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라고는 하지만 몇 번이나 신뢰를 잃었던 기상청이었던지라 비온다는 예보와는 상관없이 친지 결혼식 참석차 부산에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월악산 산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날만 쨍~ 하면 과수원에 심은 감자를 캐야 한다는 누나들의 성화에 산행은 물 건너 가고, 해운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에 일어났더니 비가 제대로 쏟아졌다. 갈까 말까 서로 전화기를 붙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시골집 공사 상황도 둘러볼 겸 우리 먹을 채소만 후다닥 챙겨가기로 합의를 봤다.
솟을대문에 담쟁이가 우거져 풍경이 제법 운치있던 옛 기와집은 작년 늦가을 무렵, 와르르 허물고 새집을 신축중이다. 계획상으로는 이미 완료되었어야 마땅한데 이 지역이 1급 문화재 보호구역인가 뭔가로 지정되어 사유재산 행사시(건물 신/증축) 기본적인 허가 외에도 문화재청의 허가까지 받아야한다는 규정에 얽매여 많이 지연되었다. 설계도면대로 집이 꼬라지를 찾아가는 모양이긴 한데, 외벽 마무리하고 실내와 조경까지는 제법 시일이 걸릴 모양이다. 그동안 서울로 상경하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과수원은 부산에 사는 두 누나들 차지가 되었는데, 마치 소꼽놀이하듯 갖은 채소를 심어 요즘 다섯집이 무농약 채소 나눠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세가 있으셔서 과수원 농사를 이어나가기에 턱없이 힘겨워진 어머니께서 작년 가을 수확을 끝으로 배농사를 완전히 접으셨다. 자식들은 수 년 전부터 그만두라 노래를 불렀지만 고집스레 경작을 하시더만, 당신 몸을 너무 혹사한 끝에 내려진 결정이 뒤늦은 감이 없잖으나 그나마 고집을 꺽어주심이 다행스럽다. 모든 과실이 그렇듯 꽃이 지고 열매가 생겨날 때 우세한 놈을 제외한 나머지를 추려내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배의 경우에는 종이를 싸지 않고 이렇게 방치하면 돌배가 되어버린다. 멀쩡한 밭에 멀쩡하게 자란 배를 저렇게 방치한다는 게 좀 아까운 생각이 없잖으나 생업으로 하는 이가 없으니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과수원에 도착하자마자 일복으로 갈아입은 뒤 길어질 장마에 썩어내릴까봐 감자와 양대 수확에 손놀림이 바빠진다. 양대는 까서 밥에 한줌씩 넣어먹어도 좋고, 파란 것은 껍데기째 삶아도 훌륭한 간식거리다. 한참이나 감자고랑을 파서 감자를 캐는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배꼽시계는 어김없이 꼬르륵 때를 알린다.
점점 비는 굵어지고 배꼽시계는 어김없이 꼬르륵 때를 알린다. 그럴 즈음에 울리는 휴대폰. 아침에 부산에서 작별인사를 나눈 누나들이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닷없이 점심을 싸들고 들이닥쳐서는 빗속 원두막에서 좌판이 벌어진다.
원두막 바닥에 간단하게 포장지를 뜯어펴고선 싸온 점심거리를 펼쳤다. 일단 삼겹살 구워주시고, 채전에서 금방금방 조달하여 흙만 털어낼 정도로 물에 쓰윽 헹궈서 먹어도 걱정할 것 하나없는 채소로 쌈거리를 준비했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오뉴월 소낙비처럼 퍼주면서 키운 채소나 과일은 유무익을 떠나 일단 맛이 싱거운데, 직접 기른 남새는 그런 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원두막 처마에서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삼겹살 구이에 막걸리 한사발은,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맛과 정경이다.


풍만한 배를 두드리며 돌아본 장대비 쏟아지는 배밭 곳곳의 풍경들... 다시 배나무밭 순례에 나섰다. 나무를 반 정도 베어낸 자리에 심은 채소들이 어쩌면 그리 이쁘게들 돋아나는지... 피망 옆의 고추는 원래는 파프리카여야 했다. 누나가 시장에서 피망을 사면서 파프리카 모종도 달라고 했다는데, 모종 파는 아줌마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막상 열리고보니 고추모종이었단다.




고구마와 파는 얼마전 집에 들렀을 때 직접 고랑을 내고 5일장에서 모종을 사다 심어서 여늬 작물보다 애정이 깊다. 새줄기가 뽀족뽀족 잘 돋아나는 것 같다. 산짐승들과 몇대 몇으로 나눠먹기를 해야할런지는 가을 수확까지 두고 볼 일이나, 제발 알이 생기기도 전에 잎사귀부터 확 뜯어먹는 반칙 플레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야생에서 날아온 씨가 싹을 튀운 둥글레도 지천이고, 올해는 다섯 형제가 골고루 가져갈 간식거리로 고구마와 단호박을 꽤 많이 심었다.

'가지군'과 '오이양'도 상태 좋아보이고, 고추는 아직 풋맛이 나지만 햇빛을 받아 약 오르면 장에 찍어먹기 적당하게 독이 오를 것이다. 농약을 전혀 안 친 배추와 열무 이파리가 벌써부터 벌레들의 표적이 되었는데, 잎채소들은 약을 안치면 거의 이꼴이 된다.
2007년 6월의 마지막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