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과 FBI가 입국을 막은 '불온한 좌파'
[토요연재-반역의 레코드] 존 레논, 오노 요코 <언젠가 뉴욕에서>

장석원 객원기자
출처 : <레디앙> 2006년 12월 09일


“혁명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 존 레논 (1971년 타리크 알리, 로빈 블랙번과의 인터뷰)

 
"Some Time in New York City"
John Lennon & Yoko Ono
1972년
Disc 1
1.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2. Sisters, O Sisters
3. Attica State
4. Born in a Prison
5. New York City
6. Sunday Bloody Sunday
7. The Luck of the Irish
8. John Sinclair
9. Angela
10. We're All Water
Disc 2 - Live Jam
1. Cold Turkey
2. Don't Worry Kyoko
3. Well (Baby Please Don't Go)
4. Jamrag
5. Scumbag
6. Au
12월 8일은 존 레논의 기일이다. 그가 뉴욕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살해당한 것이 1980년이니 올해로 26주년이 된다. 추모를 겸해 그의 활동 기간 중 발표한 작품 중 가장 급진적인 앨범인 1972년작 '언젠가 뉴욕에서Some Time in New York City'를 소개한다.

우선 이 음반은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부부의 ‘합동작품’이다. 둘은 1968년과 69년에 모두 3장의 실험음악 앨범을 공동명의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음반들에 담긴 음악은 전위적인 음악가들조차도 당혹스러워할 만한 것들이었다.

더 많은 대중들이 듣기를 기대하고 만든 음악은 처음부터 아니었던 셈이다. 이후 이들 부부는 서로의 녹음 과정에 함께 했지만 자기가 만든 노래는 자기 이름의 앨범에 모아서 발표했다.

'언젠가 뉴욕에서'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함께 작곡한, 혹은 서로의 작품을 하나의 레코드에 담은 최초의 작품집이다. 녹음에는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밴드인 ‘엘레판트 메모리 밴드’가 동원됐다.

또한 이 앨범은 이들 부부가 1971년 9월 급작스럽게 영국으로부터 뉴욕으로 거주지를 이전한 후 제작한 첫 번째 작품이다. 존 레논은 살 곳조차 정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이 영국을 떠났다.

주된 이유는 이들 부부의 재혼 후 일본인인 오노 요코에게 쏟아진 영국인들의 인종주의적인 편견이었다. 여기에 군주제가 여전히 살아있는 계급사회 영국의 숨 막히는 답답함이 존 레논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땅’을 찾는 보헤미안처럼 떠나게 만들었다.

행선지가 뉴욕이었던 이유는 재혼하기 전 오노 요코가 예술활동을 벌이던 무대이기도 하고, 존 레논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시대의 로마'가 바로 뉴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로마는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었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영주권을 획득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FBI와 닉슨행정부는 이 ‘불온한 좌익인사’가 미국에 둥지를 트는 것을 결코 용인 할 수 없었다.

이민국은 60년대 레논의 약물관련 체포혐의를 들어 영주권은 고사하고 미국으로부터 추방할 것을 결정했다. 이때부터 시작한 법정투쟁은 1975년 레논 부부의 승리로 끝났다. 추방명령을 둘러싼 4년간의 투쟁은 얼마 전 '미국정부 대 존 레논The U.S. Versus John Lennon'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개봉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가 존 레논을 국외로 내쫓으려고 기를 쓴 이유는 물론 그의 약물관련 전과 때문이 아니다. 비틀즈의 멤버라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을 베트남 반전운동이나 좌익활동에 결합시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존 레논이 공항에 내린 날 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FBI는 그가 미국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들이 애비 호프만이나 제리 루빈 같은 신좌익운동의 지도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레논 부부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내놓은 앨범이 당시까지의 대중음악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선동가요집이니 미국정부가 얼마나 경악했을지 짐작이 간다.

 
▲ 지난 가을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미국정부 대 존 레논"의 포스터.
앨범의 첫 곡은 성차별주의를 다룬 ‘여성은 세상의 깜둥이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이다. 앨범에서 유일하게 싱글로도 발매된 곡이지만 제목의 ‘깜둥이’라는 단어가 논란이 되어 많은 방송국에서 거부당했다.

존 레논은 흑인은 몇몇 나라에서만 인종차별을 받지만 여성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차별당함을 지적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노랫말 자체가 맘에 안 드는 방송국 입장에서는 좋은 핑계거리였던 셈이다.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다, 그녀가 노예이기를 거부하면 우리(남성)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질책한다, 만약 그녀가 현실을 직시하면 남자가 되려고 애쓴다고 비난한다.” 발표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노래가 묘사하고 있는 광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어지는 곡도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자매들에게Sisters, O Sisters’는 오노 요코가 만든 페미니즘 행동주의의 찬가다. 70년대 초반 오노 요코는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그가 '언젠가 뉴욕에서'에 바로 이어 발표한 솔로 앨범 '아마도 끝이 없는 우주Approximately Infinite Universe'는 지금도 페미니즘 락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아티카 주립교도소Attica State’는 1971년 발생한 아티카 교도소 폭동사건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다. 아티카는 뉴욕의 주립교도소로 알카트라즈 이후 나쁜 의미에서 가장 유명한 수용시설이었다.

