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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멈출 수 없다면 투쟁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을 모를 땐 삶의 다짐 자체가, 삶의 지속 그 자체가 투쟁일 수도 있는 것. 투쟁은 길을 묻지 승리의 가능성을 묻진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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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만인보] 유리창닦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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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
) l 2007-12-0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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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만인보] 유리창닦이
글·사진|유성문 여행작가 rotack@lycos.co.kr
출처 : <경향신문> 2007 12 03
거기 내 삶이 걸려 있다. 내 삶은 나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다른 이의 삶을 본다손 치더라도 모른 체할 뿐이다. 닦아다오. 밝은 빛조차 어둡기만한 내 눈을 닦아다오. 푸른 하늘조차 무겁기만한 내 마음을 닦아다오. 한 점 티끌 없어 차라리 시리도록 눈부시게.
겨울 유리창닦이를 보는 눈은 시리다. 고단한 삶으로 해서 시리고, 고단한 내 처지로 해서 시리다. 시간은 무상하게 흘러가버리고, 한 해의 끝에서 내일은 불투명하다. 어쩌면 가장 바라지 않은 미래가 와버릴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별 다를 건 없다. 그렇더라도 어쩌겠는가. 가릴 수 없는 현실은 바로 내 안에 있다.
유리창닦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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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논쟁] - 이념 아니라 정파 리더십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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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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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
) l 2007-12-03 19:21
https://blog.aladin.co.kr/729846193/1737663
이념 아니라 정파 리더십이 문제다
[최병천 논쟁을 우려하며] 이념 통한 대중동원은 엘리트 발상
채진원
출처 : <레디앙> 2007 11 26
최근 이런 저런 이유로 권영길 의원실과 선본 일을 그만두고 사민주의에 공감하는 이들의 폭넓은 세력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한국 사회민주주의 네트워크(약칭 ‘사민넷’, 추진위원장 유팔무)‘ 활동을 하고 있다는 최병천(존칭 생략)이 <레디앙>에 '실체 없는 ‘유령 사회주의’를 넘어 : 김종철 전진 집행위원장에게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을 제안하며'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든다. 이 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유권자들이 이런 논쟁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고,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논쟁은 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우려가 되고,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첫째로 유권자들이 이념논쟁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최병천 당원이 제기한 이념논쟁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을지라도, 최 당원이 제기한 문제의식 밑바닥에 있는 유권자들이 느끼는 이념에 대한 체감정도를 이해하는 바로미터는 될 수 있다.
유권자들 이념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
지난 11월 15일 CBS-리얼미터 조사발표에 의하면, 유권자 중 62%가 이념논쟁이 대선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즉, 이번 대선에서 대북관계 등 이념논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거의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36.1%)과 ‘대체로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25.6%)이 다수를 차지해,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61.7%로 나타났다. 영향을 줄 것으로 보는 의견은 17.4%에 그쳤다.
지지 정당별로는 민주당 지지층의 71.5%가 이념 논쟁이 대선구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응답해 가장 높았고, 그 뒤를 이어 한나라당(66.1%), 국민중심당(65.1%) 순으로 조사됐다.
반면 대통합민주신당 지지층은 55.8%로 영향력을 낮게 보는 의견이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고, 이념논쟁이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의견은 민주노동당 지지층이 24.3%로 가장 높았다.
둘째, 최병천식 문제 접근방식에 한계가 있다. 그가 이런 논쟁을 제기한 배경에는 일종의 위기의식이 있는 것 같다. 의식은 존재로부터 온 것이다. 즉, 운동권, 좌파의 위기의 원인을 자신이 생각하는 이념의 부재로 진단하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사민주의가 민주노동당에 없어서 당이 위기인가? 분명치 않다. 인과관계가 잘못되면, 정파의 위기가 당의 위기로 둔갑되고, 정파의 책임이 당의 책임으로 오인된다.
어쨌든, 최병천의 주장이 인과관계를 논하고 있지만,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증 가능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추후 논의의 한계가 있고, 따라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최 당원의 입증되지 않는 주장은 반증되기 힘들기 때문에 어떤 주장을 펼치더라도 합의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비생산적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이념 아니라 리더십이 부족
셋째, 당 위기의 진단에서도 ‘당 이념부재’가 아니라 ‘정파 리더십’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굳이 현재 당의 모습이 위기라고 진단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그 진단의 핵심은 ‘당의 이념부재’라기보다는 이념성향이 강한 소수 정파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정파일체감의 약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소수 정파들이 느끼는 ‘고립감’이 문제이고, 따라서 당 위기 원인은 이념부재가 아니라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정파 그 자체’의 문제이고 따라서 ‘정파의 리더십 부재’가 위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쉽게 말해서, 과거에는 운동권 용어로 유권자들 앞에서 잘난 척해도 씨알도 먹히고 지지를 받았는데, 이젠 안 통한다는 현실. 그렇게 잘난 척했다간, 욕만 먹고 외면 받는 현실. 괴로운 이 현실이 위기인 것이다.
