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징비록 - 전시 재상 유성룡과 임진왜란 7년의 기록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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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징비록] 서애 류승룡이 남긴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들...

 

요즘은 징비록과 서애 류승룡이 대세인가 보다. 드라마로 만나고 있는 징비록을 소설로 만나다니. 임진왜란 7년 동안 전시를 이끌었던 전시 재상 류성룡이 쓴 징비록을 읽고 있으니 드라마와는 또 다른 만감이 교차한다. 국제 정세를 무시한 조정 중신들에게 속상했다가, 전쟁 중에도 당파싸움에 몰두하는 권력층에 분노했다가, 도성을 버리고 백성을 버리고 피난 가는 임금과 신하들이 괘씸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순신의 해전에서의 승리와 민초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모습에 가슴뭉클해지기도 하고, .....

 

 

 

 

소설로 만나는 소설 징비록은 서애 류성룡이 안동 하회 마을로 파직 낙향한 후 큰아들이 죽고 홍수가 난 뒤 서미동 농환재에 머물던 시절, 승지 이효원과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전쟁의 기록인 <호종일기>를 남긴 승지 이효원과의 만남은 전쟁의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통하는 사이였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시작은 일본 전국을 통일한 풍신수길의 야심에서 시작했다. 그는 외아들이 죽자 상투를 자르며 명과 조선 정벌을 외쳤고 세밀한 대동아 공영을 계획했다. 추운 겨울을 피해 따뜻한 봄에 조선으로 출정해서 여름엔 요동, 겨울엔 북경까지 점령한다는 조선과 명을 한꺼번에 삼키려는 거대하고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기초 작업으로 명호옥(나고야)에서 전진 기지를 마련하고 군비 마련, 전투식량 비축, 군사 징발, 선발대로 16만을 추렸다. 실제로 그 당시 왜군 병력은 전투병 158천 명, 예비군 88천 명, 후방 경비 병력 12천 명, 수군 8천 명을 편성하고, 인부와 사공까지 합하면 모두 2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 조선의 상황을 보면, 전쟁 전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 의도를 알고 대마도주 종의지나 승려 현소 등이 알렸지만 조선의 왕과 비변사에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병조판서 이이의 시무육조 건의도 무시했다. 하지만 류승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군의 동태를 수상히 여겨 정읍 현감인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했고 형조정량으로 일하던 권율을 발탁했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조선과 왜가 짜고 명을 친다는 소문에 흥분하고 있었기에,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을 달래야 했다. 조선은 의주 목사 김여물이 성을 고치고 군사훈련 하는 것마저 트집 잡고 명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며 김여물을 잡아 가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임란 중에 선조는 김여물을 꺼내 탄금대로 보내 싸우게 해야했고 그가 쌓은 의주성에서 피신까지 했다고 하니…….

 

전시상황임을 알리는 남산 봉수대 횃불이 5개가 피어오르는 중에도 불구하고 파벌싸움을 벌였던 중신들은 동래에서 송상현의 피 묻은 보고가 올라와서야 긴급함을 알게 되는 장면은 어이없어 실소를 금치 못할 정도다. 준비되지 않은 군사력으로 그나마 나라를 빼앗기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고......

 

어명을 받기 전에는 군사작전조차 펼치지 못하는 지휘체제인 제승방략으로인해 제대로 된 군사작전까지 펼치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황이 속출되고, 인력이 부족한데도 책임추궁을 하며 애꿎은 무인들만 죽이는 상황도 발생하고, 더구나 징집할 군인들을 기록한 병부엔 가짜 군인들로 가득하고, 무기고는 텅 비어 있는 실정이고, 결국 순식간에 동래가 무너지고,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왜군이 장악하게 되고,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압록강 입구인 의주까지 피신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선조는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 들어갈 생각까지 한 대목에서는 분노가...... 그래도 왕세자로 지명된 18세의 광해군이 남아서 전시 조선을 이끌며 백성들과 의병장들을 격려했던 대목에서는 위로도 받고......

 

세도가들의 무사 안일한 태도, 명나라까지 넘보는 일본의 치밀한 계획성, 전쟁이 발발하자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보다 먼저 도망치는 관리들과 장수들,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명나라까지 넘보는 분위기인데, 조선의 조정과 관리들은 그런 정보를 모두 무시하며 자신들의 권력욕만 채우고 있는 모습, 분노한 백성들이 왕이 빠져나간 궁을 불태우는 장면, 그 와중에도 왜에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덤비려는 군인들과 백성들, 목숨 걸고 대드는 모습에 정복 전쟁이 쉽지 않음을 예감하는 일본 무사들, 백성들의 저항에 뒤늦게 반성하는 조정,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해전에서의 승리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왜적을 떨게 한 이야기,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장과 의병들, 이런 숨 막히는 드라마가 또 있을까.

 

책에서는 욱일승천기로 불리는 일장기가 등장하는 내력도 나오고, 조선 국왕을 일본 천황으로 옹립하고, 일본이 명나라 황제가 되려는 시나리오 등 대동아공영과 내선일치의 뿌리가 여기서 시작했다니......

 

애초에 일본을 다녀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왜의 침략에 대한 보고가 일치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에 대비할 수 있었을까. 이순신 장군과 의병장, 선조의 중국행을 만류한 군신들, 면천법을 쓰면서까지 전쟁을 지휘했던 광해군이 없었다면, 류승룡 같은 명재상이 없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두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들이다.

 

 

 

 

징비록은 서애 류승룡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 난이 일어난 배경과 과정을 밝혀 다시는 이런 수모를 겪지 않도록 조선의 잘못을 징계하고자 쓴 기록이다. 전시재상이 되어 나라가 없어질 위기까지 몰리면서 느꼈을 비애가 전해지는, 유비무환의 충정을 담은 전쟁 기록이다.

 

참고로, 저자인 서애 류성룡은 중종 37년에 경상도 의성 지방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향시에 급제한 그는 21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고, 25(1566)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도 총괄했다. 선조가 난을 피해 개성으로 갔을 때 영의정이 되었고, 평양에서는 왜가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김성일(같은 동인)을 두둔했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해 백의종군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훈련도감의 제조를 맡아 군비 강화와 인재 양성을 도모한 전시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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