폭동 당시 이미 흑인과 남미계 수형자의 비율이 60%를 넘어갔고 인종차별과 인권 유린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결국 작은 사건이 불씨가 돼 교도소가 수형자들에 의해 점령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화당 소속의 넬슨 록펠러 주지사는 협상보다 경찰 투입을 선택했고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언론은 “하루 동안의 무력충돌로는 남북전쟁 이후 최대, 최악의 규모”라고 평했다.

사건 이후 “아티카”라는 구호는 경찰의 폭력성을 상징하게 됐다. 존 레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아티카 교도소’라고 노래하고 있다. 무자비한 폭력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당신이 운동에 동참해 인권의 기준을 높이는 것” 뿐이라고 역설한다.

레논의 시각을 이어받아 오노 요코 역시 “우리는 감옥에서 태어나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에 보내지고 결국 감옥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고 주장한다. (‘감옥에서 태어나Born in a Prison’) 이 앨범은 같은 주제를 놓고 남편과 아내가 하나씩 만든 노래가 계속 짝을 이루고 있다.

다음 주제는 아일랜드 해방투쟁이다. ‘피의 일요일Sunday Bloody Sunday’은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주일미사를 마치고 시민권 행진을 벌이는 가톨릭계 주민들을 영국 공수부대가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아일랜드인들 뿐만 아니라 영국인들에게 충격을 준 이 사건에 격분한 존은 단숨에 영국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를 담은 곡을 완성했다.

“너희 앵글로색슨 돼지들이 북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만들고 피 묻은 유니온 잭을 자랑스럽게 흔들지만 (...) 아일랜드를 아일랜드인에게! 영국놈들은 바다로 쓸어버리자!”

아일랜드 해방투쟁과 아일랜드공화군IRA에 대한 그의 연대의식은 다음 노래 ‘아일랜드인의 운명The Luck of the Irish’에서도 이어진다. 이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라드이지만 가사는 슬프다 못해 처절한 느낌마저 준다. “당신이 아일랜드인의 운명을 타고 났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길 겁니다. 다음 생에는 영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어 하겠지요. (...) 세상에 영국인 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학살을 저지르고, IRA와 아일랜드 꼬마들에게 죄를 덮어씌웁니다.”

영국 정보국은 존 레논이 IRA에 자금을 제공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추정’을 미국의 정보국에 제공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를 입증할 증거는 발견된 것이 없다. 설혹 그가 아일랜드의 무장투쟁에 연대선언 이상의 물질적 지원을 했다 하더라도 영국 정부는 뭐라 할 자격이 없다.

1972년 ‘피의 일요일’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정치문제에 초연한 폴 매카트니 조차도 ‘아일랜드를 아일랜드인에게 돌려주라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라는 싱글을 발표하게 만들 정도였다. 매카트니의 노래는 발표 즉시 BBC로부터 방송금지 당했다.

 
▲ '언젠가 뉴욕에서' 앨범의 커버는 뉴욕타임즈 지면을 패러디하고 있다. 노래 제목은 기사제목으로 기사 내용은 노래가사로 바뀌어 있다. 사실 앨범의 제목도 신문의 이름을 뒤집은 것이다.


아일랜드에 이은 주제는 미국의 양심수들이다. 존 싱클레어는 좌익예술가이자 ‘백표범당’의 활동가였다. 백표범당은 흑인급진주의 조직인 ‘흑표범당’을 지원-연대하기 위해 결성된 신좌익 단체다. 경찰은 마리화나 소지죄로 그를 투옥시켰다.

마리화나 소지는 신좌익 활동가들을 체포할 때 경찰이 자주 수용한 수법이었다. ‘존 싱클레어John Sinclair’는 존 레논이 미국에 와서 처음 작곡한 곡들 중 하나다. 원래는 71년 겨울에 열린 싱클레어 석방촉구 공연을 위해 만든 것으로, 레논 부부가 앨범 녹음을 시작할 때는 이미 석방됐지만 레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 앨범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오노 요코는 흑인 페미니스트이며 미국공산당원인 안젤라 데이비스의 석방을 요구하는 노래를 작곡했다. 흑표범당 관련 정치범의 탈옥사건과 관련돼 FBI에 의해 전국에 지명수배 된  데이비스는 체포 후 18개월 동안 계속된 공판에서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안젤라 데이비스는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로 지금도 진보정당운동과 인권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레논 부부가 ‘안젤라Angela’를 쓰고 녹음할 무렵 영국에서는 롤링 스톤즈가 안젤라 데이비스를 지지하기 위한 노래 ‘사랑스런 흑인 천사Sweet Black Angel’를 발표하기도 했다.

