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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장의 전당표 - 전당포 주인이 들려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29
친쓰린 지음, 한수희 옮김 / 작은씨앗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스물아홉 장의 전당표] 잘 몰랐던 전당표, 또 다른 세계다.
전당포란 자고로 급전이 필요할 때 고가의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려가는 곳이다. 그런 전당포가 요즘에도 있나 보다. TV의 시대극에서나 보던 수십 년 전의 흔적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저자인 친쓰린은 중학교 때 전당포에서 하숙을 했고, 17 살에 가정형편으로 전당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당포를 운영하면서 장학 기금도 설립하고 이렇게 책도 낸 특이한 이력의 전당포 주인이다.
‘할머니의 수미전’이 인상적이다.
천 선생은 자신의 할머니가 유품으로 주신 수미전을 들고 온 고객이었다. 수미전(手尾錢)은 죽기 전 자손에게 기념으로 주는 돈인데, 자손에게 돈이 끊임없이 들어오길 바라는 뜻을 담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돈을 들고 와서 돈을 빌려 달라는 황당한 경우였다. 천 선생은 할머니가 주신 유언 같은 돈이기에 도저히 쓸 수 없으니 다른 돈으로 우선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부유하고 권세도 있는 집안으로 시집 간 천 선생의 할머니는 많은 손자들 중 유난히 외손자인 천 선생을 예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랑과 기대와 달리 천 선생은 도박 중독에 걸려 집 안의 재산을 팔아 노름 밑천으로 삼을 정도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손자에게 수미전을 주면서 이젠 제대로 된 일을 찾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천 선생은 어렵사리 도박을 끊게 되었고, 노점상이라도 하려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려 했지만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할머니가 주신 수미전도 있었지만 수미전에 담긴 할머니의 기대와 염원을 알기에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천 선생은 전당포에서 돈을 빌려 해산물 볶음 가게를 냈고, 지역에서 유명한 가게가 되었다고 한다. 수미전에 담긴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감동이다. 끊기 어렵다는 도박중독에서 손자를 벗어나게 했으니 말이다. 할머니의 수미전이 결국 외손자를 바른 길로 인도한 셈이다.
전당포 하나 하나에는 제각각의 사연들이 있다. 민며느리였던 어느 여공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거액의 지참금을 마련해야 했을 때 공장 동료들이 금붙이를 모아 도와준 이야기, 마약의 늪에 빠진 뒤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서야 벗어날 수 있었던 샤오쩡, 제자의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팔게 된 스승의 만년필, 자식 학비를 위해 시계를 파는 아버지, 학교 폭력과 엮인 전당포, 장제스 총통의 권총, 금으로 만든 장군의 별, 도박 빚 때문에 맡긴 옌예계 무대 의상, 고학생의 타이베이대학교 학생증, 군인 보급증 등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전당포에서 만날 수 있는 사연이다.
비싼 물건을 맡기고 돈을 융통하는 전당포지만 때로는 학비가 없는 학생에게 학비를 융통해주거나,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피해자나 가해자들을 훈계해서 깨우침을 주는 전당포다. 모든 전당포에 각각의 딱한 사정들이 있겠지만 이리도 다양한 사연들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드라마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독특한 이야기들이다.
책 속에는 정을 준 9장의 전당표, 인생의 깨달음을 준 11장의 전당표, 경영을 알려준 9장의 전당표 등 모두 29장의 전당표에 얽힌 인생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전당표에 얽힌 이야기를 읽다가 보니 마치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느낌이다. 사건과 사고, 인정과 훈훈한 미담이 넘치니까. 잘 몰랐던 전당표 이야기엔 흔한 이웃의 이야기도 있지만 급하고 어려운 이웃들의 특이한 이야기가 많기에 또 다른 세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