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재 이상설 평전 - 독립운동의 선구자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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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평전/김삼웅/채륜/헤이그 밀사로 갔던 이 사람을 아시나요?

 

 

 

 그동안 헤이그 밀사로 갔던 보재 이상설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교과서에서 몇 줄로 만나게 다였는데요.  교과서에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 열사가 을사늑약 후 일본의 외교권 강탈의 불법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성을 알리려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헤이그 밀사로  갔고 이들은 일본의 훼방으로 회의장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이에 울분한 이준은 자결했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최근에 몇 권의 역사서를 통해 3인의 밀사가 헤이그로 가기까지의 험난한 과정과 이들의 충정을 알게 되면서 헤이그 밀사로 간 이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보재 이상설 평전.

요즘 같은 시국에 정치인에 대한 실망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국민을 배신하지 않는 정치인,  믿고 나라를 맡길 만한 위인이 지금 한국 정치계에서는 찾기 힘들기에 앞으로의 미래 정치도 그리 밝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앞서간 위인들을 통해 위안을 받고 싶어서 읽은 책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던 을사늑약의 과정, 헤이그 밀사 특파의 전말, 해외에서 항일운동과 독립운동, 민족 계몽운동에 열정적이었던 해외 투사들의 노고, 이상설이 해외를 떠돌며 뿌린 교육과 독립운동의 씨앗들을 알 수 있었는데요. 보재 이상설의 행적과 정신, 그가 안중근이나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미친 영향력 등을 보며 그 시절의 한국인들에겐 희망이 있었겠구나 싶었답니다. 이상설을 비롯한 애국애족 정신이 가득한 열사들이 온몸과 온 마음으로 대한독립과 국민계몽을 위해 헌신하며 모범을 보였으니까요.

 

이상설의 삶을 보면 지식인의 삶의 본보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애써 배우고 민족을 위해 실천하고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판단력과 용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을사늑약의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았기에 그 과정의 불법성과 부당함에 울분을 토했던 이상설. 그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1894)에 합격하면서  조선이 망국이 되는 과정을 지켜본 조선의 관리였는데요. 한림학사, 세자시독관, 성균관 교수와 관장, 의정부참찬  등 관직을 거쳤습니다. 그는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대한제국을 보며 여러 번 사직을 고했지만 고종의 만류로 의정부 참찬을 하며 어전회의를 이끄는 자리에 있었는데요. 고종에게 '죽음으로 비준을 거부하라'고 상소를 올렸던 이상설은 을사늑약을 막기 위해 스스로도 노력했지만 일본의 을사늑약이 있던 중명전 어전회의에 일본군의 저지로 출입봉쇄되면서 외교권 강탈의 치욕스런 소식을 장외에서 들어야 했습니다. 고종도 없이 공포분위기에서 강탈된 을사늑약의 소식을 접한 뒤에 자결한 민영환을 보며 자신도  국권상실을 깨닫지 못한 국민들에게 국가가 망하게 된 원인을  알리는 연설을 종로에서 한 후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는데요. 잘못되어가는 나라 상황에 비분강개하면서 사직소를 내고 북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열어 민족교육에 힘을 쏟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준, 이위종과 함께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백지밀서를 들고 참석했는데요. 하지만 자국의 이익을 노린 제국들의 논리와 일본과 미국의 방해로 달성하지 못하고 이준의 죽음 이후엔 각 나라를 돌며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위법성을 알리기 시작하는데요. 그런 이상설의 활약에 일본은 본인도 없는 재판을 열어 이상설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리게 됩니다. 그 이후로 이상설은 귀국하지 못하고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를 돌며 독립활동과 교육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인해 사형선고를 당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상설은 더욱  독립운동과 교육, 계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유림 대표인 유인석, 이시영, 홍범도, 안중근 등과 만나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하게 되는데요. 정치, 사회, 과학, 수학, 철학, 종교, 외국어에 능한 학자이자 개혁가였던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식을 민족을 위한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다른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열기를 지피는 역할을 했답니다. 

그는 미국에서 애국동지 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 러시아에서 지도자들과 한민족을 모아 국민회를 조직하고 한흥동 건설하고 13도의군 편성, 성명회 선언, 권업회 조직, 권업신문 발간,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 신한혁명당 창당 등 온몸과 온 정신으로 항일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는데요.  강제퇴위 당한 고종에게 연해주로 망명해 13도의군을 이끌어 줄 것을 상소하기도 했고 상하이 임시정부(1919)보다 5년 앞서 헤외에 최초의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가 세우면서 정도령에 피선되어 일하기도 했습니다.

 

 

고종의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가서  밀사로 가는 과정, 배워야 살고 알아야 산다, 실천해야 산다며 북간도나 연해주 등 해외에서 한인사회에 항일정신과 민족정신을 일깨운 활동들 등 역사 교과서에서는 보지 못했던 내용들을 보며 정치 지도자의 표본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지도자를 보며 그 시절의 선조들은 독립의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지금의 한국 지도자와는 달라도 많이 다른 지도자입니다. 

 

 

 요즘 위정자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이 도를 넘었기에 다음 선거에 누굴 뽑을 지 고심이 커가는데요. 대통령을 비롯한 국민을 대신해서 잘 해달라고 나라의 정치를 밑겼더니 상식 이하의 정치로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서로 입을 맞추고 위증을 하고 있기에 말입니다. 그들의 위증이 더할수록 그들을 뽑아준 국민의 입장에서 자괴감은 깊어지면서 동시에 정치에 무심했다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일찌기 독립운동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 받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것을 막았다면 이런 일이 가당키나 했을까요. 『보재 이상설 평전』을 읽으며  헤이그 밀사들의 활약과 그 시절의 독립운동사를 알게 되니 더욱 지금 정치인들의 가증스런 장난이 역사 앞에서 어떤 판단을 받게 될지 무섭기까지 합니다. 국민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일할 정치인이 어디 없을까요. 다음 선거에 대한 고민이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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