남은 두곡 중 ‘뉴욕시티New York City’는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뉴욕에 도착한 후 겪은 일들을 경쾌한 리듬에 실은 노래고, ‘우리는 모두 물방울We're All Water’은 재치있는 격언을 만들어내는 오노 요코의 재능이 가사에 유감없이 발휘된 곡이다.

특히 ‘우리는 모두 물방울’은 모든 차이는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오노 요코 특유의 이상주의를 엿볼 수 있다. 레논에 비해 사상적으로 철저하지 못함(?)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마오 주석이나 닉슨 대통령이나 벌거벗겨 놓으면 별로 다를 것도 없다”거나 “백악관이나 인민궁전이나 창문개수만 놓고 보면 별 차이도 없다”는 노랫말은 나름대로의 진실을 담고 있다.

라이브 녹음을 담고 있는 두 번째 디스크는 일종의 보너스다. ‘금단증상Cold Turkey’과 ‘교쿄야 걱정마렴Don't Worry Kyoko’ 두곡은 1969년 12월 유니세프 주최의 자선공연에서 녹음된 것이고 나머지 4곡은 1971년 6월 뉴욕에서 프랭크 자파와 함께 가진 합동공연에서 녹음한 것들이다. 특히 69년 유니세프 공연은 조지 해리슨도 함께 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두 명의 비틀즈 멤버가 함께 공연한 마지막 기록이다.

 
▲ 앨범이 처음 발매될 때 보너스로 들어간 우편엽서. 자유의 여신상이 쭉 뻗고 있는 오른손을 잘 보라.
'언젠가 뉴욕에서'는 사실 존 레논, 오노 요코 부부가 ‘작정’하고 만든 앨범이었다. 미국 정부가 우려했던 바대로 이들은 자신들의 대중적 영향력을 사람들을 계몽하고 행동하게 만드는데 쓰려고 했다.

그러나 평단의 오른쪽 펀치야 예상했지만 정작 대중들의 왼쪽 펀치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전작인 '이매진Imagine' 앨범이 워낙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넘치던 레논은 팬들의 외면에 충격을 받았다.

앨범 전반에 흘러넘치는 정치적 주장과 구호들도 사람들에게 소화 불량을 일으켰지만 무엇보다도 생경한 음악 형식이 문제였다. 오노 요코는 그의 음악활동 중 최대한 대중적인 작곡과 노래를 한다고 했지만 일반대중들의 귀에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전위예술로 인식됐다.

존 레논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이 앨범에 실린 그의 작품들은 이전에 발표한 것들과 비교할 때 ‘의식의 과잉, 미학의 빈곤’이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존 레논은 1971년 혁명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혁명을 노래할 수는 있지만, 노래로 혁명을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이듬해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 2005년에 나온 개정판CD는 프랭크 자파와의 라이브 연주 중 3곡을 삭제하고 1장짜리 CD로 재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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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세금 넘는 사회주의 시스템
[사민주의 논쟁] 김종철 비판, 시장기능 무시는 순진한 발상

정다신 /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사회학연구소 연구원
출처 : <레디앙> 2007 12 02


김종철(존칭생략)의 글을 읽었다. 필자는 사민넷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방향에 동의한다. 본격적인 논쟁에 앞서 논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철의 글이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이 논쟁에 끼어들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논쟁이 현실과 유리되어 지식인들만이 논하는 고도의 추상화로 치닫지 않기를 바라며 몇 자 적는다.

김종철은 소득 불평등도를 이야기하면서 세금을 떼기 전에는 오히려 서구 사회복지 국가의 소득 불평등도가 한국의 그것에 비해 높다고 주장하며 결론적으로 서구 사회복지 국가 역시 우리보다 더욱 심각하게 양극화된 국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며 시장 체제란 다 똑같다는 식으로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세금을 뗀다는 가정 자체가 그야말로 가정인 만큼, 물가 수준, 평균 임금, 최저 임금의 절대 액수, 비화폐 임금(무상 복지) 등등 많은 것을 사상시킨 조금은 치사한 주장이다. 거꾸로 묻고 싶다.

   
  ▲ 옛 소련의 소비에트 회의 모습.
 
옛 소련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실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 소득 불평등도로만 치자면 그 어느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도 그 격차가 적은 평등지수 최고의 국가들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체제를 거부하고, 김종철이 이야기하는 ‘세금을 떼기 전에는 더 불평등하다는 체제’를 더 선호하는 것일까?

A라는 나라에서 상류 계층이 평균 10만 원을 벌고 하위 계층이 1만 원을 번다고 치고, B라는 나라에서는 상류 계층이 평균 5천 원을 벌고 하위 계층이 1원을 번다고 치자. A라는 나라의 경우 소득 격차가 무려 9만 원이고, B라는 나라는 불과 4천 원이다.