넷째, 설령 최병천의 주장처럼, 몇몇 외국에서도 이른바 이념적 정체성이 혼란한 잡탕 정당을 비판하고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처방을 내렸지만 실패한 정반대의 효과를 낳은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유럽 좌파정당들이 그랬다. 이것에 대한 이해는 유럽 좌파정당들이 왜 포괄정당(잡탕정당)으로 갔는지 반증해주는 좋은 사례이다.
유럽 좌파정당들도 이념 문제로 괴로워했다. 이념을 지키고 싶었다. 이념을 지키자니, 선거에 떨어지고. 자꾸 떨어지니 정당 존립이 힘들고. 그래서 살기 위해서, 포괄정당 잡탕정당으로 간 것이다.
왜 갔을까? 과학기술과 정보혁명, 후기산업구조의 변동에 의해 노동자계급이 중산층화되면서, 유권자들의 정당일체감 약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당은 생물적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변화된 상황에 조응해야 살아남는다. 문제의 선후관계 / 인과관계를 따져보자면, 후기산업구조의 변동과 유권자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정당은 생물적 본능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이념정체성을 약화시키면서, 잡탕정당으로 갔던 것이다.
유권자와 소통하는 대중정당이 대안
다섯째, 그렇다면, 어떻게? 소통으로 무장한 리더십 그룹이 나와야 한다. 과거 운동권처럼 정파일체감이 강한 유권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또다시 이념과 계몽을 내세울 것인가? 아니면 유권자들의 변화된 인식과 상황에 맞춰 소통적 방식(매우 어렵지만, 시도해야 한다)을 채택할 것인가?
노동자계급 내의 다수의 유권자들은 정파일체감이 극도로 약하다는 점에서 매우 유동적이고, 이슈에 따라서, 정책에 따라서, 인물에 따라서 그때 그때 반응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소통적 접근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이념을 통해 대중을 불러 모으는 것은 여전히 엘리트적이며, ‘진리의 독재정’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시대착오적 방법이라 생각된다. 엘리트들 그들만의 이념논쟁, 유권자들이 볼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사민주의든 사회주의든 하나의 의견 정도로 만족하면 족하다. 유권자들이 느끼는 생활세계의 이야기를 서로 소통하는 데 적합한 것은 무엇일까? 이념보다도 생활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개성을 살피는 일일 것이다. 그들을 외롭게, 이기적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하는 따뜻한 신뢰의 공동체와 따뜻한 연대의 손짓이 필요하다.
필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민주노동당이 당내의 이념적 정파심이 강한 소수의 폐쇄적 엘리트 집단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노동자계급 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파심이 대단히 약한 다수의 유동층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그들의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는 그야말로 개방적인 ‘대중적 정당’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부정적 이미지의 정파가 아니라 소통으로 무장한 긍정적 이미지의 리더십그룹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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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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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즐링 주식회사’ - 웨스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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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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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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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 2007-12-03 17:42
https://blog.aladin.co.kr/729846193/1737499
일단,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라면 봐서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5년이 지났지만 <로얄테넌바움>의 그 끔찍했던 '가족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할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신문에 실린 리뷰를 봐서는 이 영화 역시 어느 가족의 이야기인 듯 한데, 이번에는 <로얄 테넌바움>과는 달리 해피엔딩인 듯한 암시가 보이기도 한다. 최근에 발길이 뜸했던 영화관을 이 영화 때문에라도 가야할 것 같다. 그런데, 서울까지 가야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로얄 테넌바움>에 대해서는 아래 접힌 부분 참조)
>> 접힌 부분 펼치기 >>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저 멀리 안 보이는 곳에 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 '가족'의 이야기 『로얄 테넌바움』
"지금 죽어도 영화사에 기록될 감독"이라는 칭찬과 "유아적 자기도취"라는 폄하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로얄 테넌바움』. 쿠엔틴 타란티노와 할 하틀리의 맥을 잇는, 이른바 90년대에 등단한 영화광 출신 감독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100년의 영화의 역사를 서가에 진열한 뒤 자신이 연마한 내공을 한껏 자랑하는, 쉽게 말해서 누가 더 많은 영화를 보았으며 누가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가를 겨루는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작품 대다수는 그들이 기억하는 온갖 영화들의 리스트를 교묘한 방식으로 짜집기하여 다시 그들의 영화 속으로 녹여내다 보니 영화를 마침내 심심풀이삼아 풀어보는 퍼즐이나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영화적 기억으로 가득한 낡은 스크린 안에 자신들 세대의 삶을 펼쳐보이며 사려 깊게 현실을 응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로얄 테넌바움』의 감독 웨스 앤더슨 역시 몇 번의 우회로(『바틀 로켓』,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를 거쳐 이제는 가족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따로 요약할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단순하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인 머리를 과시하는 3명의 자녀를 둔 부부의 결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20여 년 뒤 배신과 실패의 틈바구니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린 한 가족. 이들은 서로의 아픈 기억을 딛고 하나로 합쳐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단순한 가족의 이야기라... 그럼 뭐 뻔한 이야기 아니냐고? 유감스럽게도 영화는 관객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아니, 아주 불친절하다. 마치 실제 존재하기라도 하는 책인 양 한 챕터(Chapter)씩 넘기듯 전개되는 『로얄 테넌바움』은 왠만한 관객이라면 30분을 못넘기고 하품이 나오게 만들 수도 있는, '괴팍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타블로(tableau)들의 퍼레이드로 일관하는, 여백 하나 없는 질리도록 꼼꼼한 미장센도 그러하거니와 오언 윌슨과 웨스 앤더슨이 함께 쓴 각본은 도무지 관객이 안심하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순간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쇼트는 잘게 쪼개져 있으나 영화의 호흡은 롱테이크 화면처럼 흐느적거린다. 구성요소들을 뜯어서 설명할수록 영화의 내용(?)에서는 자꾸만 멀어지는 이상한 영화가 바로 『로얄 테넌바움』이다.
