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정치·국제에디터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21일
최근 사법부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 사건 항소심에서 강교수가 국가존립과 안정을 위협했기 때문에 1심의 유죄판결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그는 2001년 평양에서 북측의 통일방안 연설 때 박수를 치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자’라고 썼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그가 사려깊지 못한 언행으로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했지만, 쿠데타나 국가전복을 기도한 것은 아니다. 자기 신념대로 쓰고 말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이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붕괴에 직면했다는 증거는 없다. 아니, 국가라는 거대한 체계는 이 ‘왕따 학자’에 의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판결문 어디에서도 그의 박수와 문장 하나가 어떻게 이 나라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었는지 그 인과관계를 서술하는 단 한줄의 문장도 찾을 수 없었다. 판결문이 이렇게 비논리적일 수 있는지 따지자는 게 아니다. 한국이 왜 이런 반이성적 사태에 아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조용한 사회로 변했는가 묻는 것이다. 요즘 한국사회가 보수화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분위기를 탄 결과일까.
-‘살림살이 개선’ 공약 어디에-
사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요즘 낡은 사회, 구질서를 변혁하자는 87년의 열정이 20년 만에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동안 지역대결과 보수 헤게모니에서도 긴장을 놓치지 않고 여론의 균형을 유지해왔던 서울의 오랜 전통도 깨졌다. ‘서울의 배반’은 이미 지난해 노무현 심판 선거였던 지방선거 때 분명하게 드러났다. 권위주의 시대 집권당을 잇는 보수당이 1967년 이래 처음으로 서울에서 압승함으로써 그 도도한 서울을 굴복시킨 것이다. 이후 신당은 보수화의 길로 들어서고, 보수후보 지지율은 60%에 이르며 유일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인기는 급락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진보적 전망의 결여와 개혁 실패가 초래한 실망임에도 진보적 대안 찾기대신 보수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의 배반일까. 여론 조사 결과는 그 반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수년 동안 스스로 진보라고 여기는 시민들이 보수보다 많거나 최소한 비등했다. 최근 경향신문·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조사도 진보가 보수보다 훨씬 많고, 차기 정부가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의견도 보수적이어야 한다는 쪽보다 많은 것으로 나왔다. 진보는 아직도 자기 의사를 대표하고, 의견을 조직할 정당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정당을 찾지 못하고 진보가 보수당을 선택하는 왜곡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한마디로 ‘시민의 배반’이 아닌, ‘정당의 실패’가 문제였다. 정당은 시민들이 덜 진보적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었다.
민노당은 노무현 정권·신당과 한묶음으로 보는 인식상의 오류로 인해 동반 하락의 위기를 겪고 있지만, 마침 신당의 지리멸렬로 호기를 맞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5년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행복하십니까” 하며 사람 속을 후련하게 했던 권영길은 그때처럼 신선하지도 않고, 생기도 유머도 잃었다. 경선 이후 한달은 진보세력이 서민들의 삶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갖도록 개혁 구상과 실천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할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지쳐 돌아서고 나서야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이란 슬로건을 내세웠지만, 십수년전 어디선가 많이 듣던 것 같은 이 구호는 ‘답답한 민노당’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대신 그들이 한 일이란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 앞에 코리아 연방공화국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공약을 내놓아 안팎의 비판을 불러온 것뿐이다. 이렇게 뒷걸음질하는 사이 당과 후보의 지지율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문국현이 등장해 민노당의 브랜드인 비정규직·재벌개혁 문제를 들고 나와 잠재적 민노당표를 몰아갈 때까지 속수무책이었다가 뒤늦게 표를 도둑맞았다며 문국현에게 신경질을 내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 사회의 다수인 진보적 시민에게 응답을 할 줄 모르는 진보정당이 지지를 못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진보적 시민 실망시키는 행보-
요즘 민노당의 헤게모니 세력인 자주파는 자기 보스들과 대리인을 내세워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가치를 당에 요구하고, 정파 보스들은 차기 총선의 비례대표를 따내는 투쟁에 몰입하고 있다고 한다. 크든 작든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며, 세상물정 모른 채 고루한 것에 집착하고, 도전을 두려워하는 현상을 우리는 보수적이라고 한다. 그래도, 민노당은 진보적인가.
