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
김기택 옮김, 임홍빈 해설, 이부록 그림, 유성룡 원작 / 알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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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알마/유성룡/김기택] 임진왜란 7년 후기, 유성룡이 남긴 교훈들…….

 

서애 유성룡의 임진왜란을 끝낸 후기이자 통한의 기록인 징비록의 관심이 요즘 뜨겁다. 소설로도 나오고 드라마로도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징비록을 읽을수록 속이 타고 분노가 들끓고 한숨이 나오는 건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무의미하다지만 자꾸만 가정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이 책을 읽을수록 안타깝고 생각할수록 분통 터지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선조가 좀 더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을 가졌더라면, 권력층들이 붕당보다는 힘을 합쳐 국력을 키우는데 힘썼더라면, 이순신과 권율 같은 명장을 좀 더 일찍 발탁해서 군대를 혁신했더라면 어땠을까.

 

 

시경지난 일의 잘못을 주의하여 뒷날에 어려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쓴 이유다. 유성룡의 <머리말> 중에서

 

국보 132호인 징비록임진왜란 당시 영의정과 도체찰사라는 직책으로 전시행정을 담당했던 서애 유성룡의 쓴 그 날의 기록물이다. 임진왜란 7년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글이며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말자는 교훈의 기록이다.

 

책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대내외적인 환경과 국제적인 상황, 조정의 분위기부터 나온다.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가장 안타까운 대목이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막지 못했으니 말이다.

 

일찍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왔던 신숙주가 성종에게 남긴 유언은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라는 것이었다. 이에 성종은 통신사를 보내려 했고, 풍랑이 심해 통신사가 되돌아온 경우가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 전국을 통일한 일본은 무사들의 힘과 전술을 바탕으로 조선을 거쳐 명을 칠 계획까지 하고 있었다. 일본은 전국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서는 꾸준히 사신을 보낸 자신들과 달리 조선이 통신사를 보내지 않았다며 이전과 달리 굉장히 불만을 터트리며 도발적으로 나왔다. 조선에 온 일본 사신들은 이전과 달리 굉장히 거만했고, 온 세상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라는 도발적 문구까지 편지에 넣을 정도였다. 더구나 사신으로 온 야스히로는 조선의 창자루가 짧다고 무시하고, 후추 통 하나에 무질서해지는 조선인들을 보며 조선이 망할 것이라며 대놓고 얘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조선을 오가는 일본 상인들 사이에서도 일본의 조선 침략 소문이 퍼졌을 정도였다. 이렇게 조선에 와서 조선을 염탐하던 일본 사신들과 달리 조선은 이들의 말을 묵살하거나 이들의 행동을 무시해버렸다. 만약 일본 사신들의 오만방자한 말과 행동의 배경을 캐고자 했었다면 그들의 저의를 알 수 있었을 텐데…….

 

 

두 번째 사신으로 온 소 요시토시는 통신사를 데려가기 위해 끈질기게 버텼다. 그 결과 15903월 황윤길과 김성일, 서장관으로 꾸려진 통신사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 통신사를 대하는 태도도 오만 방자하고 예의가 없었지만 일본왕의 답장은 더 가관이었다. 그 답장에는 일본의 전쟁의도,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쳐들어가겠다는 계획을 분명히 드러냈다. 하지만 문제는 조선의 지도자들이었다.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분위기라고 했지만 김성일은 그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이 두 지도자의 정반대의 견해는 임금과 정치 세력들을 엄청 헷갈리게 했으리라. 그래도 임금에게 보낸 일본의 답장을 파악했다면 미리 대비를 하지 않았을까. 너무나 무사 안일한 권력층의 대응이 기가 막힐 정도다.

 

뒤늦게 왕명을 받아 지방의 성을 쌓고, 무기를 갖추고 점검하도록 했지만 전쟁이 없었던 시절이라 모두들 천하태평으로 대처했다고 한다. 더구나 최고의 명장인 신립조차도 일본의 조총이 쏜다고 다 맞추느냐며 일본을 얕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일본군이 쳐들어온다는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지자 선조는 뛰어난 장수를 뽑아 올리라고 했고, 이에 유성룡은 이순신과 권율의 발탁하게 된다.

 

운명의 날인 1592413일 저녁 일본군의 배가 부산 앞바다를 덮을 정도였다. 일본은 다음 날 벌어진 전투에서 이미 이 전쟁의 승리를 자신하지 않았을까. 순식간에 정발의 부산진성이 무너졌고, 경상좌도 수사 박홍은 도망쳤고, 병사들도 도망치는 부산 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비록 송상현이 동래성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이미 수적으로 역부족이었으니까. 2만 명의 일본군 대 2000명의 조선군의 전투, 신식 무기인 조총 대 구식 무기인 칼과 활, 돌멩이의 무기 대결, 기를 쓰고 침략하려는 일본군과 도망치기 바빴던 조선군 등 비교할수록 조선군의 패배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니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지나 평양까지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혁혁한 일본군의 승리였다. 더욱 아쉬운 것은 4일이 지나서 임금에게 전쟁소식이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신속 정확해야 할 정보가 늦어지면서 전략에도 차질을 빚었을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유성룡은 전시 재상이 되어 선조의 피난을 책임졌다. 40여 일만에 평양성까지 함락되자 명나라는 군대를 보냈고,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에 대항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의 승리로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했다는 점이다. 만약 명나라 원정군대가 없었더라면,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의 불패신화가 없었다면, 각 지역 민초들의 의병 봉기가 아니었다면, 유성룡의 헌신적인 진두지휘가 없었더라면 어땠을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서늘하다.

 

미리 정비된 군사제도, 잘 훈련된 군인들, 초기 대응의 민첩함이 있었더라면 그리 허망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400여 년 전의 역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울림을 주고 일깨움을 주는 이야기에 전율이 일 정도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지 않으려면, 세계열강의 거친 경쟁 틈바구니에서 굳건히 생존하려면 유성룡의 징비록의 교훈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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