아, 그렇다고 영화가 무지 심각하다거나 난해한 건 결코 아니다. 편안하고 쉽지도 않고 심각하거나 난해하지도 않은 영화? 그럼 도대체 뭐냐고 반문해도 할 수 없다. 영화를 보라고 말할 수밖에...
진 핵크만, 기네스 팰트로, 안젤리카 휴스톤(『아담스 패밀리』의 그 엄마), 벤 스틸러(『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의 얼빵한 주인공), 빌 머레이(『미녀 삼총사』의 미녀들을 조종하는 그 복받은 넘), 대니 글로버(『리셀 웨폰』), 오웬 웰슨, 루크 웰슨. 여기다 알렉 볼드윈의 나레이션까지. 그야말로 초호화판 배역이다.
이 8명의 배역은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균형잡힌 비중을 보인다. 그럼에도 8명 각각의 캐릭터는 뚜렷하게 설명되고 있어 헷갈리거나 영화의 흐름을 놓치거나 할 염려는 없다. 제각기 한가닥 한다는 스타들을 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각자 맡은 연기에만 최선을 다하도록 묶어낸 것에서 다시 한번 감독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명의 스타들이 참여하면서도 균형 잡히고 세련된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역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숏컷』이나 현재 개봉중인 『고스포드 파크』를 보면 영화가 감독의 예술임을 새삼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럼에도 이 '불친절한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먼저 영화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엔 신경쓸 필요가 없다. 지금 당대의, 뉴욕의 이야기이지만 회화적 색채로 가득찬 화면이나 찌그러지고 색이 바랜 택시들을 비롯한 영화의 소품들은 자주 영화의 시공간을 헷갈리게 만드니까.
다음으로는 3자녀의 스타일(패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채스, 마고, 리치의 패션스타일은 확고부동하다. 지들이 무슨 스머프도 아니면서 영화 내내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온다. 물론 평론가적으로 해석하자면 아주 심오한 의미가 있다. 그들이 어린 시절에 겪은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고,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장녀 마고 테넌바움(기네스 펠트로)은 입양된 딸이다. 희곡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한 극작가이지만, 아버지 로얄이 입양한 사실을 대놓고 주위에 까발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이런 그녀의 심적 혼란은 분열을 상징하는 듯 마고의 패션은 지극히 언밸런스하다.
체크무늬 원피스에 심플한 로퍼 모피, 옆가르마의 단발머리에 빨간 핀을 단정하게 꽂은 소녀스러운 모습과 눈가를 까맣게 떡칠하고 담배를 피우는 퇴폐적인 모습이 공존하는, 겉으로는 바른 생활 소녀로 비춰지지만 알고 보면 매우 타락한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적인 모습(20여년 동안 담배를 피우는 골초지만 아무도 심지어 그녀의 남편조차 모른다)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둘째 채스 테넌바움(벤 스틸러)은 어릴 때부터 사업분야에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사업자금을 횡령하자 로얄을 고소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엄청나다. 게다가 아내는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일찍 죽어버렸다. 그런 그의 성격은 빨간색 아디다스 츄리닝에 파란색 퓨마 운동화로 표현된다(그의 아들 둘도 똑같은 패션이다. 삼부자가 맞춰입은 빨간 아디다스 츄리닝, 파란색 퓨마 운동화, 앙증맞은 파마머리가 가져다주는 웃음의 향연!). 영화내내 그 빨간색이 풍기는 촌스러움과 엉뚱한 행동으로 영화에서 가장 많은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이는 채스가 무언가 자기 세계에 빠져 있다는 고립감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아내의 죽음 이후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온갖 민방위훈련(?)을 실시하는 등 품 속에서 아이들을 풀어주는 일이 없을 정도로 융통성이 없으며, 회사도 집안에 차릴 정도다.
셋째 리치 테넌바움은 세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식으로 묘사된다. 유명한 테니스 스타이지만 입양된 누나 마고를 사랑한다. 남매끼리의 사랑? 그래서 리치는 헤어밴드와 아대, 스포츠 티셔츠에 양복을 입은 상식 밖의 모습으로 설정된다. 언뜻 보면 완전히 히피 스타일이다. 양복에 스포츠 티셔스. 글쎄, 남매간의 사랑이 상식밖이긴 하지만. 그러나 리치 스타일의 압권은 아무래도 마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머리와 수염을 깎고 손목을 그을려는 순간에 보여주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외에도 영화에서 심어놓은 암시와 은유는 꽤 많지만, 감독이 인용한 영화를 따라가는 퍼즐 게임이 아니라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어떤 인터뷰에서 웨스 앤더슨은 "책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한 편의 책이 되는 고급스러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는데, 그의 이 바램은 거의 100% 성취된 거 같다.