어느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일까?? 각 나라의 물가 수준, 절대 임금 액수, 비화폐 소득, 비화폐 복지 제도, 세금 등등 여러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주장은 그다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없다.

언젠가 단순하게 환율만으로 비교했을 때, 구 소련의 경우 한 달 평균 임금이 수 십 달러도 안 되었던 것을 들어 저임금 착취 운운하며 비판하던 황당무계한 논리가 기억난다. 그것도 비화폐성 복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도 없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김종철이 억지로 분리한 그 세금이 부과되고 기꺼이 자본이 이를 수행하도록 강제하는 체제가 우리가 긍정적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이고, 사민주의자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체제이지, 자본을 통제하는 수많은 제도들을 떼어 버린 상상 속의 체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민주의자들이 세금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김종철이 제시하는 틀에 따르더라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많다. ‘불평등 사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높은 세금이다.

그것을 통해 달성되는 주요 사회 서비스의 무상 제공 세도가 사회주의적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는데,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가리켜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이라고 했던 적이 있던가? 당연히 이는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적인 시스템이고 사민주의자들 자신이 도입한 제도들이다.

그런데, 무상 의료, 교육, 주택 등등의 제도는 이들 사민주의 복지 국가들뿐 아니라,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가장 핵심적인 제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민주의 국가들에서의 사회주의적 시스템과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이 시스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왜 사민주의자들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그야말로 사회주의적 시스템이 아닌 시장 사회 사회주의 시스템을 선호하는가?

‘시장 체제 인정 하, 시장에서의 상위층들인 자본가, 고소득자들로부터의 높은 세금 징수와 그 기금에 의한 복지 체제’가 서구 사회복지 국가들이 선택한 길이었다면, ‘시장 체제가 아니었으므로 자본가, 고소득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국가가 국가 예산에서 일괄적으로 제공하는 체제’가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질적인 측면에서나 효율성의 측면에서나 사회주의 체제가 건재한 동안에조차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였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에서 다른 어느 부분보다 핵심이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바로 시장 경제의 인정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즉, 김종철이 강조하는 ‘사회주의 시스템’이 비시장적 현실 국가 사회주의에서보다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에서 더 제대로 작동했고 현재도 작동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답이 바로 논쟁의 핵심인 것이다. 그도 바로 이 점을 길게 비판하고 있다.

김종철은 만약 한국에서 현재와 같은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세금만 스웨덴처럼 걷어서 지원할 경우의 재앙에 대해 경고하고, 사민주의를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는 것은 높은 세금 그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사민주의자들이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세금만 걷자고 하는 사람들인 양 묘사한 것은 매우 정당하지 못 하다.

이어서 그는 ‘중간의 10년을 빼놓고 한 번도 권력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스웨덴 사민당의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가 권력이 온존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였다.

자본가 권력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장의 폭력을 제어하기는 해도 시장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하기에 사민주의 체제에서 자본가는 당연히 존재하고 있고 자본가 권력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다.

같은 자본가 권력이라도 스웨덴의 그것과 삼성으로 대변되는 남한의 그것과는 천양지차라는 것은 본인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스웨덴 자본 권력은 당연히 존재하지만, 여전히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으며, 자본 권력을 마음 놓고 휘두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 자본가 권력이 강화되는 현상을 보여 주기 위해 그는 스웨덴 사회가 급격하게 우경화되었다며 이러저러한 예들을 제시하였는데, 그렇다면 현재 스웨덴 사회의 복지 국가적 성격이 사라지고 신자유주의적으로 변화되었거나 미국식 시장 근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 비스무리하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로의 경도의 정도를 아는지? 이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현실과 맞지 않는 왜곡되고 과장된 주장이다. 분명, 우파 집권 이후 교육, 연금, 의료, 부유세 등에 있어 복지 축소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파 정권 하에서조차 복지 체제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스웨덴 사회복지 여전, 신자유주의화라는 주장은 극도의 단순화

스웨덴 역시 세계 자본주의 국가와 단절하고 있지 않는 한,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외의 이유에서도 복지 국가 특유의 정체에 메스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이야기하듯, 자본 권력이 온전하게 보존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자본 권력이 온존하여 신자유주의적으로 경도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스웨덴 국가-자본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민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하지 못 하고 자본가 권력이 온존해 신자유주의 체제로 경도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와는 상관없이 이미 그 이전에 여성의 대규모 경제 참여, 노인층의 확대, 이주민의 증가, 탈 산업주의적 산업구조 변화 및 이에 따른 새로운 고용 형태 발생, 그리고 서구 중심부 외 지역에서의 경제 발전과 그로 인한 국제적 경쟁 강화에 의한 수입 축소 등으로 국가 예산에 과부하가 걸려 국가 복지 체제에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요인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련의 복지 시스템 개혁을 무조건 신자유주의적 반동으로 모는 것은 극도로 단순한 주장이 아닐 수 없으며, 사태를 과학적으로 보는 시각을 방해할 뿐이다.

