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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헤세의 서평을 읽는 기쁨…
독일의 대문호인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섬세한 문장을, 화려한 문체를 정말 사랑한다. 사실 여고 시절, <수레바퀴 아래서>, <유리알 유희>, <데미안>, <게르트루트>, <싯다르타> 등 헤세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겉멋에 취한 독서였지만 헤세의 문장들을 편지 귀퉁이에 적어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헤세의 문장을 인용하는 일이 그때는 굉장히 폼 난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들어서 헤세의 작품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의 문장들이 몹시 매력적임을 절감한다. 그래서 궁금했다. 헤세의 생각과 작품에 영향을 미친 이들은 누굴까, 헤세는 어떤 작품을 즐겨 읽었을까, 그런 작품에 대한 느낌은 어떨까 등.
《데미안》의 작가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이라니,
헤르만 헤세는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출간했다. 중병에 걸린 20대 작가인 싱클레어가 쓴 소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사람들은 이 무명의 작가를 파헤쳤다. 결국 40대의 저명한 헤세의 작품임이 밝혀지면서 헤세는 《데미안》이 자신의 작품임을 고백하게 된다. 당시 헤세는 《데미안》으로 젊은 작가를 위한 폰타네 상을 받았기에 이마저도 반납해야 했다. 이후 4쇄부터는 헤르만 헤세의 이름으로 《데미안》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입문》에 대한 헤세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그는 정신분석학은 이제 소년기를 벗어난 미래의 학문이라고 규정한다. 무의식의 심리학이 학문의 변두리에서 점차 심리학의 중심으로 서게 될 것임을 보았다.
오래 기다려온 이 책은 실제로 기대했던 그대로이다. 곧 프로이트 이론을 체계적으로 쓴 것으로, 무의식의 심리학과 분석 기술을 서술했다. (중략) 이 정신이 지닌 온갖 장점들이 이 책에 드러나 있다. 그의 명료함, 참을성 있는 결합의 재능, 정교한 표현력 그리고 위트까지도.(187쪽)
헤세는 같은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를 굉장히 야누스적인 작가로 설명한다. 어떤 면에서는 낭만주의자, 다른 면에서는 반낭만주의자가 괴테라는 것이다. 괴테는 경건한 기독 신자이자 이교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애국주의자인 동시에 그 반대의 평가를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용들을 동원해 잘 입증한, 언뜻 보기에 아주 정밀한 괴테에 대한 거의 모든 발언은 뒤집어보면 놀랍게도 근본적으로 그 반대도 똑같이 맞는다. (중략) 자기 시대 기독교 신자들에게 괴테는 뻔뻔스런 이교도이자 위험한 반모럴리스트인데, 후대에는 경건함과 인선의 위대한 스승이다. 이렇듯 괴테는 여러 얼굴을 가졌고, 그 모두가 야누스처럼 양면적이어서 똑같이 명료하게 입증되는 이면을 갖는다. 그가 죽은 다음 수십 년 동안 도이치어 문학은 그를 이미 극복된 보수주의자, 심지어 반동으로 여겼다. 하지만 뒷날의 독자들에게 그는 선동가이며 혁명가였다. (294~295쪽)
석가모니와 공자의 가르침 등 동양 고전에 심취한 흔적도 괴테의 서평으로 만날 수 있다. 헤세는 낯선 세상에서 온 공자의 《대화》을 읽으면서 처음엔 어려워 하다가 점차 수용하게 되고 나중엔 끌리게 된다. 더구나 전혀 다른 서양과 동양의 종합 가능성까지 비추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동서양의 융합을 내다 본 것이다.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낯선 공기를 숨 쉬는 듯한, 우리가 삶에서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과 다른 맥락의 공기를 숨 쉬는 듯한 느낌을 거듭 받게 된다. (중략) 우리의 개인주의 문화를 자명하다 여기지 않고, 대립되는 것과 비교해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읽어가는 중에 순간적으로 두 세계의 종합 가능성이라는 극히 빛나는 표상이 생겨난다. 이 낯선 인물 공자의 본질에서 가장 깊은 핵심은, 서양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본 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로테스크한 일그러짐처럼 보이던 것들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고, 처음에는 놀라 뒤로 물러서게 했던 것들이 매력적이라고, 심지어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306~307쪽)
짧게 쓴 서평이지만 헤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글이기에 마치 그와 소통하는 것 같다. 내가 읽은 작품에 대해서 100년의 간격을 둔 시간여행을 통해 헤세와 접선하는 느낌이다.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거장에 대한 헤세 식의 사유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동양 문화와 동양 정신에 대한 괴테의 찬사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헤세가 대단한 애서가이자 서평가임을 처음 알았다. 기숙학교를 나와 서점에 취직해서 겸업으로 한 일이 책을 읽고 서평 쓰는 일이었다니. 헤세가 쓴 서평과 에세이는 3,000 편이 넘을 정도인데, 이 책에서는 73편의 글만 간추렸다고 한다. 100년의 간격을 두고 헤세의 서평을 있는 기쁨이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대문호였던 헤세가 책을 사랑하며 서평을 썼다는 사실에서 끈끈한 동류의식을 느끼게 된다. 매일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 헤세의 서평을 접할 기회를 주는 책이기에 정말 소중한 책이다. 헤세가 더욱 가까이 와 있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