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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평점 :
프랑스 유언/안드레이 마킨/무소의뿔/시베리아 초원지대와 프랑스를 잇는 대서사시~
모든 결과물이 그렇듯 소설도 작가적 경험과 상상의 산물일 겁니다. 작가가 겪은 희노애락의 농도만큼 소설의 깊이와 넓이, 맛도 달라질테니까요. 그러니 특이한 이력의 소설가라면 그가 쓴 소설 역시 특이할 수밖에 없겠지요. 러시아와 프랑스에서의 삶을 두루 경험한 작가의 소설 속에는 시베리아 대자연의 웅장함과 프랑스적 섬세한 문체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기에 색달라 보이고 특이합니다.
글쓰기가 단지 단어와 문체, 그리고 문장들의 연쇄로만 요약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관점이다. -안드레이 마킨
저자인 안드레이 마킨은 시베리아 초원지대 볼가 지역에서 자랐고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했고요. 파리 여행 중에 정치적 망명을 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데요.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살려낸 자서전 요소가 다분히 들어간 소설입니다. 세살 적부터 할머니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공산 치하에서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사용이 가능한 작가였는데요.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작가적 경험이 잘 우러나 프랑스 문학과 러시아 문학의 융합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저자는 이 작품으로 프랑스 최고문학상인 공쿠르상, 고등학생들이 선정한 공쿠르상, 메디치상을 수상했답니다.
쁘띠뽐므
사진 찍을 때 치-이-즈처럼 입모양을 예쁘게 낼 때 내는 프랑스어인데요. 평소에 우아한 미소와는 거리가 멀었던 할머니였기에 옛사진 속에서 할머니의 우아한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아이들은 신선한 충격를 받는데요. 아이들은 옛사진 속 외할머니의 화사한 '쁘띠뽐므' 미소에 호기심을 가지고 옛추억을 더듬으면서 할머니의 과거 속으로 여행합니다. 그 속에서 한때는 우아했던 할머니가 피란만장한 삶을 겪으면서 우아함과는 멀어지는 역사의 주인공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시베리아 초원지대 인근 마을 소도시 사란짜에 살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외할머니의 러시아에서의 격동의 삶에는 나폴레옹 대군의 개선 행렬, 세계제1차대전, 러시아 혁명, 러시아 황제의 마지막 처참한 모습, 부르조아의 몰락, 공산화 혁명의 결과로 광기와 죽음으로 얼룩진 폐허가 된 마을 등 프랑스 역사와 러시아 역사 속 격동기가 함께 하는데요. 역사는 모든 것을 바꾸듯 할머니의 미소마저 바꿔 버립니다.
프랑스 유언!
러시아 역사와 프랑스 역사, 시베리아 대자연 속에서의 삶을 더 잘 알았다면 이해가 더욱 쉽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공산화가 되는 과정이나 넓은 시베리아의 눈덮인 겨울 풍경 등의 섬세한 묘사를 보며 마치 영화 〈닥터 지바고〉의 눈내린 설원 속 주인공들의 이별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시베리아 초원지대에 사는 외할머니댁을 방문했던 프랑스 소년의 눈에 비친 광활한 대지나 대초원에서의 삶이 무척 시적이고 세련된 문체로 표현되어 있기에 낭만적으로 느껴지다가 프랑스어를 쓰는 할머니의 러시아에서의 생활이 낭만에서 고통으로 전환되면서 광기의 러시아 역사를 마주한 부분은 역사적 교훈을 얻기도 하는데요. 요즘 한국의 지도자나 정치권의 광기가 겹쳐지기도 했답니다. 일반 국민의 의식 수준보다 못한 정치인들의 의식 수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던 대통령의 배반, 그런 배신감에도 우아함을 잊지 않는 국민들의 정치 의식이 오버랩되기도 했답니다.
이 책은 격동의 세월을 견뎌낸 이들에게 바치는 소설이자 지금의 프랑스와 러시아를 있게 한 역사의 주인공들에게 바치는 소설인데요. 시베리아 대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공산혁명이 준 충격적인 폭압 속에서도 우아함을 잊지 않으려는 사진 속 할머니의 짧은 미소, 프랑스와 러시아 역사를 담은 소설이기에 웅장한 느낌입니다. 이왕이면 러시아의 대자연의 풍경이나 풍습을 잘 안다면, 그 역사를 잘 안다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