그 신자유주의적으로 경도되었다던 자본가 권력은 우파가 집권한 유리한 조건에서도 여전히 커다란 변화 없이 복지 기금에 소득의 상당 부분을 내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나? 오히려 스웨덴 자본가들은 외부로부터의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편승하기보다는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이와 관련하여 더욱 황당한 것은 다음 부분이다. 임노동자 기금이 성공하여 스웨덴 기업 대다수가 자본가의 수중에서 노동자에게로 넘어 와 있다면 지금 이러한 부침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법에 대한 부분이 그것인데, 노동자 계급이 기업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맞설 수 있었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가 스스로 밝혔듯, 임노동자 기금의 성격이 유고의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가 겪었던 위기, 즉 기업 노동자 집단과 지방자치 위원회들이 전체 인민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이기적 행태’는 현실에서 좀처럼 극복하기 힘든 것이다.

   
  ▲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레닌 (앞 줄 우산 든 사람)
 
노동자 직접 생산 통제의 이상이야 말로 ‘사적 소유 / 국가 소유’의 틀을 넘어서는 ‘사회적 소유’ 논의와 더불어 현실에서 이상과는 달리 매우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며, 역사에서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집행자 혹은 경영자의 기능을 무시하고, 시장의 기능마저 인간(노동자)의 민주적 토론에 의한 결정 등으로 완전히 대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러시아와 유고 등에서의 노동자 민주주의 혹은 자주관리의 실험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를 안다면, 노동자가 소유하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소유 형태 그 중 다수의 이익과 권한이 보장되는 다양한 사회적 소유 형태를 추구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든 사민주의자든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이다. 그러나, 시장의 기능을 뺀 다양한 소유 형태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단지 개개 기업 노동자 집단이 자신들의 기업과 자신들의 복지 이익만 챙겨 생기는 문제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형질 변화와 경제 침체 상황에서 복지 수준을 전 국가적으로 계속 유지하기에 벅차서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게 되는 복지 시스템의 부분적 개혁은 불가피한 것이다.

인구 증가에 비해 생산력이 증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가 복지 수준을 유지하려다 거대한 과부하가 걸려 오랜 정체 끝에 결국에는 붕괴로 이어졌던 구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에서도 보이듯, 문제의 핵심은 바로 시장 기능에 대한 것이다.

다당제 인정하면 다양한 사회경제 시스템도 인정해야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인정하는가에 대해 다당제를 인정한다고 말하였다. 다당제를 인정한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일당 외 다양한 정당을 인정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당들이 근거로 하는 다양한 경제 주체와 이익 집단이 존재하는 시장과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과 같이 일당-국가가 경제와 시민 사회를 장악하지 않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이 다당제를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라고 할 때, 다당제 인정은 시장을 현재로서는 인정한다는 식으로 제한을 둔 뒤의 그의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폭력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한 것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사회주의자들이 앞장서 싸워왔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폭력적으로 탄압해 온 것은 도리어 지배 계급이거나 제국주의자들이라는 주장을 했다.

최병천이든 그 외 사민주의자든 누구든 사회주의자들이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며 행사한 폭력이나 지배 계급의 폭력에 대응한 너무도 정당한 폭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인가? 그의 주장처럼, 대안 사회를 꿈꾸는 운동을 폭력적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인가? 문제의 핵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놓은 이 부분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폭력혁명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폭력을 쓰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현재 그러한 폭력혁명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주장과는 달리, ‘현존하는 모든 질서는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이…’라는 말은 실제로 과거 혁명가들에게 절대적인 것이었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정치적인 변혁도 쉽지 않았지만, 적어도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 변혁이란 단순한 정치 권력 교체를 넘어 소유 체제를 변혁하는 것이었기에 그 방법은 폭력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가와 지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소유권을 박탈하는 것, 시장 체제를 폐절하는 것은 당연히 평화롭게 이루어 질 수 없었고,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실제로 폭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사민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러한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혁명 이후의 사회에 대한 상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소유와 시장의 문제를 인정한다면, 이제는 그러한 폭력적 변혁 방식을 따를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질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필요에 따라서는 폭력적 권력 획득 방법이 될 수도 있고, 국가에 따라서는 국유화의 범위가 광범위해질 수도 있으며, 위협 정도에 따라 제한적 다당제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소유권을 박탈하고 시장을 철폐하며 경제 체제를 바꾸는 민중의 운명을 바꾸는 엄청난 변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과거 사회주의 체제 실패의 진정한 원인을 뒤로 하고, 그 교훈을 잊고 시장을 인정하는 것은 자본가 권력을 온존시키는 것 운운하며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민중에 대한 죄악을 되풀이하는 것이라 단언한다.

