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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부르심을 받다 -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 순교 150주년 기념
스텔라 프라이스 지음, 정지영 옮김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스텔라 프라이스/코리아닷컴/개신교 최초의 순교사,
제너럴셔먼호를 타다~
선교를 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을 순교라고 하는데요. 대개 순교가 그렇듯 조선에서도 개신교 최초의 순교 이후에 개신교 전파가 활발했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역사책에서 배운 제너럴셔먼호 사건 속에도 개신교 최초의 순교가 있었다니 역사의 뒷 이야기를 읽는 듯 합니다. 더구나 그
순교 이후로 평양에 개신교가 퍼지기 시작했고 평양 부흥의 디딤돌이 되기도 했다니 희한한 일입니다. 제너럴셔먼 호 사건은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충돌 정도로 알았는데요. 당시 문호 개방에 대한 준비가 되지 못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국 세력의 거센 문호 개방 압력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기에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옹호하기도 했었는데요. 그런 와중에 조선에 개신교를 전파하고자 한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가
있었다니, 참으로 드라마틱합니다. 그의 순교 이후로 평양엔 개신교가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니 그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군요. 더구나
그가 뿌린 성경으로 개신교인이 된 이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의 업적을 기리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면 그는 천국에서도 기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조선은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던 시기였는데요. 그 위험한 시기에 조선 땅을 밟으면서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토마스 목사의 일대기를 보며 토마스 목사가 조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 후에 조선 땅을 밟았더라면 죽음을 면치 않았을까 싶어서
안타까움이 있네요.
책을 통해 세계에 제국주의 광풍이 휩쓸던 시절에 영국에서 개신교의 부흥이 일어나면서 중국 선교사 파송이 이뤄지는 이야기가 낯설면서도 그
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목사가 신학 공부를 하고 중국어를 배워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는 여정엔
선교에 대한 토마스의 열정을 볼 수 있었어요. 중국에 온 토마스는 중국에서 만난 조선인을 통해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선
선교사로 오기를 자원했는데요. 하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기에 선교사가 아닌 일반인의 신분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제너럴셔먼 호를 타기
전에 해군 제독의 통역사로 있으면서 조선을 방문하려다 백령도까지 온 적도 있기에 더욱 조선 선교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가 선교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를 탔던 이유엔 조선에 대한 선교 열망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가 제너럴셔먼 호를 탔던
시점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기에 아무리 통상을 목적으로 하던 제너럴 셔먼 호라고 해도 위험스런 항해였을 겁니다.
더구나 통상이 목적이라던 제너럴셔먼 호가 조선 정부의 경고를 무시한 채 평양 만경대까지 깊숙히 침투했다는 사실은 조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겠죠.
아무리 선의의 통상 요구라해도 조선을 무시하던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대동강물이 빠지면서 좌초된 제너럴셔먼 호는 조선 관군과 총질을 하다가 성난 평양 사람들에 의해 불에 타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답니다. 그리고 토마스 목사는 배에서 끌려나와 강변 모래 위에서 '야수'를 외치고 성경을 건네며 최후를 맞았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의 시작에 제너럴셔먼 호 사건과 그 배를 탔던 토마스 목사의 순교가 있었다니 역사의 뒷담화를 읽은 느낌입니다. 조선
개신교의 부흥과 한국 교회의 발전, 지금의 한국을 본다면 토마스는 어떤 말을 할 지 궁금해집니다.
제너럴셔먼호를 탔던 개신교 최초의 순교사 토마스와 저자의 인연도 신기하네요. 저자는 영국 웨일스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남편과 함께 우연히 웨일스 여행을 하던 중 토마스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로는 남편과 함께 토마스가 자랐던 웨일스의
집을 사들여 살면서 선교와 토마스 목사를 기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