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이지 않는 집 ㅣ 아티스트 백희성의 환상적 생각 2
백희성 지음 / 레드우드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보이지 않는 집/백희성/레드우드]미스터리 같은 건축가의 집, 사랑과 추억의 향기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은 너무나 멋진 일이다. 새로운 사물의 탄생은 언제나 신기하고 특별한 감흥을 준다. 요리든, 예술이든 건축이든 모든 창조적인 일은 설렘과 전율을 선물한다. 특히 집을 짓는다는 건 가족들에게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사랑과 추억의 보금자리를 창조하는 일이다. 모든 집은 건축가의 손에 의해 절반이 지어진다면, 나머지 절반은 그 집에 살아가는 가족들에 의해 완성되는 법이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호흡하고 부딪친 기억의 자취다. 그러니 오래된 집은 많은 사연을 담고 있을 것이다. 집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가는 에세이가 무슨 소름 돋는 미스터리 소설 같다.
프랑스 파리 중심부인 시떼 섬은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섬이라고 한다. 건축가 루미에르는 시떼 섬에 있는 낡고 저렴한 저택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루미에르는 세계적인 파리건축사무소 팀장이기에 낡은 저택을 자신이 직접 고치고자 저택을 방문하게 된다.
고풍스런 집, 음표 모양의 쇠 장식, 거미줄과 먼지, 뒤틀린 문짝, 삐걱거리는 계단, 낮은 계단 난간, 난간에 파인 홈, 아주 오래된 나무 마룻바닥, 음산한 분위기, 붉은 와인 빛의 대리석, 주황빛의 돌 등을 보며 루미에르는 이 집을 지은 건축가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느낀다. 그리고 저택 주인의 초대을 받아들여 집 주인을 만나러 스위스로 가게 된다.
집 주인인 피터는 스위스 루체른의 자기 소유인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다. 외로운 부자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요양병원은 사실 건축가이던 피터 씨 아버지가 세운 무료병원이다. 흔히 ‘ 4월 15일 비밀이 열리는 병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병원은 중세수도원 건축 양식을 그대로 살린 옛 건물, 매혹적이고 독창적인 문, 태양의 고도에 따라 건물 내부에 비치는 빛의 양과 각도가 달라지는 아름다움, 종탑, 유리 온실 등이 가미된 건물이다.
요양병원의 내부에서는 4월 14일 빛기둥이 살롱에 있는 테이블 모서리를 건드리면, 4월 15일에 비밀이 열린다. 루미에르는 오랜 세월 공간을 연구한 건축가의 직감으로 중세기도원이었던 요양병원의 전체구도를 그려보며 호기심을 갖게 되는데…….
피터는 아버지의 메시지를 찾아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건축가, 건물을 살아 있는 생명처럼 여기며 관찰해 줄 건축가를 찾았다며 루미에르에게 테스트 쪽지를 준다. 그리고 병원에 숨겨진 비밀과 수수께끼들을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병원에서 처음 맞닥뜨린 공간은 갈수록 좁아지는 수상한 복도다. 자연의 나팔관은 말 그대로 자연이 드나드는 통로다. 그 공간을 통해서 외부에 있는 바람소리, 새소리, 풀 향기, 꽃향기 등 자연의 소리나 향기를 선명하게 듣고 맡을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자연의 나팔관 끝에는 유리와 식물이 가득한 온실이 있다. 온실 1층의 틈으로 바람과 새가 들락거리며 소리를 전하면 병원의 아침이 시작된다니, 직접 보고 싶다.