어쨌거나 『로얄 테넌바움』은 그 평가가 극명하게 대비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둘도 없는 걸작품의 목록에 올려 놓든지, 따분하고 지루하고 황당한 영화였다는 식으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든지. 그리고 이건 결국 영화를 보는 각자의 안목이 좌우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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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불경스러움'을 시비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저의 생각이 아니라 『 하나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단순한 기표적 의미보다는 그 상징성을 고려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 펼친 부분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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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다즐링 주식회사’
- 삶의 가치를 찾는 삼형제의 로드 무비 -
장원수기자 / 온라인뉴스센터
출처 : <경향신문> 2007 12 02
거의 죽을 뻔한 오토바이 사고 후 맏형 프랜시스(오언 윌슨)는 ‘자기 자신을 찾고, 형제애를 다지기 위해’ 두 동생에게 인도여행을 제안한다. 아내가 임신하자 (그녀를) 사랑하지 않음을 알고 이혼을 도모하는 둘째 피터(애드리언 브로디), 이전 애인의 자동응답기를 도청하는 막내 잭(제이슨 슈왈츠먼). 삼형제는 아버지가 남겨준 11개의 루이비통 트렁크를 들고 기차에 오른다.
‘다즐링 주식회사(The Darjeeling Limited)’는 위기의 세 형제가 연고도 없는 인도에서 필사적으로 ‘정처 없이 거닐기’를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도에서 수행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알리기 위함이지만, 큰 형은 참된 나를 찾기 위한 ‘영적 순례’라고 말하고, 둘째는 임신한 아내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여성 편집증’ 막내의 관심은 온통 아름다운 기차 여승무원뿐이다. 이렇듯 왜 인도 여행을 하는지,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지 모른 채 형제들은 온갖 사고, 해프닝을 겪는다.
사실 형제가 며칠동안 붙어 다니면 싸움밖에 하지 않는다. 이들 형제도 예외 아니다. 날카로운 언어의 창끝은 서로의 상처를 헤집고, 오해는 불만을 쌓게 한다. 잭의 “현실에서 형제가 아니라면 인간적으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말대로 형제가 아니라면 친구도 되지 않았을 사이. 너무나도 개성이 다른 삼형제는 서로에게 ‘미안해’라는 한마디를 하지 못한 채 기차에서 쫓겨난다. 같이 기차여행을 하던 독일 여성이 ‘콩가루 형제들’라며 손가락질 하는 것을 뒤로 하고.
형제간의 믿음도 깨어지고, 원대한 계획도 틀어지려는 순간, 이들은 개울에 빠진 아이들을 구해준다. 하지만 아쉽게 한 아이의 목숨을 살리지 못한 삼형제는 아이의 장례식에 초대받는다. 주변의 사소한 일에서 삶과 죽음, 찾고자했던 길을 어렴풋이 알게 된 형제들은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내려 어머니가 있다는 사원으로 향한다.
영화는 따뜻하면서도 유머가 있으며 시종일관 경쾌하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어수선하고 불협화음의 삼형제는 여행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게 되고, 갖은 고생 끝에 다시 원위치에 선다. 그렇지만 형제간의 신뢰는 여행 전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돈독해졌다.
‘로얄 테넌바움’의 웨스 앤더스 감독이 프로듀서 로만 코폴라, 배우 제이슨 슈왈츠먼과 함께 인도여행 경험을 살려 ‘삼형제의 유쾌한 행복 찾기’를 만들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12분짜리 단편영화 ‘호텔 슈발리에’를 볼 수 있다. 막내 잭과 그의 여자친구로 나오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깔끔하면서도 신선하다. 13일 개봉.
다즐링주식회사웨스앤더슨로얄테넌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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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 춤에 반했지? - ‘헤어스프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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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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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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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 2007-12-0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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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 춤에 반했지?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
김소민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02
»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
1960년대 배경 십대 ‘뚱보’ 소녀의 티브이쇼 입성기
‘비주류’들 유쾌한 자기긍정 춤판에 관객도 ‘덩실’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는 가공할 만한 자기 긍정의 힘을 보여준다. 영화 속 비주류 인물들의 정서는 대충 이렇다. “나 뚱뚱하고 키 작고…. 그게 어쨌다고. 그럼 그렇지 너도 나한테 반했구나.” 칭찬은 고래를 춤 추게 하고 ‘대책 없는’ 낙관은 10대 뚱녀 트레이시, 그런 유전자를 트레이시에게 전수한 장본인 엄마 에드나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긍정의 엑스터시 판에 뛰어들게 만든다.
