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의 징비 - 치욕의 역사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박기현 지음 / 시루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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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징비] 참회와 반성의 임진왜란 기록…….

 

 

임진왜란 때 이미 대동아공영을 꽤했던 왜적은 욱일승천기까지 준비하고 철저하게 계획하고 저지른 전쟁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왜적의 침입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방관했으며 당쟁에 휩쓸렸던 때였다. 임진왜란이 허술한 군사체제, 국제 정세의 무지가 낳은 결과였기에 더욱 아쉬운 전쟁이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의병과 의병장, 민초들의 저항이 없었더라면, 만약 류승룡이 전시재상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망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징비록은 당시 전시 재상이었던 류승룡이 남긴 7년 전쟁의 원인과 경과, 그 결과와 참회의 기록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는 볼 수 없는 국제적인 정세와 조정의 움직임, 전국 백성들의 형편, 전쟁을 지휘했던 자신의 느낌까지 솔직하게 담겨 있기에 임진왜란에 대한 진정한 전쟁기록인 셈이다.

 

전쟁 전의 일본을 보자.

일찍이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 통일 전쟁을 펼치면서 일본의 경제와 상권을 장악했다.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총을 보급하게 되면서 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고 일본군의 군사력도 신식으로 강성해지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의 불만을 분출시키고자 조선을 넘어 명을 정벌하는 대동아 공영을 야심차게 준비하게 된다, 조선 통신사를 통한 꾸준한 조선 탐색전과 철저한 전쟁 준비를 마친 히데요시는 일본사신으로 온 황윤길과 김성일에게 명나라를 침입한다는 입대명의 답신을 주기에 이른다.

 

한편 전쟁 전의 조선을 보자.

임진왜란이 있기 전 류성룡은 조선의 6대 임금을 모신 정승이었던 신숙주와 성종의 대화록에서 큰 예지력을 발휘한다.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지 말라는 신숙주의 권고를 보며 왜를 예의주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로,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왜적의 침공의도를 알고부터는 명나라에 알리고 전란에 대피하자며 선조에게 청원하기도 한다. 또한 조선의 방어체제를 제승방략에서 진관제로 환원하자는 건의도 하고…….

조선 최고의 명장인 신립과 마주한 류성룡은 왜놈들의 전쟁 준비에 대한 소문을 대해 만일 변란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할 지를 묻기도 한다. 하지만 신립은 왜놈이 조총으로 얼마나 맞힐 수 있겠냐며 왜놈을 무시한다.

 

더구나 조정을 혼란케한 것은 일본사신으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는 전혀 상반된 보고였다. 왜국이 전쟁 준비를 마쳐놓은 듯하다는 서인인 황윤길의 보고에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그런 낌새가 없으니 괜히 두려워하지 말라는 보고를 올리게 된 것이다. 당파적 논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에, 일본의 상황을 알면서도 황윤길의 보고와 전적으로 반대되는 보고를 하는 김성일의 보고에 혼란스런 조정은 무사안일을 택하게 된다. 명나라를 침입하겠으니 조선을 길을 내어 달라는 왜에 대한 보고를 제대로 했더라면, 이런 혼란을 막을 수는 있었을 텐데...... 두 사람의 보고가 상반된 이유가 당쟁 때문이라니.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터지자 조선의 초기 대응은 부실했고 정보도 엉망이었다. 새벽을 틈타 침입한 왜적 앞에 부산은 금방 쑥대밭이 된 것이다. 군사 20만에 4~5만 척의 왜선에 대한 정보를 군사 1, 적선 400척으로 보고되기도 한다. 쑥대밭이 된 부산의 초전 상황이 조정에 제대로 보고되지도 않았다. 더구나 초기의 전투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한 것은 가짜 병부와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이었고, 오합지졸에 엉성한 지휘체제여서 싸움조차 못하고 도망가기 일 수였다고 한다.

급기야 선조를 탓하는 양반들의 상소가 이어지고, 백성들의 원망과 비난의 목소리는 거세지고, 부산, 충주, 한양까지 삽시간에 뚫리고, 왜가 한양에 당도하기 전에 도성은 성난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탈 정도였을 정도다.

 

의주에 가서 기다리다가 명나라로 가자는 이항복, 북도로 가자는 윤두수의 건의가 있었지만, 국토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말라는 류승룡의 만류로 겨우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당시에 선조가 명나라에 들어가서 조선을 비웠다면 조선의 운명이 온전했을까. 임란 후 조선이 명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일은 쉬운 죽 먹기였을 것이다. 어쨌든 권위와 체통에 연연하던 선조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속물이 되어 버렸고, 최적의 요새지라는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의 패배로 한양은 순식간에 뚫렸고, 백성들의 궁에 대한 방화로 평양 진격은 더욱 빨라졌으니, 왜군이 조선을 얼마나 우습게 보았을까.

 

그나마 광해군의 활약과 결사항쟁으로 싸우는 병사들, 평양까지 순식간에 진격한 왜의 보급을 끊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진군을 멈추게 된 왜군, 조선을 넘보려던 여진족 누르하치의 구원병 제의를 거절한 류승룡은 명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고, 전쟁 중 이순신의 하옥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 등 긴박하게 흐르는 전쟁의 기록들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역사란 지나간 흔적을 되새기도 오늘의 삶에 교훈을 얻기 위한 기록일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라는 난리를 치르면서 조선의 역사가들은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록 유산을 중시하던 조선에서 그 많은 학자들은 왜 임진왜란에 대한 글을 남기지 않았을까. 막을 수도 있었던 난리, 일찍 끝낼 수도 있었던 전쟁이기에 가슴에 사무치는 회한이나 반성의 기록이 분명 필요했을 텐데 말이다. 혹시 가보로라도 남겨진 개인 기록은 없을까. 보다 많은 징비의 기록들이 전해졌다면 일제 강점기를 그리 허망하게 맞이하진 않았을 텐데……. 임진왜란이 일제강점기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기에......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참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1562(선조25)에서 1598년까지의 그 당시의 상황이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132)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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