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시아 역사분쟁
송기호|솔
유고슬라비아의 참혹한 내전이 끝난 후, 발칸 각국의 역사가들은 국사 교과서가 전쟁의 한 원인임을 지적했다. 자기 민족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 나라와 민족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적대감을 부추김으로써, 결국에는 인종청소와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와 알바니아를 막론하고 전전의 ‘국사 교과서’를 쓴 역사가들과 열정적으로 그것을 가르친 역사 교사들은 ‘민족의 전범(典範)’을 만들었지만, ‘내전의 전범(戰犯)’이기도 했다. 그리스를 포함해서 발칸 각국의 역사가들이 교과서 위원회를 만들어 발칸의 공동 역사 교과서 편찬 작업에 착수하기까지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번민과 고통, 정신적 공황이 어떠했을까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역사가 홉스봄의 지적은 굳이 새로울 것도 없다. 멀리는 지난 20세기, 가까이는 일본의 ‘새역사교과서’ 이후 21세기의 동아시아를 뜨겁게 달군 역사 논쟁의 관찰자들에게 역사학의 핵 폭발적 갈등의 잠재력은 이미 입증된 바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역사논쟁의 뇌관을 제거해 역사가들이 부추기는 핵폭발의 재앙을 방지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1세기 이상의 시간을 거치면서 한없이 복잡하고 형편 없이 얽혀 있는 폭탄의 회로를 분석해서 뇌관을 제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폭을 감수하는 용기와 감정의 인내, 전문가적인 지식과 식견이 요구되는 고난도의 작업이다.
이 책에서 돋보이는 것은 성실한 텍스트 읽기와 치밀한 분석이다. 발해사 전공자로서 중국과 일본, 한국과 러시아의 문헌자료들을 섭렵한 그의 전문가적 지식이 주장의 신뢰도를 높인다. 서로 충돌하는 주장들을 각 장의 뒤에 자료로 배치해, 독자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편집자로서의 배려도 이 책의 미덕이다.
역사가로서의 저자의 미덕은 특히 역사해석에서 민족적 감정을 절제하려는 노력에서 잘 드러난다. 서울대 국사학과의 ‘발해사’ 전공 교수인 저자의 입에서 “발해사는 한국사에 속할 수도 있고, 만주의 역사에도 속할 수 있다”는 주장을 듣는 것은 신선하다. 민중사학이 고대사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면서도, 만약 민중사학의 입장에 선다면 말갈족이 다수였던 발해사는 만주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대목은 저자의 학문적 정직성을 잘 드러내준다. 학문적 정직성은 연구자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는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정직한 추론의 결과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식 권력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왜(倭)가 고대 한반도에서 활동했고 고대 한반도가 일본 열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임나일본부’를 인정하는 거냐는 엉뚱한 비난을 감내하겠다는 용기의 표현이다.
동아시아 역사논쟁은 ‘사실’과 ‘거짓’의 진실게임을 넘어 ‘해석’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사실’이 ‘해석’을 낳는 게 아니라, ‘해석’이 ‘사실’을 낳는 것이다. 몽골인의 영웅 칭기즈칸이 중국인이 되고, 고구려를 비롯한 다양한 소수 민족의 역사가 모두 중국사가 되는 것도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사로 규정하는 국민국가의 현상학 때문이다. 민족주의의 현상학이 동아시아 각국의 ‘국사’ 체계를 뒷받침하는 한, ‘사실’ 규명이 동아시아 역사분쟁을 해결하는 열쇠는 될 수 없다.
중국의 동북 공정 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비판이 실증적 논박에 치우쳐있는 것은 이 점에서 아쉽다. 돋보이는 해박한 지식과 학문적 정직성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역사분쟁의 인식체계라 할 수 있는 민족주의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저자가 ‘민족과 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오늘날 국민국가로 발전해 온 ‘역사의 흐름과 계승’을 추적하는 작업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구심도 있다. 국민국가를 ‘기원적 현재’로 설정하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의 사유방식이 특히 결론 부분에서 강하게 느껴진다. ‘민족주의=좌파’ 대 ‘탈민족주의=우파’라는 저자의 이분법도 너무 순진하다. 동아시아 차원에서 국사의 동시 해체를 이상론으로 차치하고 국민국가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간다면, 역사는 다시 현실을 정당화하는 순응주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인과적 설명 방식이나 통사적 역사 서술에 대한 저자의 확신은 지나치게 단단하다. 역사적 구성주의의 인식론은, 흔히 오해하듯이, 경험과학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실증으로 포장된 모든 ‘사실’을 해체하는 ‘급진적 경험론’이다. 역사적 구성주의를 전략적으로 전유하기에는 저자의 인식론이 너무 본질주의적이다.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리’도 권력과 기술과 지식의 접합 속에서 변화하는 전략 개념이라면?
〈임지현|한양대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