것과 쉽게 혼동된다는 위험이 항시 존재한다. 이 문제는 현재 한국 펑크음악인들의 과제이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외부의 관점도 달라질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세상은 그들을 제대로 보려한 적이 없지만, 그들은 세상을 스스로 보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는 사실 말이다.



*나도원 _ 대중음악평론가. 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비평계로 입문했다.
지금은 <가슴> 편집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대중음악평론가협의회 회원이며, 2005 · 2006 광명음악밸리축제 프로그래머·매체팀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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