사회주의 - 사민주의 논쟁의 핵심은 시장을 인정하는가의 문제

그는 국유화가 아니라 다양한 소유(작은 규모의 사기업, 협동조합 기업, 사회적 기업, 국유화된 기업 등등)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시장의 폭력적 성격과 불평등한 결과를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대체 질서가 가능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실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할 사민주의자는 없을 것이며, 도리어 이러한 주장은 사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문제는 그의 ‘현재로서는 시장을 인정하되…’가 아니라 ‘시장을 인정하자’는 것이 사민주의자들의 주장의 핵심일 것이고 이 부분에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장 기능 없는 사회적 소유란 경제 발전 정체, 자원 배분에 있어서의 비효율성, 해당 기업 노동자 이기주의, 그리고 소비자의 욕구와 유리된 생산 등등 또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 붕괴의 길과 유사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시장을 인정한다고 자본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시장=자본주의라는 사고를 교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 무엇보다 노동자 소유라는 문제 만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노동 인구 중 평균 12% 정도에 이르는 서구 국가들의 자영업 비율에 비해 한국에는 그 3배에 이르는 수의 각종 자영업자들이 존재한다. 무려 60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시장 없이 어찌 할 것인가?

그의 말처럼 시장은 ‘현재로서만’ 인정해서는 안 된다. 세금을 떼면 시장 사회는 어느 국가든 불평등한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자본 권력이 없어지지는 당연히 않겠지만,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로부터 이익의 50%를 세금으로 떼어 낼 수 있는 시기가 온다면, 일년에 6조에 달하는 성접대비를 복지 기금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혁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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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차베스를 구출해주었다"
"개혁보다 집권 연장에 더 신경 써"

하영식 / 아테네
출처 : <레디앙> 2007 12 05


’21세기의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선거를 통해 두 차례나 당선되면서 자신감에 차있던 차베스 정부가 이번에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2000년 이후부터 실시됐던 모든 선거를 휩쓸었기 때문에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도 이길 것으로 누구나 예상했다.

차베스의 패배

차베스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의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6년 연임으로 못박은 대통령의 재임기간을 7년으로 늘리면서 무제한 허용하자는 안이다.

하지만 12월 2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베네주엘라 국민들은 처음으로 차베스에게 패배를 안겨줬다. 차베스 대통령 자신도 패배를 인정했다.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통과했다면 차베스는 계속적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해서 선출될 수도 있었다는 의미다.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들은 차베스가 사회주의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종신대통령직을 수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현한 셈이다.

   
  ▲사진=뉴시스
 
지난 해 12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은 차베스에게 대통령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표인 7백3십만 표를 안겨주면서 그와 그의 개혁정책을 재신임했다. 이는 70%의 투표율에 과반수가 훨씬 넘는 63%의 지지율이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의 국민투표 결과를 본다면 56%의 투표율에 49% 지지율을 획득하면서 패배로 돌아섰다. 반면에 반대표는 51%로 과반수를 넘었다.

차베스 정부측에서는 국민투표의 패배가 낮은 투표율 때문이라고 변호하고 있지만 사실은 투표하지 않은 기권표들은 소극적인 반대표의 성격이 강하다. 결과적으로 차베스 정부의 헌법개정안을 반대하는 세력은 국민들의 대다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민중 기대에 어긋나기 시작한 차베스 정부

그 동안 차베스 대통령의 개혁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민중들의 삶이 결코 나아진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계속되는 인플레와 생활필수품 부족으로 인해 민중들의 삶은 계속해서 무거운 압박을 받아왔다. 자본가들의 이익에 반하는 사회주의적인 정책으로 인해 생산 분야에서 사보타지가 일어났고 생산품 공급에 많은 지장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난 해 12월의 대선에서 대다수 국민들은 차베스 대통령의 연임을 지지했고 개혁프로그램의 성공을 염원했다. 물론 어려운 삶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나아지리란 기대를 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차베스 정부는 민중들의 기대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2기에 들어선 차베스 정부는 민중들을 위한 개혁프로그램에 집중하기보다는 미래의 정권연장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지난 여름에 있었던 정부에 비판적인 TV방송국의 폐쇄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헌법개정 기도 등은 국민들의 눈에 영구집권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년 동안 정부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적으로 야기돼 왔다. 그렇다고 생필품 공급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폭발적인 인플레가 안정된 것도 아니다. 한 예를 들자면 현재 수도인 카라카스에서는 우유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 한다.

사회주의적인 개혁프로그램을 신속하게 실행하기 위해서는 스탈린이나 카스트로 같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영원한 국부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매사안마다 국민들이나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민주적인 절차를 건너뛰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백번 이해가 가도고 남는다.

달콤한 독재로의 유혹

물론 이는 사회주의적 개혁을 주도하는 차베스 정부가 빠졌던 달콤한 독재로의 유혹이다. 그러나 베네주엘라 대중들은 스탈린도 카스트로도 거부했고, 차베스가 스탈린이나 카스트로로 변신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베네주엘라 국민들이 차베스를 독재자의 길에서 구출해준 것이다.

