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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기억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9
윤이형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6월
평점 :
[개인적 기억/윤이형/은행나무]기억의 천재가 갖는 슬픔에 대해
기억을 잘 한다는 건 대체로 몹시 근사한 일이다. 시험을 앞둔 학생이라면 천재적 기억력을 갖고 있기를 은연중에 소원할 것이고, 취업 준비생의 경우도 천재적 기억을 갖지 않음을 답답해 할 것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기에 직장 생활에서든 가정생활에서든 망각보단 기억에 더욱 끌리는 것 같다.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 9번째로 만난 윤이형의 <개인적 기억>은 기억과 망각이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한 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알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후 전신마비에 이른 시골 청년 푸네스가 갑자기 천재 기억력의 소유자가 되고, 자신의 기억력을 통해 인간의 지각능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통찰한 내용을 담은 단편소설이다.
윤이형의 <개인적 기억>은 미래세계인 2058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병명도 생소한 ‘과잉기억증후군’을 앓는 남자의 주인공의 개인적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아련한 안타까움을 남기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지율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후 텅 빈 책장을 보며 문득 ‘책을 읽어야겠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어릴 적부터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게 되면서 기억통제 훈련과 약물요법의 효과로 이제야 남들처럼 평범한 기억력을 갖게 되었는데, 다시 독서라니…….
지율은 20년 전 여자 친구 은유가 읽어 준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기억에 의존해 필사를 하게 된다. 소리로 기억된 소설이었기에 기억 속 은유의 목소리에 의존한 소설 필사를 하게 된다. 그것도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닮은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필사를 하는 동안 목소리의 주인공 은유와의 사랑도 기억해내고, 어머니와의 기억, 아버지와의 기억도 되새기고……. 그러다가 택배대출 서비스를 통해 도서관에서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대출 받게는다. 택배대출서비스라니, 좋은 아이디어다. 점점 택배 세상이 되고 있기에 미래형 도서관 서비스일 게 분명하다.
어쨌든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선 초기억을 유지하는 과잉기억증후군 남자 지율, 그와 반대로 기억력이 약해지는 여자 은유의 대비가 아이러니하다. 기억의 천재가 갖는 슬픔도 있고, 망각의 보통 여자가 갖는 아픔도 있기에 세상엔 기억과 망각의 적절한 조화가 최고이겠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남들은 부러워할지도 모를 과잉기억증후군으로 치료를 받았던 남자의 아픔에 감정이입하다보니, 불필요한 기억이나 아픈 기억은 잊어야 살 수 있다는 깨달음도 얻게 된다. 때로는 아무 기억도 없이 텅 빈 머리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