보통 사람들이 매일 자학할 거리를 꾸러미로 안기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토록 올바른 힘을 갖는 건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기에 <헤어스프레이>는 판타지에 가까운 2시간의 짧은 해방구다. 아무렴 어떤가. 관객은 음악·춤과 어우러진 이 환타지에 참여하길 주저하지 않아 1988년 존 워터스 감독이 만든 원작 영화 <헤어스프레이>는 대박을 쳤고, 2002년엔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태어났다. <웨딩플래너>의 감독 아담 쉥크만이 만든 이번 영화도 올 여름 대작들 틈바구니에서 개봉해 1억2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
1960년대 방식 그대로 머리를 산처럼 세운 10대 트레이시(니키 블론스키)는 첫 장면부터 조증 상태처럼 보인다. 볼티모어 거리를 거닐며 “매일 아침은 기회로 반짝이고 매일 밤은 환타지로 가득 차 있다”고 노래한다. 그가 하루라도 놓치고는 못사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코니 콜린스 쇼>다. 늘씬 미녀 미남들이 최신 춤을 추는 프로인데 트레이시는 모든 스탭을 섭렵한 지 오래다. 콜린스 쇼에서 댄서를 한명 더 뽑게 되니 트레이시의 눈에 불 켜졌다. 엄마 에드나(존 트라볼타)는 딸이 상처 받을까 말려보지만 그 말을 들을 트레이시가 아니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호락호락하겠나. 방송국 매니저인 벨마(미셸 파이퍼)는 금발에 미인대회 수상자인데 흑인이나 못생긴 여자는 질색이고, 자기를 꼭 닮은 딸 엠버를 스타로 만들 궁리밖에 안한다. 쇼 제작진 앞에서 오디션을 보는 날, 트레이시를 벨마는 어이없게 쳐다보는데, 그 눈빛을 트레이시의 친구 페니는 이렇게 독특하게 해석한다. “너한테 완전히 빠졌구나.” 트레이시의 역동적인 춤솜씨에 다른 스태프들이 반하는 바람에 트레이시는 쇼에 입성한다. 그런데 이 쇼에서도 춤 잘 추는 흑인들이 되레 차별당하니, 정의의 트레이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영화 속에서 흑인, 뚱보 등 미국 사회 비주류는 모조리 반짝이는 별인 반면 주류는 창피한줄 알아야 하는 비웃음거리다. 빨래방을 운영하며 오줌 자국을 빼느라 진땀을 빼는 엄마 에드나(존 트라볼타)는 뚱뚱해서 20년 동안 외출을 삼갔다. 아버지 월터(크리스토퍼 월킨)는 에드나가 자기를 꼬시는 줄을 5년 뒤에야 알아챘을 정도로 눈치가 없다. 그는 “나는 꿈을 이루었다”고 말하는데 그 꿈이 작은 장난감 가게를 열고 똥 모양 초콜렛 등을 파는 것이다. 하지만 비쩍 마른 월터와 월터의 두배는 돼 보이는 에드나가 빨래 더미 앞에서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는 거의 위대할 정도로 아름답다. “당신은 냄새 나는 치즈, 나에겐 숙성된 맛으로만 느껴져. 당신의 머리는 계속 빠지고 나는 계속 뚱뚱해지겠지만 당신은 나에게 세월을 뛰어넘는 존재….” 이런 괴짜 비주류 정서에 “평등은 거저 주어지지 않으며 이를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는 도덕 교과서 같은 주제를 직설적으로 버무린다.
<헤어스프레이>에는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오로지 못된 소수의 탓으로 덤터기 씌워버리는 단순화의 함정도 있다. 흑인 차별을 주도했던 게 진정 벨마 등 일부 소수였을까? 대중은 이 혐의로부터 자유로울까? 그런 의문이 들어도 화끈한 드레스를 입은 엄마 존 트라볼타가 30년 전 뮤지컬 <토요일밤의 열기>에서 보여줬던 만큼 유연한 웨이브는 아니더라도 <유 캔트 스탑 더 비트>에 맞춰 춤출 때 밀려오는 흥은 막을 도리가 없다. 6일 개봉.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케이디미디어 제공
화끈한 그녀가 ‘존 트라볼타’라고?
» 존 트라볼타
영화 <헤어스프레이>는 미셸 파이퍼, 크리스토퍼 월킨 그리고 1000대 1의 경쟁을 뚫었다는 트레이시역의 니키 블론스키 등 배우들의 딱 맞게 수위 조절한 코믹 연기가 압권이다. 그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것은 14킬로그램 짜리 살덩이 옷을 입고 엄마 에드나로 등장한, 올해로 53살의 존 트라볼타다.
엄마 에드나 역할은 전통적으로 기괴하고 목소리 걸걸한 남자 배우들이 맡았다. 트라볼타는 약간 더 사랑스럽고 다소곳한 에드나다. 원작 영화에서는 한번 보면 잊혀질 수 없이 괴상한 남자인 해리스 글렌 밀스테드(일명 디바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선 하비 피어스테인, 내년 2월17일까지 한국에서 공연하는 뮤지컬엔 정준하가 이 역을 맡았다. 존 트라볼타는 리처드 기어가 맡았던 <시카고>의 빌리 플린역을 마다하고 에드나가 됐다.