이제는 차베스가 베네주엘라 민중들을 위해 나서야 할 차례다. 민중들은 공급이 부족한 우유나 생활필수품을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작은 변화에 힘써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남은 임기 동안 오로지 민중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만 집중해주기를 차베스에게 요구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내오랜꿈 ----------------------------------------------------------------------------------------

베네수엘라 인민들이 우리 국민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적어도 이번 국민투표 결과를 두고 보면 말이다. 물론 이번 투표 결과를 두고 말들이 많다. 하지만 분명한 건 차베스가 넣지 말아야 할 조항을 넣었다는 것이다. 왜 꼭 자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기 임기 동안 인민을 위해 최선의 정책을 펴고, 그 정책과 노선을 계승하는 차기정부를 구성하면 될 것 아닌가?

<레디앙>에 실린 이 글에 몇 개의 댓글이 딸려 있다. 그 댓글 중에는 미국과 부르조아의 음모 운운하며 이 글을 비난하는 것도 있다. 이런 인간들한테 권력 쥐어주면, 우익 독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좌익 독재체제 만들 인간들이다.

민주주의가 과연 절차적 민주주의,형식적 민주주의에 매몰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부분은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고 만약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진보를 찾아낸다면 물론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형식적 민주주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순간 힘센 자가 이기는 '동물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랬을 때 스페인 인민전선을 무너뜨린 프랑코와 칠레 인민연합을 무너뜨린 피노체트를 무슨 명목으로 비판할 수 있는가?

어떤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보니 이런 구절도 있다.

"상당수의 베네수엘라 빈민층들에게 차베스는 예수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차베스가 좀 더 오래 권력을 잡고 개혁을 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80년대 NL/PD 논쟁에서 주사파들은 수령론 비판에 이렇게 말했었다. 인민들이 위대한 수령의 영도를 원하는데 무슨 문제가 되냐고. 후계자 세습문제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후계자인데 무슨 문제가 되냐고. 이런 인간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면 형식적 민주주의를 얼마나 귀찮게 생각하겠는가? 비판하는 언론들 얼마나 눈엣가시겠는가?

히틀러를 원한 건 독일 인민들이었다. 총칼의 위협으로 히틀러가 집권한 게 아니라 자존심 상하고 상처받은 독일을 보다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 게르만 민족의 위대성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독일 인민들이 선택한 것이 히틀러였다. 다수의 인민들이 원했던 '민의'였기에 파시즘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의회민주주의의 길을 선택한 이상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고서도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예수 아니라 예수 할애비라도 '좀더 오래 권력을 잡기 위해' 개헌을 하는 등의 시도를 한다면 이미 그순간 독재체제로 발을 담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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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07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쾌한 글 잘 보았어요. 쉽사리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부분을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했군요. 어쩐지 부끄럽습니다.

내오랜꿈 2007-12-07 11:56   좋아요 0 | URL
명쾌한가요?^^;
원칙은 이게 맞지만, 사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야!한국사회] 활동가와 ‘벌금’ 먹는 하마
야!한국사회

이명원/문학평론가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05


» 이명원/문학평론가
“아룬다티 로이 아시죠?” 소설을 쓰고 있는 한 후배가 물었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받은 뒤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른 인도의 여성 작가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스스로를 ‘활동가’로 규정하면서, 인도 사회의 반핵, 환경, 반세계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여성 멸시의 분위기가 다른 사회보다 압도적인 인도의 현실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활동은 인습적 편견과 함께 직접행동에 따른 법의 압력에 자주 노출된다.

19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활동가라는 표현이 익숙해졌다. 내가 알고 있는 지인들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활동가로 규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민운동단체에 소속되어, 한국 사회의 다채로운 억압구조와 부패의 사슬을 걷어내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활동가로 사는 것은 괴롭다. 그들이 단체에서 받는 활동비는 최저임금은 고사하고, 대학생의 한달 용돈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국가와 시장을 투명하게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공적 지원 없이 철저하게 후원회비로 운영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고 비판은 하면서도, 정작 활동가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대단히 낮은 수준에 있다.

그러한데도 한국의 활동가들은 이 고통스러운 환경을 거슬러, 한국 사회의 열악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싸워 왔다. 이들의 소명에 가까운 직접행동이 있어, 거인들이 지배하는 난쟁이 나라의 시민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알게 모르게 확대시켜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활동가에 대한 탄압의 양식이 자못 고약해지고 있다.