원장의 말대로 빛이 한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통로의 벽은 하얗고 반질거려서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굴절되어 내부 복도까지 환한 빛이 옮겨왔다. 온실에서부터 들어 온 빛이 이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87쪽)
빛줄기는 잠시 후 살롱 끝자락 벽에 닿더니 천천히 벽을 타고 올라갔다. (중략) 잠시 후 벽을 오르던 빛줄기는 벽에 걸려 있는 오래되어 보이는 긴 타원형 거울로 향했다. 빛줄기가 거울에 닿자 순식간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90쪽)
거울에 닿은 빛들의 반사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더니 마지막에는 반사된 빛이 천장에 닿으면서 어두웠던 공간을 한순간에 빛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수천 갈래 빛줄기들의 난반사 향연이랄까. 그 빛의 그림자로 인해 살롱 내부의 화려한 샹들리에, 조각상, 부조상 등이 마치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런 모습은 일 년을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마치 로마 판테온 같은 절제된 빛의 향연들이라는데……. 빛의 반사로 먼지도 훌륭한 건축 재료임을 보인다는데, 어떤 모습일까.
어두운 동굴 복도, 고요한 건물, 빛의 반사와 굴절을 감상하는 환자들, 백색 종탑 근처의 피터 씨 아버지 묘비의 메시지, 비밀 공간, 아버지와 아들이 직접 만든 흔적이 가득한 책상, 석양의 아름다움, 잠들어 있는 보석인 온실 등 병원은 온통 비밀로 가득한 수수께끼의 공간이다.
루미에르는 비밀서재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일기와 아나톨이라는 여인의 일기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피터는 10년 간격을 두고 쓴 4월 15일의 일기장 두 권을 보며 조사를 중지시키게 된다. 아버지와 다른 여인인 아나톨과의 사랑으로 인해 어머니와 자신이 버림받앗다고 오해를 한 것이다. 그리고 피터는 루미에르에게도 아버지의 흔적인 남은 시떼 섬에 있는 낡은 고 저택을 무상으로 주게 된다.
하지만 공간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따뜻한 기억이든, 아픈 기억이든 공간은 옛 일을 기억하는 법이다.
루미에르가 시떼 섬에 있는 집을 고칠수록 피터 아버지와 아나톨, 피터의 아픈 사연을 알게 되는데......
건축가가 조금 부족한 공간을 만들면 거기 사는 사람이 나머지를 추억과 사랑으로 채운다는 겁니다, 그때 바로 건축이 완성되는 겁니다. (326쪽)
건축물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는 이야기가 미스터리처럼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인다.
전 주인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집, 유서 깊은 집, 기억과 추억으로 존재하는 집, 피터 왈쳐의 출생의 비밀, 사랑으로 가득한 집의 이야기에서 건축이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치료하는 도구, 따뜻한 기억을 도와주는 도구임을 생각하게 된다.
자연을 곁들여서 위로하는 아름다운 건축이라니, 무엇보다도 건축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담아내다니, 놀라운 예술혼이다.
아나톨의 죽은 아들의 향기와 입김, 아나톨의 죽은 딸이 치던 즐겨 치던 나무실로폰소리를 흉내 낸 빗방울 실로폰 ,전쟁으로 죽은 남편의 흔들의자까지 만들어주는 피터 아버지의 사랑을 보며 사물에 추억을 새기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제 각각의 사연이 있듯이 건축에도 제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제대로 느끼고, 보고, 듣고 싶다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건물에 깃든 이야기를 알려면 말로 듣기보다 직접 보아야 할 때가 더 많고, 직접 보는 것보다 인내심을 가지고 느껴야 하는 것이 더 많은 세상임을 알게 된 이야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축의 내밀한 묘미를 알게 해준 책이다.
저자는 파리에 사는 건축가 백희성이다. 그는 길을 가다가 예쁜 집이 있으면 우편함에 편지를 넣었다고 한다. 집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편지를. 그리곤 집 주인들의 초대를 받아 멋진 이야기들을 들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렇게 8년 간 모은 파리 저택에 담긴 사연들을 하나로 모아 약간의 허구를 가미한 팩션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싶을 정도다. 흥미진진하고 스펙터클한 파리 저택에 얽힌 미스터리 같은 에세이다. 영화로 나왔으면 좋겠다.