원작을 만든 존 워터스 감독은 원래 따뜻한 가족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독이었다. 그는 디바인과 함께 개똥을 먹는 장면 등이 들어가는 지저분하고 광기어린 영화들을 양산했다. 트레이시역은 신인이나 알려지지 않는 배우에게 맞기는 게 전통이어서 원작에선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리키 레이크, 뮤지컬에선 마리사 위노커가 맡았다. 김소민 기자
헤어스프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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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트라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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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블론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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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요 - 유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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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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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 2007-12-02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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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요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지킨 활달한 문장가, 유몽인
▣ 이덕일 역사평론가
출처 : <한겨레 21> 제685호 2007년 11월 15일
유몽인(柳夢寅)은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던 선조 22년(1589) 서른한 살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에서 장원급제함으로써 관직에 발길을 들여놓는다. 장원급제한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어우야담>(於于野談)이란 야사집을 펴낸 데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가치관에 머물지 않는 인물이었다. 문장가로 자처한 그가 문장에 대해 논한 글을 보면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이수광을 전송하는 글’에서 “시(詩)에는 귀신이 있는데 이름이 마(魔)이다. 그 성질은 가난, 곤궁, 질병, 방랑 등은 좋아하지만 화려, 부귀, 자신만만하고 득의에 찬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그의 호 역시 성격을 잘 보여준다. 홍만종은 <순오지>(旬五志)에서 “김시습의 청한자(淸寒子)나 유몽인의 어우자(於于子)는 자신들이 숭상하는 것을 호(號)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어우(於于)란 <장자>(莊子) ‘천지’(天地)조에 나오는 말로서 밭을 돌보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공자를 빗대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於于以蓋衆)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 아닌가(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라고 비웃으며 ‘밭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조롱한 데서 나온 말이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공자를 비웃은 장자의 한 구절로 자호(自號)한 데서 그의 기질이 우뚝하다.
△ 유몽인이 파직된 뒤 머무른 금강산 유점사와 그가 지은 <어우야담>.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잃지 않았다. (사진/ 권태균)
광해준 즉위에 일조하며 승승장구
유몽인은 15살 때 판관 신식의 딸과 혼인했는데, 신식의 며느리가 우계 성혼(成渾)의 딸이었기 때문에 잠시 성혼에게 가서 공부한다. 성혼은 서인들이 종주로 삼는 학자로서 유몽인으로서는 서인이 될 기회였지만 그에게 성리학은 잘 맞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서 유몽인이 “젊었을 때 성혼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가르침을 잘 지키지 않고 행실이 경박하자 꾸짖고 끊어버렸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장자처럼 활달한 처신이 성리학자의 눈에는 경박하게 보였을 것이다.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만에 임진왜란을 맞았을 때 그는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가 있었다. 귀국 뒤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정6품)로서 광해군을 보좌해 적진을 헤집고, 암행어사로서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 생활도 돌본다. 임진왜란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던 형이 일본군에게 죽는 큰 아픔도 이때 겪지만 나아가 기존의 가치관으로는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가 <어우야담>에 양반뿐만 아니라 많은 평민·노비들의 이야기와 함께 기독교에 관한 기록인 ‘기리단’(伎利檀)에 대해서도 쓴 것은 이때의 충격이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의식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선조 32년(1599) 유몽인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임명되는데, 이때 사관은 ‘문장이 단아하고 도량이 있었다’(文雅有餘)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 35년(1602) 경연 시강관(侍講官)으로 있던 그에 대해 사관은 “문재는 있으나 식견과 역량이 없었다’(有文才, 而無識量)라고 정반대로 평하고 있는데, 이는 당론의 시각에서 적었기 때문이다. 정작 유몽인은 이정귀(李廷龜)가 북경에 갈 때 써준 글에서 “조정의 사론(士論)이 나뉜 뒤부터 붕우의 도를 평생 보전할 수 있게 되었는가? 벗 사귀는 도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둘로 나뉘었는가? 둘도 불행하거늘 어찌하여 넷이 되고 다섯이 되었는가?”라고 비판한 것처럼 당론에 비판적이었다. 유몽인은 선조 41년(1608) 1월28일에 도승지가 되어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 일조한다. 다음달 1일 선조가 세상을 떠나는데, 이 무렵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세자 광해군 대신 어린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하려고 획책하면서 조정에 큰 파란이 일고 있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영경이 “오늘의 전교는 여러 사람들의 뜻밖에 나온 것으로 신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반대하고 군사를 동원해 궁궐 안을 호위하며 비상시를 대비했다고 전한다. 이런 비상시국에 유몽인은 도승지로서 세자시강원 때부터 여러 번 모셨던 광해군이 즉위하는 데 일조한다.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는 시?
이런 연유 때문인지 광해군 시절 유몽인은 집권 북인(北人)의 유력인사로서 승승장구한다. 예조참판, 대사간 등의 요직을 역임하던 그는 광해군 7년(1615) 이조참판이 되어 광해군 10년(1618)까지 인사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집권 대북(大北)이 인목대비 폐위에 나서면서 그는 다른 길을 걷는다. 정인홍과 이이첨 등 대북에서 폐모론(廢母論)이 나오자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鄭蘊)이 사제의 연을 끊으며 폐모론에 반대하는데, <당의통략>은 이때 ‘유몽인이 정온을 도와서 중북(中北)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인 중에서는 영의정 기자헌 정도가 폐모론을 반대하고 귀양길에 올랐고, 대부분의 북인들이 이른바 대론(大論), 또는 대절(大節)이라는 명분으로 폐모를 밀어붙일 때 유몽인은 반대쪽에 서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 10년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고 있던 유몽인이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인목대비 폐모 이후 인심이 흉흉해져서 역모 고변이 잇따르는 상황에서였다.