[고종석 칼럼] 민주노동당과 17대 대선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출처 : <한국일보> 2007년 11월 22일
역대 대선에서 보수세력을 대표한 이들 가운데 한나라당의 이명박씨가 가장 흠 많은 후보라면, 통합신당의 정동영씨는 중도우파세력을 대표했던 이들 가운데 가장 무기력한 후보다. 정동영씨의 무기력은 정 후보 자신의 정치행로에서 온 것이기도 하고, 소위 범여권의 지난 5년 행로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힘없는 사람들의 신임 위에 세워져 바로 그 지지자들의 신임을 저버려온 정권에서 누릴 만큼 누렸으니, 옛 지지자들이 그를 다시 신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 진보적 유권자들의 해방공간
통합신당 경선에서 정동영씨의 경쟁자들이 비난했듯 그가 '배신자'라면, 그 배신의 본질은 옛 민주당에 대한 배신도, 손수 만든 열린우리당에 대한 배신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배신도 아니었다.
본질은 지지자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정동영씨는 둘레의 정치세력이나 개인들과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한통속이 돼, 제게 권력을 위임한 지지자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그런 배신행위가, 우리 사회의 힘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패한 부자 정당 후보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때그때의 상황논리에 따라 말과 행동을 자유자재로 바꿨던 그 날렵한 정치행로가 아니더라도, 정동영씨에게는 정치적 자질과 자산이 앞서 그의 자리에 섰던 선배 정치인들보다 크게 부족하다. 그에게는김대중씨가 지녔던 카리스마나 넓은 시야도 없고, 노무현씨가 지녔던 단심(丹心)의 이미지도 없다.
노무현씨의 '단심'은 그의 집권 이후 연기로 드러났지만, 그것은 노무현씨가 그만큼 뛰어난 대중정치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도 그의 진심을 의심할 수 없었을 만큼, 노무현씨의 표정은 진지했고 말투는 곡진했다. 이 연기력에서 정동영씨는 족탈불급이다.
깔끔한 외모와 매끄러운 언변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왠지 그 자신도 제 말을 믿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말들이 꼭 허황해서만은 아니다.
소위 범여권과 정동영씨 개인의 이런 취약점은, 1987년 이후 비판적 지지의 망령에 시달렸던 진보 유권자들에게 이번 대선이 해방공간이라는 것을 뜻한다.
정동영씨 개인이든 그가 대표하는 정치세력이든, 복지와 사회연대라는 진보적 가치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은 이제 분명하다. 또 정동영씨와 그의 친구들이 한나라당에 견주어서는 덜 부패했고 총자본에 덜 친화적이라 하더라도, 이 중도우파 세력의 재집권 가능성은 역대 어느 대선 때보다 낮다.
설령 BBK 스캔들로 이명박씨가 낙마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니, 소위 민주세력 분열이니 사표니 하는 것에 대한 거리낌 없이 진보세력에 표를 줄 수 있게 된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진보정치세력을 대표한다는 민주노동당의 행태를 보면 그런 결정도 쉽지만은 않다.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으며 일궈낸 희망은 이제 아스라하다.
의원 개개인의 성실한 의정 활동에도 불구하고, 당내의 고질적 정파 싸움과 민주주의 문화의 부재는 이 정당에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차갑게 만들었다.
게다가, 당내 경선에서 자주파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권영길 후보는 소위 '코리아연방공화국'론을 계속 치켜듦으로써 북한 체제에 비판적인 상식적 진보 유권자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 재벌-관료 동맹이 싫다면
그러나 선거가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한 세력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라는 점을 진보 유권자들이 충분히 이해한다면, 권영길 후보와 민노당에도 희망은 있다.
권영길씨와 민노당은 민족지상주의만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민주의를 대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민노당은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삼성재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는 제도권 정치세력이다.
재벌-관료 동맹의 악취가 견디기 힘든 유권자라면, 이번 대선과 내년 총선에서 미흡하나마 민노당이라는 대안을 고려해볼 수도 있겠다. 그것은 염불보다 잿밥에만 마음을 쏟았던 중도우파 '개혁' 세력에게 교훈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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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이 어지간히 '삽질'을 해대긴 했는가 보다. 이렇게 리버럴주의자들에게까지 우려와 조롱과 격려를 받는 걸 보니 말이다. 탈당한 주제(지난 달 당비까지 냈으니 아직은 아니겠네)에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
이대근 칼럼은 우리의 폐부를 찔러온다. "한국이 왜 이런 반이성적 사태에 아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조용한 사회로 변했는가 묻는 것이다." 좌파는 그대로 있는데, 진보세력은 그대로 있는데, 사이비좌파가 판치면서 덤터기로 진보가 몰락하고 있다.
그래서 난 노무현과 청와대에 입성한 운동권과 민노당내 주사파들을 증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