“너희들은 직접행동을 해라. 우리는 벌금을 걷겠다.” 이게 요즘 대한민국의 정부와 사법부가 보여주고 있는 행태다. 노동3권을 제창하는 노동자들에게, 악덕 기업들이 손배소 등을 통해서 경제적인 파산 상태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즈음의 활동가들은 직접행동에 따른 벌금 탄압에 신음하고 있다. 가령 지난해 평택에서 있었던 불복종 직접행동의 결과로 인권운동 사랑방 활동가들은 개인당 100여만원 이상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이 때문에 소송으로 인한 비용까지 떠안게 되었다. 사정은 다른 시민단체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곳은 벌금액이 1억원을 넘어선 곳도 있다고 한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사례는 장애인 인권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헌신했던 인권활동가들에게 부과한 벌금이다.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포함한 차별 철폐를 위해 직접행동에 나섰던 활동가 66명에게 법원은 2007년 8월 현재 총 1억2381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활동가들 중에는 이규식씨와 같은 중증장애인도 있는데, 경찰은 486만원의 벌금을 낼 수 없었던 이규식씨를 구속했고, 노역을 통해 벌금을 갚게 했다.

아무리 시장 전체주의라지만, 시민들의 언로와 행동 모두를 ‘돈’으로 제어하겠다는 발상은, 오늘의 민주주의를 가감 없이 ‘금권 민주주의’로 인식하게 만든다. 천문학적 돈을 횡령하거나 편법 상속한 기업가 집단에 대한 정부와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과 이들 활동가들에 대한 벌금 탄압을 비교해 보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정의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활동가들의 직접행동도 시민사회가 아니라, 교도소의 싸늘한 노역장 안에서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울한 상상이 들기도 한다. 지난 연대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랐는데, 어찌된 게 오늘의 포스트 민주주의는 ‘벌금’ 먹는 하마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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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이전에는 기업이 파업을 벌인 노조에 피해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등 주로 노조활동 탄압 목적으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곧, 기업과 노조간의 사적대립을 중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게 소송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사적대립은 파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기업과 노조가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소송취하를 통해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는 이러한 손배소송이 사적대립 뿐만이 아니라 국가 대 시민단체 및 개인으로 확대된다. 그 결과가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그리고 기업과 노조간의 사적소송도 취하되는 경우가 점점 드물어졌다). 노무현이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강조한대로 이른바 '준법'을 내세우면서 '불법(시위)'에 단호하게 대처한 결과이다.

노무현은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90년대초 울산 현대파업 당시 '제3자개입금지' 라는 대표적인 노동악법조항을 무시하고, 현대자동차 노조의 파업현장에 제3자로 '불법 개입'해 노동자들 앞에서 악법철폐를 외쳤었다. 이순간 그는 진정 '전태일의 친구'였을까?

철저하게 이미지로 먹고 사는 대중정치인 노무현. 이런 노무현을 진보라는 이미지로 치장하고 받들며 민노당 찍으면 한나라당 집권하게 돕는 거라고 온갖 난리를 치던 유시민 같은 인간들.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노무현과 이회창의 차이가 뭐였냐,고? 내가 이해하는 차이는 한놈은 차떼기로 했고 한놈은 사과상자로 했다는 정도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다. 아, 분명한 차이 하나가 있다면 한놈은 자기가 하는 일이 어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지 숨기지 않는 반면에 한놈은 자기가 하는 일이 어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지를 애써 숨기려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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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고양이
유레카

여현호 / 논설위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05


» 여현호 논설위원
 
중국 문헌 <위략>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조조와 동향인 정배는 작은 이익을 탐하는 사람이다. 관리로서 직권을 남용해 자기 집의 여윈 소를 관아의 살진 소와 바꿨다가 발각돼 파직됐다. 그와 마주친 조조가 이런 사정을 알면서 물었다.

“이보게, 자네 관인(官印)은 어디로 갔나?”

정배도 히죽거리며 답했다. “가져다가 떡 바꿔 먹었습니다.”

조조는 한바탕 크게 웃은 뒤 수행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개(조조의 모사)가 여러 차례 정배를 중벌로 다스리라고 했지만, 나는 정배가 쥐도 잘 잡고 물건도 곧잘 훔치는 고양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놔두면 쓸모가 있을 것이다.”

도둑고양이도 괜찮다는 얘기다.

이런 ‘고양이론’은 ‘흑묘백묘론’으로 이어진다. 흑묘백묘론은 ‘흑묘백묘 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를 줄인 말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란 뜻이다. 중국 쓰촨성의 속담인 ‘흑묘황묘’에서 유래했는데,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주창하면서 유명해졌다. 여기선 이념이야 어떻든 인민을 잘살게 하면 제일이라는 뜻이 된다.

중국 경제성장의 구호였던 흑묘백묘론은 21세기 들어 질적 성장을 중시하는 ‘녹색 고양이론’의 도전을 받는다. 2004년 원자바오 총리는 “중국의 경제성장을 이제 환경과 질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안강 칭화대 교수는 ‘흑묘백묘론’을 ‘녹색 고양이론’으로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녹색 고양이가 아니라면 쥐를 잘 잡는다 해도 좋은 고양이가 아니라는 말도 나왔다.

2007년 대통령 선거를 맞은 한국에선 이런저런 흠이 있더라도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고양이의 색깔이야 어떻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이젠 색깔을 따지자는 중국과는 좀 다른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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