안처인(安處仁)·안후인(安厚仁) 형제가 관련된 역모가 고변되어 시끄럽던 그해 4월 유몽인은 처사촌 정회(鄭晦)와 남산 기슭에 올라 봄 경치를 즐겼다. 술 마시며 놀다가 소녀가수인 은개(銀介)를 불러 노래를 듣는데, 하인이 달려와 추국(推鞫)에 참석할 시간이 되었다고 일렀다.
“이처럼 좋은 시절에 어떤 도깨비 같은 자가 감히 익명(匿名)으로 고변하여 나에게 이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유몽인은 가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가면서 중얼거리던 시를 국청에서 붓으로 옮겨썼는데 이 시가 문제였다.
△ 유몽인위성공신교서. 조선 광해군 5년(1613) 3월에 임진왜란 때 왕세자인 광해군을 보좌한 공으로 유몽인에게 위성공신 3등을 내린 교서이다.(사진/ 권태균)
“성 안에 가득한 꽃, 버들과 봄놀이 즐기는데/ 옥같이 고운 손, 잔을 놓고 백주장을 부르네/ 장사가 홀연히 장검을 짚고 일어서/ 취중에 늙은 간신의 머리 찍으려 하네.”(滿城花柳擁春遊, 玉手停盈唱栢舟, 壯士忽持長?起, 醉中當斫老姦頭)
문제의 시어는 ‘백주’(栢舟)와 ‘늙은 간신’(老姦)이었다. 백주는 <시경> ‘용풍’에 위(衛)나라 세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어 부모가 그 처 공강(共姜)을 개가시키려 하자 ‘백주’(栢舟)를 지어 절개를 맹세했다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백주지통(栢舟之痛), 백주지절(栢舟之節) 같은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나왔다. 즉 유몽인이 폐모된 인목대비의 고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었다. 늙은 간신은 인목대비 폐위를 밀어붙인 대북의 대신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유학 이시량(李時亮)이, ‘백주(栢舟)의 비유와 노간(老奸)의 설(說)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자세히 조사하여 부도한 죄를 다스리고, 패거리를 곡진히 비호하며 즉시 신문할 것을 청하지 않은 양사(兩司·사헌부, 사간원)의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라고 상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유몽인은 광해군에게 백주는 자신이 아니라 은개가 부른 것이며, 늙은 간신은 변을 일으킨 안처인 형제 등을 일컬은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동시에 자신이 현재의 옥사(獄事)에 대해 살펴보니 대단한 것은 아닌 듯했다면서, “어떤 자가 이런 재앙을 만들어내어 100명씩이나 연루되는 옥사가 이루어졌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광해군에게 토로했듯이 대북 일당 전제의 경색된 정국에서 잇따르는 옥사에 불만을 가졌음도 시인했다. <연려실기술>은 유몽인이, “숟가락이 남보다 조금 큰 것만 보면 반드시 고변했다”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광해군은 사직을 청하는 유몽인에게 “아경(亞卿·참판)은 건성으로 처리할 직임이 아니고 국청은 시를 짓는 장소가 아니다. 일이 해괴하기 그지없으니 물러가 공의(公議)를 기다리라”라고 일단 유보적인 조치를 취했다.
양사에서는 계속 유몽인의 파직을 요청했고 결국 그해 7월 체차되고 말았다. 광해군 12년(1620) 8월 원접사(遠接使) 이이첨(李爾瞻)이 김상헌·장유 등 서인계 인물들과 함께 유몽인이 ‘문예(文藝)에 매우 뛰어나다’며 다시 등용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예문관 제학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출사하지 않았다. 비변사에서는 광해군 13년(1621) 8월 “유몽인을 출사시키든지 체차하든지 어떠한 조처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라고 양자택일을 요구했고, 유몽인에게 마음이 떠난 광해군은 체차시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달 유몽인은 63살 고령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이때 그는 “신선과 부귀를 모두 갖기는 어렵네/ 세월은 흐르고 인간 세상의 계책은 어그러졌네”(神仙富貴兩難諧 流水人間計較乖)라고 속세를 떠나 출가하는 심정을 밝히는 시도 썼다. 금강산에서 혹독한 병을 앓으며 한겨울을 난 유몽인은 이듬해(1622) 서쪽의 보개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해 정변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했다. 유몽인은 이때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지난 가을 구월 내가 금강산에 들어온 것은 노년을 마치고자 함이었다. 지난 10월에 집안사람들이 서울에서 산사로 온 것은 나의 위중한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4월 금강산을 떠나 서쪽으로 온 것은 식량 때문이다. …도중에 구군(舊君)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내가 크게 놀라지 않은 것은 이미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보개산 영은사의 두 승려에게 주는 글’)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킨다
광해군 때 배척받았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 벼슬자리를 구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달랐다. 영은사의 두 승려가 “지금 새로운 성군께서 나라를 다스리자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시장에 몰려드는 것 같은데, 왜 중로에 배회하십니까?”라고 묻자 “내가 산에 들어온 것은 세상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라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지금 산을 떠나는 것은 관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며 역시 출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소극적으로 출사만을 거부하는 것으로 광해군에게 절개를 바친 것이 아니었다. 인조 즉위 석 달 뒤인 인조 1년(1623) 7월 선산이 있는 양주(楊州)로 내려가 있던 유몽인에게 금부도사가 들이닥쳤다. 그의 아들 유약 등과 함께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혐의였다. 유몽인은 국문에서 아들이 자신이 지은 ‘청상과부의 탄식’이란 ‘상부탄’(孀婦歎)을 좋아해 일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키는구나/ 사람마다 개가를 권하는데/ 무궁화 꽃 같은 멋진 남자였네/ 여사의 시 자주 들었기에/ 태임(太妊·주 문왕의 모친)·태사의 훈계 조금은 알았지/ 흰 머리에 젊은 얼굴로 단장한다면/ 어찌 분가루에 부끄럽지 않겠는가.”(七十老孀婦, 單居守閨?, 人人勸改嫁, 善男顔如槿。 慣聽女史詩, 稍知妊?訓,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인조는 ‘무궁화 꽃 같은 남자’지만 자신은 끝내 광해군에게 절개를 지키겠다는 뜻의 시였다. 조익(趙翼·1579~1655)의 문집인 <포저집>(浦渚集)에는 이때 묘당(廟堂·조정)에서 만든 통유문(通諭文)이 실려 있다.
“지난해 7월에 역적 유전 등이 맹약한 글이 고발되었을 적에, 그 글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의 이름이 거의 40명에 달하였는데, 기자헌(奇自獻)이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그중에 유몽인은 도망쳤다가 잡혀왔는데, 형신을 많이 받지 않고도 모의한 사실을 일일이 자복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시를 공술하면서 폐주(廢主)를 위해 복수하려 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사형된 뒤 정조 때에야 복권돼
유몽인에게 인조반정은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일 뿐이었다. 자신은 비록 광해군 말년 조정을 떠났지만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것은 삼강(三綱)의 군위신강(君爲臣綱)이나 오륜(五倫)의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평생 장자를 좇았던 그가 불의한 현실에 유자의 사생관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반정정권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유몽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괄의 난을 겨우 진압한 인조 2년(1624) 11월 반정 일등공신 이귀(李貴)가 인조에게, “유몽인이 한 번 백이(伯夷)에 관한 설을 주창하자 학식이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화답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서인들의 쿠데타에 불만을 품은 많은 인사들은 유몽인이 백이숙제처럼 광해군을 위해 절개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유몽인은 정조 18년(1794)에야 복권되는데, 정조는 유몽인에 대해 “혼조(昏朝·광해군) 때는 바른 도리를 지켜 은거하였고, 반정(反正)한 후에도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국조보감>)라고 그 절개를 높이 사고 있다. 한마디로 참선비의 처세란 뜻이다.
유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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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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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화
2013-03-3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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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學의 先驅的 선비 柳夢寅 국외자가 되어야 했던 於于公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실용 주의자였고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개화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는데 그 싱용주의는 곧 양반도 노동을 해야한다는 론리를 펼치니 성리학에 쩌든 머리를 갖인 기득권자들이 가만 놓아둘리 없었지 , 광해군이 세자때부터 그의 문학으로 있으면서 실용주의 철학을 철저히 주입하였고 광해군이 실각 하지 않았더라면 후금과 함께 명나라를 정벌하여 수백년내 중국에 밭치던 조공이 페지 되고 자주독립 국가로 웃뚝 섰을것이다 허나 사대주의 사상에 쩌들은 조선의 선비들은 명나라와 후금, 양다리 외교를 트집잡아 구테타로서 광해군을 축출하였으니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의 뜻있은 선비들은 거이다 낙향하고 뒤이어 권력을 탐하는자들이 영남과 호남에서 올라와 벼슬자리에 앉아 정파싸움에 열중하니 나라의 운명은 기울기 시작하였다.
實學의 先驅的 선비 柳夢寅 국외자가 되어야 했던 於于公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실용 주의자였고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개화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는데 그 싱용주의는 곧 양반도 노동을 해야한다는 론리를 펼치니 성리학에 쩌든 머리를 갖인 기득권자들이 가만 놓아둘리 없었지 , 광해군이 세자때부터 그의 문학으로 있으면서 실용주의 철학을 철저히 주입하였고 광해군이 실각 하지 않았더라면 후금과 함께 명나라를 정벌하여 수백년내 중국에 밭치던 조공이 페지 되고 자주독립 국가로 웃뚝 섰을것이다 허나 사대주의 사상에 쩌들은 조선의 선비들은 명나라와 후금, 양다리 외교를 트집잡아 구테타로서 광해군을 축출하였으니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의 뜻있은 선비들은 거이다 낙향하고 뒤이어 권력을 탐하는자들이 영남과 호남에서 올라와 벼슬자리에 앉아 정파싸움에 열중하니 나라의 운명은 기울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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